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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先妣墓文 유세차(維歲次) 정사년(1917) 7월 임진삭(壬辰朔) 26일 정사일(丁巳日)에 효자 택술(澤述)은 감히 현고(顯考) 학생부군(學生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선군(先君)께서 평소 저를 돈독히 가르쳐 주신 덕에197) 불초한 제가 그지없는 은혜를 받아 다행히 사람 옷을 입은 소나 말의 꼴198)은 면하였습니다. 다만 셋째와 넷째 두 아우는 가장 늦게 태어난 탓에 잘 인도해 주시는 가르침199)을 끝마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계제(季弟) 억술(億述)이 근래에 절실히 학문에 뜻을 두어 이미 간재(艮齋) 전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의 문하를 귀의처로 정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 밝으신 존령께서는 지성(志誠)이 얼마나 진실한 지를 살피셨을 것입니다. 불초한 저는 맹세컨대 서로 권면하여 집안의 명성을 잇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가만히 도와주시고 묵묵히 인도해 주시어 그 몸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소서. 스승과 제자의 분수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라,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서 공경히 그 사유(事由)를 고합니다. 維歲次丁巳七月壬辰朔二十六日丁巳, 孝子澤述, 敢昭告于顯考學生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竊惟先君平日, 篤於義方, 不肖受恩罔極, 幸免馬牛之裾.但叔季二弟, 其生最後, 未卒式穀之誨, 是爲幽明之恨.何幸季弟億述, 近切志學, 已定依歸於艮齋田先生之門.尊靈於昭, 應鑑志誠之虛實.不肖誓與交勖, 用繼家聲.尙冀冥佑默導, 俾成厥身.師生定分, 其事至重.謹以酒果, 祗告厥由. 저를……주신 덕에 원문은 '篤於義方'이다. '의방(義方)'은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사람……꼴 마우금거(馬牛襟裾)와 같은 말이다. 이는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힌다는 뜻으로, 주로 학식이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사람이 고금의 일에 통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 옷 입혀 놓은 꼴이라네.[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6》 잘……가르침 원문의 '식곡(式穀)'은 자식을 잘 인도하여 훌륭히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뽕나무 벌레 새끼를 나나니벌이 업고 가도다. 네 자식을 잘 가르쳐서, 착한 것을 닮게 하라.[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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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妣墓文 유세차 병인년(1926) 11월 무진삭(戊辰朔) 18일 을유일(乙酉日) 남지(南至 동지(冬至))에 효자 택술은 삼가 과일을 갖추어 놓고 현비 유인 최씨의 권조(權厝)200)한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고합니다.오호라! 효경(孝敬)과 덕선(德善)을 지닌 우리 선비에 대해 하늘은 반드시 살펴보았을 것이고, 신께서는 응당 들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생전에 한 평생 동안 마음에 괴롭고 생각에 걸리며201) 부지런히 애쓰도록 하였으니, 죽어서는 만세토록 유택(幽宅)에서 편안히 자리 잡고 계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침내 임시로 합부(合祔)하여 편안하지 못하게 하고 허둥지둥하다가 자리를 잘못 잡아 이미 매장한 것을 곧바로 옮기도록 하는 것입니까. 하늘은 기필할 수 없고 신도 믿기 어려운 것, 이것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까. 오호라! 애통합니다. 하늘은 기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신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초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제가 쌓은 악행이 위로 포개져 도달한 결과일 것입니다. 일이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나와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지라,202) 자갈에 뒤덮이고 풍우도 가리지 못한 채로 둔 지가 이제 8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부터 거처하고 왕래하며 관례와 혼례를 행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사(人事)를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행세하고 있으니, 이다지도 불초한 저는 미련하고 모집니다. 다만 아주 조금의 아직 사라지지 않은 떳떳한 본성이 있어 오장(五臟)203)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타들어가고 두 다리는 묫자리를 찾느라 온 산을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그러나 완전히 미련하고 모진 사람이 약간의 양심(良心)이 있다한들 어찌 이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하늘이 살펴보고 신이 들어주는 것은 그러할 이치가 없다면야 그만이지만, 만일 있다면 효경(孝敬)한 선비(先妣)를 살피지 않고 누구를 살피겠으며, 덕선(德善)한 선비에 대해 듣지 않고 누구에 대해 듣겠습니까. 그 정천(定天)과 정신(正神)이 저의 불초함과 불효함 때문에 끝내 선비를 돕지 않지는 않을 줄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다만 아직 일을 이루기 전이기에 이 마음이 애타고 근심스러워 하루가 삼추(三秋)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처럼 천시(天時)가 바뀌고 일양(一陽)이 벌써 생겨나는 때가 되었는지라204)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205) 애통하고 사모함이 더욱 새로워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기에 삼가 저의 심정을 쏟아냅니다. 삼가 존령께서는 살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維歲次丙寅十一月戊辰朔十八日乙酉日南至, 孝子澤述, 謹具果物, 哭告于顯妣孺人崔氏權厝之墓.嗚呼! 我先妣之孝敬德善, 天必鑑, 只神應聽之.生而使之困衡勤苦於一世, 沒可使之安定幽宅於萬齡, 胡乃權祔未得安寧, 倉卒錯占, 旣厝旋移.天不可必, 神難諶斯者, 乃至於此乎.嗚呼痛哉.非天之不可必, 非神之不可諶, 乃不肖不孝之積惡, 上累而到之也.事出不意, 進退維谷.薄掩乎石田風市之中者, 于玆八朔.猶且飢打食困打眠, 以至居處往還, 冠昏祭祀, 凡干人事, 無不自同平人, 若是乎不肖之頑忍也.但其一點秉彛之未泯, 五內幾焚於一日, 雙脚亂走乎萬山.然十分頑忍, 一分良心, 奚足以有成.雖然天鑑神聽, 無其理則己 ; 苟有之, 不於先妣之孝敬而何鑑, 不於先妣之德善而何聽.吾知其定天正神, 不因不肖不孝而終不佑於先妣也.惟是未遂之前, 此心焦悶, 一日三秋.遽玆天時改移, 一陽已生, 歲不我與.痛慕益新, 情不自已, 謹寫厥衷.伏惟尊靈, 庶垂鑑諒. 권조(權厝) 좋은 묏자리를 구할 때까지 임시로 매장하는 것이다. 권폄(權窆), 또는 중폄(中窆)이라고도 한다. 마음에……걸리며 원문의 '곤횡(困衡)'은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마음에 괴롭고 생각에 걸린 뒤에 분발하며, 얼굴빛에 징험되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 깨닫는다.[困於心, 衡於慮而後作, 徵於色, 發於聲而後喩.]"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나아갈……없는지라 《시경(詩經)》 〈상유(桑柔)〉에 "붕우들이 이미 참소하여 서로 선하게 하지 않도다. 사람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고 하는구나.[朋友已譖, 不胥以穀, 人亦有言, 進退維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장(五臟) 원문의 '오내(五內)'는 우리 몸의 다섯 가지 장기(臟器)인 오장을 이른다. 일양(一陽)이……되었는지라 동지(冬至)에 양기(陽氣)가 처음으로 발동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그러므로 동지를 일양이라고도 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11월은 복괘(復卦)에 해당되어 일양이 맨 밑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참고로, 그 소(疏)에 "동지에 일양이 생긴다.[冬至一陽生.]"라고 하였다. 세월이……않으니 《논어》 〈양화(陽貨)〉에 "해와 달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지라. 세월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구나.[日月逝矣, 歲不我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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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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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와 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先妣墓文 유세차 을축년(1925) 7월 을해삭(乙亥朔) 27일 신축일(辛丑日)에 불초자(不肖子) 택술은 망극한 재앙을 만나 성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매우 애통해하며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峰居士) 부군(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아룁니다.오호라! 우리 현고께서는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품어서 일찌감치 과장(科場)에서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지푸라기를 줍듯이 공업을 쉽게 이루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자(孤子)로서 집안 살림을 맡은206) 뒤에는 조부모님과 어머니에 대해 변변찮은 음식207)으로도 봉양하기가 어렵게 되자, 거업(擧業 과거 공부)을 그만두고 몸소 밭을 갈면서도 담박하여 외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불초한 제가 조금 장성하여 글을 읽을 줄을 알게 되자, 평생 완수하지 못한 지업(志業)을 저에게 이루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엄하게 독책하고 권면하여 깨우쳐주며 격려하고 점차적으로 연마시키며 성취시키는 모든 방법을 매우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글을 지으면 점찬(點竄)208)을 직접 해 주시어 완본을 이루도록 하고, 글을 외우면 살피고 점검하기를 부지런히 하시어 거질(巨帙)을 이어 다 외울 수 있도록 하셨으니, 대개 불초한 제가 오늘날 대강이나마 문자를 이해하게 된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께서 잘 인도해 주신 가르침209) 덕분입니다.이윽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되자, 불초한 저를 불러다 고하시기를 "옛말에,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210)라고 하였는데,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기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다지도 변하였으니, 학문을 함에 비록 여력이 있다고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 사학(斯學 유학(儒學))의 요점은 오로지 도를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하고 성인이 전수하신 것을 이어서 명성과 녹리(祿利)의 사이에 참여하지 않는 데에 있다. 지금 세상 학문의 종주(宗主)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계시니, 너는 찾아가 뵙도록 하라." 하시고는, 마침내 짐을 꾸리고서 봉산(蓬山) 월명암(月明菴)의 여차(旅次)에서 절하고 모셔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간옹(艮翁 간재)께서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의 집에 방문했던 옛 일211)을 인용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레가 임하여 하룻밤을 묵음에 수레를 탄 장자(長子)212)와 금패(襟珮)213)를 착용한 후영(後英)들이 구름처럼 많이들 모여드니, 부군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습니다. 불초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현인(賢人)이 지나는 곳마다 산과 시내에는 생기가 돌고, 쑥대와 싸리에는 광채가 더해지는 법이다. 비록 가령 네가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의 즐거움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폐백을 갖추어 천안(天安)의 금화산(金華山) 안에서 사제간(師弟間)의 분수를 정하게 하고는, 장원을 팔아서 여비(旅費)를 마련하여214) 해마다 반드시 두 차례씩 찾아오셨습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귀의할 바를 얻고 대강이나마 도리를 아는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의 가르침215) 덕분입니다. 온 마음이 성(性)을 높이고 우러르며 일마다 성에서 법을 취하며 어진 이를 구하는 정성216)과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217)에 이르러서는 종신토록 변치 않았고, 옛것을 좋아하라는 교훈과 본성을 높이라는 지결(旨訣)은 백발이 되어서도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는 또한 부군이 간옹에 대해 순수하게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은 스승으로 삼은 것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간옹을 스승으로 삼고 부군을 아비로 삼았습니다. 대개 선사(先師)의 운위(云爲)는 어떤 것인들 오묘한 도리와 정밀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오직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218) 군신(君臣)과 화이(華夷)의 경계를 엄하게 하고 본성을 높이며 옳은 것을 구하고 죽어도 변치 않은219) 지결, 이것만을 제일의(第一義)220)로 삼았습니다. 부군의 언행(言行)도 어떤 것인들 아름다운 가르침과 훌륭한 행적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그중 최고는 사정(邪正)의 구분과 의리(義利)의 분별을 분명히 판단하여 동난(東亂)221)을 만나 이웃에서 사귄 비적(匪賊)의 괴수(魁首)를 끊어버리고, 단발령이 내려지자222) 부자간에 똑같이 죽기로 맹세한 것이니, 이는 평생 지절의 일부분223)이니, 불초한 제가 감화되고 가슴에 새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私)와 시비(是非)의 길에서 전전긍긍하여 감히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224) 비록 이해(利害)와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이 앞에 닥쳐와도 맹세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려서 아비와 스승의 덕에 누를 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오호라! 사문(斯文)이 곤액을 당하여 간옹의 문하에 오진영(吳震泳)225)이라는 자가 나와 간사하고 패악하며 거짓되고 기만하는 짓을 함이 끝이 없습니다. 일제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뜻을 저버리고서 경부(京府)에 원고를 보내어 스승의 덕을 더럽히고,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거나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는 등의 말226)을 지어내서 스승을 '인가하신 뜻이 있으셨다.'거나 '인가하신 가르침이 있으셨다.'고 무함하며, '청원하여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의 남기신 편지227)를 버리고서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사의 해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의리와 서릿발처럼 엄하고 절벽처럼 우뚝한 절조가 흐릿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차마 듣지 못할 기롱과 비난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넘치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는 망극한 스승의 무함을 애통해하고 크게 손상된 세도(世道)를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론을 거두어 취해서 남기신 편지를 배포하여 선사의 뜻을 밝히고, 성토하는 글을 보내 오진영의 죄를 바로잡아 스스로 스승을 높이고 도를 호위하는 뜻을 붙였으니, 이는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없어지지 않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높이는 것을 자신(自信)한 것입니다.아, 저 오진영은 마침내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고 판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토하는 글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강태걸을 시켜 진천 경찰서(鎭川警察署)에 고소한 다음, 재차 전주 검사국(全州檢事局)228)에 고소하도록 하고서 '명예손해(名譽損害)'와 '업무방해(業務妨害)'에 대한 두 가지 법률을 변무인(辨誣人)에게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이 때문에 통문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저 사람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달 초 2일에 이미 검사국의 조사를 받았는데 힘써 항변하여 굽히지 않았고, 이번 달 25일에 또 재차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지 않았으니,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어찌 끝낼 수 있겠습니까. 끝낼 수 없다면 의리상 부모가 남겨주신 당당한 칠 척(尺)의 몸이 오랑캐에게 치욕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으니, 다만 마땅히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고229) 웅장(熊掌)을 취하여230) 스스로 한결같이 섬기며231)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다하면 될 뿐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어려서부터 완악하고 몽매하여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닦지 못하였는지라 죄역(罪逆)이 누적되어 스물여섯 살에 현고(顯考)께 화가 뻗쳤고, 그 8년 뒤에 또 현비(顯妣)를 잃었으니, 원통해하고 통곡하며 뒤늦게 뉘우쳐봐야 다시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히 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진실로 불초한 저의 계술(繼述)232)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만 부조(父祖) 두 대와 고비(考妣) 네 위(位)를 선영(先塋)에 임시로 매장한 것이 길이 평안하시기에 부족함이 있기에, 앞으로 경영하여 모두 받들어 면례(緬禮 이장(移葬))해서 불초한 저의 효도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부군의 다하지 못한 정성을 뒤늦게나마 이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모두 불초한 저의 지식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의 학문이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불러온 결과인지라, 불효 중에서도 더욱 심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비록 그러나 부군께서 평소 불초한 저에게 바라시던 것은 다만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고 춘추의 의리를 지켜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고서 죽도록 하고자 한 것뿐이었으니, 오늘날의 의체(義諦)는 혹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불효를 행하였습니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선대의 일은 계제인 억술이 있으니, 거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부군의 효학(孝學)ㆍ 절의(節義)와 선비의 효경(孝敬)ㆍ 덕범(德範)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재 선사께서 천표(阡表)와 행장발(行狀跋)에 밝혀 찬미해주셨으니, 대명(大名)의 신필(信筆)인지라 충분히 백세토록 썩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의 불효 가운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선사께서는 또 불초한 저의 뜻과 학문에 대해 표문에서는 선고에 근본을 미루어주시고,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고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233)으로 행장의 발에서 불초한 저를 기약해 주셨으니, 그렇다면 불초한 저의 평생 동안의 한 번 말하고 한 번 움직이는 동안의 선악이 부모의 영욕(榮辱)이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내몰리고 엎어지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을 만남에 있어서이겠습니까.옛날에 주자(朱子 주희(朱熹)는 정자(程子)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영광으로 여겼고,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宋時烈)은 황고(皇考)의 묘에 고한 글234)234)에서 이를 인용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현인과 더불어 한가지로 파패(破敗)당한 것이 영광스러운 일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불초한 저 또한 감히 스스로 선사께서 무함을 받은 날 선사를 무함한 적의 손에 죽는 것을 비록 감히 주자와 송 선생이 당한 일에 참람되게 비의할 수는 없겠지만, 거의 천년 뒤에는 불초한 저의 한 번의 죽음이 어버이에게 영광을 드린 것인지, 치욕을 끼친 것인지에 논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오호라! 말은 이쯤에서 마치지만 마음은 다함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존경께서는 이 심정을 밝게 살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十七日辛丑, 不肖子澤述, 遭禍罔極, 性命不保.銜痛致哀, 謹稽首, 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嗚呼! 惟我顯考.負超羣之材, 抱立揚之志, 早飛英於場屋, 擬功業之芥拾.夙孤當室之餘, 層堂篤老, 菽水爲難, 則廢擧躬耕, 泊然而不慕外也.及乎不肖稍長, 能知讀書, 則欲以生平未遂之志業, 責成於不肖.凡所以嚴督獎喩激厲漸磨成就之道, 靡極不至, 製課而點竄之是親, 完本成焉 ; 誦程而考飭之是勤, 巨帙聯焉.蓋不肖今日粗解文字者, 秋毫皆府君之式穀也.已而世道大變, 無復可望, 則召不肖而告之曰 : "古有云, '學而優則仕.' 學之優, 誠難矣.然世變如許, 學雖優, 將安用諸.且斯學之要, 亶在明道誠身, 全天賦紹聖傳, 無與乎名祿之間.今世學問宗主, 艮齋田先生在, 汝往謁之."遂治裝, 令拜于蓬山之月明菴旅次.得艮翁之引郭林宗訪茅容故事.駕臨一宿, 長者車轍, 後英襟珮, 林林如雲, 則府君喜形于色.謂不肖曰 : "賢人所過, 山川生色, 蓬蓽增彩.雖使汝占巍科, 豈如今日之樂." 因具贄, 使定分于天安金華山中, 鬻庄辦斧, 歲必再度.嗚呼! 不肖得所依歸, 粗識道理者, 秋毫皆府君之義方也.至於心心尊仰, 事事取法, 緇衣之誠, 臧倉之辨, 終身而不渝 ; 好古之規, 尊性之訣, 白首而彌篤, 此又府君之於艮翁, 不純師之師也.嗚呼! 不肖以艮翁爲師, 府君爲父, 蓋先師之云爲, 何莫非妙道精義, 惟是絶島獻靖, 嚴君臣華夷之防, 尊性求是至死不變之訣, 爲第一義也 ; 府君之言行, 亦莫非嘉訓懿蹟, 而最是判邪正之分義利之辨, 遭東亂而絶匪魁於隣交, 當薙變而誓父子之同死者, 爲平生志節之一斑也.不肖之所擩染服膺者如此.故凡於公私是非之塗, 兢兢然不敢放過, 雖利害禍福死生之當前, 誓不欲負父師敎而累父師德矣.嗚呼! 斯文窮厄, 艮翁之門.不幸有吳震泳者出, 奸悖誣罔, 罔有紀極.舍無認而投稿京府, 以累師德, 造料量不拘等說, 誣師以認意認敎, 棄請願自辱之遺書, 令其徒姜泰杰出認而印稿.於是先師日光玉潔之義, 霜嚴壁立之節, 昧昧破破, 而不忍聞之譏罵, 漲天溢地矣.不肖痛師誣之罔極, 憂世道之大害, 竊不自量.收取公論, 布遺書而明先師之義, 行討文而正震泳之罪, 自附於尊師衛道之義.蓋出於是非不泯之天, 而自信其奉遵父師之敎也.噫! 彼震泳.乃以認印之難成, 販賣之未售, 爲討文之沮害.使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于辨誣人.而不肖則以製通也.故尢爲彼之所甘心.去月初二日, 已被檢局調訊, 力抗不屈.今月廾五日, 又被再呼不往.前頭之禍, 安得以已乎.無己則義不容以父母所遺之堂堂七尺, 受辱於閭夷, 只合輕鴻毛而取熊掌, 以自盡事一致死之義而已.嗚呼! 不肖幼少頑昧, 不修子職.罪逆積重, 弱冠有六, 禍延顯考.厥後八年, 又喪顯妣, 寃酷痛號, 追訟靡逮.承先裕後, 不墜家聲, 固不肖繼述之責.而惟是父祖兩世考妣四位, 權厝先塋有欠永安.方且經紀, 幷奉緬襄, 少洩不肖不孝之恨, 追繼府君未盡之誠.此事未遂, 遽當大禍, 莫非不肖知不能量力, 學不能保身而致之, 則不孝中尢不孝也.雖然, 府君平日所望於不肖者, 惟欲奉聖賢之敎, 守春秋之義, 無忝所生而死, 則今日義諦, 或得免虧, 行辱親之不孝.而先事之未遑, 有季弟億述在, 庶可以有恃也.至於府君之孝學節義, 先妣之孝敬德範, 俱蒙艮翁先師闡美於阡表狀跋, 大名信筆, 足以不朽於百世, 則不肖不孝中一幸, 旣在乎此.而先師又以不肖之志學, 推本先考於表文, 以顯親來許, 期不肖於狀跋.然則不肖生平一言一動之善惡, 莫非父母之榮辱.矧此顚沛之際死生之大者乎.昔朱子遭請斬於攻程之時, 自以爲光華.尢菴宋先生, 引此於告皇考墓文, 以證與栗、牛兩賢同其破敗之爲榮.不肖亦敢自以爲以先師被誣之日見死於誣師賊者, 雖不敢僣擬於朱宋之所遭.庶千載之下, 有論不肖一死之貽其親者, 是榮是辱矣.嗚呼! 言止此而意無窮.伏惟尊靈, 昭鑑此衷.謹告. 집안 살림을 맡은 원문은 '당실(當室)'이다. 이는 부친이나 형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대부분 적자(嫡子)가 당실을 했으므로 적자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변변찮은 음식 원문의 '숙수(菽水)'는 콩과 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데, 곧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효도를 제대로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를 극진히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바로 효라 이른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점찬(點竄)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고치고 다듬는 일을 말한다. 당(唐)나라 왕발(王勃)이 비송(碑頌)을 지을 때마다 미리 몇 되의 먹을 갈아 놓고 한번 붓을 잡고서 써 내려가면 한 번도 점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복고(腹稿)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語資》 잘……가르침 00쪽 주 00) 참조. 학문을……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보인다. 곽임종(郭林宗)이……일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현자를 알아보고 그를 정성스레 모셔가려고 했던 노력에 대한 내용을 말한 듯하다. 참고로, 《명현씨족언행유고(明賢氏族言行類稿)》 권24에 "옛날 모용은 농가의 아들이었다. 닭을 잡아서는 요리하여 그의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곽임종(郭林宗)에게는 채소반찬으로 접대하니, 곽임종이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하고 나서 학문할 것을 권고한 끝에 그가 사해의 명사(名士)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수레를 탄 장자(長子)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의 수레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패(襟珮) 푸른 옷깃을 두르고 푸른 패옥(佩玉)을 찬 유생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옥,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비(旅費) 마련하여 원문의 '판부(辦斧)'는 도끼를 마련한다는 말로, 도끼란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여비를 의미한다. 이는 《주역(周易)》 손(巽)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물자와 도끼를 잃는다.[喪其資斧]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가르침 원문은 '義方'이다. 자세한 내용은 00쪽 주 00) 참조. 어진……정성 원문의 '치의(緇衣)'는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에 "검은 옷이 잘도 어울리는 분, 해지면 내가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라고 하였고, 또 《예기》 〈치의〉에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치의〉 편처럼 한다.[好賢如緇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구하려는 정성을 의미한다.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 미상(未詳)이다.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 간재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간 바 있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처한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죽어도 변치 않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곤궁했을 때의 뜻을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君子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章句 第10章》 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동난(東亂) 1894년(고종31)에 있었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들어왔던 일본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고는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부분 원문읜 '일반(一斑)'은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아이도 역시 대롱으로 표범을 엿보면서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此郞亦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롱 구멍을 통해 표범의 얼룩무늬를 엿본다는 것으로, 전체의 모습을 조관하지 못하고 겨우 사물의 일부분만을 보는데 그치는 아주 협소한 안목이나 소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世說新語 方正》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9 〈답진부중(答陳膚仲) 4〉에 "근래에 벗들의 독서가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는데도 곧장 이와 같이 대충대충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近覺朋友讀書多是苟簡, 未曾曉會得, 便只如此打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타과(打過)'에서 "그냥 지나치다는 말과 같다.[猶言放過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주희(朱熹)가 진공석(陳孔碩)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집안일이 산적하여 학문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으니, 이는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바로 공부를 하는 현장일 따름이니, 매사에 도리를 꿰뚫어 데면데면 지나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承以家務叢委妨于學問爲憂, 此固無可奈何者. 然亦只此便是用功實地, 但每事看得道理, 不令容易放過.]"라고 한 데서도 보인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말 오진영이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이병은(李炳殷)에게 보낸 편지에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청원하여……편지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사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반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强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검사국(檢事局) 일제 강점기에 검사(檢事)가 일을 보던 곳을 가리킨다. 기러기…여기고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웅장(熊掌)을 취하여 목숨보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좋아하고 웅장도 내가 좋아한다. 하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도 내가 좋아하고 의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결같이 섬기며 원문의 '사일(事一)'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준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의리와도 통한다.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글을 가르쳐 준 스승과 밥을 먹게 하여 준 임금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말하기를 "백성은 부모, 스승, 임금의 셋에서 사는지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國語 晉語》 《小學集註 明倫》 계술(繼述) 효자가 선세(先世)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무릇 효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조상의……것 원문의 '래허(來許)'은 《시경》 〈하무(下武)〉에 "앞으로 올 날 밝히어, 조상의 발자취를 이으면, 아, 만년이 되도록 하늘의 복 받으시리라.[昭茲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을 의미한다. 우암(尤庵)……글 《송자대전( 宋子大全)》 권151의 〈고황고수옹선생황비정경부인곽씨묘문(告皇考睡翁先生皇妣貞敬夫人郭氏墓文)〉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維歲次) 갑신년(1944) 6월 을유삭(乙酉朔) 6일 경인일(庚寅日)에 효자(孝子) 택술(澤述)은 삼가 맑은 술을 차려놓고 감히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峯居士) 부군(府君)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오호라 우리 집안은 嗚呼吾家누대에 걸쳐 단명하였습니다 累世短壽부군께서 임종(臨終)할 때에 府君臨終불초한 저의 손을 잡고는 執不肖手우리 할아버지는 나이가 曰吾祖年삼십 이세로 세상을 마쳤고 三十二畢아버지는 사십 삼세였으며 父四十三이제 나는 오십 일세이니 今吾五一매 대마다 십 년의 수명이 더해진 것이다 每世加十너는 마땅히 회갑까지는 살 것이요 汝當回甲너의 자식은 칠순까지는 살 것이니 汝子七旬그 이치가 기필할 만하다고 하셨는데 其理可必이 말이 너무나도 슬퍼 此言絶悲듣자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聞之心折불초한 저의 올해 나이가 不肖今年과연 하신 말씀에 부합되는지라 果符所言부군의 그날의 원통함에 庶慰府君위로가 되었을 것이니 當日之寃신명과 사람의 사이에 神人之際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亦云可慶그런데 마침 이 세상의 화란을 당하여 屬玆世禍죽음의 운명이 가까이 다가오니235) 近止大命마음 썩히고 머리 아파하며 腐心疾首근심과 울분이 함께 생겨납니다 憂憤相幷늙은이들이야 괜찮지만 哿矣老者자성236)들이 애달픕니다 哀哉子姓살아생전 매우 아끼시던 마음이 平日至愛유명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何間幽明후손들을 보전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庶保後昆우러러 존령(尊靈)을 믿습니다 仰恃尊靈부디 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甲申六月乙酉朔六日庚寅, 孝子澤述, 謹以淸酌之奠, 敢昭告于顯考碧峯居士府君之墓.嗚呼吾家, 累世短壽.府君臨終, 執不肖手曰 : "吾祖年, 三十二畢.父四十三, 今吾五一.每世加十, 汝當回甲.汝子七旬, 其理可必." 此言絶悲, 聞之心折.不肖今年, 果符所言, 庶慰府君當日之寃.神人之際, 亦云可慶.屬玆世禍, 近止大命.腐心疾首, 憂憤相幷.哿矣老者, 哀哉子姓.平日至愛, 何間幽明.庶保後昆, 仰恃尊靈.尙饗. 마침……다가오니 원문의 '근지대명(近止大明)'은 대명근지(大命近止), 즉 기근이 들거나 왜적이 침입하여 전란에 휩싸인 것 등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위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죽음이 가까운지라, 우러러볼 곳이 없으며 돌아볼 곳이 없노라.[大命近止, 靡瞻靡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일을 가리킨다. 자성(子姓) 자손을 의미하는데, 특히 손자(孫子)와 손녀(孫女)의 항렬을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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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 을유년(1945) 2월 임오삭(壬午朔) 24일 을유일(乙酉日)에 효자 택술은 감히 현고 벽봉거사 부군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삼가 생각하건대 伏以옛날 문정공237) 昔文貞公우리 현조께서는 惟我顯祖도학 이외에도 道學以外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하였으니 名世文章동벽238)의 정밀함을 품부 받고 稟東壁精서경239)의 솜씨를 독차지하였습니다 擅西京手시와 표문에 가장 뛰어나 最長詩表고려와 조선에 으뜸이었으니 冠維麗韓식견이 있는 이들의 숭상하는 논의는 有識尙論모두 같아서 이론이 없었습니다. 一辭無異이십이 대를 지나 歷世廾二부군이 이으셨는데 府君繼之뛰어난 자질을 지녀 卓然之資이미 그 닮은 모습을 보이니 旣見其肖오직 시와 표문에 뛰어나 惟詩若表잘하는 것 역시 똑같았습니다 長處亦同젊은 시절의 예봉은 少日銳鋒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고 人莫敢敵늘그막에는 더욱 순숙해져서 晩更純熟석장들이 감탄하고 칭송하였으나 碩匠賞稱마침내 그 마음을 쓰는 것은 乃其用心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則不在此자신에게 돌이켜 실천하며 反己實踐약례240)하고 구인241)하였으니 約禮求仁어디서나 한결같이 一彼一玆경중을 분별하였습니다 輕重是判평생 동안의 문장은 生平文字다만 약간 편뿐이었는데 止若干篇오직 그 많지 않기 때문에 惟其不多현명함을 더욱 볼 수 있으니 尢見可賢소자들이 공경히 보전하여 小子敬保옥을 잡은 듯 물 가득찬 그릇을 받들 듯242)하였습니다 執玉奉盈이 상전이 벽해되는 세상의 변화243)를 만나 値此滄桑예상치 못한 일을 어찌 대비나 하였겠습니까 不虞曷備이에 판각할 것을 도모하여 爰謀剞劂힘을 합친 자손들이 同力子孫날짜를 지정해두고 일을 끝마쳐서 指日竣功거의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庶幾不泯존경께서 묵묵히 도와주신 덕이니 尊靈默佑그 얼마나 다행입니까 何其幸歟거듭 우리 집안을 생각해 보건대 重念吾家고려 말 이후로 麗季以降칠백 년 세월 지나는 동안 閱年七百어질고 덕스러운 인물들이 서로 이어 賢德相承어떤 이는 향사에 배향되고 或享鄕祠어떤 이는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或作朝宰어찌 논저하여 豈無論著후세244)에 전할 만한 이가 없겠습니까 來許可傳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니245) 然無有乎매번 남몰래 통탄스러워하였습니다 每竊痛歎아마도 그 처음에 無乃其始편차와 인쇄에 소략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마는 編梓有踈비록 주밀하고 상세하게 하였더라도 抑雖周詳끝내 그 망실하였기 때문입니다. 終致其失문정의 문집 이후로는 文貞集後오직 부군의 문장뿐이니 惟府君文서로 아득히 마주하고 있는 것은 相對遙遙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亦不偶爾우리 집안의 일이 吾家有事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孰大於玆고금을 생각해 보니 俯仰古今슬픔과 경사가 매우 교차합니다 交切悲慶삼가 그 사실을 아뢰오니 謹告其實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冀垂鑑臨 維歲次乙酉二月壬午朔二十四日乙巳, 孝子澤述, 敢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之墓.伏以昔文貞公, 惟我顯祖.道學以外, 名世文章.稟東壁精, 擅西京手.最長詩表, 冠維麗韓.有識尙論, 一辭無異.歷世廾二, 府君繼之.卓然之資, 旣見其肖.惟詩若表, 長處亦同.少日銳鋒, 人莫敢敵.晩更純熟, 碩匠賞稱.乃其用心, 則不在此.反己實踐, 約禮求仁.一彼一玆, 輕重是判.生平文字, 止若干篇.惟其不多, 尢見可賢.小子敬保, 執玉奉盈.値此滄桑, 不虞曷備.爰謀剞劂, 同力子孫.指日竣功, 庶幾不泯.尊靈默佑, 何其幸歟.重念吾家, 麗季以降.閱年七百, 賢德相承.或享鄕祠, 或作朝宰.豈無論著, 來許可傳.然無有乎, 每竊痛歎.無乃其始, 編梓有踈.抑雖周詳, 終致其失.文貞集後, 惟府君文.相對遙遙, 亦不偶爾.吾家有事, 孰大於玆.俯仰古今, 交切悲慶.謹告其實, 冀垂鑑臨.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로, 문정(文貞)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권장하였고, 원종 때 유경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시록을 수찬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동벽(東壁) 문장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여기서는 김택술이 문장에 재능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진서(晉書)》 권11 〈천문지 상(天文志上)〉에 "동쪽 벽에 두 별이 있어 문장을 주관하니, 천하의 도서를 갈무리한 비밀 창고이다.[東壁二星, 主文章, 天下圖書之祕府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西京) 서한(西漢 전한(前漢)) 시대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문장이 크게 흥성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참고로, 이때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가의(賈誼), 사마상여(司馬相如), 동방삭(東方朔) 등이 있다. 약례(約禮) 예로써 요약한다는 말로, 예를 통해 몸을 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하였고, 또 《논어》 〈자한(子罕)〉 안연(顔淵)이 공자에 대해 "선생님께서 질서 있게 사람을 잘 지도하시되, 글로써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를 요약하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인(求仁) 인(仁)을 구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평가하여 말하기를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옷을……듯 공경히 보전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로서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있고, 온화한 기운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쁜 낯빛이 있고, 기쁜 낯빛이 있는 자는 반드시 온순한 태도가 있는 법이니, 효자는 마치 옥기(玉器)를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받들 듯 지극히 공손한 모습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하고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한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孝子, 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희(朱熹)의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에도 보인다. "컴컴한 방안에도 밝게 임하니 옥을 잡고 가득한 물그릇 들 듯이 조심하여 다급할 때나 잠깐 사이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有幽其室, 有赫其臨, 執玉奉盈, 須臾顚沛.]"라고 하였다. 《心經附註 卷4》 상전(桑田)이……변화 창상지변(滄桑之變)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고, 뽕나무밭이 변하여 큰 바다가 된다는 말로, 흔히 세상의 변화가 매우 심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창해상전(滄海桑田),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도 한다. 후세 원문은 '래허(來許)'인데, 이는 후세를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하무(下武)〉에 "밝도다. 후세에서 그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한다면 아, 만년토록 하늘의 복을 받으리라.[昭玆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도 없으니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문왕부터 공자까지 500여 년이니, 태공망과 산의생은 직접 보고서 문왕의 도를 알았고, 공자는 들어서 알았다. 공자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100여 년이니, 성인의 세대와 이처럼 멀지 않고 성인이 거주하던 곳과 이처럼 매우 가까운데도 아무도 들은 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 若孔子則聞而知之. 由孔子而來, 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師墓文 유세차 을축년 7월 을해가 초하루인 2월 병자일에 문인 김택술은 다가오는 두 번째 휘신(諱辰)246)에 감회가 이는데 끝이 없는 재앙의 변고를 당하여 삼가 글을 짓고 제수를 갖춰 간재 선생의 묘소에 고합니다."옛날 공자는 주나라가 쇠퇴함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고, 주자는 송나라 말기에 태어나 《강목(綱目)》을 지었으니, 모두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큰 경계를 엄격히 한 것입니다. 오호라! 우리 선생께서 도체의 근원에 통철하고 성(性)을 높이는 학문을 밝혀서 영원히 후대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은 천지의 대경(大經)과 사람의 대륜(大倫)이 아님이 없는데, 맞닥뜨린 때가 주나라나 송나라의 말세보다 심하니,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엄격한 경계는 선사(先師)의 거질의 원고 가운데 더욱 제일가는 의리입니다. 선사께서는 머나먼 바다 외로운 섬에서 서공(徐公)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247) 노중련(魯仲連)처럼 치욕을 품고 있었는데,248) 임금의 나라가 패망함에 이르자 피눈물을 흘리며 흰 상복을 입고서 생애를 마쳤으니, 또한 만년(晩年)에 대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선생의 도의와 행한 업적은 한말의 공자와 주자로, 백 대가 지나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249)어찌하여 천하는 오랫동안 사문(斯文)에 곤궁과 재액을 낳아서 불행하게도 패륜의 도적 오진영(吳震泳)250)이 문하에서 배출되어 선생의 의로운 경계를 파괴하여 무너뜨리고 선생의 뜻과 절개를 어둡게 덮어버립니까. 이윽고 또 다시 담장 안에서 창과 방패를 정비하고서 끝내는 오랑캐에서 손을 빌려 죽은 사람의 몸에 피를 흘리듯 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대개 그는 사려(邪戾)한 기를 모으고 교활한 본성을 품부 받은 자로 성질이 원래부터 스스로 일반적인 것에 어긋났었지만, 그러나 죄악이 커서 극에 달하기 전에는 누가 먼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약삭빠르고 방자하며 말을 잘하고 안색을 잘 꾸미며 온갖 양상으로 속여 제멋대로 술수를 부리고 사람을 현혹시키기 일을 즐겨하는 등의 폐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바로잡아주시고 채찍질 해주신 약석(藥石)을 또한 지극하게 베푸셨는데, 이른바 '이견(而見)251)은 사공(事功)을 중하게 여겨서 도의를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 선비 된 자가 아무개 궁과 통하여 아무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 '사공(事功)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식견이 저열한 어떤 사람이 나252)에게 다공(茶公)253)이 머리를 깎은 복철(覆轍)254)을 실천하라고 했다.'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앞서 엄한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고 할 밖에 무엇이겠습니까.그러나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고 문사와 변론이 능숙하니 명리(名理)255)를 밝히고 외부의 모욕을 막는 것에 도움을 준 자들이 또 때때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며, 식견이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권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리와 눈, 비와 이슬이 모두 가르침이 아님이 없다는 것에 해당합니다. 마땅히 그 배척함을 두려워하여 악을 제거하고 그 권장함을 기뻐하여 더욱 노력하여서 나 자신을 성취하고 사문의 후사(後事)에 힘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나쁜 습관은 제거하기 어려워서 본래 성질이 드러나 사공을 중시하고 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으니 원고를 간행하는 의논을 앞서서 외쳤습니다. 남을 이기기 좋아하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사사로움으로 호남 사림을 배체한 체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서울에서의 문집 인가를 도모하고 거질의 원고를 받들어 원수 놈의 관청에 바치며 책을 판매하는 도적놈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선사에게 대단히 누를 끼친 것입니다.게다가 자신의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는 사악한 생각으로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출판에 대해) 인가할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연이어 편지로 써서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업자가 스스로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일찍이 지시하셨다.'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상에 앉아 계시다가 진영에게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는 그대가 모름지기 잘 헤아려서 하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오호라! 사람을 속이는 죄도 나쁜데 더구나 스승을 속이는 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스승을 속이는 것은 큰 죄인데, 더구나 공자와 주자를 이어 《춘추》의 경계를 엄하게 지키는 큰 스승을, 대의를 파괴하는 일로서 속인다면 그 죄는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문하의 제자의 입장해서 해야 할 도리는 마땅히 매가 참새를 쫓듯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말고 담장에서 내쫓고 제자의 문적에서 삭제하여야 합니다.선사께서 평소에 동문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를256) 진심으로 바라며 선비들의 싸움을 마음 아파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니, 마땅히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수많은 편지에서 언급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믿게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위로 고하고 아래로 사죄하게끔 하는 것을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기하여 음험하다고 저를 지목하고 대중을 홀려서 미치게 만든다고 매도하면서, 오만하게도 자신은 옳다고 하여 일찍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놈에 청원하여 문집을 간행, 배포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니 삼가 절대로 따르지 말라.'257)고 한 편지가 나오자, 스승을 속인 죄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강경하게 서서 '죽음에 이르러도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니, 「헤아려서 하라」,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는 등의 말은 확실하다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에 오진영의 무리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아무개 공은 우리 선사께서 의발을 전하였으니,258) 어찌 속이는 말을 하겠는가. 「홀로 있을 때 명하신 것」은 증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해 알겠다고 답한 것259)에 해당하다.'라고 합니다. 이에 남기신 편지는 저 한 때의 일이고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은 이 한 때의 일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며, 남기신 편지와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이 나란히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도 있으며, 남기신 편지가 위조라고 여기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그 밖의 사람들은 이에 '오 아무개 옹은 고제(高祭)라. 스승의 마음을 깊이 아는 자인데 그 말이 어찌 속이는 데 이르겠는가. 아마도 아무개 옹260)께서 이런 의도를 지니고 이런 지시를 하셨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앉아서 비웃고 서서 팔뚝을 휘두르며 작게는 기롱하고 크게는 욕을 합니다. '이런 스승이 있으니 이런 제자가 있도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으니, 귀로 차마 듣지 못하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오진영이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이르는 자들은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편당을 지어 아부하며 나쁜 놈끼리 서로 도와 함께 나쁜 짓을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며, 선사께서 평소 오진영을 배척하는 엄한 가르침과 제자들이 편벽되고 잡박하여 의발을 전할 자를 고르지 못하겠다는 정론에 대단히 배치됩니다.그러나 선사께서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했던 뜻으로 헤아려보면 '오진영이 본래 고족(高足)의 반열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편벽된 주장입니다. 다만 그가 고족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의심을 불러들임이 더욱 심한데, 우암이 생각한 고제(高弟)로써 증명한다면,261) 끝내 그 일에 대해 분명할 수 없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까울 것입니다.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득 찰대로 찼는데,262) 또 다시 감히 거질의 원고에 나아가 자신이 직접 나눠서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정선(精選)한 한 부를 마침내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263)을 시켜 인허를 구걸하여 받고 인쇄하여 판매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말로 속이는 것이 지금 일로서 증명되었으며 앞에서 붓과 혀로 가르침을 깨뜨린 것을 지금 몸으로 직접 부숴버린 것이니, 이 얼마나 잔혹합니까.허가를 받아 인쇄한 견본에 보태고 빼는 것과 고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였습니다. 시의(時義)에 관련된 모든 것은 구절마다 삭제한 것은 오진영이며, 저작자라고 크게 쓰인 이름은 강태걸입니다. 이와 같으니 오진영의 문집, 강태걸의 문집이라고 해도 옳을 것인데 오히려 억지로 명명하여 《간옹고》라고 하였으니, 참람하게 분수와 의리를 범하며 이름과 실제가 서로 어긋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선생의 썩은 뼈는 아는 것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두려워할 줄 안다.'고 하겠습니까.대개 오진영이 건드린 선생의 순정한 도와 광명한 의리는 곳곳이 깨지고 어두워졌는데, 의리가 어두워지고 도가 깨졌으니 선생은 이제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공자와 주자 이후로 《춘추》의 의리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게 되어 천지는 온통 암흑이 되어 오랫동안 어둡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속인 것이 끝이 없어서 이미 너무나도 원통한데, 세상 재앙의 참혹함은 또한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윤리가 사라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변고를 보고도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문하에 사람이 없으며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 23년이 됩니다. 자질이 얄팍하고 재주가 적어서 비록 가르침의 만 분의 일도 받들어 새기지 못하지만 그러나 기대를 받은 것은 깊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두텁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性)을 스승으로 높여 도를 지키려는 뜻에 감히 붙따라 변석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뒤따랐기에 왜놈의 인허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매하여 읽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저 강하여 대적하기 어려운 기세를 헤아려보면 외로운 군인이 깨끗이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다행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떳떳한 본성이요 막을 수 없는 것은 공론이니, 남기신 편지가 널리 퍼져서 선생의 뜻을 해와 별처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성토하는 문장이 답지하여 오진영의 죄에 대해 도끼를 함께 휘두르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함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264)능히 말을 잘하는 무리들이 이런 지경이 되면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마땅히 스스로 새로워지고 이후로는 행동을 개선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자신의 속임을 자복하고 선사의 묘소에 고하며 흉악한 붓을 거둬서 불속에 내던져서 빠른 시일 내에 인가를 받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고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세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벌이 침을 쏘아대거나 뱀이 독을 내뱉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사나워져서 허가를 받아 판매하지 못한 것을 사람이 방해하였다고 힘써 무고하여 강태걸(姜泰杰)로 하여금 이미 진천 경찰서에 고소하게 하였고 또 다시 전주 검사국에 고소하여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두 가지 법률 조항에 걸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는 것입니까.소자는 통문을 지었다는 까닭으로 더욱 저들이 이를 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을 때 '오진영은 선사의 명예를 훼손한 자이니, 명예를 훼손한 법은 오진영에게 해당한다. 인가를 받아 판매를 금지하려 한 것은 내가 우리 선사를 위해 그 무고를 분별하고 가르침을 지킨 것인데, 세상에서 선생의 책을 영업하는 것은 대단히 많거늘 어찌 반드시 선사께서 인가를 금지한 원고를 영업하는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영업을 방해한 법률은 해당되지 않으니 죽기를 맹세코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무사하게 아무런 일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봉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때때로 적용되는 법률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앞날의 재앙을 어찌 끝까지 면할 수 있겠습니까.일찍이 들으니, 스승을 섬기는 도리는 임금, 부친과 같아서 다만 그들이 계신 곳에 목숨을 바친다265)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7척의 몸으로 곤란을 당하자 안자는 오히려 목숨을 바치려 하면서 뒤따랐는데,266) 더구나 사문 만 대의 도리가 손상됨을 입었는데 소자가 어찌 감히 한번 죽는 것을 아껴서 그 무함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한문공(韓文公)이 말한 '도가 나로 말미암아 전해진다면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여한이 없다.'267)고 한 것은 바로 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인(閭人)268)이 집권하여 법을 적용함이 이치에 어긋나고 기이하니 저 자신이 미처 죽지 않았습니다만 머리를 깎이는 곤욕이 먼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 없다.'269)고 성인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 신체를 훼손당하여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였어도 또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선생께서 이에 대해 정론(定論)을 두었으니, 어찌 감히 소홀하겠습니까.옛 사람이 이르기를 '스승이란 인재를 양성하는 모범(틀)이다.'270)라고 하였으며, 또한 '감히 자신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271)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선생께서 줄포 경찰서의 묘적(墓籍)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오진영이 거짓으로 서명한 화(禍)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자진(自盡)할 도구를 몸에 지니고 계시면서 '모욕을 받아 죽는다면 차라리 조용히 먼저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셨으니, 소자가 현재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선다면 선생을 본받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해보면, 선생께서는 나의 충심을 헤아려서 머리를 끄덕일 것입니다. 오호라! 이전에 천 년 하고도 천 년의 시간이 있었고 이후로 만 대 하고도 만 대가 있을 것인데, 공자와 주자가 엄정하게 세운 《춘추》와 《강목》의 의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의 마음과 진영의 죄와 소자의 죽음을 귀신이 분명하게 살필 것이며 후대의 수많은 성인이 잘 알 것이니, 소자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日丙子, 門人金澤述感諱辰之載邇, 遭禍變之罔極, 謹構文具奠而告于艮齋先生之墓.曰 : "昔孔子當周衰而作《春秋》 ; 朱子生宋末而修《綱目》, 皆所以嚴君臣華夷之大防也.嗚呼! 我先生洞道體之源, 明尊性之學, 以垂敎於永世者, 無非天地之大經, 人生之大倫, 而所値之時, 有甚於周、宋之末, 則君臣華夷之嚴防, 尢爲大稿中第一義也.絶海孤島, 握徐公之髮, 抱魯連之恥, 至乎君國之破亡, 血涕縞素而終其身, 則又大義之見乎晩節者也.先生之道義行業, 殆韓末之孔、朱者, 百世而可俟也.夫何天下久生斯文窮厄, 不幸有悖賊吳震泳者, 出於門下, 先生之義防焉, 破壤之 ; 先生之志節焉, 晦昧之.旣又修戈戟于門墻, 終至於假手閭夷而伏尸流血, 嗚呼! 尙忍言哉.蓋其鍾邪戾之氣, 稟慓猾之性者, 生質元自乖常, 然罪大惡極之前, 孰得以先斷.惟是便儇挑達, 巧言令色 ; 欺詐變幻, 挾數任術, 喜事惑人之弊, 無所不至.故先生之箝錘藥石, 亦畢施備至, 至如'所謂而見, 以事功爲重, 而不計道義.' '焉有士子而可以通某宮做事某人.' '以事功見笑於人.' '識見低矮某人, 勸余復蹈茶削覆轍.'等訓, 則其斥之嚴見之先, 顧何如也.然其識解之穎悟 ; 文辯之捷給, 有可資以發名理禦外侮者, 則又時加愛重, 至以見識發揮期獎之, 眞所謂霜雪雨露, 無非敎也.宜乎懼其斥而去惡 ; 喜其獎而加勉, 有以成身, 而賴及師門之後事也.而無柰惡習難除, 本質彰露, 以重功輕道之心, 倡出認刋稿之議, 以好勝自用之私, 含7)湖無拘而圖京認, 奉大稿而納讐府, 輪8)販賊, 此已累師之大者.而又以脫罪嫁師之惡念, 公然告諸人曰 : '先師曾有認意.' 繼而筆之書曰 : '先師嘗敎業者自認, 著者無關, 不必深拘.' 又曰 :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 「世不可知, 文稿須自料量爲之.」' 嗚呼! 誣人罪也, 而况乎誣師乎.誣師, 大罪也, 而况乎繼孔、朱而嚴《春秋》之防之大宗師, 誣之以破敗大義之事, 則其罪又何如也.在門弟子道, 宜其揮墻割籍, 若鷹鸇逐雀之不暇也.念先師平日血願同門之塤篪, 心痛士類之矢石, 宜亦有所處之道.故篇篇累牘, 面面衆喩, 使之自信自服而上告下謝者, 非不勤且誠矣.彼乃目之以猜險 ; 罵之以衆狂, 傲然自是, 曾不動念.及其'請願刋布決是自辱愼勿勉從'之遺書, 出也, 知其無奈乎誣罪之莫逃, 則乃悍然立'臨死不易辭之, 誓以確「料量」、「不拘」等說.' 於是震之徒, 爭曰 : '某公, 吾師傳鉢, 豈其誣言.有以「獨命」當曾子一貫之唯者.' 有以遺書爲彼一時而獨命爲此一時者 ; 有以遺書獨命爲幷行而不悖者 ; 有指遺書爲僞造者.外之人乃曰 : '吳某某翁, 高弟.深知其師之心者, 其言豈至誣也.容有某翁之有是意是敎也.' 坐嗤立排, 小譏大罵.至有言'有是師有是弟.' 耳不忍聞 ; 口不忍道.噫! 謂'震傳鉢'者, 固出於其徒阿好黨附同惡相濟之私, 而絶背先師平日斥震之嚴訓及晩年諸子偏駁未有擬望之定論矣.然揆以先師愛重期獎之意, 則謂'震本非高足之列'者, 亦偏論也.惟其爲高足也, 故致外疑之滋甚, 而尢菴所慮以高弟而證之, 則終不可辨明者, 不幸而近之矣.罪至於此, 已極貫盈, 而又敢就大稿, 而手分之編輯, 所謂精選者一部, 竟使其徒姜泰杰, 乞出認許而印販之, 向以言誣者, 今焉實之以事矣 ; 向以筆舌破訓者, 今焉身親碎之矣, 何其酷也.至其認印見本, 則添刪改動, 恣其所欲.凡係時義, 句句拔去者, 震也, 大書其著作者氏名, 則杰也.如是則震集杰集, 斯可矣, 猶復强名之曰, 《艮翁稿》, 僭犯分義, 乖錯名實, 莫此爲甚, 豈可謂'少能知懼於先生朽骨無知之戒'者乎.蓋震泳之所觸先生純正之道光明之義, 在在破晦, 義晦而道破, 先生不得爲先生.先生不得爲先生, 則孔、朱以降, 春秋之義, 無人接續, 而天地窣窣, 其長黑矣.師誣罔極, 旣切痛寃, 世禍之酷, 亦可寒心.見此倫亡經墜之變, 而恬然視爲無事, 則是門下無人 ; 世界無人.伏念小子之出入先生之門, 爲二十有三年.質薄材短, 雖未能承服萬一之誨, 然見期則不可謂不深 ; 受恩則不可謂不厚矣.竊不自量, 敢附於尊師衛道之義, 從辨討之列, 而幷禁認販本之購讀, 料彼强亢難敵之勢, 非孤軍之所能廓然.惟幸不泯者秉彛 ; 莫遏者公論, 遺書之布 ; 先生之義, 共覩日星, 討文之到, 震泳之罪, 同揮鈇鋮, 報佛之恩, 豈敢云然.能言之徒, 其或在斯, 苟有毫分人心者, 宜思自新善後之道, 服其誣而告諸墓 ; 收凶筆而付之火, 亟罷認販之役, 屛息潛伏, 以俟幷世之裁處, 胡乃蜂螫蛇毒, 愈往愈烈, 乃以認販之未售, 爲辨9)誣人沮害, 令姜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以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 爲綱打之計.而小子則以製通之故, 尢爲彼之所甘心.頃被檢局訊質, 答謂'震是損害先師名譽者, 損名之律, 震可以當之.禁止認販, 吾爲吾師辨誣守訓, 世間營業, 不勝其多, 而豈必以先師禁認之稿爲營業物乎.妨業之律, 非所當也, 誓死不服.' 無事而出.然彼鋒益銛, 時律難測, 前頭之禍, 安得以終免.竊嘗聞事師之道, 同於君父, 惟其所在, 則致死焉.師門七尺之軀之遇難, 顔子猶必捐生而赴之, 而况師門萬世之道之被喪, 小子豈敢惜一死而不明之.韓文公所謂'使道由某而傳, 雖滅死萬萬無恨'者, 正吾心也.但今閭人執命, 用法乖異, 身未及死, 而髡役之辱先至.'士可殺不可辱.' 聖有明訓, 變形而死, 死且有辱, 先生曾有定論, 豈敢忽諸.古人云, '師者, 人之模範.' 又曰 : '不敢信己而信其師.' 昔先生之斥茁署勒籍, 處震泳冒書之禍也.恒以自盡之具隨身曰 : '與其見辱而死, 無寧從容先裁.' 小子今於死生之際, 不法先生而何以哉.伏想先生鑑我衷而首肯也.嗚呼! 前有千千年, 後有萬萬世, 孔、朱所嚴《春秋》、《綱目》之義, 終不可得以泯焉, 則先生之心, 震泳之罪, 小子之死, 神祗昭昭, 後聖林林, 小子尙復何言.謹告." 휘신 기일(忌日)과 같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서공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서공(徐公)'은 서부원(徐浮遠)으로, 호는 동해(東海), 명나라 말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간재척독》 〈답박노원(答朴魯原)〉에서 "서동해 -부원- 는 항상 머리카락을 잡고서 통곡하며 고황제를 부르면서 '외로운 신하는 머리카락으로 절개를 삼고 시와 예로 벗을 삼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가 구천에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만에서 14년을 거처한 뒤에 조주의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생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처럼 치욕을 품고 살았는데 '노련(魯連)'은 제나라 선비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백 대가……것입니다 '百世而可俟'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의 준말이다. 《중용》 29장에서 ""통치자의 도는 자신이 지닌 덕을 근본으로 하여 일반 백성에게 징험을 하는 것이요, 삼왕에게 상고해도 오류가 없는 것이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이요,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1886년(고종 23)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수업을 받았고, 1897년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하여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전우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하였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오진영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이견(而見) 오진영의 자이다. 식견이……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은 충고해주는 오진영을 가리키며, '나'는 간재 자신을 가리킨다. 다공 미상. 《간재집》을 보면 왜에게 머리를 깎인 것으로 보인다. 권2 〈답남중칙(答南仲則)〉, 권3 〈답서병갑(答徐柄甲)〉 등에 그러한 내용이 보인다. 복철 원래 수레가 줄줄이 뒤집힌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명리 원래 명리는 명(名)은 명칭(名稱)을 말하고, 이(理)는 도리(道理)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명분(名分)의 의미로 보인다. 화목하게 지내기를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을 불고 아우는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여 매우 좋은 형제애를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문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왜놈에……따르지 마라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의발을 전하였으므로 '전발(傳鉢)'은 의발(衣鉢)을 전한다는 뜻이다. 의발은 본디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특히 학문 전수(學問傳授) 등의 경우에 쓰인다. 증자가……답한 것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參乎, 吾道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曾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아무개 옹 스승 간재를 가리킨다. 우암이……증명한다면 이이(李珥)의 낙발(落髮)에 대해 그의 고제인 김장생이 증언하였다면 그 설은 끝내 변명할 수 없다는 말로 간재의 고제라고 일컬어지는 오진영이 스승이 하지 않은 말을 햇다고 무함했으니 이 사실은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권8의 〈여오사익, 기축(與吳士益, 己丑〉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죄가……찼는데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구양수의 〈논여이간차자(論呂夷簡劄子)〉에서 " 이간의 죄악은 가득차서 사적이 환하게 드러납니다.[夷簡罪惡滿盈 事跡彰著]"라고 하였다. 강태걸(姜泰杰) 자는 자흥(子興),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거주하였다. 스승의……하겠습니까 주희(朱熹)가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塵刹, 삼라만상)을 받든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 하겠네.[將此⾝⼼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全》 卷36 〈答陳同甫〉 《능엄경(楞嚴經)》주석에는 "성과(聖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은(佛恩)을 갚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삼는다.[以此爲報不報之恩也]"라고 하였다. 뒤 구절의 말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어찌 책을 인간하는 행위를 하느냐는 의미이다. 스승을…바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보이는 말로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고 나는 들었다. 어버이는 나를 낳아 주셨고, 스승님은 나를 가르쳐 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 주셨다. 어버이가 안 계셨으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임금님이 길러 주지 않았으면 먹고살지 못했을 것이고,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니, 이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 주신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 중 어느 분과 있든 간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壹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 하였다. 공자께서……뒤따랐는데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광(匡)에서 곤액을 당했을 때 안연이 뒤쳐졌다가 따라왔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회(回)야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子在 回何敢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만약 공자가 해를 입었으면 안자(顔子)가 반드시 죽음으로써 구했을 것이다.'라고 주자가 말하자, 혹자가 '안로(顔路 안연의 아버지)가 있는데 안연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주자가 말했다.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면 단지 죽을 뿐이다. 이것과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어려움을 당한 상황에서는 그 말대로 할 수 없다.[事偶至此 只得死 此與不許友以死之意別 不許以死在未䖏難以前 乃可如此 䖏已遇難 却如此說不得]"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38 子畏於匡章》 한문공이……없다 한문공은 한유(韓愈)를 가리키며, 이 문장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 여인(閭人) 미상. 아마도 무식한 왜놈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선비는……없다 《예기》 〈유행(儒行)〉편에 보이는 말이다. 스승이란……모범이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나오는 말이다. 감히……믿었다 《근사록》 〈치지(致知)〉에서 이천 선생이 문인들에게 답하는 말에 "공맹의 문인이 어찌 모두 현철한 자만 있었겠는가. 진실로 중인들도 많았으니, 중인으로서 성인을 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겠지만 오직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구한 뒤에 얻었는데, 지금 제군들은 나의 말에 대하여 조금만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다시는 생각해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끝내 다르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含은 오자로 보인다. 輪은 輸의 오자로 보인다. 辨은 辦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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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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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화도강당 제정축문【스승의 명을 받들어 지음. 을묘년(1915)】 華島講堂祭井祝文【奉師命作 乙卯】 드높고 드높은 산악이 維嶽巍巍이 땅의 진산285)이 되고 作鎭玆土그 빛나고 빛나는 신령이 厥靈赫赫뭇 생령들에게 은택을 내리는지라 惠澤羣生아무개 등이 某等이 곳에 온 뒤로 入此以來모두 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咸蒙神賜다만 이 옛 우물만이 惟此舊井혹 그 물줄기가 짧아지므로 或短其流모두 우려스럽다고들 하니 僉曰可憂어찌 깊이 팔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盍思深鑿가래질하기도 하고 삽질을 하기도 하여 載鍬載鍤그 근원을 파내자 用濬厥源콸콸 마침내 흘러나와 混混乃來아무리 마셔도 다하지 않는지라 飮之不竭관리들286)에겐 기쁨이 넘치고 喜動冠珮숲 골짝엔 광채가 더해졌습니다 光增林壑오직 신명의 은총이니 維神之恩어찌 감히 잊고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其敢忘忽마침내 길한 날짜를 정하여 肆卜吉日정결한 술밥을 이에 베푸노니 精饎斯陳신께서는 밝게 강림하시어 神其昭臨부디 흠향하고 돌아보아 庶幾歆顧상서를 불러오고 환란은 막아서 致祥弛患무궁히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惠我無疆 維嶽巍巍, 作鎭玆土.厥靈赫赫, 惠澤羣生.某等, 入此以來, 咸蒙神賜, 惟此舊井.或短其流, 僉曰可憂, 盍思深鑿.載鍬載鍤, 用濬厥源, 混混乃來, 飮之不竭.喜動冠珮, 光增林壑.維神之恩, 其敢忘忽.肆卜吉日, 精饎斯陳.神其昭臨, 庶幾歆顧, 致祥弛患, 惠我無疆. 진산(鎭山) 마을이나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을 말하는데, 주로 고을의 뒤쪽에 위치한다. 관리들 원문의 관패(冠佩)는 관리들이 모자와 몸에 차는 장신구로, 보통 관리들의 복장을 이른다. 여기서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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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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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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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11월 계사삭 15일 정미에 문인 김택술, 최태일(崔泰鎰) 등은 손자 일중(鎰中)이 보름날 아침 첨배(瞻拜)하는 것을 말미암아 선사 간재 선생의 유상(遺像)에 고합니다."삼가 아룁니다. 사문(斯文)의 발전과 침체는 비록 기화(氣化)의 흥성과 쇠퇴에 말미암지만 또한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에 기인합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세상이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운 것이 참으로 일정한 햇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장의 마지막에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함에 스스로 힘쓴다272)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방비책에 힘입고 있습니다. 옛날 전재(全齋) 선생의 상(喪)에 가릉(嘉陵)273)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을 올렸는데, 겉으로는 칭송하는 듯하였지만 속으로 기롱하는 것을 간파한 이가 적었습니다. 문인 가운데 세력을 두려워하고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앞 다투어 무마시키려고 하였고 간혹 간파한 자들은 도리어 선생께서 그 제문을 내친 것을 지나치게 행동하여 사단을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선생께서는 시종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스승과 제자274)의 논의가 붙들어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지나 안정되었습니다. 이전에 만약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사문(斯文)이 어찌 그러한 은택을 받았겠습니까. 이 또한 선생께서 스스로 힘쓰신 효과이며 또한 뒤에 죽을 저희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지난번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275) 문인 오진영(吳震泳)이란 자가 선사께서 일찍이 문집 간행에 대해 인가하신 뜻을 두시고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앉아 계시다가 「일을 헤아려서 처리하라.」라 명하였다'고 속였습니다. 사방에서 책망이 이르는 것에 대해 변론할 때면 또한 백방으로 말을 교묘하게 하여 겉으로는 기피하면서 뒤로는 몰래 증거를 댑니다. 그러나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276)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실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가르침을 따랐다.'는 문장이 나왔으니, '인가하신 가르침'이란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남김없이 자백한 꼴이었습니다. 그런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하는 것을 지나친 행동이라고 여겨서 강한 자는 말로 드러내고 부드러운 자는 낯빛으로 드러내며 휩쓸려 따라가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옛날의 근심거리는 밖에 있어서 그 근심이 적었는데, 지금의 걱정거리는 안에 있어서 그 걱정이 더욱 큽니다. 자손과 문인이 바야흐로 그 후의 일을 잘 대응할 수 없어서 동동거리며 편안하지 못합니다.또한 김용승(金容承)277)이란 자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때에 사특한 말을 널리 퍼트리며 그 틈을 탔으니, 오호라! 불인(不仁)함이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사에게 끝도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서는 영혼에 고하는 문장278)은 너무나 패악스러우니, 문장을 구성하여 여닫는 수단은 가릉의 김평묵에 비하면 앞뒤로 똑같다고 할 수 있으며, 겉으로는 기피하고 뒤로는 증거를 대는 심술은 음성(陰城)의 오진영에 비하면 또한 피차간에 서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문장에 '사우(師友)가 사우가 되는 것은 춘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뜻 보면 병통이 없는 말인 듯하지만 이는 실로 '전날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였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의 문장에서 이른바 '저자 호랑이의 의심을 면치 못하여 그렇게 명목을 세운 것이다.'279)라고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당시 오진영의 무함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아직 선생의 유서280)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의심하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데, 유서가 이윽고 나와 오진영의 속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어도 오히려 다시 의심스럽다고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살아 있을 때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타계한 이후에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며, 무함을 알기 전에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무함을 안 뒤에는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한 것은 비록 스승을 배반함을 속이고자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버티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며 사사로이 가학을 전수한다는 둥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나열하였습니다. 오호라!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지는 운수는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바인데, 어지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이해지며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지니,281) '하늘이 그 사이에 음으로 이르게 한 것 같다.'라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오진영이 속인 것은 그 행동이 뜻밖이어서 사람들도 또한 괴이하게 여겼기에 그 말을 들을 때 곧이곧대로 여기지 않았는데, 김용승이 선사를 모독한 것은 그 일을 뒤따라 일어나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여 그 말의 그릇됨을 알아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비로소 성토하게 되었으니, 오진영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사람의 핑계거리가 되어 그의 거짓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승은 음성의 오진영과 가릉의 김평묵이 다만 스스로 외치고 스스로 화답한 것에 비하면 어떤 자이겠습니까.옛날 선생의 역량으로도 오히려 한 때에 벌어진 것도 급히 안정시키기 어려웠는데, 현재 저희들의 연약함으로 어찌 오랜 기간 벌어진 일을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한 가지 일도 오히려 어려웠는데, 더구나 두 가지 일이겠습니까.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참담하고 아픈 마음을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니, 참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힘쓸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기는 하니, 다만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 문장을 따져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한다는 뜻을 삼가 부치면서, 과연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선생의 햇빛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지조와 인으로 덮어주고 의로서 길러주는 덕이 다시 세상에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자들의 현재의 책임입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저승과 이승이 비록 다르지만 신리(神理)는 절로 통할 것이니, 외롭고 약한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때때로 강림하여 은밀하게 도와주심을 마땅히 멈추지 말아주십시오. 일이 만약 그르다면 비록 사람들의 한 때 비난에서 도망할 수는 있지만 훗날 신령이 처벌은 면키 어려울 것이니, 오히려 어찌 감히 어리석게 김용승의 번거로운 글에서 그의 허물을 본받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높으신 영령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에 이르소서." 維歲次十一月癸巳朔十五日丁未, 門人金澤述、崔泰鎰等, 孫鎰中因望朝瞻拜, 敢昭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伏以斯文隆替, 雖由氣化之盛衰, 而亦因人事之得失.是以孟子論一治一亂, 固有常數, 而卒自勉以距詖閑聖, 至今賴其彌縫矣.昔者, 全翁之喪, 嘉金之文, 鮮有識破其外贊內譏.門人之畏勢樂謟者, 爭相扳去, 其或識破者, 反以先生之斥逐爲過擧生事.惟先生始終堅確, 師生之論, 得有所扶, 久而乃定.向者若無先生, 今日之斯文, 寧有影響乎.此亦先生自勉之效, 而又以望於後死者也.越自山頹, 門人有吳震泳者, 誣先師以曾有認意, 謂'杏下獨命, 「料量爲之.」' 至其辨責四至, 則又百方巧辭, 陽諱而陰證之.及震與徐柄甲書,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文, 出而認敎之說, 自白無餘.人猶有以聲討厥罪爲過擧, 强者發於言, 柔者顯於色, 靡然不可止矣.蓋昔之患在外, 其患小, 今之憂在內, 其憂大.子孫門人, 方無以善其後, 憧憧不自安.又有金容承者, 乃以此時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平日自謂'受罔極之恩.' 而告文絶悖, 而其縱橫捭闔之手段, 視嘉金, 可謂前後一揆 ; 陽諱陰證之心術, 視陰吳, 亦可謂彼此同轍.其文有曰 : '師友之爲師友, 以其有春秋也.' 以外面觀之, 似乎無病之言, 而此實從其前日待先生以師友間之說而來, 其所以待先生以師友間者, 卽其文中所謂'不免市虎之疑而立'者也.當吳誣方張, 遺書未出, 疑之不爲大罪, 及夫遺書已出, 吳誣快明, 而猶復云爾者, 其用心之不美, 大可見矣.蓋其生前純師之, 沒後師友間之, 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間之者, 雖欲諱倍師之實, 得乎.然且抵賴, 欺人耳目, 私自傳授, 護法羅列, 嗚呼! 治亂之數, 固所難免, 而亂之愈往愈奇, 每下愈况, '天於其間若有以陰致之者.' 果有何說也? 震泳之誣, 創自意外, 人亦有怪, 其聽聞之, 不雅馴者.容承之瀆, 躡其事後, 人方藉稱, 認說之非, 虛金初討.吳終至畔師人之藉之, 有以成之.其視陰吳與嘉金之只屬自唱而自和者, 爲何如也.以在昔以先生之力量, 猶難遽定於一時者, 以當今以小子等之綿薄, 何能鎭定於餘日乎, 而一之猶難, 况其二者乎.俯仰慙痛, 天地莫容, 誠不自知其所以爲喩也.惟有一事, 可以自勉者, 只得揮其人辨其文, 而竊附距閑之義, 以待夫果能彌縫其人者, 得有所藉手, 而先生日光玉潔之操, 仁覆義育之德, 復明於世, 此小子等今日之責也.竊伏惟念, 幽明雖殊, 神理自通, 致悶孤弱, 時降陰隲, 當亦莫已之應也.事如其非, 縱逃人誅於一時, 不免神殛於來日, 尙何敢冒昧效尢於容承之瀆告乎.伏惟尊靈, 是聽是格." 맹자는……힘쓴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보이는 내용으로, 오백 년을 주기로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맹자는 "나는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행동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내쳐서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노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마지못해서이다. 능히 양주, 묵적의 도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가릉(嘉陵) 가평의 옛 지명이다. 중암 김평묵은 지도(智島)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가평읍과 가평 설악에서 강학을 하였다. 스승과 제자 여기서 스승은 전재 임헌회와 그 문도들을 가리킨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산퇴(山頹)'는 훌륭한 스승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옛날 공자(孔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哲人)이 죽겠구나.[奉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 하였는데, 그 후 곧 별세하였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스승의 죽음을 산퇴양최(山頹梁摧)라고 한다. 《禮記 檀弓上》 서병갑(徐柄甲) 자는 두익(斗益)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구계(龜谿) 서침(徐沈)의 후손이다. 보은에 거주하였다. 김용승(金容承) 자는 성선(聖先)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문원공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여주에 거주하였다. 간재선생을 배신했다고 한다. 영혼에 고하는 문장 김용승의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가리킨다. 저자 호랑이의……세운 것이다 김용승의 〈귀혜가(歸兮歌)〉에서 한 말이다. 김용승에 관하여 후창이 변론한 내용은 권15 〈김용승망고현천문변(金容承望告玄阡文辨)〉에 자세히 나온다. 선생의 유서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앞의 〈고선사유문(告先師墓文)〉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상황은……나빠지니 원래 '매하유황(每下愈况)'이란 말은 《장자》 〈지북유(知北遊)〉에서 나온 말이다. 즉 "돼지 잡는 정확(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을 때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아보는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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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을유년(1945) 8월 무인삭(戊寅朔) 15일 임진일(壬辰日)에 문인(門人) 김택술과 조제원(趙濟元)은 삼가 선사 간재선생(艮齋先生)의 초상에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선생의 학문은 先生之學인을 체득하고 의를 따르는 것이었으니 體仁用義오직 그 의를 다하는 것이 惟其義盡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282) 所以仁至의를 어디에 다하여야 하겠습니까 盡義于何만 가지 모든 일에 하여야 하니 有萬其事화이와 군신에 대한 것이 華夷君臣바로 그 중 큰 것입니다 是其大致재앙 낀 시운을 만나 時値劫運섬의 왜인이 유리한 상황을 틈타서 島倭乘利우리나라의 땅을 빼앗고 奪我疆土우리 종묘의 기물을 부수었습니다 毁我宗器화가 군상에까지 미쳐 禍及君上전후로 원통하고 분한지라 前後寃懥함께 한 하늘을 일 수 없겠기에 頭不共天마침내 피란길을 떠났습니다 身乃避地십여 년이 지나도록 積十餘年눈물만 흘리고 있으나 有泫其淚인의의 바른 학문은 仁義正學변함없이 공론에 남아있습니다 公議無異오호라 嗚呼왜놈들이 없어진다면 그 즉시 죽더라도 倭亡卽死전혀 슬프지 않을 것이라며 萬萬無悲감개가 격렬하여 感慨激烈선생께서 시를 지으셨지요 先生有詩또한 검남의 시인 亦誦劒南〈시아〉의 노래의 示兒之詞중원을 평정하던 날 定中原日네 아버지께 고하라는 가사를 외우시고는283) 告乃翁祠고인의 말씀이 云古人言나보다 먼저 터득하였다 하셨는데 先我獲之그 말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아 言猶在耳마치 어제 들었던 듯합니다 如昨日時다행이 이제 幸玆호천이 비로소 돌아와284) 皓天始返나라의 명운이 다시 새로워지자 邦命重新지사들은 지혜를 내고 志士運智열강은 군대를 도와주어 列强助軍저 왜놈들 쓸어버리기를 掃去彼倭등에나 모기를 내쫓듯이 하고 如逐蝱蚊그 소굴까지도 幷其巢穴쳐부수고 불살랐습니다 載擣載焚우리 청구를 수복하여 復我靑邱강산에 아무런 탈이 없게 되니 無恙河山만백성이 모두 경사스럽고 萬姓普慶온 나라가 함께 기뻐합니다 八方同歡선생의 言念先生그날의 유언을 생각해보니 當日遺言이 쾌한 일을 보고서 見此快事어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豈容昧然그 곧장 지체가 없어야 하겠기에 宜卽無緩삼가 이에 거듭 아룁니다 謹玆告申바라건대 존령께서는 伏惟尊靈상청에서 기뻐하시고 喜動上淸구원에서 한을 푸시며 恨消九原때에 따라 조화를 타고서 因時乘機상제의 대궐을 출입하시어 周旋帝閽묵묵히 치도를 돕고 默相治道우리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리며 惠我生民가만히 유학을 보우하고 冥佑儒學우리 사대부들을 빛나게 해 주소서 輝我冠紳삼가 아룁니다 謹告 維歲次乙酉八月戊寅朔十五日壬辰, 門人金澤述、趙濟元, 謹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先生之學, 體仁用義.惟其義盡, 所以仁至.盡義于何, 有萬其事.華夷君臣, 是其大致.時値劫運, 島倭乘利.奪我疆土, 毁我宗器.禍及 君上, 前後寃懥.頭不共天, 身乃避地.積十餘年, 有泫其淚.仁義正學, 公議無異.嗚呼! 倭亡卽死, 萬萬無悲.感慨激烈, 先生有詩.亦誦劒南, 〈示兒〉之詞.'定中原日, 告乃翁'祠.云 : "古人言, 先我獲之." 言猶在耳, 如昨日時.幸玆皓天始返, 邦命重新.志士運智, 列强助軍.掃去彼倭, 如逐蝱蚊.幷其巢穴, 載擣載焚.復我靑邱, 無恙河山.萬姓普慶, 八方同歡.言念先生, 當日遺言.見此快事, 豈容昧然.宜卽無緩, 謹玆告申.伏惟尊靈, 喜動上淸, 恨消九原.因時乘機, 周旋帝閽.默相治道, 惠我生民.冥佑儒學, 輝我冠紳.謹告." 인을……방법입니다 남송(南宋)의 정치가인 문천상(文天祥)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쓴 자찬시(自贊詩)에, "공자는 인을 이룬다 하고 맹자는 의를 취한다 하였으니, 그 의를 다하는 것이 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라네.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배운 것이 과연 무엇이겠나.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도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검남(劒南)의……시인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이다. 육유는 자는 무관(務觀), 또 다른 호로는 위남(渭南), 노학암(老學菴), 구곡노초(九曲老樵) 등이 있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뒤에 자신의 시집을 《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실패하고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시아(示兒)〉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이다. 그 시에, "죽으면 온갖 일이 헛됨 원래 알고 있지만, 다만 구주 통일을 보지 못함 슬프구나. 황제의 군사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 제사 올릴 때 네 아비에게 알리는 일 잊지 말라.[死去原知萬事空, 但愁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라고 하였다. 《劍南詩稿 卷85》 호천(皓天)이 비로소 돌아와 호천은 밝은 천도(天道)를 이른다. 《순자(荀子)》 권18 〈부(賦)〉에 "호천이 돌아오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노라. 천추에 반드시 돌아옴은 옛날의 떳떳한 도이니, 제자가 학문에 힘쓰면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歲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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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사에 춘우정 김공287)을 봉안할 때의 축문【을유년(1945)】 泌陽祠春雨亭金公奉安祝文【乙酉】 빛나고 빛나는 매옹288)은 赫赫梅翁사문의 맹종이요 斯文盟宗빼어난 인산289)은 仁山有卓고족290) 가운데에 나열되었다오 列高足中누가 인의 단서를 이었는가 孰繼仁緖춘우정이 있으니 春雨有亭순수하고 바름은 전수받은 것이요 純正淵源온화하고 돈후함은 품부 받은 것이라네 和厚稟生의방291)은 연원이 있으니 義方有自현인인 성은292)으로부터였고 城隱其賢세덕을 미루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推溯世德월봉293)과 명천294)이 있다네 月峯鳴川학문은 충신을 주장하고 學主忠信마음은 성경을 오로지하여 心專誠敬정성스레 지키고 拳拳其守부지런히 공부하였네 孜孜其程하늘이 보이는 곳에서는 눕지 않았으니 見天不臥홀로 있을 때를 삼감이 지극하였고 至哉謹獨도둑을 불쌍히 여겨 사다리를 구해다 놓으니 矜盜覓梯인이 충족되었도다 仁用充足실행하지 못했으면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未行恐聞계로가 이와 같은 뜻을 지녔고295) 季路同志아무리 무식하여도 또한 가르쳐주었으니 空空亦敎공자도 이미 하신 일이라네296) 宣尼已事지금의 학문을 끊고 하지 않으며 絶今不爲오직 옛 도와 똑같이 하려 하였네 惟古是同존왕양이297)를 엄하게 하니 尊攘其嚴춘추대의가 높아졌다네 春秋義隆평생의 학문이 蓋生平學인의에 있었으니 在乎仁義평상시이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이거나 于常于變어찌 혹시라도 떠났겠는가 豈其或離사직에 지붕이 설치되었을 때298)에 逮夫屋社충분이 들끓어 올랐으니 忠憤炳炳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여 歸潔有道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바쳤네299) 一心獻靖어찌 저 원수 같은 금나라는 夫何讐金온갖 방법으로 으르고 더럽혀서 脅汙百端물리치고 물에 던지더니 牢却投水마침내는 뭇 산들을 무너뜨리는가 竟隕群山의대에 찬을 남겨 衣帶有贊문문산과 궤적을 함께하였으니 同轍文文그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한 것이 其所成取고인에 부끄럽지 않도다300) 不愧古人풍성이 이르는 곳마다 風聲攸曁사림들에게 광채가 더해지니 光增士林그 의열을 사모하는 것은301) 羹墻義烈삼십년 지난 지금도 여전한다네 卅載餘今마침내 하늘이 뉘우침에 屬玆天悔큰 원수를 몰아내었으니 驅逐鉅讐오랑캐302)들이 깨끗이 腥塵掃淸나라 안 여러 고을에서 사라졌도다 環海列州태산이 있는 고을이라 泰山之鄕선생을 제사지낼 만하니 先生可祭학문으로 보나 절의로 보나 以學以節누가 다시 이견을 세우겠는가 孰復立異사우가 완성되자 祠宇旣成오르내리며 퍼져 숙연하게 하는지라303) 陟降悽焄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304) 籩豆簿正유자305)들은 재빠르게 달려 다니네 章縫駿奔무성의 이웃이요 武城之隣비수의 북쪽이로다 泌水之陽정일의 제사에 어그러짐이 없으니 丁禋莫愆영원토록 향기로우리라 永世芬芳 赫赫梅翁, 斯文盟宗, 仁山有卓, 列高足中.孰繼仁緖, 春雨有亭, 純正淵源, 和厚稟生.義方有自, 城隱其賢, 推溯世德, 月峯、嗚川.學主忠信, 心專誠敬, 拳拳其守, 孜孜其程.見天不臥, 至哉謹獨, 矜盜覓梯, 仁用充足.未行恐聞, 季路同志, 空空亦敎.宣尼己事.絶今不爲, 惟古是同, 尊攘其嚴, 春秋義隆.蓋生平學, 在乎仁義, 于常于變, 豈其或離.逮夫屋 社, 忠憤炳炳, 歸潔有道, 一心獻靖.夫何讐金, 脅汙百端, 牢却投水, 竟隕群山.衣帶有贊, 同轍文文, 其所成取, 不愧古人.風聲攸曁, 光增士林, 羹墻義烈, 卅載餘今.屬玆天悔, 驅逐鉅讐, 腥塵掃淸, 環海列州.泰山之鄕, 先生可祭, 以學以節, 孰復立異.祠宇旣成, 陟降悽焄, 籩豆簿正, 章縫駿奔.武城之隣, 泌水之陽, 丁禋莫愆, 永世芬芳. 춘우정(春雨亭) 김공(金公) 김영상(金永相, 1836~1911.)로, 춘우정은 그의 호이다. 자는 승여(昇如), 초명은 김영조(金永朝), 본관은 도강(道康)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매옹(梅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응(伯應)ㆍ백림(伯臨),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이 있다.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 1814~1889)으로, 인산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나이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할아버지인 수구(洙榘)에게 학업을 닦았으며,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1858년(철종9) 도백(道伯)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1881년(고종18) 선공감 가감역, 전설시 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집(仁山集)》 17권이 있다. 고족(高足) 품행(品行)과 학식이 우수한 문인(門人)이나 제자를 의미한다. 의방(義方)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가정교육을 의미하기도 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성은(城隱) 춘우당의 아버지인 김경흠(金景欽, 1815~1880)으로, 성은(城隱)은 그의 호이다. 자는 덕현(德玄)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월봉(月峯) 춘우당의 9대조 김대립(金大立, 1550~미상)으로, 월봉(月峯)은 그의 호이다. 자는 신부(信夫)이다. 명천(鳴川) 춘우당의 8대조 김관(金灌, 1575~1635)으로, 명천(鳴川)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옥이(沃而)이다. 실행하지……지녔고 계로(季路)는 자로의 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으면 행여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일이라네 《논어》 〈자한〉에 공자가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양단을 들어서 다 말해주노라.[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실(王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할 때 이 원칙에 입각하였으므로,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고 한다. 사직에……때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에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신의 뜻을 바쳤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의대(衣帶)에……않도다 문문산(文文山)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으로, 문산(文山)은 그의 호이다. 문천상이 47세의 나이로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 띠에 찬(贊)을 남겼는데, 그 찬에 "공자께서는 인(仁)을 이루라고 하였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고 하였네. 생각건대 의를 다하면 인은 이르는 것이다. 성현들의 글을 읽고 배운 바가 무슨 일인가. 지금에나 이후에나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사모하는 것은 원문은 '갱장(羹墻)'인데, 이는 국과 담장을 보기만 하여도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는 말로 돌아가신 선왕이나 현인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랑캐 원문의 '성진(腥塵)'은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청나라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오르내리며……하는지라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그 기운이 발산하여 위로 날아 올라가서, 소명하고 훈호하고 처창함이 된다.[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해설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이고, 그 기운이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훈호이고, 사람의 정신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라고 하였다. 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께서 먼저 문서상으로 제기에 올릴 제수를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음으로써, 공급하기 어려운 사방의 귀중한 물품들을 문서상으로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은 제기에 올리지 못하게 하셨다.[孔子先簿正祭器, 不以四方之食, 供簿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자들 원문의 '장봉(章縫)'은 장보봉액(章甫縫掖)'의 줄임말로, 유자(儒者)로서의 지위, 곧 유자를 이른다. 《예기》 〈유행(儒行)〉에 "저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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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한 자를 성토하고 배신자를 배척한 일을 벗 정경산 기성 이 도와준 것에 감사하며 2수 謝敬山鄭友【基聲】贊討誣斥倍 【二首】 스승 위해 몸이 꺾이는 것도 생각할 겨를 없어 爲師不暇念身摧외로운 군대 힘껏 이끌어 적의 수괴 성토했네 勖率孤軍討賊魁도를 밝히는데 공이 있다면 지나친 말이나 明道有功雖過語음이 다하면 혹여 한 양이 열리는 걸 보리라 窮陰或見一陽開-진영(震泳)241)-여문242)의 죄안을 스스로 펼쳐 열었으니 驪文罪案自陳開시호243)처럼 의심스런 마음이 그 근원 되었네 市虎疑情作厥胎죄상을 아는 데 어찌 꼭 맑은 거울 비춰보랴 知狀何須淸鑑照이제 배반하지 않았다 하니 마음244)도 어둡네 謂玆不叛昧靈臺-용승(容承)245)- 爲師不暇念身摧, 勖率孤軍討賊魁.明道有功雖過語, 窮陰或見一陽開.【震洙】驪文罪案自陳開, 市虎疑情作厥胎.知狀何須淸鑑照, 謂玆不叛昧靈臺.【容承】 진영(震泳) 오진영(吳震泳)을 말한다. 김택술은 오진영이 스승 간재의 뜻을 어기고 일제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했다고 비판하였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시호(市虎) 있지도 않은 것도 계속 반복하면 사실처럼 믿게 되는 유언비어를 말한다.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결국 믿게 된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內儲說上》 마음 원문의 '영대(靈臺)'로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영대를 침입하지 못한다.[不可內於靈臺.]"라고 하였는데, 곽상(郭象)의 주(注)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고 하였다. 용승(容承) 김용승(金容承)을 말하는 것으로, 후창이 쓴 〈관김용승백천재기언(觀金容承百千齋記言)〉을 보면 "그 스승을 배반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其爲倍師也, 蔑以加矣.]" 등의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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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에게 고소를 당한 뒤 막내 동생 여안264)의 시에 차운하다 6월 被震訴後 次舍季汝安韻 【六月】 약관에 사도265)를 추구하여 弱冠求斯道벌써 흰 머리가 빛나구나 鬂霜已生光부친과 스승의 평생 가르침은 父師生平敎음을 배척하고 양을 부양함이라 斥陰與扶陽일음의 우레266)를 차마 보랴 忍見一陰震육양의 담장267)을 부수는구나 打破六陽墻스승을 속이고 선비들을 해치니 誣師復禍士그는 하늘도 두려워 않는구나 其不畏上蒼세도의 근심거리 생각하나니 言念世道憂굽이굽이 애간장이 끊어지구나 曲曲斷寸腸글 지어 현동 묘소에 고하는데 綴文告玄阡봉분268)엔 가을풀만 무성하네 秋草蔭斧堂한 번 죽음 뭐 그리 애석하랴 一死何足惜단지 도가 망하지 않길 원하네 但願道不亡원컨대 함께 부친과 스승 따르고 願同遵父師생사간에 상도를 바꾸지 않으리 死生無易常서풍을 맞으며 한 번 맹세하고 一誓臨西風돌아가는 기러기 떼 슬피 보네 悵看歸鴈行 弱冠求斯道, 鬂霜己生光.父師生平敎, 斥陰與扶陽.忍見一陰震, 打破六陽墻.誣師復禍士, 其不畏上蒼.言念世道憂, 曲曲斷寸腸.綴文告玄阡, 秋草蔭斧堂.一死何足惜, 但願道不亡.願同遵父師, 死生無易常.一誓臨西風, 悵看歸鴈行. 여안(汝安) 김택술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字)이다.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도(道)를 말한다. 일음의 우레[一陰震] 음진(陰震)은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吳震泳)을 가리킨다. 육양의 담장[六陽墻] 간재(艮齋)의 높은 도를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말을 빌려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말을 전하자 자공이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라 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알 수가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고 하였다. 봉분 원문의 '부당(斧堂)'으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봉분이 당같은 것도 보았고 …… 도끼같은 것도 보았다.[見封之若堂者矣, …… 見若斧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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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이 있어서 有憂 현동 묘소의 봄 풀은 몇 번이나 푸르렀나 玄阡春草幾回靑재앙이 사문에서 나오니 배반자271)가 있네 禍出門墻有不庭음설272)이 장황하니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陰說張皇人盡醉여문273)이 현란하니 누가 능히 깨어나리오 驪文眩爍孰能醒한 세상에 거친 주먹질한 추성274)이 없고 麤拳一世無鄒聖당대에 큰 붓 휘두른 고정275)을 생각하네 大筆當年憶考亭잔약한 제자와 후손이 비록 힘을 다한들 弱弟孱孫縱盡力세운 공 어찌 충분히 알려질 수 있을까 建功那得足聞聽 玄阡春草幾回靑, 禍出門墻有不庭.陰說張皇人盡醉, 驪文眩爍孰能醒.麤拳一世無鄒聖, 大筆當年憶考亭.弱弟孱孫縱盡力, 建功那得足聞聽. 배반자 원문의 '부정(不庭)'은 왕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곧 배반을 뜻한다. 《시경》 〈한혁(韓奕)〉에 "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음설(陰說) 음성(陰城)에서 사는 오진영(吳震泳)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거친 주먹질한 추성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맹자를 말한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분이 아니며, 맹자가 어찌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고정(考亭) 주희(朱熹)를 지칭한다. 고정은 주희가 만년에 거처하던 곳으로, 1192년 이곳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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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움 可憎 봄이 오면 또 반드시 가을 겨울이 있으니 春生亦必有秋冬잡초 없애고 새싹 살피면 독실한 농사 보리라 去莠存苗見篤農의리를 철석처럼 지킴에는 진퇴가 없어야 하니 義理鐵閑無進退시비를 조금만 잘못해도 배신과 순종에 어둡네 是非毫失昧違從원래 한나라와 역적은 나란히 설 수 없으니276) 元來漢賊不幷立이우277)가 오로지 서로 치는 것과 어찌 같으랴 豈似李牛專互攻성벽위에서 수없이 초나라 싸움을 방관하고서278) 壁上幾多觀楚戰스스로 중도를 지켰다고 자랑하니 가증스럽네 可憎自詑執中儂 春生亦必有秋冬, 去莠存苖見篤農.義理鐵閑無進退, 是非毫失昧違從.元來漢賊不幷立, 豈似李牛專互攻.壁上幾多觀楚戰, 可憎自詑執中儂. 한나라와 …… 없으니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漢)'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를 가리키고 '적(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선제(先帝)는 한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라고 하였다. 이우(李牛) 흔히 '우이(牛李)'로 일컬어지는데, 대립했던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당파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목종(穆宗)에서 무종(武宗)까지 우승유와 이덕유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우승유와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이길보(李吉甫)와 이덕유 부자(父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당시 이를 일러 '우이의 당[牛李之黨]'이라 하였다. 《新唐書 卷180 李德裕列傳》 성벽위에서 …… 방관하고서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 것이다. '초나라 전쟁'은 간재의 유고를 발간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제자들간의 다툼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거록성을 구원하러 온 제후들의 군사가 10여 성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감히 군사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모두 성벽 위에 서서 바라보니, 초나라의 전사들은 모두 일당십의 전사들이었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에 바라보던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덜덜 떨었다.[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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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운을 거듭 쓰다 疊前韻 공자께서 동산에 오른290) 날 언제였나 何日孔登東까마득하여 함께 하지 못해 한스럽네 遙遙恨未同마음은 삼고291)의 풍속에 노닐어 心遊三古俗꿈에도 이양292)의 풍조에 놀라네 夢愕二洋風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감이 참 사업이니 克復爲眞業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함이 어찌 큰 공인가 治安豈大功이 몸이 작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莫云此身小양간 가운데 참여하고 있다네293) 參在兩間中 何日孔登東, 遙遙恨未同.心遊三古俗, 夢愕二洋風.克復爲眞業, 治安豈大功.莫云此身小, 參在兩間中. 공자가 동산에 오른 천하를 굽어보는 큰 뜻을 비유하는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공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하였다. 삼고(三古)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합칭인데, 여기서는 고대의 이상적인 시대를 가리킨다. 이양(二洋) 동양의 오랑캐인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지칭한다. 양간……있다네 원문의 '양간(兩間)'은 하늘과 땅 사이로, 사람이 하늘과 땅과 나란히 서서 같은 지위를 이루어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용장구》 제22장에 "오직 천하에서 지극히 진실한 사람이라야 자신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 자신의 성을 다하면 다른 사람의 성도 극진히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을 극진히 하면 물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며, 물의 성을 극진히 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나란히 삼재(三才)에 참여할 수 있다.[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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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이 변산에서 노닌 일을 생각하며 憶希淑遊邊山 작년 이맘 때 내가 동쪽으로 여행 갈 때304) 去年此時我東征어찌 금강의 약속 저버렸나 그대에게 물었지 問君何負金剛約이제는 그대가 표연히 변산으로 들어갔는데 君今飄然入邊山아 나는 세사에 골몰해 함께 즐기지 못하네 嗟余滾汨未同樂하늘의 절서는 해마다 도로 다시 같아지는데 天序年年還復同사람의 일은 총총하여 이미 어제가 아니로다 人事悤悤已非昨명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도 운수가 있는데 名山一遊亦有數부귀에 애면글면하는 건 진정 망녕된 거네 營營富貴眞妄錯쌍선봉305) 꼭대기에 달이 정말 밝을 때 雙仙峯頭月正明머리 들어 동쪽306) 보며 몇 번 탄식했나 矯首東望歎幾作내가 정양사307)에 있던 날에 應如我在正陽日그리운 그대 못 봐서 서운했던 내 마음과 같으리 思君不見懷緖惡사람들은 변산을 소금강이라 말하니 人言邊山小金剛기이한 절승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네 奇絶相比庶無怍내소사는 유점사308)와 유사하고 來蘇依俙楡岾寺월암각은 헐성각309)과 비슷하다네 月菴彷彿歇惺閣삼일포와 채석강310)은 난형난제요 三日采石誰伯仲구룡연과 직소폭포311)는 강약의 차이네 九淵直沼差强弱인물을 가지고서 고하를 품평한다면 如將人物品高下한 성인과 한 현인으로 비유해야 하리312) 一聖一賢宜假託내가 성인의 문313) 노닐었다 말하지 말게 莫說我遊聖人門단지 그 얼굴만 보고 두 다리 병들었네 只見其面病雙脚부럽다 그대 지척에 현사314)를 얻었으니 羡君咫尺得賢師배움에 근거가 있어 자세히 다보겠구나 學之有據盡詳略귀는 높이고 눈은 천시하는315) 게 결국 시속이고 貴耳賤目終是俗가까운 건 소홀하고 먼 데 힘쓰는 것도 병통이네 忽近騖遠亦云瘼남쪽 지방에는 원래 명승지가 많은지라 南服自多名勝地분분히 동쪽으로 나선 것도316) 한 번 웃음거리지 東出紛紛堪一噱산 구경과 학문을 함도 이치는 하나이니 看山爲學還一理사람은 말 밖에서 마땅히 헤아려야 하네 人於意表當忖度식견이 이런 이치에 이르러 견해가 같아지면 識到斯理同一見굳이 산 정상에 나란히 오를 필요는 없겠지 不須絶頂聯筇屩 去年此時我東征, 問君何負金剛約.君今飄然入邊山, 嗟余滾汨未同樂.天序年年還復同, 人事悤悤已非昨.名山一遊亦有數, 營營富貴眞妄錯.雙仙峯頭月正明, 矯首東望歎幾作.應如我在正陽日, 思君不見懷緖惡.人言邊山小金剛, 奇絶相比庶無怍.來蘇依俙楡岾寺, 月菴彷彿歇惺閣.三日采石誰伯仲, 九淵直沼嗟强弱.如將人物品高下, 一聖一賢宜假託.莫說我遊聖人門, 只見其面病雙脚.羡君咫尺得賢師, 學之有據盡詳略.貴耳賤目終是俗, 忽近鶩遠亦云瘼.南服自多名勝地, 東出紛紛堪一噱.看山爲學還一理, 人於意表當忖度.識到斯理同一見, 不須絶頂聯筇屩. 동쪽으로……때 후창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갈 때를 말한다. 쌍선봉(雙仙峰)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변산반도에 있다. 희숙이 유람을 간 곳을 가리킨다. 동쪽 후창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정양사 김택술이 유람했던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를 가리킨다. 내소사와 유점사 내소사(來蘇寺)는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이고, 유점사(楡岾寺)는 금강산에 있는 절이다. 월암각은 헐성각 월암각(月菴閣)은 변산에 있는 암자인 듯하나 미상이고, 헐성각은 금강산 정양사에 있는 헐성루(歇惺樓)를 가리킨다. 삼일포와 채석강 삼일포(三日浦)는 외금강에 있고, '채석(采石)'은 채석강(彩石江)으로, 변산반도에 있다. 구룡연과 직소폭포 원문의 '구연(九龍)'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인 듯하다. 직소폭포(直沼瀑布)는 변산반도에 있다. 한……하리 사람에 비하자면 금강산은 성인, 변산은 현인이라는 뜻이다. 성인의 문 금강산을 비유한 것이다. 현사 변산을 비유한 것이다. 귀는……천시하는 소문으로 들은 금강산만 높이고 눈으로 본 변산을 천시하지 말라는 비유이다. 원문의 '귀이천목(貴耳賤目)'은, 풍문으로 멀리 들은 것은 높이 치고, 자신이 가까이서 본 것은 천시하는 풍조를 말한 것이다. 동쪽으로 나선 것도 후창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갔던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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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원운 以承齋原韻 잔약한 가문이 여러 해 힘써서 건축을 하였는데 孱門營築費多年지금처럼 잘 갖추어진319) 건 하늘의 도움이네 苟完如今祐自天띠풀로 지붕 덮어서 청결과 검소함에 잘 어울리고 屋覆茅茨宜潔儉고향 땅에 세웠으니 공건한 마음 기탁할 수 있겠네 地占梓里寓恭虔봄이 오니 천태산 기슭에는 꽃이 장차 피려하고 春回台麓花將發밤이 되니 창강에는 달이 점차 둥그러지구나 夜入滄江月漸圓백세토록 정결히 함이 편액한 이름의 뜻이니320) 百世齊明扁號意더욱 성인을 지키고 추현을 배워야 하리라321) 更推閑聖學鄒賢 孱門營築費多年, 苟完如今祐自天.屋覆茅茨宜潔儉, 地占梓里寓恭虔.春回台麓花將發, 夜入滄江月漸圓.百世齊明扁號意, 更推閑聖學鄒賢. 잘 갖추어진 원문의 '구완(苟完)'은 이승재 건물이 그런대로 잘 지어졌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위(衛)나라 공자 형(公子荊)을 두고 이르기를 "그는 가정생활을 잘하는도다. 살림살이를 처음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갖추었다.' 하였고, 많이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아름답다.'고 하였다.[善居室, 始有曰苟合矣, 小有曰苟完矣, 富有曰苟美矣.]"라고 하였다. 《論語 子路》 정결히……뜻이니 '재명(齊明)'은 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이다. 《중용장구》 제16장에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정결히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는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이승재'의 뜻을 여기에서 취했다는 뜻이다. 성인을……하리 공자와 맹자의 학문에 힘쓰라는 뜻이다. '성인'은 공자를, '추현'은 맹자(孟子)를 가리킨다. 그의 출생지가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이기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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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봉을 읊다 咏望帝峯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울창한 망제봉 우뚝 솟고 君不見望帝之峯鬱矗矗하늘에 꽂힌 부용봉 얼마나 푸른지를 揷天芙蓉何蒼蒼때때로 보니 상서로운 안개가 진면목279)을 가리고 時見瑞靄掩眞面어렴풋이 신선이 이곳에서 노니누나 隱約仙靈此徜徉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상쾌하여 좋고 絶頂眺望快一好정북쪽 삼천리가 평평한 당과 같네 直北三千平如堂그해에 좋은 이름을 누가 처음 내렸나 當年嘉號誰肇錫원인을 찾아보고자 많은 생각해보았네 欲究原因費商量추억하니 옛적 남한280)에 비바람 친 뒤 憶昔南漢風雨後동녘땅에 피 뿌린 충신들 얼마였던가 血灑東土幾忠良응당 고사들이 있어 이 산을 올랐고 應有高人躡此山아득한 신주281)는 하늘 한 쪽에 있네 渺渺神州天一方지척의 거리로 같은 마을에서 사십년 咫尺同鄕四十秋삼봉에서 내 죽장과 짚신 얼마나 닳았나 三峯幾弊我竹芒맑은 밤 장난삼아 북두성 그림자 붙잡고 淸宵戱攀星斗影가을 새벽 웃으며 달빛이슬 향기 마시네 秋晨笑吸月露香유유해라 슬픈 감흥도 원래 무상하나니 悠悠悲興元無常지금은 만사가 모두 상전벽해 되었도다 如今萬事都滄桑날 저문데 금릉 -금곡의 홍릉282)- 은 어디멘가 日暮金陵【金谷洪陵】何處是하늘은 텅비고 먼데 구름만 아득하구나 九天寥廓雲蒼茫 君不見望帝之峯鬱矗矗, 揷天芙蓉何蒼蒼.時見瑞靄掩眞面, 隱約仙靈此徜徉.絶頂眺望快一好, 直北三千平如堂.當年嘉號誰肇錫, 欲究原因費商量.憶昔南漢風雨後, 血灑東土幾忠良.應有高人躡此山, 渺渺神州天一方.咫尺同鄕四十秋, 三峯幾弊我竹芒.淸宵戱攀星斗影, 秋晨笑吸月露香.悠悠悲興元無常, 如今萬事都滄桑.日暮金陵【金谷洪陵】何處是, 九天寥廓雲蒼茫. 진면목 망제봉의 전체 모습을 말한다. 북송(北宋)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에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속에 있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는 시구가 있다. 남한(南漢)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항전하다 항복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신주(神州) 중국의 미칭(美稱)으로 '적현신주(赤縣神州)'의 줄임말이다. 《사기》 권74 〈맹자 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에 "중국 이름을 적현신주라 한다.[中國名曰赤縣神州.]"라고 하였다. 금곡(金谷)의 홍릉(洪陵)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능호이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다가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金谷)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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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군에게 주다 贈金君庸洛 추억하노니 옛날 시냇가의 학297) 憶昔川上鶴탁연히 군계 사이에 서있었지 卓卓立鷄羣그 전형이 손자에게 남아 있어 典型在賢抱두각이 이미 우뚝 드러났도다 頭角已嶄然나를 따른 날이 얼마이던가 從余幾何日남산과 덕천298)에서 함께 했지 南山又德川덕기는 추위 뒤의 해와 같고299) 德氣寒後日문리는 바람 앞의 물결 같네300) 文理風前瀾명성있는 집안 요결을 실추하지 말고 不墜家聲訣그대는 그것을 큰 띠에 써야하리라301) 君應書諸紳집안에서 청년을 걱정하는데 人家靑年憂내가 어찌 의탁한 손자 저버리랴 我豈負託孫한 마디 말로 천년의 맹세하노니 一言千載誓두산은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았네 斗山矗靑天 憶昔川上鶴, 卓卓立鷄羣.典型在賢抱, 頭角己嶄然.從余幾何日, 南山又德川.德氣寒後日, 文理風前瀾.不墜家聲訣, 君應書諸紳.人家靑年憂, 我豈負託孫.一言千載誓, 斗山矗靑天. 학(鶴) '학(鶴)'은 《후창집》 권25 〈학천김공행장(鶴川金公行狀)〉을 보건대, 김용락의 조부인 학천(鶴川) 김형재(金衡載)를 가리킨다. 남산과 덕천 '남산(南山)'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산으로 고부면소재지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남산으로 불린다. '덕천(德川)'은 현 전라북도 정읍시 중서부에 있는 면이다. 덕기는 …… 같고 따듯한 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문리는 …… 같네 문장이 밋밋하지 않고 기복이 있어 다종다양하다는 뜻이다. 큰 띠에 써야하리라 집안의 요결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자장(子張)이 공자의 가르침을 듣고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큰 띠에 써서 기록하였다.[書諸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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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재 강회 뒤에 지어서 희숙에게 부치다 思敬齋講會後 有作 寄希淑 높은 사경재에 유림들이 모였으니 齋高思敬會儒衣옛날의 문풍이 아니라고 하지마오322) 休說文風昔日非시율은 굳이 애써서 읊을 건 없고323) 詩律不須吟苦瘦도담은 필히 기름진 걸 맛봐야하네 道談必欲味腴肥배 안에서도 강학을 한324) 것이 진정한 급선무요 舟中講學眞先務포위된 중에도 관례를 행한325) 것이 바른 스승이네 圍裏行冠是正師이 땅에서 문득 새로 낙성연 이뤘으니 此地飜成新落宴이 늙은이는 아마도 남은 한이 없으리 諟翁儻或恨無遺 齋高思敬會儒衣, 休說文風昔日非.詩律不須吟苦瘦, 道談必欲味腴肥.舟中講學眞先務, 圍裏行冠是正師.此地飜成新落晏, 諟翁儻或恨無遺. 옛날의……하지마오 사경재에서는 옛날의 문풍이 여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시율은……없고 시를 짓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배……한 육수부(陸秀夫)의 고사를 가리킨다. 남송(南宋) 말엽에 원(元)나라의 공격을 받아 남쪽 바닷가로 파천을 하다가 애산(厓山)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에 행조(行朝)에서 좌승상(左丞相)으로 있던 육수부(陸秀夫)는 배를 타고 떠도느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날마다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직접 베껴서 강독을 권하였다. 《宋史 卷450 忠義列傳 陸秀夫》 포위된……행한 윤곡(尹穀)의 고사를 가리킨다. 남송(南宋) 말엽 충신인 윤곡이 지키던 담주성(潭州城)이 원나라 군대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관례를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때냐고 비난하자 윤곡이 "아이들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하여 지하에서 선조를 뵙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관례를 마친 뒤 온 가족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다. 《資治通鑑後編 卷151 宋紀 孝恭懿聖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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