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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 2수 感懷【二首】 남들은 모두 더위가 가길 원하나 人皆願暑退나는 흘러가는 세월이 아깝다네 而我惜流年안개가 홀연 눈 아래 생기고 霧忽生眸底서리는 왜 살쩍 가에 들어오나 霜何入鬢邊길은 막혔는데 갈 곳이 없으니 道窮無所往부절340)이 오면 길이 잠들어야지 符到且長眠슬픈 감회 생길까 도리어 두려워서 還恐悲懷發높이 노래하며 조연341)을 흉내내네 高歌學趙燕이목을 새롭게 하는 것들 어지럽고342) 紛紛新耳目옛날의 의상들은 헤져가구나 弊弊舊衣裳나조차 참인가 꿈인가 의심하나니 我且疑眞夢누가 성인과 미치광이 분별하겠나 疇能辨聖狂굴원의 관을 쓰고 물에 뛰어들지언정 屈冠寧赴水관녕의 모자343) 쓰고 귀향하지 않으려네 管帽不歸鄕하늘도 믿기 어려워 두렵나니 却恐天難信일양은 돌아올 기약이 없구나 無期復一陽 人皆願暑退, 而我惜流年.霧忽生眸底, 霜何入鬢邊.道窮無所往, 符到且長眠.還恐悲懷發, 高歌學趙燕.紛紛新耳目, 弊弊舊衣裳.我且疑眞夢, 疇能辨聖狂.屈冠寧赴水, 管帽不歸鄕.却恐天難信, 無期復一陽. 부절[符] 명부(冥符)를 말하는데 저승에서 보내온 부절로, 죽음을 이른다. 조연(趙燕) 전국시대 조나라와 연나라에 많았던 비분강개(悲憤慷慨)한 호걸들을 가리키는데 목숨도 가벼이 여겼다. 특히 전국 시대 말기에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을 죽이러 떠날 때, 축(筑)의 명인인 고점리(高漸離)의 반주에 맞추어 비장한 〈역수가(易水歌)〉를 부르고 작별했다는 고사가 유명하다.《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이목을……어지럽고 새로운 문물이 넘치는 것을 가리킨다. 관녕의 모자 '관녕(管寧)'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40년 가까이 지냈다. 위(魏)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曹丕)가 태중대부(太中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명제(明帝)인 조예(曹叡)가 광록훈(光祿勳)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청빈을 달게 여겨 항상 '검은 모자[皁帽]'만 착용하고 지냈다고 한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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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246) 소 어른 학규 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는데 소학규 어른이 시를 부쳐 사례를 해왔기에 보운하여 드리다 訪悅齋蘇丈【學奎】 不遇 蘇丈寄詩見謝 步韻却呈 우뚝하다 구산247)의 덕이여 巍巍臼山德태산 북두와 형제로구나 山斗與弟兄깨끗하다 구산의 절조여 皜皜臼山節일월과 서로 빛을 다투네 日月光相爭아 저 음하의 사람248)이여 噫彼陰下人마음씀이 어찌 그리 사나운가 宅心一何獰스승이 홀로 인가를 지시했다며249) 謂師獨敎認근거도 없이 지어내 이루었구나 白地撰出成은혜를 받은 지 사십년인데도 受恩四十載하루 아침에 이렇게 무함하니 一朝此陷傾태산 북두가 천 길이나 꺾이고 山斗摧千丈해와 달이 모두 밝음을 잃었도다 日月失雙明그 스승을 속인 죄 따져본다면 究厥誣師罪단연코 의경의 벌250)이 합당한데 端合劓與黥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주려고 俾開自新路공벌을 가장 가벼운 쪽으로 따라주었네 公罰從最輕그런데 눈도 깜짝하지 않고 曾不爲瞬目도리어 다시 큰소리를 쳤네 還復大色聲검사공 -다른 호는 열재(悅齋)- 같은 분이 있어 有若檢四公【悅齋一號】스승 문하의 간성이 되었다네 師門作干城거친 주먹 휘둘러 힘껏 양주를 막고251) 麤拳距楊力한 가닥 향 피워 정성껏 증공에 보답했네252) 一瓣報曾誠내가 문하를 찾아갔던 날은 我來訪門下공교롭게도 금마253)로 가신 때라 巧値金馬行어렵사리 호해의 길로 갔으나 間關湖海路헛되이 돌아오며 이름만 남겼네 虛歸但留名좋은 노래254)가 어디서 왔나 何來風肆好경거255)에 놀라 눈을 부볐다오 瓊琚刮眼驚옛날을 생각하니 곤옹과 매옹256)은 憶昔困梅翁주진257)처럼 집안끼리 통하는 정이 있었지 朱陳通家情그 이래로 사백년 邇來四百年십여세가 이미 바뀌었구나 十餘世已更함께 눈 속에 섰으니258) 얼마나 다행인가 何幸同立雪곤궁한 처지259)에 일생을 의탁했었지 歲寒託一生더구나 이번 무고를 가릴 때 눈물 흘리며 矧玆辨誣淚함께 현동 묘소260)에 술을 올렸음에랴 同滴玄阡觥알겠나니 한 마리 여윈 돼지261) -음인262)을 가리킨다.- 와는 懸知一羸豕【指陰人】육룡 -육양 선생263)을 가리킨다.- 이 병존하기 어려운 형세구나 六龍【指六陽先生】勢難幷다만 일편단심으로 只將一片心굳고 곧은 절개 단단히 지키리니 斷斷守固貞만고의 계화산은 萬古繼華山우뚝 하늘까지 솟아있네 屹屹聳太淸 巍巍臼山德, 山斗與弟兄.皜皜臼山節, 日月光相爭.噫彼陰下人, 宅心一何獰.謂師獨敎認, 白地撰出成.受恩四十載, 一朝此陷傾.山斗摧千丈, 日月失雙明.究厥誣師罪, 端合劓與黥.俾開自新路, 公罰從最輕.曾不爲瞬目, 還復大色聲.有若檢四公【悅齋一號】, 師門作干城.麤奉距楊力, 一瓣報曾誠.我來訪門下, 巧値金馬行.間關湖海路, 虛歸但留名.何來風肆好, 瓊琚刮眼驚.憶昔困梅翁, 朱陳通家情.邇來四百年, 十餘世己更.何幸同立雪, 歲寒託一生.矧玆辨誣淚, 同滴玄阡觥.懸知一羸豕【指陰人】, 六龍【指六陽先生】勢難幷.只將一片心, 斷斷守固貞.萬古繼華山, 屹屹聳太淸.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호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구산(臼山) 전우(田愚)의 호이다. 음하의 사람[陰下人] 음성(陰城)에 사는 오진영(吳震泳)을 가리킨다. 스승이 …… 지시했다며 《후창집(後滄集)》 권22 〈선사의 묘에 고하는 글[告先師墓文]〉에 "(오진영이)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문집출간에 대해) 인가할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상에 앉아 계시다가 진영에게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는 그대가 모름지기 잘 헤아려서 하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오호라! 사람을 속이는 죄도 나쁜데 더구나 스승을 속이는 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公然告諸人曰: '先師曾有認意.' …… 又曰: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 「世不可知, 文稿須自料量爲之.」' 嗚呼! 誣人罪也, 而况乎誣師乎. 誣師, 大罪也.]"라는 내용이 있다. 의경의 벌[劓與黥] '의(劓)'는 코를 베는 형벌이고, '경(黥)'은 얼굴을 자자(刺字)하는 형벌이다. 거친 …… 막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에 힘쓴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분이 아니며, 맹자가 어찌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한 …… 보답했네 스승을 연모하여 보답했다는 뜻이다. '일판(一瓣)'은 한 가닥의 향이다. 진사도(陳師道)의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라는 시에 "지난날 한 가닥 판향을 올리었거니, 공경히 증남풍을 위한 것이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는 구절이 있다. '증남풍(曾南豐)'은 증공(曾鞏)으로 진사도의 스승이었는데, 그가 별세하였으므로 와서 향을 사른 것이다. 증공은 간재 전우를 비유한 것이다. 금마(金馬) 전라북도 익산(益山)시 금마(金馬)면을 말한다. 좋은 노래 상대가 보내준 시를 말한다. 경거((瓊琚) 보배로운 구슬로, 상대방이 보내준 훌륭한 시(詩)를 뜻한다. 《시경》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곤옹과 매옹[困梅翁] 소학규와 김택술의 선조 중에 각기 '곤(困)'자와 '매(梅)'가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나 자세치 않다. 참고로 소학규의 선조 중에 소세량(蘇世良, 1476~1528)의 호가 곤암(困菴)이고, 김택술의 선조 중에 김종(金宗 ?~?)의 호가 '매죽당(梅竹堂)'이다. 주진(朱陳) 당(唐)나라 때 서주(徐州) 고풍현(古灃縣)에 있던 주진촌(朱陳村)을 이르는데, 이곳은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집안만이 살면서 대대로 서로 혼인하여 화목하고 순박하게 살았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주진촌(朱陳村)〉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는데, 이후로 순박하고 인심 좋은 고장을 가리키게 되었고, 또 혼인관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함께 …… 섰으니 원문의 '입설(立雪)'은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성을 뜻한다. 《송사(宋史)》 〈도학열전(道學列傳) 양시(楊時)〉에 "어느 날 스승인 정이를 뵈러 갔는데, 정이가 마침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양시가 동문인 유초와 함께 시립하고 문밖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이가 이윽고 정신을 차려 보니, 문밖엔 눈이 한 자쯤 내려 있었다.[一日見頤, 頤偶瞑坐. 時與游酢侍立不去, 頤旣覺, 則門外雪深一尺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곤궁한 처지 원문의 '세한(歲寒)'으로,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하였다. 현동 묘소[玄阡]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묘소가 있는 익산의 현동(玄洞)을 말한다. 여윈 돼지[羸豕] 간악한 소인을 뜻한다. 《주역》 〈구괘(姤卦) 초육(初六)〉에 "파리한 돼지가 날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羸豕孚蹢躅]"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음인(陰人)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을 말한다. 육양 선생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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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의 여흥 2수 臺巖旅興 【二首】 길 떠나 대암에 누웠더니 별천지라 旅臥臺巖別洞天근래 맑은 복에 바람 안개 만끽하네 邇來淸福飽風烟아침구름 항상 가까워 창 옆에서 일고 朝雲常近牕邊起밤달은 평평히 보여 베개맡에 걸렸네 夜月平看枕上懸원래 세속 밖에 초월한 신령한 경계요 靈境元超塵俗外더구나 꽃 지기 전 좋은 때를 만났네 良辰况値落花前백가들 떠드는 소리가 지금 저러하니 百家喙喙今如許빈 산에서 시악을 듣는 게 가장 좋네 最可空山聞誦絃첩첩한 푸른 산에 굽이굽이 강줄기 疊疊蒼山曲曲江호남의 절경이라 비할 바가 없다오 湖南絶勝也無雙파란 하늘엔 구름 사이에서 학이 높이 울고 碧霄高唳雲間鶴고요한 밤엔 달 아래에서 삽살개 한가히 자네 靜夜閒眠月下尨긴 세월 지난 꽃 산가지가 석불에 남았고 閱劫花籌留石佛속세 벗어난 선비들은 서재307)에 모였네 超塵冠佩會芸牕연하의 고질308)은 원래 병이 아니거니 烟霞痼癖元非病술단지 비워 취하는 걸 어찌 마다하랴 取醉何辭倒酒缸 旅臥臺巖別洞天, 邇來淸福飽風烟.朝雲常近牕邊起, 夜月平看枕上懸.靈境元超塵俗外, 良辰况値落花前.百家喙喙今如許, 最可空山聞誦絃.疊疊蒼山曲曲江, 湖南絶勝也無雙.碧霄高唳雲間鶴, 靜夜間眠月下尨.閱劫花籌留石佛, 超塵冠佩會芸牕.烟霞痼癖元非病, 取醉何辭倒酒缸. 서재 원문의 '운창(芸牕)'으로, 운(芸)은 다년생 풀인데, 좀을 물리치는 향기를 지녔으므로 서재나 장서실을 운각(芸閣) 또는 운창이라고 한다. 연하의 고질[烟霞痼癖] 연하(烟霞)는 연기와 노을로 산수의 경치인데, 산수를 몹시 좋아하여 마치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린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당(唐)나라 전유암(田遊巖)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는데, 고종(高宗)이 사람을 보내 산속 생활이 어떤지를 물어보니, "신은 물과 바위에 대한 병이 이미 고황에 들고 안개 노을에 고질병이 들었습니다.[臣泉石膏肓, 煙霞痼疾.]"라고 대답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舊唐書 卷192 田游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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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족숙과 신헌이 내방했으나 만나지 못해 시로 추후에 사례하다 松坡族叔與愼軒來訪 未遇 以詩追謝 백 겹으로 주름진 영산은 오솔길도 긴데 百襞瀛山細徑長마당의 싹을 먹은 흰 망아지 매어두지 못했네310) 白駒未縶食苗場봄옷 입고 노나라 기수에서 목욕할 틈 없었고311) 春衣不暇魯沂浴멋진 일로 술 마시던 난정의 풍류도 어긋났네312) 勝事差過蘭水觴백년동안 화수 모임313)에서 조상 더럽히지 않았고 花樹百年無忝祖지초와 난초처럼 한 집에서 양기 부지 맹세했네 芝蘭一室誓扶陽연홍314)처럼 지척에서도 서로 기다리지 못했으니 燕鴻尺地不相待진실로 이내 삶이 바삐 오고감을 깨닫는다오 良覺吾生來去忙 百襞瀛山細徑長, 白駒未縶食苖場.春衣不暇魯沂浴, 勝事差過蘭水觴.花樹百年無忝祖, 芝蘭一室誓扶陽.燕鴻尺地不相待, 良覺吾生來去忙. 마당의 …… 못했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만나지 못해서 붙잡아 둘 수 없었던 아쉬움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 〈백구(白駒)〉에 "깨끗한 저 흰 망아지가 마당에 난 싹을 먹었다고 핑계 대고, 발을 묶고 고삐를 매어 오늘 아침을 길게 늘여서, 귀한 이 손님을 더 놀다 가시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봄옷 …… 없었고 서로 만나지 못해 함께 초연히 산수에서 노닐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기우(沂雩)'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멋진 …… 어긋낫네 풍류를 함께 즐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삼월 삼짇날에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가 난정에서 모여 수계를 행한 뒤에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를 즐긴 계회가 있었는데,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보인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화수 모임 원문의 '화수(花樹)'는 당(唐)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에서 유래하여, 친족들이 화목한 모임을 말한다. 잠삼(岑參)은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서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하였다. 연홍(燕鴻) 제비와 기러기인데, 제비는 여름 철새이고 기러기는 겨울 철새여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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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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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사년(1905) 10월 上艮齋先生 乙巳 十月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1)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2) 치발(薙髮)3)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양복은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의 〈정시(鄭詩)ㆍ치의(緇衣)〉4) 편을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緇衣)5)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6)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7)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8)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검은 양복을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과 병칭하셨으니, 검은 양복과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 없다9)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〇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는 것과 머리를 자르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 竊觀今日之勢, 履霜之氷已堅矣, 色斯之擧無及矣. 薙髮將在於後, 而黑裝卽當於前. 竊謂此二者, 若有等殺於凡夫之眼, 而實無輕重於春秋之義也. 或見人引鄭詩之緇衣謂無害於義. 若以古人之事言之, 則緇衣尙矣, 不須說, 至於斷髪, 如成湯之禱雨, 泰伯之讓國, 亦或出於不得巳之地. 今也則所以黑裝者, 不在於我之欲從古人, 而出於彼之脅從條約, 烏可援此而爲說哉? 今有兩言可以斷之者, 孔子以左袵幷稱於被髪, 則黑裝薙髮之無輕重, 已不待辨說而明矣. 孟子謂五十步無異於百步, 則雖圓袂大帶而只著一箇黑襦, 卽不免從夷亦可知矣.〇 先生答書曰: "黑裝薙髮, 其爲夷制, 一也. 或者之分輕重非是, 而左右之不以爲然者是矣. 頃有〈從衆時中辨〉一篇, 正闢破此說, 今未暇寫往." 서리를……단단해졌고 《주역(周易)》 〈곡괘ㆍ초육(坤卦ㆍ初六)〉에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고 하였다. 《정전(程傳)》에서는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니, 지극히 미약하지만 성인은 음이 처음 생겨날 때, 음이 장차 자라날 것을 경계하였다. 음이 처음 응결하여 서리가 되는데, 서리를 밟으면 음이 점점 성하여 단단한 얼음에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소인이 처음에는 비록 매우 미약하지만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니, 자라나면 성함에 이르는 것과 같다〔陰始生於下, 至微也, 聖人於陰之始生, 以其將長, 則爲之戒. 陰之始凝而爲霜, 履霜則當知陰漸盛而至堅冰矣. 猶小人始雖甚微, 不可使長, 長則至於盛也〕"라 했다. 즉 이 말은 음이 왕성한 시기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 기미가 나타났다는 뜻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매우 위급함을 나타낸다. 새가……되어버렸습니다 《논어(論語)》 〈향당(鄕黨)〉,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고 하였다. 이는 사람이 어떤 기미를 보고서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치발(薙髮) 변발(辮髮)ㆍ편발(編髮)ㆍ승발(繩髮)ㆍ삭두(索頭)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앞머리 부분은 깎고 후두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묶는 것을 말한다. 여진족과 몽고족이 이러한 형태를 취하였고, 한족은 속발(束髮)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곳에서 치발은 일본의 압제 하에 발령된 단발령을 의미한다. 정시(鄭詩)ㆍ치의(緇衣) 치의(緇衣)는 검은 옷이라는 뜻이다. 모시(毛詩)에서는 경사(卿士)들이 입조할 때 입는 정복(正服)이라고 하였다. 이 시는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첫 번째 시로 검은 옷을 입은 현사(賢士)를 예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緇衣)〉 시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巷伯)〉 시처럼 하면, 벼슬살이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조심할 줄 알게 될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치의(緇衣) 단발령을 시행하기 전에 조선 조정에서는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을 입을 것을 권고하였다. 때문에 앞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옷 복장은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서 치의는 서양의 검은색 양복을 의미한다. 오랑캐의 복장이라는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발령은 1884년에 내려졌다. 그러나 1896년 2월에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1897년에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에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단발과 편복은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와 일본의 압박에 대하여 간재는 〈작경세문(作警世文)〉에서 단발령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단발령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무식하여 영화에 욕심이 나서 그렇게 한 사람도 있고, 절조가 없어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배고픔에 몰려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서 머리를 깎으면 그 사람은 곧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성탕(成湯)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殷(商)왕조의 개국 군주이다. 일반적으로 탕왕(湯王)으로 불리지만, 무탕(武湯)ㆍ은탕(殷湯)ㆍ천을(天乙)ㆍ성탕(成湯)ㆍ성당(成唐)으로 불리기도 하며, 갑골문에는 성(成)ㆍ당(唐)ㆍ태을(太乙)ㆍ고조을(高祖乙)로 기재되어 있다. 탕임금이 즉위한 후 7년 뒤에 가뭄을 당해 상림(桑林)의 들에서 하늘에 기도한 것을 뜻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권1 〈은왕성탕(殷王成湯)〉에서는 "7년 동안 큰 가뭄이 드니, 태사가 점을 쳐 '사람으로 제물을 바치고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탕 임금은 '내가 기우제를 지냄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으로 제물을 삼는다면 내가 스스로 감당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욕재계하고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흰 띠풀로 몸을 묶어 자신을 희생으로 삼아, 상림의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며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사가 절도를 잃었습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었습니까. 궁궐이 너무 컸습니까. 여인의 청탁이 성행했습니까. 뇌물이 횡행했습니까. 참소하는 자가 많았습니까.'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 수천 리를 적셨다.〔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者民也. 若必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 剪爪斷髮, 身嬰白茅, 以身爲犧牲,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라고 하였다. 태백(泰伯)이 나라를 양보한 일 주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이다.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다. 《사기(史記)》 권31〈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고공에게는 장자가 있었으니 태백이라 하고, 둘째가 있었으니 우중이라 한다. 태강이 막내 계력을 낳았고, 계력은 태임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현명한 부인이었으며, 태임은 창을 낳았는데, 성스러운 조짐이 보였다. 고공은 '나의 대에 흥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창에게 있을 것이다.'라 했다. 그러나 장자인 태백과 차자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 창에게 전수하려는 뜻임을 알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형만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여 계력에게 지위를 양보했다〔古公有長子曰太伯, 次曰虞仲. 太姜生少子季歷, 季歷娶太任, 皆賢婦人, 生昌, 有聖瑞. 古公曰: "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 長子太伯·虞仲知古公欲立季歷以傳昌, 乃二人亡如荊蠻, 文身斷髮, 以讓季歷〕"라 하였다. 맹자가……없다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고 패주하되 혹은 백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며 혹은 오십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고서 자신은 오십 보를 도망갔다 하여 백 보를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 어떻습니까?〔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 笑百步, 則何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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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병오년(1906) 上艮齋先生 丙午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선생은 장자 응만(應萬)의 초상 때 (응만이) 이미 관례(冠禮)를 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면서도 상복에 있어서는 참최복(斬衰服)10)을 입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른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단지 본래의 상복 제도에 따라 상복을 착용할 뿐이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강복(降服)11)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 것은 그가 장차 전중(傳重)12)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응만은 바로 장차 전중하게 될 아들이었고 이미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의당 참최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쩌면 혹시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에 대해 그 후사를 이어주는 일이 비록 옛날의 예법에는 있지만 옛날과 지금은 시의(時宜)가 달라서 아직 장가를 들지 않은 사람에 대해 후사를 이어주는 것을 형편상 할 수 없고 후사를 이어줄 수 없다면 전중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입니까?〇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장자가 죽었을 때 (장자가) 이미 관례를 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마땅히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기년복(朞年服)만 입었으니 의심할 만하다. 또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은 자에 대해 후사를 이어주는 것이나 후사를 이어주지 않는 것은 둘 모두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지만, 정현(鄭玄)의 설명이 진호(陳澔)의 주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정현의 설명에 따라서 후사를 세우지 않더라도 상복에 있어서는 마땅히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 嘗聞全齋先生於長子應萬之喪, 旣以已冠不殤, 而服則不斬. 竊以爲所謂不殤者, 只依本服而服之, 不以年幼而降服也. 所以爲長子服斬者, 以其將所傳重也. 應萬乃將所傳重之子, 旣爲之不殤則宜其服斬, 而今却不然, 何也? 豈或以不殤者繼後, 雖有古禮, 然古今異宜, 繼後於未娶之人, 勢不得行, 而未得繼後, 則無由傳重故歟?〇 先生答書曰: "長子死, 以已冠而不殤, 則當得斬, 而今只服朞可疑. 不殤者繼後不繼後有兩疑, 而鄭氏說似勝於陳氏註矣. 雖依鄭說而不立後, 服則當斬矣." 참최복(斬衰服) 한복에서 제례복의 일종으로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상중일 때 입는 옷이다. 원칙적으로 참최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입었고,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는 자최복을 따로 입었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제례복 자체를 참최복 혹은 참최한다라고 표현했다. 상을 치르는 것이 몇 년이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는데, 3년복인 참최와 1년복인 기년(朞年), 9개월복인 대공(大功), 5개월복인 소공(小功)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麻)로 분리됐다. 부모 사망 시 자식은 모두 3년복인 참최를 입게 되어 있었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도 상복을 입어 장자상(長子喪)에는 3년, 둘째아들(次子)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다. 아버지와 장자가 죽었을 때 참최복을 입는 것은 집안의 가계를 계승해가는 혈통의 수직관계, 그리고 그 존엄성을 대변한다. 강복(降服) '강복'은 상(喪)의 수위를 본래의 등급보다 한 등급 낮추는 일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자식은 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러야 하지만, 다른 집의 양자로 간 경우라면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르지 않고, 한 등급 낮춰서 1년만 치르게 된다. 이것은 상(喪)의 기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복(喪服) 및 상(喪)을 치르며 부수적으로 갖추게 되는 기물(器物)들에도 적용된다. 전중(傳重) 종법 제도에 따르면 적장자만이 종묘의 제사를 주관할 권한을 가지고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 종묘 주인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전해주는 것을 '전중(傳重)', 전해 받는 것을 '승중(承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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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기유년(1909) 上艮齋先生 己酉 삼가 제가 생각해 보니, 공자께서 바다에 떠 가고 싶다고 하신 것이 비록 한때의 탄식하시는 말씀이었지만, 당시의 혼란이 만약 오늘과 같았다면 그 말씀을 반드시 실천했을 것입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는《논어》에 기록된 노(魯)나라 태사(太師) 이하의 사람들이 하수(河水)를 넘고 바다를 건너 난리를 피한 것을 성인(聖人)의 잠깐 사이의 교화라고 하였는데,20) (이렇게 이해하면) 공자의 뜻은 더욱 매우 분명합니다. 속된 선비들이 (간재) 선생이 바다를 건너 계화도로 온 것을 함부로 헐뜯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대한(大韓)의 역법(曆法)이 폐기되고 나서 일본의 역법이 이미 유행하니 애통할 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새 역법이 비록 일본 사람에게서 나왔을지라도 이미 대한의 연호(年號)를 기재하고 있으니 그 달력을 보고 날짜를 아는 것이 의리(義理)에 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의 연호를 기재한 것이 곧 소금 배를 숨기려고 그 위에 건어물을 올려두는 계책21)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대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결코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의 얕은 견해로는 단지 천세력(千歲曆)이나 백중력(百中曆) 등의 달력을 보고서 사계절의 기후(氣候)를 대략 기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의한 내용이 맞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와 조정문(曹靖聞) 두 사람의 고사를 지금에 수용하여 쓸 수 있다.【조일주(曹一周)는 우암(尤庵)의 문인인데 죽을 때까지 오랑캐 역법을 보지 않았다.】"○ 동계(桐溪)의 시에 "숭정 연호가 여기에서 멈추었으니, 명년에는 어떻게 다른 역서를 펼쳐 보겠는가. 이제부터 나 산옹은 더욱 일을 줄이고, 다만 꽃잎이나 보면서 세월 가는 것을 알리라[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尢省事 只看花葉驗時移]"고 하였다.○ 진함(陳咸)은 하무포선(何武飽宣)이 죽은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갔는데 왕망(王莽)이 제위(帝位)를 찬탈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라 달력을 쓰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진함이 말하였다. "나의 선인(先人)이 어찌 왕씨의 달력을 알 수 있겠는가?"지난겨울에 일과를 정하여 《역경(易經)》을 읽었는데, 소장(消長)의 이치와 상수(象數)의 변화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한 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저는 오늘날 《역경》에서 수용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곤괘(坤卦)의 "천지가 폐색(閉塞)하면 현인이 은둔한다"와 대과괘(大過卦)의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숨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및 곤괘(困卦)의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룬다"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혹여라도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서 함부로 큰일을 하려고 하고 남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마음에 원망과 후회를 품으며, 대절(大節)에 임하여 구차하게 면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늘날 《역경》을 쓰는 방도가 아닙니다. 저 신학문(新學問)을 주장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정자(程子)의 '수시변역(隨時變易)'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선왕(先王)의 전례(典禮)가 모두 변한[變易] 뒤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자가 말한 변역(變易)이라고 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손익(損益)22)과 우직(禹稷)의 출처(出處)23) 같은 것뿐이고, 천서(天叙)의 강상(綱常)과 인이(人彛)의 예의(禮義)를 말한 것이 아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감히 선현(先賢)의 학설을 인용하여 오랑캐로써 중화를 바꾸는 도구로 삼아 기탄없이 천하 사람들을 이끌어 《역경》에 재앙을 끼치는 것은 반드시 저 신학일 것입니다. 삼가 저는 이 때문에 그지없이 통탄(痛歎)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정자는 '수시변역'하여 도를 따른다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수시변역'하여 욕심을 따르니, 이 말은 내가 일찍이 운창(芸牕) 박장(朴丈 박성양(朴性陽))에게 들은 것이다." 竊念孔聖之浮海, 雖一時歎傷之詞, 然當時之亂若如今日, 則其踐言也必矣. 張子以《論語》所記魯太師以下逾河蹈海以去亂, 爲聖人俄頃之化, 則孔子之志, 又較然明矣. 俗士之妄詆先生浮海, 眞不知類者也韓曆旣廢, 日曆已行, 痛矣何言? 或者謂新曆之法, 雖出自日人, 旣載大韓年號, 則觀知旬朔, 無害於義, 殊不知其載韓年號者, 乃鹽船加鯗之計也. 苟有韓人心者, 決不可看. 淺見只看千歲百中等曆略記四時氣候可也.○ 先生答書曰: "所論得之. 鄭桐溪․曹靖聞二公故事, 今可受用.【曹公一周, 尤門人, 終身不看胡曆.】"○ 桐溪詩"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尤省事, 只看花葉驗時移."○ 陳咸見何武飽宣死, 旣乞骸骨去, 莽篡位猶用漢臘, 人問其故, 咸曰: "我先人豈知王氏臘乎?"昨冬課讀在於易經, 而於消長之理․象數之變, 茫然無得. 然竊謂今日之所當受用於易者, 如坤之'天地閉賢人隱', 大過之'獨立不懼遯世無憫', 困之'致命遂志'是也. 如或不度時勢, 而妄欲有爲, 人莫與我, 而心存怨悔, 臨大節而思欲苟免, 則非今日用易之道也. 彼主張新學者, 輒引程子'隨時變易'之語, 謂先王典禮一切變易而後, 國可以致治, 民可以致安, 殊不知程子所謂變易者, 如三代之損益, 禹稷之出處而已, 非謂天叙之綱常․人彛之禮義也. 彼敢援引先賢之說, 爲以夷易華之具, 而無所忌憚, 率天下之人而禍易經者, 其必新學也. 竊爲之痛歎不已.○ 先生答書曰: "程子隨時變易以從道也, 今人隨時變易以從欲, 此語余嘗聞於芸牕朴丈矣." 노(魯)나라……하였는데 《논어(論語)》 〈미자(微子)〉에서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고 갔으며, 삼반료는 채나라고 갔고, 사반결은 진나라로 갔으며, 북을 치는 방숙은 하내로 갔고, 소고를 흔드는 무는 한중으로 들어갔으며, 소사양과 경쇠를 치는 양은 해도로 들어갔다.〔大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小師陽, 擊磬襄入於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금……계책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4〉에서는 육자정(陸子靜)의 학문은 논하면서 "소금을 파는 자가 소금 위에 여러 마리의 건어물을 올려놓아 소금을 가리고서 관문이나 나루터를 지나치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 소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此正如販鹽者, 上面須得數片鯗魚遮蓋, 方過得關津, 不被人捉了耳〕"고 평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삼대(三代)의 손익(損益)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의 예를 인습(因襲)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정사를 함에 전 왕조의 풍습이나 제도에 너무 지나친 것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더 보충하는 것으로, 예컨대 하나라는 충을 숭상하여 너무 순박하므로 은나라에서는 질을 숭상하여 이를 보충하였고, 은나라는 질을 숭상하여 문식이 부족하므로 주나라에서는 문을 숭상하여 보충한 것과 같은 따위를 말한다. 우직(禹稷) 禹는 순임금 치세에서 황하의 治水를 맡아 홍수 조절에 성공했다. 후에 순임금의 선양을 받아 천자가 되고 夏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稷은 舜 임금 때 농사를 맡은 后稷으로, 周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사기(史記)》 권2 〈하본기(夏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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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 甲寅 제가 근래에 한희녕(韓希甯 한유(韓愉))의 유문(遺文)을 읽고 그의 지취(旨趣)와 언론(言論)이 호방(豪放)하고 굉박(宏博)하여 족히 들을 만한 말임을 보았습니다. 그의 리기(理氣)와 심성(心性)에 관한 학설의 경우도 본래 설명한 것이 대체로 좋았지만, 심과 리를 하나로 보는 무리29)의 학설을 물리친 점은 얻어 보기 가장 쉽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그가 선생께서 주장한 '심은 비천하고 성은 존귀하다[心卑性尊]30)'는 학설을 의심한 것은 어쩌면 그리도 사색이 정밀하지 못한 것입니까? 대개 심성 두 글자를 한덩어리로 섞어서 말하면 애초에 존귀함과 비천함 두 가지로 나눌 수 없으니 이를테면 성인의 마음은 혼연(渾然)히 천리(天理)라는 것31)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심(心)과 성(性) 둘의 개념과 외연을 가지고 말하면, 자사(子思)는 존덕성(尊德性)의 가르침을 제시하였고, 정자(程子)는 성인은 하늘에 근본을 둔다는 말씀32)을 하였는데, 높여짐을 받아 근본이 되는 본체는 성(性)이고, 높이고 근본을 두는 주체는 어찌 심(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심이 비천하고 성이 존귀하다는 설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심과 리를 하나로 보는 무리를 물리친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도리어 이 '심은 비천하고 성은 존귀하다'는 주장을 의심하였으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주자대전》 〈답정자상서(答鄭子上書)〉의 의목(疑目)33)은 지금 이미 결론이 난 것입니까? 대개 정자상(鄭子上)의 문목(問目)의 요지(要旨)로 살펴보면 당시 유행하였던 학설에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만, 주자가 답한 편지의 문세(文勢)로 살펴보면 본체에 관한 학설은 더욱 바꿀 수 없습니다. 일전에 가르쳐주신 말씀에서 정자상의 문목은 태극(太極)의 동정(動靜)만을 가리키지 않고 음양(陰陽)도 함께 거론한 것이므로 주자가 그것에 대하여 답할 때 리기의 측면에서 리가 기의 근저(根柢)가 된다고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등등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이 가장 분명하고 적절하여 이 안건을 판정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시 주자가 "인(仁)은 바로 움직이는 것이고, 의(義)는 바로 고요한 것이니 이것이 또 기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仁便是動 義便是靜 此又何關於氣]"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태극의 동정에 관한 설인 듯합니다. 이 세 구절이 가장 처리하기 어려우니 삼가 분석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선생께서 다음과 같이 답장하셨다. "한유(韓愉) 문집의 설들에 대해 그대가 논한 것은 모두 맞는 말이다. 정자상의 문답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견해가 없다." 小子近得韓希甯遺文讀之, 見其風旨言論豪爽宏博, 言足聽聞. 至於理氣心性之說, 亦自說得大體好了. 其闢心理一派, 最不易得. 但其疑先生心卑性尊之說, 何其思之不精也? 蓋'心性'二字渾淪說, 則初不可以尊卑二之, 如聖人之心渾然天理是也. 若以二者之名位界分言之, 子思有尊德性之訓, 程子有聖人本天之語, 所尊所本者是性也, 尊之本之者, 豈非心乎? 則心卑性尊之說, 不其然乎? 以若闢心理之眼目, 乃有此疑, 是不可曉也.《大全》〈答鄭子上書〉疑目, 今已斷案否? 蓋從子上問目主意上看來, 則流行之說不爲無理, 從朱子答書文勢上看來, 則本體之說又不可易. 日前下敎子上問目, 不單指太極動靜, 而兼擧陰陽. 故朱子答之, 不容不就理氣上說出理爲氣之根柢云云, 最爲明切可斷此案. 而其下又曰: "仁便是動, 義便是靜," 此又何關於氣? 此則似是太極動靜之說也. 蓋此三句, 最難區處, 伏俟剖示.○ 先生答書曰: "所論韓集諸說皆得之, 子上問答尙未有定見." 심과 리를 하나로 보는 무리 心과 理를 하나로 본다는 것은 바로 心卽理를 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송 대의 육구연과 명 대의 왕양명을 대표적인 心學者라고 하지만, 심학의 근원은 맹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성리학의 두 줄기인 리학과 심학을 이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리학자들은 오로지 性卽理만을 긍정할 뿐 心卽理는 부정한 반면, 심학자들은 性卽理와 心卽理 그리고 性卽心을 동시에 긍정한다는 것이다. 단지 심학자들은 心의 자율성을 크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性보다는 心을 보편적으로 사용할 뿐이다. 심은 비천하고 성은 존귀하다 간재의 心性論의 핵심은 '心本性'ㆍ'心是氣'ㆍ'性師心弟'ㆍ'性尊心卑'ㆍ'明德心說'로 종합할 수 있다. 간재가 비록 주자와 달리 明德을 性으로 규정하지 않고 心으로 규정하였지만, 간재철학에서 오로지 性만이 형이상의 至善한 존재이고, 心은 형이하의 범주에 속한 氣이다. 따라서 性師心弟 혹은 性尊心卑로 心과 性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卑'를 결코 절대적인 의미로서의 낮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간재에 의하면, 性尊心卑에서 卑는 性의 尊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卑일 뿐이다. 다른 氣에 비하여 心은 尊의 성격의 가진 존재이다. 성인의……것 《논어집주(論語集註)》 〈술이(述而)〉15장의 집주(集註)에 나오는 말이다. 정자(程子)는……말씀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1에 "성인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석씨는 마음에 근본을 둔다.〔聖人本天 釋氏本心〕"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의목(疑目) 의목은 질문하기 위해 의심나는 부분들을 조항별로 나열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1191년 주자가 62세 때 정자상에게 답한 편지를 가리킨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6 〈답정자상(答鄭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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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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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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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려 정세영(鄭世永)의 편지를 논함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論鄭世永書 甲寅 정세영의 편지에 부표(付標)34)한 부분은 가르쳐주신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조목들에 감히 의거하여 그대로 대충 베껴 쓴 데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감히 진본(眞本)의 뜻을 잃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저는 매번 《중용》 서문을 읽을 때마다 높은 재주와 참된 공부를 바탕으로 오묘한 비결을 익히 들었을 정자(程子)의 문인들로서도 그 스승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사상에 빠진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선생 평생의 정묘(精妙)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실컷 배웠을 터인데도 간혹 행실을 닦으며 궤장(几杖)을 받드는 날에 감히 다른 주장을 펴는 자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에 정자 문인들은 족히 이상하게 여길 만하지 않고 지금의 제자들이 그보다 더욱 이상하게 여겨질 만함을 알았습니다. 저는 항상 동문(同門)들에게 "우리들이 존양성찰(存養省察)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공부는 본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정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성(心性)을 담론하는 본원(本源)의 정미(精微)한 곳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사문(師門)의 학설을 따른다면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 힘들게 억지로 스스로 다른 이론을 세워서 무한한 번뇌를 생기게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율곡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은 "다행히도 주자 뒤에 태어나서, 학문이 거의 잘못되지 않게 되었다."35)고 하셨는데, 저는 감히 이 말을 이어서 "다행히도 간옹(艮翁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나와 성리설(性理說)이 거의 잘못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정세영의 편지에서는 정명도(程明道)가 말한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生之謂性]'36)는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37)으로 여겼는데 선생께서 수십 년간 연구한 본연지성(本然之性)38)의 정론(定論)과 상반됩니다. 생각건대, 그가 정밀히 연구하고 힘써 사색하여 필시 자득한 실제가 있어서 의문을 질정하고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일부러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만들어 선생과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친 사유와 얕은 견해를 가진 저와 같은 경우는 성리(性理)에 대해 함께 논하기에 부족합니다만, 선생께서 평소 논의하신 대강의 종지는 거칠게나마 이해하였습니다. 이제 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설들 가운데 그 본뜻에 어긋나는 것 및 그 자신의 말 가운데 타당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아래에 조목조목 나열해보겠습니다.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정자(程子)가 "성(性) 자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중용집략(中庸輯略)》을 살펴보면, 이것은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말한 것으로,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이천이 말한 '생지위성(生之謂性)'이 기질지성으로 말한 것이고 명도가 말한 '생지위성'이 본연지성으로 말한 것이라는 점은 본래 서로 상충되지 않는데 어찌하여 저 말을 인용하여 이 말을 증명한단 말입니까? 또《정씨유서(程氏遺書)》를 살펴보면, 명도가 "천지의 위대한 덕은 생(生)이다. 천지의 두 기운이 얽히고 설켜 만물이 생성된다. 타고난 것을 성이라 말한다. 이 원(元)이라는 것은 선(善)의 으뜸이고 이것이 이른바 인(仁)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과 서로 표리를 이루는데 이미 '원이라는 것은 선의 으뜸이다'라고 하고 다시 '이것이 이른바 인이다'라고 했다면, 이 역시 본연지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 말한 "명도가 말한 이 장(章)의 성(性) 자는 기질 중에 타재39)한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도 있고, 본연의 지극한 선을 가리켜 말한 것도 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生之謂性)', '재(才)를 성이라고 말하는 것(才說性)' 등에서 성 자는 기질 중에 타재한 것을 말한 것으로, 이는 이미 순수한 본연의 성이 아닙니다. 성 자는 본원의 지선(至善)을 말한 것인데, 이제 기질 중에 타재한 것은 기질지성이라고 하고, 본원의 지선한 것은 본연지성이라고 합니다.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타(墮) 자를 잘못 보았기 때문에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은 리이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은 높고 사람은 아래이다는 것을 근거로 말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墮)라는 한 글자는 어세가 자연스러워서 빛나는 상제가 아래 백성들에게 충심을 내려주었다는 강(降) 자와 동일한 뜻으로, 깨끗하고 깨끗한 것이 혼탁하고 더러운 가운데 떨어졌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타(墮) 자 때문에 억지로 기질지성이라고 한다면 정자와 주자가 성(性)을 말한 곳곳마다 서로 장애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논하지 않고 상제가 충심(衷心)을 내려주었다는 충을 본연의 성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주자가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에 "기질지성은 단지 이 성(性)이 기질 속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라 자체적으로 하나의 성이 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기질지성을 논한 것이고 또한 '타(墮)' 자가 있으니, 정세영 편지의 증거가 될 만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건대,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기질지성이 기질성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기질에 떨어진다는 타(墮) 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질을 따른다는 수(隋) 자에 있습니다. 이 두 구 사이에는 별도로 고(故) 자 하나를 써서 한번 국면을 전환하여 매우 힘 있게 하였습니다. 주자의 뜻은 기질 속에 떨어진 본연지성이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르는 기질지성이 있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주자가 말한 이 장 내의 기질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마땅히 본연지성으로 간주해야 하고, 본원지선이라는 것은 마땅히 본원지선의 리로 보아야 하는 것이 어찌 명백하지 않겠습니까?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形) 이후에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天地之性)이 있게 된다'라고 했는데 이 두 개의 성(性) 자를 가져다 '생지위성(生之謂性)' 이하로 무릇 성을 말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천지지성이고 어느 것이 기질지성인지 분별해 보면 (그 이치가 자명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 부분은 정말로 정세영의 편지에서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생지위성'의 해석을 놓고 명도와 이천이 서로 차이가 있으니, 주자의 이 설은 명도의 설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천의 설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만약 정말로 명도의 설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그것이 주자의 초년설(初年說)인지 만년설(晩年說)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어찌 이 한 단락만 붙잡고서 주자의 여러 설을 다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율옹(栗翁 이이(李珥))이 말한 "주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타고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율옹의 설이 정말로 정세영이 인용한 바와 같다면 이는 참으로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스러운 의리(義理)를 놓고 입론(立論)의 주요 의미의 소재에 착안하여 연구하지 않고, 해석한 설들의 정조(精粗)를 가져다 취사(取捨)하지 않고서, 오로지 선현의 설들 중에 자기 견해와 맞는 것만을 증거로 삼는다면, 율옹의 설만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 후의 선현 가운데 혹은 본연지성을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하고 혹은 기질지성을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하며 주자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두 설이 있으니, 이 둘 사이에서 각각 한쪽만 잡고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면 끝내는 정론(定論)이 있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먼저 입론의 본뜻을 가져와 공평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지혜로운 눈으로 투철히 볼 수 있다면 무릇 선현들의 여러 설의 동이(同異)와 정조(精粗)를 눈앞에서 훤히 알게 되어 저절로 기질지성은 버려야 할 것이고, 본연지성은 따라야 할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정세영이 인용한 주자가 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은 태극(太極)의 전체가 기질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지 따로 하나의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와 율옹(栗翁 이이(李珥))이 말한 "기질지성은 실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이 기질에 있는 것이고 두 개의 성이 아니다."라는 것에 대하여:주자께서 이를 말씀하신 것은 〈엄시형에게 답한 편지[答嚴時亨書]〉에서인데 거기에는 '기(氣)' 자 앞에 '단론(但論)' 두 글자가 있고, '성(性)' 자 뒤에 '즉차(則此)' 두 글자가 있습니다. 그 뜻은 기질지성 속에 태극의 전체가 있다고 말했을 뿐이지 태극이 기질 속에 있으면 기질지성이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율옹이 운운한 것으로 말하자면, 이 역시 다만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40) 어찌 정세영의 말처럼 성이 기 속에 있으면 바로 기질의 성이 된다고 직설적으로 말한 적이 있겠습니까?정세영의 편지에서 말한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을 기질지성이라 명명하고, 기질을 끼고 있지 않은 것을 본연지성이라 말한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정세영 편지에 수록된 내용은 수백 가지의 말이지만, 그가 말한 핵심을 총괄해보면, 다음 두 구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자가 성을 논함에 기질을 띠고 있다는 등과 성을 말한 것이 한두 가지일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대략 여기에서 몇 조목만을 들어서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을 곧바로 기질성이라 말할 수 없고, 본연지성은 기질에 일찍이 끼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주자어류》의 〈정가학록(鄭可學錄)〉에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더라도【살펴보건대, 이것은 천지의 성이다】 이미 형기를 끼고 있는 것이어서 오로지 성만을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가학록〉에서 "태극이라 말하자마자 즉시 음양을 끼고 있고, 성이라고 말하자마자 기를 끼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지록(砥錄)〉에서는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으며, 태극은 단지 음양 속에 있고, 음양을 떠나지 않는다. 성과 심도 그러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탕영록(湯泳錄)〉에서는 "사람들이 성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을 계승한 것이 선하다고 하였는데, 이때도 기질을 함께 갖추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단몽록(端蒙錄)〉에서는 "《역》에서는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氣)와 질(質)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허(虛)와 기(氣)가 합하면 성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정세영의 말처럼 이해한다면, 이상의 여러 조목의 '협(夾)' 자, '대(帶)' 자, '리(離)' 자, '겸(兼)' 자, '합(合)' 자 때문에 본연지성은 될 수 없고 단지 기질지성이라고만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물을 생성한 이후로 오로지 하나의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은 어두운 우주 속에서 구해야 하니, 이렇게 되면 주자가 이른바 '아무런 근거 없이 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41)라고 한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까. 〈동수록(董銖錄)〉에서 기록한 한 단락은 바로 이 장을 해석한 것입니다. 이는 병진년 이후 가장 늦은 만년정론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사람과 생물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단지 리라고만 할 수 있고 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에 있을 때는 명(命)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이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이미 성(본연지성)이 아니게 됩니다. 이는 성이라 말하자마자 바로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 이 리가 형기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니 오로지 전적으로 성의 본체만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람에게 있을 때는 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 있는 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을 성이라 하니, 이 두 구절은 팔자타개(八字打開)42)하여 일필로 곧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늘에 있고 사람에 있는 것을 명(命)과 성이라 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나열했으니 비록 오척 동자라도 문리를 조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성 자는 본연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이론을 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 자는 리가 형기 중에 떨어져 있어서 전적으로 성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정세영이 주장한 이 두 구절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보충하여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질을 끼고 있지 않는 것은 하늘에 있는 리라고 명명해야 하고, 기질을 끼고 있는 것은 본연지성이라 명명해야 하며, 기질을 끼고 있으면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되는 것은 기질지성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이렇게 한 연후에야 완전하게 보완이 될 것 같은데, 정씨는 이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완고하게 지키려고만 할지 모르겠습니다.정세영의 편지에서 "이것이 주자가 천명지성(天命之性)을 풀이할 때 '성(性)이 곧 기(氣)이고 기가 곧 성이며, 온전히 성의 본체이지는 않다[不全是性之本體]'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성이 곧 리(理)이다'라고 말한 까닭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성이 곧 기이고 기가 곧 성이다'43)는 것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44)고 말하는 것과 같고, '부전시성(不全是性)'은 오직 성(性)이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치우쳐 온전하지 않은 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성이 단지 기 속에 있을 때를 말한 것일 뿐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자는 일찍이 "도(道)가 곧 기(器)이고 기가 곧 도이니, 기를 떠나서 도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청컨대 이 말을 이어서 "성이 곧 기(氣)이고, 기가 곧 성이니, 기를 떠나서 성을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 역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천명지성으로 말하자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변화하고 생성하여 형기(形氣)가 형성된 이후에나 있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형기가 아직 생기지 않은 이전에 초연히 홀로 존재한 적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은《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살펴본다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정세영이 인용한〈엄시형에게 답한 편지[答嚴時亨書]〉의 내용을 운운한 것에 대하여:이것은 《주자어류》의 조목들과 한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오행(五行)과 태극(太極)을 운운한 것'에 대하여:그 다른 것은 오행과 생(生)에 소속시키고, 그 같은 것은 태극과 성(性)에 소속시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오행, 태극이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서로 비슷하다고 여겼습니다. '잡저(雜著)' 두 글자는 본문에는 본래 없는 것인데 밖에서 온 재료를 첨가해 넣었으니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 설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태극과 음양을 섞어 말한 것은 마땅히 단지 본연(本然)으로만 간주하여야지 갑자기 치우침과 온전함의 차이가 있고 허물과 악이 있는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정세영의 편지에서 인용한 '주자가《통서(通書)》를 논하면서 운운한 것'에 대하여:이 부분은 정말로 정세영의 설과 같습니다만, 이 부분이 누구의 기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수록(董銖錄)〉의 기록에 '하늘에 있는 것을 명(命)이라 한다', '사람에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해설하여 말할 수 없다[解不容說]', '성(性)을 말하기만 하면'45)이라고 한 말들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당 정론(定論)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의 설일 듯합니다. 지금 67세 이후의 정론을 버리고 저것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정세영의 편지에서 "본성(本性)이 기질(氣質) 속에 떨어진 것을 본연(本然)으로 간주한다면, 기질을 본연이라 간주하는 오류를 면할 수 없어서 그 폐단이 반드시 본성을 버리고 따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이것은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 일46)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성이 기질 속에 있다는 것은 마치 태극이 음양 속에 있고, 도(道)가 형기(形器) 속에 있으며, 리(理)가 사물 속에 있고, 광대한 작용[費]은 나는 새와 뛰는 물고기47)에 있으며, 천명(天命)은 기화(氣化) 속에 있다고 말하는 설과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매우 많은데, 이것들을 모두 기질로 간주하여 본연을 버리는 폐단이라고 근심해야 하겠습니까? 鄭書付標, 敢據下示《大全》《語類》諸條, 不免依樣胡蘆, 安敢望不失眞本也? 惟是之懼耳. 小子每讀〈中庸序〉, 竊怪夫以程門人之高才眞功習聞妙訣, 而及其師沒未久, 淫於老佛, 今見門下諸子 皆厭飫於先生生平精思妙契之訓, 而或有敢爲異論於行脩操几之日者. 於是又知程門人之不足怪, 而今日諸子之尤可怪矣. 小子常謂同門諸人曰: "吾輩存省修治之功, 固在自家之如何, 定依賴他人不得." 若夫說心說性本源精微去處, 一從師門之論, 則可以傳之百世而無弊, 何苦而強自立異, 生出無限煩擾耶? 栗谷先生曰: "幸生朱子後, 學問庶幾不差." 小子敢繼之曰: "幸出艮翁之門, 性理說庶幾不差." 鄭書以明道'生之謂性', 爲氣質性, 而與先生數十年本然性之定論相反. 意其精究力索, 必有自得之實, 而出於質疑就正之心, 非欲故爲此謬見, 致異於先生也. 至如小子粗思淺見, 不足與論於性理之間, 而先生平日議論之大旨, 則粗聞之矣. 今將鄭書所引諸說之失其本旨者, 及其自言之未當者, 條列于左.鄭書所引程子曰"性字不可一槩論"考《中庸輯略》, 此非明道說, 乃伊川說, 而正是以氣質性言者也. 蓋伊川'生之謂性'之以氣質性言者, 與明道'生之謂性'之以本然性言者, 自不相干, 奈之何引彼而證此也? 又考《程氏遺書》, 明道曰: "天地之大德曰生. 天地絪緼, 萬物化醇, 生之謂性. 此元者善之長也, 斯所謂仁也." 此正與此章相表裹, 而旣曰"元者, 善之長", 又曰"斯所謂仁", 則此亦可以本然性看矣.鄭書所引朱子曰: "明道此章內性字, 有指其墮在氣質中而言者, 有指其本原至善而言者."生之謂性, 才說性等, 性字是指堕在氣質中者, 便已不是性. 性字是指本原至善者, 而今以堕在氣質中者, 做氣質性, 本原至善者, 做本然性. 細察其意, 似縁錯看墮字而失其本指也. 夫在天之理, 在人而爲性, 從天人上下之聞而立言. 故墮之一字, 語勢自爾, 與惟皇上帝降哀于下民之降字同一意思, 非謂一箇潔潔凈凈底墮落於溷穢汙濁之中也. 苟以墮字之故, 而硬做氣質性, 則凡程朱說性之處處相碍. 且置勿論, 至於上帝降衷之衷也, 不得爲本然性, 豈有是理? 朱子答徐子融書曰: "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其氣質而自爲一性." 此則正論氣質性, 而亦有墮字, 似可爲鄭書之證佐. 然察其文勢, 大有不然者. 蓋氣質性之, 爲氣質性者, 不在墮氣質之墮字, 在於隨氣質之隨字矣. 此兩句之間, 另下一箇故字, 使之一轉換面, 而十分有力. 朱子之意, 蓋曰有墮氣質之本然性. 故有隨氣質之氣質性云爾. 如此看破, 則朱子所云, 此章內墮在氣質者, 當做本然性, 本原至善者, 當做本原至善之理看, 豈不明白乎?鄭書所引朱子曰: "橫渠云'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將此兩性字分別自生之謂性以下, 凡說性者, 孰是天地之性, 孰是氣質之性?"此則果如鄭書之所主. 然'生之謂性', 有明道․伊川之異, 朱子此說, 未知指明道乎? 指伊川乎? 且若果指明道, 其初晚之分, 未可的知, 何可執此一段而盡廢朱子諸說乎?鄭書所引栗翁曰: "朱子不云乎【止】, 生之謂也."栗翁說, 果如所引, 則誠以氣質性看矣. 然此等疑義, 不向立言主意之所在而研究之, 不將解釋諸說之精粗而取舍之, 惟先賢說之合於己見者是證是據, 則非惟栗翁說如此. 厥後先賢或有主本然性者, 或有主氣質性者, 朱子亦有本然․氣質二說, 於此二者之間, 各執一偏, 而不知適從, 則終無定論之日矣. 苟能先將立言本意, 平心領會, 慧眼看透, 則凡先賢諸說之同異精粗, 瞭然於前, 自見氣質性之可舍, 而本然性之可從矣.鄭書所引朱子曰: "氣質之性, 太極全體, 墮在氣質之中, 非別有一性." 栗翁曰: "氣質之性, 實是本然, 在氣質者, 非二性."朱子說此是〈答嚴時亨書〉, 而'氣'字上, 有'但論'二字, '性'字下, 有'則此'二字. 其意謂氣質性中, 有太極全體云爾, 非謂太極在氣質中, 則爲氣質之性也. 至於栗翁云云, 此亦但謂氣質․本然, 非有兩性而已, 何嘗直謂性在氣中, 卽爲氣質之性, 如鄭書之言耶?鄭書曰: "夾帶氣質者, 命之以氣質之性, 不夾帶氣質者, 命之以本然之性."鄭書一幅, 累百言, 總其大旨, 不過此二句矣. 然凡朱子論性, 而言夾氣帶氣等說, 不一而足. 今略擧數條於此, 以見夾帶氣質者之不可直謂氣質性, 本然性之未有不夾帶氣質者也.《語類》〈可學錄〉曰: "人生而靜【按此是天地之性】已是夾形氣, 專說性不得." 錄曰: "纔說太極便帶著陰陽, 纔說性便帶著氣." 砥錄曰: "性猶太極, 心猶陰陽, 太極只在陰陽之中, 不離陰陽也. 惟性與心亦然." 泳錄曰: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便兼氣質了." 端蒙錄曰: "《易》說一陰一陽之謂道, 這便兼氣與質而言, 因擧合虛與氣有性之名." 若如鄭書之說, 則以此諸條之夾字帶字不離字兼字合字之故, 不得爲本然性, 而只做氣質性矣. 然則自天之生物以後, 只有一箇氣質性, 而將求本然性於太空冥冥之中, 其與朱子所謂無能懸空說得性者, 不相戾矣乎? 若乃董銖錄一段, 正是解此章者. 而爲丙辰以後最晚年定論矣. 其言曰: "人生而靜, 卽是人物未生時, 只可謂之理, 說性未得. 此所謂在天曰命也. 纔說性, 便已不是性. 言纔謂之性, 便是人生以後, 此理墮在形氣中, 不全是性之本體矣. 故曰便已不是性." 此所謂在人曰性也. 竊以爲在天曰命, 在人曰性此二句, 可謂八字打開而一筆句斷也. 旣以在天在人曰命曰性, 齊頭幷腳, 則此性字, 雖五尺童子粗解文理者, 恐無異辭於本然性. 而此性字, 亦不過此理墮在形氣中, 不全是性之本體者也. 由此言之, 鄭書所主此二句, 當改而補之. 曰: "不夾帶氣質者, 命之以在天之理, 夾帶氣質者, 命之以本然之性, 夾帶氣質而自爲一性者, 命之以氣質之性." 然後乃爲完備, 未知鄭氏於此, 亦不領悟, 而一向膠守乎?鄭書"此朱子所以訓天命之性, 不曰性卽氣, 氣卽性, 不全是性之本體. 而但曰性卽理也."性卽氣, 氣卽性, 猶云理氣不相離也, 不全是性, 猶云不獨是性, 非偏而不全之性也. 此皆只是言性在氣中, 非謂氣質性也. 朱子嘗曰: "道卽器, 器卽道, 莫離器而言道." 今請繼之曰: "性卽氣, 氣卽性, 莫離氣而言性", 不亦可乎? 且以天命之性言之, 亦在二五化生形氣已成之後, 何嘗超然獨立於形氣未生之先乎? 斯義也, 考之《中庸章句》曉然可見.鄭書所引嚴時亨書云云此可與《語類》諸條一樣看定鄭書所引五行太極云云其異者, 屬五行與生, 其同者, 屬太極與性. 故朱子以爲五行太極與生之謂性相似也. '雜著'二字本文所無, 而添入外來材料, 可異也. 且依此說言之, 太極和陰陽滾說底, 當只作本然看, 不可遽作有偏全有過惡底氣質性看了.鄭書所引朱子論《通書》云云此則果如鄭說, 但未知此爲誰錄. 而以銖錄'在天曰命', '在人曰性', '解不容說', '才說性'者觀之, 恐當爲未定說. 今捨六十七歲以後定論, 而以彼爲主何也?鄭書曰: "以本性之墮在氣質中者做本然, 則未免以氣質做本然, 而其弊必有捨本性而別求氣質之性也."此可謂杞人憂天也. 蓋性在氣質中, 如云太極在陰陽中, 道在形器中, 理在事物中, 費在飛躍上, 命在氣化中之說矣. 此類極多, 皆當做氣質看, 而以舍本然之弊憂之乎? 부표(付標) 문서 중에 특별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경우 그곳에 찌를 붙이는 것을 말한다. 다행히도……되었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2 〈어록 하(語錄下)〉에 보인다. 정명도(程明道)가……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과 《근사록(近思錄)》 권1〈도체(道體)〉에 정호(程顥)가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하는데, 성은 기(氣)이고 기는 성이니 타고난 것을 말한다. 사람이 기품(氣稟)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이치에는 선악이 있다. 그러나 성 가운데에서 원래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대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려서부터 악한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참으로 성이다. 그러나 악도 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生之謂性, 性卽氣氣卽性, 生之謂也. 人生氣稟, 理有善惡, 然不是性中元有此兩物相對而生也. 有自幼而善, 自幼而惡, 是氣稟有然也. 善固性也, 然惡亦不可不謂之性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기질지성(氣質之性) 유가철학에서 기질지성은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최소한 두 개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각종의 생리적 본능과 재능 재질 등의 총칭이다. 다른 하나는 주자가 제시한 독특한 것인데, 선천적으로 부여 받은 본연지성(性善의 性 혹은 性卽理의 性)이 발현할 때 반드시 기질에 떨어져(墮在) 나타나게 되는데, 본연지성이 기질에 타재하여 드러난 본성을 기질지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자는 기질지성이라는 말을 오로지 이러한 한 가지 의미로 제한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주자어류(朱子語類)》등에는 '기질지성'이 각종의 생리적 본능과 재능 그리고 재질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질지성 용어가 출현하면 전후 맥락을 살펴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 의리지성(義理之性) 혹은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자가 말한 성즉리의 본성이 바로 본연지성이다. 타재(墮在) 성리학에서 타재는 '본연지성이 기질 중에 떨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성리학에서는 거의 고유용어처럼 사용되기 때문에 이후에는 '타재'로 표기할 것이다. 율옹이……뿐입니다 이이는 "주자(朱子)는, '기질지성은 다만 이 성(性) 【이 성(性)은 본연지성입니다.】이 기질 가운데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기질을 따라 따로 하나의 성(性) 【이 성(性)은 기질지성입니다】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자(程子)는, '성이 곧 기이고 기가 곧 성이니, 생성(生成)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 결코 두 개의 성이 아닙니다. 다만 기질 상에 나아가 이(理)만을 가리킬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합하여 명명(命名)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이 이미 하나라면 정이 어찌 두 갈래의 근원이 있겠습니까"〔朱子不云乎, 氣質之性, 只是此性, 【此性字.本然之性也.】 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 【此性字.氣質之性.】 程子曰.性卽氣.氣卽性.生之謂也. 以此觀之, 氣質之性, 本然之性, 決非二性. 特就氣質上, 單指其理曰, 本然之性, 合理氣而命之曰, 氣質之性耳. 性旣一則情豈二源乎.〕라고 말하였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 〈정자지서일(程子之書一)〉 명도(明道)의 〈논성論性〉 1장에 '사람이 태어나면서 고요하다.'라고 하였는데, 고요한 것은 진실로 그 성(性)이다. 그러나 다만 '생(生)' 자가 있기만 하면 기질(氣質)을 띠게 된다. 그러나 '생' 자 이상은 또 말할 수 없으니, 대개 이 도리는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성(性)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기질을 띠게 되므로 아무런 근거 없이(터무니없이) 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人生而靜, 靜者固其性. 然只有生字, 便帶却氣質了. 但生字以上又不容說, 蓋此道理未有形見處. 故今才說性, 便須帶著氣質, 無能懸空說得性者〕 팔자타개(八字打開) 주가가 한 말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5 〈여유자징서(與劉子澄書)〉에서 "성현께서는 이미 팔자타개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오히려 밖으로만 내달린다〔聖賢已是八字打開了, 但人自不領會, 卻向外狂走耳〕"고 하였다. 이는 '八' 자처럼 양편을 모두 넓게 열어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안을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밖으로만 내달린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正路를 놓고 邪道를 찾는 사람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성이……성이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정호(程顥)가 이르기를, "낳는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니, 성(性)은 바로 기(氣)이고 기(氣)는 바로 성(性)이라는 것은 생(生)을 이른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받은 기품(氣稟)은 이치상 선악이 있기 마련이나 성(性) 가운데에 원래 이 두 물건이 상대하여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기품에 그러함이 있어서이다. 선(善)은 진실로 성(性)이지만, 악(惡)도 성(性)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生之謂性, 性卽氣氣卽性, 生之謂也. 人生氣稟, 理有善惡, 然不是性中元有此兩物相對而生也. 有自幼而善, 自幼而惡, 是氣稟有然也. 善固性也, 然惡亦不可不謂之性也.]"라고 하였다. 리와……않다 주자철학에서 性卽氣, 理卽氣, 道卽氣라는 말이 자주 출현한다. 이때 '卽' 자는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類의 卽 자 용법은 性卽理의 卽 자 용법과 다른 것이다. 유가철학에서 卽 자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동일관계인데, 대표적인 것은 性卽理이다. 다른 하나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의 不離이다. 주자는 理氣不離不雜을 주장하였는데, 不離를 卽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은 接의 의미가 있다. 주자철학에서 格物에 格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물에 나아가(卽) 접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卽 자는 理와 氣, 性과 氣, 道와 器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 것이다. 동수(董銖)의……하면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 45조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로, '解不容說'의 '解'자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없는 글자이다. 기(杞)나라……일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뜻으로, 옛날 중국 "기나라에 살던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다고 걱정하며 침식을 잊었다.〔杞國有人 憂天地崩墜 身亡所寄 廢寢食者〕"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 나는……물고기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였으니, 천지의 도가 위아래에 밝게 드러난 것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연 현상 자체에 작용이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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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 甲寅 근래에 《가례증해(家禮增解)》를 보다가 〈성복(成服)〉의 '참최(斬衰)' 조목에 이르러서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의 안설(按說)을 보니 논의할 만한 곳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는 부친이 상중(喪中)에 돌아가신 경우라면, 그 자식이 (부친이 치르던 상에) 대신 복상(服喪)하지 않는다는 설을 주장하였고, 부친의 후사(後嗣)가 된 양자(養子)에 대해서는 참최복(斬衰服)을 입지 않는다는 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손(玄孫)48)으로 승중(承重)49)한 자가 그 모친이나 조모(祖母)를 위해 입는 상복에 대해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가 말한 4대(代)에 대해 모두 삼년복을 입는다는 의론을 어기고, 그녀들의 남편이 승중을 했느냐의 여부를 살펴서 삼년복을 입기도 하고 본복을 입기도 한다는 설을 주장했습니다. 대개 부친이 상중에 돌아가셨는데 그 자식이 대신 복상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부친이 미처 마치지 못한 효를 이룰 수 없어 아버지로 하여금 지하에서 한을 품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효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부친의 후사가 된 양자로서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이미 그 천륜(天倫)을 옮겨 나를 마치 낳아주신 것처럼 대하는데 나는 도리어 저 사람을 친자식과 차이 나게 대하는 꼴이니, 이 어찌 천지간에 커다란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애롭지 못한 것입니다. 현손이 승중했는데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가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면 중간에 세대(世代)가 끊기고 이어지지 못하여 위로는 이어올 바가 없게 되고 아래로는 전해 줄 바가 없게 되니 이는 더욱 자애롭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데 비할 수 있습니다. 무릇 예(禮)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윤상(倫常)의 도리를 밝히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를 논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애롭지 못하게 하고 효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른바 윤상(倫常)을 밝힌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대저 예를 논하는 자들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나아가 몸소 체험하여 말하지 않고 한갓 주소(註疏)에만 천착하면서 시비를 말하기 때문에 정의(正義)를 보지 못하고서 결국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예설(禮說)을 논변하는 일은 성리설처럼 쉽게 잘못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살펴보니 진실로 두 가지 가운데 쉽고 어려움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성리(性理)의 큰 근원은 한 번 어긋나면 곧바로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에 빠지게 되고, 변례(變禮)50)의 큰 원칙은 한 번 어긋나면51) 마침내 윤상을 어그러뜨리는 데 이르게 되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比看《家禮增解》, 至成服斬衰條, 見鏡湖按說, 往往有可議處. 其於父在喪中而死者, 則主其子不代服之說, 其於爲所後子, 則主不服斬之說, 其於玄孫承重者, 其母及祖母之服, 則違沙翁四世皆服三年之論, 而主視其夫之承重與否, 而或三年或本服之說焉. 蓋父死喪中而子不代服, 則無以遂亡父未終之孝, 而使父抱恨於地下, 是爲不孝也. 爲所後子而不服斬, 則彼已移其天倫, 而視我如所生, 我乃視彼有間於己子, 豈非天地間一大冤枉乎? 是爲不慈也. 玄孫承重, 而孫妻曾孫妻不服三年, 則中間代序斷而不續, 上無所繼, 下無所傳, 此又可比之於不慈不孝也. 夫所貴乎禮者, 欲其講明倫常也. 若論禮而至於使人不慈不孝, 則烏在其所謂明倫哉? 大抵論禮者, 不就天理人情上體驗說出, 徒屑屑於註疏腳下, 說是說非, 所以未見得正義, 而終至於如此也. 小子昔嘗謂講辨禮說, 不至如性理說之易差, 以今觀之, 誠不可較難易於二者之間也. 性理大源頭, 一差則便陷異端邪說, 變禮大節, 日一差則竟至於悖倫乖常, 可不愼哉? 可不戒哉? 현손(玄孫) 증손의 아들이니, 손자의 손자로서 고손에 해당한다. 승중(承重) 장손으로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조부모의 상을 당하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제 노릇을 한다. 변례(變禮) 經禮가 불변의 예법이라면, 變禮의 비상시에 응변할 수 있는 예법을 지칭한다. 한 번 어긋나면 원문은 '日一差'로 되어 있는데 '日'은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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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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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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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권17 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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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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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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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02년 조(租)의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장부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문서이다. 산지기와 준룡(俊龍), 복남(卜南)의 조를 각각 기록하였다. 조 아래에는 비용 내역을 적었다. 끝에는 이듬해 10월 15일의 산지기의 구조(舊租)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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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기두(李箕斗)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유학은 학교에 적을 둔 양반유생을 가리킨다. 임명된 관직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당상관의 무관 품계이다. 행(行)은 행수법(行守法)이라는 인사 규정의 하나로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이 글자를 붙인다. 용양위부호군은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된 종4품의 무관직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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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05년 5월 2일에 윤재진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간찰 1905년 5월[榴夏] 2일에 윤재진(尹在晉)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날마다 집안의 근심이 생기고 사업을 억지로 일으켜보지만 잘 되지 않아 이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면목(面目)을 대신할 자료로 삼는다. 노인 봉양하는 일은 배나 고민이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부탁한 크고 작은 대나무를 바꾸어 보내는데 쓰기에 합당한지 모르겠다고 하며 가격은 6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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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이 사위에게 풍두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간찰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尹璂燮)이 사위[東床]에게 풍두(豐頭)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부모님 모시고 공부하느라 고달프리라 생각하는데, 자신은 머리가 계속 흔들리는 풍두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어 스스로 서글퍼진다고 하며,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돌아봐 주기를 원하는 자신의 바람에 부응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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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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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집지록 金華執贄錄 경자년(1900) 여름에 가군(家君)께서 불초한 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씀하시기를,"내가 너를 가르친 이후로 밤낮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를 옥성(玉成)1)시키고자 하였는데, 시문을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을 하면 다만 속된 선비가 될 뿐이고 실질적인 공부는 성현의 학문에 있다. 듣건대 간재 전 선생(艮齋田先生)이 천안(天安)의 금곡(金谷)에 사는데 도덕과 학문이 세상의 추앙을 받는다고 하니, 네가 어찌 가서 스승으로 섬기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불초한 내가 공경히 훈계를 받들어 즉시 길을 떠나려 하였으나 예복이 완성되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윤8월 16일에 밖으로부터 뜰을 지나자 가군께서 말씀하시기를,"근래에 듣건대 간옹(艮翁)이 남쪽으로 떠나 부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이 너에게 인연을 빌려준 것이니 빨리 찾아가 뵈어라."라고 하셨다. 이에 명하신 대로 부안에 이르러 선생이 있는 곳을 탐문한 다음 변산의 월명암(月明菴)에 도착하여 명함을 들이고 재배하였다. 강록(講錄)에 참여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정주교질장(周鄭交質章)을 강(講)하였는데 선생이 강록을 보고는 다시 성명을 살펴보았다. 그때 응강(應講)한 사람이 많아 이미 한밤중에 이르렀다.다음 날 아침에 선생이,"어제 《춘추좌씨전》을 외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시문(時文)2)은 무익하니 실학(實學)3)에 힘써야 하네."하면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어 비유함에 자상해 마지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도(道)를 향하는 마음이 있게 하였다. 얼마 뒤에 하직하고 물러나자 선생이 만류하여 하루를 더 머물렀다. 돌아가겠다고 아뢸 때에 선생이 말하기를,"이곳에서 그대의 집까지는 거리가 조금 멀지만 내가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4)에 따라 오로지 그대의 집에 가겠네."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29일에 선생이 나의 누추한 집에 방문하였는데 따라온 사람이 3, 40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떠나려고 할 때에 '벽봉-가군의 호이다.-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ㆍ'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至樂莫如讀書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자를 써서 가군께 드렸는데, 이는 대개 자식을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이다. 여러 사우(士友)가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라고 권유하자 가군이 말씀하시기를,"옛사람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갔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로 인해 스승을 정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되니, 문하에 나아가 집지(執贄)5)해야 예에 합당할 것입니다."하시고, 선생을 모시고 태인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마침내 10월 11일에 길을 떠나 17일에 금곡(金谷)에 당도하였는데, 먼 길에 바람을 맞고 높은 고개에서 눈길을 헤치며 고달팠던 상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금곡에 와서 가군의 편지를 선생에게 드렸으니,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아이가 공경히 예물을 받들고 문하에 나아가 절하게 되었으니 물 뿌리고 쓸며 소제하는 제자의 반열에 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운운."선생이 말하기를,"존대인(尊大人)의 편지가 이미 이와 같이 진중(珍重)하고 그대의 의지도 가상하니, 마땅히 《관선록(觀善錄)》6)에 이름을 쓰고 종신토록 서로 권면해야 하네."라고 하였다.다음 날에 집지하는 예를 행하였다. 정유몽 인창(鄭惟夢寅昌)ㆍ진사 오한근(吳漢根)ㆍ이희영 조원(李希潁祖遠)이 창찬(唱贊)하여 지도하고 선생이 구양남야(歐陽南野)7)의 말 뒤에 '직하승당(直下承當)' 네 글자를 써서 권면하였다. 내가 재배하고 큰 띠에 적어 두고서 그대로 머물며 공부를 하였다.일전에 "소자와 사석(師席)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자주 가르침을 받기가 어려우니, 사우(士友)를 좇아 인덕(仁德)을 보강한다면 도움이 또한 클 것입니다. 소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선생의 문인 중에서 누구와 더불어 평생 상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독실(篤實)함으로는 그대 집안의 여극(汝克)8)만한 사람이 없고 정명(精明)함으로는 박형부(朴衡夫)9) 군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는 자주 상종하게나." 하였다.11월 20일에 돌아가려 할 때 선생이 가군에게 답하는 편지에,"당신의 훌륭한 아들이 편지를 가지고 멀리서 찾아와 예물을 올리고 서로 만났습니다. 돌아보건대 제가 남을 이루어 주는 지혜는 없으나 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복이 얕지 않음을 자축합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또 학문의 진위(眞僞)를 분변하는 것으로써 〈증시(贈示)〉 1편을 지어 주었으니, 대개 나이 어린 초학(初學)이 뜻이 견고하지 않아 혹시 겉멋을 즐기고 박실(樸實)함을 싫어하는 병폐가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庚子夏, 家君召不肖以前曰: "我自敎汝以來, 晝宵一念, 欲玉成汝身, 記誦詞章之學, 但俗儒而已, 實地上工夫在聖賢之學. 聞艮齋田先生居天安金谷, 道德學問, 爲世所推, 汝盍往師事之?" 不肖敬奉訓辭, 卽擬啓程, 以禮服未成不果. 至閏八月旣望, 自外趨庭, 家君曰: "近聞艮翁南駕留扶安. 天借汝緣, 亟往拜焉. " 於是承命, 至扶安, 探問先生所在, 轉到邊山月明菴, 納刺再拜. 參講錄, 講《左傳》周、鄭交質章, 先生觀講錄, 更詳姓名. 時應講者衆, 已至夜分. 翼朝, 先生曰: "昨誦《左傳》者誰也?" 澤述進跪席前. 先生爲說"時文無益, 實學可勉", 百端引喩, 諄諄不已, 使人自然有向道心. 已而辭退, 先生挽之, 復留一日. 告歸時, 先生曰: "此距君家雖稍遠, 吾用郭林宗訪茅容故事, 專到君家矣. " 余聞甚感激. 二十九日, 先生枉駕陋廬, 從者三四十人. 翼日將發, 書"碧峯【家君號】賢子潤屋"、"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等字, 贈家君, 蓋勸以敎子成德之意也. 諸士友勸行師弟禮, 家君曰: "揆以古人千里負笈之義, 因而定師, 事涉輕忽, 詣門執贄, 乃爲合禮也. " 令陪先生, 至泰仁, 拜別而歸. 乃以十月十一日登程, 十七日, 抵金谷, 遠路觸風, 峻嶺穿雪, 困苦之狀, 不可勝言. 至則以家君書納先生, 書曰: "兒子敬奉禮贄, 進拜門下, 得備灑掃之列則幸矣. 云云. " 先生曰: "尊大人書, 旣如是珍重, 君志又可尙, 當書名《觀善錄》, 終身交勗也. " 翼日, 行贄禮. 鄭惟夢寅昌、吳進士漢根、李希潁祖遠唱贊指導, 先生書歐陽南野語後以"直下承當"四字勉之. 余再拜書紳, 因留做課. 間者問"小子距師席絶遠, 難於頻承敎誨, 從士友輔仁, 爲益亦大. 先生門人之在小子近地者, 誰可與始終相從也?" 先生曰: "篤實無如貴族汝克, 精明無如朴君衡夫, 君其數數相從也. " 及十一月念間將歸, 先生答家君書曰: "令子齎書遠來, 委質相見. 顧未有成物之智, 然晩得髦士, 自賀福分不淺. 云云. " 又以學問眞僞之辨, 作《贈示》一篇以賜之, 蓋慮年少初學, 志旣未固, 容有耽浮華厭樸實之弊也.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그대를 빈궁하게 하고 시름에 잠기게 하는 것은,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함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문(時文) 과거 시험(科擧試驗)에 사용하던 문체로, 이른바 팔고문(八股文)으로 불리던 문체를 말한다. 실학(實學) 절실하게 유용한 학문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 머리에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이 처음에는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는 만사(萬事)로 분산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일리(一理)로 합쳐진다. 놓으면 우주에 가득 차고 거두면 은밀하게 간직되어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가 실학(實學)이다."라고 하였다. 주로 성리학에서 인격 수양에 초점을 맞춘 말로 쓰인다. 곽임종(郭林宗)……고사 임종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곽태(郭泰)의 자(字)이며, 모용(茅容)은 효자이다. 당시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門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관선록(觀善錄)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구양남야(歐陽南野) 남야는 구양덕(歐陽德, 1496~1554)의 호이다. 명(明)나라 강서(江西) 태화(泰和) 사람인데, 가정(嘉靖) 2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여극(汝克) 김연술(金淵述, 1860~1905)의 자(字)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호는 성암(成菴)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5권 2책의 《성암유고》가 있다. 박형부(朴衡夫) 형부는 박수(朴銖, 1864~1918)의 자(字)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중당(中堂)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중당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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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화록 莘門話錄 계묘년(1903) 9월 22일 밤에 선생이 요통(腰痛)이 있어 신음하며 괴로워하였다. 나에게 명하여 이불과 베개를 안배하게 하고는 옷을 벗고 누워 아픈 곳을 누르게 하다가 곧 다시 일어나 앉아 나에게 말했다."지금 나랏일이 계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하니 참으로 존망이 달린 때이네. 그런데 성상께서 재야의 독서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낭묘(廊廟)10)에 배치하고 참찬(參贊)의 벼슬을 제수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네. 이로써 성덕이 진보하고 국운이 형통하기를 기대하였네. 오직 그들이 왕실에 마음을 다하고 그 끝을 신중히 하여 임금의 마음을 계옥(啓沃)11)하고 백성들에게 이로움과 혜택을 베풀기를 바랐네. 그렇다면 어찌 국가의 다행이 될 뿐이겠는가. 사림의 영광 또한 클 것이네. 그러나 출처(出處)의 정밀한 의리로써 논하자면 식자(識者)에게는 반드시 불만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네.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조정에서 장차 나를 부를 것이라고 하니 우려가 적지 않네. 생각건대 나는 참으로 재주와 덕이 없고 설령 재주와 덕이 있더라도 지금이 어찌 일을 할 만한 때이겠는가. 어제 이 대감(李大監) 성렬(聖烈)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비록 소명(召命)이 있더라도 마땅히 사양하고 한 발짝도 문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이 대감이 답하기를 '제가 전일에 입시하였을 때에 상께서 「곽(郭) 아무개12)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몰랐는데 그가 영남의 유명한 선비라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田) 아무개13)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신이 우러러 존경하는 유현(儒賢)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내가 전 아무개를 발탁하여 임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유현을 발탁하여 임용하는 것이 어찌 성덕(盛德)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허례(虛禮)에만 얽매여 실상이 없게 된다면 천고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곽씨로 인하여 문장(文丈)14)을 물은 것이라 실제로 발탁하여 등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니, 문장에게는 필시 소명이 없을 것입니다. 운운.' 하였네.이제는 염려를 놓았지만 일은 미리 알기 어려운 법이니 끝내 소명이 없다면 참으로 개인적인 다행이네. 그러나 만약에 성심으로 돈유(敦喩)하기를 두세 번에 마지않는다면 몸은 비록 출사(出仕)하지 않더라도 정의(情義)가 있는 바에 또한 무심히 아무 일도 없으면서 한 마디도 진언하지 않기는 어렵네.만약에 진언한다면 《맹자》에서 이른바 '그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한다.[格其非心]'는 것과 《대학》에서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을 먼저 거론하여 고하지 않을 수 없네. 《중용》에서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복장을 갖춰 입고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齊明盛服 非禮不動]'라고 한 것과 《예기》에서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빛을 귀담아 두지 않고 눈여겨 두지 않고, 음란하고 사특한 예절이 마음에 접하지 않도록 한다.[奸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라고 한 것은 몸을 닦는[修身] 방법인데 상이 능하지 못한 것이니, 그 다음은 이것으로 고하여 관을 쓰지 않고는 대신을 보지 않게 하고, 또 무기(巫妓)를 내쫓아 궁중을 깨끗하게 하겠네. 첩을 아내로 삼는 것은 오패(五覇)도 인정하지 않은 것인데15) 어찌 후궁을 황후로 올릴 수 있겠는가. 이는 제가(齊家)의 큰 관건이니, 황후를 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고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러한 뒤에야 국정의 득실을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집안이 다스려진 뒤에 국가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네.그러나 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성학(聖學)을 권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경연(經筵)을 복설(復設)하여 강학을 그치지 않아야 하네. 이것이 《대학》에서 격치(格致)16)를 우선으로 삼은 까닭이네. 비록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만약 실천이 충실하지 못하면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니, 이것이 《대학》에서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으로써 요체로 삼은 까닭이네. 이 두 가지는 또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혹 천려일득(千慮一得)17)이 될까? 그대의 생각에는 어떻게 여기는가?" 癸卯九月廿二日夜, 先生有腰痛, 呻吟作苦. 命澤述安排衾枕, 解衣而臥, 使按痛處, 旋復起坐, 謂澤述曰: "今國事危如累卵, 誠存亡之秋也. 聖上擧在野讀書之士, 置之廊廟而授以參贊之職, 甚盛事也. 以此庶望聖德之進而國運之亨也. 惟祝其盡心王室, 克愼其終, 啓沃君心, 利澤生民也. 然則豈獨爲國家之幸? 士林之榮亦大矣. 然論以出處之精義, 則識者必有不滿矣. 有人傳言'朝家將召鄙人', 憂慮不淺也. 念此固無才德, 設有才德, 此豈可爲之時乎? 昨與李台【聖烈】書曰: '吾則雖有召命, 只當有辭而不出門一步地. ' 李台答曰: '某前日入侍, 上問「郭某何如人」, 某對「臣未嘗知, 而聞其爲嶺南名士也」. 「田某何如人」, 某對「臣所宗仰而儒賢也」. 上曰「吾欲陞用田某, 何如」, 某對「陞用儒賢, 豈非盛德事? 若縻以虛禮而無實, 則爲千古所笑, 可深戒也」. 此蓋因郭氏而詢及文丈, 非實欲陞用也, 文丈則必無召命. 云云. ' 今則可弛慮也, 然事難預知, 終無召命, 則誠私幸. 若誠心敦喩, 再三不已, 則身雖不出, 情義所在, 亦難恝然無事而不進一言也. 若進言, 則《孟子》所謂'格其非心'者, 《大學》所謂'正心'也, 不可不首擧以告之. 《中庸》曰'齊明盛服, 非禮不動', 《記》曰'奸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 此修身之法, 而上之未能者, 次當以此告之, 不使不冠而見大臣, 又使迸逐巫妓, 肅淸宮中. 以妾爲妻, 五伯之所不與, 豈可以後宮陞后乎? 此齊家之大關也, 不容不簡擇皇后, 是不可以不告也. 然後乃可言國政得失, 此所謂家齊而後國治也. 然欲知正心修身齊家之理, 聖學不可不勉, 當復設經筵, 講學不輟, 此《大學》所以格致爲先也. 雖已知之, 若行得未實, 終不濟事, 此《大學》所以誠意爲要也. 此二者又不可以不告也, 此或爲千慮之一得耶, 君意以爲如何?" 낭묘(廊廟)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는 건물을 뜻하는 말로,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계옥(啓沃)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곽(郭) 아무개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을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한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고종(高宗)을 독대해서 구국의 의견을 상주한 것을 계기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다. 1919년 파리장서에서 대표로 추대되었다가 옥고를 치렀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여독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면우집》이 있다. 전(田) 아무개 저자의 스승인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문장(文丈)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 여기서는 전우를 가리킨다. 첩을……것인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에서 제후들과 맹약한 다섯 가지 중의 하나를 말한 것으로,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오패(五覇)는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진 목공(秦穆公)ㆍ초 장왕(楚莊王)ㆍ송 양왕(宋襄王)을 가리킨다. 격치(格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준말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천려일득(千慮一得) 어리석은 자도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한 가지쯤 좋은 꾀를 낼 수 있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의 "지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잘못이 있고, 우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광부의 말이라도 성인은 채택한다고 하는 것이다.〔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 聖人擇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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