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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단470) 肇慶壇 울창한 건지봉의 묘지471)에 鬱鬱佳城乾止峯신라시대 이사공472)이 고이 묻혔네 好藏羅代李司空치솟은 산 형세는 중천에 춤추는 봉황이요 半天舞鳳騰山勢늙은 냇가의 솔은 만마리 푸른 용이로다 萬箇蒼虯老澗松이곳에 뿌리하여 선원473)이 각 파로 나뉘었거늘 根此璿源分各派무슨 까닭으로 제사가 이전 모습과 달라졌는가 緣何芬苾異前容빛나도다 임금이 친히 쓴 단과 비의 글자들 煌煌宸筆壇碑字천추토록 남아서 감동함이 끝이 없으리라 留與千秋感不窮 鬱鬱佳城乾止峯, 好藏羅代李司空.半天舞鳳騰山勢, 萬箇蒼虯老澗松.根此璿源分各派, 緣何芬苾異前容.煌煌宸筆壇碑字, 留與千秋感不窮. 조경단(肇慶壇) 조선 왕실의 시조인 사공(司空) 이한(李翰)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쌓은 단으로,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다. 광무(光武) 3년(1899)에 축조하였다. 건지봉의 묘지 '건지봉'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산이다. '가성(佳城)'은 묘지의 별칭이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 자 깊이에서 석곽(石槨) 하나가 나왔는데, 거기에 "울울한 가성이 삼천 년 만에 흰 해를 보았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아아, 운명이구나. 내가 죽으면 곧 이곳에 안장할지어다."라고 하였는데, 사망하자 마침내 이곳에 장사하였다. 《西京雜記 卷4》 신라시대 이사공 신라시대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으로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인데,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선원(璿源) 아름다운 옥(玉)의 근원(根源)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집안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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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명륜당에서 감회가 있어 全州明倫堂有感 옛날 스승480) 모시고 이 당에서 강학했고 昔侍臯比講此堂일체의 공진481)은 선당482)에서 하였지 一應供進自宣堂스승은 갔고 나라 망하니483) 한탄한들 어쩌랴 山頹社屋嗟何及나 홀로 유건 쓰고 초당에서 늙어가네 獨我儒巾老草堂 昔侍臯比講此堂,一應供進自宣堂.山頹社屋嗟何及,獨我儒巾老草堂. 스승 원문의 '고비(臯比)'는 호랑이 가죽이라는 뜻으로 스승의 자리를 말한다.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周易)》을 강론했는데, 후세에 와서는 강학(講學)하는 자리 또는 선생을 고비라 이르게 되었다. 공진(供進) 음식이나 물건 따위를 바치는 것이다. 선당(宣堂) '선화당(宣化堂)을 가리키는 듯하다. 관찰사가 집무하는 곳을 말한다. 스승은 …… 망하니[山頹社屋] 원문의 '산퇴(山頹)'는 스승이나 훌륭한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孔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哲人)이 죽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하더니, 그 후 곧 세상을 떠났다. '사옥(社屋)'은 토지신(土地神)을 제사 지내는 곳에 지붕을 덮는다는 뜻으로, 망국(亡國)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망국의 사에는 지붕을 만들어 덮어서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喪國之社, 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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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임신년(1932) 答田士狷 壬申 유씨35)가 간행한 전재(全齋) 선생 연보는 저도 또한 근자에 잠깐 보았습니다. 그런데 연보에서 이르기를, 전재 임헌회 선생께서 문인 간재 전공에게 명하여 오선생의 수언(粹言)을 모아서 14권을 만들었다는 것은, 진실로 형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설인행(禮說印行) 조목에도 또한 이르기를 간재 전공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스승의 명령 아래에서 문인의 성명을 쓰지 않고 그 별호를 쓰고 높여서 공이라고 한 것은 도대체 어느 경전에 나오는 것입니까? 유씨 쪽에서 온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연보는 임참봉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선자인 임헌회의 문인인 간재를 지목하여 호를 이야기하고 공이라 말하는 것은, 이것이 예의 체면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이 출행했다는 연보의 조목을 보면 곧바로 유모 서모 종행했다고 말하고, 호를 쓰지 않고 연보에 부록한 문인의 제문 제목 아래에도 또한 그러한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은 한 쪽에서 의를 듣고도 복종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변명하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실수를 저지르기를 면치 못한 것입니다. 또 부록인 〈간재록(艮齋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선사 간옹께서 신미년 모월 삭(朔)일에 우리 선자를 모시면서 고하기를, '꿈을 꾸었는데 소자인 제 나이가 41세 된다고 말했습니다. 깨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아 목숨의 한계가 닥쳤구나, 그러나 참으로 한스러운 것은 학문에 소득이 없이 죽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자께서 곧바로 그 목소리에 응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후로 41년이 더해져서 82세가 된다는 것이니, 이것은 현자의 면학을 위해서 신명이 견고한 것이 아니겠는가, 덕과 학문을 닦아 수업할 날이 여전히 많으니 더욱 면진하여 성인과 철인을 기약하는 것이 노부의 바람이니라"라고 연보에서 말했습니다. 이것 또한 가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선사의 학문은 진실로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 나이가 부족한 것도 잊었고, 전옹께서도 사람을 가르칠 때 또한 다만 인(仁)을 제 소임으로 삼아 죽은 후에 그친다는 법문을 쓰시니, 반드시 알기 어려운 수단(修短)36)을 마음에 따져서 말씀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사께서 실제로 꿈을 아뢰는 일이 있고, 전옹께서 실지로 이러한 꿈을 해몽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불과 말할 때에 한번의 웃음거리가 됨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이 후인의 가칙(柯則)37)이 되는 보록에 기대어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말에 근거하여 추구해보면 파탄되고 불치되지 못함을 면치 못하여, 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 줄 볼 수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선사는 신축생(辛丑生)인즉, 신미년(辛未年)에는 나이가 31세입니다. 어찌 41세가 되어 명하니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 41세를 더하면 72가 되니 어떻게 10년을 덧붙여서 82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왕이 문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꿈을 꾸었더니 상제가 나에게 치아 9개를 주었습니다"라고 하자, 문왕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나이를 치아라고 하여, 내가 너에게 셋을 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왕은 97세에 붕어하였고, 무왕은 93세에 붕어하였습니다. 지금 간재에게 이러한 기록이 있는 것은, 선사의 82세 천수에 억지로 끌어다 합치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전옹의 선견의 지혜가 거의 문왕의 이 일과 같음을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예기(禮記)》의 이러한 설들은 대부분 후인들이 견강부회하여 나온 것으로, 이미 선유(先儒)의 논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으니 제가(諸家)의 기술 조목에 《조선사략(朝鮮史略)》38)과 《대동사강(大東史綱)》39) 두 서책 가운데에 전옹을 칭송하고 선양하는 말을 기대하였는데, 《사강》은 듣건대, 북도인(北道人)이 저술한 것으로 음성의 오진영이가 교감한 것이요, 의화군(義和君)이 서(序)를 단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조선사략》은 일제의 작위를 받은 대감 아무개의 저작이 아니겠습니까? 당당한 대한의 국자감을 지낸 선생께서 어찌 일제의 작위를 받은 모 대감의 소작(所作)의 무거움을 빌리고 그가 칭찬하는 말을 빌려서 기재한단 말입니까? 임참봉의 연보 발문에 '오진영과 유영선이 함께 일을 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오씨는 식견으로 스스로를 허여하고 그 오진영 문인의 무리가 선사보다 우월하다고 칭송하는 자인데, 그 교감한 바가 이에 이와 같으니 아아, 그 견식의 고루함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잠깐 열독하고 얻은 실착(失錯)도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밖에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형이 만약 다시 연보를 본다면, 모름지기 다시 상세하게 보여주시어, 하나하나 곧바로 변론하시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대개 전옹의 연보와 묘지는 오진영이가 가히 도울 일이 아닙니다. 비록 일이 정당하게 되었을지라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 하물며 병폐가 이와 같이 많을 경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공론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柳刊全齋先生年譜, 弟亦近得暫見.而其云先生命門人艮齋田公, 取五先生粹言爲十四卷, 誠如兄言.(禮說印行條亦云艮齋田公所編)師命之下, 不書門人姓名, 而書其別號, 尊之爲公者, 是出何典.自柳邊來者, 有云譜是任參奉作.故目其先子門人而曰號曰公此爲得體.然則其於先生出行條, 直言尹某徐某田某從行, 而不書號, 附錄門人祭文題目下, 亦然者皆何也.此不免爲一邊聞義不服, 强辯自是之失也.且附錄艮齋錄有云.先師艮翁辛未某月朔, 侍吾先子告曰, 夢一道士, 道小子年爲四十一云, 覺來思之, 命限至矣, 可恨者學無所得而死.先子卽應聲曰, 自今四十一加之於後, 爲八十二歲, 得不爲賢者勉學, 神明警告者乎.進修之日尙多, 彌加勉進, 期以聖哲, 是爲老夫之望.此又可疑者, 先師之於學, 固俛焉孜孜, 忘年數之不足.全翁敎人, 亦但以仁爲己任, 死而後己之法門, 必不以難知之修短,較於心而形於言.使先師而實有是告夢, 全翁而實有是解夢, 不過爲語次間一笑之資, 不宜載於柯則後人之譜錄.而况卽此而求之, 自不免破綻不合而未見實有是事者乎.先師是辛丑生, 則辛未之歲, 爲年三十一矣.安得爲四十一而命限至.自今更加四十一則爲七十二, 安得加十年而爲八十二乎.武王告文王曰, 夢帝與我九齡, 文王曰古者謂年爲齡, 我與爾三.文王九十七而崩, 武王九十三而崩.今艮齋之有是錄, 而牽合於先師八十二之天年者, 欲使人知全翁先見之知, 殆若文王此事也.然曾不知禮記此等說, 多出後人傅會者, 己有先儒所論也.又有一焉, 諸家記述條, 載朝鮮史略大東史綱二書中稱揚全翁語, 史綱聞是北道人所著, 陰吳所校, 義和君所序.未知著者爲何等人.吾不敢言.史略此非月爵大監某之所作乎.堂堂大韓之國子先生, 何所籍重於日爵大監之所作而引載其語乎.任參奉譜䟦, 有吳柳同役語, 吳以見識自許, 而其徒稱以優於先師者, 而其所校勘乃如是, 噫其見識之固陋.亦可知己.霎時閱見所得失錯, 已至於此.安知此外不有幾多謬舛乎.兄若再見, 須更詳示一一立辨, 如何.蓋全翁譜誌, 非吳之所可相役者.雖使事出精當, 猶爲未可, 况疵病之此多乎.然而世無公論, 柰如之何. 유씨 유영선 柳永善, 1893~ 1961)으로 호는 현곡(玄谷)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수단(修短) 목숨의 길고 짧음을 말한다. 가칙(柯則) 《시경(詩經)》 빈풍(豳風) 벌가(伐柯) 편에 유래하는 말로 표준, 전범(典範) 또는 귀감이라는 뜻이다. "도끼 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않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1923년 김종한이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자 학술서이다. 대동사강(大東史綱) 1929년에 김광이 간행하여, 단군조선부터 대한제국 순종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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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계유년(1933) 4월 答田士狷 癸酉 四月 지난 25일에 전순형(田舜?)이 내방하여 원고에 관한 일을 제기하였습니다. 제가 묻기를 음인이 이른바 행하죽상(杏下竹床)40)에서 잘 헤아려 행하라는 설(說)은, 이는 스승에게 인의(認意)41)가 있다고 무함(誣陷)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순형이 말하기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여, 또 묻기를 음인이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른바 "그 사실은 원래 선사의 말씀하지 않은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스승에게 인교가 있다고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형이 말하기를 "이것은 말실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서로 이별할 때 제가 순형에게 말하기를, "어제 논한 음인의 두 가지 설42)에 대해서 그대는 끝내 모른다고 하고 또 말실수라고만 여깁니다"라고 하였는데, 순형이 말하기를 "마음속의 춘추(春秋)43)는 사람마다 모두 있으니 저라고 어찌 소견이 없겠습니까? 다만 속담에 그 나라에서는 춤추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왼쪽을 편들면 오른쪽이 노하고, 오른쪽을 편들면 왼쪽이 화를 내니, 제가 어찌 그 사이에서 간여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그대가 무함하고, 무함하지 않았다는 그 물음에서 사람들은 가슴속에 춘추가 있다고 대답한즉, 그대 또한 무함하지 않았다고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슴속에 춘추가 있다'는 것은 나와 무관한 곳에만 쓰고, 일이 자기의 분수 상에 이르면 쓰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스승은 나의 아버지와 같아서 일이 스승에 관여되면 그것이 크게 자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절의가 없다고 무함(誣陷)하는 것은 그 죄가 큽니다. 이때에 춘추를 써서 구두나 붓끝을 쓰지 않고, 다만 가슴속에 있는 춘추만 써서 타인의 혐의와 노여움만 회피한다면, 이는 스승을 섬기는 도를 잃은 것이고, 자가의 분수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속에 보존된 것이 끝내는 오유(烏有)44)에 귀결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시비(是非)의 실질은 자기의 본성에서 터득되고 마음에서 구비되는 것이어서, 끝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是)를 비(非)라 하고 비를 시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형이 음성 쪽을 편들어도 오히려 감히 허물을 가려주고 엄호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춘추가 있다고 일컬으니, 만일에 여기서 제가 순형의 잘못을 변론하고 주토한 것이 조금이라도 억지스러웠다면, 순형의 평소 이기기 좋아하는 기질로 어찌 이 말을 즐겨 하였겠습니까!순형조차 이와 같으니 온 세상의 공론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문제인(同門諸人)들이 모두 다 그 나라에서는 춤추기 어렵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으니, 학계의 부실함이 하나와 같이 이 지경에 이르러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어찌할는지요! 去念五田舜?來訪, 提出稿事, 余問陰人所謂杏下竹床料量爲之之說, 是不爲誣師有認意乎.?曰不知也,又問陰人答徐某書, 所謂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者, 是不爲誣師有認敎乎.?曰此語失也.翌朝相別, 余謂?曰昨論陰人二說, 子終以爲不知及語失而已乎.?曰皮裡春秋,人皆有之, 吾豈無所見.但諺不有其國難舞之語乎.左之則右怒,右之則左怒,吾何能涉其問乎.余曰子於誣與非誣之問, 答以有皮裡春秋, 則子亦不謂之非誣也.然皮裡春秋, 用之於與我無關之地, 事到自家分上, 則用不得.師者同於吾父也, 事關先師則其爲自家也大矣.誣師以無節義, 則其罪也大矣.於是乎用春秋, 不以口頭筆端只以皮裡而避人嫌怒, 則是忘事師之道, 棄自家之分.吾知其皮裡所存,亦終歸於烏有也云云.蓋是非之實,得於性而具於心者,終無柰,不容以是爲非以非爲是.故雖以?之右陰,猶不敢遮護而謂有皮裡春秋,如使此中辨討少涉抑勤,以?平日辯勝之氣, 豈肯作此言.?猶如此,幷世之公論可知.然同門諸人擧皆其國難舞之見,學界之無實,一至於此, 誠可吁歎柰何柰何. 행하죽상(杏下竹床) 이른바 '행하죽상독대설'이란 간재(艮齋)께서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 살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았는데 오진영이 지나가므로 그를 불러 독대로 이르기를 문집은 "나 죽은 후에 임자가 요량 것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설이다. 인의(認意) 여기에서 인의는 후창 쪽에서는 인가를 받지 않으면 출간을 하지 말라 하는 것이고, 오진영 쪽에서는 출판사에서 인가를 받아주면 출간해도 좋다하는 입장을 나타낸다. 두 가지 설 하나는 음변 쪽의 '행하죽상설'이고, 하나는 오진영이 서모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씀하지 않은 교시를 받아들였다'고 한 것이다. 마음속의 춘추 본문의 '皮裡春秋'는 '살가죽 속의 춘추(春秋)'라는 말로 곧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시비를 가려 포폄(褒貶)을 가하는 것이다. 진(晉)나라 때 소준(蘇峻)을 평정한 공신으로 벼슬이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이른 저부(褚裒)를 대신(大臣) 환이(桓彝)가 일찍이 지목하여 말하기를 "계야는 가죽 속의 춘추가 있다.[季野有皮裏春秋]"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의 皮裡春秋 살가죽 안에 춘추가 있다. 오유(烏有) 없는 것이다.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 오유 선생, 망시공(亡是公)이라는 가공의 세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했는데, 자허는 '빈말'이라는 뜻이고 오유 선생은 '무엇이 있느냐'는 뜻이고 무시공은 '이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후세에 허무한 일을 말할 때 흔히 자허ㆍ오유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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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보냄 계유년(1933) 與田士狷 癸酉 형이 근자에 선사(先師)의 〈문인록〉을 간행하려 한다는 것을 들은 듯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 일의 어려움은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산퇴(山頹)45) 후에 변형(變形)46) 한 자는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만약 선사의 엄정한 법문을 준수하여 변형한 사람을 모두 잘라낸다면 저들이 장차 말하기를, "선사께서도 잘라내지 않는 사람을 어찌 감히 잘라낸단 말인가?" 라고 하여 원한과 노여움이 떼로 일어나서 화가 장차 몸에 미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사의 엄정한 법문을 준수하지 않고 그대로 〈문인록〉에 보존한다면, 선사의 혼령이 장차 더럽혀질 뿐만 아니라, 자손으로서 부조(父祖)를 바른 도리가 아닌 것을 그릇된 도리로 섬겨서, 이미 스승에게 할거된 자도 어지럽게 들고 일어나서 "형체를 훼손한 것은 동일한데 어찌하여 우리는 잘라내고 저들은 보존해주는가"라 하고, 선사의 말을 듣고 부조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넣어주라고 하니, 이는 또 어찌할 것입니까?47) 이 뿐만 아니라 비록 훼형(毁形)하지 않았더라도, 근일에 무인(誣認)48)하여 원고를 바꾸고 사문에게 죄를 얻은 무리들을 가히 할거한다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모두 어떻게 조치할 것입니까? 요컨대 진실이 드러날 날이 되지 않으면, 이 일에 대해 말하기 어렵습니다.49) 그러니 부디 그만 두시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似聞兄近欲刋先師門人錄.果然否.此事之難, 固非一端.最是變形於山頹後者,何以處之.欲遵先師嚴正法門而盡割其人也, 則彼將曰, 先師之所不割, 何敢割之, 怨怒羣起, 禍且及身.不遵而存之也, 則非惟先師之靈, 若將浼焉, 而子孫之事父祖以非道, 其已見割者, 又將紛然而起曰, 毁形同也何割吾而存彼也, 此又柰何.不但此已, 雖不毁形, 近日誣認改稿, 得罪師門之輩, 可以割去者, 不亦多乎.此皆如何措置.要之不到水落石出雲歸山立之日, 難以語此事.千萬已之, 毋至不可收拾之地, 如何. 산퇴(山頹) 위대한 학자나 스승이 돌아가시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간재의 죽음을 이른다. 변형(變形) 머리 자른 자와 머리 자르지 않는 자로 〈문인록〉의 명단을 작성하는데 보발한 자는 문인록에서 잘라 없애자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간재 생전에 머리를 잘라 쫓겨난 자를 〈문인록〉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어찌할 것입니까 간재는 생전에 변형하면 제자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선사가 돌아가신 후에 변형한 사람들은 넣지 않아야 한다고 후창은 말하였다. 그러나 선사가 돌아가신 후에야 바꾼 사람들이니 문인록에 넣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인(誣認) 스승이 인가를 받으면 출간해도 좋다고 무함하는 일이다. 요컨대……어렵습니다 전사견이 〈문인록.을 만든다고 하자, 후창이 빼야할 사람을 넣자니 선사의 혼령에 누가 되고, 그렇다고 빼자니 벌떼처럼 일어나 비난할 것이므로 그만두는 게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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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487) 關王廟 삼분488) 당일에 영웅의 기풍 떨쳤는데 三分當日振英風사당489)이 어찌하여 이 곳에 있는가 廟貌胡爲在此中의기는 천년토록 산악처럼 무겁고 義氣千秋山岳重제향은 한 몸처럼 화이가 같아서라네 苾芬一體華夷同오나라 병탄과 위나라 섬멸은 평생의 뜻이요 呑吳殲魏平生志붉은 얼굴에 긴 수염490) 용모 변치 않았지 赤面長髥不改容동녘 땅의 비린내 먼지491)가 요즘 이러한데 東土腥塵如許日위령으로 큰 공적 드러내는 걸 어찌 아끼나 威靈何惜顯豐功 三分當日振英風, 廟貌胡爲在此中.義氣千秋山岳重, 苾芬一體華夷同.呑吳殲魏平生志, 赤面長髥不改容.東土腥塵如許日, 威靈何惜顯豐功. 관왕묘(關王廟) 삼국 시대 촉한의 명장으로 무안왕(武安王)에 추봉(追封)된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삼분(三分) 삼국 시대 유비(劉備)가 조조(曹操), 손권(孫權)과 중원을 삼분(三分)했던 형세를 말한다. 사당 원문의 '묘모(廟貌)'는 묘우(廟宇)와 신상(神像) 또는 진영(眞影)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관왕묘를 가리킨다. 붉은 …… 수염 관우(關羽)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처럼 붉었고, 긴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 불리었다. 비린내 먼지 원문의 '성진(腥塵)'은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오랑캐가 날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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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의 시에 차운하다 20수 次汝安詩 【二十首】 장부가 큰 일을 하고자 한다면 丈夫欲有爲마음이 갈 바501)를 먼저 정해야지 先定心所之우뚝하도다 동로수502)여 卓哉東魯叟이미 열다섯 때부터였구나 已自十五時나는 마흔 여섯인데 而我四十六이에 뜻을 세웠다고 감히 말하랴 敢謂立在玆단지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아니 但知當行路이를 구하며 다시 의심치 않았네 求此不復疑돌아보매 바람과 서리 급해지니 回首風霜急만년의 절조 더욱 스스로 지키리 晩節益自持보라 저 봉해의 북쪽 睠彼蓬海北아득한 계화산이로다 蒼茫繼華山산은 푸른데 사람503)은 이미 멀어져 山碧人已遠감회 서글퍼서 차마 말을 못하네 感愴未忍言그래도 도는 추락하지 않아 猶有道不墜위로 사천년을 이었다네 上紹四千年진중한 평소의 가르침을 珍重平日敎신중히 전하길 맹세하네 兢兢誓相傳송산 언덕에서 천 번 눈물을 훔치고 松隴千掬淚연곡의 묘도504)에 만고의 정 느끼네 蓮阡萬古情훌륭한 절조는 말속에 모범 되셨고 懿節範末俗여사505)는 꽃다운 이름을 남기셨네 女士留芳名소완506) 시가 내 마음을 알았으니 小宛獲我心나아준 분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 願無忝所生늙건 젊건 오직 공평한 도리 있으니 老少惟公道백발 되었다고 놀랄 필요 없다네507) 雪鬂不須驚다만 온전히 돌아가는508) 날 기다려 直待全歸日자식의 직분을 이내 이루리라 子職乃可成올빼미가 나의 집을 부수고509) 鴟梟毁我室즐겁게 장난치며 하늘을 나네 嬉戱戾天飛뒤흔드는 풍우에 둥지 잃은 새는 漂搖失巢者방황하고 탄식하며 슬퍼한다네 彷徨歎以悲외로운 봉황은 어디에 있는가 孤鳳何處在단산510)이 서로 의지하길 원하네 丹山願相依배불리 먹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 飽哺非所欲빙빙 날면서 돌아갈 곳 잊었구나 翶翔却忘歸마침내 비바람 진정되고 會當風雨定폭염도 응당 사그라지리 虐燄亦應衰원컨대 동지들과 더불어 願與同志者세한의 마음511) 어기지 말세 歲寒不相違내 집은 천태산 아래 我屋台山下맑고 깨끗해 소란한 속세 벗어났네 瀟灑出塵喧멀리 보니 하늘이 아득함을 알겠고 望遠知天逈객이 적으니 땅이 외졌음을 깨닫네 客少覺地偏맑은 밤에 향을 사르고 앉으니 淸宵燒香坐밝은 달이 절로 오가는구나 明月自往還게다가 책 속에 옛사람 있으니 更有卷中人참 뜻을 함께 말할만 하다오 眞意堪共言잘못은 작은 잘못도 제거해야 하고 非可去小非옳음은 참된 옳음을 구해야 하네 是當求眞是실정보다 과한 명예 도리어 두려워하고 還怕過情譽완전을 구하다 받는 비방512) 꺼리지 말라 勿嫌求全毁옳음과 그름 칭찬과 비방 사이에서는 是非毁譽間오직 의를 따를513) 뿐이네 惟義與比爾이런 까닭에 군자의 도는 所以君子道비단옷에 홑옷을 덧입은 것처럼 날로 드러나네514) 日章絅尙綺천대산에 무엇이 있는가 台山何所有절로 뭉게뭉게 피는 흰구름이지 白雲自英英때로 산집의 창 옆으로 내려오니 時傍山窓下무정한 것이 가장 다정하다네 無情最多情바위 위에 앉은 손님을 맞아 迎客石上坐다시 작은 덮개 되어 기울여주네 復作小蓋傾이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줄꼬 持此贈誰人태반은 불평으로 우는515) 이에게지 太半不平鳴봉우리 개이면 더욱 사랑스러워 晴峯還可愛상쾌한 기운이 주렴에 스며드네 爽氣入簾生시냇가 솔은 늦도록 푸르름 머금고 澗松含晩翠골짜기 난은 꽃다운 자태 품었구나 谷蘭抱芳姿종일토록 유독 절로 향기 발하고 竟日獨自薰해를 다하도록 가지를 변치 않네516) 終歲不改枝이 물건들 아끼는 이는 누구던고 誰歟愛此物물건도 기이하고 사람도 기이하네 物奇人亦奇그것을 아낌은 또 무엇 때문인가 愛之亦何爲천성이 무위하기517) 때문이네 性也無爲爲너와 애오라지 함께 돌아가려니 與爾聊同歸외물의 속박으로 어찌 제어하랴 物累孰能羇산중엔 달력도 없는데 山中無曆日꽃잎은 졌다 다시 피네 花葉落復開멀리 동계옹518)을 추억하니 緬懷桐溪翁예나 지금이나 회포는 같구나 古今同一懷속인이 어찌 아는 게 있겠는가 俗子有何知타괴519)를 배운 나를 비웃구나 笑余學打乖샘 있으니 의지해 내가 물을 긷고 有泉資我汲산 있으니 빌려서 내가 깃든다네 有山借我棲도도히 흐르는 게 모두 탁류지만 滔滔皆濁流어찌 차마 진흙탕을 휘젓겠는가520) 安忍掘其泥바다와 산은 절로 높고 양양한데 海山自峨洋고상한 곡조는 뉘와 함께 할까521) 高調誰與諧중천에 걸려있는 해와 달은 中天懸日月만고토록 항상 길을 잃지 않지 萬古常不迷한 이치가 마치 순환하듯이 一理如循環원래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네 原無往不回어려서부터 노력을 하지 않아 從少不努力얼마나 많이 초년에 잃었던가 幾多失東隅이렇게 만년522)의 날에 이르렀으니 迨此桑楡日어찌 늘그막에 수습할 걸 생각지 않으랴 盍思收晩途힘써 노력하여 빨리 정도로 돌아가서 策勵亟歸去그물과 함정에 몰리지 않게 해야하네 免敎罟阱驅목전에 날이 부족하지만 目下日不足통틀어 계산하면 넉넉히 남음이 있네 總計裕有餘편안한 집523)이 여기에 있음을 아니 安宅知在此이를 버려두고 다시 어디에 살겠는가 舍之更何居예로부터 영재가 몇이던고 古來幾英材중도를 얻는 게 가장 어렵네 最難得中道이 때문에 광견자524)를 所以狂狷者선니525) 늙은이가 취하셨다네 見取宣尼老무성한 강아지풀526)이 되기보다는 與爲稂莠盛차라리 말랐어도 좋은 싹 되리라 寧作佳苗槁지금의 군자들은 어떠한가 如何今君子사람들이 좋게 말해주길 바라네 要令衆道好맹인이 기와와 돌527)을 얻고도 瞽者得瓦石만족하면서 보배로 여기는구나 充然以爲寶위대하도다 중용의 덕이여 大哉中庸德명과 성528)이 표리를 꿰뚫었네 明誠貫裏表구렁의 깊이가 몇 척이 되더라도 溝壑深幾尺지사는 신념을 잊지 않는다네529) 志士不忘時나는 제나라 우인을 사랑하노니 我愛齊虞人정으로 부르자 죽음으로 마다했지530) 旌招以死辭누가 생생하는 이치531)가 孰知生生理도리어 다시 여기에 있음을 아는가 還復在於玆무덤532)에선 성인도 일어나지 못하니 九原聖不作사람들의 의심 풀어주기도 어렵구나 難將解衆疑늙은 용이 깊은 못에서 굶주릴지언정 老龍餒九淵어찌 미꾸라지 뱀장어의 능멸 받으랴 寧受鰌鱔欺청컨대 그대는 하늘을 보라 請君看太虛뜬구름 가는 대로 맡겨둔다오 浮雲任所之결백했던 초나라 대부533) 皎皎楚大夫슬프게도 역경을 만났네 堪嗟遭逆境하의534)에 가을 서리 옅게 젖고 荷衣秋霜薄천년토록 우러러 홀로 깨었네 千載仰獨醒참소하던 근상535)의 무리들은 儳儳靳尙輩제 모가지를 잘도 보존했구나 好得保首領근심과 울분이 노래로 터지고 憂憤發爲歌변풍536)이 붓537)에서 나왔네 變風發毛穎자양의 붓이 영예롭게 기리니538) 袞褒紫陽筆해와 달이 찬란함을 다투도다 日月爭炳炳방공은 한나라 말에 은거하면서 龐公隱漢末성부에는 발을 딛지 않았지539) 城府足不至풍도와 운치가 얼마나 높았던가 風韻一何高지금까지도 사람을 취하게 하네 至今使人醉밭갈이 멈추며 때로 다시 쉬고 釋耕時復休밭둔덕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네 隴上班坐次유업이 이런 편안함이었으니540) 遺業此爲安만금인들 어찌 귀하게 여기리오 萬金奚足貴누가 현명한 안목541)을 갖추어 何人具隻眼무미한 맛을 알 것인가 識得無味味날마다 차조술542)에 취하고 日日醉秫酒시상543)엔 전택이 있네 柴桑有田宅초연했던 도연명 선생은 超然淵明子처사로 이름과 자취 남겼네 處士留名跡취하려 해도 내겐 술 없고 欲醉我無酒백 묘544)의 밭도 없는데 亦無田畝百되레 청한한 아취 자랑하니 還詑淸寒趣고인에 비해 생색을 더했네 視古添生色귀거래사를 읽고 나니 讀罷歸來辭먼 훗날에도 애석하구나 曠世堪可惜진나라 정545)이 백성을 어둡게 하려 秦政昧黔首선비를 묻고 또 경전을 불태웠으니546) 坑士復焚經앉아서 융절아547)로 하여금 坐令隆準兒집안을 변화시켜 제업 이루게 했네548) 化家帝業成보잘것없는 숙손통549)은 區區叔孫通제례작악하여 존귀하게 해주었네550) 制作猶尊榮지금 세상 사람은 무슨 마음인가 何心今世人가정에서부터 독서를 금하는구나 禁讀自家庭이를 스스로 분서갱유한다는 것이니 是謂自焚坑이를 생각하면 슬피 울만하구나 念之可哀鳴하늘이 빨리 성인을 낳아주길 원했던 願天早生聖옛 사람551)이 나의 마음을 알았구나 古人獲我情사마천은 강회를 떠다녔고552) 馬遷浮江淮종각은 장풍을 탔었지553) 宗慤乘長風일찍부터 사방의 뜻554) 품고 夙抱四方志자나깨나 잊지 않았다네 不忘寤寐中시대는 어지럽고 명운조차 궁하니 時亂命且窮행적도 답답하여 통하지 못한다오 足跡鬱未通쓸쓸한 창동리에서 寥落滄東里걸어놓은 강궁555) 헛되이 저버렸네 虛負懸桑弓저 우뚝 솟은556) 태산이여 泰山高節彼꼭대기에 오르려해도 길이 없구나 陟巓無由得진실로 정상에 올라보지 않았다면 苟不陟上巓미혹되지 않았다고 누가 허여하리 孰能許不惑이와 기는 체와 용으로 나뉘고 理氣分體用사람과 사물은 통과 색으로 말미암네557) 人物由通塞명쾌하도다 석담자558)여 明快石潭子바로 동국에서 으뜸임을 알겠노라 正識冠東國같고 다름을 어찌 족히 말하리오 異同何足說차라리 침묵을 지켜야 하리559) 寧可守玄黙내가 듣건대 옛날의 군자는 我聞古君子원래 벼슬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나560) 元非不欲仕오직 그 도를 따르지 않으면 惟其不由道한 갓 자기를 잃는 것이라네 所以徒失己노재 허문정은 魯齋許文正천고의 수치 면치 못했지561) 不免千古恥어찌 학식을 안고 豈如抱學識깊이 숨어 향리에서 늙음만 같았으랴 深藏老州里암담해라 관구562)가 뒤집히고 黲黲倒冠屨문란해라 기강이 사라졌구나 棼棼蔑綱紀몇이나 되는 유문의 제자들이 幾箇儒門子실족하고 스스로 그치지 못했나 失脚不自止손잡고 함께 돌아갈 수 없으니 携手未同歸나의 마음 스스로 믿어야 하리 吾心庶自恃지극한 정은 말하지 않는 중에 있으니 至情在不言말 하고자 하면 이미 진정이 아니라네 欲言已非眞후대에 났어도 마음은 옛 도를 좇으니 生晩心追古세속이 야박해도 기는 절로 순박하네 俗薄氣自淳상체의 뜰563)에 기뻐하는 사람 있으니 棣園喜有人즐겁고 화락함564)이 날로 새로우리라 湛樂日相新어찌 이리도 동으로 서로 떠도는가 夫何西復東궁귀565)가 포악한 진나라보다 심해서지 窮鬼甚暴秦한 말의 곡식도 서로 나눌 수 없어 斗粟未相分때로는 솥에 먼지가 필 지경이네 有時釜生塵단지 부친과 스승 저버릴까 두려워 但恐負父師글을 부쳐 서로 걱정하고 힘써야지 寄書胥憂勤아행566) 시를 탄식하나니 嘆息我行詩얹제나 나의 친애함을 회복할까 何日復我親고해의 파도는 걱정하지 않으나 未愁苦海濤가없는 나루터가 아득하구나 渺渺無涯津보배 뗏목567)은 무슨 물건인고 寶筏云何物나는 유자의 건 하나 있다네 我有一儒巾언덕에 오를 날이 있으리니 登岸知有日스스로 구제하고 남도 구제하리 自濟兼濟人 丈夫欲有爲, 先定心所之.卓哉東魯叟, 已自十五時.而我四十六, 敢謂立在玆.但知當行路, 求此不復疑.回首風霜急, 晩節益自持.睠彼蓬海北, 蒼茫繼華山.山碧人己遠, 感愴未忍言.猶有道不墜, 上紹四千年.珍重平日敎, 兢兢誓相傳.松隴千掬淚, 蓮阡萬古情.懿節範末俗, 女士留芳名.小宛獲我心, 願無忝所生.老少惟公道, 雪鬂不須驚.直待全歸日, 子職乃可成.鴟梟毁我室, 嬉戱戾天飛.漂搖失巢者, 彷徨歎以悲.孤鳳何處在, 丹山願相依.飽哺非所欲, 翶翔却忘歸.會當風雨定, 虐燄亦應衰.願與同志者, 歲寒不相違.我屋台山下, 瀟灑出塵喧.望遠知天逈, 客少覺地偏.淸宵燒香坐, 明月自往還.更有卷中人, 眞意堪共言.非可去小非, 是當求眞是.還怕過情譽, 勿嫌求全毁.是非毁譽間, 惟義與比爾.所以君子道, 日章絅尙綺.台山何所有, 白雲自英英.時傍山窓下, 無情最多情.迎客石上坐, 復作小蓋傾.持此贈誰人, 太半不平鳴.晴峯還可愛, 爽氣入簾生.澗松含晩翠, 谷蘭抱芳姿.竟日獨自薰, 終歲不改枝.誰歟愛此物, 物奇人亦奇.愛之亦何爲, 性也無爲爲.與爾聊同歸, 物累孰能羇.山中無曆日, 花葉落復開.緬懷桐溪翁, 古今同一懷.俗子有何知, 笑余學打乖.有泉資我汲, 有山借我棲.滔滔皆濁流, 安忍掘其泥.海山自峨洋, 高調誰與諧.中天懸日月, 萬古常不迷.一理如循環, 原無往不回.從少不努力, 幾多失東隅.迨此桑楡日, 盍思收晩途.策勵亟歸去, 免敎罟阱驅.目下日不足, 總計裕有餘.安宅知在此, 舍之更何居.古來幾英材, 最難得中道.所以狂狷者, 見取宣尼老.與爲稂莠盛, 寧作佳苖槁.如何今君子, 要令衆道好.瞽者得瓦石, 充然以爲寶.大哉中庸德, 明誠貫裏表.溝壑深幾尺, 志士不忘時.我愛齊虞人, 旌招以死辭.孰知生生理, 還復在於玆.九原聖不作, 難將解衆疑.老龍餒九淵, 寧受鰌鱔欺.請君看太虛, 浮雲任所之.皎皎楚大夫, 堪嗟遭逆境.荷衣秋霜薄, 千載仰獨醒.儳儳靳尙輩, 好得保首領.憂憤發爲歌, 變風發毛穎.袞褒紫陽筆, 日月爭炳炳.龐公隱漢末, 城府足不至.風韻一何高, 至今使人醉.釋耕時復休, 隴上班坐次.遺業此爲安, 萬金奚足貴.何人具隻眼, 識得無味味.日日醉秫酒, 柴桑有田宅.超然淵明子, 處士留名跡.欲醉我無酒, 亦無田畝百.還詑淸寒趣, 視古添生色.讀罷歸來辭, 曠世堪可惜.秦政昧黔首, 坑士復焚經.坐令隆準兒, 化家帝業成.區區叔孫通, 制作猶尊榮.何心今世人, 禁讀自家庭.是謂自焚坑, 念之可哀鳴.願天早生聖, 古人獲我情.馬遷浮江淮, 宗慤乘長風.夙抱四方志, 不忘寤寐中.時亂命且窮, 足跡鬱未通.寥落滄東里, 虛負懸桑弓.泰山高節彼, 陟巓無由得.苟不陟上巓, 孰能許不惑.理氣分體用, 人物由通塞.明快石潭子, 正識冠東國.異同何足說, 寧可守玄黙.我聞古君子, 元非不欲仕.惟其不由道, 所以徒失己.魯齋許文正, 不免千古恥.豈如抱學識, 深藏老州里.黲黲倒冠屨, 棼棼蔑綱紀.幾箇儒門子, 失脚不自止.携手未同歸, 吾心庶自恃.至情在不言, 欲言已非眞.生晩心追古, 俗薄氣自淳.棣園喜有人, 湛樂日相新.夫何西復東, 窮鬼甚暴秦.斗粟未相分, 有時釜生塵.但恐負父師, 寄書胥憂勤.嘆息我行詩, 何日復我親.未愁苦海濤, 渺渺無涯津.寶筏云何物, 我有一儒巾.登岸知有日, 自濟兼濟人. 마음이 갈 바 뜻[志]를 가리킨다.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자립하였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라고 한 데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마음이 가는 바를 뜻이라고 한다.[心之所之謂之志]"라고 하였다. 동로수(東魯叟) 공자(孔子)를 말한다. 동로(東魯)는 공자가 출생한 중국 동쪽의 노(魯) 나라를 말한다. 사람 김택술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로, 만년에 계화도(繼華島)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산 …… 묘도 원문의 '송롱(松隴)'은 후창의 부친 묘소가 있는 곳이고, '연천(蓮阡)'은 모친의 묘소가 있는 곳을 말한다. 김택술의 〈생일날 감회를 쓰다[生朝感題]〉 시에 "구로의 은혜 생각하니 눈물이 의건을 적시네. 일찍 송산의 언덕을 소제하고 멀리 연곡의 묘도 바라보네. 내 부친은 군자유셨고 내 모친은 현명한 여사이셨네.[念及劬勞恩 有淚滿衣巾 早掃松山隴 遠瞻蓮谷阡 我父君子儒 我毋女士賢]"라고 하였다. 여사 김택술의 모친을 말한 것이다. 소완(小宛)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서 너를 낳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다. 형제가 각각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함이 없기를 경계한 말이다. 늙건 …… 없다네 두목(杜牧)의 〈송은자(送隱者)〉에 "세간의 공평한 도리는 오직 백발이라, 귀인의 머리라고 일찍이 봐준 적이 없었네.[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온전히 돌아가는 원문의 '전귀(全歸)'는 몸을 훼손하지 않으며 욕되지 않게 생을 마치는 효성을 말한다.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가야 효도라고 이를 수 있으니, 몸을 훼손하지 않으며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한다고 이를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하였다. 《禮記 祭義》 올빼미가 …… 부수고 악인이 선인을 해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치효(鴟鴞)'는 간악한 사람을 비유한다. 《시경》 〈치효(䲭鴞)〉에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새끼를 잡아먹었으니, 내 집마저 헐지 말지어다. …… 내 둥지가 위태롭고 위태롭거늘 비바람이 뒤흔드는지라 내 울부짖는 소리를 급히 하노라.[鴟鴞鴟鴞! 旣取我子, 無毁我室. …… 予室翹翹, 風雨所漂搖, 予維音嘵嘵.]"라고 하였다.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 이름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 …… 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 …… 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하였다. 세한의 마음[歲寒] 처지가 곤궁해도 지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하였다. 완전을 …… 비방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예상치 못한 칭찬도 있고, 완전함을 구하려다가 받는 비방도 있다.[有不虞之譽, 有求全之毁.]"라고 하였다. 의를 따를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고집함도 없고 끝까지 거부함도 없어서 의를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하였다. 비단옷에 …… 드러나네 내면의 덕이 있으면 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경(絅)'은 홑옷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히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불평으로 우는[不平鳴] 불만스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시인들을 지칭한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체로 사물이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우나니, 본래 소리가 없는 초목을 바람이 흔들어서 울게 하고, 본래 소리가 없는 물을 바람이 출렁이게 해서 울게 한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草木之無聲, 風撓之鳴, 水之無聲, 風蕩之鳴.]"라고 하면서, 맹동야가 시를 잘 지은 것을 '잘 울었다[善鳴]'라는 말로 평하였다. 해를 …… 않네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무위하기[無爲] 특별한 까닭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동계옹(桐溪翁)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저서에 《동계집》이 있다. 타괴(打乖) 세상과 어그러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송나라 소옹(邵雍)이 〈안락와중호타괴음(安樂窩中好打乖吟)〉이란 시를 지어 자신이 세상과 어긋나는 삶을 살면서 유유자적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도도히 …… 휘젓겠는가 혼탁한 세태에 동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원문의 '도도(滔滔)'는 흐르는 강물처럼 모두 나쁜 데로 휩쓸려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때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난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어부가 굴원에게 "세상 사람이 다 탁하거든 어찌하여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뭇사람이 다 취했거든 어찌하여 술지게미를 먹고 묽은 술 마시지 않는가?[世人皆濁, 何不掘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라고 하였다. 바다와 …… 할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원문의 '아양(峨洋)'은 아양곡을 말하는데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다.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가 높은 산을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가 "태산처럼 우뚝하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을 연주하면 "강하처럼 양양하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뒤에 벗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거문고의 현(絃)을 모두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초년에 …… 만년 원문의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고, '상유(桑楡)'는 해가 지는 곳이다. 그래서 동우는 인생의 초년을, 상유는 인생의 만년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장군(將軍) 풍이(馮異)가 적미병(赤眉兵)과 싸울 때, 처음에는 패주했다가 나중에 적을 격파하자, 광무제(光武帝)가 "동우에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하였다.[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했던 고사(故事)가 전한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편안한 집[安宅] '인(仁)'을 뜻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하였다. 광견자(狂狷者) '광(狂)'은 기개가 높은 반면 말을 함부로 하여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자이고, '견(狷)'은 의지가 굳어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반면 고집이 세어 변통하지 못하는 자를 이른다. 《논어》 〈자로(子路)〉에 "중도의 선비를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할 것이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하였다. 선니(宣尼) 공자(孔子)를 말한다. '선니(宣尼)'는 한(漢)나라 평제(平帝) 때 공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추시(追諡)한 데서 공자를 가리킨다. 《漢書 卷 12 平帝紀》 강아지풀[稂莠] 논에 자라는 해초(害草)인데 쓸모없는 잡초를 말한 것이다. 기와와 돌[瓦石] 가치가 없는 물건을 말한다. 명과 성[明誠] 진실함과 밝음을 말하는데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에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明]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誠)해짐을 교(敎)라 이르니, 성(誠)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誠)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지사는 …… 않는다네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죽더라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 정으로 …… 마다했지 정도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때 우인(虞人)을 정(旌)으로 불렀으나 우인이 오지 않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는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라고 칭찬하셨으니,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취하셨는가? 합당한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昔齊景公田, 招虞人以旌, 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대부를 부를 때는 정(旌)을 사용하고, 우인을 부를 때는 피관(皮冠)을 사용하게 되어있으므로, 우인이 가지 않은 것이다. 생생(生生)하는 이치 '생생(生生)'은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하늘의 이치를 가리킨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라고 하였다. 무덤 원문의 '구원(九原)'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묘지가 있던 곳으로, 무덤을 뜻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조문자가 숙예와 더불어 구원을 구경하였는데, 문자가 말하기를 '죽은 이들을 만약 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따라 돌아갈까.' 하였다.[趙文子與叔譽觀乎九原, 文子曰: 死者如可作也, 吾誰與歸?]"라고 하였다. 초나라 대부[楚大夫] 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인 간의대부(諫議大夫)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은 간언(諫言)을 올렸다가 쫓겨나 강가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하의(荷衣)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의 옷을 뜻한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에 "연잎 옷에 혜초 띠 매고 갑자기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네.[荷衣兮蕙帶, 儵而來, 忽而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근상(靳尙) 초회왕(楚懷王)의 총애를 받던 상관대부(上官大夫)이다. 굴원을 질투한 나머지 왕에게 참소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변풍(變風) 굴원의 시를 가리킨다. '변풍'은 본래 《시경》의 문체(文體)의 하나로, 당시 각국(各國)의 민요 따위를 모은 것으로 주남(周南)ㆍ소남(召南)과 십삼열국풍(十三列國風)을 합하여 모두 15개 국풍(國風)으로 되어 있는데, 정(正)ㆍ변(變)으로 구분하여 주남ㆍ소남을 정풍(正風), 패풍 이하 빈풍까지 13개국의 국풍을 변풍(變風)이라고 한다. 붓 원문의 '모영(毛潁)'은 붓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서 토끼털로 만든 붓을 역시 의인화하여 "모영은 중산 사람이다. …… 동곽에 사는 놈을 준이라 하는데, 재빨라서 잘 달린다.[毛穎中山人也, …… 居東郭者曰㕙, 狡而善走.]"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양의 …… 기리니 주희(朱熹)가 굴원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을 말한다. '자양(紫陽)'은 주희의 별호이다. 주희는 《초사집주(楚辭集註)》의 서문(序文)에서 "굴원은 그 뜻과 행동이 비록 더러 중용(中庸)에서 벗어난 점이 있어서 본받을 것은 못되지만, 모두 충군(忠君)ㆍ애국(愛國)의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였다. 방공은 …… 않았지 '방공(龐公)'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방덕공(龐德公)으로, 현산(峴山) 남쪽에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뒤에 처자를 데리고 평생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였다. 유업이 이런 편안함이었으니 부귀와 영달을 초탈한 것을 말한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방공(龐公)을 찾아가서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겠느냐고 묻자 방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주는데 이제 나만은 편안함을 남겨 주겠습니다."[世人皆遺之以危, 今獨遺之以安.]"라고 하였다. 《後漢書 逸民列傳 龐公》 현명한 안목 원문의 '척안(隻眼)'은 선림(禪林)의 용어로, 범부의 육안(肉眼)이 아니라 진실한 정견(正見)을 갖춘 혜안을 말한다. 차조술 차조로 빚은 술로, 진(晉)나라 때의 처사 도연명(陶淵明)이 마시곤 했다. 그의 시 〈화곽주부(和郭主簿)〉에 "차조 찧어서 좋은 술 빚고, 술 익으면 나 혼자 따라 마시네.[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라고 하였다. 시상(柴桑) 도연명(陶淵明)이 팽택현령(彭澤縣令)을 하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 은거한 곳이다. 백 묘 본래 백 묘(百畝)는 정전법(井田法)에서 한 사람의 가장(家長)이 받는 토지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작은 농토를 의미한다. 진나라 정[秦政] 진시황(秦始皇)을 말하는데, 그의 이름이 정(政)이다. 선비를 …… 불태웠으니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말한다. 진 시황 때 이사(李斯)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박사관(博士官)의 직책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 및 백가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우도록 의논을 올려서, 진시황으로 하여금 모든 서책을 불사르게 하였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게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융절아(隆準兒) '융절(隆準)'은 콧날이 높다는 말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의 사람됨이 콧날이 높고 용의 얼굴이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하였다. 집안을 …… 했네 유방이 일개 집안을 변화시켜 나라를 창건하고 황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보잘것없는 …… 숙손통은 '숙손통(叔孫通)'은 진(秦)나라에서 벼슬하다가 한 고조 유방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에 임명된 사람이다. 한나라 초기에 숙손통이 조정의 의례(儀禮)를 새로 제정하고자 하여, 노나라의 유생 30인을 불렀다. 그중에 두 유생은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고, 숙손통에게 말하기를 "공이 섬긴 군주는 열 군주에 이르는데, 모두 아첨으로 섬기어 친귀를 얻은 것이다. 공의 행위는 옛 도에 합치하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 않을 것이다. …… 공은 어서 가 버려서 우리를 더럽히지 말라.[公所事者且十主, 皆面諛以得親貴. 公所爲不合古, 吾不行. …… 公往矣, 無汚我!]"라고 하였다. 제례작악하여 …… 해주었네 숙손통이 왕조의 조제(朝制)와 전례(典禮)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마침 장락궁(長樂宮)의 낙성식을 마치고 모든 신하가 질서정연하게 하례하는 것을 보고는 한 고조가 "나는 오늘에야 황제의 존귀함을 알게 되었다.[吾乃今日知爲皇帝之貴也.]"라고 하였다. 《史記 叔孫通列傳》 하늘이 …… 사람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을 말한다. 오대(五代) 때에 혼란이 극에 달하자, 명종이 매일 밤마다 궁중에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기를 "저는 오랑캐인데 난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추대되었습니다. 원컨대 하늘이 어서 빨리 성인을 내셔서 만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원하였다.[某, 胡人因亂, 爲衆所推, 願天早生聖人, 爲生民主.]라고 하였다. 《通鑑節要 卷49 後唐紀 唐 長興4年》 사마천은 강회를 떠다녔고 '마천(馬遷)'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의하면,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 20세에는 남쪽으로 강수(江水)와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랐다가 우혈(禹穴)을 탐방하고 구의산(九疑山)과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등지를 여행하였고,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옛날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지역에서 강학(講學)을 하며 공자(孔子)의 유풍을 익혔다고 한다. 종각은 장풍을 탔었지 '종각(宗慤)'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좌위장군(左衛將軍)을 지낸 인물로, 어렸을 때 숙부 종병(宗炳)이 포부를 묻자 "장풍을 타고 만리의 거친 물결을 헤쳐 보는 것입니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하여, 헌걸찬 기백과 원대한 뜻을 밝혔다. 그는 과연 뒤에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큰 공훈을 세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다. 《宋書 卷76 宗愨列傳》 사방의 뜻 원문의 '사방지(四方志)'는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3년 조에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제(齊)나라에 이르자 제 환공(齊桓公)이 그를 장가보내 주고 말 20필을 주니, 중이가 안주하였다. 그의 시종들이 중이와 제나라를 떠나려고 뽕나무 밑에서 계책을 논하였는데, 누에를 기르는 여자가 뽕나무 위에서 그 말을 듣고 중이의 아내 강씨(姜氏)에게 고하였다. 강씨가 누에를 기르는 여자를 죽이고 중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방을 경영할 뜻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누설할까 봐서 죽였습니다.[子有四方之志, 其聞之者, 吾殺之矣.]'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강궁 원문의 '상궁(桑弓)'은 뽕나무로 만든 강한 활로, 남아의 큰 포부를 비유한 것이다. 《예기》 〈사의(射儀)〉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 여섯 개로 천지와 사방을 쏘니, 천지와 사방은 남자가 일할 곳이기 때문이다.[男子生, 桑弧蓬矢六, 以射天地四方, 天地四方者, 男子之所有事也.]"라고 하였다. 저 우뚝 솟은[高節彼] '절피(節彼)'는 산이 높은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 절남산(節南山)〉에 "우뚝 솟은 저 남산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네.[節彼南山, 維石巖巖.]"라고 하였다. 절(節)은 주희의 주에 "산이 높은 모양이다.[高峻貌]"라고 하였다. 통과 색으로 말미암네 사람과 사물은 차이는 기(氣)가 통하느냐 막히느냐로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라고 하였다. 석담자(石潭子)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석담(石潭)은 본래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지명인데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침묵을 지켜야 하리 원문의 '현묵(玄默)'은 한(漢)나라의 양웅(揚雄)의 말을 원용한 것이다. 양웅이 조용히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하고 있을 때, 혹자가 도가 아직 깊지 못해서 곤궁한 게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양웅이 〈해조(解嘲)〉를 지어 "오직 적막함만이 덕을 지키는 집이다. …… 나는 묵묵히 홀로 나의 태현을 지킬 뿐이다.[惟寂惟寞, 守德之宅. …… 黙然獨守吾太玄.]"라고 하였다. 《漢書 卷87 揚雄傳》 옛날의 …… 아니나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사람이 일찍이 벼슬하지 않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음을 미워하였으니 그 도를 따르지 않고 가는 것은 구멍의 틈을 뚫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古之人, 未嘗不欲仕也, 又惡不由其道, 不由其道而往者, 與鑽穴隙之類也.]"라고 하였다. 노재 …… 못했지 노재(魯齋) 허문정(許文正)은 송말 원초의 학자인 허형(許衡)이다. 경전(經傳)ㆍ자사(子史)ㆍ예악(禮樂) 등에 정통하고 특히 정주학(程朱學)을 신봉했는데, 한족(漢族)이자 학자이면서 원 나라에 벼슬한 것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잇달았다. 조선에서도 동묘(東廟)에 허형의 위패를 모셨는데, 효종과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배향된 허형을 문묘에서 출향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번거로운 문제가 야기됨을 이유로 거론하지 말라고 처분을 내렸다. 관구(冠屨) 머리에 쓰는 관과 발에 신는 신으로, 상하(上下)나 존비(尊卑)를 비유한 것이다. 상체의 뜰[棣園] 화목한 형제를 비유한 것이다. '체(棣)'는 《시경》 〈소아 상체(常棣)〉 시를 가리킨다. 이 시는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작품이다. 즐겁고 화락함 원문의 '담락(湛樂)'은 형제간에 화목한 것을 말하는데, "형제간이 화합하여, 화락하고 즐겁네.[兄弟旣翕, 和樂且湛.]"라고 하였다. 《詩經 常棣》 궁귀(窮鬼)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일찍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쫓아 버리겠다는 뜻으로 〈송궁문(送窮文)〉을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아행(我行) 《시경》 〈아행기야(我行其野)〉를 말한다. 인척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을 기롱하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미상이다. 보배 뗏목 불교에서 불법(佛法)을 보배 뗏목[寶筏]이라 하는데, 이는 중생(衆生)에게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게 해주는 보배로운 뗏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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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가석 문생들의 계회 시에 차운하다 次可石門生契會韻 가석공의 덕과 학문이 날로 새로웠으니 石公德學日新新한 계를 단란히 이뤄 얼마나 가르침 받았나568) 一契團成幾坐春천지가 어찌 운수를 회복함이 없다 하리 天地豈云無復運장부들은 장차 큰 일 하는 사람 되리라 丈夫且作有爲人권규569)를 힘쓰며 강습에 도움 주고570) 勸規勤處資麗澤동지571)들 같이하며 덕스런 이웃 접하네 聲氣同時接德隣이제부터 남녘 고을에 좋은 일 더해지니 從玆南鄕添好事훗날에 참된 판향572)을 잃지 않겠구나 他年莫失瓣香眞 石公德學日新新, 一契團成幾坐春.天地豈云無復運, 丈夫且作有爲人.勸規勤處資麗澤, 聲氣同時接德隣.從玆南鄕添好事, 他年莫失瓣香眞. 가르침 받았나 원문의 '좌춘(坐春)'은 스승의 훈도와 덕화(德化)를 뜻한다.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뵙고 돌아와 "광정이 춘풍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권규(勸規) 학문을 권하고 충고하는 것이다. 강습에 도움 주고 원문의 '이택(麗澤)'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동지 원문의 '성기(聲氣)'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벗을 말한다. 판향(瓣香) 스승을 흠앙하는 의미를 담아 사르는 향이다. 북송(北宋) 진사도(陳師道)의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라는 시에 "지난날 한 가닥 판향을 올리었거니, 공경히 증남풍을 위한 것이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는 구절이 보인다. 증남풍은 증공(曾鞏)으로 진사도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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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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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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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田士狷 甲戌 춘간(春間)의 한번 이별은 묘연(渺然)하기가 꿈만 같습니다. 소식을 받을 길이 없으니 슬픈 마음을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선사집(先師集) 습유(拾遺)50)를 편간한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과연 그랬는지요? 저는 형에게 이미 충성을 바치지 못했습니다. 〈문인록〉의 간행에 대해서도 그 허물을 보고 규간(規諫)51)하여 거의 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끝내 그만 둘 수 없게 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한번 음성의 무함(誣陷)가 나온 뒤로 우리들이 유훈을 근거하여 저들의 무함(誣陷)를 변토하였고, 또한 유훈을 지켜서 자기의 직분을 다했으니, 이러한 의리를 익숙히 강론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형세를 헤아려보면 인의가 없었다면 뚜렷한 이치가 없은즉, 형의 이 거사는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세기(世基)가 마지막에 존장(尊丈)의 여지가 없다고 배척한 것은 어찌 용동(龍洞)의 간행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존장이 앞에서 실수하고 형은 또 뒤를 이어서, 저들의 입을 꺼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이 뿐만 아니라 저들이 유훈을 가리켜 여노(女奴)의 석서(石書)하는 습관이라고 지목한 것이 어찌 천고의 절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만약 여러 자손들 중에 한사람이라도 간재의 유훈을 지키는 이가 없다면 아울러 방관자들이 좌담한 것까지 거짓된 유훈으로 비견되지 않을 것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어찌 더욱 통분하지 않는가요? 형의 고견은 제가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께서도 자부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의리가 어떠한가를 묻지 아니하고, 영세하고 조각난 문자를 원집과 속집 외에 수집하여 인쇄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어떤 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 입니까?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적이 보건대 동지 제공들이 대부분 모를 잘라서 둥글게 하고, 다시 옛 의견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의 마음이 심히 불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몸이 고립되어 돕는 이가 없음을 느껴서, 항시 가슴이 사나워지고 그것을 밖으로 풀지를 못합니다. 형이 만약 저의 말을 또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는 마땅히 산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며 교유를 그치고, 붓을 불사르며 사문(師門)의 일을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길이 초목과 더불어 짝이 되겠으니 능히 이 고충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春間一別, 渺然如夢.音信莫憑, 悵仰何已.似聞近圖編刋先師集拾遺, 果然否.弟於兄旣忠未效.於門人錄之刋, 見過相規.迄可止之, 而今又終不能已者, 抑何心哉.一自陰誣之出, 吾輩據遺訓而辨彼誣, 守遺訓而盡己分, 此義非不講之熟矣.諒今之勢, 無無認淸楚之理, 則兄之此擧, 亦何心哉, 吾不可得以知也.世基之最後斥尊丈以無餘地者,豈非以參龍刋故耶.尊丈失之於前,兄又繼後而不憚彼口何也.不寧惟是,彼輩之指遺訓爲女奴石書習,豈非千古絶痛.乃使衆子孫無一人守者,則幷與?觀坐談而不歸之僞遺訓者鮮矣,豈不尢可痛乎.兄之高見非惟弟所不反,亦兄所自許.今乃都不問義理若何,欲收印零文片字於原續之外者,有何甚不得已之故.怪事怪事.竊見同志諸公多刓方爲圓, 非復舊意見.非惟心甚不滿, 亦覺身孤無助, 常懷惡而不能遺也.兄若又不見聽,則當入山杜門,息交焚筆,不復言師門事.而長與樵牧爲伍矣, 幸能諒此若哀否. 습유(拾遺) 빠뜨린 글을 말한다. 규간(規諫) 옳은 도리로써 임금이나 웃어른의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는 것으로 간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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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재의 시에 차운하다 次永裕齋韻 세속에 모범되는 돈독한 성실로 막힌 식견573) 깨뜨리니 範俗敦誠破面墻진가의 정자574)만 온전히 향기로운 건 아니네575) 甄家亭子未全芳영유재 경영은 응당 변산576)과 더불어 쌓여가고 經營應與邊山積그것을 지킴은 장차 좌해577)와 함께 장구하리라 保守將同左海長용의 비늘 같은 솔과 회나무 천년토록 늙어가고 千歲龍鱗松檜老말갈기578) 같은 한 봉분에 제물이 향기롭구나 一封馬鬛苾芬香환륜의 선송579)이 먼 후손에게까지 내려왔으니 奐輪善頌來雲裔유후580)의 마음이야 어찌 직손 방손이 다르랴 裕後心何異直傍 範俗敦誠破面墻, 甄家亭子夫全芳.經營應與邊山積, 保守將同左海長.千歲龍鱗松檜老, 一封馬鬛苾芬香.奐輪善頌來雲裔, 裕後心何異直傍. 막힌 식견 원문의 '면장(面墻)'은 이치에 어두워 꽉 막히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백어에게 말하기를 '너는 〈주남〉과 〈소남〉을 공부했느냐? 사람이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담장에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라고 하였다. 진가의 정자 진씨(甄氏) 집안의 사정(思亭)을 말한다. '진가(甄家)'는 송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그의 대(代)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진가의 …… 아니네 영유재가 진가의 정자에 못지 않다는 뜻이다. 변산(邊山) 전라북도 부안군 서해안에 돌출한 반도이다. 좌해(左海) 중국에서 볼 때 동해, 조선에서 볼 때 황해로 조선을 지칭한 것이다. 말갈기 원문의 '마렵(馬鬣)'은 말갈기 모양으로 만든 봉분(封墳)의 모양을 말한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예전에 공자께서 '내가 보건대, 봉분을 당처럼 쌓은 것이 있고, 제방처럼 쌓은 것이 있으며, 하나라 때의 가옥처럼 쌓은 것이 있고, 도끼처럼 쌓은 것이 있다. 나는 도끼처럼 쌓는 것을 따르겠다.'라고 하셨는데, 바로 세속에서 이른바 말갈기 봉분이라고 하는 것이다.[昔者, 夫子言之曰, 吾見封之若堂者矣, 見若坊者矣, 見若覆夏屋者矣, 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 馬鬣封之謂也.]"라고 하였다. 환륜의 선송 영유재의 원운시(原韻詩)를 가리킨 것이다. 원문의 '환륜(奐輪)'은 건물의 낙성식 때 쓰는 말로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고 성대하다는 뜻이다. 《禮記 檀弓下》 유후(裕後) 명예나 업적을 후손에게 넉넉하게 남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제어하고 예로 마음을 제어하여 후세에 넉넉하게 남겨 주어야 한다.[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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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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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84년 사문계(私門稧)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甲申四月 甲申四月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이다. 이때 도조로 받은 곡식이 모두 17석 18두이다. 이를 석당 9냥씩으로 몇 사람에게 분배해 주니 모두 150냥2전이다. 이중 백 냥은 4월 21일에 큰댁으로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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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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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田士狷 乙亥 선장(先丈)께서 돌아가신 일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달 10일에 나의 아우가 완주(完州)에서 와서 말하기를, "정재 어른이 어제 저녁에 별세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듣고는 경달(驚怛)52)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의(情義)로 헤아려보면 곧바로 달려가고 싶은데,53) 손에 부조할 것도 없고 내 자신 여행갈 노자도 없어서, 조금 며칠을 기다려서 동행할 사람과 약속을 하고 또 돈도 마련하려 했습니다만 또 모두 어긋났습니다. 비로소 29일에서야 최여중(崔汝重)과 나란히 가서 영궤(靈几)에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형께선 계시지 않았습니다. 저의 비통한 사사로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아아! 지난 겨울에 형이 저의 집에서 병으로 신음할 적에 항시 말씀하시기를, "가대인(家大人)께서 정력이 더욱 그르쳐져서 아마도 오래 세상에 계시지 못할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서 탄식을 그치지 않으셨지요. 이 말이 오래지 않았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한 기운(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감응하여 먼저 당신의 마음과 말에 조짐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이후부터는 만사가 다 그만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일은 중간에 겪었던 영남과 음성의 허다한 파란으로 앞날에 선자(先子)에게 바라던 허다한 뒷일을 어찌하여 잊고 갑자기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애형께서 집촉(執燭)54)한 날에 저에게 보낸 답서의 초안에 그것이 마지막 글씨라는 것을 알고서 마음이 측연하였습니다. 그 잊지 않고 눈을 감지 못한다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무릇 이러한 나머지 사건들은 모두 애형의 신상에 남아있습니다. 현재 어버이를 위해 가장 절실한 급무는 평일의 문자를 수습하여, 이로써 선자를 위한 변무의 설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대처가 미진한 것까지 개수하고 보완하고 엄호한 연후에, 허물을 감추고 덮어야 이에 효(孝)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많을 것이라 여겨지니, 이것이 참으로 크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애형께선 어떻게 대처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 섣달에 선장이 편지를 음성에 투서하여 음성과의 교유를 끊었는데, 애형께서 여기기를 "이미 일찍이 주토하였으니, 교절한 지가 본디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편지를 보내 절교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인지라 차라리 그 혈당(血黨)55)을 배척하여 교절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 당혈을 끊으면 음성을 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형이 했던 이러한 일은 매우 엄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건대, 선장이 하는 바가 정히 그 마땅함을 얻어서 임종의 큰 절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때 편지를 보내 미처 교절할 경황이 없었다면 무엇으로써 음성과의 교절을 증명하여 저 원수를 풀라는 입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56) 이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연보 초안은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중반 이후는 저에게 이어서 완성하기를 부탁했는데, 그 편지가 여전히 상자에 있습니다. 만약 일찍 책임을 맡겼더라면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어찌 사양했겠습니까?57) 지금은 뜻밖에 변괴가 속출해서 국세가 전환되었으니, 이 일이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애형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계신지요? 대저 몸이 있은 연후에 집상(執喪)58)할 수 있고, 가히 선인의 일을 전술할 수 있습니다. 애형의 현재 병세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급히 다스려 몸을 잘 보호하고 중책을 맡아서 큰 효를 마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先丈哭事, 何言何言.去月十日家弟自完來言, 靜齋丈以昨晨下世.聞之驚怛, 不知所云.揆以情義,卽欲匍匐, 而手無賻物, 身無行資, 稍待幾日, 約件辦金, 而又皆牴牾.始以二十九日, 與崔汝重聯行慟哭于靈几而兄則不在, 悲悵之私, 又如何可言.噫昨冬兄在獘廬吟病中, 常言家大人精力益敗, 似不久世, 奈如之何.仍中夜起坐, 歔欷不已.此言未幾, 果至於斯.豈其一氣相感, 先兆於心言歟.今焉而後萬事已矣, 最是中間所經嶺陰許多波瀾,前頭所望先子許多後事,何能忘棄而遽歸.哀兄執燭日所送答弟書草認是絶筆而讀之心惻.知其不忘而不瞑者在也.兄此餘案總在哀兄身上.而目下爲親最切急務,在收拾平日文字, 使爲先子辨誣之說, 不至泯滅.幷與有事以來, 處之未盡者, 而爲之改補掩蓋之然後, 乃得爲孝.然想多有事不由已者矣, 此實大難.未知哀兄何以處之.客臘先丈之投書絶陰也, 哀兄以爲旣曾討之, 絶固久矣.今復書絶是自辱, 不如斥絶其血黨.絶其黨則絶陰不待言.此甚嚴正然以今觀之, 先丈所行正得其當, 而可謂臨終大節.如其未遑, 何所證其節陰而杜彼解仇之口耶.是則幸矣.惟是年譜草, 未及了役, 是爲恨事.中半以後, 託弟續成, 書猶在篋.使早委責, 弟雖不敏, 亦何敢辭.今焉變出不意, 局勢頓換, 不知此事竟如何爾.哀兄於此, 又何以爲心.大抵有身然後可以執喪, 可以述先.哀兄現祟, 不可謂輕.惟望亟治, 善保身任重責以終大孝.幸甚. 경달(驚怛) 남의 부모님이나 가까운 손윗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깜짝 놀라는 것이다. 포복(匍匐) 《예기(禮記)》〈단궁 하(檀弓下)〉에 "상사(喪事)가 나면 부복(扶服)해서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부복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급히 가야 한다는 포복(匍匐)과 같은 뜻이다. 《예기》 〈문상(問喪)〉에도 "포복해서라도 가서 곡(哭)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집촉(執燭) 임종을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예기》〈단궁 상(檀弓上)〉에 증자(曾子)가 병들어 누웠을 때 동자가 구석에 앉아 촛불을 들었다는 말이 있다. 혈당(血黨) 오진영을 따라 다니는 무리, 잔당을 말한다. 해구(解仇)를 풀라는 입들 중립파이다. 호파와 영파 원수끼리 화해하라고 종용하는 파를 말한다. 원수를 풀라는 쪽에선 전사견의 아버지가 언제 음성과 교절한 적이 있느냐 옛날부터 성토해왔으므로 교절한 것과 다름없다(전사견의 생각) 작년 섣달 죽기 전에 확실히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 아들의 생각처럼 교절한 것이면 굳이 편지를 안보내도 된다고 한 그 말은 매우 엄정했다. 그러나 후창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 저 중립파의 입을 막을 증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보낸 편지가 있으니 간재 집안 쪽에서 생각할 때는 확실히 우리 호남 편이다. 만약……사양했겠습니까 전사견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전사견에게 대필 편지를 쓰게 하였던 것 같다. 연보 속간을 후창에게 맡긴다고 하여, 정서되지 않은 연보 초안을 후창에게 보낸 정황이다. 집상(執喪) 부모의 상사에서 상제로서의 예절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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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을해년(1935) 8월 答田士狷 乙亥 八月 오늘 들으니 박애(朴哀)59)가 끝내 상경해서 김씨(金氏)를 맞이해서 정사(精舍)에 거처하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 조부의 문자를 찬술하게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일전에 형과 내가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고한 것이 참으로 간절했는데, 제가 이에 이 말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까?창암 어른은 일생동안 선사를 높이 섬긴 것이 문인들도 가히 미칠 바가 아닙니다. 사후의 큰일60)은 이에 스승을 배반하는 사람의 수중에서 나오니 이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습니까? 명절 전에 함재(涵齋)61) 어른께서 저에게 전언하여 말씀하시기를 "유영선(柳永善)62)이 와서 사과하기에, 내가 이미 원한을 풀었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만 김씨에 붙은 자를 토벌하는 것이 사사로운 원한인줄만 알고, 오진영이 무인(誣印)하고 난고(亂稿)한 것을 조장한 것이, 사문의 공적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유영선이가 함께 어른께 와서 사과할 때에 마땅히 함재어른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네가 만약 현천(玄仟)에 사죄하려 하거든, 비록 나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일이 이곳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가을에 권순명(權純命)63)과 화해한 실수는 오히려 창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와 같이 사람들이 분명히 고한 것을 들은 후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어른께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오늘날 이 의(義)를 누구와 함께 더불어 말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한번 탄식합니다. 今聞朴哀竟上京, 邀金處知精舍, 俾撰其祖文字云.日前兄我守而告之者,何等恳切, 而渠乃不有之此快耶.蒼丈一生尊事先師, 有非門人之可反.而身後大事, 乃出於倍師人手中, 寧不慨歎.節前涵齋丈傅言於弟曰, 柳永善來謝過, 吾已解仇, 是伹知黨金之討之爲私仇, 而不知助震誣印亂稿之爲師門公仇也.當其來謝也, 當曰爾若謝罪玄仟, 則雖不謝過於吾可也云矣.惜乎其事不出此也.昨秋解權之失, 猶可諉之倉卒未思.今復如此於聞人明告之後何哉.此丈而猶復如此, 此日此義, 誰可與語.爲之一欷. 박애(朴哀) 부모님 상 중에 있는 박씨를 말한다. 큰 일 조부의 문자인 행장을 찬술하는 일이다.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이다. 유영선 유영선(柳永善, 1893~1960)은 호가 현곡(玄谷)이며 艮齋 田愚의 제자이다. 권순명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은 호가 양재(陽齋)이며 艮齋 田愚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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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10월 與田士狷 乙亥 十月 일전에 희숙(希淑)64)을 석동(席洞) 묘제에서 만났습니다. 희숙이 말하기를, "현암(玄巖)으로 가서 김상(金庠)65)을 만나 그에게 문장을 다시 고쳐 사죄하라고 고한즉, 김씨가 말하기를 '일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가 나의 동정을 엿보아서 장차 어찌하려고 하니, 내가 경솔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상사의 이 말은 다 칭탁(稱托)66)하는 말입니다. 단지 고치지 않을까를 근심할 뿐이지, 만일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오진영이도 간재가 스승이므로 장차 무슨 말로 죄를 짓겠습니까?희숙이 또 말하기를, "박인규(朴仁圭)가 나의 책상에서 형님께서 김상사를 언급한 편지를 보고 낯빛을 바꾸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후창이 어찌하여 우옹(尢翁)67)을 폄하한 전일중(田鎰中)과 더불어 친후하단 말인가요?'였습니다"라고 희숙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온 조선을 움직여서 대사(大事)를 거행하여 평일에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어이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두렵고 두렵습니다.또 책상 위에 있던 편지글에서는 다만 그 고친 것이 명백한 것을 보고서 대응한다고 말했는즉, 본래 가히 노할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더욱 두려워할만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우옹을 폄하했다면 어찌 그 사람을 직접 성토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과 친한 자가 김씨를 논하기를 기다려서 아울러 성토하겠습니까? 그러니 실제로 그런 일이 없고 단지 불과 우옹을 머리에 이고서 김씨를 보호하는 패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옹을 모독하고 희롱하는 죄를 어디에다 귀결시켜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고, 실제로 통분할 일입니다.희숙이 또 말하기를, "현암에 가서 들어본즉, 형님께서 박진호(朴震鎬)에게 김씨의 문장을 받지 말라는 말을 권해서 윗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들이 당일에 신중히 고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고 또 심지어는 그 말이 쓰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도리어 조소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행했던 것은 진실로 창암 선생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명월주(明月珠)68)를 암실에 던졌다면 누가 그 보배로움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만 번 남에게 비웃음을 받더라도 부끄러운 바가 없고, 도리어 비웃은 자들의 식견이 없음을 제가 비웃었습니다. 양가의 교분이라든지 유명간의 믿음이라든지 사실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사람을 기극(忌克)69) 할 지경으로 귀결시키니 어찌 이런 자는 운수를 모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희숙이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희숙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진호(震鎬)70)에게 인척의 교분은 그만두더라도, 교학의 의리가 창장에게 있다고 칭한 즉, 간재의 문하에 출입한 지 30년에 도의로써 서로 믿는 것이 늙거나 젊다고 하여 차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스승의 일로 인하여 창장과 함께 음적의 화를 입은 즉, 실로 생사에 있기 어려운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대신 창암의 집안 행장을 초안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진호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나에게서 구하여 이미 집안 행장문을 유실하고 다시 저에게 청해서 제가 그를 위해서 다시 행장문을 본초가 없어진 이후에 완성해주어서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서로 관련됨이 이와 같아서 이로 인해 문장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논급했습니다. 또 연전에 오진호가 그 조부의 문자를 모씨의 집안에서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안은 간옹의 일에 불만이라는 것을 말해서 만류시켜 그친 일이 남아있습니다. (희숙에게 일러 말한 끝부분에 " 표시를 해야하는데 차직 힘듭니다)지금 정성으로 간옹을 섬기는 것이, 문인과 다름없던 창암이었습니다. 그 사후의 문자를 간옹 생전에는 스승으로 섬기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홀연히 배신하고 떠난 여흥 김씨에게 문자를 청하니, 어찌 모른 척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을 보듯이, 냉담하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오진호 조부의 원고 일은 저에게 방문하여 질의한 즈음에 있었습니다! 김씨의 집안은 높고 문장도 아름답습니다. 오진호가 이를 사모하여 그리했겠지만 그러나 유독 삼세(三世)의 교분과 우의, 장초가 관련된 정리는 김씨가 능히 먼저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는지요.71)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지, 아울러 가히 말할 수 있는 정리까지 생각지 아니하고 비웃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비록 오진호가 여전히 나이가 적어서 깊이 말할 것이 없지만, 모든 이러한 말들은 어찌 일어나야 할 때에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다시 희숙이 말하기를, "내 또한 처음에 듣고서 형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고 의심을 하였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진실로 옳고 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오형께서는 박인규(朴仁圭) 등이 연명하여 편지하는 것에는 일종의 의사(意思)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또 선사의 문인인 김진식(金璡植)의 이름이 끼어있는 것이 뜻밖의 변고라 여겼기 때문에 다소의 개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나, 예로부터 국가의 변란은 항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의 관채(管蔡)72)의 일부터도 그러했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뿐이겠습니까?금일 오진영과 김용숙의 변란이 나온 것은 선사의 가까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김진숙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일 때문에 즐거움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위정척사의 기가 꺾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락자저'는 전사견이 보낸 편지의 말입니다. 유경조(柳景肇)가 말하기를, "김중옥(金仲玉)이 김종현(金鐘賢)이가 논한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73)을 보고 말하기를 '독서 삼십년에 다만 취모(吹毛) 몇 자74) 만을 보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75) 이것은 자정(子貞)이 친히 묶어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중옥이 과연 이런 말을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군자가 치지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정밀히 살펴 밝게 구별하여 겉과 안을 통관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밖에서부터 두루 뭉실하게 본다면 양묵(楊墨)의 인의(仁義)가 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한자(韓子)의 박애(博愛)가 인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맹자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했고, 주자는 논하여 한유를 도를 알지 못한다고 논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말에 조금 허물이 있는 것을 밖으로 터럭으로 덮어 능히 볼 수 없다고 하면, 어찌 독서가 귀할 것이 있겠습니까?76) 단지 억지로 끝을 두어 억지로 허물을 찾는다면, 심술(心術)에 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컨대 제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이 정도까진 이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서 수십 년에 터럭 이면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자와 그 허물이 있는 것을 알고도 터럭을 취해서 억지로 돕는 자를 싫어합니다. 또 천하가 중화(中華)인데도 유자들이 능히 천하를 중화로 만들지 못하고 이적(夷狄)으로 가게 했다는 오진영의 설은 그 허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가히 엄폐할 터럭도 없음에도 엄폐만을 일삼으니 또한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日前過希淑於席洞墓祀.希言往見金庠於玄巖, 勸其改告由謝罪, 則曰此非不欲爲, 但今吳震泳伺我動靜, 將欲如何. 吾不敢率爾.希言止此此是稱托之辭.只患不改苟能改之吳將何辭而罪之.希又言朴仁圭於獘案,見兄主語及金庠之書, 變色大怒曰, 後滄何以與貶尢翁之田鎰中親厚.希言止此 此非欲動全鮮擧大事. 期遂平日之未遂耶. 可怕可怕.且鄙書只言觀其改之明白而應之, 則元非可怒者, 而猶如此尢可怕也.雖然有人而實貶尢翁, 則何不直討其人. 而待其所親者論金事而幷討耶.可知其無實事,而不過戴尢翁爲護金之干牌也.然則侮弄尢翁之罪,何所歸乎.非可怕而實可痛也.希又言往玄巖聞之, 則兄主勸朴震鎬勿受金文之言, 爲衆笑囮.噫吾輩當日守告而不憚煩, 至慮其言不見用反見嘲笑, 而猶且爲之者, 亶出於爲蒼巖一念矣.果然如其所料, 投明月於暗室, 孰知其爲寶今雖萬被人笑.實無所愧, 反笑笑之者之無見也.不思兩家之契分, 幽明之相信, 及事實關係之如何, 而遽歸人於忌克之科, 豈非不知數者耶.余謂希曰, 吾於震鎬, 戚分姑舍, 而稱有敎學之誼於蒼丈, 則出入艮門三十年, 道義相信, 不以老少而有間.以至於因師事而同受陰禍, 實有死生難忘之故.故代草家狀之文.震不於他而求吾, 旣又遺失狀文, 再請於吾, 吾乃爲之再成狀文於無本草之候, 而不憚勞.相關如此, 因而論及受文, 在所當然.且年前震欲受其祖文字於某家.吾爲言其家不滿艮翁事而止之, 己事在焉.今以誠事艮翁, 無異門人之蒼巖.身後文字,請於師事艮翁生前,而忽然倍去山頹後之驪金也, 豈容越秦視而不爲之一言乎.况在震以祖稿事,訪余質疑之際乎.金之地閥高矣, 文章美矣.震雖慕此而然, 然獨不念三世契誼, 狀草關係之情理.非金之所能先乎.不用忠告則不用已矣,幷不思可言之情而笑之者何哉.雖震尙年淺不足深言, 几此云云, 豈非起於起處乎.希曰吾亦始聞而疑兄主胡至如是, 今承所喩誠然誠然.嗚呼吾兄以朴仁圭等聯書, 有含一種意思,而先師門人金璡植之參名.爲意外之變故.致多少慨歎.此非不然.然從古以來家國之變.常起於肘腋之下.自周室管蔡事而已然.何獨今日乎.今日吳金之變出, 已出於先師之肘腋, 何論金璡植乎.皆不足以此無樂而自沮於衛闢.無樂自沮來書語.柳景肇言金仲玉見金鐘賢所論陰作鄭節士傳曰, 讀書三十年, 只學得吹毛覓疵.此子貞親聞而傳者也.弟謂子貞曰, 吾雖未知仲玉果有此言, 然君子之致知窮理, 貴在精察明辨, 通貫表裡.若自外泛觀, 則楊墨之仁義, 非不爲德, 韓子之博愛非不爲仁, 而孟子斥之以爲異端, 朱子論之以爲不知道.若人言之有疵者, 外爲毛掩而不能見, 則烏足貴乎讀書哉.但有意吹覓,則有害心術.故君子不爲也.吾自信汙不至此矣.吾則又惡夫讀書數十年, 不能察毛裡之疵者, 與夫知其有疵而取毛强掩者也.且此天下華而儒不能華天下卽夷之說, 其疵易見, 幷無可掩之毛者,而專事掩覆, 則其心術又當如何哉. 희숙(希淑) 후창의 족제이다. 김상(金庠) 김씨 성을 가진 성균관 유학생으로 김용숙을 말한다. 칭탁(稱托) '핑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옹(尢翁) 우암 송시열을 말한다. 명월주(明月珠)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기극(忌克) 다른 사람의 재능(才能)을 시기하여 꺼리고 능멸하는 것이다. 진호(震鎬) 오진영의 아우인 오진호인 것 같다. 오진호가……않았는지요 창암이 죽은 후 간재를 비판했던 김씨의 글을 받았다면 죽은 창암이 받아들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관채(管蔡)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다. 주공의 동생들로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고 마침내 은(殷)의 반경(盤庚)과 더불어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켰다.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 음인이 지은 정절사전이다. 취모(吹毛) 몇 자 남의 허물을 억지로 찾아내는 것을 이른다. 아마 남을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유경조……했습니다 오진영이가 쓴 《정절사전》이 있고, 오진영이가 쓴 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였다, 즉 오진영이가 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고, 김중옥이가 김종현이 논한 글을 보았다. 그러니……있겠습니까 이 말은 김중옥의 말을 찬성한 것으로, 김중옥은 오진영을 비판한 사람이다. 남의 허물 있는 말을 터럭으로 덮어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독서가 귀할 것이 없다. 독서가 귀한 것은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허물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여우 석하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李汝禹 碩夏 ㅇ辛酉 택술(澤述)은 품격이 저열하고 학문이 거칠어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형께서 지금 시대의 현인과 호걸의 높은 덕과 넓은 학업을 나에게 장려하시면서 정함(庭函)81)의 아래에서 들었다고 한 것을 어찌 뜻했겠습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 장차 어떤 말로 사례해야 하겠는지요. 형이 잘못이라고 여긴다면, 그 선생 장자의 가르침은 어찌 잘못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사람이 아님을 어찌하겠는지요. 이는 아마도 제가 내면의 덕을 버리고 겉만을 꾸미며 실질을 제거하고 화려한 것에만 나아갔기 때문에, 선생 장자께서 그것에 속임을 받아서 우연히 소시(所試)의 칭찬82)을 두어서 그 장래를 기약한 것뿐입니다.83)형께서 미처 말의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 현재 성취된 실제적인 미덕으로 오인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입장에서 진실로 스승과 부친을 속이는 것이 되거니와, 형의 입장에서도 또한 소홀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남몰래 스스로를 닦아서 소박하고 진실한 덕을 짊어질 것을 제가 마땅히 힘쓸 터이니, 정밀하게 살피고 밝게 살펴서 사람 칭찬을 구차하지 않는 것은 형도 가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은근한 뜻은 당신의 깊은 마음에서 나와서, 요컨대 겉으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형에게 만일 가히 규간할 허물이 있거나, 가히 보완할만한 흠궐이 있다면 어찌 감히 침묵하여 취용(取容)하여 스스로 선유(善柔)84)의 죄에 빠지겠습니까? 다만 제가 형을 보건대 덕의 모습이 화락하고 뜻과 행동이 돈실하고 언론은 상세합니다. 저처럼 노둔한 재주로 쫓아갈 바가 아니거늘85) 또 어찌 감히 억지로 드러나지 않은 허물과 흠결을 찾아서 구차히 꾸짖는다는 비판을 취하겠습니까? 굳이 저에게 말을 구하신다면, 또한 정밀하게 살피고 사람을 구차히 칭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불과 단지 이 사람을 잘못 칭찬한 것으로 인하여 당신께 개진할 따름입니다, 이 일 이후로도 또 어찌 알겠습니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있어서 가히 옥(玉)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고, 반딧불같이 작은 불빛이 햇빛을 도울 일이 없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편지에서 "자기를 버리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기 바랍니다."86)라는 훈계를 주셨는데, 진실로 증세를 진단하여 약제를 투여하고 굶주림을 가련히 여겨서 식량을 진휼한 것과 같으니, 우리 형의 진실된 마음이 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은 충고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벗이 있으니, 어찌 은혜를 새기고 의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형 또한 어찌 저의 병폐를 모두 알아서, 작은 악과 숨겨진 사특함까지 한 번 쓸어서 없애겠습니까? 오로지 훗날 더 자세히 살펴서 더 맹렬하게 다스려 줄 것을 바랍니다.대저 우리들이 서로 닦고 서로 힘쓰게 해서 세한(歲寒)을 기약해야지, 어찌 갑자기 짧게 편지를 오고가는 사이에 효과를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붕우지간의 도리가 상실된 지가 오래입니다. 저 아침에는 금란지교(金蘭之交)87)와 같다가 저녁에 풍파(風波)를 일으킨 자들은, 진실로 친구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명색이 유문의 도의로써 교유한다고 이름 하는 자들도 책선(責善)88)하고 잘못을 보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더 나아가서는 칭찬하여 그 장점을 치켜세우다가, 물러나서는 비난하면서 단점을 드러내는 자는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잔인하고 이치를 해치는 것이 또한 매우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는 혹 의론이 합치되지 않는 점으로 인하여 서로 병장기를 쓰는 일까지 이르게 되니, 풍속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것이 더욱 참혹합니다.저는 비록 불초하지만 이러한 무리들을 보기를 기슬(蟣蝨)89)보다도 더 천하게 여기고 치아(鴟鴉)90)보다 더 미워합니다. 제 마음으로 이미 미워하니, 어찌 차마 제 자신이 친히 이러한 일을 범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세풍(世風)에 구속되고 습속에 익숙해져서91) 혹 그렇지 않기를 기약하지만 그럴 경우도 있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형과 더불어 따로 맹세와 훈계를 세워서 혹여라도 끝내 소인의 교유로 귀결되지 않기를 생각합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저와 같은 마음이라 즐겨 들을 것이라 여깁니다.본심(本心)이란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過不及)이 없다는 명칭입니다. 다 이치에 합치되지 않아서 과불급이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비록 도심(道心)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되지 못하고, 모두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이 없다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심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용(中庸)》 서문에서는 본심을 인심과 도심을 공통하여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혹 그대의 견해와 합치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澤述品劣學踈, 最出人下者也.何圖吾兄以當世賢豪德崇業廣, 見獎謂是聞諸庭函之下.弟於此將下辭以謝之.謂兄之誤也, 其於先生長者之敎,何不誤也.則弟非其人何.此殆弟遺內飾外, 去實就華, 先生長者爲其所欺, 偶有所試之譽, 而期其將來.兄未及諦察語意, 認以爲見成之實美也.是則在弟固爲誣罔, 而在兄亦不免踈忽也, 要之闇然自修, 朴實負荷, 弟當勉勵, 精審明察, 譽人不苟, 兄可留意歟.求敎之勤, 認出肝膈赤衷, 要非皮面白談.兄苟有過可規闕可補者, 安敢噤默取容, 自䧟於善柔.但以弟見兄, 德容之和睟, 操履之敦實, 言論之詳覈.有非弟十駕之追者, 又何敢强覓過闕於未形, 以取苟訾之譏哉.無已則亦惟曰精審明察, 譽人不苟, 不過因誤獎此漢而陳之己矣.繼此以往, 又安知不有他山之石.可資攻玉, 螢火之爝, 倘助日光乎.蒙惠舍已愼獨之戒, 誠診證投藥, 憫飢賑粮, 不有吾兄實心, 惡能忠告乃爾.有友若此, 寧不鏤恩服義.雖然兄亦安得盡知弟病, 纖惡隱慝, 一刷刷下.專仰異日察地細而洽之猛耳.大抵吾輩交修胥勖,歲寒以之,何可遽責效於造次往復之間耶.噫友道之哭久矣.彼朝金蘭而夕風波者,固不足道也.名爲儒門之道義交者, 不惟不責善補過而已, 乃有進而潝潝然推其長, 退而訿訿然揚其短者, 比比焉.其忍心害理, 亦已極矣.甚或至於因議論之不合, 成戈戟之相尋, 傷風禍世, 尢其慘矣.弟雖無似, 視此輩不啻賤之若蟣蝨,惡之若鴟鴉.心旣惡之,豈忍身親犯之.雖然世風之囿, 俗習之憤, 或不免不期然而然者, 故思欲與吾兄另立誓戒, 毋或終歸小人之交也.仰想同情而樂聞也.本心者,合於理而無過不及之名也.以其未盡合理而有過不及者言,則雖道心不得爲本心,以其盡合於理而無過不及者言,則雖人心亦得爲本心.故曰庸序本心通人道心而言.未知此或合於盛見否. 정함(庭函) 정은 부친을 말하고 함은 스승을 이른다. 즉 부친과 스승이다. 《논어》 〈위령공〉에 "만약 칭예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는 것이다.〔如有所譽者,其有所試之矣.〕"라고 하였다. 이는……것 뿐입니다 이 말은 '선생 장자께서 나의 겉모습만 보고 한번 칭찬한 말을 두어서 앞으로 현호(賢豪)가 될 것이라고 기약만 둘 뿐'이라는 것이다 선유(善柔) 《논어》〈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세 가지이며, 해로운 벗이 세 가지이니, 곧고 진실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며, 편벽되고 아첨을 잘하고 말만 잘하면 손해가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라고 하였다. 저처럼……아니거늘 본문의 십가(十駕)는《순자》〈수신(修身)〉에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자기를 버리고……바랍니다 근독(謹獨)은 홀로를 삼가는 것으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유독(幽獨)의 곳에서 조심하는 것과 남이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은미(隱微)한 마음을 삼가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세미한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라고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하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단금지교와 지란지교를 합한 말이다. 책선(責善) 상대방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책선은 붕우 사이에 적용되는 도리이다. 부자가 책선하는 것은 은의(恩義)를 해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다.〔責善, 朋友之道也. 父子責善, 賊恩之大者也.〕"라고 하였다. 기슬(蟣蝨) 사람에 기생하는 이[虱]로서 옷엣니와 머릿니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와 서캐이다. 치아(鴟鴉) 솔개와 갈까마귀이다.《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사람은 가축을 잡아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까마귀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인가?〔民食芻豢, 麋鹿食薦, 蝍蛆甘帶, 鴟鴉嗜鼠, 四者孰知正味?〕"라고 하였다. 본문의 분(憤)은 관(慣)의 오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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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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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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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우에게 보냄 임술년(1922) 與李汝禹 壬戌 적막한 물가92)에 가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고, 단지 밭 사이에 늙은 농부를 따라서 날마다 농사일을 하니, 도리어 학도들을 모아놓고 허튼 변론을 일삼은 자보다 진실함이 있다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해가 저물고 나면 호미를 메고 돌아오면서93) 말하기를, "오늘도 가히 공짜 밥을 먹지 않았다고 이를만하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삼연옹(三淵翁)94)이 "세간만사는 모두 허위요, 오직 봄날에 소를 끌고 가는 소리만 약간이나마 사람의 뜻을 굳건하게 한다"는 말을 읊으며 내 자신을 견주곤 합니다.백수(白水)에 사는 양공(楊公)은 그 학문은 논의가 독실하고 행동은 더욱 진실하며, 문사에 통달했으며 이치가 더욱 수승(殊勝)95)합니다. 참으로 천상(泉上)의 덕망과 지혜가 높은 제자요, 남녘의 으뜸가는 학자입니다. 학업을 마치고 남긴 문집이 나를 일깨움이 매우 많습니다. 저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에 이르러서는 후학의 의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일찍이 듣건대 교감자의 안목이 문집을 짓는 이보다 높은 연후에 교감의 일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교감하는 일은 천루(淺陋)한 제가 전혀 감당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미 무릅쓰고 맡았으니, 의심나는 대목에 산정(刪定)할 곳을 띠지로 표시하여 본가의 재결을 기다리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본 문장 가운데 큰 논의로써, 편(篇)마다 문장마다 대부분 이런 뜻96)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면 크게 작자의 본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듣건대, 남의 문집을 교감하는 자는 임의대로 산정하고 제거하여 본래의 면목을 허물어뜨려선 안 됩니다. 만일 이를 멋대로 산정하고 범하여 본래 면목을 없애면, 이는 교정자의 문집이지 작자의 문집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 또한 이치가 있습니다. 제가 이 문집에 대해 감히 첨삭하지 못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입니다. 그러니 그대의 고견으로는 어떻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암경(巖卿)97)이 갑자기 고인이 되셨다는데 이 어찌된 일일까요? 그 외의 학문에 정미한 곳은 비록 내가 깊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우리 당의 빼어난 선비이거늘, 오늘 이 지경이 되었다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만시(挽詩) 한 편을 보냈으니 조만간 혹 당신께서도 볼 수 있겠습니다. 寂寞之濱, 無人可與語者, 惟逐田間老農, 曰有所事, 覺得反有實於聚徒浮辯者.日旣暮, 荷鍤而歸曰, 今日可謂不素食矣.時誦三淵翁世間萬事, 都是虛僞, 惟春日野中叱牛聲, 差强人意之語, 以自况耳.白水楊公, 其學也論篤而行益實, 辭達而理尢勝.信乎其爲泉上高足, 南中巨擘.卒業遺集, 警發弘多.至如太極兼氣, 神爲太極, 天有三氣, 心合理氣, 知覺智用諸說, 則不無後學之疑矣.嘗聞校讐者眼目, 高於作者然後.乃可濟事, 是役也萬非淺陋之可堪者.然旣已冒當, 則籖刪疑案, 俟本家裁決, 似無不可.但此爲本集中大議論, 篇篇章章多, 是此義, 此而剛却, 大非作者本旨.抑又聞之, 校人文集者, 不可任意剛抹, 壞却本來面目.如其犯此, 是校正者之集, 非作者之集, 此言有理.弟於是集, 不敢籤剛者, 亦此意也.未知高見以爲如何.巖卿遽作古人, 此何事耶.他精微去處, 雖不可深悉, 大抵是吾黨秀女, 令焉至此, 安得不悼惜也.曾有挽詩一篇送往, 早晩或及雅覽也. 적막한 물가 본문의 '寂寞之濱'은 보통 자기가 사는 곳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해가……돌아오면서 《시경(詩經)》〈채미(采薇)〉에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해 또한 저물리로다.〔曰歸曰歸, 歲亦莫止.〕"라는 구절과, "옛날에 내가 길을 떠날 때에는,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졌는데, 지금 내가 돌아올 때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도다.〔昔我往矣, 楊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라는 구절이 나온다. 삼연옹(三淵翁) 조선 숙종 때의 시인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가리킨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하였다. 수승(殊勝) 뛰어나고 훌륭함을 이른다. 가장 빼어난 일로 세상에 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이다. 이러한 뜻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을 말한다. 암경(巖卿) 허업(許業, 1883~1922)이다. 기우만, 곽종석, 전우를 금세의 장덕으로 여겨 알현하였다. 1922년(임술년) 2월 24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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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당 김공 행장 병자년(1936) 構述堂金公行狀【丙子】 공의 휘는 용헌(龍憲), 자는 덕중(德中), 호는 구술당(構述堂)이다. 언양(彦陽) 김씨는 계통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섯 번째 아들에서 나왔다. 휘 선(鐥)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대로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휘 취려(就礪)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휘 전(佺)은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휘 변(賆)은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휘 윤(倫)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휘 경직(敬直)은 본조에 들어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휘 복생(福生)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휘 윤(潤)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휘 약흠(若欽)에 이르러 한양에서 호남의 고부(古阜)로 이사하여 거처하였으니, 비록 존귀하고 현달함은 이전보다 덜하였지만 또한 벼슬아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충효와 예의로 군수에게 알려졌다.5대인 봉사 휘 선명(善鳴)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인륜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6대인 도헌(蹈軒) 휘 태운(泰運)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화가 맺어진 뒤에 벼슬하지 않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이로부터 대대로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국려(菊廬) 휘 용(墉)은 상을 당해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국화가 묘 앞에서 자랐다. 송곡(松谷) 휘 만상(萬祥)은 어버이 병에 하늘에 기도하여 곧바로 기이한 효과를 보았다. 현곡(玄谷) 휘 명(溟)은 성리에 잠심하였으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영모재(永慕齋) 휘 주성(柱成)은 효성으로 뇌우를 감동하여 송충이를 쓸어버리는 기이한 일이 있었으며, 또한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지금까지 공의 증조 이상이다.조부의 휘는 신(賮) 호는 성재(省齋)로, 효성과 학문은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 부친의 휘는 재행(栽行)이다. 생부의 휘는 재영(栽瑛) 호는 송암(松菴)으로 내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손이 없자 공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비는 이천(利川) 서씨(徐氏) 취학(就學)의 따님이다.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따님이 공의 생모이다.공은 정조 을묘년(1795년) 12월 29일에 고부(古阜)의 송산리(松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쌓은 덕을 계승하고 돈후한 자질을 품부 받았다. 입으로 시와 예의 글을 외우고 마음에는 영화와 이익의 생각을 끊어버렸으며, 다만 의리를 숭상하고 실질을 힘썼으며, 모든 행위가 사군자(士君子)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적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안한 것은 정성을 다해 선조를 받드는 것을 평생의 큰 일로 삼았으니, 이른바 '효도가 백행의 근원이며 인을 행하는 근본이란 것'을 공이 실제로 실천하였으며 이에서 여러 선들이 나왔다.부친과 조부를 장사지낼 곳을 여러 해 동안 구하였으니 멀리는 7사(舍)33)를 벗어나기도 하였는데, 묘소를 정한 곳은 끝내 길지를 택하였다. 대종, 소종계를 만들어 부지런히 그 일을 주관하여 재물을 불려서 논 20마지기 이상을 사들였다. 해마다 소작세를 거둬서 각처의 친진(親盡)34)한 묘소를 지키거나 제사지내는 도구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오래 유지할 방도로 삼았다. 도헌(蹈軒) 이하 여러 선조의 전할 만한 행적은 천 리에 발을 부릅뜨더라도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청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석물(石物)을 갖추지 않는 묘소가 없었다. 방친의 조상에게도 또한 각각 제전(祭田)을 마련하였으니, 모든 선조를 섬기는 일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갖춰 유감이 없게 하였다. 또한 나머지를 미뤄서 종족 가운데 빈궁한 자의 혼인과 장례, 교육의 비용으로 나눠 지급하였으며, 이를 전하여 전례(典例)로 삼게 하였으니, 대개 그가 종신 근검하여 이미 자신의 업을 이루었고 인하여 종물(宗物)을 넉넉하게 한 것은 참으로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만년에 직접 집터를 잡아 자손들이 대대로 전하며 거처할 곳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라고 하였으니, 그가 풍수지리까지 두루 통달함이 이와 같았다. 조목으로 가법을 정해 매번 여러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고하였으니, 그 요점을 들어보면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하며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학문에 힘쓰며 교만과 사치를 버리고 부지런하고 우졸함을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이 친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대략이다. 맹자는 "군자는 창업수통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잇게 한다."35)고 하였으니 공을 김씨 일문에 후대에 이어 나갈 통서(統緖)를 드리운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 그르겠는가. 지금 비록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 세상이지만 선조를 생각하고 자신의 뿌리에 힘쓰면서 정성을 다해 엄숙하게 공경하여 세속과 다르게 행하매, 사람들이 '송산의 김 아무개'라고 칭송하니 이에서 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철종 경신년(1860년) 9월 14일에 공이 돌아가셨으니, 정읍군(井邑郡) 내산면(山內面) 원덕리(院德里) 안산 토지등(兎只嶝) 해좌(亥坐)의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첫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한응(漢膺)의 따님으로 공과 합봉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연안 이씨 도풍(度豊)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있다. 아들 세열(世烈)은 준수하고 총명하고 강단이 있어서 능히 집안을 잘 다스렸으니, 첫 부인의 소생이다. 세훈(世勳)은 효행이 있었으며, 막내는 세형(世亨)이다. 딸들은 여흥(驪興) 민주호(閔周鎬)와 충주(忠州) 박원항(朴源恒)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둘째 부인 소생이다. 세열의 아들로 진사 원석(源錫)은 의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존모하여 더욱 집안의 명성을 날렸다. 봉석(奉錫)과 홍석(弘錫)과 기석(璣錫)이 있는데, 기석은 남의 후사가 되었다. 세훈의 아들로 형석(炯錫)이 있고, 딸들은 문화(文化) 유병철(柳炳喆), 연일(延日) 정희원(鄭喜源), 해평(海平) 윤계선(尹桂善)에게 시집갔다. 세형은 기석을 양자로 들였고, 딸들은 전주(全州) 이호선(李鎬善), 전주(全州) 최경렬(崔暻烈), 울산(蔚山) 김희수(金希洙), 의령(宜寧) 남정옥(南廷玉)에게 시집갔다. 사위 민주호의 아들은 영욱(泳旭)이며, 사위 박원항의 아들은 판주(判柱)와 정주(定柱)가 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이 타계한지 지금 팔십 년이나 오래 되었다. 이미 당시에 행장을 짓지 못하였으니 용모와 기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언론과 사적도 또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증손 한경(漢鏡), 현손 구상(求相), 5대손 성학(成學)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니, 참으로 죽은 뒤에 진영(眞影)을 뒤미처 그림에 그 비슷한 모습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다. 더구나 나의 졸렬한 문장으로 말인가. 그러나 동향의 후생으로 유풍에 대해 익숙히 들었으며 정의(情誼) 또한 사양할 수 없다. 이에 《세보》 중에 기록한 것과 여러 후손들이 구전한 것을 선술(選述), 편차한 뒤 글을 지어서 입언가가 재택하기를 대비한다. 公諱龍憲, 字德中, 號構述堂.彦陽之金, 系出新羅敬順王第六子.諱鐥以麗太祖外孫, 封彦陽君.歷世大顯, 有諱就礪, 平章事, 謚威烈.諱佺, 平章事, 謚翊戴.諱賆, 集賢殿學士, 謚文愼.諱倫, 左議政, 謚貞烈.諱敬直, 入本朝大提學, 贈右議政, 謚忠敬.諱福生, 工曹典書.諱潤, 吏曹參判, 至寶城郡守.諱若欽, 自漢師居湖南之古阜, 雖貴顯遜于前, 亦簪組不絶, 而以忠孝禮義聞郡守.五世而奉事諱善鳴, 光海時棄官居鄕, 痛彛倫之斁傷.六世而蹈軒諱泰運, 丙子亂擧義旅, 媾成後不仕, 明春秋大義, 自是連世行誼.菊廬諱墉, 遭艱廬墓, 菊生墓前.松谷諱萬祥, 親癠禱天, 輒得奇效.玄谷諱溟, 潛心性理, 遊學于遂庵權先生門.永慕齋諱柱成, 孝感雷雨, 致剝掃松蟲之異, 亦以學問著名, 公之曾祖以上也.祖諱賮號省齋, 孝學承先懿.考諱栽行.生父諱栽瑛號松菴, 內行淳篤, 仲兄早歿無嗣, 以公系後, 妣利川徐氏就學女.文化柳氏女, 其所生也.公以正廟乙卯十二月二十九日, 生于古阜之松山里第, 承積累之世德, 稟敦厚之天資, 口講詩禮之文, 心絶榮利之念, 惟義是尙, 惟實是勉, 動靜云爲, 有不遵士君子規模者蓋募.而最是竭誠奉先爲生平大致, 則所謂孝爲行源仁本者, 公實有之, 而爲衆善之出也.父祖葬地, 積年求之, 遠則出七舍之外, 佳城之占, 竟多獲吉.立大小宗契, 勤幹殖聚, 買得水田二十頃以上, 歲收佃稅, 優備各處親盡內外墓守護享祀之具, 爲久遠計.蹈軒以下累位之行治可傳者, 趼足千里, 謁文名家, 顯刻斧堂, 儀物之備, 則無墓無之.至傍親位, 亦爲各置祭田, 凡於先事, 旣皆豊美無憾.又推羨餘, 分助宗族貧窮者婚葬敎學之用, 傳以爲例, 蓋其終身勤儉, 旣致己業, 因贏宗物者, 亶爲此用也.晩年親占宅基, 爲子孫傳世之居, 人咸稱爲名基, 其旁通堪輿之術如此.條定家法, 每會衆子姪告之, 大要若曰: "正倫理, 篤恩義, 誠祭祀, 勤學問, 去驕奢, 守謹拙." 此又公保族宜家之略也.孟子曰: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公謂之垂可繼之統於金氏一門者, 非耶.今雖滄桑變遷之餘, 念先務本, 恂恂秩秩, 異於俗習者, 人稱松山之金, 斯可以知公矣.哲廟庚申九月十四日, 公之考終, 井邑郡山內面院德里案山兎只嶝亥坐原, 其藏也.前配延安李氏漢膺女祔公合封, 後配延安李氏度豊女, 公墓同原.男世烈, 秀偉明斷能克家, 前配出, 世勳, 有孝行, 世亨.女適驪興閔周鎬·忠州朴源恒後配出.長房男源錫進士, 好義慕賢, 益揚家聲, 奉錫·弘錫, 璣錫出系.次房男炯錫, 女文化柳炳喆·延日鄭喜源·海平尹桂善.三房系男璣錫, 女全州李鎬善·全州崔暻烈·蔚山金希洙·宜寧南廷玉.閔壻男泳旭, 朴婿男判柱·定柱.曾玄以下不盡書.嗚呼, 距公之沒, 爲八十年之久矣.旣未及狀行於當日, 則容貌氣像, 不可以想度, 言論事蹟, 亦無有詳說者.今於公之曾孫漢鏡玄孫求相五代孫成學之請余狀也, 正如身後之追寫眞像, 難得其髣髴, 矧以余之文拙乎.然爲同鄕後生, 習聞遺風, 而誼亦有不敢辭者.乃摭述《世譜》中所錄及諸後孫口傳, 纂次成文, 以備立言家裁擇之資云爾. 사(舍) 거리 단위로 일사는 30리이다.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군자는……한다 《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에 보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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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에게 보냄 경인년(1950) 與金周伯 庚寅 형이 권순명을 데리고 나에게 와서 그와 화해시키려는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先師)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권순명에게 "만약에 간옹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면 어찌 간옹선생이 되셨겠습니까?"라고 하니, 권순명이 내 무릎을 어루만지며 온화하게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온당치 않습니다. 이제 그만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우리들이 맹자가 공자를 존중하듯이 간옹을 존중한다면 무슨 온당치 않음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공자가 위나라에서 옹저(癰疽)를 주인 삼았다면48) 어떻게 공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자, 권순명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후에 다시 편지로 질문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 계속 음성의 오진영을 존경하며 믿었습니다. 근래에 친구 정교원(鄭喬源)이 '은행나무 밑 대나무 평상에서 말한 것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애매하게 대답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필 나한테 묻습니까?"라고 말하고, 바쁜 일이 있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나가버렸습니다. 그의 뜻을 살펴보건대, 선사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는 그의 말이 뚜렷하니, 이는 어찌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내가 저들과 30년 동안 절교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절교된 것은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고, 저들이 사람을 보내와 화해를 청한 것이 한 번이 아닌데 끝내 응하지 않은 것도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70이 되어 죽게 된 때에 갑자기 이 일을 잊고 스승을 무함한 자들과 함께 화해를 한다면 어찌 똑같이 스승을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이전의 견해를 통렬히 고쳐서 반기를 들어 오씨를 성토하고 선사의 묘소에 달려가 고하고서 동문의 여러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사과한다면 내가 장차 가서 만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비록 나를 찾아온다 하더라도 어찌 얻는 것이 있겠습니까?형은 이 일에 대하여 이전에 있었던 양쪽의 시비에 대하여 다소간 말한 것이 있는데, 지금 화해시키려 하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고쳤는가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일처리 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그 마음의 변화를 완전히 알기 전에는 절대로 가볍게 허락할 수 있는 이치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형은 이미 저 사람과 인친관계를 맺어 친밀함이 더욱 절실하니, 반드시 성심으로 그들을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선뜻 뉘우치고 깨달아 끝내 사문(師門)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한다면 나도 그들과 화해할 날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兄之欲携權就我, 與之和解者, 意亦善矣. 但此事非關吾身, 關乎先師. 吾嘗語權曰: "若有認意, 何以爲艮翁?" 權按吾膝而溫言曰: "如此則未安, 已之已之." 吾曰: "吾輩之尊艮翁, 若孟子之尊孔子, 有何未安? 孟子豈不曰: '孔子主癰疽, 何以爲孔子乎?'" 權無言. 後又書質, 亦無答, 而一向尊信陰吳. 近於鄭友喬源杏下竹床說有無之問, 模糊不對而曰"如此說, 何必問我?", 方傯忙當去即出. 觀其意, 其謂先師有認意者躍如, 則是豈不爲誣師乎?吾之與彼三十年不絕而自絕者, 只爲此關, 自彼遣人請和者非一, 而終不應者, 只爲此關. 今於七旬將死之日, 忽然打破此關, 與誣師者共和, 則豈不同爲誣師乎? 彼若痛改前見, 反旗討吳, 走告先師之墓, 輪謝同門諸人, 吾將往見, 亦無不可. 不然, 彼雖就我, 安所得乎?兄於此事, 從前之兩邊是非, 有多少云云之說, 今之欲和解者, 亦非謂不問其改革與否而爲之? 然處事之義, 未悉其心面變化之前, 萬無輕許之理矣. 雖然, 兄既與其人通家而親益切, 必將誠心喻之, 使之幡然悔悟, 不終爲師門罪人, 則吾之和解亦有其日, 惟是之望焉爾. 맹자가……삼았다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만장이 물었다. '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위나라에서는 옹저를 주인으로 섬겼고, 제나라에서는 내시인 척환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萬章問曰 : 或謂孔子於衛, 主癰疽, 於齊主侍人瘠環, 有諸乎? 孟子曰 : 否. 不然也. 好事者爲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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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에게 답함 신묘년(1951) 答金周伯 辛卯 어제 편지에서 권씨가 저를 보러온다고 하였다가, 잠시 후에 다시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따지는 말을 야기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만둔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가소롭습니다. 맹자께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49)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자께서도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잘못을 없애고 옳은 것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50) 하셨으니, 옳은 것과 잘못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더라도 시비를 가릴 수 있는데, 하물며 저에게 있는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부모나 스승과 관계된 일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제가 기꺼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51)이 되어서 학문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순명은 30년 동안 오진영을 존경하고 믿으면서 나를 배척하여 "오진영에게 스승을 무함한 죄를 억지로 더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화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종전에 저지른 큰 잘못이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어찌 입을 열어서 목구멍을 보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어제가 그르고 오늘이 맞다고 말하지는 않고, 반대로 시비를 서로 질문함에 밑바탕이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독을 남긴 채 봉투를 봉함하는 것처럼 가리고 막아 원한을 숨기고 타인을 벗하는52) 데에 귀착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찌 선비의 마음 씀씀이이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분별하면 분명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53)고 하였습니다. 지금 기왕에 오고자 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니, 피차간에 할 말을 다하고 논의를 다하여 의리를 끝까지 완벽하게 규명하고서 깨끗한 곳에 몸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기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아! 오늘날 학문을 익히는 것이 참으로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이상할 따름입니다. 어제 만났을 때 자리가 좀 멀었고, 말하기는 병중이라 더욱 어려워 자세하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편지를 보내오니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昨枉喻以權欲來見我, 而旋復曰"恐其惹出湖嶺是非說, 則沒滋味, 故罷之", 其言極可笑. 孟子不云乎? "無是非之心, 非人也." 朱子不云乎? "爲學只要去非求是." 是與非在人, 猶當是之非之, 况當於我者乎? 凡事猶然, 况事關父師者乎? 使我甘作非人而不欲爲學則已, 不然, 安得不討吳誣師之罪乎? 權則三十年來尊信吳也, 斥我謂"勒加吳以誣師之罪矣." 今欲來我而親和者, 何意? 如云覺其從前鑄錯之非也, 則何不分明說昨非今是, 若開口而見咽, 反慮是非相質, 底蘊畢露, 欲掩覆遮攔, 若留毒而封皮, 不憚爲匿怨友人之歸? 是豈士子之用心乎? 孔子曰: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 今既欲來則正好, 彼此極言竭論, 以究義理十分到頭, 立身於潔凈之地. 不此之爲, 坐失悔心已萌之機, 更待何時? 鳴呼! 今之講學, 固如是歟? 可異也已. 昨唔時, 坐次稍遠, 語音病中益艱, 未由詳達. 茲復書申, 伏惟諒察. 시비를……아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학문을……것이다 주희는 "학문하는 것은 다만 정성을 다하고 오래도록 견디면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굳이 딴 생각하여 앞뒤를 잴 필요가 없다〔爲學只要致誠耐久, 無有不得, 不須別生計較, 思前算後也〕"라고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0 〈답임숙공(答林叔恭)〉. 사람답지 않은 사람 앞에서 말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원망을……벗하는 공자는 "말을 잘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며 지나치게 공손하게 함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감추고서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 했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분별하지……않는다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제20장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면 능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면 분명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아서,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有不學 學之 不能不措也 有不問 問之 不知不措也 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也 有不行 行之 不篤不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剛〕"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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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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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극경병수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吳極卿秉壽 ○丁丑 근래에 나아가 배알했는데, 자취는 우연인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모색한 것입니다. 받들어 대면함에 있어 꾸밈없이 정성껏 맞아 주시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니 안색은 오랜 친구와 같고 마음은 전일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일생의 사귐을 정하고 세 잔의 술로 세 희생의 피를 대신하니, 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바람이 성취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궁핍한 인생에서 즐거운 일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년에 익우(益友)를 얻은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니, 복분(福分)이 적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흡족했는데 우러러 두터이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또 받았습니다. 비할 데 없는 한때의 거친 논설을 인자(仁者)가 정중히 말해주는 예로 간주해주시고, 심지어 '하늘이 우리 노형을 사랑하여 다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풀어준 것은 없는데 보답만 받는 것 같아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산에 있는 돌이 비록 거칠지라도 옥을 가는 데에는 유용하고54), 초나라 수도 영에서 보낸 편지가 비록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연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니55), 형 같은 사람은 취하여 미루어나가는 것56)을 잘하여 인을 실천하는데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아!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선비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편지로 교류한다고 명분을 삼고는 더러 자신의 학문을 믿고 잘난 체 하여 정성껏 접대하려 하지 않기도 하고, 더러 단점과 졸렬함을 감춘 채 물어서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추종하면서도 끝내 겉으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가까이 지내지만 속으로는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만큼 먼 것을 면하지 못하는 자들은 역시 도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저는 평소에 이런 무리들이 하는 짓을 부끄럽게 여기고 항상 옛사람 대장부의 심사(心事)를 사랑하여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는 사람마다 볼 수 있다'57)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삼가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우리 형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만사는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지니 모두 마음속에 담아둘 만한 것은 없고, 오직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58)이야말로 구경법(究竟法)59) 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늙었고 세상과는 어긋났습니다. 푸른 등불 아래 누런 책을 보면서 옛 철인이 남긴 단서를 찾고, 차가운 물과 가을의 밝은 달에서 이 마음이 철저히 밝은 것을 보아서 이른바 구경법이라는 것을 구하니, 우리 형과 함께 서로 권면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책은 다만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이치는 다만 궁구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니, 요컨대 마땅히 스스로 터득한 지취(志趣)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보내준 편지에서 말씀하신, 기쁨을 얻은 것도 많고 의심나는 것도 많다는 것이니, 생각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무릇 기쁨과 의심이 절반인 경우가 자득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됩니다. 모두 의심만 하고 즐거워할만한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의심일 뿐입니다. 모두 기쁘기만 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참된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의심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에 투영시켜서 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으로 기뻐하면서 자득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온 편지에서는 어찌 기뻐할 것과 의심나는 것을 한두 가지 언급하여 강론하면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으십니까? 이후에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頃者造拜, 跡若偶緣, 心則積營. 及其承接也, 則削邊之欵, 由中之辭, 面如舊而心惟一, 一言以定一生之交, 三杯以替三物之血, 願始遂而望不負矣. 自以爲竆生快事, 無過於此. 而晚得益友, 私幸, 福分不淺. 歸猶充然, 仰謝厚賜之不暇, 乃承先書. 將一時荒蕪無倫之說, 看作仁者鄭重贈言之例, 至有天惠我老兄, 更起精神之喻, 無施受報, 愧不敢當. 然他山之石雖麁, 而功於攻玉; 郢都之書雖誤, 而資於治燕, 若兄者可謂善取譬而巧爲仁也. 嗟呼! 人之相知, 貴相通心, 士子爲尢甚. 彼名爲文字之交, 而或恃學自高, 不肯欵接, 或護短藏拙, 恥於問學, 終身追逐, 而卒不免靣魯衛而心燕越者, 亦獨何心? 區區平生羞作此輩之為, 常愛古人大丈夫心事, 如青天白日, 人得見之之語, 竊願學之. 而今始遇於吾兄, 何幸何幸? 朱夫子不云乎? '世間萬事, 須叟變滅, 舉無足置胷中, 惟有讀書竆理, 爲究竟法,' 吾儕俱老矣, 且世與違矣. 青燈黃卷, 尋曩哲之遺緒; 寒水秋月, 見此心之照徹, 以求所謂究竟法者, 願與吾兄交勖焉. 雖然, 書不可以徒讀, 理不可以徒竆, 要當有自得之趣. 此則來書所謂得喜處多, 得疑處亦多者, 已思過半矣. 盖喜疑相半, 自得之機關, 皆疑而不知有可喜, 固是疑也. 皆喜而不知有可疑者, 亦未爲真喜. 若能將可疑者反映於可喜者而通之, 則是可謂真喜而爲自得也. 今於來書, 胡不以可喜可疑者一二示及, 而作講明相長之資也? 後勿復然是望. 다른……유용하고 《시경(詩經)》에서는 "학이 구고에서 울거든 소리가 들에 들리니라. 고기가 잠겨 깊은 못 속에 있고 혹은 물가에도 있도다. 즐거운 저 동산에 심어놓은 박달나무여, 그 아래 낙엽이 떨어지는구나. 타산의 돌은 숫돌이 될 수 있느니라.〔鶴鳴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蘀. 它山之石, 可以爲錯〕"라 했다. 《시경(詩經)》 〈소아·학명(小雅·鶴鳴)〉 초나라……되었으니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와전(訛傳)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 중국의 영(郢) 지방 사람으로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쓴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어둡자 옆 사람에게 촛불을 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편지에 '촛불을 들라'고 썼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는 기뻐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현자를 천거하여 쓰라는 말일 것이다." 하고는 곧 임금에게 아뢰어 그대로 실천하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 취하여……것 공자가 "무릇 인자(仁者)는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을 세우며,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하게 한다. 가까운 자신에게서 취하여 먼 곳의 남에게 미루어 간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푸른……있다 숨김없이 솔직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안동의 늙은 아전 권후중(權後重)이 상납색(上納色)으로 서울에 올라와 송시열을 만나고는 송시열의 거취(去就)에 대해 말하였다. 그 뒤에도 가끔 왕래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손수 "청천백일 인득이견지(靑天白日人得而見之)" 여덟 자를 대자(大字)로 써 주었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8 책을……것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을 수양함〔窮理修身〕'이라고 되어 있다. 구경법(究竟法)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로, 최고 경지의 원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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