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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張太興 張太興<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4년 장태흥(張太興)이 도내(島內) 서면(西面) 방하교(防下橋)에 있는 자신의 논 2두락지를 누군가에게 전당(典當) 잡히고 전문(錢文) 4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기 1904년 장태흥(張太興)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논을 전당 잡히면서 작성한 수기이다. 장태흥은 도내(島內) 서면(西面) 방하교(防下橋)에 있는 여자(如字) 자호의 논 2두락지를 자신이 매득하여 수년 동안 경작해왔는데, 금년 겨울에 긴히 쓸 곳이 생겨서 부득이 이 논을 전당 잡히고 전문(錢文) 40냥을 빌렸다. 전당 기한은 다음해인 을사년(1905) 7월까지로 하였다. 이 기한 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그대로 방매한다는 뜻으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증인이나 필집 없이 장태흥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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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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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9년 윤석호(尹奭浩)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尹奭浩 南原鄕校 □…□ (흑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9년 2월 18일에 해남향교 교임 윤석호·박창렬 등 11인이 천만리의 10대손 천재청을 의례적으로 대우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남원향교에 답한 통문 1899년(광무 3) 2월 18일에 해남향교(海南鄕校) 교임(校任) 윤석호·박창렬(朴昌烈) 등 11인(人)이 천만리(千萬里, 1543~?)의 10대손 천재청(千載淸)을 의례적으로 대우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남원향교(南原鄕校)에 답한 통문이다. 남원향교에서 보낸 통문 내용 중에 해남에서 타향살이하는 선비 천재청은 화산군(花山君) 천만리의 10대손이라고 하였다. 이에 해남향교 교임 윤석호와 박창렬 등은 천만리의 덕화(德化)를 칭송하며 해남에 묻혀 사는 천재청에 대해 등용되어야 할 인재를 빠뜨렸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여 부끄럽다고 하였다. 이어서 남원향교의 통문 내용에 따라 천재청을 맞이하여 그의 언행과 풍모를 보니 그 유래의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온 지역을 깨우쳐서 이 충훈(忠勳)의 후예를 의례적으로 대우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계획이니 헤아려 주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남원향교에 답하였다. 통문을 보낸 날짜 위에 '해남향교(海南鄕校)' 묵인(墨印)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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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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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2년 공명첩(空名帖) 2 고문서-교령류-공명첩 高宗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42_001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이 아무개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에 추증하는 공명첩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이 아무개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추증(追贈)하는 공명첩(空名帖)이다. 발급 연호에 찍혀있는 '시명지보(施命之寶)' 위에 휘지(諱紙)가 부착되어 있으며, 좌방(左傍)에 추증 사유가 기재되어 있어 통정대부 행돈녕부 도정에 임명된 손자로 인하여 그의 할아버지를 법전에 따라 추증한 공명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규행(李圭行)의 할아버지인 이시준의 추증교지인 소장자료 '1892년 이시준(李時濬) 추증교지(追贈敎旨)'와 연관되어 있으며, 추증내용과 발급 연월도 서로 동일하다. 그러나 이시준의 추증교지에는 추증 사유가 방서(傍書)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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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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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04년 최동룡(崔東龍)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1804 谷城縣監 崔東龍 谷城縣監<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81_001 1804년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동룡이 주소와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 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 1804년(순조 4)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동룡이 주소와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 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최동룡의 거주지 주소는 곡성현(谷城縣) 석곡면(石谷面) 운와곡리(雲臥谷里) 13통 1호이다. 최동룡은 양인(良人)으로 올해 나이는 56세 기사생(己巳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동룡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귀선(龜善), 할아버지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오위도총부 도총관(贈嘉善大夫工曹叅判五衛都摠府副摠管) 성남(聲南), 증조(曾祖) 증통정대부 공조참의(贈通政大夫工曹叅議) 석벽(錫壁), 외조(外祖) 학생 오태위(吳泰位)는 본관이 동복(同福)이다. 최동룡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57세 무진생(戊辰生)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경하(慶河), 할아버지 가선대부(嘉善大夫) 진상(進相), 증조 가선대부 서(叙), 외조 학생 김노적(金老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외 가족으로 최동룡이 모시고 살던 어머니 오씨(吳氏)는 사망하였으며, 아들 덕련(德連)의 나이는 16세 기유생(己酉生)이다. 이 문서는 관인(官印)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 등이 찍혀있지는 않으나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와 외조 오태위에 대한 주기(註記)가 있어 1801년에 작성한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 최덕련에게 다시 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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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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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31년 월산사(月山祠) 제관(祭官)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月山祠 盧鍾龍 月山祠印(3.0×3.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1년 3월 5일에 월산사에서 석채례의 헌관으로 노종룡을 의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한 망기. 1931년 3월 5일에 월산사(月山祠)에서 같은 달 15일에 이제현(李齊賢) 영정각(影幀閣)에서 지낼 석채례(釋菜禮)의 헌관(獻官)으로 노종룡(盧鍾龍)을 의망하고, 이 사실을 광주군(光州郡) 본촌면(本村面) 일곡(日谷)에 사는 노종룡 본인에게 통보한 망기(望記)이다. 월산사(月山祠)는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1678년(숙종 4)에 처음 세워졌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2년에 중건하였다. 문서의 작성연도는 신미년으로만 표기되어 있으나, 1931년(신미년)에 충북 진천에서 이제현 초상 복제본을 배향한 바 있다. 따라서 본 문서의 작성연도인 신미년은 1931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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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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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9년 범재휴(范在烋)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范在烋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9년 4월 1일, 생 범재휴가 노진영에게 모친의 기제를 맞아 물건을 보내며 전한 서간. 1929년 4월 1일, 생(生) 범재휴(范在烋)가 노진영(盧軫永)에게 모친의 기신(忌祭)이 돌아온다며 약간의 물건을 보내면서 인사를 전한 서간(書簡)이다. 뵙고 이별한 뒤로 어언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었다고 했다. 가물고 장마비가 내리는 초기에 상대와 가족들이 안녕한지 안부를 물었다. 생(生)인 자신은 곁에서 모시는 어른이 그럭저럭 여전하게 지내시어 다행이라고 하며 노진영의 어머니 기신(忌辰)이 다시 돌아오는데, 알면서도 헛되이 보낼 수 없다며 비록 아주 작은 것이지만 올리니 받아주기를 바라다고 했다. 나머지는 추후에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하며 편지를 마쳤다. 여기에서 올리는 물건이 무엇인지 추기나 단자(單子) 등을 동봉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범재휴는 지내리(池內里)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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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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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35년 노진영(盧軫永)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道會所 盧軫永 武陽書院 2顆(흑색, 직방형, 7.3×5.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도회소에서 노진영을 무성서원의 추향제 전사관으로 추천한다는 내용의 망기. 1935년 8월에 도회소(道會所)에서 노진영(盧軫永)을 무성서원(武城書院) 추향제(秋享祭) 전사관(典祀官)으로 추천한다는 내용의 망기(望記)이다. 입재(入齋) 일자는 8월 10일 상오 12시이다. 무성서원 인장 2건이 답인되어 있다. 노진영의 본관은 광주(光州),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 1856~1940)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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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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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關聖帝君新病文關王이下京ᄒᆞ여謂曰내가朝鮮을세번報【輔】給할지라已往의두번은報【輔】給ᄒᆞ여신니ᄒᆞᆫ번이나문됴할告諭ᄒᆞ노니速速킈傳ᄒᆞ여後悔업게ᄒᆞ라進士驚ᄒᆞ야본직書案의一封書ᄀᆞ잇거ᄂᆞᆯ卽時開坼ᄒᆞ여본직其書의ᄒᆞ엿시되辛丑年運數不吉ᄒᆞ여人數가連日하의네九十月間의怙病大發ᄒᆞ여人命多死ᄒᆞ니卽時年年事年傳ᄒᆞᄅᆞ此書信ᄒᆞ면病이消滅ᄒᆞ고信티아니ᄒᆞ면一身을保全치못ᄒᆞ이ᄅᆞ符作{月+或}{月+惑}{月+或}{月+戒}四字을朱砂써서불의사라冷水의타마시면病이消滅ᄒᆞ난故로此書을傳ᄒᆞ면一身을保全ᄒᆞ고十張을傳ᄒᆞ면一家을保全ᄒᆞ고百張을傳ᄒᆞ면一洞이太平ᄒᆞ리라藥은細辛朱砂川芎石硫黃栢紫石雄黃烏藥을各一戔重을몸의진니면病이侵犯치아니ᄒᆞᆯ라別方文은㴢㕵黃大人이구복정라指䨖{雨/音}{雨/消}四字의後예나무사람들의일너曰今年예五穀大登ᄒᆞ나人有有災殃이라善人隱能免ᄒᆞ고惡人은免치못ᄒᆞ리라今年八九月間의別病이잇서死者無殺ᄒᆞ고湥夜의呼人之名則對答디말고每月初九日十三日三十日의惡氣衝天ᄒᆞ여烟火分明ᄒᆞᆯ거시니門外의나디마라此書人間알게ᄒᆞ여能書者以書傳之ᄒᆞ고不能書者以言傳之ᄒᆞ라不傳ᄒᆞ면萬受災殃ᄒᆞ리라仍病者ᄂᆞᆫ麻木{木+北}三字을槐黃紙의朱砂로써서몸의진니면病을免ᄒᆞ리라藥은防風貫中薄荷石雄黃麻黃皂角을一戔重을먹으면卽差ᄒᆞ리라見則不忘 草野之人聞則銘心 聽而誦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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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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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0년 천일관(千鎰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千鎰貫 城主 城主<着押> 谷城郡守之章 (적색, 정방형, 2.5), □…□ 3顆 (적색, 정방형, 4.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74_001 1900년 3월에 곡성군 예산면 장선리에 사는 천일관·천일권·천일표가 곡성군수에게 동임 이치현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전령을 내려줄 것을 청원한 상서 1900년(광무 4) 3월에 곡성군(谷城郡) 예산면(曳山面) 장선리(長善里)에 사는 천일관·천일권(千鎰權)·천일표(千鎰杓)가 곡성군수에게 동임(洞任) 이치현(李致鉉)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전령(傳令)을 내려 후폐(後弊)를 막아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천일관 등의 선조 천만리(千萬里)는 임진왜란의 공신(功臣)으로 열성조에서 그의 충의(忠義)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의 공렬(功烈)을 밝혀 특별히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얼자(孽子) 천손(賤孫)을 막론하고 잡역을 면제시키라는 전교(傳敎)와 완문(完文)을 내려서 거주하는 곳에서 별 폐단없이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천일관 등이 근래 우거하고 있는 곡성군의 임장(任掌)이 간혹 침해하여 여러 차례 정소(呈訴)하여 은택을 입었다. 그런데 동학란 이후로 인심이 전과 같지 않아 동임 이치현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관령(官令)을 거역하여 내정(內庭)에 당돌하게 들어와 밥솥을 거둬 갔다. 이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소하여 동임에게 전령을 내려 뒷날에 생길 폐단을 막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에 대해 곡성군수는 3월 11일에 형리(刑吏)에게 '동임에게 전령을 내려 금지시키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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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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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2년 이보승(李普升)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高宗 李普升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대전회통(大典會通)』 柳池榮, 『朝鮮時代 任命文書 硏究』, 韓國學中央硏究院 博士學位論文, 2014 HIKS_Z999_99_A00742_001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보승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한 추증교지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보승(李普升)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追贈)하면서 발급한 추증교지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의 품계이다. 호조참판은 종2품 관직으로 아경(亞卿)이라고도 하며,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고 하였다. 발급 연호 위에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으나 연호의 좌방(左傍)에 추증사유를 방서(傍書)하는 추증식(追贈式)의 형식과는 달리 추증의 사유가 생략되어 있다. 이보승은 이규행(李圭行)의 아버지로, 이규행이 통정대부로 임명됨에 따라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법전에 따르면 3대를 추증할 때 그의 부모는 그와 같은 품계를 추증하고, 그의 조부모와 증조모는 한 등급 낮은 품계를 추증하되 원종공신의 아버지는 생전에 지낸 직품이 있으면 한 등급 더하여 추증하였다. 그러나 이규행의 아버지인 이보승이 이규행보다 한 등급 위인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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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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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3년 최덕련(崔德連)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崔德連 谷城縣監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81_001 1813년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덕련의 준호구 1813년(순조 13)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덕련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것이다. 거주지 주소는 곡성현(谷城縣) 석곡면(石谷面) 운와리(雲臥里) 2통 1호이다. 호주 최동룡(崔東龍)이 죽어 그를 대신해 아들 최덕련이 호주가 되었다. 최덕련의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25세 기유생(己酉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동룡(東龍), 할아버지 학생 귀선(龜善), 증조(曾祖)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오위도총부 도총관(贈嘉善大夫工曹叅判五衛都摠府副摠管) 성남(聲南), 외조(外祖) 학생 황경하(黃慶河)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최덕련의 아내 박씨(朴氏)는 나이 26세 무신생(戊申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그녀의 사조는 아버지 유학 광욱(光旭), 할아버지 학생 경(璟), 증조 학생 무춘(茂春), 외조 학생 장시엽(張時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소유 노비는 여종 상원(尙元)이고 나이는 24세 경술생(庚戌生)이다. 이 문서는 관인(官印)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 등이 찍혀있지는 않으나 문서 하단에 '경오식상준인(庚午式相凖印)'이 기재되어 있어 경오년인 1810년에 작성한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 최덕련에게 다시 돌려준 준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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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박동환(朴東煥)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朴東煥 康津縣監 <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34년에 康津縣監이 童蒙 朴東煥(1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1834년에 康津縣監이 童蒙 朴東煥(1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父 學生 千益 祖 學生 碓俊 曾祖 學生 師正 外祖 學生 金龍郁 *주소: 古郡內面 朴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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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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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최씨(崔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高宗 崔氏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42_001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규행 처 최씨를 숙부인으로 추증한 추증교지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최씨(崔氏)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追贈)한 추증교지이다. 숙부인은 정3품 당상관의 부인에게 내리는 작호(爵號)이다. 발급 연호 위에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으며, 연호 좌방(左傍)에 '법전에 의해 남편의 직(職)에 따라 봉작한다[依法典從夫職]'라는 추증 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이 추증은 이규행(李圭行)의 임명과 함께 그의 부인과 3대를 추증한 데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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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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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2년 박씨(朴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高宗 朴氏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42_001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규행 처 박씨를 숙부인으로 추증한 추증교지 1892년(고종 29) 10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박씨(朴氏)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追贈)한 추증교지이다. 숙부인은 정3품 당상관의 부인에게 내리는 작호(爵號)이다. 발급 연호 위에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으며, 연호 좌방(左傍)에 '법전에 의해 남편의 직(職)에 따라 봉작한다[依法典從夫職]'라는 추증 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이 추증은 이규행(李圭行)의 임명과 함께 그의 부인과 3대를 추증한 데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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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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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8년 노문영(盧文永)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文永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8년 4월 11일에 족제 노문영이 노진영에게 조씨와의 혼담 소식을 전한 서간. 1928년 4월 11일에 족제(族弟) 노문영(盧文永)이 노진영(盧軫永)에게 혼담(婚談) 등의 소식을 전한 서간(書簡)이다. 만나지 수일이 지났다며 최근 숙부님의 기력과 형님 그리고 일문 여러분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객지의 노정 중에 침식부분에서 족장(族丈) 대련(大蓮)씨의 후의를 입어 집과 다름없이 지낸다고 했다. 또 조씨(趙氏)와의 혼담(婚談)에 관한 일은 대련씨에게 긴히 부탁을 하여 수차례 직접 가서 그 기미를 상세히 살폈는데, 쾌히 승낙하고 거절할 의사가 없어 우선은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는 것, 일후에 일이 성사가 되던 되지 않던 간에 사실을 상세히 말씀드릴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부분에는 이달 18일을 혼일(婚日)로 정했는데 그날이 어그러질 듯하다고 말했다. 별지에는 조씨가에서 칭탁(稱托)하고 있는 조항을 4가지로 정리해서 적었다. 첫째는 신랑이 나이가 신부와 적당했으면 하는데 너무 높다는 것, 둘째는 조(趙) 처사(處士)는 무남일녀라서 집안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것, 셋째, 대도 항구 여자가 우귀(于歸)하는 경우에는 궁벽한 향촌에 머물 의사가 없다는 것, 넷째는 궁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칭탁은 우선 놓아두고, 대련(大蓮) 족장의 말씀으로는 우선 기대할만하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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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28년 박태경(朴泰慶)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泰慶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8년 음력 3월 8일에 생 박태경이 노진영에게 약속한 지불금을 3주 안에 지급하겠다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 1928년 음력 3월 8일에 생(生) 박태경(朴泰慶)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약속한 지불금을 3주 안에 지급하겠다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書簡)이다. 최근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5일내로 꼭 뵈러 가려고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지 못하게 되었다며 죄송하고 답답하다고 했다. 그러나 3주일간에 꼭 납상(納上)하겠다며 용서해 달라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세로줄이 있는 규격편지지를 이용하여 국한문혼용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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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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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5년 봉산정사(鳳山精舍) 서간(書簡)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鳳山精舍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1월 6일에 봉산정사의 임언재 등 2명이 노종룡에게 사문의 주상문제로 보낸 서간. 1935년 1월 6일, 봉산정사(鳳山精舍)의 임언재(任漹宰) 등 2명이 노종룡(盧鍾龍)에게 사문(師門) 주상(主喪)문제로 보낸 서간이다. 새해의 안부 인사를 간단히 적은 후 곧바로 본론을 적었다. 사문(師門)의 주상(主喪)으로 집에서 모신 장자(長子) 대석(大錫)이 있으니 승중(承重)자가 복을 입는 것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며, 같은 문하에 원하는 말이 있는 있는 상황이라 서로가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이 잘 양해해 주시어 서로에게 뜻이 전해지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스승의 주상을 큰아들로 정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으로 보인다. 별지(別紙)에는 사문(師門)의 6인 이름과 자(字), 호(號), 사는 곳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2월 16일이다.'라고 부기(付記)해 놓아 이것을 작성한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6인의 이름은 나종우(羅鍾宇), 임언재(任漹宰), 유병구(劉秉龜), 양효묵(梁孝黙), 김승곤(金勝坤), 이재춘(李載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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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봉산정사(鳳山精舍) 서간(書簡)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鳳山精舍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3월 15일에 鳳山精舍의 高光璉 等 6名이 盧鍾龍에게 弦窩 高光善 문집 간행의 후원금을 부탁하는 내용의 서간. 1935년 3월 15일, 봉산정사(鳳山精舍)의 고광련(高光璉) 등 6명이 노종룡(盧鍾龍)에게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문집 간행 후원금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 집에서 뵙고, 또 유회(儒會)에 왕림해 주신데 대해 감복하였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상대방과 아드님 등의 안부를 간단히 물었다. 주요 내용은 자신들의 간소(刊所) 경영 비용이 아껴 쓴다고 했자만 군색함이 심하다며 의연금을 보내주어 대사(大事)를 완수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발신인은 고광련(高光璉), 임언재(任漹宰), 이재춘(李載春), 유병구(劉秉龜), 양효묵(梁孝黙), 윤경혁(尹璟赫) 등 6인이 열서(列書)되어 있다. 봉산정사는 현와 고광선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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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양회택(梁會澤)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梁會澤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6월 27일, 제 양회택이 노진영에게 미맥 1석 20원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내용의 서간. 1935년 6월 27일, 제(弟) 양회택(梁會澤)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미맥(米麥) 1석 20원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내용의 서간이다. 늦더위에 어른 모시고 계신 상대방과 가족이 안녕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지난번 집에 돌아간 후 어머니께서 여전하시고 가족 모두 무탈하였다며 다행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지난번 만났을 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아 그냥 돌아왔다며 집안이 말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이번 봄에 동생이 분가하게 되었다며 보리 소작 몇 두락으로 거둔 것으로 나누어 가서는 7~8월을 생활하기 어렵다며 염치없지만 미맥(米麥) 1석 20원을 빌려주어 갈등을 면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당시 발신자 양회택은 전남 화순군 능주면 원지리(元地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수신자 노진영은 광주군(光州郡) 대정정(大正町) 동복약방(同福藥房) 내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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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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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1.地燮君의 學校問題는 結局失敗되고마는 것이올시다. 期限인 今日, 學校에 探訪하여본 結果, ᄯᅩ 缺席者가 數日前붙어 登校되엿슴니다. 참으로 이것이 무슨 魔戱인지요. 이럿케 안이되는 일은 秉鉉出世後 처음이올시다. 참으로 未安하기도하고 다시 兄의ᄭᅴ 무슨 말노 말삼할수업슴니다. 中間世話役도 이제는 진이 ᄲᅡ저서 다시 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업고 弟는 兄과 그 中間에 處하야 더욱 兩方으로 未安하고罪悚하다는 말을 다 할 수 업슴니다. 容恕하시오. 弟는 弟의 全力을 다하여 三四个月을 이럿케 奮鬪하엿지만은 兄이 그ᄭᅡ지 엇지 諒解하겟슴닛까? 例条는 第一回四百円, 第二回百円, 第三回五十円, 合計五百五十円인대 第三回分은 景福条로 이것은 成不成間 消費된다는 것을 형의 諒解를 得한줄 思하고 그 餘外 五百円은 時方爲替로 反呈하오니 考領하시오. 弟二回分도 旣히 消費된 것이지만은 ᄭᅩᆨ 밋엇든 자리에 이와 같이 狼貝되고 보니 이것을 兄의ᄭᅴ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업고 ᄯᅩ한 長期間活動上 自然消費를 누구보고 贖債하여달라할 수 업서서 弟와 中間사람이 各其五十円式 물어 놋는 것이올시다. 弟는 自作之孽이지만은 참으(제2장)로 兩方에 對하야 未安하고 罪悚한 것은 形言할 수 업슴니다. 깁피 恕諒하소서. 그리고 第三回分五十円에 對하여서도 兄의 命令이 게시면ᄯᅩ 弟가 卽時로 ᄭᅩᆺ 充補하여드리겟슴니다. 左右間 回 示하소서. 그리고地燮君 學事에 對하야는 他方面 어너 有力한 側에서 第二學期初에는絶對責任지겟다고 하는 사람이 잇다는 것을 弟가 前日 兄의ᄭᅴ 무신말 ᄭᅳᆺ태 얼는 한변 한 즉 잇지요? 그 方面에서는 時方도 ᄭᅩᆨ 責任지고 入學시킬수 있다고 壯談함니다. 弟로서는 그 말를 尋常히 듯지 안이한다고 하는 것보담 ᄯᅩ 絶對信任도 함니다. 그래나 世上事 都是運이라는대 너무도 놀내엿고 ᄯᅩ 다시 兄을 그時ᄭᅡ지 기다려 보자고 할 體面도 업서서 그만 이럿케 모든 것을 處理하고 마는 것이올시다. 容恕하시오. 三回分도 兄의 命令을기다리고 ᄯᅩ한 此書入 覽後 더욱 兄의 嚴責의 回喩를 바래나이다. 餘姑此, 不備上. 惟祝侍體安旺耳.五月十日 弟 安秉鉉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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