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문고를 읽고 느낌이 있어 표출하고 삼가 안설을 붙이다 【1938년】 讀先師文稿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 【戊寅】 학문의 폐단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흥분하여 다투는 것입니다. 흥분하여 다투는 사람은 가슴 속이 편안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자기의 주장을 요구하여 지난 시대 성현의 말씀과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묻지 않고 한결같이 자기의 소견에 따라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할 뿐입니다.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사 람은 도리어 단지 몸가짐을 삼가고 이름을 아껴서 눈으로 삿된 말과 그릇된 행동이 바른 도 를 깎아 먹는 것을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 행한 곳도 또 한 볼 만한 것들이 많은데, 끝까지 구차스럽게 대강대강 할 생각만 있습니다.【〈김봉수(金鳳 峀)어른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 오진영의 일을 가지고 논하면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문고를 인허 받는다는 것으로 선사의 절개를 무함하고, 자기의 의견으로 선사의 문고를 고치기까지 하였으니, 흥분하여 다투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를 무함하는 패륜적 행동이 바른 도를 깎아 먹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고 말하지 않는 자로 말하면 선사의 도를 보호하지 못한 죄와 선사의 도를 해치는 죄는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구차하게 편안함만을 훔치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께서 이 두 가지 폐단을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먼 미래를 염려해서일 것이다.오로지 이익과 손해만을 살피는 폐단은 임금을 버리고 친부모를 뒤로 하며, 스승을 배반하 고 벗을 파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이어당(李峿堂) 어른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일의 공적에 대한 마음과 명예ㆍ이익에 대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그 폐단이 임금을 잊고 원수를 받들며, 선사를 무함하고 벗에게 화를 끼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무릇 옛날 이래로 이단의 학문을 하는 선비는 후대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문 밖에 있지만,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방 안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묵씨(墨氏)는 요(堯) 와 순(堯)을 종주로 삼았으니, 묵씨는 공자와 맹자의 방 안에 있는 것이고, 육씨(陸氏)는 추 (鄒)나라와 노(魯)나라를 높였으니, 육씨는 정자와 주자의 방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유자(儒者)가 분별하고 물리쳤다는 말을 직접 들었으면서도 오 히려 그것을 바른 학문으로 인식했던 것이고, 성현(聖賢)은 세상 사람들이 빠지는 것을 눈으 로 보고 죽기를 각오하고 복수하는 원수처럼 그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고, 후대에 도를 아는 선비가 나와서 바로잡은 뒤에야 비로소 방 안과 문 밖, 삿됨과 바름의 구분이 있게 되어 다시는 합쳐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음성(陰城)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도 또한 선사를 높였는데, 어찌하여 방 안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인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우리 유가들이 이단을 변박하는 것은 다만 도리에 당연한 일로 여겨서 할 뿐이지, 우리의 말이 행해질지 행해지지 않을지, 다른 사람이 따를 것인지 거스를 것인지, 저들의 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비교하여 나아가거나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맹자와 주자의 시대에 저들이 진실로 그들을 두려워 한 적이 없었으니, 비록 맹자나 주자라 할지라도 또한 감히 온 천하 에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곧바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의 사람은 많고 선생의 사람은 적으며, 그의 세력은 강하고 선생의 세력은 약하니, 선생이 비록 그를 변박할지라도 선생의 말이 행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그들의 이간질하는 말과 조장하는 말, 무함하는 언사, 악다구니 소리는 변박할수록 더욱 심 해져서 단지 자신만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니 망령된 말에 붙여두는 것만 못합니다. 오랜 시 간이 지나고 나면 옳음과 그름은 저절로 밝혀질 것이고, 비록 사람은 밝게 알지 못 한다 하 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하늘이 있으니, 내 심군(心君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년에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니다.【〈안혼재(安渾齋)에게 답 합〉】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과 이승욱(李承旭) 및 그 일당의 무함하는 말과 악다구니 소리에 대해 또한 일찍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다만 그 일이 선사와 관계된 것은 끝까지 그만 둘 수 없을 뿐이다.우리 어른께서 이른바 "전자로 보면 강론에서의 작은 과실로 여겨 참아야 하고, 후자로 보 면 사문의 큰 변고로 여겨 힘껏 성토해야 한다. 다만 전모(田某 전우(田愚))가 진심으로 감 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옆에서 본 사람들이 그것을 사심의 작용에서 나온 것이고 당연한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길까 염려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고 이를 만합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한 뒤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불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사를 무시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놈'ㆍ '농사꾼 늙은이', '선사를 무시함'은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런데도 전자로 보면 작은 과실로 여겨 참을 뿐만이 아니었고, 게다가 여러 해 동안 그를 공경하고 믿으며, 아끼고 보호하였다. 심지어 선사의 문고를 교정할 유사(有司)로 정해 망첩(望帖)으로 그를 초빙까지 하였다. 자기를 성토한 뒤에 이르서야 비로소 그의 죄를 드러내 성토하였으니, 어찌 사심(私心)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김용승은 결국 선사를 배반하였으니, 그가 당연히 진심으로 감복한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오진영의 심술(心術)이 그러할 뿐이었다.김(金)이 처음 이런 괴이한 논의를 했을 적에 그 마음에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습니 까.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이렇게 감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애를 써서 물 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처음에 "헤아려서 하라."거나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 "말없는 가르침", "하늘은 만물을 낳고 성인은 법을 세우셨다.", "꺼리지 않으시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 등의 말로 선사를 무함할 적에 그 마음이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는가. 뒤에는 도리어 "말에 구별이 부족했다."거나 "말을 가림에 소홀했다." 등의 말로 감출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호남의 선비들이 애를 써서 물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대체로 선생의 문집이 저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절대로 선선생(先先 生)께서 동문과 문인에게 처리하신 뜻이 아닙니다. 저는 선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 하실까 염려되니, 매우 통탄스러운 일입니다.【〈조참판(趙參判)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숙재(肅齋)에 대해 그 분이 선사의 동문이 됨에도 오히려 문집이 다른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을 매우 비통하고 한탄스럽게 여기셨고, 심지어 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군자들은 친한 스승의 문집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난하게 고쳐지고 삭제되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보면서 일찍이 통탄스럽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차라리 시호(諡號)가 없을지언정 시장(諡狀)은 결코 그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임경유(任景孺)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몇 해 전에 내가 전일효(田鎰孝)85)가 오진영에게 선사의 행장(行狀)을 짓게 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말하기를, "차라리 행장이 없을지언정 행장을 결단코 선사를 무함한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일이 사문(師門)과 관계되니, 한 줌의 숨이 아직 끊어지기 전에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고 문고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혹자는 일이 여러 해 오래 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만두어도 된다고 하였다. 나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말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일찍이 명나라 유학자 고경일(高景逸)86)의 말을 보니, "기개와 절의가 있으면서 학문을 하 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학문을 하고서 기개와 절의가 없는 사람은 있지 않다. 학문을 하고 도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교화에 해됨이 적지 않다."라고 하 였는데, 이 말이 아름답긴 하지만 미진한 점이 있다. 대체로 만약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 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으니, 그 '학문'이라 한 것은 단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명성일 뿐이다. 【〈왕사간(王司諫)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가령 음성 오진영의 말처럼 선사께서 진실로 인허를 받으려고 생각하고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면 이는 이른바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어떤 사람은 음성의 오진영을 보호하고 본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비록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선사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또 심지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뒤에 선사가 될 수 있으니, 만약 구구한 작은 신의와 절개에 얽매어 도를 후대에 전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군자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 천리가 어두우지고 인심이 사악해짐이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인가?지금 저 사람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내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만약 조금이라도 원망하 고 두려워하는 싹이 보인다면 이것이 장애가 될 것이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어찌 이른바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87)는 것이겠으며, 어찌 이른바 "마음이 평 탄하여 여유가 있다."88)는 것이겠는가. 내심 스스로 우리들이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 서 묵묵히 도를 체득하는 공부를 해나가야지, 단지 문자로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 네. 【〈벗 이명(李明)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음성 오진영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나의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비록 스스로 원한과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컨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다."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끝날 것이다.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선사의 가르침을 마치 오늘 얼굴을 대하고 명을 받드는 듯하다.한쪽 사람들이 내가 선비가 상(喪)을 치르는 동안에 의(義)를 주창하는 것은 중도에서 지나 친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습니다.【〈김광국(金光國) 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내가 그가 지은 〈정절사전((鄭節士傳)〉89) 뒷부분의 의논 가운데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 말한 것에 대해 논변한 것으로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다. 선사께서 바로 의를 주창한 사람을 논변하신 것은 단지 그가 상을 치르는 사람이 중도에 맞는지 여부만을 논변하고 일의 옳고 그름을 논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부당하다. 하물며 나는 단지 그 글의 의논이 의를 해친 점이 있다는 것만 논변했고, 애초에 절사(節士)의 일은 거론하지도 않았으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어찌 더욱 부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내가 선사의 뒤를 따라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을 얻은 것은 분수에 영광이나, 단지 그의 마음 씀이 험악함을 볼 뿐이다.이렇게 사문이 분열된 때에는 벗들이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큰 변고가 아 니라면 또한 잘못을 포용함으로써 교유의 도를 온전히 할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은 사실 주 희와 송시열 두 선생의 뜻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의 이 편지를 끌어와 오진영과 김용승(金容承)을 단절한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아, 스승을 무함하고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고 작은 흠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선사께서 정윤영(鄭胤永)ㆍ신계(申桂)ㆍ이승욱(李承旭) 세 사람을 단절한 일을 보지 않는 것인가?90) 여기에서 이른바 '작은 흠'이란 신이산(申梨山)이 가평 김평묵의 형편없음을 알면서도 단지 뚜렷하게 단절을 통고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신이산은 매번 제문을 배척해 물리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격동하여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으켰다고 하는데, 내가 내심 생각하기에 이 일은 단지 옳은가 옳지 않은가 를 논변해야지 격동시키고 촉발시켰는가는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해(利害)상의 말 인 듯합니다. 【〈정명신(答鄭命新)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인 중에 오진영과 김용승을 성토하고 단절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일으켜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어나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하겠는가?다만 신이산이 조정의 의론을 둠으로써 이승욱의 헐뜯음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평묵의 세력 이 더욱 성대해지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오늘날의 재앙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자신을 탓하지 않고 반대로 도를 곧게 하여 행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니, 이것이 무 슨 식견이고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하의 변고가 다만 중간에 선 자가 조정의 의론을 두었기 때문에 오진영의 무함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용승의 배반이 더욱 어그러져 큰 재앙을 이루게 한 것 또한 선사의 이 말씀과 같은 점이 있다.지난번에 한 벗이 나를 보고 "그대가 제문을 물리치고자 한 것은 어설픈 일이라 이를 만하 다. 저들의 기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에 임 해서 이치의 옳고 그름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되고, 단지 사람의 강약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학문이라 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하고, 그 뒤로 여러 차례 변론을 마지않자, 사람들 중에 진실로 저들의 형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도록 권면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치의 옳음과 그름을 보고 진퇴를 결정할 뿐, 사람의 강약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지 않은 것고 또한 선사의 마음과 같았을 따름이다. 과연 전에는 고소의 재앙을, 뒤에는 무함의 치욕을 면치 못했으니, 지난날에 그만두도록 권면했던 자가 스스로 앞을 내다보는 명철함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찌 그 사이에서 한 터럭만큼의 원망이나 후회가 있겠는가.무릇 횡포와 패역이 오면 세상의 교화와 도술(道術)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또한 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임석영(林奭榮)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 쪽의 횡포와 패역이 올 적에 선사를 무함하는 것과 문고를 어지럽히는 것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일체 받아들였을 뿐, 변론하여 다스리지 않았다.자경(子敬 김용구(金容九))이 명도(明道)는 왕안석(王安石)과 절교하지 않았고, 이천(伊川) 은 소동파(蘇東坡)와 다투지 않았다91)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명도의 덕과 도량이 넓 고 컸지만 만약 왕씨가 부모와 스승을 기롱하고 모욕했다면 그를 대우함이 반드시 달랐을 것입니다. 또한 저 김(金)과 유(柳)의 문인(門人)92)들이 소동파로 자처했다면 저 또한 그들 과 다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자신들을 공자ㆍ주자의 정통을 전수받았다 고 말하지만 성리(性理)의 의론과 출처(出處)ㆍ사행(事行)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과 어긋나니, 유자(儒者)된 자로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최종화(崔鍾和)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 사람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한 것은 그가 선사를 무함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평소의 고제(高弟)가 아니고, 또 전발(傳鉢)93)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호남 사람의 변론도 또한 굳이 이처럼 힘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전발의 고제로 자처하여 스승을 무함하였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힘써 변론한 것이다.한쪽이 바르고 다른 한쪽이 치우치거나 한쪽이 공정하고 다른 한쪽이 사사로우면 반드시 다 툼이 있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옆에서 본 사람들이 모름지기 시비하는 방향을 정밀하게 살피고, 또 모름지기 이쪽저쪽의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 함을 세밀하게 본 뒤에 좇을 것인지 등질 것인지 나의 길을 정하고, 도울 것인지 억누를 것 인지 나의 힘을 베푸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양쪽을 옳게 여기거나 혹은 모 두를 그르게 여기는 것은 선현이 기롱한 "낙(洛)도 옳고 촉(蜀)도 옳으며, 원우(元祐)도 그르 고 희풍(熙豊)도 그르다.94)"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의 이치겠으며, 성 인의 법이겠습니까. 【〈임장우(林章佑)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호남도 스승을 높였고, 영남도 스승을 높였으며, 영남도 일을 그르쳤고 호남도 일을 그르쳤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시비하는 방향을 살피지 않고, 또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상의 평온함과 험악함을 보고서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을 선사의 말씀처럼 하지 않는 것인가? 【정도현(鄭道鉉)이 김홍재(金弘梓)를 대하여 말하기를, "의론은 호남이 옳다." 하였으며, 전기진(田璣鋠)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싸움에서 호남이 승리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호남이 영남에게 곤욕을 받아 고소의 화를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어찌하여 호남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자, 전기진이 말하기를, "'싸움의 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전기진이 말하기를, "호남의 문자는 주로 일을 의론하고, 영남의 문자는 주로 사람을 타격한다. 이것이 진실로 공론(公論)이다. 그래서 승리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정도현과 전기진은 함께 영남에 거처하여 영남을 편드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시비의 방향 및 말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함에 대한 구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끝내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한탄스럽다.】단지 전장(奠章)95)을 조목조목 밝혀서 스승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리면 되는데, 끝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사이에서 과실로 인한 잘못[眚]과 일부러 지은 죄[怙]의 구 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쩌지 못했다. 이에 분열된 까닭을 버려두고 주위를 둘러보다 다 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흘러 떠도는 것들을 주어모아 내 몸을 더럽히고 후배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 을 볼 수 있다.【〈관서(關西)의 제생(諸生)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음성 오진영의 말에 진실로 선사를 무함한 사실이 없었다면 그의 무리들이 단지 오진영의 본문(本文)에 나아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주변을 둘러보아 다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터무니없는 것을 억지로 뒤집어씌워 호남 사람을 더럽히고 한 시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더욱 스승을 무함한 죄가 유심(有心)의 일부러 지은 죄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만약 화서(華西)96)가 율옹(栗翁 이이(李珥))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할 생 각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 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약 화서가 주자에 대해 독실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진실함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 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 기는 어려울 듯하다.【〈화문이자론(華門二子論)〉】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과 후대 사람 중에 오진영의 일을 논하는 자가 어찌 "만약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참으로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과 인허에 대한 분부가 없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변론하는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지나치게 염려한다고 지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식견과 사려가 없단 말인가.윤철규(尹喆圭)가 거짓으로 칙령(勅令)을 전해서 빈사(賓師)를 유인해 쫓아낸 것97)에 대해 조정에서 비록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보(章甫 유생)들은 성토해야 한다.【〈쇄 묵(瑣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퇴계의 이른바 "통문(通文)을 돌려 상소하는 것은 유생의 일이 아니다."는 것은 유생이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으로 말한 것이지, 사문(斯文) 중에 일이 있어도 서로 알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호남 사람이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미 퇴계의 본래 취지를 잃은 것이다. 지금 또 선사의 말씀으로 보건대 장보들이 윤철규를 성토하는 것은 조정에서 그의 죄를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또한 그것을 허여한 것이니,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이 유생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식견이 없음을 더욱 볼 수 있다.유자(儒者)는 저서(著書) 수십 권에 곡필(曲筆)을 용납하여 고금(古今)의 한 사람도 원통하거 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받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후대에 응당 어진 자손을 얻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사 람을 논하면서 행적을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까지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늘의 형 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니, 신중해야 한다.98)"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과 그의 무리들은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글의 혐의를 꾸미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나를 무함한다. 내가 그에 대해 설사 진실로 혐의할 만한 행적이 있더라도 혐의를 피하여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것은 제자로서의 직분이 아니니, 진실로 이것으로 마음을 무함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애초에 혐의할 만한 행적이 없는데, 도리어 거짓을 꾸미고 뒤집어씌워서 억지로 애매모호한 행적을 만든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마는 "행적까지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형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돌이켜볼 것이다.고금(古今)의 일을 낱낱이 헤아려보면 온갖 병폐는 그 근원이 어느 한 가지도 우리 유학자 들이 소문[聞]과 현달[達]의 변별99)을 밝히지 못하고, '진실[誠]'과 '거짓[僞]'의 기미를 살피 지 못하며,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는 것100)에 있어서는 최고의 완전한 도 리로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고선사묘문(告先 師墓文)〉】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이 이미 온갖 병폐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음성의 오진영을 일과 공적을 중요하게 여기고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배척하신 것은 단지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니, 훗날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먼 곳의 사람에게 던져 준 것"과 "선사를 무함하여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것", "선사의 문고를 고치고 어지럽힌 것", "일작(日雀)에게 돈을 구걸한 것", "동문을 일망타진한 것"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여 가두는 것" 등 온갖 죄악을 빚어낸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저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없겠 습니까. 단지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원망 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도 감히 평소의 지조를 바꾸어서 따르지 못하고 있 으니, 그 정상이 또한 참으로 슬픕니다. 만약 집사처럼 인품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했었다면 사문(斯文)에는 붙들어 세우는 도움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몸에는 주먹질과 발 길질이 가해지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께서는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여 일을 맡을 마음은 없고 이렇게 외롭고 미천하며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시 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사께서는 스스로 맡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시기까지 하시니, 더욱 옳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신 앙여(與申仰汝)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음성 오진영의 무함과 어지럽힘에 대해 만약 인품과 지위가 있는 동문의 노성(老成)한 사람이 변론과 성토의 일을 맡았다면 저쪽의 방자함을 거두어 선사의 도의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두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고서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면서 이렇게 나처럼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경솔한 자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함으로써 원망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고 재앙과 근심이 몸에 가해지게 하는 것인가? 비록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정상이 또한 진실로 슬프다 하겠다. 아아, 옛적에 선사와 같은 인품과 지위로도 오히려 이러한 탄식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의 소자(小子)처럼 인품과 지위가 낮고 미천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한쪽 사람이 또 저의 제문(祭文)에 있는 음양(陰陽)과 같은 마음과 행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 을 가지고 신(神)을 업신여긴 것이라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음양(陰 陽)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상반되듯 마음과 행적이 모순된다는 말101)은 농옹(農翁 김창협 (金昌協))이 일찍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비기어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입 니다. 부친에게 사용했던 말을 선사에게는 베풀 수 없다고 말하니, 저는 그것이 무슨 말인 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이 호남의 통문(通文) 중에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을 반복했다는 말이니, 이 때문에 선사께서 반드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를 하지 않으셨음을 깊이 밝히려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할 부분까지 언급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선사의 이 가르침을 읽고서도 남에게 뒤집어씌운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인가? 대체로 그의 심술이 선사의 이른바 "한쪽 사람"과 한 꿰미에 꿰어져 있는 것이 자못 같은 기운을 전해 받고 같은 탯줄에서 태어난 것과 같다.일찍이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일이 없겠지만 지금 사우(士友)의 뒤를 따라 그 학설을 듣고 서도 이와 같이 따지지 못하고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입 니다. 맹자가 남과 변론하고 논쟁한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성인이 옳고 이단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할 때에 만약 화를 불러들일까 두려워하여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다. 변론을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선사께서 이러한 사실이 없고 그의 말이 무함임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이다.제가 내심 엿보건대 집사의 뜻은 회니(懷尼)의 논쟁102)과 호락(湖洛)의 변론103)을 징창(懲 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릇 인물(人物)의 삿됨과 바름의 사이나 강론의 같음과 다름 의 즈음에서 일체 화합을 주된 것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못 삿됨과 바름을 분별하 고 같음과 다름을 나누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화합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사의(私意)와 인욕(人欲)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에 나와 전일중(田鎰中)이 오진영과 화평할 것을 권면하는 사람들이 어찌 선사의 '사의와 인욕'이라는 가르침에 송연(竦然)하지 않겠는가.집사께서도 또한 그의 제문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 는 것으로 처신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만약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괜찮을 것입 니다. 그러나 지금 부친과 스승이 모욕을 받았는데도 단지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다니 요.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함이 단지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진실로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는 것으로 처신할 뿐이지만, 선사와 관계된 것이라면 감히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어 선사의 심법(心法)을 어그러지지 못하게 할 것이다.집사가 형제처럼 처우한다고 하지만 자기와 관계된 것이면 노여워하고, 선사와 관계된 것이 면 편안하게 여기십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부르고,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했을 때에는 일이 선현과 선사에게 있었기에 편안하게 여기더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할 때에는 일이 자기에게 있게 되자 노여워하면서 비로소 그의 죄를 발설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선사의 영령 앞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게 하였다. 선사의 이 말씀은 마치 오진영의 심술을 먼저 내다보고 미리 말씀하신 듯하다.옛적에는 주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주자를 어지럽 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안에 있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옛적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안에 있다. 스승의 문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말에 쉽게 변론하지 못한다. 그 말을 변론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변론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오백풍(吳伯豊)104)은 주자 문하의 안연(顔淵)이다.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 연호) 연간에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사문의 칭찬을 자주 받았다. 우옹(尤翁 송시열)이 지은 창랑(滄浪)의 글에 이성보(李誠父)ㆍ오백풍 등의 말이 있었는데, 뒤에 대윤(大尹 윤선거(尹宣擧))의 청으로 그것을 삭제하였다.105) 우옹이 빗대어 견준 것과 대윤이 삭제를 요청한 것이 어찌 오백풍이 진실로 권세를 좇는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단지 그에게 일찍이 한탁주(韓侂胄)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을 뿐이었다. 【〈수현재우기(守玄齋偶記)〉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람들 중에 "오진영이 비록 선사를 무함했다 하더라도 선사가 진실로 이러한 사실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는 데, 이는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다. 오백풍이 비록 권세를 좇는 허물이 없고 단지 그가 일찍이 한탁주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하더라도 글의 저작에서 삭제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비록 실제적인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일찍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무함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백풍처럼 글에서 삭제당하는 일을 받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적이 이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대체로 절교를 알리는 편지는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106)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의 제문을 해명한 문자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한 구절도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송조(宋朝)의 네 현인107)에 대해 교묘하게 사설(辭說)을 지어 장황하게 늘 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단지 이것으로 보건대 그 마음이 어디 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에서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고 성토한 글은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와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라는 말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에서 해명한 말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변박하고 성토한 사람의 신상에 나아가 교묘하게 사설을 지어 죄안(罪案)을 억지로 만들고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다. 단지 이것만 보더라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선사께서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적이 없었다고 여기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꺼리는 것이 있어 감히 말을 함부로 하면서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라는 말이 나옴에 이르러서야 호남 사람들이 겨우 고소의 재앙에서 벗어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운을 잃은 채 다시는 성토할 힘이 없게 되자 이에 오진영은 다시 서병갑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담하게 분명히 말없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큰소리치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문인과 자제들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다른 사람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큰 의리를 잊는다면 스승과 제자의 인륜은 이로부터 폐지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륜이 폐지되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108)도 또한 의지하여 설 곳 이 없게 될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우리 문하의 여려 사람들이 이 가르침에 대해 마음속으로 송연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가르침을 보고서도 오히려 송연해할 줄 모르다면 성인의 이른바 "나도 어찌할 수 없다.109)"라는 사람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이러한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정자ㆍ주자ㆍ율곡ㆍ우암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선비 된 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 마디 말을 꺼내어 도를 지킬 계책으 로 삼지 못한다면 성현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무함하는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간옹(艮翁 전우(田愚))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제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도를 지킬 계책으로 삼지 못한다면 이는 간옹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당세의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바로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한 때문인데, 고상한 제문 (祭文)을 들추어낸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창칼의 위협을 가하며 쫓아내기를 바라는데 이르 렀습니다.【〈심치대(沈致大)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한쪽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함 때문인데, 억지로 문고를 압류한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검국(檢局)110)에 고소하여 큰 재앙을 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옛적 선사와 오늘날 소자가 만난 재앙이 똑같구나.근세 유자(儒者)들의 의론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성인의 문하를 어지럽히는 적도와 왕가(王家)에 재앙을 끼치는 역도로 몰고, 사람을 칭찬할 때에는 고금에 유일한 사람이며 공 자나 주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니, 나는 그러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리들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부모를 파멸시킨 적자(賊子)와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으로 몰고, 오진영을 칭찬할 때에는 식견과 문장이 선사보다 뛰어나며, 또 우옹(尤翁 송시열)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켜세우니, 이것은 미워할 만한 나쁜 습관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의(私意)와 객기(客氣)에 빠져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분별없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이니, 미워할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여겨야 할 것이다.지난번에 인보(仁父)111)와 이견(而見 오진영)이 나에게 출사하여 나라의 보존을 도모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를 꾀하지 않는 것으로, 가릉(嘉陵)의 여 러 사람들112)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화((華)와 경(敬) 두 아이에게 부침〉】지난번 이견이 처음 왔을 때에 맹사간(孟士幹)의 뜻을 전하며 "아무개 어르신이 한번 일어 나시면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또 서울에는 아무개와 아무 개가 의지할 만하고, 대궐 내에는 모궁(某宮)이 통할 만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군자가 큰 일을 하면서 어찌 모궁을 좇아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견이 다시 와서 "아무개 사람이 근래에 이미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하기에, 내가 "어진 무리들이 헤아 려서 의지할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가소롭다."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오진영【이견(而見)은 그의 자이다.】이 행한 것과 선사께서 물리친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이런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스승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멀리 있는 사람에게 투척하여113) 선사로 하여금 목멜 생각을 품고서 변고를 대비하시게 한 변고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이 일 이전에는 선사께서 때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내셨는데, 이 일 이후에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며, 또 그의 도당인 권순명(權純命)이 기록한 〈치명록(治命錄)〉 중에 "오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셨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그의 도당은 또다시 오진영은 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변박하고 성토하는 것은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일찍부터 이미 "도의를 꾀하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것과 "끝내 일을 만들 것이다."고 우려하신 것에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주자의 경우도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르다는 까닭으로 마침내 임율(林栗)의 탄핵 상소를 만 났고114), 또 육구연(陸九淵)의 문인들이 원수처럼 보는 것을 당했는데115), 섭씨(葉氏)가 또 한 일찍이 편지로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주자는 오히려 말을 다하지 못한 것 을 스스로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한즉, 모름지기 저 사람이 남과 논쟁하는 것이 공공의 도 의를 논쟁하는 것인지 사사로운 생각을 논쟁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하는데, 논쟁하는 이유는 묻지 않고, 오직 논쟁하는 것만을 그르게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국가의 정토(征 討) 및 성인군자가 스스로 정도를 지키려다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받거나 다른 사람의 모함 에 빠지는 것과 혹 누군가 정도를 해치는 것을 보고든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 탄핵하고 초야 에 있으면 배척 하려다 도리어 화를 만나는 것, 이러한 것은 마치 밭의 짐승을 잡아서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난 형상116)과 같은 것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비록 천지조화의 기운으로도 또한 음기가 지극히 성대해고 심지어 양기와 다투다 둘 다 패하여 함께 손상되 는 이치가 있게 됨을 면치 못한다. 기수(氣數)의 융성과 쇠퇴가 이와 같다면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도 또한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설사 공부자(孔夫子)께서 지금의 시대에 사 신다 하더라도 아마 면치 못하실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 다면 군부(君父)에게 예의가 없고 성인(聖人)의 도에 화를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굳이 공격하여 성토함으로써 그와 승부를 겨룰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자가 있게 될 것이니, 그것이 국가와 세도(世道)에 해가 됨이 어찌 다른 사 람과 논쟁하는 것보다 백배나 크지 않겠는가. 아, 애통할 따름이다.【〈쟁유공사설(爭有公私 說)〉】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청컨대 우리 동문의 여러 사람들은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오진영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것으로 무함하여 선사의 도의를 잃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성리의 학문이 다른 까닭 정도일 뿐이겠는가. 그가 고소한 재앙이 비록 혹독하다 하더라도 문인 된 입장에서 어찌 이것을 두려워하면서 말을 다해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쟁하는 것이 공(公)인지 사(私)인지 묻지 않고, 오직 논쟁만을 그르게 여겨서야 될 뿐이겠는가. 또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와 같지 않은가? 어찌하여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고 세도(世道)에 재앙을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굳이 공격하여 성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선사의 글을 익숙히 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이른바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어찌 차마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陳相)을 본받아 추성(鄒聖 맹자(孟子))이 배척한 사람117)이 되겠습니까. 또 어찌 차마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 서 감히 쫓아내지 못하여 민옹(閩翁 주자(朱子))이 싫어한 것118)을 답습할 수 있겠습니까. 【〈제전재선생문(祭全齋先生文)〉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의 동문 천오백 사람 중에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부모와 스승에게 무례함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는 자들도 또 세상에 넘쳐나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감히 옛적부터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단지 선사의 말씀처럼 민옹이 싫어한 것을 행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지금 그의 글을 보니, 곧바로 소자(小子 제자의 겸칭)를 편벽되고 방탕한 말을 하는 음란하 고 사악한 도당이라고 배척하였고, 또 쫒아내야 한다고 의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그 렇긴 하지만 만약 선생의 가르침이 소자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구황 (九荒)119)에 쫓겨나 죽을지언정 마음은 진실로 달고 즐겁게 여겨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 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오진영의 도당과 김세기(金世基) 무리들의 글을 보니, 곧바로 이 몸이 스승의 명을 무함하고 미혹시켜 남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는 간흉(奸凶)이며,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예의가 없는 패악한 무리라고 배척하였다. 또한 이미 검사국에 고소당하는 재앙까지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만약 선사의 도가 소자로 말미암아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니, 또한 선사께서 당시에 전옹(全翁 임헌회)에게 도리를 다한 마음과 같을 뿐이다.오늘날 선비들이 대부분 묘적(墓籍)의 등록120)을 인허 받는 것을 명예와 절개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명예와 절개를 위해 부조(父祖)의 유해 (遺骸)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인정과 천리에서 마땅히 나올 바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 산 사람을 능멸해 죽일 것이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묘를 파서 옮길 것입니다. 일단 묘가 파괴된다면 그 재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 전(大典)》에 "시체를 더럽히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죄가 같다."고 하였으니, 자손이 묘 적을 등록하지 않아 시체의 혼백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변고를 당하게 한다면 이는 부 조가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통분을 참 고 원한을 머금은 채 절박하여 마지못해 산다.121)"는 남긴 가르침을 마지못해 사용한 것입 니다.【〈송회연(宋晦淵)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매번 선사께서 묘적의 등록을 인허 받으신 것을 문고를 인허 받도록 한 가르침의 증거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온당한 것이겠는가. 묘적을 등록하지 않는 재앙은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됨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고는 간행하지 않고 필사하여 보관해두면 아무런 일이 없을 따름이니, 어찌 이른바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재앙이 있겠는가. 그가 억지로 끌어다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이 진실로 그의 정상인데, 사람 중에 그의 말에 현혹되어 분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매우 가소롭지 않은가.질문하신 "제가 죽은 뒤에 누가 도를 전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은, 저 스스로도 소견이 없는데, 다른 것이야 다시 어찌 물을 것이 있겠습니까. 정문(程門)의 제자들에 대해 서 회옹(晦翁 주희(朱熹))은 그들이 스승을 배반하고 이단에 빠졌다고 말하였으니 도를 전수 하는 어려움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병암(炳庵)122)이 병이 없었을 때에 저는 그의 학문이 깊 고 식견이 바르며, 지조가 굳고 덕이 두터워 위로 전옹(全翁 임헌회)의 실마리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벗이 불행하게도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나머지 제자 들 중에는 아직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구구한 제가 선숙(禪宿)123)의 눈물을 감당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노인오(盧仁吾)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에 얼마나 말이 비통하고 슬픈가. 도를 전할 사람이 없음을 근심함에 얼마나 말이 심각하고 절실한가. 바로 공자가 안연(顔淵)을 잃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124)"와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125)"라는 탄식을 한 것과 천고토록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오진영은 어찌하여 차마 진본(晉本)126)에서 이것을 삭제해 없애버린 것인가. 아, 불인(不仁)함이 심하다. 일찍이 삼천(三千)의 제자들이 애공문(哀公問)과 안연사(顔淵死) 등의 장을 《노론(魯論)》127)에서 삭제해 없앴다고 하던데, 이런 이치가 있어서인가? 또한 큰 변고라 이를 만하다.선사께서 신장(愼狀)128)을 삭제하도록 명하신 뜻은 글이 사실과 어긋났다고 여겨서가 아니 라 단지 본가(本家)에서 글과 편지를 받고 답장이 없자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 런 것인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네. 존선사(尊先師) 서(徐) 어른129)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우리 외가(外家)가 신원(伸寃)된 뒤 첫 유현(儒賢)의 글이기에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감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외가(外家)가 가난이 심하여 예 물 없이 편지만으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어렵게 여겼기에 이 때문에 오래도록 답 장 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네.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 계셔서 이런 곡절을 아뢰었다면 어찌 허락 하지 않았겠는가. 이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네."하셨네. 내가 그 분의 효심을 중시하여 속편 (續編)에 넣기로 논의하였는데, 서 어른께서 나로 하여금 원편(原編)에 넣을 것을 다시 생각 해보도록 하신 것이네.【〈임윤만(答任潤萬)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신장은 전옹(全翁 임헌회)께서 임종하실 때에 삭제토록 명하신 것인데, 선사께서 《집촉록(執燭錄)》130)에 실어 놓으신 것은 오히려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고, 논의하여 속편(續編)에 넣으셨다가 뒤에 또 결국 원편(原編)에 넣으셨다. 그런데 음성의 오진영은 도리어 선사께서 손수 교정하신 신도비(神道碑)131)를 바꾸어 묘갈(墓碣)로 고쳐 일컬으면서 이는 국전(國典)에 있다고 하였지만 끝내 국전에서 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타고난 천성이 괴이하고, 일 처리가 망령된 것이 원래 보통 사람의 마음에서 나올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전을 빌려 핑계를 대며 사람을 압도할 구실로 삼은 악한 마음을 볼 수 있다.유상준(柳相俊) 군이 영형(令兄) 동만(動萬)132)과 사사로이 상의하여 결정하고 마침내 초고 (草稿)를 사사로이 판각하여 덕이 높은 어른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軆)인가? 비록 전에 정한 간행소의 공임(公任)과 장재(掌財)를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 만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몰래 간행한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네. 서 어른께서 그 소식을 듣고 전담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어 쩔 수 없이 통문을 발송하여 성토한 것이었네.【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 에야 성토하였으니, 또한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전재(全齋) 문하의 여러 공들이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려 했던 유경당(柳敬堂 유상준)을 성토한 일에 대해 마지못해 한 것이라 하셨고, 다시 "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으니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오진영이 선사의 절개를 무함한 경우는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죄가 백배가 될 뿐만이 아닌데, 또한 편지를 보내 고치도록 권면하자, 사양하고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쪽의 의론은 인의를 함께 행하였다고 칭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중(過重)함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두 공으로서도 형편없는 사람이면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두 공을 가려 뽑아 그들을 고제 (高第)의 제자로 세운 것이 어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하신 것이 되지 않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도당들이 선사의 이 편지를 인용하여 오진영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배척하는 것은 선사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유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오진영은 이미 스스로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쳤으며, 사림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였으며, 누구의 집에나 비추는 해133)를 떠받드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그를 배척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형편없는 사람이 되겠는가. 설사 그들의 말처럼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가려 뽑았다 하더라도 제요(帝堯)는 숭곤(崇鯀)을 가려 뽑았고134), 주공(周公)은 관(管)ㆍ채(蔡)를 가려 뽑았지만135) 모두 사람을 알아보지 것에 귀결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적이 있고, 다시 말년에 그가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신 적이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선배들은 다른 사람의 악(惡)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선(善)을 말하지 않는 것을 천지가 만물 을 생장시키는 마음과 서로 같지 않다고 여겼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구제할 만한 재물이 없으니, 우선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드날리지 않는 것이 만물을 생장 시키는 천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것이네. 지금 우리들은 다시는 더불어 성 리(性理)에 대해 말하지 말고, 망령되고 잘못된 심술과 언행은 털끝만큼도 입과 붓끝에 올려 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이 심제(心弟)가 성사(性師)를 배우는 도이네. 나는 여기에서 이견 (而見) 그대가 식견이 있는지 식견이 없는지, 덕이 있는지 덕이 없는 지를 증험하려고 하니, 이견이여, 이견이여, 공경히 듣고 삼가 지키게나. 【나는 본성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그대의 마음에 합당할 만한 것이 있지 않지만 이 한 마디 말은 이견 그대가 평생 스승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네. 분수에 넘는 말을 했으니, 나의 죄를 잘 알고 있네. ○ 〈오진영(吳震泳)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것은 선사께서 오진영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 끝과 소주(小註)의 말로 보건대 그를 염려하심이 깊고, 그를 경계하심이 절실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꺼이 살펴 들어 공경히 따르지 않고 끝내 훗날 무한한 변괴를 만들어낸 것인가? 또 진인(晉印)136) 중에 이견(而見)을 두 번 부른 것과 소주 여덟 글자를 삭제한 것에서도 또한 그가 기쁘게 듣지 않았던 마음을 볼 수 있다.내 스스로 정력을 헤아려보건대 세상에 오래있을 사람이 아니네. 평생 이룬 것들이 전부 변 변찮아서 일컬을 만한 것이 있지 않고, 오직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 것이 '성(性)' 한 글자에 있기에 감히 뭇사람을 따라 깎아내리지 않았다네. 이로 인해 당시 유림(儒林)에 죄를 얻음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처럼 높았지만 또한 끝내 원망과 후회가 없음은 서로 따르는 여러 군들 이 들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네. 내 마음을 전적으로 그대 이견에게 부탁하니, 힘 을 다해 주지(主持)하고, 매우 공경하고 삼가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노부의 눈이 감길 수 있을 것이네. 기미년(1919) 3월 상순(上旬) 79세에 계화도에 은둔하며 지내는 병든 늙은이가 공경히 말하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이 편지 중에 이견에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말씀이 있고, 또 문고에서 편지의 년월을 갖추어 쓴 것은 특별한 예에서 나오는 일이다 하여 의발을 전수한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경계한 말이고, 그를 인정한 말은 아니다. 또한 선사의 함자를 위조해 서명하여 선사로 하여금 목을 맬 생각을 하시게 했던 사건 전이었고, 그 뒤로 삼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도록 다시는 이 편지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글이 없었으며, 게다가 이기환(李起煥)에게 보낸 편지에 "아무개가 일의 공적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권순명(權純命)의 〈치명록(治命錄)〉에 "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된다."는 말씀이 있으니, 이 편지를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권순명은 그의 당인데도 오히려 이러한 기록을 두었으니, 더욱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 만약 이런 기록이 이쪽에서 나왔다면 그가 또 선사의 명을 무함하고 현혹했다고 말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집안사람 중에 어버이를 죽인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집안사람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 또한 감히 말한다. "동문 중에 인허를 내라고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선사를 무함하여 대의(大義)를 더럽힌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동문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는가."내가 신(申)과 절교한 것으로 신의 무리에게 무함을 받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김의 형제는 귀가 막히고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이 아니면서 어찌하여 듣지 못한 것인가?【〈최병 심(崔秉心)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이미 연서(聯書)로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하고, 또 그의 〈고현천문(告玄阡文)〉137)을 변론하였다. 또 박진호(朴震鎬)에게 말하여 그 조부(祖父)의 글을 받지 말게 하여 박진호의 의심과 노여움을 받고 김용승의 무리인 박인규(朴仁圭)에게 무함을 당하는데 이르렀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오진영의 무리는 도리어 나를 김용승과 일당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연서로 절교한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니, 매우 가소롭다. 이것은 진실로 그의 무리들이 비록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니, 오직 사람을 밀쳐내는 일생의 장기(長技)이다.김평묵(金平默)이 나의 제사문(祭師文)을 본 것이 병자년(1876, 고종13) 계동(季冬 12월)이 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문리(文理)에 통달하지 못해 그것이 신기(新奇)한 것을 만들어 내고 어려운 일을 구차하게 해내는 것인 줄 몰랐다가 정축년(1877)에 자신의 뇌문(誄文)이 물리 침을 당한 뒤에야 문리에 비로소 통달하여 그것이 세 정승과 여섯 현인을 배척한 것임을 활 연하게 깨달았던 것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크나큰 죄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공격한 때에 있지 않고, 김평묵의 제문을 받지 않은 날에 있습니다.【〈아무개에게 보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전(傳)ㆍ표(表)의 일로 오진영과 서로 관련된 것이 임술년(1922) 겨울이었다. 내가 만약 선사의 명을 현혹하려다 그의 다스림과 바로잡음을 받았다면 이 당시에 어찌하여 한 마디 하문(何問 힐문(詰問))은 없고, 반대로 앞뒤의 논설이 다르다 하여 스스로 송구스럽다는 편지가 있고, 이어 갑자년(1924) 가을에 그의 선사에 대한 무함을 성토한 뒤에야 비로소 명을 현혹시켰음을 깨닫고 그것을 단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죄는 명을 현혹한 때에 있지 않고, 오진영을 성토한 날에 있는 것이다. 병자년(1936) 여름 김세기(金世基)의 흉문(凶文)에 이르러서는 명을 현혹한 것이 또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 아, 선사를 무함하여 다른 사람의 성토를 받은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성토한 자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도둑질해 놓았다가 주인이 찾아서 가지고 감을 당한 도둑이 도리어 주인이 도둑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오늘날 선비들이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校宮 향교(鄕校))를 보존하고 오히려 스스로 성 현을 높인 공으로 자처하니,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화도만록(華島漫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교궁을 보존하는 것과 자기의 문고를 간행하는 것 중에 그 경중(輕重)과 대소(大小)가 과연 어떠한가? 선사께서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을 보존하는 것을 오히려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자기의 원고를 간행하여 매우 부끄러움이 없는 행위를 무릅쓰려고 하시겠는가. 흉악하고 흉악하도다. 무함하는 자의 말이여.주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고상하고 신묘한 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인이 그 것을 숨긴다면 이는 성인이 대단히 형편없는 사람이니, 불충(不忠)과 불신(不信)을 성인이 제일 먼저 범한 것이다." 하였네.【〈정세구(鄭世求)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주자의 이 말은 성인은 숨김이 없다는 것을 심하게 말한 것이다. 오진영은 자신을 성토하는 글 중에 선사께서 혼자 있을 때 명한 일이 없음을 심하게 말한 "만약 일을 비밀리에 해야 해서 몰래 한 사람에게 부탁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심술(心術)과 견식(見識)이 모두 매우 우매한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선사를 논박(論迫)하는 패악한 말이라 단죄하였고, 선사께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가 없었음을 심하게 말한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不忠)을 반복하신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 단죄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또한 주자의 이 말에 대해 논박하는 패악한 말이 위로 성인에게 미쳤다고 할 것인가?한 가문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아주 악랄한 소인이 아니라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네. 오늘날과 후세 사람들이 이견을 소인이라 이른다면 그대는 의심할 것이 없는 군자이네. 그 렇지 않다면 그대가 어느 곳으로 가서 발을 붙이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계셔서 오진영이 59명을 전주(全州) 검사국(檢事局)에 고소하고, 사손(嗣孫)을 진주서(晉州署)에 압송해 가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셨다면 반드시 이 말로 정세영(鄭世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융흥(隆興) 초에 화의(和議)138)가 결정된 뒤에 한무구(韓無咎 한원길(韓元吉))ㆍ이덕원(李德 遠)139)이 모두 지킬 바를 잃었는데, 오직 왕가수(王嘉叟) 등 여러 사람만이 오히려 정론(正 論)을 견지하였으니140), 선생이 위원리(魏元履)141)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주자대전표의 (朱子大全標疑)〉】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무구ㆍ이덕원은 모두 당시 명망을 지닌 사람임에도 또한 절개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고, 유독 왕가수 한 사람만이 있었으니, 나 택술은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의론에서 진실로 느끼는 바가 있다. 아, 주자가 아니면 어느 누가 홀로 정론을 지키는 것이 귀중한 일인 줄 알겠는가.나라가 이미 망하고 임금이 이미 폐해졌으니, 신하가 장례를 치르면서 어찌 길흉을 논하겠 는가. 자손과 문하생들은 단지 다툼이 없는 땅을 구하여 매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효도 이며 도의(道義)이다.【다른 사람과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이 어찌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가 아니겠는가. ○ 〈경구에 부치고 아울러 제생에게 보이다[寄敬九幷示諸生]〉】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이미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을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로 여기셨으니, 어찌 문고를 간행하기 위해 저 일본에게 나아가 청원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인허를 낼 생각을 하시고 인허를 내는 분부를 하셨겠는가. 이것이 일찍이 문고의 간행을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유서(遺書)를 남기신 이유이다. 學問之弊有兩端, 一是苟偸, 一是熱閙. 熱閙者, 胸中不安貼, 凡事要自主張, 不問前言往行如 何, 一任自己所見, 胡叫妄作而已. 苟偸者, 又却只是謹身惜名, 目見邪說詖行剝蝕正道, 而不 敢開口指陳, 其行處亦多可觀, 終是苟簡底意思在. 【〈與鳳峀金丈〉】澤述謹按: 以近日吳震泳事論之, 胡叫妄作之不已, 而至於誣師節以認稿, 改師稿以己見, 熱閙之弊一至於此. 若其目見誣師悖行剝蝕正道, 而不敢開口指陳者, 不閑師道之罪與害師道之罪, 相去不遠, 苟偸之弊, 一至於此. 先師之言此兩弊, 其慮遠哉.專察利害之弊, 至於遺君後親倍師賣友.【〈答峿堂李丈〉 下同.】澤述謹按: 震泳不勝事功之心名利之念, 其弊至於忘君戴讐陷師禍友, 可不畏哉?凡古來異學之士, 由後人視之, 固是門外, 自當時觀之, 猶在室中. 且如墨氏宗堯舜, 是墨氏在 孔孟室中. 陸氏尊鄒魯, 是陸氏在程朱室中. 惟其如是, 故世人親聞儒者之辨闢, 而猶認爲正學. 聖賢目見世人之陷溺, 而攻之如血讐. 此在當時, 不知孰爲得失, 而後世知道之士, 出而正之, 然後始有中外邪正之分, 而不可以復合矣.澤述謹按: 人多譏澤述辨陰震者, 曰: "彼亦尊師, 胡爲乎室中之鬪?"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如何哉?凡吾儒之辨異端者, 只認爲道理當然而爲之, 不可較吾說之行否它人之從違彼勢之强弱, 而爲之 前却也. 孟朱之時, 彼固未嘗畏之. 雖孟朱亦未敢便道擧天下無一人不從吾說者矣.澤述謹按: 人又有譏澤述辨陰震者, 曰: "彼衆子寡, 彼强子弱, 子雖辨之, 子說其能行諸?"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何如哉?彼之間言長語誣辭惡聲, 愈辨而愈甚, 徒自憤懣耳, 不若付之忘言. 久則是非自明, 縱人未明得, 亦須有天在, 正不當煩惱我心君也. 此比年所受用.【〈答安渾齋〉】澤述謹按: 澤述於震承及其黨之誣辭惡聲, 亦曾受用先師此訓而得力矣. 但其事關先師者, 則不容終已耳.吾丈所謂"由前則以爲講論薄過而忍之, 由後則爲師門大變而力討之, 非但田某之不心服, 亦恐 傍觀者, 以爲出於私心之作用, 而非出於義理之當然"者, 可謂刺著他痛處.澤述謹按: 震泳之於金容承討己誣師之後, 曰: "此人年前呼漢農老." 又曰: "此人心中無先師久矣." 漢農老無先師, 何等大罪? 而由前則不惟以爲薄過而忍之. 且多年敬信愛護, 至定校正師稿有司望帖而聘之. 至於討己之後, 始乃發其罪而討之, 豈非私心作用哉? 雖然, 承則終於倍師, 非渠之所當不心服. 但震之心術則然耳.金之當初爲此怪論也, 其心豈復有忌憚? 而今乃爲此遮藏之計. 此則某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 無其功也.澤述謹按: 震泳之當初"料量爲之""不必深拘""不言之敎""天地生物, 聖人立極""不諱公言"之說而誣師也, 其心豈復有忌憚? 後乃以"語欠區別""命辭疏忽"等說爲遮藏之計. 此則湖南之士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無其功.大抵先集是彼之手分現化, 絶非先先生所以處於同門與門人之意. 吾恐先先生之目, 將不瞑於地 下, 甚可痛哉. 【〈答趙泰判〉】澤述謹按: 先師於肅齋, 以其爲先師之同門, 猶以文集之被人手分現化, 深致痛恨, 而至謂先生之目, 不暝於地下. 胡乃今之君子, 於親師文集之被人無難改削也, 恬視而曾無痛恨之意也? 絶可怪也.寧可無諡號, 諡狀決不可使其人作也. 【〈與任景孺〉 下同.】澤述謹按: 年前, 澤述聞田鎰孝使震泳作先師行狀之說, 亦曰: "寧可無行狀, 行狀決不可使誣師人作也.事係師門, 一息未絶之前, 豈容放過?澤述謹按: 澤述於辨師誣正稿亂, 其心亦如此而已. 或以事在年久, 迄可已矣. 規余者, 視先師此言, 謂如何哉?嘗見明儒高景逸之言, 曰: "氣節而不學問者有之, 未有學問而不氣節者. 若學問而不氣節, 這 一種人, 爲世敎之害不淺." 此言美矣, 然而未盡. 蓋若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 其曰"學問", 只是外面聲華而已.【〈與王司諫〉】澤述謹按: 使先師誠有認意認敎, 如陰震之說, 是所謂"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者. 嗚呼! 豈其然乎? 或者護法陰震之不已, 至有謂"雖有認敎, 不害爲先師"者, 又至有謂"有認敎, 然後爲先師, 若拘牽於區區之小諒細節, 而不思道之傳後, 不足謂大君子"者. 噫! 天理之晦, 人心之邪, 乃至於此乎?今於彼人罔極之誣, 反而求之吾心, 如見些子怨恨恐㥘底苗脈, 卽此是窒碍, 何等苦腦? 豈所謂 "無入而不自得"? 豈所謂"坦蕩蕩"? 竊自謂吾人正當於難處險處, 默默加體道之功, 不可只於 文字上做家計也.【〈答李友明〉】澤述謹按: 澤述於陰震罔極之誣, 反求吾心, 雖自謂無怨恨恐㥘, 然要之至於"無入而不自得""坦蕩蕩", 然後乃已, 先師正當於難險處加功之訓, 如承今日面命矣.一番人以某之言士子喪中倡義似過中云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答金光國〉】澤述謹按: 震泳以澤述論渠所作〈鄭節士傳〉後論中混華夷爲說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 先師是直論倡義之人, 以其只論居喪者之中否, 而不論其事之是非. 罵者之言, 猶爲無當. 況澤述但論其文議論之有害義, 而初不論節士之事者, 則罵者之言, 豈非尤無當乎? 嗚呼! 澤述從先師後而得排節義之目, 於分榮矣, 只見彼用心之險也.當此斯文分裂之日, 朋友雖有小疵, 苟非大故, 亦可以含垢藏疾, 以全交道, 此實朱、宋兩先生 之意也.澤述謹按: 人有引先師此書, 謂吳震泳金容承不當絶. 噫! 誣師倍師非大故而是小疵乎? 豈不觀先師絶鄭申李三人之事乎? 此所謂"小疵", 指申梨山之知嘉金無狀而特不能顯然告絶而言耳.梨每以斥逐祭文, 爲激成惡心, 挑發禍機. 某竊謂此事, 只論是與不是, 不得說激觸, 此似是利 害上言論也.【〈答鄭命新〉 下同.】澤述謹按: 吾門之謂討絶吳金爲激成惡心挑發禍機者, 視此訓, 謂何如也?特以梨山有調停之論, 使李讒益肆, 金勢益盛, 所以成今日之禍. 今乃不以自咎, 反歸罪於直道 而行者, 不知此是何等見識議論也.澤述謹按: 吾門之變, 特以中立者有調停之論, 故使吳誣益肆, 金倍益悖, 以成大禍者, 亦有如先師此說也.向有一朋友, 見謂"君之欲退其文, 可謂疏矣.彼中氣勢, 何可當也?" 然則吾人臨事, 不當視理 之是非, 以爲進退, 只看人之强弱, 以爲前却矣, 此爲何等學問?澤述謹按: 澤述始討陰震也, 其後之累辨不已也, 人固有以彼勢不可當勸止者矣. 然吾只以當視理是非爲進退, 不看人强弱爲前却, 亦如先師之心已矣. 果不免訴禍於前, 誣辱於後. 向之勸止者 自謂有先見之明. 然我何有一毫怨悔於其間哉?凡橫逆之來, 除却關係世敎與道術者外, 且當容之.【〈答林奭榮〉】澤述謹按: 澤述於震邊橫逆之來也, 除却關係誣師亂稿者外, 只得一切受之, 而不辨理矣.子敬謂明道不絶王安石, 伊川不校蘇東坡. 鄙謂明道德量宏大, 然使王氏譏侮父師, 則其待之必 別矣. 且彼金柳門人以東坡自處. 則某亦不與之校矣. 今彼自謂孔朱正傳, 而性理議論, 出處事 行, 咸乖聖訓. 則爲儒者者, 安得無言?【〈與崔鍾和〉】澤述謹按: 湖人之與陰震絶者, 以其誣陷先師故爾. 且彼若非平日高弟, 而又不以傳鉢自處, 則湖人之辨, 亦不必如此之力矣. 惟其自處以傳鉢之高弟而誣師, 則人不能不信. 故辨之不得不力也.一正一偏, 一公一私, 必不免於有爭. 傍觀者, 須精察於所以是非之方, 又須細看彼此言辭之溫 暴氣像之平險, 而後以定吾向背之理, 施吾扶抑之力可也. 不然而或兩是之, 或幷非之, 先賢 所譏"洛也是, 蜀也是, 元祐也非, 熙豊也非"之說也. 是豈天命之理與聖人之法乎?【〈答林章 佑〉】澤述謹按: 今之爲湖亦尊師, 嶺亦尊師, 嶺亦誤事, 湖亦誤事之說者, 胡不察所以是非之方, 又看言辭溫暴 氣像平險, 而向背扶抑, 如先師之說也? 【鄭道鉉對金弘梓言: "議論則湖是." 田璣鋠對余言: "嶺湖之戰, 湖勝." 余曰: "湖受嶺困, 至遭訴禍, 何謂湖勝?" 田曰: "非謂戰勝之勝, 謂理勝之勝." 余曰: "何謂?" 田曰: "湖之文字主論事, 嶺之文字主打人, 是固公論也. 故謂之勝." 鄭與田, 俱居嶺而右嶺者, 其言如此. 則非不知所以是非之方及言辭溫暴氣像平險之分, 而終不能知所擇於向背扶抑之間, 是可歎也.】但就奠章, 條而晳之, 以白其師心之無它可也. 終無奈有心之於無心, 有眚怙之別. 於是舍其 所以分裂之故, 顧而之它, 裝飾其疑, 似掇拾其流傳, 以爲汙衊賤身疑眩後進之計. 可見用心 之苟且勞矣.【〈答關西諸生〉】澤述謹按: 使陰震之說, 苟無誣師之實, 爲其徒者, 但就震之本文, 條晳其不爲誣師, 可也. 乃顧而之他, 裝飾其疑, 似抑勒其無據, 以爲汙衊湖人疑眩一世之計. 可見其用心之苟勞, 而尤見其誣師之罪出於有心之怙也.使華西之於栗翁, 眞有心悅誠服之意.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 子苗脈矣. 使華西之於朱子, 眞有篤信不貳之實.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 難謂其無些子苗脈矣.【〈華門二子論〉】澤述謹按: 今與後人論震泳事者, 亦豈不曰"使艮齋眞無認意認敎, 則其高弟,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子苗脈矣." 此余所以深懼而不得不辨者. 或者指余爲過慮, 何其無識慮也?尹喆圭之詐傳勅令而誘逐賓師也, 朝廷雖不勘核, 章甫却當聲討.【〈瑣墨〉 下同.】澤述謹按: 退溪所謂"通文上疏, 非儒者之事", 以儒者干預朝政而言, 非謂斯文中有事而不相告也. 今有引此以非湖南之通文以討震者, 已失退溪本旨矣. 今又以先師說觀之, 章甫之討尹喆圭, 因朝廷不勘其罪而行之, 則是不可謂非干預朝政者而亦許之, 尤可以見謂通文討震非儒者事者之無識也.儒者著書數十卷, 不可用曲筆, 寃枉古今一人, 可謂接承天地好生之心, 後世應得賢子孫. 昔人 言: "今之論人, 有幷跡而誣之, 那能論心? 此天譴鬼責所係, 愼之."澤述謹按: 陰震及其徒黨誣我以辨師誣出於文字之修嫌. 我之於渠, 使實有可嫌之跡, 避嫌而不辨誣, 非爲人弟子之職, 固不可以此而誣其心, 而況初無可嫌之跡, 乃構捏抑勒, 强成疑似之跡者乎? 渠何不懼? 然却顧於"幷跡誣之, 那能論心? 天譴鬼責所係"之訓也乎.歷數古今, 萬般弊病, 其源無一不出於吾儒之未晰乎聞達之辨, 不審乎誠僞之幾, 至於事求可功 求成, 而不以第一等十分道理自爲而爲人也.【〈告先師墓文〉】澤述謹按: 事求可功求成, 已足以致萬般弊病, 而況先師嘗斥陰震以事功爲重而不計道義者, 非但事求可功求成而已, 則宜其釀成後來"僞署師銜, 投諸遠人""誣師認敎""改亂師稿""乞錢日雀""網打同門""押囚師孫"萬般罪惡也.某亦有血肉之身, 豈無自私之理? 只爲見得尊師衛道, 不容不爾, 故目見仇謗溢世, 而不敢變素 守以徇之, 其情良亦戚矣. 苟得人地如執事者爲之, 則斯文有扶植之助, 而自身無拳踢之加. 乃 執事自占便宜, 而無任事之心, 使此孤賤陋劣者代之, 是豈君子公正之心乎? 執事不惟不自任, 乃或反助彼勢, 無乃尤不可乎?【〈與申仰汝〉 下同.】澤述謹按: 今於陰震之誣亂, 如得同門老成有人地者, 任辨討之事, 則可以戢彼邊之恣肆, 而明先師之道義. 胡乃皆自占便宜, 反助彼勢, 使此人微言輕如澤述者任之, 以致仇謗溢世, 禍患加身也? 雖以尊師衛道之不容不爾而然, 然其情良亦戚矣. 嗚呼! 以伊昔先師之人地, 猶有此歎, 況於如今小子之卑微乎?一番人又以某祭文有陰陽心迹之語, 謂之慢神, 以此爲大罪. 然陰陽離合心跡矛盾之說, 農翁嘗 以擬之於文谷, 以明其必不然也. 用之於父者, 謂不可施於師, 某不識其何說.澤述謹按: 陰震以湖南通文中"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語, 所以深明先師必無認敎"者, 謂上及不敢言之地, 以此爲大罪. 何不讀先師此訓, 而自服勒人之罪乎? 蓋其心術與先師所謂"一番人"者, 一串貫來, 殆若一氣而傳, 同胎而生也.惟是未嘗爲學, 便都無事, 今旣從士友之後, 與聞其說, 便如此計較不得, 才涉計較回互, 便是 靠負聖賢之敎也. 且孟子所以與人辨爭, 只要人知聖人之爲是, 異端之說爲非爾.澤述謹按: 今之辨師誣也, 若恐其致禍, 才涉計較回互, 便是靠負先師之敎也. 其所以爲辨, 只要人知先師之無是, 而彼說之爲誣爾.愚竊覵執事之意, 似是懲創於懷尼之爭湖洛之辨. 故凡於人物邪正之間講論同異之際, 一切以和 同爲主, 殊不知分別邪正, 剖判同異, 令不相混淆, 乃是自然之和, 不然只是私意人欲而已矣.澤述謹按: 近日之勸澤述及田鎰中與吳震泳平和者, 豈不竦然於先師私意人欲之訓也乎?執事亦非不知彼文之可惡, 而惟欲以彼自不是處之. 此若只關己事則可, 今乃父師受侮, 而只以 此一句冷語了之.澤述謹按: 震泳之誣, 只關己事者, 則固以彼自不是處之已矣, 其關於先師者, 則不敢以一句冷語了之, 以戾於先師心法也.執事兄弟之處之也, 在自家則怒之, 在先師則安之.澤述謹按: 震泳於容承年前, 呼漢農老, 心中久無先師也, 事在先賢先師則安之, 及其討己之誣師也, 事在自家則怒之, 始發其罪, 又使人拳踢於先師靈前. 先師此言, 若先見震之心述而豫言之者矣.昔之亂朱子者, 在朱門之外, 今之亂朱子者, 在朱門之內.澤述謹按: 昔之誣師者, 在師門之外, 今之誣師者, 在師門之內. 在師門之內, 故其說有未易辨者, 其說有未易辨者, 故其辨之不得不力也.吳伯豊, 朱門之顔淵也, 慶元間, 樹立卓然, 屢被師門之稱奬矣. 尤翁之作滄浪文字, 有李誠父 吳伯豊等語, 後以大尹之言而削去之. 夫尤翁之比擬, 大尹之請刪, 豈以伯豊眞有趨勢之累? 只 爲其嘗有附韓之謗也.【〈守玄齋偶記〉 下同.】澤述謹按: 人有言"震泳雖誣師, 師實無是實, 則人誰信之?" 此不思之甚也. 吳伯豊雖無趨勢之累, 只爲其嘗有附韓之謗, 至削去於文字之作. 則先師雖無實地之累, 安知其不以嘗有認敎之誣, 受後人之刪於文字如吳伯豊耶? 區區竊有是懼焉.蓋其告絶之書, 以爛漫參差之說爲主, 而彼邊文字之分疏祭文者, 無慮累萬言, 而終無一句就此 分明道破者, 只須就宋朝四賢, 巧爲辭說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其心所在, 可見矣.澤述謹按: 湖南辨討陰震之文, 以認意認敎之說爲主, 而彼邊分疏之言, 無慮累萬言, 而終無就此分明道破者, 只就辨討人身上, 巧爲辭說, 勒成罪案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可見其心. 不以先師爲無認敎, 而猶有所忌憚, 而不敢放言謂有矣. 及至震答徐柄甲書"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說出, 而湖人僅脫訴禍, 垂頭喪氣, 無更討之力. 則於是震再與徐書, 放膽大言明有不言之敎, 至於無所忌憚矣.爲門人子弟者, 見其如此, 而避與人失和之小嫌, 而忘爲師辨誣之大義. 則師生之倫, 自此廢矣. 師生之倫廢, 則三綱九法, 亦無所賴而立矣.澤述謹按: 吾門諸人之避與震失和之小嫌而不辨師誣者, 能不竦然心目於此訓矣乎? 目見此訓, 而猶不知竦然, 此聖人所謂"吾未如之何也"者. 復何言哉?此而不闢, 程朱栗尤之道, 將不得行矣. 身爲士子,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靠負了聖賢敎育之恩也.澤述謹按: 震誣而不闢, 艮翁之道, 將不得行矣. 爲其弟子者,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是靠負了艮翁敎育之恩也.其所以得罪於當世,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抉摘高文, 遂至於戈㦸相加, 竄逐是擬.【〈答沈 致大〉】澤述謹按: 澤述所以得罪於一邊,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勒執其文, 遂至於訴之檢局, 加以大禍. 嗚呼! 昔之先師今之小子同一所遭.近世儒流議論誣人, 則驅之以聖門亂賊王家凶逆, 稱人, 則推之爲古今一人孔朱齊等, 余甚憫 之.澤述謹按: 震之徒黨誣人, 則驅之以滅父賊子千古小人, 稱震, 則推之以見識文章優於先師, 又至幷侔於尤翁. 此其可惡之惡習. 然其實困於私意客氣, 不自脫出, 爲是狂悖, 則非可惡也, 伊可憫也.頃者, 仁父而見以出而圖存見勸. 此是功業爲重, 不計道義者, 却與嘉陵諸人, 不甚遠也.【〈寄華 敬二兒〉】頃者而見之初來也, 傳孟士幹之意云: "某丈一起, 則國中士流皆響應. 又京中則有某某可仗, 闕內則有某宮可通." 余謂: "士君子有爲, 詎可從某宮做事?" 及而見再來却言: "某人比已剃 髮, 誠是意外." 余曰: "賢輩所擬以爲可仗者如此, 誠可笑也."澤述謹按: 觀此震泳【而見其字】之所爲先師之所斥, 則其爲人何如也? 爲其有此根子, 所以後來致得僞錄師銜, 投諸遠人, 使師懷繯待變之變也. 蓋此事以前, 先師時致愛重之意, 此事以後, 則不復然. 而更有渠黨權純命所記〈治命錄〉中"吳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矣. 然而渠徒方且謂震是先師傳鉢之人, 而指辨討者爲傷先師知人之明, 殊不知先師知人之明, 早已在"不計道義"之斥"終有事爲"之慮矣.至於朱子, 又以性理學問異同之故, 遂遭林栗之彈章, 又見陸門之仇視, 而葉氏亦嘗以書誚其與 人爭辨, 而朱子猶以未盡其言自恨矣. 然則須看他與人爭, 是爭箇公道, 爭箇私意, 不問其所以 爭, 惟以爭爲非而已. 則自古國家之征討及聖人君子之自守其正, 而被人詆訾, 被人擠陷, 或見 人害正, 而立朝則擧劾, 在野則擯斥, 而反遭其害, 此似獵取田禽而噬腊遇毒之象, 柰何避之? 雖以天地造化之氣, 亦未免有陰盛之極, 至與陽爭, 兩敗俱傷之理. 氣數盛衰, 旣如此, 則人事 是非, 亦何獨不然? 假使孔夫子居今之世, 恐也不免. 苟欲避與人爭競之嫌, 則將見無禮於君 父, 貽禍於聖道, 而不惟不能攻討, 而又有倡爲不必攻討以與彼角勝之說者. 其爲國家世道之 害, 豈不百倍於與人爭競者乎? 噫, 其可痛也已.【〈爭有公私說〉】澤述謹按: 請我同門諸人試思之. 震泳之誣以認敎, 亡師道義, 奚但性理學問異同之故乎? 彼之訴禍雖酷, 爲門人者, 豈可畏此, 而不盡言而辨之乎? 不問所爭之是公是私, 惟以爭爲非而已乎? 又試思之. 師不與君父等乎? 胡爲乎欲避與人爭競之嫌, 見無禮於父師, 貽禍於世道, 非惟不能攻討, 又倡爲不必攻討之說乎? 諸人非不熟讀先師之書, 猶然如此何哉? 怪事怪事. 無乃所謂"書自書, 我自我"者耶?豈忍效陳相之變於夷, 而爲鄒聖之所斥? 亦豈忍見無禮於父師, 拱手坐視而不敢逐, 以蹈閩翁之 所惡乎?【〈祭全齋先生文〉 下同.】澤述謹按: 吾同門千五百人中, 其爲變夷之陳相者, 固不足言, 其見無禮於父師而拱手坐視者, 又滔滔皆是, 可勝歎哉? 澤述之不敢自古便宜者, 只爲懼蹈閩翁之所惡如先師之言而已.今見其文字, 直斥小子爲詖淫之說淫邪之黨, 而又有行遣之論者矣. 雖然, 使先生之敎, 由小子 而不墜於地, 則雖竄死九荒, 其心誠甘樂之, 不自以爲悔也.澤述謹按: 今見震徒世基輩文字, 直斥此身爲誣幻師命, 抑勒人罪之奸凶, 亂常無禮之悖類. 亦已遭檢訴之禍而幾死僅生矣. 雖然, 使先師之道, 由小子而不墜, 雖死無悔, 亦如先師當日盡分於全翁之心而已.今之士多認墓籍爲損名節而不肯爲, 爲自己名節, 不顧父祖遺骸, 恐非人情天理之所宜出也. 彼 始也, 陵夷我人, 不從則終必掘移矣. 纔一破基, 其禍不可言. 《大典》: "汙穢尸軆, 與殺人同 罪." 則子孫不籍, 而至使軆魄, 遭罔測之變, 是與父祖被殺同, 此如何可忍? "忍痛含寃, 迫不 得已"之遺訣, 不得已而用之矣.【〈答宋晦淵〉】澤述謹按: 震每以先師許墓籍爲認稿敎之證, 此何所當也? 墓不籍之禍, 至於與父祖被殺同固也, 稿不刊而寫藏, 則斯無事已, 豈有所謂"與父祖被殺同"之禍者耶? 彼之强引掩罪, 固其情態, 人有眩於其說而不知辨者, 豈不可笑之甚哉?所詢"某身後, 誰可得其傳?"者, 某自無所見, 其它更何問也? 程門諸子, 晦翁且謂其倍師而淫 異, 甚矣, 傳道之難也. 炳庵無恙日, 某意其邃學正識, 堅操厚德, 可以上續全翁之緖. 此友不 幸遽九原矣. 自餘諸子, 未有可擬望者, 區區不勝禪宿之淚爾.【〈答盧仁吾〉】澤述謹按: 此於悼人云亡, 何等痛傷語? 憂道無傳, 何等深切語? 正與孔子失顔淵而發"未聞好學", "噫, 天喪予"之嘆, 千古同情, 震何忍刪沒於晉本乎? 噫, 其不仁之甚矣. 曾謂三千之徒, 刪却哀公問顔淵死等章於魯論者, 有是理也乎? 亦可謂變之大者.先師命削愼狀之意, 非謂文字爽實, 只因本家受文得書而無答, 則疑其不以爲重而然也. 尊先師 徐丈言: "此是吾外家伸寃後一初儒賢文字, 不容不傳後, 何敢不重之? 但外家貧甚無幣, 難於 空簡致謝, 所以久無答也. 先師在世, 而稟此曲折, 豈不見許? 因而泣下." 某重其孝思, 議入續 編, 而徐丈令某更思之.【〈答任潤萬〉下同】澤述謹按: 愼狀是全翁臨終時命削, 而先師至載於〈執燭錄〉者, 猶以不得已之故, 而議入續編, 後又終入原編. 陰震則乃變動先師所手定之神道碑, 改稱墓碣, 謂是有國典, 而竟未見國典. 於此可見賦性乖異, 處事妄錯, 元非常情所出, 亦見其籍託國典, 作壓倒人欛柄之惡心也.柳君相俊與令兄動萬私相議定, 遂將草稿暗地開板, 不令長德一人知之. 此何等事軆? 雖仍前定 刊所公任掌財, 然事至於此, 不得不歸於私印矣. 徐丈聞之, 專書令止之, 不從, 不得已發通聲 討.【書止, 不從, 然後聲討, 亦見仁義幷行.】澤述謹按: 先師於全門諸公聲討柳敬堂私印師稿之擧, 旣以爲不得已, 更謂"書止不從, 然後聲討, 見仁義幷行"者如此矣. 若震之誣陷師節, 比私印師稿, 其罪不啻百倍, 而亦書勸改, 謝不從, 然後聲討. 胡爲乎一邊議論, 非惟不以仁義幷行贊之, 至謂過重已甚乎? 絶可怪也.二公而爲無狀人, 則先師所以簡拔二公於衆人之中, 而立之爲高第弟子者, 豈不爲眼不識人之失 矣乎?擇述謹按: 震黨有引先師此書, 謂斥震爲無狀人, 歸先師於眼不識人, 此不知類也. 震也旣自爲誣師改稿, 禍士林押師孫, 戴誰日之人, 則豈待人斥之而後爲無狀? 假使先師簡拔衆中如彼之言, 帝堯簡拔崇鯀, 周公簡拔管蔡, 而幷不歸於眼不識人, 而況先師早有不計道義之斥, 更有末年終有事爲之慮者乎?前輩以稱人之惡, 不稱人之善, 爲與天地生物之心不相似. 我輩無財可以濟人, 且樂道人之善, 毋揚人之惡, 爲少助天地生物之心. 今我輩再勿與之言性理, 若其心術言行之妄錯, 一毫不可掛 於口頭筆尖, 是爲心弟學性師之道矣. 某於是將以驗而見之有見無見有德無德, 而見! 而見! 其 敬聽而謹守之哉.【某性癡昧, 未有可以當盛心者. 至此一言, 不妨作而見平生之師也. 僭越之 言, 知罪知罪. ○〈與吳震泳〉 下同.】澤述謹按: 此先師與吳震泳書也. 以書末及小註之語觀之, 其慮之也深, 戒之也切矣. 其柰不肯審聽敬循, 終致後來無限變怪何? 又就晉印中刪再呼而見及小註末八字, 亦可見其不喜聞之心矣.某自量精力, 非久於世者. 平生成就, 全然鹵莽, 未有可以稱述者. 惟赤心所重, 在一性字, 而 不敢隨衆貶降, 因以得罪於時儒, 直與須彌高, 而亦終無怨悔也. 相從諸君, 無不聞知, 鄙心全 託而見, 極力主持, 十分敬愼, 得而不墜於地, 則老夫之目, 可以瞑矣. 己未三月上旬, 七十九 歲, 華遯病叟敬言.澤述謹按: 震以此書中有全託而見語, 且備書年月於文稿, 事出特例, 作傳鉢之據. 然此亦戒之之辭, 非許之之辭. 亦在僞署師銜, 使師懷繯之前矣. 其後日月至於三四年之久, 而無復愛重文字如此書者, 更有與李起煥書言"某人以事功爲人所笑"權純命〈治命錄〉"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 則其不可以此書爲據也明矣.【權是渠黨, 猶有此錄, 其爲可信益明. 如使此錄出於此中, 則安知渠又不以爲誣幻師命乎?】同室有弑父者, 豈復可以同室待之?澤述謹按: 澤述亦敢曰: "同門有誣師以認敎而汙衊大義者, 豈復可以同門待之?"余以絶申爲申黨所構誣, 無人不知, 金之兄弟, 非耳塞神昏者, 如何不聞?【〈答崔秉心〉】澤述謹按: 澤述旣聯書絶容承矣, 又辨其告玄阡文矣. 又言於朴震鎬, 勿受其祖文字, 而至遭震鎬之嫌怒, 承黨朴仁圭之構誣矣. 此無人不知, 震黨乃罪余以黨承, 而謂聯絶爲僞, 絶甚可笑也. 此固渠輩雖知之, 若不聞也, 而惟以擠人之一生長技也.金之見余祭師文, 在丙子季冬. 此時文理未達, 而不及知其爲創新苟難, 乃至丁丑自家誄文見却 之後, 文理始達, 而豁然覺其斥三相六賢者耶? 然則余之大罪, 不在於攻華西, 而在於不受金文 之日矣.【〈與某〉】澤述謹按: 澤述以傳表之事與震泳相關, 在壬戌冬. 我若幻師命, 而被渠釐正. 則此時何無一言之何問, 而反有以前後貳論自悚之書, 乃甲子秋, 討渠誣師之後, 始覺其爲幻命而罪之耶? 然則澤述之罪, 不在於幻命, 而在於討震之日矣. 至於丙子夏世基凶文, 則幻命又變爲誣師. 噫, 誣師而被人討者, 反謂討之者爲誣師, 是猶竊盜而被主人推去者, 反謂主人爲盜也.今之士, 請願於彼, 得存校宮, 尙自居以尊聖之功, 可謂無恥之甚者矣.【〈華島漫錄〉】澤述謹按: 存校宮之與刊己稿, 其輕重大小果何如也? 先師以請願於彼而存校宮者, 尙謂無恥之甚, 而況請願於彼, 以刊己稿, 而冒無恥之甚乎? 凶矣凶矣, 誣者之言也.朱子嘗言: "若有高妙底道理, 而聖人隱之, 是聖人大無狀, 不忠不信, 聖人首先犯著."【〈答鄭世 求〉 下同.】澤述謹按: 朱子此言, 甚言聖人之無隱也. 震泳以討文中"若謂事宜秘密, 暗託一人, 則是幷與心術見識而昧昧"之甚言先師無獨命者, 罪之以論迫先師之悖言, "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甚言先師無認敎者, 罪之以上及不敢言之地. 然則其亦將以朱子此言, 爲論迫悖言上及聖人也乎?網打一門, 非小人之甚者, 必不爲也. 今與後之人, 謂而見爲小人, 則子爲君子無疑, 不然, 子 向何處著脚?澤述謹按: 使先師在世, 而目見震泳之告訴五十九人於全檢, 押囚嗣孫於晉署, 則必不以此言責鄭世永矣.隆興初, 和議已決, 韓無咎李德遠, 皆失所守. 而獨王嘉叟諸人, 尙持1)正論, 見先生與魏元履 書.【〈朱子大全標疑〉】澤述謹按: 韓、李皆當時負望之人, 而亦未免失守, 獨有王嘉叟一人. 澤述今日湖嶺之論, 實有所感矣. 嗚呼, 非朱子, 孰知獨守正論之爲貴也哉?國已亡而君已廢矣, 臣子之葬, 何論吉凶? 子孫門生, 只求不爭之地而埋之, 是爲孝且義矣.【與 人訟山而就彼決之, 豈非貽辱父師之罪乎? ○〈寄敬九幷示諸生〉】澤述謹按: 先師旣以訟山而就彼決之爲貽辱父師之罪, 則豈有以刊稿而就彼請願, 不以爲辱, 而有其意有其敎乎? 此所以早有請願刊稿決是自辱之遺書也. 전일효(田鎰孝)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장손이다. 고경일(高景逸) 경일은 명(明)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어떤……없다 《중용장구》 제14장에 "군자는 현재 처한 위치에 알맞게 행동할 뿐이요, 그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현재 부귀하면 부귀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고, 현재 빈천하면 빈천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현재 이적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고, 현재 환난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한다. 따라서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라는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마음이……있다 《논어》 〈술이(述而)〉에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한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라는 공자의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정절사전(鄭節士傳) 정승원(鄭升源, 1868~1934)이 일제의 삭발에 항거하여 목을 매 순절한 것에 대한 전기이다. 정승원의 자는 덕여(德汝)이고, 본관은 영일(迎日)로, 일제가 강제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자 1934년(67세) 10월에 "이 백의(白衣)와 백발(白髮)을 보존하여 지하로 돌아가 부모를 뵐 것이다.〔存此白衣白髮, 歸見父母地下.〕"라는 말과 절명시(絶命詩),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고 한다. 《石農集 卷31 鄭節士傳》 어찌하여……것인가? 정윤영이 윤봉래(尹鳳來)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에서 전우를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에 비유하면서 그와 절교하지 않으면 순욱(荀彧)이나 가충(賈充)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신계(申桂)와 이승욱(李承旭)의 말을 가져와 전우를 욕하고 꾸짖는 일이 있었는데, 윤봉래가 대의와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전우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전우가 어쩔 수 없이 동문들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들과 연명으로 절교를 통고하는 세 편의 편지를 써서 정윤영과 신계, 이승욱에게 보냈다. 《艮齋先生文集後編續 卷2 答李活俊兼示北省諸賢》 명도(明道)는 …… 않았다 명도는 정호(程顥, 1032~1085)의 호이고, 이천은 정호의 동생인 정이(程頤, 1033~1107)의 호이며, 소동파는 소식(蘇軾, 1036~1101)을 가리킨다. 이들은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왕안석(1021~1086))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며 구법(舊法)을 주창한 대표적 학자들로, 정이 형제는 낙당(洛黨)을 주도하고, 소식은 촉당(蜀黨)의 영수가 되어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김(金)과 …… 문인 김평묵(金平默, 1819~1891)에서 류중교(柳重敎, 1832~1893)로 이어지는 문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유중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으로 이항로의 사후에 김평묵을 스승으로 섬겼다. 전발(傳鉢) 불가(佛家)에서 사용하는 전의발(傳衣鉢)의 줄임말로, 스승의 도학을 전수 받음을 비유한다. 낙(洛)도 …… 그르다 낙은 낙양(洛陽) 출신 정이(程頤)를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을 가리키고, 촉은 촉 출신인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蜀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고 구법(舊法)을 주장하면서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원우는 철종(哲宗)의 연호인 원우 연간에 집권한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舊法黨)을 가리키고, 희풍은 신종(神宗)의 연호인 희령(熙寧)ㆍ원풍(元豐) 연간에 득세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인 원우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당쟁이 극심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전장(奠章) 김평묵이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祭文)을 말하는 것으로, 제문 가운데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다는 이유로 전우에게 거부당했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초명은 광로(光老)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과거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에 전념하여 최익현(崔益鉉)ㆍ김평묵(金平默)ㆍ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으며, 천거로 동부승지ㆍ공조참판ㆍ경연관 등을 지냈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철규(尹喆圭)가……때 빈사(賓師)는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송병선이 고종 황제에게 시정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동의를 받아내고 다시 대궐에서 상소하려고 하자, 경무사(警務使) 윤철규가 그를 속여 일본 헌병대로 넘겨 고향으로 이송시킨 일이 있었다. 고향으로 이송당한 후 송병선은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늘날 …… 한다 명나라 여곤(呂坤, 1536~1618)이 지은 《신음어(呻吟語)》 3권 〈응무(應務)〉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문과 …… 변별 《논어》 〈안연(顔淵)〉에 "현달[達]이란 정직함을 바탕으로 삼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잘 헤아려 몸을 낮추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한다. 소문[聞]이란 얼굴빛은 인(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일은 …… 구함 《맹자집주(孟子集註)》 〈양혜왕 장구 하(梁惠王章句下)〉 제15장 장하주(章下註)에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여 지혜와 도모의 말단에서 기필을 취하고 천리의 올바름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凡事求可功求成, 取必於智謀之末, 而不循天理之正者, 非聖賢之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음양(陰陽)이 …… 말 《농암집(農巖集)》 11권 〈상중구(上仲舅)〉에 보인다. 회니(懷尼)의 논쟁 회덕(懷德)에 거주했던 송시열(宋時烈)과 이성(尼城)에 거주했던 윤증(尹拯) 사이에서 일어난 사제 간의 대립을 말한다. 송시열이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윤선거의 처신을 언급하자 윤증이 그것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송시열이 거절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여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호락(湖洛)의 논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한 논쟁을 말한다.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주장한 한원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호서(湖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론(湖論)이라 하였고,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한 이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洛下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 하였다. 오백풍(吳伯豊) 오필대(吳必大, ?~1198)로, 백풍은 그의 자이다. 주희(朱熹) 문하의 고제(高弟)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저서로 《사해집(師海集)》이 있다.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집권할 때에 오백풍이 벼슬에 임명되자 주희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으며, 뒤에 주자의 학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자 오백풍은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우옹이 …… 삭제했다 이성보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아들인 이신보(李信甫)이다. 송나라 간신 용대연(龍大淵)ㆍ증적(曾覿)이 집권할 때에 간관(諫官)의 직에 임명되자, 주희(朱熹)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다. 창랑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들이자 윤선거(尹宣擧)의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의 호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성문준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처신이 분명하지 못함을 책망하자 성문준이 사과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 일을 주희에게 의심받던 이성보와 오백풍의 일에 비교하여 창랑의 묘갈(墓碣)에서 "이성보ㆍ오백풍도 일찍이 주문(朱門)에 의심받았으나 끝내 명인이 되었으니, 일시의 득실로 천하의 선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윤선거(尹宣擧)가 이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한 일을 말한다. 《宋子大全 卷36 答尹汝望吉甫, 卷174 成滄浪公墓碣銘》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 《간재선생문집 전편속(艮齋先生文集前編續)》 6권 〈독수재윤공행장(篤守齋尹公行狀)〉에 "감역(監役) 김평묵(金平默)이 선사(先師)에게 바친 뇌문(誄文)은 사문(師門)의 남은 도통과 출처어묵(出處語默)이 크고 작게 어긋났다는 것을 서두로 삼고, 종국에는 문인(門人)의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斯文)을 이었다는 것을 결어로 삼았으니, 선사를 유문(儒門) 밖으로 몰아낸 것이 분명하다. 나와 공이 서공(徐公) 및 여러 동문들과 함께 회의하여 그의 뇌문을 물리쳤다.〔金監役平默, 致誄先師, 以師門緖餘, 出處語默, 大小參差, 做頭, 終以門人小大爛漫, 允紹斯文, 爲結語, 其驅先師於儒門之外, 明矣. 愚與公與徐公及諸同門, 會議而逐之.〕"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평묵(金平默)의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 "사문의 남은 도통과 시사(時事)의 어묵이 …… 어찌 어긋남이 없겠는가. ……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을 이었네.〔師門緖餘, 時事語默, …… 豈無參差? …… 小大爛漫, 允紹斯文.〕라는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 송조(宋朝)의 …… 현인 사마광(司馬光)ㆍ윤화정(尹和靖)ㆍ호안국(胡安國)ㆍ정이(程頤)을 말한다. 김평묵은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를 이 네 현인에 견주어 "윤화정처럼 사설(師說)을 굳게 지키고, 부옹(涪翁 정이)을 법삼았네. 맑은 행실과 굳은 절개는 속수옹(涑水翁 사마광)과 같고, 한 겨울 송백(松柏) 같은 기상은 강후(康侯 호안국)의 기풍이 있었네.〔和靖緊守, 涪翁之則. 淸修苦節, 如涑水翁. 大冬松柏, 有康侯風.〕"라고 하였다.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삼강은 유교 사회의 기본 덕목이 되는 세 가지 강령으로, 군신 간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자간의 도리인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부간의 도리인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구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나도 …… 없다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른 소리로 깨우쳐 주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로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귀중하다. 완곡하게 이끌어 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궁구하는 것이 귀중하다. 좋아하기만 하고 궁구하지 않거나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런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하였다. 검국(檢局) 일제 강점기 때 검사가 일을 보던 검사국(檢事局)을 가리킨다. 인보(仁父)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자이다. 호는 용암(勇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石農集 권31 勇庵金公行狀》 가릉(嘉陵)의 …… 사람들 가릉은 지금의 경기도 가평으로, 이곳에 거주한 김평묵(金平默)과 그의 문인 유중교(柳重敎)를 말하는 듯하다. 훗날 …… 투척하여 1919년에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뒤에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연명으로 장문의 글을 지어 보낼 때,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에게게 여기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지만 간재가 참여하지 않자 오진영이 간재의 이름을 거짓으로 서명하여 보낸 일을 말한다. 주자의 …… 만났고 임률(林栗)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시강에서 당시 병부 낭관(兵部郎官)으로 있던 주자와 《주역(周易)》과 〈서명(西銘)〉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자 상소하여 주자의 도학(道學)을 공격한 일을 말한다. 육구연(陸九淵) …… 당했는데 육구연의 제자였던 조건(曹建)이 주자의 문인이 되어 육구연의 학문을 버리고 주자의 학문에 전념하다 죽자, 주희가 그의 묘표(墓表)에 육구연과 관계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인해 육구연의 문인들이 크게 노한 일을 말한다. 《宋元學案 卷18 滄洲諸儒學案》 마른 …… 형상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나 허물은 없다.〔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오랑캐로 …… 사람 유학자(儒學者)인 진량(陳良)을 스승으로 섬겼던 진상이 등(藤)나라에서 만이(蠻夷) 출신 농가자류(農家者流) 허행(許行)을 만나고서 스승의 도를 배반하고 허행의 제자가 되자, 맹자가 "나는 중화의 법을 써서 오랑캐의 도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랑캐에게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라고 진상을 비난한 고사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부모와 …… 것 송(宋)나라 간신 채확(蔡確)이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 때 〈하일유거개정(夏日遊車蓋亭)〉시 10수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오처후(吳處厚)가 이 시는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방(誣謗)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공척(攻斥)하여 문언박(文彦博)이 채확을 영교(嶺嶠)로 내쫓으려 하자, 범순인(范純仁)이 문자를 들추어내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니라고 말리면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속담을 소홀히 하고, 받는 대로 돌려주기를 좋아한다는 경계를 위배하면 스스로 재앙과 실패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라고 논한 것에 대해 주자가 "만약 후세에 군친(君親)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서 쫓아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이 말 때문일 것이다.〔使後世見無禮於君親者, 拱手坐視而不敢逐, 則必此言之爲也.〕"라고 비판한 내용을 가리킨다. 《朱子大全 卷37 答鄭景望》 구황(九荒) 천하를 상징하는 구주(九州)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세상 끝을 비유하는 말이다. 묘적(墓籍)의 등록 일제 강점기 때 묘지대장인 묘적계등본(墓籍屆謄本)에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분묘의 위치, 사망자의 씨명(氏名), 사망년월일, 제주(祭主)의 주소와 씨명, 참고사항 등 묘지에 관한 제반 사항이 기록되어 있고, 묘지 약도가 그려져 있다. 일제 통감부는 1912년에 식민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 조사령(土地調査令)을 반포하면서 선조의 무덤에 대해서도 묘적을 등록하도록 강요했다. 통분을 …… 한다 주희(朱熹)의 〈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에 나오는 말이다. 남송(南宋)이 금(金)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여 화친을 구걸하고 복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한 말이다. 《朱子大全 卷24 與陳侍郞書》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 1842~1907)의 호이다. 자는 덕경(德卿)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전우(田愚)의 문인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숙(禪宿) 학식이 높은 노숙한 선승(禪僧)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편지의 수신자인 노인오(盧仁吾)를 가리킨다. 학문을 …… 못했다. 《논어》 〈옹야(雍也)〉 애공문(哀公問)장에 나오는 말이다. 애공(哀公)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하는지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하였다. 아 ……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안연사(顔淵死)장에 나오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말하기를,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噫, 天喪予, 天喪予.〕" 하였다. 진본(晉本) 1926년 10월에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의 문집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노론(魯論) 《노논어(魯論語)》를 말한다. 이것 외에 《제논어(齊論語)》, 《고문논어(古文論語)》 등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신장(愼狀) 신의묵(愼宜默, 1768 ~ 1821)의 행장(行狀)인 〈석성현감신공행장(石城縣監愼公行狀)〉을 말하는 것으로, 《고산집(鼓山集)》에 실려 있다. 서(徐) 어른 서정순(徐政淳)을 말한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신의묵의 외손자이고,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장인이며, 둘째 아들 임감재(任坎宰)의 스승이이다. 전우(田愚)와 함께 《고산집(鼓山集)》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문집총간 고산집 해제》 집촉록(執燭錄) 《성전집촉록(星田執燭錄)》을 말한다. 1876년 임헌회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전우(田愚)에게 당부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신도비(神道碑) 〈소윤최공신도비(少尹崔公神道碑)〉를 말한다. 동만(動萬)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호이다. 누구의 …… 해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誰家日月照臨〕'의 줄임말로, 세상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후창집》 권14 〈독송자대전유감이표출지근부안설(讀宋子大全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에 "오진영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말하기를, '주머니 속의 화폐가 왕래하고, 차표와 편지에 도장이 찍히며,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떠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震大書特書曰: '囊中紙貨往來, 車票書詞附印, 誰家日月照臨.' 此豈非戴日本者乎?〕"라는 구절이 보인다. 제요(帝堯)는……뽑았고 숭곤(崇鯀)은 숭백(崇伯)에 봉해진 곤으로, 요 임금의 신하이며, 우왕(禹王)의 아버지이다. 요 임금 때에 홍수(洪水)가 나자 그에게 다스리게 하였는데, 9년이 되어도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書經 堯典》 주공(周公)은……뽑았지만 관(管)ㆍ채(蔡)는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이자 성왕(成王)의 숙부인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말한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한 뒤에 주공이 섭정할 때에 그들을 관(管)과 채(蔡)에 봉하여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감독케 하였는데, 관숙선과 채숙도는 '주공이 어린 왕에게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다.〔公將不利於孺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書經 周書ㆍ金縢》 《史記 卷35 管蔡世家》 진인(晉印) 1926년에 문인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간재의 문집을 활자(活字)로 간행한 진주본(晉州本)을 말한다. 고현천문(告玄阡文) 김용승(金容承)이 간재 묘소에 올린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말한다. 융흥(隆興) …… 화의(和議) 융흥은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연호(1163~1164)이며, 화의는 금(金)나라의 요청에 응해 맺은 강화(講和)를 말한다. 이덕원(李德遠) 송(宋)나라 문신 이호(李浩, 1116~1176)로, 덕원은 그의 자이다. 건창(建昌) 사람으로, 소흥(紹興 고종(高宗) 연호) 12년(114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태상승(太常丞), 사농 소경(司農少卿), 이부 시랑(吏部侍郎), 태상시 주부(太常寺主簿) 등을 지냈다. 《宋史 卷388 李浩列傳》 오히려 …… 견지하였으니 저본에는 '尙指持正論'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指'를 '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위원리(魏元履) 송(宋)나라 문신 위섬지(魏掞之, 1116~1173)로, 원리는 그의 처음 자이다.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간재(艮齋)이다. 건양(建陽) 사람으로, 호헌(胡憲)에게 사사하였으며, 주희(朱熹)와 교유하였다. 《宋史 卷459 魏掞之列傳》 持 저본에는 '指'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持'로 교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