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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용승192)의 〈망고현천문〉 대한 변론 【1931】 金容承望告玄阡文辨 【辛未】 문하(門下) 한광(韓狂) 김용승은 금마(金馬 전북 익산)로 길을 나서 땅을 자리삼아 위패를 모시고, 술을 따르고 두 번 절하며 고합니다.'문하(門下)'는 김용승이 일찍이 선사에게 칭한 것인데 지금 갑자기 취하여 자칭하고 또 '한광(韓狂)'이라는 별호를 썼으니 이러고도 문인으로 자처했다고 이를 수 있는가? 묘소 아래를 지나다니면서도 10년 동안 한 번도 묘소에 절을 올리지 않았는데 제문을 아뢰는 데 이르러서도 여전히 20리 밖 남의 집 안마당에 땅을 자리 삼아 멀리서 술잔을 드리며 '스승에 대한 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벗에 대한 도리도 오히려 이렇지 않거늘, 아! 그 마음이 어떤지 알 만하다.고제에게 의발을 전하였습니다.선사는 오진영에게 애당초 의발(衣鉢)을 전하지 않았고 더욱이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배척이 있었으며, 【〈화(華)ㆍ경(敬) 두 아이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 끝내 일을 벌이기를 좋아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권순명의 〈화도치명록(華島治命錄)〉에 보인다.】 김용승이 이걸 모르지 않는데도 의발을 전했다고 특별히 쓴 것은 분명 조롱한 말이다.애당초 유서(遺書)가 나오기 전부터 문하(門下)는 '독대하여 명한 것[獨命]'193)이 선생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고, 무함(誣陷)을 변론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여 필설(筆舌)이 쉴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움을 청한 지 겨우 6일밖에 되지 않았고, 일찍이 수업을 받아 제자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수업을 받아 제자가 된 적이 없었다.[未嘗受業爲弟子]'는 7글자는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의 말194)이다. 삼주는 우암 송시열과 4대에 걸친 사우(師友)의 교분이 있었다. '선생(先生)'이라 칭하고, '소자(小子)'라고 칭한 것이 저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이렇게 칭한 것이다.】스승과 문인의 의리는 진실로 한 번 본분(本分)이 정해지면 집지(執贄)한 지가 오래되었는지 아닌지는 마땅히 논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김용승은 선사를 10년 동안 모시고 배웠으니 오래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여러 차례 서신을 올렸으니 많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전에 김용승이 선생에게 올린 편지에 이르기를 "소자는 문하에서 망극한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생성(生成 낳고 이루어줌)해 주신 은혜 각골난망이나 갚을 길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배움을 청한 지 겨우 6일밖에 되지 않았고,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며 은혜를 받지 않았으므로 제자가 아니라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런데도 사람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삼주(三洲 김창협)가 이른바 "일찍이 수업을 받아 문인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우암에게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또 제자가 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바로 은혜를 받은 것이 적지 않아 제자로 자처한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귀 위에 '수(雖)'자를 쓰고 나서, 이 글귀 아래에 바로 "문하에 출입한 지 수십 년이 지나 정의가 돈독합니다."라고 하였고, 그 아래 문장에 또 맹자가 말한 유공지사(庾公之斯)195)의 일을 인용하여 밝히고 있으니 그 뜻이 이미 명백하다.다시 이 말을 가지고 〈중구(仲舅)에게 올린 편지〉196) 속의 "저는 우옹(尤翁 송시열)에 대하여 실로 4대에 걸친 사우(師友)의 교분이 있으니 비단 잠시 학업을 배우고 가르침을 청하는 관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라는 말과 표리(表裏)로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이동보(李同甫)197)에게 답한 편지를 보면 "우리는 우암을 대종사로 여깁니다."라고 하였고, 그의 우옹에 대한 제문을 보면 처음에도 '소자'라 하였고, 두 번째도 '소자'라 하였다. 이것은 제자로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주는 배움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로서의 예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르지 않았다. 김용승은 오랫동안 섬겼는데도 【여기에서 구두를 끊어야 한다.】 생전에는 '소자'라고 하고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일찍이 수업을 받아 제자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삼주로서 김용승을 견주어보면 그 죄는 더욱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에 감히 이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더욱 놀랄 만하다.이미 얼굴을 마주하고 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근거가 될 만한 사실이 없고 또 한 사람도 응한 사람이 없습니다.유서가 나오기 전부터 선생께서는 일찍이 '관을 나무에 매달고 시신을 바다에 빠뜨려라.[懸棺沈尸]'198)는 맹세가 있었다. 문인 중 몸소 받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김용승만 유독 귀가 없는 것인가? 자기 원고를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보다 더 아끼고 중히 여겨서 독대하여 인교(認敎)199)하라는 명이 있었을 리가 결코 없으니, 곧 이것이 얼굴을 마주하여 명한 근거가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 없다고 말한다. 김용승의 성토가 나오기 전부터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문인들은 혹 글로써 비난하고, 혹 논변하여 물리친 사람이 많다 뿐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한 사람도 응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안으로 그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 남의 이목을 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귀혜가(歸兮歌)〉200)를 한 곡조 부르고 영원히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끝내 시호(市虎)201)의 의심을 스스로 풀 수 없었습니다.이미 "독대하여 명한 것[獨命]이 선생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라고 말한 이상, 어찌하여 오진영이 무함하는 말을 믿어 선사를 더럽게 보고 스스로 그 자신을 깨끗이 한다고 하는가? 아버지처럼 섬기는 분에 대해 비방과 칭찬에 따라 관점을 고치고, 생사에 따라 절개를 바꾸어 명교(名敎 유교)에 죄를 얻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나는 그 이른바 '스스로 깨끗이 한다'는 것이 마침 족히 자신을 더럽힐까 저어된다.사우의 설은 《노론(魯論 논어)》을 상고해 보면, '선생(先生)'은 본래 부형(父兄)을 일컫는 말이고 '사우(師友)'는 곧 부형을 말합니다. 천하에 우리 임금 이하 어찌 내 아버지 내 형제보다 높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요ㆍ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라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심복(心服)한 것도 이것에 불과합니다.공자의 《논어(論語)》를 언급하기에 앞서, 관중(管仲)의 〈제자직(弟子職)〉202)에 이르기를 "선생이 가르침을 베풀면 제자는 이를 본받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원래 사문(師門)을 지칭한 것으로 그 존귀함이 부형(父兄)과 같다. 그러므로 공자가 대개 이것을 빌려 '부형'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공자 이후 백 년도 채 안 돼, 이미 맹자는 송경(宋牼)203)을 선생이라고 칭한 일이 있었다. 이후 송대(宋代)에 이르러 주자는 진동보(陳同甫)204)를 선생이라고 칭한 일이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거의 으레 편지 안에 쓰는 존칭이 되었다.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세 가지 근본이 있다. 아버지가 아니면 태어날 수 없고 임금이 아니면 양생(養生)할 수 없으며 스승이 아니면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나란히 열거하여 '삼존(三尊)'으로 삼았다. 후세의 선비 중에 도를 배워 제자로서 본분이 정해진 자는 생전에는 반드시 '사문(師門)'이라 칭하고, 사후에는 '선사(先師)'라고 칭하였다. 그런 뒤에야 부모ㆍ임금ㆍ스승을 똑같이 섬기는 의리205)를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다만 '선생'이라고만 칭하면 분수(分數)에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존귀함이 전일(專一)하지 못한 점이 있다.만약 김용승이 스승이 순수한 스승이라는 데 흠잡을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선사(先師)' 두 글자를 아끼고 우회하여 선생이라는 호칭을 빌린 '부형(父兄)'이라는 말과 부형이라는 호칭을 빌린 '사우'라는 말을 마지못해 꺼내어 자기 죄를 면하길 구하려 하는가? 그리고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심복(心服)한 것도 이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데 이르면, 이것은 또한 칠십 제자를 무함하여 사우로 부형을 대한 것이고 사우간으로 공자를 대한 것이다.○김용승이 갑자년(1924) 여름 유서(遺書)를 보기 전에 지은 〈백천재기언(百千齋記言)〉에 "도의(道義)가 없다면 선생을 바꿀 수 있다."라고 하였고,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한 것은 마음을 속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이라는 호칭은 춘추의리(春秋義理)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오직 고산(鼓山 임헌회)이 강재(剛齋 송치규)206)에게 있어서와 매산(梅山 홍직필)이 성담(性潭 송환기)207)에게 있어서 서로 비유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우간으로 대우하는 설을 세운 연유이다. 지금 유서를 보고 나서는 춘추의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우'라는 말은 고치지 않고, 극구 순수한 스승이 되는 데 해(害)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예전에 '도의가 없고, 춘추의리가 없는 사우'라고 한결같이 말한 것은 어찌하겠는가? 그런데도 애써 부르짖으며 "춘추의리에 어찌 흠을 잡을 데가 있겠는가?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한 것은 이것에 불과하다."라고 하니,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런 것이란 말인가?그래서 자양(紫陽 주자)은 연평(延平 주자의 스승)에게 사우라 하였고 북산(北山)208)은 면재(勉齋)209)에게 사우라 하였으며, 노재(魯齋)210)는 북산에게 사우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은 신노(愼老 김집(金集))에게 사우라 하였고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는 우옹(尤翁 송시열)에게 또한 사우라고 하였습니다. 문하가 사우(간재)에게 유독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주자가 이성보(李誠父)211)에게 보낸 편지에 연평(延平)을 '노선생(老先生)'이라 칭하고 스스로를 '문인'이라 칭하였다. 가령 '사우(師友) 이연평(李延平)'이라는 말은 후인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주자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만 '동지(同志)'라는 말로 '상우(尙友)'212)와 같은 의미로 말하였을 뿐이지, 사우간(師友間)이라는 호칭을 순사(純師 순수한 스승)에게 붙여 칭호로 삼아도 된다는 것을 이른 것은 아니다. '북산(北山)'과 '노재(魯齋)'가 말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다. 화양(華陽)이 말한 것은 아래에 보이고, 삼주(三洲)가 말한 것은 위에 보인다.지난 정사년(1917) 봄을 떠올려보니, '이ㆍ신(理神), 도ㆍ심(道心)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해 선생께서 문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퇴계가 될 것이니, 자네는 율곡이 되며, 나는 연평(延平)이 될 것이니, 자네는 주자(朱子)가 되오."라고 하였습니다.만약 이렇게 말하였다면, 이것은 선사께서 김용승의 논의를 정론으로 여기고 파란색이 쪽보다 나은 것을 허여한 것이다.213)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고(大稿 간재집) 안에 김용승의 논설에 대해 변정(辨正)한 것이 한 둘에 그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 때문에 선사께서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김용승이 선사께 올린 편지214)에 말하기를 "이(理)와 성(性)이 비록 분변이 없을지라도 '성을 기른다[養性]'고 하면 맞지만 '이를 기른다[養理]'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心)과 신(神)은 분변이 없으므로 '마음을 기른다[養心]'고 해도 맞고, '정신을 기른다[養神]고 해도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답하기를 "선현의 '천리를 보존하고 기른다[存養天理]'는 말이 있으니, '리를 기른다[養理]'고 해도 관계없소. 대개 '순하여 해치지 않는 것을 양(養)'215)이라고 하기 때문이오. 심(心)과 신(神)은 비록 같은 부위(部位)이지만, 그러나 신(神)은 심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곳이기 때문에 악(惡)이 없소. 심에 이르면 혹 저절로 악을 행하기도 하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김용승이 편지에 또 말하기를 "이(理)와 성(性)이 분변(分辨)이 있다는 것은 호론(湖論)의 설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대답하시길 "주자는 '이(理)가 같다고 하면 옳지만, 성(性)이 같다고 하면 옳지 않다.'라고 하였소. 율곡 또한 '만물의 이(理)는 곧 우리 사람의 이(理)이지만 사람의 성(性)이 물(物)의 성은 아니다.'라고 하였소. 이것은 이(理)와 성이 분변이 있는 듯한데, 호론의 설과 가리키는 것의 동이(同異)가 어떻소?"라고 하였다.김용승이 편지에서 또 이르기를 "오진영은 단지 '성통심국(性通心局 성은 통하고 심은 국한된다)'만을 말하였고, '리통신국(理通神局 리는 통하고 신은 국한된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과 심이 분변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답하기를 "심(心)이란 사람의 신명(神明)이니, 심 또한 통한다고 말할 수 있소. 단지 신(神)은 지극히 정묘하고, 심(心)은 정조(精粗)를 겸하였으니, 여기에는 분변이 없을 수 없소. '신국(神局)' 두 글자는 그대 스스로 만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근거가 있는 것이오? 주자가 《통서(通書)》216) 〈동정장(動靜章)〉을 논변하여 말하기를 '신(神)은 곧 이 이치이다.'라고 하였고, 또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면서 고요하지 않으니, 움직이지 않은 것도 아니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217)고 하였소. 이것은 형이상의 이치를 말한 것이오. 여기에 의거하면 신(神)은 아마도 곧바로 가리켜 국한된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오. 몇 해 전 내가 '상제는 하늘의 신인데, 그대는 상제도 국한된다고 여깁니까?'라고 물었소. 그대가 다짜고짜 말하기를 '이는 감히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소. 그렇다면 신(神)에 통(通)ㆍ국(局) 두 신이 있단 말이오? 【《맹자》에서 "성스러워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라고 한다.[聖而不可知之謂神]"라고 하였으니 국한된다고 할 수 없고, 《중용》의 '귀신(鬼神)'은 조금 더 거친 개념이지만 또한 국한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 여기까지 이르러 한바탕 웃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꾸짖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김용승이 편지에 또 말하기를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218)가 이르기를 '이기(理氣)는 원래 이물(二物 두 가지 종류)이 아니다. 이물(二物) 속에 저절로 이 기(氣)를 주재하고 다스리는 것이 있다. 곧 그 형체가 없으면서 행위가 있고 기(氣)이지만 기가 아닌 오묘함이다.219)'220)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원두(原頭)를 미루어 지극히 하면, 이기(理氣)는 결국 일물(一物)이다. 주자가 환히 본 것인데 정암(整菴)221)은 혼벽(混闢 기미의 시작과 생성의 드러남)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주자가 이기를 이물(二物)로 여겼다고 인식하였다.'222)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답하여 말하기를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다.'라는 말은 신(神)과 리(理)가 한데 섞여 틈이 없는 곳으로부터 말한 것이지, '이(理) 또한 음양불측(陰陽不測)의 신(神)'이라거나, '신(神) 또한 충막무짐(冲漠無朕 지극히 고요하여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태)한 이(理)'라거나, '이(理) 또한 지각(知覺)이 있는 인심(人心)'이라거나, '심(心) 또한 작위(作爲)가 없는 도체(道軆)'라고 이른 것이 아니라오. 나정암(羅整庵)과 임헌회(任憲晦)가 '이기일물(理氣一物)' 설에 대해 《노주집(老洲集)》 안에서 분변하고 논박한 것이 한 둘이 아니오. 그 외에 '도(道)는 형이상(形而上)이고, 신(神)은 형이하(形而下)이다.'거나, 또 '이(理)와 기가 합하였으되 분별이 있어 이(理)는 주가 되고 기는 짝이 된다.'223)라거나, 또 '신(神)은 거의 이(理)와 하나이다. 다만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있어서 그 이(理)가 순일하고 무망(無妄)한 것과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理)는 신(神)을 바탕으로 하고 신은 이(理)를 짝으로 한다.'224)라거나, 또 '녹문(鹿門 임성주)은 기(氣)가 중하다고 보되,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여기고 진망(眞妄 진실과 거짓)의 분별이 없다.'225)라거나, 또 '정암(整菴)은 말에 따라 이해하여 이기일물(理氣一物)의 증거가 된다고 강경하게 말하였지만, 말의 조리가 험난하고 횡설수설한 느낌을 면하기 어렵다.226)'라는 말 등 여러 가지 이와 같은 종류가 아주 많소. 그리고 일찍이 정제경(鄭濟卿 오희상의 제자)이 매번 노주에게 자못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실로 자신의 견해가 그다지 밝지 못하면서 또 전현(前賢)이 평생토록 의론한 것의 주편(周偏 폭)과 정밀함을 살피지 않고, 일단(一端)에 치우쳐 고집하여 비난하고 의심하는 빌미로 삼는 것이 안타깝소. 명화(明華 김용승의 자)가 또다시 그런 습속을 따를 줄 미처 생각지 못했소. 나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옆에서 냉소할까 저어되니 부디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이 말을 들으시오. 이 늙은이가 결코 제군(諸君)을 오도(誤導)하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김용승이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주자는 일찍이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으나 이른바 '태극과 음양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한 것을 끌어와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요점은 아마 다만 '이(二)'라는 글자에 있을 듯합니다.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씨(蘇氏 소동파)가 '성인은 음양을 빌려 도(道)에 비유하였다.'라고 하자, 주자가 비난하며 말하기를 '도와 음양은 각각 일물(一物)이다.'227)고 하였소. 또 '도(道)는 곧 기(器)이고, 기는 곧 도이다.'228)라고 하였소. 또 '도와 기는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도와 기의 이름이 비록 다르지만 실지 일물(一物)이다.'229)라고 하였소. 주자가 '도와 기가 일물(一物)이다.'라고 말한 것이 이렇게 많소. 그러니 지금 운운한 것이 어찌 고찰이 상세하지 않고 말이 지나치게 거칠다 하지 않겠소? 주자는 훗날 또 일찍이 '이(理)와 기는 결단코 이물(二物)이다.'230)라고 하였고, 또 '다만 음양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여긴다면 도와 기의 구분에 모호한 것이다.'231)라고 하였소.내가 슬며시 생각해보건대,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은 이기(理氣)에 대하여 혹은 일물(一物)이라고 하고, 혹은 이물(二物)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나름대로 취지가 있소. 통달한 사람은 모두 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두 막힐 것이오. 그런데 명화(明華)처럼 고명한 사람이 곧 일(一)과 이(二) 사이에서 '이(二)' 자만을 주장하여 요점으로 삼고, 유독 '일(一)' 자를 그다지 긴요하게 여기지 않고 헐후어(歇後語)232)로 만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소. 청컨대, 다시 율곡 옹이 임신년(1572)에 우계(牛溪)233)에게 답한 편지에서 일이(一二)의 의미를 논설한 것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음미해보면,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노주(老洲) 문하에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율곡 옹이 말하기를 "이미 이물(二物)도 아니고, 또 일물(一物)도 아니다. 일물이 아니기에 하나이면서 둘이고, 이물이 아니기에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씀이 평온하고 둘이 서로 균형이 잡혀 있으니 우리 문하의 이기(理氣)의 정안(正案)이 될 수 있다. 어찌 일찍이 보내준 편지에서 말한 한쪽에 편중하여 다른 한쪽을 경시한 것과 같겠는가? ○이상은 모두 선사의 《후고(後稿)》 기미(己未)234)에 보인다.】'사우간(師友間)'이라는 말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말하고 우암이 이를 따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상(喪)에 복(服)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저 또한 선생에 대한 복례를 3개월까지 했는데, 이것이 트집 잡을 만한 죄가 되는 것입니까? 우암과 동춘당 두 분께서는 일찍이 이것으로 신독재 문하에서 죄를 얻지 않았습니다.우암과 동춘당은 이미 사계(沙溪 김장생)를 순수한 스승으로 모셨고, 신독재에게는 사우간(師友間)으로 처우(處遇)하였으니 참으로 마땅하다. 어찌 김용승 또한 일찍이 전재(全齋 임헌회)를 순수한 스승로 모시고 나서 다시 선사에게 배웠겠는가? 우암과 동춘당의 일과는 사체(事體)가 현격히 다르니 이것을 가지고 근거로 삼기에는 충분치 않다. 또 동춘당이 이른바 '우리가 이 노사(老師)에게 사우간으로 처우하였다.'라고 한 것은 평소의 처우한 바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가마(加麻 상복을 입다)를 3개월 동안 하였음에도 단지 우도(友道)로 처우한 것이 편치 않아 다시 몇 달 더 심상(心喪)을 하였다. 이것은 사도(師道)로 처우한 것이다. 비록 '사우'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사(師)'자에 비중을 둔 것이다.지금 김용승은 생전의 '순사(純師 순수한 스승)'라는 호칭을 버리고, 세상을 떠난 뒤 갑자기 '사우'라고 불렀다. 비록 '사우'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우(友)' 자에 중점을 둔 것이다. '사우'라는 이름은 같지만, 그 실지는 다르다. 이것을 가지고 남을 막는 칼자루로 삼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남은 혹 속일 수 있을지라도 혼자 속으로 부끄럽지 않겠는가?또 만약에 일찍부터 평소 '사우'라고 불렀다면, 똑같이 섬기는 분235)에 매우 외람되고 망령되지만 오히려 스승은 붕우의 윤리에 속하는 것236)에 근거하여 그 의도가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 그렇지 않고 선사께서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오진영의 인무(認誣)237)에 현혹되어 스스로 자신을 깨끗이 한답시고 호칭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무함한 사람은 오진영이지만, 그 무함을 실천한 사람은 김용승이니 이에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평소 서간문에서 스스로 이르기를 "사생영욕(死生榮辱)은 의리상 혼자만 다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위태로울 때는 모두 눈을 뒤집으면서 서로 모르는 듯이 하다가 샛길로 음(陰 오진영)에게 가서 몰래 스스로 모략을 꾸며 김(金 김용승 자신)과 한패라는 지목을 두려워하였습니다.'사생영욕(死生榮辱)은 의리상 혼자만 다를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대상일(大祥日)에 내가 오진영을 만나려고 했다가 만나지 못하였으니 '샛길로 음(陰 오진영)에게 갔다'는 나를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저쪽 생각으로는 마땅히 가야할 바른 길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일러 '간로(間路 샛길)'라고 하였지만 마치 진짜 샛길로 간 사람과 같은 듯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음해하는 독필(毒筆)이다.대개 내가 오진영을 만나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왕복하는 중으로 성토하기 이전이었고, 의론이 정재(靜齋 간재의 둘째 아들 전화구(田華九))와 여러 사우에게 이르렀는데 이를 두고 '샛길로 음(陰 오진영)에게 갔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김(金 김용승)과 한패가 되는 것을 피하고 아울러 오(吳 오진영)의 개복(改服)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위로는 하늘이 굽어보고 있고 옆에는 천 사람의 눈이 있으며 뒤에는 공론이 있으니 삼가 공경히 두 손을 맞잡고 기다리겠다. 【김용승은 글을 공포하여 오진영을 토죄하고 나서 친히 음성으로 가 오진영을 만났다. 나는 선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겼으므로 일찍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정재(靜齋) 전화구(田華九)의 「우기(偶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샛길로 오진영에게 갔다'는 말은 김용승은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전한 사람이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흉악한 무리에게 행패를 당해 분노와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사실과 상반된 말을 하는 것인가? 갑자년(1924) 7월 3일에 모인 사람 수천 명이 모두 성심으로 바란 것은 오진영이 잘못을 뉘우치고 연석에 알려 선친이 처음부터 인교(認敎 문집의 출판 인가를 받도록 지시한 것)하지 않았음을 밝히기를 바랐고, 또 한 문하의 원수 간 된 사이를 풀고 손잡고 함께 돌아갈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깨우치고 달랜 사람이 백 사람 천 사람뿐 아니었다. 그러나 간인 오진영은 이것이 도리어 그를 토죄하는 빌미가 될까 두려워서 단호히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의 무리 중 최원(崔愿)238)이라는 자가 곁에서 몰래 오진영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 함께 구석진 데에서 귀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한참 있다가 자리로 돌아와서는 큰소리로 이르기를 "최병심(崔秉心)이 고문(告文)에 함께 서명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병심은 먼저 고문이 있었으므로 고집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이 기회를 놓쳐 당장 결렬되면 영원히 무함(誣陷)을 씻고 화합하는 날이 없을 것이기에 나와 여러 사우가 최병심에게 응하길 권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물고 제사를 지내려는데 오진영이 처소로 가버렸다. 나는 노심초사 간담이 타는 듯하였다. 어쩔 수 없이 사우와 함께 논의하여 김택술에게 내일 아침 오진영의 처소로 가서 다시 좋은 말로 깨우쳐 결렬되지 않도록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김택술이 오진영의 처소에 다다르기 전에 오진영이 이미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었다. 천하의 일이란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단지 다른 사람의 비방과 칭찬만 듣고 어찌 그 사실 여부를 살피지 않고 갑자기 믿을 수 있단 말인가?사우의 복례(服禮)는 이미 죄가 되지 않았는데 사우의 설이 갑자기 큰 죄가 되었습니다.스승의 복례가 3개월에 이른 것은 선현의 의론이었거니와, 김용승이 3개월간 상복을 입었을 때는 애초 '사우간'이라는 말은 없었다. 단지 그가 스승의 복례를 행한 줄로만 알았지, 어떻게 '사우간'의 복례를 행한 한 것 때문에 죄로 삼을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지금도 김용승의 말에 따라 말한 것일 뿐이지 사실은 그 당시 김용승은 부친의 참최(斬衰) 기간이었고 마음으로 슬퍼한[心喪] 개월 수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상복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많은 사람이 모여 절교를 고할 적에 저에게 글을 청하였습니다.[請文] 그러나 제가 거절하였습니다. 글이 몇 줄 완성되자 저에게 삭제를 청하였습니다..[請削] 저는 또 거절하였습니다. 절교하면 절교할 것이지 오직 절교하는 사람이 마음을 상할까 걱정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은 "절교라고 썼으나 마음은 절교하지 않는다.[書絶心不絶]"는 것입니다.절교할 사람에게 청문(請文)과 청삭(請削)을 하는 것이 과연 조금이라도 이치에 닿는가? 그날 글을 써서 김용승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만약에 억지로 강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그것은 해당하는 죄를 밝힌 것이지 억압한 것이 아니다. 또 '잘못을 고친다면 끝내 절교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김용승은 이런 말로 허황되고 어지럽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평소 편지에서는 누차 '소자 망극한 은혜를 입었습니다.'라고 하고서도, 남에게는 생전에 '소자'라고 칭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김용승이 최민열(崔敏烈)에게 한 말이다.】 고문((告文 망고현천문)에서는 또한 일찍이 수업을 받아 제자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오히려 세상을 떠난 스승에게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 다시 다른 사람을 무함하는 데에 무엇을 꺼리겠는가? 보는 사람이 참작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가 변론한 글239)은 다음과 같다.선사의 대상(大祥)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십여 명이 김씨(金氏)의 병사(丙舍 묘지 근처에 있는 방)에 모여 오진영을 토죄(討罪)할 일을 논의하였는데 마침 김용승이 그 자리에 있었다. 김창암(金鬯庵 김낙규(金洛奎))이 이르기를 '김 진사(김용승)는 어찌하여 공경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대개 김용승을 애석히 여겨 개과천선하길 바란 것이다. 김용승이 떠들썩하게 다투어 변론한 것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가운데 가장 곧이듣기 힘든 것은 "오 아무개를 높이는 【노주(老洲 오희상)의 함자를 바로 불렀다.】 사람을 내 어찌 스승으로 섬기겠소. 나는 우리 가학을 할 것이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사우간으로 처우한다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사람과 절교해야 한다.'는 말은 먼저 내가 꺼냈다.김창암 또한 "김용승은 절교하고 오진영은 토죄합시다."라고 하자, 여러 사람이 이견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달리하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김종현(金鍾賢 김택술의 자(字))이 글을 짓고 내가 글씨를 썼다. 그 당시의 전말이 이와 같으니 그가 말한 '청문(請文)'과 '청삭(請削)', '서절심부절(書絶心不絶)'은 이치에 있어 천부당만부당하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밖의 횡설수설은 또 어찌 깊이 변론할 필요가 있겠는가?신헌(愼軒) 이기환(李起煥)이 변론한 글은 다음과 같다.청문(請文)과 청삭(請削)의 설은 기억하기로 그날 절교서를 지어 김용승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보고 부당한 사실이 있으면 말씀하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절교하는 것이 당연함을 보인 것이다. 그가 이것을 근거로 그렇게 말한 것인가. '서절심부절(書絶心不絶)'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대개 그 글에서 트집을 잡는 것은 단지 '사우간' 석 자뿐, 조용히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연명(聯名)으로 절교를 고한 글에 이미 이르기를 "선사를 모욕하고 연원을 배격하였다."라고 하였고, 인하여 말하기를 "사우간(師友間)이라는 설을 고치지 않는 것이 스승을 배반한 것이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제목인데 "조용히 다른 말이 없다."라고 하는가. 아마 모욕과 배척이 일상사가 되어서 그런 것인가.'간로(間路)'의 '간(間)'은 족히 죄가 되지 않는데 '사우간(師友間)'의 '간(間)'은 유독 죄가 됩니까?'간로'의 '간'은 일이 사실이 아니고 '사우간'의 '간'은 스승을 배반하는 데에 귀결된다.무릇 '마음과 행적이 판이하다.'240)는 논지는 왕문중(王文中)241)의 견해로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문하에서 바로잡은 것입니다.242)속으로는 사실 스승을 배반하고, 겉으로는 배반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 이는 마음과 행적의 판이함이 대륜(大倫 인류의 큰 도리)과 관계된 것이니 당연히 사람마다 바르게 할 수 있다.문하는 일찍이 시(詩)에서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나의 글을 읽는다.[先生沒後讀吾文]'라고 하였는데, 또 '독오문(讀吾文)' 석 자를 커다란 죄목으로 삼으니 그 절교하지 못하는 자의 마음이 이렇습니까? 유서(遺書)는 오진영이 꺼리는 것이고 제 글 또한 미움을 받으니 선생의 글이 곧 문하의 글이고, 문하의 글이 곧 선생의 글입니다. 여기에서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드러낼 뿐입니다.'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유문을 읽는다.[先生沒後讀吾文]'고 하거나 혹 '그 글을 읽는다.[讀其文]'고 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굳이 "내 글을 읽는다."라고 하였으니, 뜻을 두고 있는 데가 있어서 일부러 말한 것이다. 지금 "유서는 오진영이 꺼리는 것이고, 제 글은 또 미움을 받는다."라고 하며, 나란히 칭하고 짝을 지어 거론한 것은 사람들을 오진영과 같은 죄과로 몰아가는 계략이니, 흉악하다.문하가 만약 선생이 "사우 임고산(師友任鼓山)"이라고 말했다고 하면, 또한 장차 "우리 선사를 스승을 배신한 죄인이 되게 하였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사우(師友) 임고산(任鼓山)'이라는 말이 만약 '사우 이연평(李延平)'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면, 위에서 논의한 것은 괜찮다. 그렇지 않고 그가 선사를 처우한 것과 같다면 그는 선사를 배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선사가 고산(임헌회)을 배신하였다고 무함한 것이니 그 죄는 열 배가 더 된다.선생께서 평소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勤勤懇懇] 말씀하신 문ㆍ행ㆍ충ㆍ신(文行忠信)의 가르침이 지금은 털끝만큼도 비슷한 점이 없고 말류(末流)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실올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선생의 도(道)가 영영 전할 수 있는 날이 없을까 저어됩니다.정자가 이르기를 "지나치면 점점 겸애(兼愛)에 이르게 되고, 미치지 못하면 곧 위아(爲我)에 이르니, 그 끝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이르게 된다."243)라고 하였다. 주자가 이르기를 "양주(楊朱)는 의(義)를 배우다가 위아에 치우쳤고, 묵적(墨翟)은 인(仁)을 배우다가 겸애에 빠졌으니 본원(本原)에 있어서 미세한 흠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논하자면, 무릇 '말류에 폐단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본원에 흠결이 있는 것이다. 만약 본원의 바름이 증자(曾子)의 학문과 같고 자사(子思)와 맹자를 보면 전함에 폐단이 없음을 알 수 있는데 어찌하여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게 있으며 영영 전할 수 있는 날이 없겠는가?그렇다면 김용승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암암리에 선사의 학술이 흠결이 있다고 배척한 것으로 정자와 주자가 양주와 묵적을 논변한 것과 같다. 선사의 본원이 어디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있으며, 어디에 미세한 흠결이 있다고 감히 이렇게 말하는가? 그가 〈기언(記言)〉에서 이미 선사가 이치를 강론하는 데 있어 의혹이 풀리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에서 또 선사의 본원을 흠결이 있는 양주와 묵적에게 귀결시켰다. 사우라는 칭호로 시작하여 말류의 폐단이라는 말로 끝맺으니 의도가 매우 음험하고 악독함을 알 수 있다.○'근근간간(勤勤懇懇)' 네 글자는 우암이 대윤(大尹 윤선거(尹宣擧))이 윤휴(尹鑴)244)를 가까이 한 것을 논변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겉으로는 칭찬하지만, 속으로는 비방하지 않은 말이 없으니 이 또한 유심히 논하지 않을 수 없다.내가 이에 변론을 하니 혹자가 이르기를 "김용승은 거칠고 망령된 사람입니다. 비록 스승을 배반한다고 말한들 선사에게 무슨 손해가 된다고 이렇게 애를 태웁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김용승은 선정(先正)의 손자이고 명경(名卿)의 아들이며 기절(氣節 기개와 절조)을 지닌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세덕(世德 대대로 내려온 덕)과 기절이 실학(實學)과는 무관하나 족히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습니다. 김용승은 선사를 십 년 동안 스승으로 모신 사람으로서 갑자기 오진영이 무함한 뒤에 배반하고 스스로 자신을 깨끗이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장차 이것을 구실로 삼으면 선사께서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또 신명에 제사를 지내고 아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전에는 도의가 없고, 춘추대의가 없는 사우라고 줄곧 주제넘게 칭하였고, 지금은 아울러 학술과 본원마저 남김없이 배척하고 있습니다. 비록 빛나는 영령께서 그의 죄를 환히 볼 것이나 저승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니 아직 죽지 못한 문인들이 어찌 차마 유명(幽明)을 달리한 애통함을 억누르며 입 다물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선사(先師)께서 김평묵이 지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245)과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246)의 제문을 분변(分辨)하여 본분을 다한 까닭입니다.247) 제가 일찍이 선사의 원고 안에 실린 김용승이 스승을 정하는 날 그의 부친 대감(台監) 확재(確齋) 김학수(金鶴洙) 공이 그 아들을 부탁한 글을 보았는데, 이르기를 '이 녀석이 보고 느껴 오랑캐와 금수로 귀결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하늘의 신령함에 힘입어 난적(亂賊)이라는 이름을 면하였으니 부자가 받은 은혜가 크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더없이 중대하고 더없이 간절한 말입니다. 지금은 감히 부친의 당부를 저버리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아니 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어찌하여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 아울러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 될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뉘우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 참으로 괴이합니다."라고 하였다. 門下 韓狂金容承, 路出金馬, 席地爲位, 斟酒再拜而告之."門下", 金所嘗稱於先師者, 今忽取而自稱, 又書"韓狂"之別號, 是尙可謂自處以門人乎? 來往墓下, 且十載一不拜墓. 至於文以告之, 猶且席地遙斟於二十里外人家中庭, 舍曰"師禮". 友道尙不如是, 噫! 其心可知已矣.傳鉢高弟.先師於吳震泳, 初無衣鉢之傳. 更有不計道義之斥. 【見《寄華敬二兒書》】 終有事爲之慮【見權純命《華島治命錄》】矣. 金非不知此, 而特書傳鉢者, 明是譏嘲之辭也.當初遺書未出之前, 門下決知獨命不出先生之口, 而辨誣是事, 竭盡心膂, 筆舌無休日. 然摳衣纔六日, 未嘗受業爲弟子. 【"未嘗受業爲弟子"七字, 三洲語. 三洲於尤庵宋子, 有四世師友之契. 稱"先生", 稱"小子", 如彼其久, 而猶如是稱之.】師生之義, 苟一定分, 則摳衣久近, 非所當論. 況金於先師十年服事, 不爲不久;累度書面, 不爲不多. 故金上師門書, 有曰: "小子於門下受罔極之恩. " 又曰: "其生成之恩也, 刻肺銘肝, 罔知攸報. " 今乃曰: "摳衣六日, 未嘗受業. " 以示不受恩, 非弟子之意. 是可曰有人心乎哉!三洲所謂"未嘗受業爲弟子"者, 非曰: "不受恩於尤翁. ", 亦非曰: "不爲弟子也. " 正以示受恩不淺, 弟子自處之意. 故此句之上, 旣下"雖"字, 此句之下, 卽曰: "出入門下數十年, 情義篤矣. ", 其下文, 又引孟子所云"庾公之斯"事以明之, 則其意已躍如矣.更以此語, 與其《上仲舅書》中"姪於尤翁, 有四世師友之契, 不止一時執業請益者, 比而已. "者, 表裏看, 則尤可見矣. 至其《答李同甫書》, 則曰: "吾輩, 以尤翁爲大宗師. ", 其祭尤翁文, 一則曰"小子", 再則曰"小子". 無間於弟子自處矣. 三洲, 雖不執業, 而弟子之禮, 無間於存亡. 金則久事, 【句】小子於生前, 而未嘗受業爲弟子於沒後, 以三洲而視金, 則其罪益彰. 乃敢引此爲證, 更可駭也.旣無面命可據之實, 又無一人應之者.前乎遺書之出, 而先生曾有懸棺沈尸之誓. 及門者, 莫不親承, 而金獨無耳乎? 必無愛重己稿, 踰於親遺. 而有獨命認敎之理, 則卽此可謂"面命可據", 而今曰"無之". 前乎金討之出, 而兩湖門人, 或書詰或辨斥者, 不啻其多. 而今曰"無一人應之", 此非內謾其心外蔽人耳目者乎?自潔之外, 無他道理. 故歸兮一闋, 長往不返, 是固萬萬不得已之事, 而卒無以自解於市虎之疑也.旣云"決知獨命, 不出先生之口", 則胡爲而信吳之誣說, 汙視先師而自潔其身乎? 父事之地, 毁譽改觀、存亡易節, 不憚於得罪名敎. 吾恐其所謂"自潔"者, 適足以自汙也.師友之說, 考諸《魯論》, 先生, 本父兄之稱, 而師友, 乃父兄之謂也. 天下吾君而下, 安有過於吾父吾兄之尊乎? 堯、舜之道, 孝悌而已者, 良有以也. 而雖以七十子之服孔子, 不過乎此矣.先孔子《魯論》, 而管仲《弟子職》, 有曰: "先生施敎, 弟子是則. " 先生, 元是師門之稱, 而其尊與父兄等. 故孔子蓋借以稱父兄也. 然自孔子後, 不過百年, 已有孟子, 宋牼之先生. 降及宋世 有朱子, 陳君同甫之先生. 至于近世, 幾乎例爲書札間尊稱矣.夫人生於世, 有三本. 非父不生、非君不養、非師無敎. 故幷列君、師、父爲三尊焉. 後世之士, 爲學道定分之弟子者, 必生稱"師門", 死稱"先師". 然後, 可以見生三事一之義. 不然而只稱"先生", 則分數有多般, 其尊有不專矣. 如使金而無間於純師也, 何所慳惜於"先師"二字, 而迂迴去, 將借先生之父兄、借父兄之師友, 艱辛說出, 求免其罪乎? 而至謂"七十子之服孔子, 不過乎此. ", 則是又誣七十子, 而以師友待父兄, 而以師友間待孔子也. ○金於甲子夏, 未見遺書之前, 有《百千齋記言》曰: "道義不存, 先生可易. "若曰"七十子之服孔子, 是欺心也. " 是先生無《春秋》之謂也. 因以曰: "惟鼓山之於剛齋、梅山之於性潭, 則可相喩也. " 此師友間處之之說, 所由立者也. 今見遺書矣, 謂有春秋矣, 而猶不改師友之說, 而極口明不害爲純師. 其柰與前日"道義不存"、"無《春秋》之師友", 一串說來何? 猶且强叫之曰: "於《春秋》, 豈有間然乎? 七(十)14)子之服孔子, 不過乎此. ", 不欺其心者, 固如是乎?是以, 紫陽之於延平師友之, 北山之(於)15)勉齋師友之, 魯齋之於北山師友之. 我東華陽之於愼老師友之, 三洲之於尤翁亦師友之. 門下之於師友也, 抑獨何罪哉?朱子《與李誠父書》, 稱延平以老先生, 自稱以門人矣. 若乃師友李延平之語, 是後人所作, 而非朱子自言也. 然其意, 但以志同爲言, 如尙友之意云爾, 非謂以師友間之稱, 可加於純師而爲名也. 北山、魯齋之云, 亦不過類此也. 華陽云云見下, 三洲云云見上.憶昔丁巳春, 理神、道心之同異也, 先生謂門下曰: "吾爲退溪, 爾爲栗谷;吾爲延平, 爾爲朱子. "若如此言, 是先師以金說爲定論, 而許其靑勝於藍矣. 然則何以大稿中, 辨正金說者, 不一而足也? 吾以是知先師之無此言也. ○金容承上先師書曰: "理、性, 雖無辨, 謂之'養性', 則可, 謂之'養理', 說不去. 心、神無辨, 故謂之'養心', 可;謂之'養神', 亦可". 先師答曰: "先賢有存養天理語, 則謂之'養理'亦無礙. 蓋'順而不害曰養'故也. 心、神, 雖同一部位, 然神是心之至精至妙處, 故無惡. 至於心, 則或自爲惡, 此不可不思也." 金書又曰: "理、性有辨, 是湖家說也. " 先師答曰: "朱子云: '謂之理同, 則可;謂之性同, 則不可. ' 栗谷亦云: '萬物之理, 卽吾人之理;人之性, 非物之性. ' 此似有理性之辨, 與湖家說, 其所指異同如何? 金書又曰: "震泳, 只言'性通心局', 禁言'理通神局'. 故所以神心有辨. " 先師答曰: "心者, 人之神明, 則心亦可言通. 但神至精妙, 心兼精粗. 此則不得無辨也. '神局'二字, 高明自創歟? 抑有據耶? 朱子論《通書ㆍ動靜章》云: '神卽此理也. ' 又云: '動而無動, 靜而無靜, 非不動不靜. ' 此言形而上之理也. 據此則神恐難直據16)爲局也. 年前愚問: '上帝天之神也, 子謂上帝亦局歟? ' 高明遽曰: '此則不敢然.' 然則神有通局兩神歟? 【《孟子》 '聖而不可知之謂神', 未可謂之局也. 《中庸》 鬼神較粗, 而亦非可以局言者也. 】說到此, 不免一哂, 可能無誅否? 金書又曰: "老洲曰: '理氣非二物, (二物)17)之中, 自有主宰綱紀于此氣者. 卽無形有爲卽氣非氣之妙也. ' 又曰: '推極原頭, 理氣畢竟是一物. 朱子之所洞見, 而整菴不知混闢之義, 反認朱子理氣爲二物. '云云. 此未知如何?" 先師答曰: "'理氣一物', 從神理渾融無間處說, 非謂'理亦是陰陽不測之神'、'神亦是冲漠無朕之理'、'理亦是有覺之人心'、'心亦是無爲之道體也'. 羅、任理氣一物之說, 《老洲集》中, 有辨而駁之者, 非止一二. 其它如言'道是形上'、'神是形下', 又言'理氣合有分別, 而理主氣配', 又言'神幾與理爲一. 但有情意造作, 不似它純一無妄. 故理資乎神, 神配乎理. ', 又言'鹿門看得氣重, 以理氣爲一物, 眞妄無別. ', 又言'整菴隨語生解, 硬說主理氣一物之證, 而不免於辭理之崎嶇拗橫. ' 諸如此類甚多. 而曾聞鄭濟卿每於老洲頗懷不滿之意, 愚實憫其己見未甚明, 又未察前賢平生議論之周偏精密, 偏執一端, 以爲譏疑之資矣. 不謂明華, 又復追蹤其習. 吾恐明眼(人)18), 從傍冷笑, 千萬聽此衷言. 老夫決不誤諸君. " 金書又曰: "朱子未嘗言'理氣一物', 而其所謂'太極陰陽, 一而二, 二而一者', 可以援據. 然其要, 恐只在二字上. 未知如何? " 先師答曰: "蘇氏謂'聖人借陰陽以喩道. ', 而朱子非之曰: '是道與陰陽, 各爲一物. ' 又曰: '道卽器, 器卽道. ' 又曰: '道器一也. ' 又曰: '道器之名, 雖異, 然其實一物也. ' 朱子之言'道器一物', 如是之多. 而今曰云云, 豈非考之未詳而言之太粗歟? 朱子它日, 又嘗言'理氣決是二物. ', 又言'直以陰陽爲形而上者, 則昧於道器之分矣. ' 愚竊謂諸老先生於理氣, 或曰一物, 或曰二物, 皆有其指. 達者皆通, 昧者皆窒. 不謂以明華之高明, 乃於一二之間, 偏主二字爲要. 而獨以一字爲不甚緊關, 可作歇後語, 何也? 請更取栗翁壬申答牛溪所說一二之義者, 虛心細玩, 不俟鄙言, 而悔過謝罪於老洲門下矣. 【栗翁言 "旣非二物, 又非一物. 非一物, 故一而二;非二物, 故二而一也. "云云. 其言平穩, 兩相均停, 可爲吾門理氣之正案. 何嘗如來喩之偏重一邊而放輕一邊耶? ○右幷見先師《後稿》己未.】師友間之說, 同春言之, 尤菴從之, 以服愼齋之喪. 故門下亦以是服先生止三月, 是可執之爲罪耶? 尤、春兩正, 未嘗以是得罪於愼老之門也.尤、春旣已純師於沙溪, 其於愼齋, 處以師友間, 固宜然也. 豈金亦曾純師於全齋, 而後復學於先師乎? 與尤、春事, 事體懸別, 不足以爲據也. 且同春所謂"吾輩於此老, 處以師友之間"者, 言其平日所處也. 故旣行加麻三月, 而不安於但以友道處之, 故更加數月心哀. 此則以師道處之也. 雖曰"師友", 而其實重在師字. 今金則棄其生前純師之號, 而忽有身後師友之稱. 雖曰"師友" 而其實注在友字. 同名師友, 而其實則殊. 欲以此作禦人欛柄而莫敢誰何, 人或可欺, 獨不內愧乎? 且若早稱師友於平日, 則雖極猥妄於事一之地, 猶足以據師居朋友之倫, 而信其意則無它. 不然而於先師百世之後, 眩於陰吳之認誣, 自潔其身, 而改其稱號. 然則誣之者, 吳也;實其誣者, 金也, 於是乎不得不辨.平常之時, 書尺之間, 自謂"死生榮辱, 義無獨殊"者, 危厲之際, 比反眼若不相識, 間路之陰, 陰自爲謀, 惴惴乎黨金之目."死生榮辱 義無獨殊"之云, 不知指誰, 而大祥日, 余欲見吳, 而不遇, 間路之陰, 是指余而言也. 彼意謂非當行正路, 故謂之間路, 而似若眞由間路而行者然, 此陷人毒筆也. 蓋吾之欲面喩陰吳時在往復中聲討前也. 議及靜齋與諸士友也, 是可謂間路之陰乎? 其爲謀避黨金與喩吳改服. 上有天鑑, 旁有千目, 後有公論, 謹拱手而俟之. 【金則布文討吳後, 親往陰城見吳. 吾則以爲非關先師者, 故不曾言之. 】 ○田靜齋華九 《偶記》曰: "間路之陰之說, 金容承未悉其事, 而有傳者誤歟? 抑遭凶徒悖習, 而不勝忿激, 有此事實相反之云耶? 甲子七月三日, 會者數千, 皆誠心望震之悔罪告筵, 以明先人之初無認敎. 又解一門之仇敵, 携手同歸, 則千萬大幸. 故自朝至暮, 喩之勸之者, 不啻千人百人. 而奸震恐以此還作討渠之資, 牢拒不從. 至晩有些意思, 則其徒崔愿者, 從傍暗裡, 指撞震脇, 與之僻處, 附耳密語. 良久乃還座, 大言曰: "崔秉心同簽名告文, 則可爲也. " 崔則先有告矣, 故堅不從. 而若失此機, 決裂在卽, 而永無雪誣和同之日, 華與諸士友, 勸崔應之而又不從. 日已昏矣, 祀事將設, 震投處所. 華心焦肝焚. 不得已與士友共議, 使金澤述, 明朝往震處, 復善爲說辭而喩之, 不至決裂之地, 幸甚云云. 澤述未至震處, 震已乘船走矣. 而有此云云. 天下事類此多矣. 聞人毁譽, 豈可不審其實否, 而遽信之哉?師友之服, 已無所罪;師友之說, 忽爲大罪.師服之至有三月, 先賢有論, 金服三月之時, 初無師友間之說, 但知其爲師服, 安得知其爲師友間之服而罪之乎? 然今且從金說而言爾, 事實則其時金方持父衰, 而未嘗明言心哀月數, 其服不服, 亦不可得以知之矣.衆會告絶之際, 請文門下. 門下却之. 文成數行, 請削門下. 門下又却之. 絶則絶矣, 惟恐其傷絶者意, 何意? 其言曰"書絶, 心不絶. "請文、請削于當絶者, 是果一分近理乎? 當日作書示金曰: "如有抑勒者, 則言之. " 蓋明其當罪, 而非勒也. 且有"改之不終絶"之言. 故金欲以此等說變幻眩亂也. 然平日書疏, 累稱"小子受罔極之恩", 而語人以"未嘗稱小子於生前" 【金對崔敏烈言】 至於告文亦云"未嘗受業爲弟子". 此猶無難於亡師, 復何憚於誣餘人乎? 觀者可以參悉. ○蘇悅19)齋學奎辨曰: "先師大祥後歸路, 十餘人會金氏丙舍, 議討吳震泳, 適金容承在座, 金鬯菴曰 '金進士胡爲不恭說話. ' 蓋爲承愛惜, 冀其改遷也. 承呶呶爭辨, 不可盡記, 最不忍正聽者, '尊吳某【直斥20)老洲姓啣. 】者, 吾豈師事之? 吾爲吾家學. ', 終始以師友間處之之說, 口不絶聲. 故'當絶此人'之言, 先出學奎. 鬯菴亦曰: '絶金容承, 討吳震泳. ', 諸人皆無異辭, 遂分席面絶. 金鍾賢作文, 學奎書之. 其時顚末如此, 渠所謂'請文'、'請削'、'書絶心不絶', 於理萬萬不當. 推此則外他橫竪之說, 又何足深辨哉?" 李愼軒起煥辨曰: "請文、請削之說, 記得當日作絶書與金曰: '看其有不當事實者則言之. ' 蓋示其絶之之當然也. 彼藉是而云然也歟? 至於'書絶心不絶'之云, 全不當理也. "蓋其書所執, 只是師友間三字, 寂寥無他語.聯名告絶書旣曰: "侮辱先師, 侵斥淵源. ", 因言"不改師友間說之爲倍師. " 此爲何等重大題目, 而曰"寂寥無他語. " 豈以侮辱侵斥爲渠常事而然歟?未知間路之間, 不足爲罪;而師友間之間, 乃獨爲罪耶?間路之間, 事非其實;師友間之間, 歸於倍師.夫"心迹判之"說, 王文中之見, 正於伊川之門者也.內實倍師, 而外飾不倍. 此爲心迹判之係大倫者, 當人人得而正之者.門下嘗有詩言"先生沒後讀吾文", 又以"讀吾文"三字, 爲大罪目, 其不絶者之心, 乃如是乎? 遺書爲陰所諱, 吾文又爲所惡, 則先生之書, 卽門下之文;門下之文, 卽先生之書. 於是而可分別乎? 多見其不知數也."先生沒後讀遺文", 或"讀其文", 自是當然語. 而必曰"讀吾文", 則意有所在故云云矣. 今謂"遺書爲陰所諱, 吾文又爲所惡. ", 幷稱對擧者, 驅人於與陰同科之計也, 凶矣.門下若爲先生言"師友任鼓山", 亦將曰: "使吾師爲倍師之罪人也. ", 必矣."師友任鼓山", 若出於師友李延平之意, 如上段所論, 則可矣. 不然而如渠所以處先師者, 則非惟渠之倍先師, 上而誣先師爲倍鼓山, 其罪更加十倍矣.先生平日, 勤勤懇懇, 文、行、忠、信之敎, 到今無毫髮近似, 而末流之弊, 有不可勝言者. 竊恐先生之道不絶如縷者, 永無可傳之日也.程子謂 "厚些, 漸至兼愛;不及些, 便至爲我, 其末遂至楊、墨. 朱子謂 "楊朱學義, 而偏於爲我;墨翟學仁, 而流於兼愛, 本原之際, 微有差失. 以此論之, 凡"末流之有弊"者, 必其本原之有差失也. 若本原之正, 如曾子之學, 觀於子思、孟子, 傳之無弊可見矣, 何以有末流之弊不可勝言而永無可傳之日也? 然則, 金之爲此言也, 暗斥先師學術之差明, 如程、朱之論楊、墨也. 先師本原, 有何厚些、不及些, 有何微有差失, 而敢如此道乎? 渠於記言, 旣以先師之講理, 有未解惑, 今於此文, 又以先師之本原, 歸之於有差之楊、墨. 起以師友之稱, 結以末流之弊, 可見其用意之非常陰毒矣. ○"勤勤懇懇"四字, 出於尤菴論大尹親尹鑴語. 此文全篇, 無非外贊內譏之辭, 則此亦不得不以有心論. 余爲此辨, 或曰: "金是粗妄人. 雖云倍師, 何損於先師, 而乃苦爲此也? " 余曰:"否. 不然. 金是先正之孫, 名卿之子, 而稱有氣節人. 世德、氣節, 雖於實學無干, 足以爲人藉重則有矣. 金以十年師事之人, 忽然倍去於吳誣之後, 而云'自潔其身'. 人將藉以爲口, 先師爲何如人哉? 且祭告神明, 何等重事, 而敢以前日道義不存、無春秋之師友, 一向冒稱;於今日, 幷與學術本原, 而斥之無餘. 雖赫靈之昭鑑其罪, 九原不可作, 則未死之門徒, 豈忍按住幽明之痛而噤嘿自便乎? 此先師所以辨嘉金祭梅、全文而盡其分者也. 吾嘗見師稿中載金定師日, 其先台監確齋公託子書, 曰: '此子能觀感而不爲夷獸之歸, 則幸矣. ' 又曰: '賴天之靈, 得免亂賊之名 , 父子受恩, 顧不大歟? ' 此爲何等重大, 何等懇至語. 今敢至於弁髦親託, 抑又何心? 胡不念棄師之幷爲棄親, 而一向不悛也? 嗚呼! 其可異也. " 김용승(金容承) 처음에는 오진영을 성토하는 쪽에 가담했으나 뒤에 배반한 사람이다. '김씨의 일'이란 김용승이 간재 묘소에 올린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의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을 말하는데, 전일중(田鎰中)이 쓴 이에 대한 변척과 김택술(金澤述)이 그 내용을 조목조목 나누어 문제를 지적한 글이 《사백록(俟百錄)》 권2 〈승문변척(承文辨斥)〉에 실려 있다. 독대하여 …… 것 김택술의 《사백록(俟百錄》에 따르면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杏下]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오진영에게 《간재집》 간행에 대해 "헤아려서 하라."고 명하였다고 오진영이 말하였다. 김창협의 말 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 권20 〈여신무일(與愼無逸) 계미(癸未)〉에 "비록 수업을 받아 사제 간이 된 적은 없지만, 그분의 문하에 출입한 지 수십 년이 되어 정의(情義)가 돈독하네.[雖未嘗受業爲師弟子, 而出入門下數十年. 情義篤矣. ] 삼주는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호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ㆍ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 김수항이 신원되어, 이조참판ㆍ대제학ㆍ예조판서 등에 임명되나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였다. 양주 석실서원, 영암 녹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 등 다수가 있다. 유공지사(庾公之斯) 전국 시대 위(衛)나라 장수 유공지사가 처음에 윤공지타(尹公之他)에게 활쏘기를 배웠는데, 윤공지타의 스승인 정(鄭) 나라 장수 자탁유자(子濯孺子)가 지휘하는 군대와 대적하게 되었다. 이때 자탁유자가 병이 들어 활을 잡을 수 없다고 하자, 유공지사는 "소인은 활쏘기를 윤공지타에게 배웠고 윤공지타는 선생에게 배웠으니, 나는 차마 선생에게 배운 궁술로 선생을 해칠 수 없습니다." 하고는 살촉을 빼버린 화살을 쏘고 돌아갔다. 《孟子 離婁下》 중구(仲舅)에게 …… 편지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 갑신(甲申)〉을 말한다. 이동보(李同甫) 이희조(李喜朝, 1655∼1724), 동보는 자이고, 본명은 이다. 우암의 문인이다. 관을 …… 빠뜨려라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강제로 개인묘지를 일절 금지하고 공동묘지만을 허용하며 화장을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간재가 여기에 대항하여 한 말이다. 인교(認敎) 간재 선생이 자신의 유고의 출간과 관련하여 인가 여부에 관한 언급을 말한다. 귀혜가(歸兮歌) 김용승의 《우당집습유(尤堂集拾遺)》에 실려 있다. 시호(市虎) 《회남자(淮南子)》 〈설산훈(說山訓)〉에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 사람이 똑같이 말하자 사실로 받아들여 졌다." 하였다. 제자직(弟子職) 《관자(管子)》의 편명이다. 송경(宋牼) 선진(先秦) 때의 사람으로, 송견(宋鈃) 또는 송영(宋榮)이라고도 한다.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전쟁하고 있을 때 양국의 제후를 만나서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것[利]으로써 달래어 화해시키려 하자, 맹자가 그에게 인의(仁義)로써 달랠 것을 권하였다. 《孟子 告子下》 진동보(陳同甫) 송(宋)나라 영강인(永康人)으로 이름은 량(亮)이고, 자는 동보(同甫)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패도(覇道)를 쓴 한 고조(漢高祖)나 당 태종(唐太宗) 등도 권도(權道)를 사용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자와 왕패(王覇)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부모 …… 의리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도리를 말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버이는 낳아 주신 분이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임금은 먹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民生于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라는 말이 나온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이다.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본관은 은진이다.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의 문인이며, 이이와 김장생ㆍ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저서로 《강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이다.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ㆍ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북산(北山) 하기(何基, 1188∼1269)이다. 자는 자공(子恭), 호는 북산(北山), 시호는 문정(文定)이며, 금화(金華) 사람이다. 주자의 문인인 황간에게 수학하였다. 금화산(金華山) 북쪽에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며 주자학을 널리 전파하였다. 면재(勉齋) 송(宋)나라 황간(黃榦)의 호이다. 자(字)는 직경(直卿)이며, 주희(朱熹)의 문인이자 사위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노재(魯齋) 송말 원초의 경학가 허형(許衡, 1209∼1281)으로,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저서로는 《독역사언(讀易私言)》, 《노재심법(魯齋心法)》, 《허노재집(許魯齋集)》 등이 있다. 이성보(李誠父) 주희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아들이다. 상우(尙友)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과 벗을 하는 것, 혹은 벗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옛사람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선사(善士)와 벗하는 것을 부족하게 여겨서, 다시 위로 올라가 옛사람을 논하나니,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의 사람됨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그의 당세(當世)의 삶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우인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라는 말이 나온다. 파란색이 …… 것이다 후생(後生)과 제자가 전인(前人)이나 스승보다 나은 것을 말하는데,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얼음이 물에서 나되 물보다 차고, 파란색이 쪽[藍]에서 나되 쪽보다 푸르다[氷生於水寒于水, 靑出於藍靑於藍.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김용승이 …… 편지 《간재집(艮齋集) 후편(後編)》 권6 〈답김용승(答金容承) 기미(己未)〉를 말한다. 순하여 …… 양(養) 《맹자》 〈진심 상(盡心上)〉 1장의 집주(集註)에 나오는 말이다. 통서(通書)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으로 1권 40편이다. 본래 《역통(易通)》이라 칭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표리(表裏) 관계나 도설이 우주론(宇宙論)을 설명한 데 반해, 이 책은 오로지 윤리설(倫理說)을 가리키고 있다. 신(神)은 …… 아니다 《통서(通書)》에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면서 고요하지 않은 것이 신(神)이다.[動而無動, 靜而無靜, 神也. ]"는 말을 논한 것이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800년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818년 은거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황과 이이의 양설을 절충적 입장에서 취하였으며,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저서로 《독서수기》ㆍ《노주집》 등이 있다. 기(氣)이지만 …… 오묘함이다 이 말은 《농암집(農巖集)》 〈잡지(雜識) 내편2(內篇二) 논세(論世)〉에 나온 말인데, "그 형체가 없으면서 행위가 있고 기(氣)이지만 기가 아닌 오묘함이다.[無形有爲卽氣, 非氣之妙. ]"라고 하였다. 이기(理氣)는 …… 오묘함이다 김용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희상의 글에서 빠진 글자가 있으며 글의 순서도 약간 다른다. 《노주집》에 이르기를 "대개 이기(理氣)는 원래 이물(二物 두 가지 종류)이 아니다. 이물 속에는 저절로 이 기(氣)를 주재하고 다스리는 것이 있다. 곧 이른바 기(氣)이지만 기가 아니고 형체가 없으면서 행위가 있는 오묘함이다.[大抵理氣元非二物, 二物之中. 自有主宰綱紀于此氣者. 卽所謂卽氣非氣, 無形有爲之妙也. ]"라고 하였다. 정암(整菴) 명나라 때의 학자인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의 호이다. 원두(原頭)를 …… 여겼다 오희상(吳煕常)의 《노주집(老洲集)》 권11 〈답홍백응(答洪伯應)〉에 보인다. 이(理)와 …… 된다 오희상(吳煕常)의 《노주집(老洲集)》 권24 〈잡지(雜識)[이(二]〉에 "이것은 이(理)와 기가 합하되 분별이 있어, 이(理)는 주가 되고 기는 짝이 됨을 알 수 있다.[此可見理與氣合有分別, 而理爲主而氣爲配也. ]"라고 하였다. 글자가 생략된 부분이 있다. 신은 …… 한다 오희상(吳煕常)의 《노주집(老洲集)》 권15 〈잡지(雜識)[사(二]〉에 "신은 편정(偏正)도 없고 청탁(淸濁)도 없고 거의 이(理)와 하나가 된다. 다만 이에 비하여 정의와 조작이 있어서 이가 순일하여 무망한 것과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는 신을 바탕으로 하고 신은 이를 짝으로 한다.[神則無偏正無淸濁, 幾與理爲一. 但比理有情意造作, 不似他純一無妄. 故理資乎神, 神配乎理. ]"고 하였다. 몇몇 글자에 차이가 있다. 녹문은 …… 없다 오희상(吳煕常)의 《노주집(老洲集)》 권25 〈잡지(雜識) 삼(三)〉에 보인다. 정암은 …… 어렵다 오희상(吳煕常), 《노주집(老洲集)》 권25 〈잡지(雜識) 삼(三)〉에 보인다. 그러나 빠진 글자가 있다. 《노주집(老洲集)》에 이르기를 "정암이 말에 따라 해석을 만들어 내어 이렇게 억지로 해설하며 그 일물(一物)의 증거로 만든 것은 단지 많은 힘을 쏟은 것을 보았지만, 말의 조리가 험난하고 횡설수설한 느낌을 면치 못하였다.[整庵之隨語生解, 如是硬說, 做成其一物之證者, 只見其多少費力, 而不免乎辭理之崎嶇拗橫. ]"고 하였다. 몇몇 글자에 차이가 있다. 소씨(蘇氏)가 …… 일물(一物)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의 〈잡학변(雜學辨)〉에서 《소씨역전(蘇氏易傳)》을 논변한 말이다. 도(道)는 …… 도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에 이르기를 "형이하는 기가 되고 형이상은 도가 된다. 도는 곧 기이고 기는 곧 도이다.[形而下爲器, 形而上爲道. 道卽器, 器卽道. ]" 하였는데, 주자는 이 말이 공자가 한 말이라고 하였다. 도와 …… 일물(一物)이다 이 말은 〈주자변소황무노자해(朱子辨蘓黃門老子解)〉에 보인다. 이(理)와 …… 이물(二物)이다 이 말은 주자의 〈유숙문에게 답한 편지[答劉叔文書]〉에 보인다. 다만 …… 것이다 이 말은 《송원학안(宋元學案)》 권58 〈상산학안(象山學案)〉에 보인다. 헐후어(歇後語) 말의 뒷부분을 생략하고 앞부분만으로 그 뜻을 암시하는 말을 일컫는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본관은 창녕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후고(後稿) 기미(己未) 《간재집(艮齋集) 후편(後編)》 권6 〈답김용승(答金容承) 기미(己未)〉를 말한다. 똑같이 …… 분 부모와 임금과 똑같이 섬기는 스승을 말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버이는 낳아 주신 분이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임금은 먹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民生于三,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라는 말이 나온다. 스승이 …… 것 오륜에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의 윤리만 있고 스승의 항목이 없으므로 스승은 붕우의 윤리에 속한다고 보았다. 오진영의 인무(認誣) 원문 '음오(陰吳)'는 '음성(陰城)의 오진영'이라는 말로, 오진영이 충청도 음성 사람이어서 '음인'이라고 불렀다. 오진영은 간재가 세상을 떠나기 전 행하(杏下)에서 독대하여 문집의 출간을 인가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최원(崔愿) 1896년∼1943.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의숙(毅叔), 호는 경암(敬庵) 또는 수양자(首陽子)이다. 전우(田愚)와 오석농(吳石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열재(說齋) …… 글 소학규(蘇學奎)의 《열재집(說齋集)》 〈제김종현변김용승망고문후(題金鍾賢辨金容承望告文後)〉를 말한다. 마음과 …… 판이하다 왕통(王通)이 동상(董常)에게 "마음과 행적이 다른 지 오래되었다.[心迹之判久矣. ]"라고 말한 것으로, 왕통의 저서인 《중설(中說)》 권5 〈문역편(問易篇)〉에 보이는데, 이 주장은 정이(程頤)에게 난설(亂說)로 배척되었다. 왕문중(王文中) 수(隋)의 대학자 왕통(王通)이다. 자는 중엄(仲淹), 시호는 문중자(文中子)로 당나라의 천재시인 왕발(王勃)의 조부이다. 문제(文帝) 인수(仁壽) 연간에 장안(長安)에 와서 태평십책(太平十策)을 상주했는데, 채택되지 않자 하분(河汾) 일대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쳐 설수(薛收)와 방교(房喬), 이정(李靖),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등 1천 명이나 되는 제자를 길렀으며 《중설(中說)》 10권을 남겼다. 이천의 …… 것입니다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석씨의 학설을 만약 그 말을 연구하여 취사선택하려 하면 그 말을 궁구하기 전에 진실로 이미 화하여 불자가 될 것이다. 다만 우선 자취상에서 상고하여야 할 것이니, 그들이 이처럼 가르침을 베풀었다면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그 마음만 취하고 그 자취를 취하지 않기가 어려우니, 이 마음이 있으면 이 자취가 있는 것이다. 왕통은 '마음과 자취가 다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어지러운 말이다.[釋氏之說, 若欲窮其說而去取之, 則其說未能窮, 固已化而爲佛矣. 只且於跡上考之, 其設敎如是, 則其心果如何? 固難爲取其心, 不取其迹, 有是心則有是迹. 王通言心跡之判, 便是亂說. ]" 하였다. 《近思錄 卷13 辨異端》 지나치면 …… 된다 《근사록집해》 권13 〈변이단(辨異端)〉에 "사(師 자장(子張))는 지나치고 상(商 자하(子夏))은 미치지 못한 것은 성인(聖人)의 중도(中道)에 있어, 사(師)는 다만 지나침이 과하고 상(商)은 다만 미치지 못한 것이었으나, 지나치면 점점 겸애(兼愛)에 이르고 미치지 못하면 곧 위아(爲我)에 이르니, 과불급(過不及)이 똑같이 유자(儒者)에게서 나왔으나 그 끝에 가서는 반드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이르는 것이다.[如師也過, 商也不及, 於聖人中道, 師只是過於厚些, 商只是不及些, 然而厚則漸至於兼愛, 不及則便至於爲我, 其過不及, 同出於儒者, 其末, 遂至楊墨. ]"고 하였다. 윤휴(尹鑴) 1617∼1680.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ㆍ하헌(夏軒)이다. 1656년 재학으로 천거되어 우참찬ㆍ이조판서ㆍ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기해예송 전까지 남인과 서인 모두와 교유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갑산에서 사사되었다.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ㆍ수정하여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집에 《백호집》이 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이다. 자는 백응(伯應)ㆍ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세에 박윤원에게 '오도유탁(吾道有托)'의 찬사를 받고, 원로 명사들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며, 오희상에게 유종(儒宗)이라 불리었다. 주리파로 한원진의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임성주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를 반대하였으며, 개천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 자는 명로ㆍ중명, 호는 고산ㆍ전재ㆍ희양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조참판ㆍ대사헌 등에 임명되기도 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낙론으로 이이ㆍ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제자로는 전우가 있고, 저서로는 《전재집》이 있다. 이것이 …… 까닭입니다 간재는 〈논가김제매산선생문(論嘉金祭梅山先生文)〉을 지어 김평묵(金平默)이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자처하면서도 홍직필에게 올린 제문에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밝혔다. 또 〈관홍재구소찬기사행장(觀洪在龜所撰其師行狀)〉에서 임헌회에 대해, 김평묵이 '송백하혜(松栢荷蕙)'라고 기롱한 것과 김평묵의 문인 홍재구(洪在龜)가 '왜양혈당(倭洋血黨)'이라고 비난한 사실을 말하였다. 《간재집 후편(艮齋集後編)》 卷30에 있다. 十 문맥상 《후창집》에 누락된 것으로 보고 수정 번역하였다. 於 문맥상 '於'자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추가하여 번역하였다. 據 《간재집》에는 '지(指)'로 되어있다. 수정 번역하였다. 二物 대본에는 없으나 오희상(吳煕常)의 《노주집(老洲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人 대본에는 없는 글자나 《간재집(艮齋集)》에 의거하여 추가하여 번역하였다. 悅 소학규의 문집에는 '說'로 되어있다. '悅'은 '說'과 뜻이 통하는 글자이다. 斥 소학규의 《열재집(說齋集)》 〈제김종현변김용승망고문후(題金鍾賢辨金容承望告文後)〉에는 '呼'로 되어있어서 수정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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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문 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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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사307) 유지에 강당을 중건하는 상량문【병자년(1936)】 旌忠祠遺址講堂重建上樑文【丙子】 삼가 생각하건대 竊以충성을 포양하고 현인을 높이는 의전(儀典)을 두는 것은 褒忠尊賢之有儀조정 선비들이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고, 朝士間之通義학업을 강론하고 익히는 장소를 정하는 것은 講學肄業之定所사원(祠院)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약이니, 祠院界之同規지금 이곳 제향을 지내던 빈터에 今此俎豆之墟학사의 건립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重瞻黌舍之建생각해보건대 옛날에 정충사를 처음 지은 것은 念昔旌忠祠之創立참으로 세 현인의 신위를 봉안한 것이니, 寔是三賢位之奉安충렬공(忠烈公) 송 선생308)은 忠烈公宋先生임진왜란 때 적의 예봉을 제일 먼저 맞닥뜨렸고, 首當龍蛇之敵鋒일찍이 살아남는 것과 의리를 분별하여309) 早分熊魚之義하늘이 감동할 정성으로 기운을 뻗쳤기에, 秤天感誠而亘氣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으니 異徵以見참으로 장하도다 충성이여. 忠固壯哉선비들이 그 소문을 듣고 의기를 떨쳐서 士聞風而奮義유지(遺址)를 회복하였으니 恢復有基그 공 또한 훌륭하도다. 功亦偉矣무장공(武壯公) 신 선생310)은 武壯公申先生멧돼지 여우같은 왜놈들이 다시 침범할 때 値豕狐之再獅교룡311)의 외로운 성을 지켰는데, 守蛟龍之孤城옷과 치아를 집으로 보내고 衣齒送家이미 한번 죽기로 미리 정하였어라. 已預定其一死말가죽에 시체가 쌓여서 돌아왔으니 馬革裹屍과연 평생 원하던 바를 이루었도다. 果遂願於平生장무공(壯武公) 김 선생312)은 壯武公金先生붓을 내던지고 만 리의 거센 파도를 깨뜨리려 하여 投筆而願破萬里濤진나라 때의 종각(宗慤)313)이 되려는 뜻을 품었네. 有懷晉代之宗慤작은 몸으로 능히 나라의 한 지역의 방패가 되었으니 殲身而能作一隅障어찌 휴양의 장순314)에 뒤지랴. 豈下睢陽之張巡우리나라는 본래 강화와 항복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我國本無和與降당당하도다 이 한 마디 말이여 堂堂乎一言이것이 천지 도리의 올바름이 되었네. 是爲天經之正한 가문에 효자와 충렬을 겸하였으니 一門幷生孝且烈빛나도다 삼강(三綱)이여 赫赫乎三綱가법이 엄한 것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更見家法之嚴이 세 분은 모두 이 고을의 지령(地靈)을 받았으니 是皆鍾玆鄕之地靈참으로 함께 한 사원에서 배향을 받는 것이 마땅하네. 允宜同一祠之享禮임금께서 '정충사(旌忠祠)'란 세 글자 현판을 하사하시니 九宸寵錫三字額많은 선비들이 봄과 가을 두 번의 정일(丁日)에 분주히 내달렸건만, 多士駿奔兩丁辰대저 어찌하여 시간이 흐른다고 상황이 바뀌는가 夫何時移勢殊갑자기 훼철의 명령을 보게 되었어라. 遽見撤毁之令이 지역이 황폐해지고 물도 나오지 않아 不忍地荒水廢끝내 사라지리라는 탄식을 차마 견딜 수 없네. 終歸湮沒之歎비석의 기록은 건립 당시에 지어졌으니 碑記成於當時사적은 이미 실려 있네. 蹟旣載矣제단의 향사는 근래에 다시 행해졌으니 壇祀行於近日마음도 이제 괜찮을 것이라네. 情或可焉비록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사원(祠院)을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縱難復尊靈妥侑之祠어찌 선비들이 강론하는 건물이 없을 수 있는가. 豈可無士子講修之室이에 뜻이 있는 자들이 爰有有志者마음속의 계획을 경영하여, 經綸心上圖점차로 이루어졌나니 見見成之눈앞에 우뚝 솟았어라. 突兀眼前〈대장〉괘의 상사(象辭)315)가 벌여져서 占大壯之象辭이윽고 길한 건물을 만들었나니, 已獲吉體동지들의 의견을 물으매316) 詢同人之謀議마땅히 다른 말이 없도다. 宜無異言어찌하면 자본을 모을 것인가 何爲本資성의를 모아 유계(儒契)를 설립하였어라. 積誠立於儒契또한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며 亦有略助고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의연금을 내도다. 感義出於鄕人저 도끼질과 저 톱질이여 斧彼鉅彼목수에게 맡겨 훈수를 두지 말 것이라. 任梓人自不須說군자가 이곳에 오르고317) 이곳에 거처하니318) 躋斯芋斯마땅히 군자가 편안하게 지낼 것이라네. 宜君子爰得其安산천에 빛을 더하며 光增山川사방의 이목을 끌었네. 四方之瞻聆聳動거문고와 글 외는 소리 들으니 聲聞弦誦백 대의 풍운이 오래 전하리라. 百世之風韻長存이에 여섯 방향의 어영차 노래를 불러서 肆唱六偉之歌들보를 올리는 일에 기운을 내게 하노라. 庸助修樑之擧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아침 해가 망제봉319)에 막 떠오르네. 朝日初昇望帝峰선생의 곧은 충정은 일편단심이니 夫子貞忠心一片참으로 붉어서 이 해와 같아라. 也應正赤與斯同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한 굽이 초강320)이 빙 둘러 옷깃처럼 흐르네. 一曲楚江還作襟강을 끼고 그 당시엔 가까이 있었는데 夾水當年居密邇행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가늘 걸음 멈추었지. 行人指點駐征驂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두승산321)은 저쪽에 우뚝하여 하늘과 나란하네. 斗山截彼與天齊만일 천 길로 우뚝 설 뜻이 없었다면 如無壁立千尋志어떻게 이처럼 인을 이룰 수 있었을까. 那得成仁若是兮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한성을 멀리 바라보니 아득하여 끝이 없네. 漢城遙望渺無極진령의 노래322)를 지었는데 무엇 하려 하는가 榛苓歌作欲何爲나의 그리움 아득하니 탄식이 이는구나. 我思悠悠增嘆息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어찌하여 밤에 규성323)이 서광을 비추는가. 何夜奎星瑞彩放후생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노력할지라 寄語後生須勉旃천추에 다시 돌아오리니 내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네. 千秋必返我非誑어영차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넘실거리며 흘러가는 새 물결을 어찌하랴. 新潮其奈滔滔者그대는 사당 안에 받들고 있는 이를 보라 君看祠內所尊者인륜과 삼강을 죽었어도 놓치 않았도다. 爲是倫綱死不舍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당우가 훼손됨이 없으며 堂宇無恙의관324)이 계속 전하기를. 衣冠相傳의와 인을 서로 권면하여 課義責仁전국에 풍교가 세워지며, 樹風聲於全國이전보다 빛나고 후대를 열어 光前啓後영원히 은택을 드리우기를. 垂功澤於永年 竊以褒忠尊賢之有儀, 朝士間之通義.講學肄業之定所, 祠院界之同規.今此俎豆之墟, 重瞻黌舍之建.念昔旌忠祠之創立, 寔是三賢位之奉安.忠烈公宋先生, 首當龍蛇之敵鋒.早分熊魚之義, 秤天感誠而亘氣.異徵以見, 忠固壯哉.士聞風而奮義, 恢復有基, 功亦偉矣.武壯公申先生, 値豕狐之再獅, 守蛟龍之孤城.衣齒送家, 己預定其一死.馬革裹屍, 果遂願於平生.壯武公金先生, 投筆而願破萬里濤, 有懷晉代之宗慤.殲身而能作一隅障, 豈下睢陽之張巡.我國本無和與降, 堂堂乎一言, 是爲天經之正.一門幷生孝且烈, 赫赫乎三綱, 更見家法之嚴.是皆鍾玆鄕之地靈, 允宜同一祠之享禮.九宸寵錫三字額, 多士駿奔兩丁辰.夫何時移勢殊, 遽見撤毁之令.不忍地荒水廢, 終歸湮沒之歎.碑記成於當時, 蹟旣載矣.壇祀行於近日, 情或可焉.縱難復尊靈妥侑之祠, 豈可無士子講修之室.爰有有志者經綸, 心上圖見見成之.突兀眼前, 占〈大壯〉之象辭.已獲吉體, 詢同人之謀議.宜無異言, 何爲本資.積誠立於儒契, 亦有略助.感義出於鄕人, 斧彼鉅彼.任梓人自不須說, 躋斯芋斯, 宜君子爰得其安.光增山川, 四方之瞻聆聳動.聲聞弦誦, 百世之風韻長存.肆唱六偉之歌, 庸助修樑之擧.兒郞偉抛樑東, 朝日初昇望帝峰.夫子貞忠心一片, 也應正赤與斯同.兒郞偉抛樑南, 一曲楚江還作襟.夾水當年居密邇, 行人指點駐征驂.兒郞偉抛樑西, 斗山截彼與天齊.如無壁立千尋志, 那得成仁若是兮.兒郞偉抛樑北, 漢城遙望渺無極.榛苓歌作欲何爲, 我思悠悠增嘆息.兒郞偉抛樑上, 何夜奎星瑞彩放.寄語後生須勉旃, 千秋必返我非誑.兒郞偉抛樑下, 新潮其奈滔滔者.君看祠內所尊者, 爲是倫綱死不舍.伏願上樑之後, 堂宇無恙, 衣冠相傳.課義責仁, 樹風聲於全國.光前啓後, 垂功澤於永年. 정충사(旌忠祠) 전라북도 정읍시 흑암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우로, 송상현(宋象賢)·신호(申浩)·김준(金浚) 등을 배향하고 있다. 1632년(인조 10) 창건되었으며, 1657년(효종 8)에 사액되었다. 충렬공(忠烈公) 송 선생 송상현(宋象賢, 1551~1592)으로, 본관은 여산,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결사의 의지로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여 처형당하고 말았다. 살아남는 것과 의리를 분별하여 맹자(孟子)는 "생선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웅장(熊掌)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하였다. 《孟子 告子上》 무장공(武壯公) 신 선생 신호(申浩, 1539~1597)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언원(彦源)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남원성(南原城)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교룡 남원시 신곡동 교룡산을 가리킨다. 장무공(壯武公) 김 선생 김준(金浚, 15682~1627)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징언(澄彦)이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군에게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 자결하였다. 붓을……뜻을 품었다 붓을 던진다는 것은 문(文)을 버리고 무(武)에 종사하는 것을 말하고, 종각(宗慤)은 유송(劉宋) 시대 사람인데, 그가 어렸을 때 한번은 그의 숙부가 그에게 장래의 포부를 묻자, 대답하기를, "거센 바람을 타고 만 리 파도를 헤쳐 나가는 것이 소원입니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했던 바, 그가 뒤에 과연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큰 공훈을 세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던 데서 온 말이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붓을 던질 생각이 있으니, 종각의 거센 바람을 사모하노라.〔有懷投筆 慕宗慤之長風〕"고 하였다. 휴양의 장순(張巡) 장순은 당나라 때 인물이다. 지덕(至德) 2년(757)에 안경서(安慶緒, 안녹산安禄山의 둘째아들)가 부장(部將) 윤자기(尹子琦)에게 반군 13만 명을 이끌고 강회(江淮) 휴양(睢陽)을 공격하도록 할 때 장순과 허원(許遠) 등 수천 명이 식량이 부족하고 외부의 원조도 없는 가운데 휴양(睢陽)을 사수했다. 수만 명의 적군을 죽이고, 반군의 남침을 막아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대장〉괘의 상사(象辭)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후세 성인이 궁실로 바꾸어서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풍우에 대비하였으니, 대장괘에서 취한 것이다.〔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라고 한 말에서 뜻을 취하였다. 동지들의 의견을 물으매 동인(同人)은 《주역》의 64괘(卦)의 하나이니, 사람이 서로 화동(和同)함을 뜻한다. 그 괘사(卦辭)에 "사람과 화동하되 들에서 하면 형통한다.[同人于野 亨]"는 말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여 서원 건립에 협력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오르고 《시경》 〈사간(斯干)〉에서 집을 새로 지어 낙성식의 잔치를 벌이며 송축하면서 "새가 날아가듯 하며, 꿩이 나래 친 듯하니, 군자가 오르는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하였다. 이곳에 거처하니 《시경(詩經)》 〈사간(斯干)〉에서 "비바람 들어오지 않고 새나 쥐가 없어진 집 바로 군자의 거처로다.[風雨攸除 鳥鼠攸去 君子攸芋]"라고 하였다. 망제봉 정ㅇ읍시 덕천면 암제리에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초강 정읍 초강리 칠섭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두승산 정읍 고부에 있는 산이다. 진령의 노래 개암나무와 감초(甘草)로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이여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세 선생을 비유한 말로 쓰였다. 규성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열다섯째 별자리에 있는 별이다. 굴곡이 문자 획과 비슷해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것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전한다. 의관 세 선생의 의관을 보관하는 사당으로 영원히 전해지길 바란다는 의미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사경재325) 상량문【병인년(1926)】 思敬齋上樑文【丙寅】 봄 이슬과 가을 서리에 春露秋霜두려운 마음326)으로 근본에 보답하니, 怵悽報本옛날부터 위는 대들보 아래는 서까래 얹은지라 自古上棟下宇크고 아름다워 종친들이 모여들었는데,327) 輪奐聚族이에 만약 깊은 정성 들이지 않았다면 於斯苟無費了積誠어찌 짧은 시간에 완성됨을 보았으리오. 詎見成之不日우리 부녕(부안) 김씨는 惟吾扶寧之金뿌리가 신라의 태자에서 나왔으니,328) 源出羅胃천년 동안 금강산을 우러렀다고 千秋仰金剛특별히 늠름하게 써 놓았도다. 特書之凜凜뛰어난 풍모의 현달한 조상 문정공329)은 온 나라가 칭송하였고 英風祖顯文貞擧國誦석담도 추론하여 가법이 반듯하다고 하였어라. 石潭推論之秩秩家法대개 사경재는 산의 한 골짜기를 차지하였으니 蓋此席山之一邱壑실로 우리 집안 여러 조상들의 무덤으로 實是吾家之列祖塋산봉우리는 수백 리 정령의 기를 모았다네. 岡巒萃數百里精靈붉은 봉새 날개를 펼쳐 오른 듯한 송백은 반쯤 젖었는데 紫鳳軒翥松栢霑半천 년의 비와 이슬에 푸른 규룡이 수염을 떨치네.330) 千載雨露蒼虯拂髥윗대 조상을 받들어 함께 제사지내니 奉上世而同禋빛나는 칠성각이요, 奕奕星閣본종(本宗)이 나뉘어져 각자 제향하니 分本派而各享날개를 펼친 듯한 화려한 재각이라네. 翼翼粉菴명성은 원근에 널리 전파되고 聲譽播聞邇遐규모가 커서 금석 간에 찾기 어렵네. 規模宏遠今昔오직 계장331)이 친진332)하였으니 惟是繼葬之親盡예문에 없는 것도 차례로 제사 지내네.333) 稱秩多文본 재실과 어찌 그리 멀리 떨어졌나 其奈本齋之隔違내달려 갈 겨를이 없었다네. 駿奔無暇노의 체제(禘祭)를 보지 못함에 매우 부끄러우니334) 深慙魯禘之勿見내 공경이 부족해 허물이 되었도다.335) 我熯是愆감히 태산이 예를 모른다 하리336) 敢謂泰山之不如신이 이른 것을 알 수가 없구나. 神格未度어찌 〈사간〉처럼 건물 짓기를 도모하여337) 盍圖斯干之築室남국에서 캔 다북쑥을 올리지 않으랴.338) 用奠南國之采蘩이에 병인년을 만나 玆値赤虎之年현귀의 점을 치게 되었네.339) 爰稽玄龜之卜땅은 오늘을 기다려 地有待於今日끝내 목재를 감춰두었어라. 終焉協臧재목을 다른 산에서 빌리지 않으니 材不借於他山애초부터 힘을 허비하지 않았네. 初無費力상하에 방을 나누어 배치하여 分室房於上下정일(丁日) 아침에 치재(致齋)와 산재(散齋)를 마쳤네.340) 待致散於丁朝동남쪽의 청당을 여니 開廳堂於東南비 맞던 곳에서 이제 자리 바꿔 잔을 올리도다. 替奠酌於雨地남들이 이목이 홀연 집중 되었으니 瞻聆忽其聳動시내와 산은 빛을 더하누나. 溪山增其光輝푸른 병풍341)이 처마에 들어오니 蒼屛納簷뭇 봉우리 자손처럼 읍을 올리며, 羣峰獻子孫之揖푸른 강줄기 난간을 휘감으니 綠帶繞檻세 강이 바다로 내달려 흘러가누나.342) 三渠趨朝宗之流위엄 있는 군자가 거처하고343) 오르니344) 儼然攸芋攸躋아! 그런대로 갖추고 그런대로 아름다워라.345) 猗歟苟完苟美달력을 펼치니 일월은 길하다고 하고 披鳳曆而日月告吉《노논》을 낭송하니 명호가 훌륭하네.346) 誦魯論而名號鍚嘉이에 여섯 방향의 어영차 노래를 불러서 載唱六偉之歌들보를 올리는 일에 기운을 내게 하노라. 庸助修樑之擧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솔두치 위로 해가 붉구나. 傘頭峙上日輪紅복이 응당 이와 같음을 분명히 보리니 證看福履應如此〈주시〉에 오랜 오동나무347) 들어갈 수 있네. 更把周詩被古桐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거울처럼 평평하게 펼쳐진 건선담.348) 一鑑平開建善潭원천이 있지 않은데도 깊이를 알 수 없나니 不有源頭深不測어찌하여 쪽처럼 푸른 물 만 곡이나 될까나. 那成萬斛碧如藍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봉산의 맑은 기운 아침에 짙게 피어오르네. 蓬山淑氣蔚朝隮예부터 우리 집 가학을 부러워하였으니 古來歆豔吾家學많은 영재들이 백 척의 청운 사다리 올랐네. 濟濟英才百尺梯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선학동349)의 임천은 모습이 바뀌지 않았구나. 仙鶴林泉不改色위정척사는 전현의 공이거늘 衛正斥邪前哲功지금도 백성들은 남긴 은혜를 받네. 至今民物霑遺澤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우러러 청도350)의 백옥 휘장을 바라보네. 仰看淸都白玉帳오르내리는 밝은 영령은 천제의 곁을 따르리니 陟降明靈從帝傍냄새가 양으로 천상에 도달하여 흩날릴 것이리라.351) 臭陽直達九天颺어영차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증손의 기장은 들판 밭에서 익어가네.352) 曾孫黍稷宜田野천 말을 빚어서 예제353)를 만들었다가 釀來千斗醴齊成꽃나무354)에 동풍 불 때 옥 술잔에 마시리라. 花樹東風餕玉斝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신령이 보호하여 神祇持護문호가 번창하기를. 門戶熾昌재우는 만년토록 튼튼하고 齋宇鞏固於萬年자손은 억만으로 늘어나기를. 子姓繁衍其億麗선조의 법을 지켜 폐하지 않는 것이 守先法而不廢어찌 이종악355) 집안만 그러하랴. 豈專李宗諤家'백번 참으라'고 써서 함께 거주하니 書百忍而同居장공예356)의 집안과 비교하기를. 庶擬張公藝宅의관을 지키고 시와 예를 익히는 保衣冠服詩禮선비가 무리로 배출되고, 學士輩興제수를 밝게 하고 희생을 깨끗하게 하여 明粢盛潔犧牲효자가 다하지 않기를.357) 孝子不匱 春露秋霜, 怵悽報本.自古上棟下宇, 輪奐聚族.於斯苟無費了積誠, 詎見成之不日.惟吾扶寧之金, 源出羅胃.千秋仰金剛, 特書之凜凜.英風祖顯文貞擧國誦, 石潭推論之秩秩家法.蓋此席山之一邱壑, 實是吾家之列祖塋, 岡巒萃數百里精靈.紫鳳軒翥松栢霑半, 千載雨露蒼虯拂髥.奉上世而同禋, 奕奕星閣.分本派而各享, 翼翼粉菴.聲譽播聞邇遐, 規模宏遠今昔.惟是繼葬之親盡, 稱秩多10)文.其奈本齋之隔違, 駿奔無暇.深慙魯禘之勿見, 我熯是愆.敢謂泰山之不如, 神格未度.盍圖〈斯干〉之築室, 用奠南國之采蘩.玆値赤虎之年, 爰稽玄龜之卜.地有待於今日, 終焉協臧.材不借於他山, 初無費力.分室房於上下, 待致散於丁朝.開廳堂於東南, 替奠酌於雨地.瞻聆忽其聳動, 溪山增其光輝.蒼屛納簷, 羣峰獻子孫之揖.綠帶繞檻, 三渠趨朝宗之流.儼然攸芋攸躋, 猗歟苟完苟美.披鳳曆而日月告吉, 誦《魯論》而名號鍚嘉.載唱六偉之歌, 庸助修樑之擧.兒郞偉抛樑東, 傘頭峙上日輪紅.證看福履應如此, 更把周詩被古桐.兒郞偉抛樑南, 一鑑平開建善潭.不有源頭深不測, 那成萬斛碧如藍.兒郞偉抛樑西, 蓬山淑氣蔚朝隮.古來歆豔吾家學, 濟濟英才百尺梯.兒郞偉抛樑北, 仙鶴林泉不改色.衛正斥邪前哲功, 至今民物霑遺澤.兒郞偉抛樑上, 仰看淸都白玉帳.陟降明靈從帝傍, 臭陽直達九天颺.兒郞偉抛樑下, 曾孫黍稷宜田野.釀來千斗醴齊成, 花樹東風餕玉斝.伏願上樑之後, 神祇持護, 門戶熾昌.齋宇鞏固於萬年, 子姓繁衍其億麗.守先法而不廢, 豈專李宗諤家.書百忍而同居, 庶擬張公藝宅.保衣冠服詩禮, 學士輩興.明粢盛潔犧牲, 孝子不匱. 사경재(思敬齋) 전북 부안군 부영면 석동간에 김종(金宗)의 후손들이 지어 그를 기리던 사원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김종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호는 매죽당(梅竹堂). 현감 숙손(淑孫)의 아들이며, 정언 직손(直孫)의 조카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인 부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성리(性理)를 깊이 탐구하고, 상을 당하자 가례(家禮)에 따라 삼년 여묘(廬墓)를 마쳤으며 더위와 추위에도 의대를 풀지 않는 등 성리학적 예절을 직접 실천하였다. 봄 이슬과……두려운 마음 《예기》 〈제의(祭義)〉에서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있게 되니, 이는 추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에 젖으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서 반드시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되니,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하였다. 크고……모여들었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건물이 낙성된 것을 축하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도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 때에도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도 여기에서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뿌리가……나왔으니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인 김일(金鎰)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로 고려 원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붉은 봉새……떨치네 붉은 봉새나 푸른 규룡은 송백을 비유하였다. 계장(繼葬) 조상의 무덤 아래에 잇대어 자손의 묘를 쓰는 것을 이른다. 친진(親盡)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하는 것, 즉 4대가 지남을 이른다. 예문에……제사 지내네 《서경》 〈낙고(洛誥)〉에서 "큰 禮를 돈독히 높이고 큰 제사를 거행하여 차례로 제사를 지내되, 모두 예문(禮文)에 없는 것까지도 차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할 것입니다.[將禮 稱秩元祀 咸秩無文〕"이라 하였다. 원문에 '다문(多文)'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친진(親盡)이라 하였으니 예문에 없는 제사이므로 '多'는 '無'의 오자로 보인다. 노의……부끄러우니 《논어》 〈팔일(八佾)〉에서 "노(魯)나라에서 체제를 지낼 때에 관(灌) 즉 강신(降神)을 한 뒤로부터는 너무 엉망이라서 내가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다.〔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라고 하였는데, 선영에서 제사 지낼 때 정성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말이다. 내 공경이……되었네 《시경》 〈초자(楚茨)〉에 "내 매우 공경하여, 예를 행하매 어그러짐이 없었네.〔我孔熯矣 式禮莫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태산이……하리 《논어》 〈팔일(八佾)〉에서 계씨가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내자 공자가 염유에게 '네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느냐?'라고 하자, 염유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아!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느냐!'라 하였다.[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女不能救與?' 對曰:'不能.' 子曰:'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조상이 자손들의 제사가 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느냐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간〉의……않으랴 〈사간〉은 《시경》의 편명으로 모서(毛序)에서는 주(周) 선왕(宣王)이 궁실을 완공한 것을 읊은 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재실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남국에서……않으랴 《시경》 〈소남(召南) 채번(采蘩)〉에 "이에 다북쑥 캐기를 연못과 물가에서 하도다. 이것을 쓰기를 공후의 제사에 하도다.[于以采蘩 于沼于沚 于以用之 公侯之事]"라고 하였다. 현귀의……되었네 현귀는 점치는 데 쓰는 큰 거북으로 원귀(元龜)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단지 점을 쳤다는 의미로 쓰였다. 치재와……마쳤네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재(散齋)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하면서 밖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고, 다음에 치재(致齋)하여 목욕재계하고 오직 제사만 생각하는 것이다. 푸른 병풍 병풍처럼 펼쳐진 산을 이른다.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푸른 병풍이 푸른 물굽이 에워싸고 띳집에는 종일토록 사립문이 닫혔어라.〔六曲蒼屛繞碧灣 茅茨終日掩柴關〕"라고 하였다. 세 강이……흘러가네 《서경》 우공(禹貢)에서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그렇게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라고 하였다. 거처하고 《시경(詩經)》 〈사간(斯干)〉에서 "비바람 들어오지 않고 새나 쥐가 없어진 집 바로 군자의 거처로다.[風雨攸除 鳥鼠攸去 君子攸芋]"라고 하였다. 《시경》 〈사간(斯干)〉에서 집을 새로 지어 낙성식의 잔치를 벌이며 송축하면서 "새가 날아가듯 하며, 꿩이 나래 친 듯하니, 군자가 오르는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하였다. 그런대로 …… 아름다워라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훌륭하다.」 하였다.'〔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노논》을…훌륭하네 사경재(思敬齋)란 이름은 《논어》 〈계씨(季氏)〉의 구사(九思) 가운데 "일은 경건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에서 나왔다. 오랜 오동나무 옛날 동향(桐鄕)으로, 한나라 주읍(朱邑)이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곳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낸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선영을 비유하였다. 건선담 부안 건선면에 있던 연못을 말하는 듯하다. 현 줄포면 지역이다. 선학동 부안읍 신은리 선학동을 가리킨다. 청도(淸都) 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 위의 궁전이다. 냄새가……것이리라 사마광의 《서의(書儀)》에서 "옛날에 제사하는 자는 신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울창주를 부어 냄새가 음으로 연천(淵泉)에 도달하게 하고, 쑥에 메기장과 찰기장을 합하여 냄새가 양으로 천상의 장옥(牆屋)에 도달하게 하였으니 널리 신을 구하려는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 증손의……익어가네 《시경》 〈보전(甫田)〉에 "증손의 농사가 이엉 같고 수레의 끌채 같으며, 증손의 노적이, 모래톱 같고 언덕과 같은지라, 이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며, 이에 만 개의 수레 짐칸을 구하노니, 서직과 도량이, 농부의 복이라, 큰 복으로 보답하니, 만수무강하리로다.〔曾孫之稼 如茨如梁 曾孫之庾 如坁如京 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 報以介福 萬壽無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예제(醴齊) 예제는 종묘(宗廟) 등의 대제(大祭)에 사용하는 다섯 가지 술인 오제(五齊)의 하나로, 첫 번째는 술찌끼가 떠 있는 범제(泛齊), 두 번째는 찌끼를 거르지 않은 예제, 세 번째는 탁주인 앙제(盎齊), 네 번째는 찌끼가 밑에 가라앉아 있는 붉은색의 제제(緹齊), 다섯 번째는 탁주와 청주가 반반씩 섞여 있는 침제(沈齊)이다. 《周禮 天官冢宰 酒正》 꽃나무 원문의 화수(花樹)를 이 구의 문맥에 맞추어 번역한 것으로, 속뜻은 친족을 비유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시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서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려.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종악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에 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송대(宋代)의 공경(公卿) 중에 선대의 가법을 변함없이 꾸준하게 지켜 오는 집안은 돌아가신 재상 이방(李昉)의 집안뿐이다. 자손이 몇 대를 거치면서 200여 식구가 되었는데도 함께 기거하고 밥도 함께 지어 먹는 등,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농지와 객점(客店)에서 나오는 수입과 관직이 있는 자의 봉록을 모두 한 창고에 모아서는 식구 수대로 날마다 양식을 공급하며, 혼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경비에도 모두 액수가 정해져 있고 자제들에게 그 일을 나누어 맡기는 식으로 치른다. 이러한 틀은 이 재상의 아들인 한림학사 이종악(李宗諤)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만든 결과이다."라는 내용이다. 장공예 장공예의 집안은 9대가 함께 살았는데,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그 집에 들러 그 많은 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묻자 장공예가 종이에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다. 그 뜻은 존장(尊長)의 의복과 음식이 고르지 않거나 아랫사람의 예절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다투게 되는데, 능히 서로 참는다면 집안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小學 卷6 善行》 효자가 다하지 않기를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旣醉)에서 "효자가 다하지 않는지라, 길이 너와 같은 효자를 주나니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 하였다. 多는 無의 오자로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사견79)의 〈오진영이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를 보고나서〉를 제2조로 첨부함 【1936년】 附田士狷〈觀吳震泳答金聖章書〉第二條 【丙子】 오진영이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 중에 이른바 "우리 문하에 간행의 다툼이 있는 이후로 내가 받은 무함의 죄안(誣案)이 종남산(終南山)과 나란할 뿐만이 아니네. 이것이 비록 스스로 공 경하고 삼가지 못해 불러들인 것이겠지만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 외에는 물증을 잡을 만한 것이 없네."라는 것은 앞뒤로 있었던 그의 일과 그의 편지를 일제히 없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전체의 국면을 총괄해 묶어서 호남의 두세 사람의 큰 죄안으로 만든 것이다. 지 금 또 그의 말을 따라서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을 제외하고, 단지 그의 지금 이 편지 중에서 진상을 파악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한다면 원통함이 없을 것인가? 이미 "연원과 선현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라고 말했다면 의리를 끌어대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 마땅한데, 지산 영감이 살아 계신 동안에 절교를 알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초상을 치른 뒤에는 여러 차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류(陽類 군자)가 없어진 것이 비통하고, 우리 무리들이 더욱 외롭게 된 것이 가슴 아프네."라고 하였으며, 또 돌아가 신 뒤에 달려가 아부하고자 하면서 말하기를, "김성구가 가벼이 참언(讒言)을 믿고서 상을 당했을 때에 부고하지 않으니, 사람을 부당하게 끊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네." 하였다. 과 연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면 연원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는 말이 또 어찌 그의 편지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이것으로나 저것으로나 죄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의 손에 서 만들어져 나와 더 이상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이 아닌 데에서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세상의 월조가(月朝家)에게 한 마디 비평을 내려주길 청하노라. 吳震泳稱答金聖章書中所謂"自有吾門刊閙以來, 震所得誣案, 不啻齊終南. 此雖不自敬愼所召, 湖南二三人舌尖筆尖外, 無可捉贓者矣", 是將前後渠事渠書, 一歸之於無之, 而總束全局, 作 湖南二三人一大罪案者也.今且從渠說除湖南二三人舌尖筆尖, 直從渠今此書中捉贓, 使渠伏 辜, 無寃可乎? 旣曰: "詆斥淵源先賢矣." 則宜其引義之不暇, 而志令生前, 旣不聞有告絶, 於 其喪後, 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 傷吾輩之益孤." 又欲趨附於身後而曰: "聖九輕信讒言, 遭喪不訃, 絶人不當, 若是無據." 果可如此, 則詆斥淵源之說, 又何以出於渠書也? 以此以彼, 罪有不容赦者. 從渠自手辦出, 非復湖南二三人舌尖筆尖而捉贓則在, 請世之月朝家下一評焉 전사견(田士狷) 간재 전우의 손자인 전일중(田鎰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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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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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주 최씨 숙사재358) 중건 상량문【계유년(1933)】 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文【癸酉】 평상시와 다르게 먹고 다른 곳에서 거처하며 食必變居必遷마땅히 제향의 재계를 엄숙하게 해야 하네. 宜肅享祀之齋戒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일을 잘 이어받아 志善繼事善述건물이 설립되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359) 重覩堂構之建修만일 오랜 세월의 경영이 없었다면 苟無積年經綸어찌 짧은 기간에 우뚝 서게 됨을 보랴. 豈見不日突兀삼가 생각건대, 최씨는 竊惟崔氏세계가 전주에서 나왔으니 系出完府먼 조상 문성공360)은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라. 遠冑文成公之顯名후손이 영주361)로 나뉘었나니 派分瀛州또한 맑은 명성의 원조(遠祖) 소윤362)이 있었네. 亦有少尹祖之淸譽높은 벼슬아치 끊이지 않았으니 簪纓不絶덕과 인을 쌓아서 생긴 것 아님이 없도다. 罔非積德累仁之由충성과 효도하는 자손이 무리로 배출되었으니 忠孝輩興어찌 다만 수많은 자손으로 번창함에 그치리오. 豈但百族億麗之盛이 지역 분토동363)을 바라보니 睠玆一區粉土之洞만 년 묘소가 들어앉을 자리임을 알겠네. 知是萬年佳城之藏칠보364)에서 흘러와 형국을 이뤘으니 來從七寶而成形마치 그 부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듯. 如回顧其父祖앞으로 반등365)을 마주하여 안산이 되는데 前對半登而作案손을 맞잡고 읍하는 아이 같아 기쁘구나. 喜拱揖之兒孫대개 동복공366)이 남쪽으로 온 뒤로 蓋自同福公南來비로소 이 산에 유택을 정하였네. 始卜玆山地遺宅사직공367)이 뒤를 이은 후로 繼司直以後여러 대의 종손과 지손이 함께 썼네. 累代宗支共同덕촌368)의 묏자리를 정하니 占德村之兆다른 언덕의 정령들이 이웃하였어라. 別岡精魄鄰近수백 리 신령한 기가 모였는데 萃靈氣數百里반천 년 비와 이슬을 지나왔도다. 歷雨露半千年진군(甄君)의 정자369)에 영원한 그리움을 부치니 寓永思於甄亭선영에 대한 감회가 얼마나 많은가. 幾多松梓之感위장(韋莊)의 집에 뿌리가 같으니 曾同根於韋室어찌 화수회의 기쁨이 없겠는가.370) 那無花樹之歡돌이켜 생각해보면 병사371)를 緬惟丙舍창건하고 수리하여, 創之修之그 갑자가 粤在甲周두 번 세 번 지났어라. 三去再去당실이 기울어지고 무너졌지만 堂室頹圯도연명은 무릎도 펴기 힘든 방에서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었으며,372) 陶元亮親戚情話之膝難容자손은 번창 하였나니 雲仍繁昌이문정의 집은 태축과 봉례에게는 대단히 좁았어도.373) 李文靖太祝奉禮之廳頗隘이윽고 노나라 창고는 그대로 물려받기가 어려웠으니374) 旣難仍於魯府이에 주나라 영대를 경영하기 시작하였어라.375) 爰經始於周臺사람들이 모두 거북점을 따르니 人協龜從비록 크게 길하다는 이치376)를 얻었지만, 雖獲九疇之大吉힘이 부족하고 공사가 커서 力綿事鉅천 근의 무거운 짐을 인 듯하였네. 若擔千斤之重任다만 다행히도 기와를 빚고 재목을 잘라와 惟幸搏是瓦斷是材다른 산의 흙과 나무를 빌리지 않았고, 不借他山之土木실로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없는 사람은 힘을 내어 實賴有者財無者力기꺼이 여러 자손들의 정성스런 마음을 받았어라. 樂用諸孫之誠心넓고 툭 트인 마루와 방은 寬敞軒房이전보다 규모가 커졌으며, 增制度於厥舊골짜기에 빛이 나니 輝映洞壑새로운 건물에 이목이 집중하였네. 聳觀瞻於維新한갓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지 마라 毋徒曰人事之當然이 또한 신명이 도와주었도다. 抑亦爲神明之攸助이 정도면 그런대로 모이고 갖추어졌으니 苟合矣苟完矣어이 위나라 형(荊)이 살림살이를 잘한다고 논하랴.377) 奚論衛室之善居참으로 크고 아름다우니 美輪焉美奐焉영원히 친족이 모여 제사 지내기에 부합하누나.378) 允符張禱之聚族달력을 펼쳐보니 날과 달이 길하다고 하며 鳳曆披而日月告吉무지개가 떠오르며 칭송하는 말이 뒤따라 오르도다. 虹榤掛而頌辭隨騰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상두산379)에 해가 떠올라 주렴에 붉은 햇살 가득하네. 象頭初日滿簾紅그대 위해 '여승'의 구절380)을 외우노니 爲君誦獻如升句희가381)만 복록을 높게 되지 않기를. 未獨姬家福祿崇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우산의 아름다운 나무가 푸르러 빽빽하네.382) 牛山佳木翠森森자제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여 寄言子弟須勤學이 양심으로 잘 함양하기를. 將此良心善養涵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울창한 봉래와 영주산383)은 하늘과 맞닿았네. 蓬瀛鬱鬱與天齊사람이 장수하면 신선과 짝을 하는데 人而長壽還仙侶모름지기 쉬지 않고 열심히 인을 행해야 하리라. 要在爲仁自强兮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덕성은 푸르고 푸른 색이 변하지 않네. 德城不改蒼蒼色선조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이전 왕을 모시니 先靈陟降侍前王이곳에서 여전히 옛 나라를 보는 도다. 此處依然見故國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규성384)은 언제나 서광을 쏘아댈까. 奎宿何時瑞彩放땅의 운수와 하늘의 아름다움 서로 합한 듯하니 地運天休若相符후진이 대가가 될 것을 우두커니 기다려 보리라. 佇看後進作鴻匠어영차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증손의 기장은 들판 밭에서 익어가는구나.385) 曾孫稼穡宜田野단술을 빚으니 얼마나 향기로운가 釀成酒醴何馨香게다가 맑은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도다. 復有淸泉流不舍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동우가 오래 견고하며 棟宇長固묘소가 영원히 평안하길. 邱壟永安종족이 서로 화목하며 宗族相與雍和장공예가 함께 거처한 것386)이 公藝之同居옛날에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말 길. 罔專美於古효도하고 공경하니 어찌 창대하지 않으랴 孝敬豈不昌大비교하기 드문 최산남387)을 山南之罕比다시 오늘에 보기를. 復見於今 食必變居必遷, 宜肅享祀之齋戒.志善繼事善述, 重覩堂構之建修.苟無積年經綸, 豈見不日突兀.竊惟崔氏, 系出完府, 遠冑文成公之顯名.派分瀛州, 亦有少尹祖之淸譽.簪纓不絶, 罔非積德累仁之由.忠孝輩興, 豈但百族億麗之盛.睠玆一區粉土之洞, 知是萬年佳城之藏.來從七寶而成形, 如回顧其父祖.前對半登而作案, 喜拱揖之兒孫.蓋自同福公南來, 始卜玆山地遺宅.繼司直以後, 累代宗支共同.占德村之兆, 別岡精魄鄰近.萃靈氣數百里, 歷雨露半千年.寓永思於甄亭, 幾多松梓之感.曾同根於韋室, 那無花樹之歡.緬惟丙舍, 創之修之. 粤在甲周, 三去再去. 堂室頹圯, 陶元亮親戚情話之膝難容. 雲仍繁昌, 李文靖太祝奉禮之廳頗隘. 旣難仍於魯府, 爰經始於周臺.人協龜從, 雖獲九疇之大吉.力綿事鉅, 若擔千斤之重任.惟幸搏是瓦斷是材, 不借他山之土木.實賴有者財無者力, 樂用諸孫之誠心.寬敞軒房, 增制度於厥舊.輝映洞壑, 聳觀瞻於維新.毋徒曰人事之當然, 抑亦爲神明之攸助.苟合矣苟完矣, 奚論衛室之善居.美輪焉美奐焉, 允符張禱之聚族.鳳曆披而日月告吉, 虹榤掛而頌辭隨騰.兒郞偉抛樑東, 象頭初日滿簾紅.爲君誦獻如升句, 未獨姬家福祿崇.兒郞偉抛樑南, 牛山佳木翠森森.寄言子弟須勤學, 將此良心善養涵.兒郞偉抛樑西, 蓬、瀛鬱鬱與天齊.人而長壽還仙侶, 要在爲仁自强兮.兒郞偉抛樑北, 德城不改蒼蒼色.先靈陟降侍前王, 此處依然見故國.兒郞偉抛樑上, 奎宿何時瑞彩放.地運天休若相符, 佇看後進作鴻匠.兒郞偉抛樑下, 曾孫稼穡宜田野.釀成酒醴何馨香, 復有淸泉流不舍.伏願上樑之後, 棟宇長固, 邱壟永安.宗族相與雍和, 公藝之同居, 罔專美於古.孝敬豈不昌大, 山南之罕比, 復見於今. 숙사재(肅事齋) 현재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 송내 마을에 있다. 동복 현감을 지낸 전주 최씨 동복공(同福公) 최자목(崔自睦)을 비롯하여 12분의 시제(時祭)를 모시는 곳이다 건물이……되었도다 '당구(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줄임말로, 부조(父祖)의 창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함을 가리킨다. 《서경》 〈대고(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는 충숙왕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로 문하시중을 지냈다. 영주(瀛州) 전라북도 고부의 옛 이름으로, 영주산이 있다. 소윤(小尹) 최득지로, 호는 율헌(栗軒)이다. 사헌부 감찰, 한성 소윤 등을 지냈다. 분토동 정읍 고부면 분토동을 가리킨다. 칠보 전라북도 정읍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반등 고창의 반등산을 가리킨다. 동복공 최자목(崔自睦)으로, 최득지의 아들이다. 사직공 동복공의 당질 최강(崔崗)을 가리킨다. 덕촌 최희정(崔希汀)의 호로 자는 정지(汀之)이다. 직제학 최담(崔霮)의 후손이다. 진군의 정자 진군은 송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그의 대(代)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위장의……없겠는가 위장은 당나라 사람이다.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 하였다. 화수회는 친족끼리의 모임을 뜻한다. 병사 묘지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당실이……나누었으며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좁은 집이지만 편안하구나.……친척들과 정담 나눠 즐거워하고."라고 하였다. 자손은……좁았어도 이 문정은 송(宋)나라 태종(太宗) 때의 명재상 이항(李沆)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이항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 집이 앞마당에서 말 한 마리를 겨우 돌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초라하였는데, 어떤 이가 이에 대해 지적하자, 이항이 말하기를, "집은 자손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 집은 재상의 집으로는 누추하지만, 태축이나 봉례의 집으로는 매우 넓다.〔居第當傳子孫, 此爲宰相廳事誠隘, 爲太祝奉禮廳事已寬矣.〕"라고 한 일이 있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 태축과 봉례는 모두 제사를 맡은 태상시(太常寺)의 관직으로 재상의 자제들에게 내리는 음직이다. 노나라……어려웠으니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사재가 오래되어 그대로 쓰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나라 영대에서 시작하였네 《시경》 〈영대(靈臺)〉에 "영대를 짓기 시작하여 공사를 벌이니 서민들이 와서 일하는지라 하루도 못 되어 완공하였도다.〔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라고 하였다. 원거와 영대 두 구절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하는 재실을 후손들이 달려와서 도와 빨리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크게 길하다는 이치 구주(九疇)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가지 이치를 말한다. 여기서는 점을 쳐서 얻은 이치의 개념으로 번역하였다. 어이……논하랴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훌륭하다.」 하였다.'〔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참으로…부합하네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상두산 정읍 태인에 있는 산이다. 여승(如承)의 구절 당(唐)나라 유변(柳玭)이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余見名門右族, 莫不由祖先忠孝勤儉, 以成立之; 莫不由子孫頑率奢傲, 以覆墜之. 成立之難如升天, 覆墜之易如燎毛. 言之痛心. 爾宜刻骨.]"라는 내용이 있다. 희가(姬家) 주나라의 성이 희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천자가 되기까지 매우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고생하였는데, 우리 집안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매우 조심해야 함을 이른다. 우산의……빽빽하네 《맹자》 〈우산장〉에서 인간의 본성을 우산의 나무에 비교하였으니, 아래 보이는 '양심'을 출처 근거가 된다. 봉래와 영주산 부안의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으로 불린다. 규성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열다섯째 별자리에 있는 별이다. 굴곡이 문자 획과 비슷해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것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전한다. 증손의……익어가는구나 《시경》 〈보전(甫田)〉에 "증손의 농사가 이엉 같고 수레의 끌채 같으며, 증손의 노적이, 모래톱 같고 언덕과 같은지라, 이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며, 이에 만 개의 수레 짐칸을 구하노니, 서직과 도량이, 농부의 복이라, 큰 복으로 보답하니, 만수무강하리로다.〔曾孫之稼 如茨如梁 曾孫之庾 如坁如京 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 報以介福 萬壽無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공예처럼……것이 장공예의 집안은 9대가 함께 살았는데,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그 집에 들러 그 많은 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묻자 장공예가 종이에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다. 그 뜻은 존장(尊長)의 의복과 음식이 고르지 않거나 아랫사람의 예절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다투게 되는데, 능히 서로 참는다면 집안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小學 卷6 善行》 최산남 최산남은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을 말한다. 최관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 부인(唐夫人)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형제와 자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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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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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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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승재388) 상량문【병인년(1926)】 以承齋上樑文【丙寅】 어찌하여 승냥이와 수달이 짐승과 물고기로 제사 지냄389)을 보지 않는가 盍觀豺獺之祭獸魚사람의 도가 그와 같지 않을 수 있는가. 可以人道而不若새가 나는 듯한 아름다운 재실390)을 이에 바라보니 聿覩鳥翬之呈飛革참으로 군자가 거처할 곳이로다. 允矣君子之攸居뜻이 있으면 일은 끝내 성취되니 有志者事竟成치재하고서 조상이 있는 듯 제사지내네.391) 致齋而祭如在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김씨는 竊惟吾金포옹392)에서 나와 계노393)가 원조(遠祖)가 되니 系浦翁而祖溪老참으로 훌륭한 후손이라 하겠도다. 寔謂醴源之流부풍394)에 관향을 두고서 영주395)를 건넜으니 貫扶風而渡瀛州보배로운 감귤에 비교할 탱자가 아니네.396) 非比寶橘之枳문장과 행실이 반듯하니 文行濟濟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마라 경계하네. 戒勿墜其家聲후손들이 연이어 나왔으니 雲昆繩繩참으로 절로 넘치는 경사가 있도다. 信有自乎餘慶다만 청빈하여 물력이 가난하였기에 只緣物力之淸窶선조를 넉넉하게 받듦에 부족하게 되었구나. 致闕先事之美豊칠팔 대 이백 년 동안 七八代二百年제전을 맡아 담당할 자가 없었으며, 旣少祭田之選掌오육 리 서너 묘소에도 五六里數四兆재사를 마련할 경황이 없었다네. 不遑齋舍之始營제수를 올리는데 상례(常禮)를 바꾸어 供苾芬而易常돌려가며 행하니 온당하지 않고, 輪行未穩예측할 수 없는 비바람을 만나면 値風雨之不測이리저리 내달리니 법도가 아니어라. 駿奔無儀얼마나 다행인지 선령이 저승에서 도와 何幸先靈之冥扶이에 가문의 의논이 일치하게 되었구나. 乃獲門議之克協이곳 송산397)의 선영은 惟玆松山之壟선조의 터전398)을 겸하고 있어라. 兼是桑梓之基멧부리의 기슭은 밝아 岡巒麓明두승과 천태의 여러 산보다 뛰어난 경치를 보이며, 挹勝形於斗台諸嶽거리는 중간이어서 道里均敵궁사리와 달전리399) 각 선영의 중심을 차지하였어라. 占中心於宮達各塋이에 천간이 병(丙)이고 지지가 인(寅)해를 만나 爰値干丙支寅그 해에 터를 잡았으니400) 維年遂胥해(亥) 방향을 바라보고 사좌(巳坐)에 집을 지었네. 枕亥面巳其宇많고 적은 것은 내 재산에 맞춰서 多寡稱吾有기꺼이 종사(宗事)의 재물에 도움을 주고, 樂助力於宗財공교로움과 졸렬함은 그 재주에 따라 巧拙隨其才몸소 큰 공사에 수고로운 일을 담당하였어라. 親執勞於巨役변산의 큰 목재를 옮겨오니 輸邊山之大木어찌 등림401)의 좋은 재목에 뒤지랴. 豈遜鄧林之良材근방의 목수에게 일을 맡기니 任近坊之梓人영 땅의 도끼를 휘두르는 고수402)를 기다릴 필요 없어라. 無待郢斤之高手완성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莫曰成不日也이른바 그 진심을 다하였기 때문이라오. 所謂盡其心焉아름답고 웅장하니 美奐美輪비록 장노(張老)의 축하에 비기기는 어렵지만,403) 縱難擬於張禱그런대로 갖추고 그런대로 아름다우니 苟完苟合형의 거처에 거의 부합하는도다.404) 庶同符於荊居자사의 《중용》에서 '이승(以承)'을 취하여 이름을 지으니 取思傳而錫名신명이 도처에 충만하여 위에서 있는 것 같음을 보리라.405) 瞻洋洋乎在上붉은붓으로 써서 현판을 내거니 摹朱筆而揭額놀랄 만큼 휘황하여 새로운 듯하여라. 驚煌煌焉若新아! 그대 뭇 장인들이 긴 대들보를 들 때 嗟爾衆工修樑之抛나의 짧은 아랑위 여섯 곡을 들어 보게나. 聽我六偉短詞之唱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소중한 공자와 주자의 도가 동방에 있네. 珍重尼晦道在東선조가 살아 계실 때 어진 마을을 골랐으니 先祖當年仁里卜지금도 아름다운 이름이 바로 창동406)이라네. 至今嘉號是滄東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우리 집안의 가법을 삼남에서 부러워하는구나. 吾家家法豔三南추모하여 덕을 닦음407)이 아내의 모범408)이 됨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念修不出刑妻外《시경》을 붙들고 〈이남〉을 읽도록 하게나. 請把毛詩讀二南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석동409)의 무덤은 조용히 서쪽을 향해 있구나. 席洞佳城暗拱西봄 이슬 가을 서리410)는 해마다 되풀이되는데 春露秋霜年復歲얼마나 많은 관복 입은 자손이 매번 서쪽으로 달려가는가. 幾多冠服每趨西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한강 북쪽은 바람에 강물411)이 오열하네. 風泉嗚咽漢之北충성으로 옮길 곳412) 없어 탄식하노니 堪歎無地可移忠밤에 홀로 부질없이 북두성만 바라보네. 獨夜虛勞倚斗北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정령이 밝게 구천의 하늘 위로 올라가는구나. 精靈昭陟九天上너의 마음 둘로 하지 않는다면 신령도 응당 들으리니 爾心不貳神應聽높고 높은 하늘에 부질없이 계시다고 하지 마라. 無曰高高徒在上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태산에 높이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이누나.413) 泰山高處小天下원래 효도와 공손은 신명과 통하니 元來孝悌通神明상달하려면 모름지기 아래로부터 배워야 하리라. 達上須知自學下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모든 신령들이 준엄하게 보호하고 百靈峻衛온갖 상서로움이 사방에서 몰려들기를. 萬祥鼎臻어찌 창대하지 않으랴 安得不昌최산남414)의 집안만 홀로 그러하지 않으리. 罔專崔山南門戶끊임없이 이어가서415) 勿替引之〈초자〉의 증제사, 상제사416)를 영원히 전하라. 永傳周楚茨烝嘗 盍觀豺獺之祭獸魚, 可以人道而不若.聿覩鳥翬之呈飛革, 允矣君子之攸居.有志者事竟成, 致齋而祭如在.竊惟吾金, 系浦翁而祖溪老, 寔謂醴源之流.貫扶風而渡瀛州, 非比寶橘之枳.文行濟濟, 戒勿墜其家聲.雲昆繩繩, 信有自乎餘慶.只緣物力之淸窶, 致闕先事之美豊.七八代二百年, 旣少祭田之選掌.五六里數四兆, 不遑齋舍之始營.供苾芬而易常, 輪行未穩.値風雨之不測, 駿奔無儀.何幸先靈之冥扶, 乃獲門議之克協.惟玆松山之壟, 兼是桑梓之基.岡巒麓明, 挹勝形於斗、台諸嶽.道里均敵, 占中心於宮、達各塋.爰値干丙支寅, 維年遂胥, 枕亥面巳其宇.多寡稱吾有, 樂助力於宗財.巧拙隨其才, 親執勞於巨役.輸邊山之大木, 豈遜鄧林之良材.任近坊之梓人, 無待郢斤之高手.莫曰成不日也, 所謂盡其心焉.美奐美輪, 縱難擬於張禱.苟完苟合, 庶同符於荊居.取《思傳》而錫名, 瞻洋洋乎在上.摹朱筆而揭額, 驚煌煌焉若新.嗟爾衆工修樑之抛, 聽我六偉短詞之唱.抛樑東, 珍重尼、晦道在東.先祖當年仁里卜, 至今嘉號是滄東.抛樑南, 吾家家法豔三南.念修不出刑妻外, 請把《毛詩》讀〈二南〉.抛樑西, 席洞佳城暗拱西.春露秋霜年復歲, 幾多冠服每趨西.抛樑北, 風泉嗚咽漢之北.堪歎無地可移忠, 獨夜虛勞倚斗北.抛樑上, 精靈昭陟九天上.爾心不貳神應聽, 無曰高高徒在上.抛樑下, 泰山高處小天下.元來孝悌通神明, 達上須知自學下.伏願上樑之後, 百靈峻衛, 萬祥鼎臻.安得不昌, 罔專崔山南門戶.勿替引之, 永傳周〈楚茨〉烝嘗. 이승재 부안 석동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승냥이와……제사 지냄 《예기(禮記)》에, "1월에는 수달이 고기를 제사지내고, 9월에는 승냥이가 짐승을 제사지낸다.[孟春之月獺祭魚季秋之月豺祭獸]" 하였다. 새가 나는 듯한 재실 '비혁(飛革)'을 풀이한 말인데, 춘추 시대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무너진 궁실을 다시 짓고 낙성을 알리니, 사람들이 송축하여 읊기를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으며,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으니, 군자가 올라가서 정사를 다스릴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詩經 斯干》 치재하고서……제사지내네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재(散齋)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하면서 밖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고, 다음에 치재(致齋)하여 목욕재계하고 오직 제사만 생각하는 것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이 계신 듯이 하였고, 신을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였다. 포옹(浦翁) 지포(止浦) 김구(金坵)로 고려 원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계노 후창의 11대조 죽계(竹溪) 김횡(金鋐)을 가리킨다. 자는 여기(汝器)이다. 부풍 부안(扶安)의 옛 지명이다. 영주 정읍 고부의 옛 지명이다. 보배로운……아니네 《주례》 〈고공기(考工記)〉에서 "귤이 회수를 넘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들은 영주를 건넜지만 탱자처럼 변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송산 정읍 칠보면 송산을 가리킨다. 선조의 터전 '상재(桑梓)'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가리키는데, 《시경》〈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 뵐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고 하여 고향을 의미한다. 궁사리와 달전리 궁사리는 정읍 태인에 있는 마을이며 달전리는 덕천면에 있는 마을이다. 터를 잡았으니 《시경》 〈대아(大雅) 면(綿)〉에서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니, 이에 강씨 부인과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한 데서 온 말이다. 등림(鄧林) 전설상의 숲이다. 옛날에 과부(夸父)가 해를 쫓아 달려서 해가 들어가려 할 즈음에 목이 말라 하수(河水)와 위수(渭水)를 마셨는데도 부족하여 대택(大澤)의 물을 마시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목이 말라서 죽고, 버려진 그의 지팡이가 화(化)하여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 《山海經 卷8 海外北經》 영 땅의……고수 《장자》 〈서무귀(徐无鬼)〉에서 "영 지방 사람이 코끝에 백토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것을 깎아 내게 하였다. 그러자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 내기 시작하였는데, 백토를 다 깎았는데도 코를 다치게 하지 않았고 그 영 지방 사람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라 하였다. 아름답고……축하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무(趙武)가 저택을 준공했을 때 다른 대부들이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는데,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규모가 큼이여. 아름답도다, 꾸밈이 화려함이여. 제사(祭祀) 때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는 여기에서 곡읍(哭泣)을 하고, 연례(宴禮)에는 여기에 국빈(國賓)과 종족(宗族)을 모으게 될 것이다."라고 송축(頌祝)의 말을 하자, 주인인 조무가 답사(答辭)에서 "무(武)가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곡(哭)하고, 여기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서 연례를 할 수 있다면, 이는 내 목숨을 온전히 누린 다음 선대부(先大夫)가 묻힌 구원(九原)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북면(北面)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군자(君子)가 이 일을 두고 평론하기를 "장로는 송축하는 말을 잘했고, 조무는 기도하는 말을 잘했다.[善頌善禱]"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원래 장로는 송축을 잘하고 조무는 기도를 잘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뒤바꿔 사용하였다. 그런대로……부합하는도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여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잘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자사의……보리라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전한 책이라고 한다. 《중용》에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깨끗이 재계하고 의복을 성대히 입고 제사를 받들게 하면, 신명이 충만하여 마치 위에 있는 듯하기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하기도 하느니라.[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 하였다. 창동(滄東) 동쪽의 창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주자는 만년에 창주정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그 외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추모하여 덕을 닦음이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하였다. 아내의 모범 《시경》 〈사제(思齊)〉에서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그 덕이 미쳐서,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하였다. 석동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을 가리킨다. 봄 이슬 가을 서리 《예기》 〈제의(祭義)〉에서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있게 되니, 이는 추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에 젖으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서 반드시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되니,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하였다. 바람과 강물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충성으로 옮길 곳 효심을 충성심으로 바꿔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효경》 〈광양명장(廣揚名章)〉의 "군자는 어버이를 모시는 효심이 깊기 때문에, 그 효심을 임금에게 바꿔 적용하여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태산에……보이누나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최산남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끊임없이 이어가서 《시경》 〈소아(小雅) 초자(楚茨)〉에 "심히 순하고 심히 때에 맞아 극진하였으니 자자손손 중단하지 않고 길이 이어 나가리라.〔孔惠孔時 維其盡之 子子孫孫 勿替引之〕"라고 하였다. 〈초자〉의 증제사, 상제사 《시경》 〈소아(小雅) 초자(楚茨)〉에서 "너의 소와 양을 정갈히 마련하여 나아가 증(烝) 제사를 지내며 상(嘗) 제사를 지내니〔絜爾牛羊 以往烝嘗〕"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주 최씨 종회각 상량문【무인년(1938)】 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戊寅】 삼가 생각하건대, 종족을 모으는 것이 조상을 높이는 의리라 여겨 竊以收宗族爲尊祖之義그 예를 만든 것은 선왕이며, 制其禮者先王상재를 공경하여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을 내어 敬桑梓出思親之心시를 지은 이는 효자로다.417) 作此詩者孝子이런 까닭으로 문자가 크고 화려한 건물을 완공한 것은 是故文子之能成輪奐室실제는 종족을 모으려는 의도였으며,418) 實爲聚族之謀평천장의 꽃과 바위를 지키지 못하면 若乃平泉之未保花石庄선조를 계승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있으리.419) 有愧述先之事옛 사람의 득실을 살펴보면 觀古人之得失지금의 향배를 알 수 있으리라. 知今日之從違삼가 생각건대 최씨는 恭惟崔氏전주에 관향을 두어 籍自全州좌해에 명망이 드높았어라. 望著左海벼슬아치가 대를 이어 무리로 나오고 承簪纓而輩出현달하여 마침내 큰 가문이 되었네. 賢達遂爲華門자손이 번창하여 사방에 흩어져 거처하니 繁雲仍而散居영남, 호남에서 대성(大姓)이라 일컬어지네. 嶺湖亦稱大姓이곳 동촌리 유지는 惟玆東村里遺址일찍이 중랑장420)이 처음 거처하였지. 曾是中郞將始居종대는 마을 이름으로 불리우며 宗垈稱爲洞名많은 사람들이 전설을 이야기하니 萬口傳說어릴 때 사마광과 비슷하네.421) 有同兒童之君實옛 집을 그대로 종회각으로 만들었는데 舊廬因作會閣한 마음으로 아끼고 보호하니 一心愛護어찌 소백의 감당422)만 못하겠는가. 奚啻召伯之甘棠산천은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니 山川供麗明형국의 신령한 기운이 다하지 않았고, 全局之靈運不盡초목에 정채로움이 남아 있으니 草木留精彩그 당시의 풍운이 아직도 존재하누나. 當日之風韻尙存거리가 적당하니 道里適切이미 가문의 일에 왕래하기에 편하며, 旣便門事之來往묘소가 멀지 않으니 丘壟不遠또한 재계하여 시제 지내기도 좋아라. 亦可歲祀之齊明다만 당우가 세월이 오래되어 只緣堂宇之積年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은 걱정이 되누나. 或虞風雨之有日지금까지 계속 보수하였으나 嗣葺旣事죽루의 썩지 않는 공을 거두기 어려워서,423) 難收竹樓不朽之功기꺼이 지을 것을 거듭 도모하니 肯構重謀어찌 〈대고〉의 후손이 있다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인가.424) 盍遵大誥有後之訓길한 점을 얻어 위는 대들보 아래는 서까래 나란하니425) 得吉占上棟下宇사람과 거북점이 모두 따르네. 人龜俱從다섯 도리〔架〕426) 네 기둥의 집을 지으며 建築舍五架四楹회랑과 창고도 갖추었어라. 廊庫亦具당장 해야 할 급한 일이니 事在當下之急務애당초 이전 공보다 잘 됨을 구하지 말아야 하네. 初非求多前功여러 사람들이 의연금을 내어 사용하니 費出各人之義捐종가의 재물을 부러워할 필요 없네. 幷不有羡宗物저 도끼질과 저 톱질은 斧彼鉅彼모두 대목장의 지시를 듣고, 咸聽都匠指揮공사를 시작하면서 經之營之한 가문의 계획대로 결정하였도다. 共決一門計劃이른바 오래 되지 않고 완성하니 所謂成之不日어찌 하늘로부터 도운 것이 아니랴. 豈非佑之自天이에 주자의 《강목》처럼 乃以紫陽綱目일을 기록할 때 해를 앞세웠으며,427) 記事之首年왕희지의 난정처럼 右軍蘭亭좋은 날을 골라 모임을 열었도다.428) 修褉之良日조심스레 긴 들보를 허공에 올리는데 謹上修樑半空기다란 무지개가 떠있나 의심했고, 疑長虹之掛평지에 이목을 집중시키니 聳動觀聽平地채색의 꿩이 날아오른 듯하여429) 見彩翬之飛골짜기가 빛이 나네. 光輝洞壑낙성식의 연회가 곧 열리리니 宴將設於成落제비가 축하하러 처마에 찾아오며,430) 燕賀來簷화목한 가운데 강론할 장소가 있나니 講有所於睦和큰 복이 집안에 넘치리라. 鴻福呈戶아! 그대 여러 목공들 일을 잠시 멈추고 嗟爾暫輟衆工之役내가 목청껏 부르는 여섯 아랑위 노래를 들어보게나. 聽我高唱六偉之歌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높은 한벽당431)에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어라. 寒碧高堂聞國中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432) 무한한 흥취로니 魚躍鳶飛無限趣지금도 옥동433)에는 맑은 바람이 부네. 至今玉洞有淸風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울창한 완산에 청람(晴嵐)434) 흩어졌구나. 完山鬱鬱罷晴嵐맑은 기운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자니 試看淑氣有如許앞뒤로 기운 모아 태어난 준걸이 몇이던가. 前後鍾生幾傑男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구미의 풍조를 누가 막을 것인가. 歐美風潮孰障堤전배들은 이제 구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前輩無由九原作지금 세상의 도에 탄식만 이는도다. 如今世道堪歎兮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주덕산435)의 푸른 봉우리 경치는 바뀌지 않구나. 周德靑巒不改色무덤에 서리와 이슬은 해마다 내리는데 霜露佳城年復年흐릿하게 조상을 본 듯하여 마음이 놀라네.436) 僾然如見其心惕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상천이 응당 도를 없어지게 하지 않으리라. 上天應不道終喪마땅히 자제는 유학의 글을 읽어야 하니 端宜子弟讀斯文부지런히 부지런히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리라. 好著孜孜自勉强어영차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출렁출렁 남천437)은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滾滾南川流不舍사람 일이나 사물의 실정이나 이치가 다르지 않으니 人事物情無二致근원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이와 같다네. 有源皆是如斯者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기둥과 서까래가 오래토록 튼튼하며 楹桷長固종친438)들은 더욱 친하길. 花樹愈親참으로 참을 수 있다면 苟能忍之어찌 장공예처럼 백 번 쓸 필요가 있겠는가.439) 何待公藝百字형제간에 서로 좋아하여 式相好矣〈사간〉의 수장처럼 지내시라.440) 自有斯干首章 竊以收宗族爲尊祖之義, 制其禮者先王.敬桑梓出思親之心, 作此詩者孝子.是故文子之能成輪奐室, 實爲聚族之謀.若乃平泉之未保花石庄, 有愧述先之事.觀古人之得失, 知今日之從違.恭惟崔氏, 籍自全州, 望著左海.承簪纓而輩出, 賢達遂爲華門.繁雲仍而散居, 嶺、湖亦稱大姓.惟玆東村里遺址, 曾是中郞將始居.宗垈稱爲洞名, 萬口傳說, 有同兒童之君實.舊廬因作會閣, 一心愛護, 奚啻召伯之甘棠.山川供麗明, 全局之靈運不盡.草木留精彩, 當日之風韻尙存.道里適切, 旣便門事之來往.丘壟不遠, 亦可歲祀之齊明.只緣堂宇之積年, 或虞風雨之有日.嗣葺旣事, 難收竹樓不朽之功.肯構重謀, 盍遵〈大誥〉有後之訓.得吉占上棟下宇, 人龜俱從.建築舍五架四楹, 廊庫亦具.事在當下之急務, 初非求多前功.費出各人之義捐, 幷不有羡宗物.斧彼鉅彼, 咸聽都匠指揮.經之營之, 共決一門計劃.所謂成之不日, 豈非佑之自天.乃以紫陽《綱目》記, 事之首年.右軍蘭亭, 修褉之良日.謹上修樑半空, 疑長虹之掛.聳動觀聽平地, 見彩翬之飛.光輝洞壑, 宴將設於成落, 燕賀來簷.講有所於睦和, 鴻福呈戶.嗟爾暫輟衆工之役, 聽我高唱六偉之歌.兒郞偉抛樑東, 寒碧高堂聞國中.魚躍鳶飛無限趣, 至今玉洞有淸風.兒郞偉抛樑南, 完山鬱鬱罷晴嵐.試看淑氣有如許, 前後鍾生幾傑男.兒郞偉抛樑西, 歐美風潮孰障堤.前輩無由九原作, 如今世道堪歎兮.兒郞偉抛樑北, 周德靑巒不改色.霜露佳城年復年, 僾然如見其心惕.兒郞偉抛樑上, 上天應不道終喪.端宜子弟讀斯文, 好著孜孜自勉强.兒郞偉抛樑下, 滾滾南川流不舍.人事物情無二致, 有源皆是如斯者.伏願上樑之後, 楹桷長固, 花樹愈親.苟能忍之, 何待公藝百字.式相好矣, 自有〈斯干〉首章. 상재(桑梓)를……효자라네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문자가……의도였으며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평천장의……있으리 평천장은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중랑장 고려 충정왕 때 중랑장을 지낸 최용봉(崔龍鳳)이다. 어릴 때 사마광과 비슷하네 군실(君實)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字)가 이다. 그가 어렸을 때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물을 담아 놓은 큰 항아리에 빠지자, 딴 아이들은 놀라 도망했으나 사마광은 돌로 항아리를 깨뜨려 살게 한 일이 있다. 소백의 감당 감당은 《시경》 〈소남(召南)〉의 편명이다.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 희석(姬奭)이 서백(西伯)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감당 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어려워서 왕우칭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의 마지막 부분의 "계속해서 지붕을 이어준다면 아마도 이 죽루가 썩지 않을 것이다.[嗣而葺之 庶斯樓之不朽也]"는 말에서 온 것이다. 기꺼이……않을 것인가 선대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을 잘 이어 나가기를 힘썼다는 뜻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 그 아버지가 밭을 일구었거늘, 그 자식이 기꺼이 파종도 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수확하려 하겠는가. 고익이 기꺼이 '내 후손이 있으니 기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 厥父菑 厥子乃弗肯播 矧肯穫 厥考翼 其肯曰 予有後 弗棄基〕"라 하였다. 고익(考翼))은 《서경집전(書經集傳)》에 "고익(考翼)은 부로가 공경히 섬기는 자들이다."라 하였다. 길한……나란하니 앞의 〈여충사유지강당중건상량문(旌忠祠遺址講堂重建上樑文)〉에 보인다. 다섯 도리〔架〕 다섯 개의 도리로 이루어진 집을 말한다. 다섯 개의 도리는 후기(後庋), 후미(後楣), 동(棟), 전미(前楣), 전기(前庋)를 말하는데, 이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방(房)과 실(室)과 당(堂)이 구분된다. 주자의……앞세웠으며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대개 세(歲)를 표기하여 년(年)을 먼저하고."라고 하였다. 세(歲)는 간지(干支)를 가리키고 년(年)은 모왕모년(某王某年) 또는 모년(某年)을 가리킨다. 《자치통감강목》의 맨 처음에는 "戊寅 周威烈王二十三年"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해는 "己卯 二十四年", "庚辰 安王元年"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왕희지의……열었도다 '우군(右軍)'은 우군장군을 지낸 왕희지(王羲之)이다. 〈난정기(蘭亭記)〉의 서문을 지으면서 "이 날에 하늘은 맑고 기운은 청명하여 온화한 바람이 화창했다."라고 하였다. 채색의……듯하여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제비가……찾아오며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큰 집이 완성되면 제비와 참새가 깃들 곳이 생겨 서로 축하한다.[大廈成而燕雀相賀]"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한벽당 전주 최씨 시조 문성공 최아(崔阿)로부터 4대손인 최담(崔霮)이 전주에 낙향하여 지은 별장이다. 물고기……나니 천지(天地)의 도(道)가 밝게 유행(流行)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였으니, 천지의 도가 위아래에 밝게 드러난 것을 말한 것이다.[詩云鳶飛戾天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옥동 전주 완산구 환벽당 서쪽 일대가 옥류동으로 불리었다. 청람 맑은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주덕산 완주 소양면 주덕산을 가리킨다. 무덤에……놀라네 《예기》 〈제의(祭義)〉에 보이는 말로,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남천 전주를 가로지르는 전주천을 가리킨다. 종친 당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시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서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려.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참으로……있겠는가 장공예(張公藝)의 고사는 앞의 〈전주최씨숙사재중건상량문(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에 보인다. 형제간에……지내시라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은 새로 집 지어 낙성(落成)할 때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그 집에 거처하는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게 잘 살기를 축원한 노래인데, 그 시에 "질펀히 흐르는 물가요, 그윽한 남산이로다. 대나무가 떨기로 난 듯하고, 소나무가 무성한 듯하도다. 형과 아우 다 모여서, 서로 잔 권하며 좋아하고, 서로 딴마음 없으리로다.〔秩秩斯干 幽幽南山 如竹苞矣 如松茂矣 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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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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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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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조씨 부용재 상량문【정축년(1937)】 金堤趙氏孚用齋上樑文【丁丑】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니 乃孚用禴《주역》 〈췌괘〉 육이의 효사를 취한 것이라네.441) 取易萃二爻之辭이에 〈사간〉처럼 爰處斯干서남쪽에 백도나 되는 담장을 보노라.442) 見西南百堵之築분명코 근본에 보답하는 예를 치를 것이니 必有事報本之禮참으로 조상이 계신 듯한 재계를 극진히 하리라.443) 亶爲致如在之齊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고을의 조씨는 竊惟吾鄕之趙氏벽성444)의 세가이며 碧城世家청구의 오랜 가문이다. 靑丘古族문량공445)은 크게 현달하여 文良大顯당시에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 固冠冕乎當時남쪽 영주로 이사하였으니 瀛州南遷또한 가업을 계승한 후손이라네.446) 亦箕裘乎後裔저 여러 대 늘어선 무덤을 보니 睠彼累世之列兆만 년 가는 가성인 줄 알겠네. 認是萬年之佳城봄, 가을로 성묘하니 瞻掃春秋비와 서리의 감회가 얼마나 많은가.447) 幾多雨霜之感소와 목으로 차례대로 모여 있으니448) 會序昭穆더욱 화수의 기쁨449)이 있구나. 更有花樹之歡진씨가 어버이를 그리는 정자를 지었으니450) 甄氏作思親之亭마음은 그 옛날과 같고, 情同千古문자가 친족을 모을 집을 만들었으니451) 文子成聚族之室지금의 급선무라네. 務急當今종친의 사람들이 힘을 합치니452) 肆同人于宗곧 〈대장〉의 상사(象辭)라네.453) 卽大壯之以象백 년 동안 공을 들여 기른 송백이 養百年積功之松柏참으로 오늘을 위해 재목으로 쓰기에 적합하고, 正爲此日適合於用材완벽하게 길한 터를 잡으니 占十全純吉之址基전부터 미리 비밀스럽게 보관하여 일이 있기를 기다린 듯. 有若前期藏秘而待事돈으로 돕고 몸으로 일을 하며 金以助身以役많은 자손이 기꺼이 달려왔도다. 衆孫樂趨졸렬한 이는 힘을 쓰고 뛰어난 이는 머리를 쓰며 拙用力巧用心여러 장인이 참으로 고생하였어라. 羣工良苦이른바 얼마 걸리지 않고 완성하니 所謂成之不日어찌 하늘로부터 도움이 아니랴. 豈非佑之自天웅장하고 화려하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則高則華저 제운루를 어찌 취할 것인가.454) 彼齊雲之奚所取이에 그런대로 갖추고 그런대로 아름다우니 是爲苟完苟美위나라 형(荊)처럼 칭송을 받으리라.455) 乃衛室之曾見稱얼마나 많이 마음속으로 경영하였는가 幾多心上之經營비로소 평소 정성된 효도에 부합하네. 始副平日誠孝비로소 눈앞에 우뚝 솟음을 보게 되매 始見眼前之突兀다투어 사방에서 축하하는 글을 바치누나. 爭獻四方賀章달력을 펼치니 달과 날이 이미 좋은데 鳳曆披而月日旣良무지개 들보가 걸리니 노래를 뒤따라 부르노라. 虹樑掛而歌頌隨昌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좌해는 본래 유학의 도가 높다고 일컬어졌네. 左海素稱吾道崇예제는 원래 전현의 가르침에서 나오니 禮制原從前哲敎그 유풍을 오늘 이곳에서 보노라. 遺風今日見斯中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무수한 필봉이 뾰쪽뾰쪽 늘어섰구나. 筆峰無數列尖尖지령과 천운이 서로 부합하는 날이니 地靈天運相符日그 기(氣)로 문장이 뛰어난 남아를 얼마나 배출하려나. 鍾出文章幾箇男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천 길 천태산456)은 하늘과 나란하여라. 天台千仞與天齊높은 행실에 갖춘 학문은 하학을 말미암았으니 行高有術宜由下누가 상달에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 하는가. 上達誰言不可梯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넘실거리는 벽골은 30리 떨어져 있어라. 碧骨迢迢一舍隔신전으로 언제나 독룡을 섬멸할까457) 神箭何年殲毒龍거센 바람458)은 백 대에도 멈추지 않네. 雄風百世未能息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밝고 밝은 상제를 머리에 이고 우러르네. 上帝明明頭戴仰선조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날마다 그 곁에 있으니 陟降先靈日在傍남긴 존체(尊體)에 대한 공경을 어찌 소홀히 하랴. 敬行遺體豈宜放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증손이 농사짓는 밭에 해마다 풍년이 드는구나.459) 有田歲熟曾孫稼제사 지내기 편하게 마침 재실이 완성되니 利成祀事適成齋낙성의 잔치에 술잔이 넘쳐도 무방하리. 宴落不妨因餕斝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삼광460)이 비춰주며 三光照應온갖 신령들이 보호해 주기를. 百神護持지켜서 영원히 전하리니 守而永傳어찌 이덕유의 평천장 경계461)를 기다리랴. 何待李氏平泉之戒끊임없이 이어가야 하니 引之勿替절로 주나라 〈초자〉의 시에 그 내용이 있어라.462) 自有周人楚茨之詩 乃孚用禴, 取《易》〈萃〉二爻之辭.爰處〈斯干〉, 見西南百堵之築.必有事報本之禮, 亶爲致如在之齊.竊惟吾鄕之趙氏, 碧城世家, 靑丘古族.文良大顯, 固冠冕乎當時.瀛州南遷, 亦箕裘乎後裔.睠彼累世之列兆, 認是萬年之佳城.瞻掃春秋, 幾多雨霜之感.會序昭穆, 更有花樹之歡.甄氏作思親之亭, 情同千古.文子成聚族之室, 務急當今.肆同人于宗, 卽〈大壯〉之以象.養百年積功之松柏, 正爲此日適合於用材.占十全純吉之址基, 有若前期藏秘而待事.金以助身以役, 衆孫樂趨.拙用力巧用心, 羣工良苦.所謂成之不日, 豈非佑之自天.莫曰則高則華, 彼齊雲之奚所取.是爲苟完苟美, 乃衛室之曾見稱.幾多心上之經營, 始副平日誠孝.始見眼前之突兀, 爭獻四方賀章.鳳曆披而月日旣良, 虹樑掛而歌頌隨唱.抛樑東, 左海素稱吾道崇.禮制原從前哲敎, 遺風今日見斯中.抛樑南, 筆峰無數列尖尖.地靈天運相符日, 鍾出文章幾箇男.抛樑西, 天台千仞與天齊.行高有術宜由下, 上達誰言不可梯.抛樑北, 碧骨迢迢一舍隔.神箭何年殲毒龍, 雄風百世未能息.抛樑上, 上帝明明頭戴仰.陟降先靈日在傍, 敬行遺體豈宜放.抛樑下, 有田歲熟曾孫稼.利成祀事適成齋, 宴落不妨因餕斝.伏願上樑之後, 三光照應, 百神護持.守而永傳, 何待李氏平泉之戒.引之勿替, 自有周人〈楚茨〉之詩. 정성스럽게……것이러네 《주역》 〈췌괘(萃卦) 육이(六二)〉에 "정성이 있어야 약(禴)을 씀이 이롭다.〔孚乃利用禴.〕"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주에 "약(禴)은 제사함에 간략하고 박하게 하는 것이니, 박하게 제사하여 물건을 갖춤을 숭상하지 않고 다만 성의(誠意)로써 신명과 사귀는 것이다." 하였다. 《伊川易傳 卷3》 〈사간〉처럼……보노라 《시경》 〈사간(斯干)〉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는 하였다. 1장(丈)이 1판(板)이 되고, 5판(板)이 1도(堵)가 된다. 조상이……지극히 하리라 《논어》 〈팔일(八佾)〉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이 계신 듯이 하였고, 신을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였다. 벽성 김제의 옛 지명이다. 문량공 조간(趙簡)으로, 충렬왕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에 검교첨의평리,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업을 계승한 후손이라네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봄, 가을로……많은가 《예기》 〈제의(祭義)〉에 보이는 말로,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소와……있으니 무덤 배열 방식에 소목장(昭穆葬)이 있다. 중앙을 시조로 하여, 2세 ‧4세 ‧6세는 왼쪽으로 세워 소(昭)라고 하고, 3세 ‧5세 ‧7세는 오른쪽으로 세워 목(穆)이라고 한다. 화수의 기쁨 앞의 〈전주최씨종회각상량문(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에 보인다. 진씨가‥‥지었으니 앞의 〈전주최씨숙사재중건상량문(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文)〉에 보인다. 문자가……만들었으니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종친의……합치니 이 말은 《주역》 〈동인괘〉 육이의 "남과 함께 하기를 종족끼리 하니 비린(鄙吝)한 방도이다.[同人于宗 吝]"라 하여 부정적으로 이해하였는데, 여기서는 집안 친척끼리 힘을 합쳐 부용재를 건립함을 이른다. 〈대장〉 상사(象辭)라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후세 성인이 궁실로 바꾸어서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풍우에 대비하였으니, 대장괘에서 취한 것이다.〔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라고 한 말에서 뜻을 취하였다. 웅장하고……취할 것인가 제운루는 당나라의 조공왕(曹恭王)이 세운 누각으로,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자성(子城)의 위쪽에 있다. 왕우칭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에, "제운과 낙성이 높기야 높다.[齊雲落星高則高矣]"라고 하였다. 그런대로……받으리라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천태산 정읍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천태산을 가리킨다. 신전으로……섬멸할까 세 발의 화살로 돌궐을 진압한 설인귀(薛仁貴)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독룡 즉 왜놈을 무찌르는 비유로 사용되었다. 거센 바람 웅풍(雄風)은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보인다.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부리자 송옥이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여 풍간하였는데, 후대에 내려와서는 제왕에 대한 송가(頌歌)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증손이……드는구나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 이덕유의 평천장 경계 평천장은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끊임없이……있어라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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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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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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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승재 이건 상량문【갑신년(1944)】 以承齋移建上梁文【甲申】 삼가 생각하건대 묘부직인 총인은 《주례》에 실려 있으니463) 竊以載冡人墓夫職於周禮그 법은 선왕에서 나왔으며, 法規自先王하늘의 곧은 우레는 후회가 없다는 상은 《주역》에서 취하였으니464) 取天貞雷悔象於羲經동우가 이전 제도를 회복하였어라. 棟宇復前制치제465)에 어찌 장소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致齊豈無所也공사를 마치니 어찌 그리 다행한가. 訖功何其幸歟생각건대 우리 김씨의 창동 이승재는 惟我金氏之滄東以承齋위치가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位置則在一偏지와공과 통덕랑 때문에 충의위를 배향하니466) 均爲止窩公通德配忠義병사467)의 제도를 따랐건만, 祖之丙舍制度끝내 그런대로 아름답지 않으니 終不苟美실로 장계파와 관계된 일이라네.468) 實繫長季派두세 군의 반인 二三郡半백 가구의 공의(公議)가 일었어라. 百戶之公存창설은 옛날 병인년 겨울이었는데 創造在昔丙寅冬지금 갑신년까지 유지하였더니, 維持到今甲申歲어찌 세월이 흘러 변고가 발생하여 夫何時移事變갑자기 일겁의 상전벽해를 만나게 되었구나. 遽遭一劫之滄桑이는 실로 점괘에 어긋나 성인도 알 수 없는 것으로 是實筮違聖迷다섯 가지 근심469) 중에 물길이 됨은 헤아리기 어려웠어라. 難料五患之溝道기산으로 가서 이주하였듯470) 之岐山而遷徙어쩔 수 없으니, 不得已焉초구471)로 정하여 경영하니 卜楚丘而經營참으로 끝을 잘 마무리하였도다. 允臧終矣그 땅도 또한 이 산 안에 있으며 其地亦此山之內그 공은 즉 얼마 걸리지 않았어라. 厥功卽不日之間기와와 재목은 아직까지 온전하니 瓦材尙全비용은 절약되어 비록 이전 장부를 그대로 쓰는 것과 같지만,472) 費省雖同長府之舊貫정밀한 물건이 대단히 귀하니 物精極貴일이 커서 종묘를 새로 짓는 것에 뒤지지 않네. 役鉅不下悶宮之新成힘을 다 쏟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데 力殫而心勞시국이 어렵고 가문의 운이 막혔다고 말하지 마라. 莫謂時局艱門運否의견이 일치되어 일이 완성되니 議協而事濟또한 하늘의 신령과 선조의 영혼이 도왔도다. 亦見天神佑先靈扶지난번 갑신년 술월(戌月) 粤以涒灘閹茂之年月미일(未日) 오시(午時)에, 協洽敦牂之日時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리니 竪柱上梁허공에 무지개가 걸리고 용이 날아오르는 듯 虹掛龍騰於半空이십 년 만에 다시 장관을 보며, 再覩壯觀於卄載백 척 높이로 새가 솟아오르고 꿩이 날 듯473) 鳥革翬飛於百尺같은 재목에 빛이 남을 거듭 보네. 重瞻生色於一材이에 여섯 아랑위 노래를 외쳐서 肆颺六偉之章여러 장인의 흥을 돋우노라. 庸助衆匠之興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정토의 동쪽에 가을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는구나. 秋月圓升淨土東물가 가까운 누대에 먼저 달빛 비추니 近水樓臺先得照이전처럼 밤바다 창동에도 비춰주기리라. 依前夜夜入滄東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높디높은 두승산은 저 남쪽에 깎아지른 듯하네. 斗嶽嶄嶄截彼南인자는 산을 좋아하였는데 어찌 수를 누리지 못하였나 仁者樂山那無壽남쪽의 노인성474)을 밤에 바라볼 필요가 없겠구나. 不須夜看老星南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성인의 경전은 그 당시 서쪽 중국에서 왔다네. 聖經當日自中西제사를 받든다는 밝은 가르침475) 분명한데 以承祭祀明明訓어찌 감히 동쪽으로 와서 다시 서쪽으로 가겠는가. 豈敢來東復倒西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만 리의 이내와 먼지 멀리 북쪽에서 피어나는구나. 萬里烟塵遠直北천에 하나 황하가 맑을 때가 있겠지만476) 千一河淸行有期시인이 이미 〈북풍〉477)을 지었다네. 詩人且己賦風北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모름지기 오묘한 도가 형이상임을 알아야 하네. 要知道妙形而上천도를 깨닫는 것은 참으로 인륜을 배움에 있나니 達天亶在學人倫자제는 효성과 공경에 마음을 두어야 하리. 子弟存心孝悌上어영차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넘실거리는 긴 시내가 그 아래를 감싸도네. 長川滾滾繞其下복의 근원 쉬지 않아 또한 이와 같으니 福源不息亦如斯지란과 옥수478)는 연이어 나와 슬하에 가득하리라. 蘭玉承承滿膝下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기둥과 서까래가 더욱 견고하고 楹桶彌堅향기로운 제수는 더욱 정결하길. 苾芬益潔위씨 정원의 화수처럼 韋園花樹장차 천백 대 영원히 전하기를 기약하며,479) 將期千百世永傳주나라 구릉의 무성한 쑥마냥480) 周陵菁莪열두어 무리가 연달아 배출됨을 볼 것이라. 庶見十數輩連出 竊以載冡人墓夫職於《周禮》, 法規自先王.取天貞雷悔象於《羲經》, 棟宇復前制.致齊豈無所也, 訖功何其幸歟.惟我金氏之滄東以承齋, 位置則在一偏.均爲止窩公、通德配忠義, 祖之丙舍制度.終不苟美, 實繫長季派.二三郡半, 百戶之公存.創造在昔丙寅冬, 維持到今甲申歲.夫何時移事變, 遽遭一劫之滄桑.是實筮違聖迷, 難料五患之溝道.之岐山而遷徙, 不得已焉.卜楚丘而經營, 允臧終矣.其地亦此山之內, 厥功卽不日之間.瓦材尙全, 費省雖同長府之舊貫.物精極貴, 役鉅不下悶宮之新成.力殫而心勞, 莫謂時局艱門運否.議協而事濟, 亦見天神佑先靈扶.粤以涒灘閹茂之年月, 協洽敦牂之日時.竪柱上梁, 虹掛龍騰於半空, 再覩壯觀於卄載.鳥革翬飛於百尺, 重瞻生色於一材.肆颺六偉之章, 庸助衆匠之興.兒郞偉抛樑東, 秋月圓升淨土東.近水樓臺先得照, 依前夜夜入滄東.兒郞偉抛樑南, 斗嶽嶄嶄截彼南.仁者樂山那無壽, 不須夜看老星南.兒郞偉抛樑西, 聖經當日自中西.以承祭祀明明訓, 豈敢來東復倒西.兒郞偉抛樑北, 萬里烟塵遠直北.千一河淸行有期, 詩人且己賦〈風北〉.兒郞偉抛樑上, 要知道妙形而上.達天亶在學人倫, 子弟存心孝悌上.兒郞偉抛樑下, 長川滾滾繞其下.福源不息亦如斯, 蘭玉承承滿膝下.伏願上樑之後, 楹桶彌堅, 苾芬益潔.韋園花樹, 將期千百世永傳.周陵菁莪, 庶見十數輩連出. 묘부직인……있으니 《주레(周禮)》 〈춘관(春官) · 총인(冢人)〉에 실려 있다. 하늘의……취하였으니 〈대장(大壯)〉괘 효사의 전체적인 내용을 아울러서 표현한 것이다. 〈대장〉은 상량문에서 천둥소리처럼 웅장한 건물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치재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재(散齋)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하면서 밖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고, 다음에 치재(致齋)하여 목욕재계하고 오직 제사만 생각한다. 지와공과…배향하니 지와공은 후창의 9대조인 숙(潚)의 호이다. 후창의 10대조인 정길(鼎吉)의 차자인 숙과 막내인 택(澤)의 자제들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충의위는 후창의 7대조인 욱(奧)을 가리킨다. 병사(丙舍) 묘지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실로……일이라네 정길의 차자인 지와공 계열만 배향하고 장자(長子)와 계자(季子) 계열은 배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가지 근심 묘지를 쓸 때 꺼리는 다섯 가지 경우로, 뒷날 도로가 될 곳, 성곽이 될 곳, 도랑이나 못이 될 곳, 세력가에게 빼앗기게 될 곳, 농지가 될 곳을 말한다. 《近思錄 卷9 治法11》 기산으로 가서 이주하였듯 《맹자》에 "태왕이 빈(邠) 땅에 거주할 때 적인(狄人)이 침입하자 그곳을 떠나 기산의 아래로 가서 거처하였다."는 말에서 나왔다. 초구 적(狄)의 침입으로 위나라가 멸망하자, 제 환공(齊桓公)이 적을 정벌하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은 다음 위나라를 다시 세우고 문공을 임금으로 세워 주었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정읍의 옛 이름이 초산(楚山)이다. 여기서는 이 둘을 중의적으로 사용하여 옮겨간 재각을 정읍에 정한 것을 나타내었다. 이전……같지만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하였다. 새가…날 듯 《시경》 〈사간(斯干)〉에서 집을 새로 지어 낙성식의 잔치를 벌이며 송축하면서 "새가 날아가듯 하며, 꿩이 나래 친 듯하니, 군자가 오르는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하였다. 남노성 수명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남극성(南極星), 남극노인(南極老人)이라고도 한다. 나라가 태평하게 다스려지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추분(秋分) 무렵에 남쪽 교외에 나타난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천문지(天文志)〉 제사를……가르침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천에……있겠지만 하처(河淸)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준 말이다. 원래 황하는 본래 흐린 강이어서 맑아질 리가 없지만,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징응(徵應)〉, 《사문유취》 등에는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탄생한다."라고 하였다. 〈북풍〉 《시경》의 북풍(北風)은 백성들이 학정(虐政)을 피하여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면서 부른 노래이다. 지란과 옥수 지란옥수(芝蘭玉樹)는 훌륭한 자제들을 가리킨 말이다.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일찍이 여러 자질(子姪)들에게 어떤 자제(子弟)가 되고 싶으냐고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지란 옥수(芝蘭玉樹)가 뜰에 나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자제들을 비유한다. 위씨……기약하며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주나라……쑥이여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서 "무성하고 무성한 쑥이, 저 구릉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陵〕"라고 하였는데,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으로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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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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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둘째 아들 형태가 거처하는 집의 상량문【계유년(1933)】 次子烔泰居室上樑文【癸酉】 동우의 제도는 선왕에서 내려왔으니 棟宇制自先王어찌 둥지에 거처하고 굴속에 살까. 豈可巢居而穴處등급별 위엄은 사람 일에서 정해지니 等威定於人事달팽이 집이나 대궐 누각과 다르다네. 有異蝸廬與龍樓위나라 형(荊)이 맑은 마음으로 知衛子之淸心집에 잘 거처함을 알겠고,481) 善居乎室하후는 검소한 덕으로 見夏后之儉德허름하게 그 궁실을 지은 것을 보았노라.482) 卑作其宮부귀한 처지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在貴富而猶然빈천하게 살면서 어찌 화려함을 말하랴. 處貧賤而奚道후창거사 김택술은 後滄居士金澤述포의의 곤궁한 선비로 布衣寒士콩잎이나 먹는 가난한 사내라네. 藿食窶夫쑥대로 문을 내고 대나무로 문을 만드니 蓬戶蓽門비루한 마을에서 근심을 견디기 어려우며, 難堪憂於陋巷가지나 잎 같은 손자와 자손이 枝孫葉子외람되이 여러 아들들에게 많다네. 猥多口於諸房이미 지금 재산까지 떨어졌으니 旣乏現財장공예483)처럼 함께 살림할 수 없고, 計無公藝之共産각자 자신 힘대로 먹고 사니 各食其力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484)할 형편이라네. 勢將秦人之出分이에 둘째 아들 형태가 乃爲次子烔泰창동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築室于滄東之里능력이 넘쳐서가 아니라 非曰能之어쩔 수 없어서라네. 不得已也마을 안 작은 땅을 얻어 터로 삼았는데 得村中隙地爲址앞이 트이고 시원하니 氣像開朗마치 기다리는 듯하였어라. 有待如焉집안의 재주 좋은 이를 빌려 목공으로 삼으니 借門內巧手作工마음이 서로 기뻐하여 情意歡洽흠 잡을 데가 없었도다. 無間然矣목재는 대부분 선대의 산에서 나왔기에 材多出於先麓많은 돈을 쓰지 않았으며, 不費夥金사방 이웃들이 서로 일을 도와준 덕에 役相助於四隣더욱 힘을 줄일 수 있었도다. 更覺省力융희 27년 계유년 以隆熙二十七年癸酉10월 27일 갑인일 미시에 들보를 올리는데, 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겨울인데도 따뜻하고 온화하니 冬暖而若和煦아니 이것은 천지가 도운 것이 아닌가. 莫是天地之眷扶일이 다급한데도 제 때에 마치니 事遽而趁定期마치 신명이 도운 듯하여라. 如或神明之助佑이른바 얼마 걸리지 않아 완성한 것이니 是所謂成之不日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구나. 亦可曰事非偶然누가 세 가(架)가485)의 집을 비루하다 하는가 誰言三架之陋卑거처하는 곳이 무릎이나 들어갈까 하지만 所居不過容膝이미 장생의 경계하는 말을 들었네. 已聞張生之箴語어찌 다만 집이 크고 화려해야만 豈獨巨寢之輪奐이에 친족을 모으기를 乃得可以聚族반드시 진의 장로(張老)의 축송하는 말과 같으랴.486) 必如晉老之頌辭돌아보건대 곤궁한 인생길에 남은 생애는 顧窮途餘生자신의 분수를 헤아려 알맞게 처신하여야 하는데, 度身分而苟合더구나 망한 나라의 유민으로 况亡國遺庶의리를 헤아려보면 마음이 편치 않도다. 揆義理而未安이에 밭 갈고 길쌈하면서 爰處焉耕織다만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고 사누나. 但得喫著之不空이렇게 살면서 효도하고 자애로우며 是居而孝慈오직 윤리가 실추되지 않길 바라노라. 惟望倫常之勿墜길일을 점쳐서 吉日玆筮하찮은 소망을 써 보노라. 微願庸書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소중한 학문 연원은 회옹에서 나왔어라. 珍重淵源有晦翁인한 마을을 골라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487) 擇不處仁焉得智창동488)의 마을 이름은 뜻이 무궁하여라. 滄東里號意無窮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아득히 〈주남〉을 생각하며 〈갈담〉489)을 읊조리네. 遙想周南咏葛覃묻노니 집안에 무엇이 있는가 借問家中何所有뜰에 가득한 방초는 모두 의남490)이라네. 滿庭芳草總宜男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석동산 경치는 눈앞에 희미하네. 席洞山光望裏迷해마다 서쪽으로 성묘 가는 길에 歲歲西歸瞻掃路서리 밟고 슬퍼하며491) 글을 짓지 못하네. 履霜感愴不堪題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사방의 뭇 별 북극성을 향하누나. 四面群星拱北極한 집안의 정치492)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爲政一家當若斯요컨대 핵심은 내 덕을 쓰는데 있도다. 要知樞紐用吾德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상제가 밝게 임하니 누군들 우러르지 않으랴. 上帝明臨孰不仰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하여 마음을 둘로 하지 않을지니 夙夜孜孜毋貳心인을 실천함은 참으로 그 방심을 구하는데 있도다. 爲仁亶在求其放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곤궁하여 아래에 있으면 마땅히 들에서 밭 갈아야 하네. 窮而在下宜耕野만약 힘써 농사짓고 다른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苟能力穡無他求서자의 고풍493)이 어찌 다른 것이랴. 徐子高風豈別者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삼재494)가 들어오지 않으며 三災不入온갖 상서로움이 점차로 이르기를. 百祥漸臻자손이 시와 예를 익혀 변하지 않으며 子孫服詩禮而不渝짐승으로 변하는 새로운 풍조로 돌아가지 않기를. 無歸新風化獸之類가도와 세운이 모두 화태하여 家道與世運而俱泰높은 대문에 네 마리 수레495)를 볼 날이 있기를. 庶見高門容駟之時 棟宇制自先王, 豈可巢居而穴處.等威定於人事, 有異蝸廬與龍樓.知衛子之淸心, 善居乎室.見夏后之儉德, 卑作其宮.在貴富而猶然, 處貧賤而奚道.後滄居士金澤述, 布衣寒士, 藿食窶夫.蓬戶蓽門, 難堪憂於陋巷.枝孫葉子, 猥多口於諸房.旣乏現財, 計無公藝之共産.各食其力, 勢將秦人之出分.乃爲次子烔泰, 築室于滄東之里, 非曰能之, 不得已也.得村中隙地爲址, 氣像開朗, 有待如焉.借門內巧手作工, 情意歡洽, 無間然矣.材多出於先麓, 不費夥金.役相助於四隣, 更覺省力.以隆熙二十七年癸酉, 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冬暖而若和煦, 莫是天地之眷扶.事遽而趁定期, 如或神明之助佑.是所謂成之不日.亦可曰事非偶然, 誰言三架之陋卑.所居不過容膝, 已聞張生之箴語.豈獨巨寢之輪奐, 乃得可以聚族, 必如晉老之頌辭.顧窮途餘生, 度身分而苟合.况亡國遺庶, 揆義理而未安.爰處焉耕織, 但得喫著之不空.是居而孝慈, 惟望倫常之勿墜.吉日玆筮, 微願庸書.抛樑東, 珍重淵源有晦翁.擇不處仁焉得智, 滄東里號意無窮.抛樑南, 遙想〈周南〉咏〈葛覃〉.借問家中何所有, 滿庭芳草總宜男.抛樑西, 席洞山光望裏迷.歲歲西歸瞻掃路, 履霜感愴不堪題.抛樑北, 四面群星拱北極.爲政一家當若斯, 要知樞紐用吾德.抛樑上, 上帝明臨孰不仰.夙夜孜孜毋貳心, 爲仁亶在求其放.抛樑下, 窮而在下宜耕野.苟能力穡無他求, 徐子高風豈別者.伏願上樑之後, 三災不入, 百祥漸臻.子孫服詩禮而不渝, 無歸新風化獸之類.家道與世運而俱泰, 庶見高門容駟之時. 위나라……알겠고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하후는……보았노라 공자가 말하기를,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 음식은 박하게 먹으면서 귀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효성을 극진히 하며,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 제사에 착용하는 불과 면류관은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며, 거처하는 궁실은 나직하게 지어 살면서 치수 사업에는 힘을 다하였으니,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 하였다. 《論語 泰伯》 장공예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의하면 "진나라 사람들은, 부유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재산을 나눠 주어 가정을 독립시키고, 가난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처가살이를 나간다.〔秦人家富子壯則出分, 家貧子壯則出贅.〕"라고 하였다. 세 가(架) 일반적인 집은 다섯 가(架)로 이루어지는데, 세 가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집이다. 다섯 가에 대해서는 앞의 〈전주최씨종회각상량문(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 참조. 어찌……같으랴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무(趙武)가 저택을 준공했을 때 다른 대부들이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는데,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규모가 큼이여. 아름답도다, 꾸밈이 화려함이여. 제사(祭祀) 때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는 여기에서 곡읍(哭泣)을 하고, 연례(宴禮)에는 여기에 국빈(國賓)과 종족(宗族)을 모으게 될 것이다."라고 송축(頌祝)의 말을 하자, 주인인 조무가 답사(答辭)에서 "무(武)가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곡(哭)하고, 여기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서 연례를 할 수 있다면, 이는 내 목숨을 온전히 누린 다음 선대부(先大夫)가 묻힌 구원(九原)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북면(北面)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군자(君子)가 이 일을 두고 평론하기를 "장로는 송축하는 말을 잘했고, 조무는 기도하는 말을 잘했다.[善頌善禱]"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인한……하리오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후(仁厚)해야 좋으니, 잘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창동(滄東) 동쪽의 창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주자는 만년에 창주정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그 외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갈담(葛覃)〉 《시경》의 편명으로, 주 문왕(周文王)의 비 태사(太姒)가 신분이 귀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며 시집을 간 뒤에도 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내용이다. 의남 풀이름으로, 훤초(萱草)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서리 밟고 슬퍼하며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한 집안의 정치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공자가 "《서경》에 효(孝)에 대해 말하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그것을 정치하는 데에 미루어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꼭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는가.〔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 서자의 고풍 우암은 주자는 항상 서유자(徐孺子)의 고풍을 칭송하였다고 하였는데, 유자(孺子)는 서치(徐穉, 97~168) 자이다. 후한 예장(豫章)의 학자로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직접 농사지으며 공손 검약하여 고사(高士)로 불렸다. 삼재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를 가리킨다. 높은……수레 한나라 우공(于公)이 옥사(獄事)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였으므로 사람들에 의해 생사(生祠)가 세워지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집을 수리하면서 "내가 음덕을 많이 쌓은 만큼 우리 자손 중에 고관이 많이 나올 테니 좁은 문을 개조해서 사마(駟馬)의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야 하겠다."라고 하고는 대문을 높이 세웠다. 그런데 과연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이 되고 나서 그 뒤를 이어서 대대로 자손들이 봉후(封侯)된 '우공고문(于公高門)'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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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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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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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부군 제단비 參奉府君祭壇碑 부안군 석동산은 우리 부녕 김씨의 선영이다. 장사랑 군자감 참봉과 유인 청주 김씨를 함께 장사지낸 묘소는 직장공의 묘소 왼쪽 아래 계좌(癸坐)에 있는데, 그 봉분이 누구 것인지 분명하지 않을까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낸다. 부군의 휘는 정길(鼎吉), 자는 응구(應九)로, 죽계(竹溪) 선생 휘 굉(鋐)의 큰 아들이다. 세계(世系)는 동강 죽계공 묘갈에 모두 적혀 있으며, 모친은 병절교위 시산 허씨 강(剛)의 따님으로 만력 병자년(1576) 5월 26일 태어났다.부군은 자질이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아우와의 우애가 대단히 돈독하였다. 성리의 학문에 부지런하였으며 학행으로 군자감 참봉에 천거, 제수되었다.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청의 병사들이 곧바로 한양을 침범하자, 임금이 남한산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포위를 당하여 바야흐로 위급할 때 교서가 포위 가운데서 나왔는데, 문사가 대단히 뼈에 사무치게 간절하였다. 부군은 변고를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군이 모욕을 받으면 신하는 죽는 것이 분수이다."라고 하고서, 사우(士友) 및 종친들과 의병을 규합하여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을 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옥과 현감 이흥발(李興浡) 공, 대동 찰방 이기발(李起浡) 공, 순창 군수 최온(崔蘊) 공,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공, 전 찰방 유즙(柳楫) 공 등과 여산에 모의청을 설립하여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부군은 마침내 모은 병사와 군량미를 이끌고 다섯 공에게 찾아가 합류하였다. 이에 전략을 세워 청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가 이뤄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췄다. 이 일은 《호남창의록》에 실려 있다.인조 을유년(1645) 8월 26일 돌아가시니, 향년 73살이었다. 장남은 필(泌)이다. 차남은 숙(潚)으로,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선대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호는 지와(止窩)이다. 막내는 택(澤)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다. 호는 포정(浦亭)이다. 딸은 송연(宋淵)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세열(世烈), 세석(世奭), 세광(世光), 세융(世隆), 세설(世卨), 세열(世說), 세량(世亮), 세기(世基) 등으로 모두 통덕랑이다.오호라! 부군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고 태어나 올바른 가학을 배워 부지런히 수신하여 성실함으로 이루었다. 그러므로 실상과 이름이 드러나서 구고에서 우는 학의 울음이 높은 하늘에 들렸으니,496) 이에 부군의 덕과 학문을 알 수 있다. 북쪽 오랑캐의 난리 때 백수의 노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군부의 위급함에 구원하러 달려갔다가 강화가 맺어진 뒤에 자취를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굳센 충절과 엄격한 의리는 천추의 후대에도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시와 예를 전하여 지와공은 조상의 뜻과 일을 계승하였으며 포정공은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세상에 드러냈으니,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준 법도497)도 또한 볼 수 있다. 학문의 여사(餘事)인 문장에 대해서도 장인 동호공(東湖公)에 대한 만사의 글에서도 또한 그 조금을 알 수 있다.498) 묘소에 비석이 없으니, 다만 행한 업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무덤인지 의심을 면키 어려웠다. 이는 비록 두어 대 후에 빈한하여 옮겨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흥성과 쇠퇴, 현달함과 은거함은 또한 운수가 정해져 있어서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윽이 후손으로서 감개함을 견딜 수 없다. 삼가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제단의 비석을 다시 세우는 날을 기다려 음각으로 새긴다.임신년 중추절에 10대손 택술은 삼가 쓴다. 維扶安郡席洞山, 我扶寧金氏世阡也.有將仕郞軍資監參奉, 孺人淸州金氏合窆之墓, 在直長公墓左下癸坐, 而有疑其封, 築壇立碑, 歲一祀之.府君諱鼎吉字應九, 竹溪先生諱鋐長子.世系具在同岡竹溪公墓碣, 妣詩11)山許氏秉節校尉剛女, 生于萬曆丙子五月二十六日.天資卓爾, 早襲庭訓, 事親至孝, 友弟彌篤, 勤於性理之學, 學行薦除軍資監參奉.崇禎丙子淸兵直犯京師, 上幸南漢, 被圍方急, 敎書自圍中出, 辭甚痛切.府君聞變, 慨然曰, "主辱臣死, 分也." 與士友及宗族, 糾合義兵, 收聚穀粮, 爲勤王策.適玉果縣監李公興浡、大同察訪李公起浡、渟昌郡守崔公蘊、前翰林梁公曼容、前察訪柳公楫, 設募義廳于礪山, 傳檄列邑.府君遂以所聚兵粮, 往會同五公, 謀畵方略, 進至淸州, 聞和成痛哭而歸, 杜門晦迹, 事在《湖南倡義錄》.以仁廟乙酉八月二十六日卒, 享年七十有三.長男泌, 次潚, 孝友爲任, 克纘先業, 號止窩.季澤, 文科禮曹正郞, 號浦亭.女, 宋淵.孫, 世烈、世奭、世光、世隆、世卨、世說、世亮、世基, 皆通德郞.嗚呼! 府君禀天資之美, 受家學之正, 修之勤而成之實, 故實與名彰, 以至臯鶴之聲, 聞于九天, 則斯可以知德學矣.北胡之亂, 白首起義, 赴君父之急.和成之後, 晦跡不仕, 則忠之壯義之嚴, 足以有辭千秋矣.詩禮有傳, 得止窩公之繼述志事 ; 浦亭公之立揚顯親, 則貽謨之法, 亦可見矣.至於餘事文章, 則觀於挽內舅東湘許公之辭, 又知一班矣.墓闕顯刻, 不惟行業之不昭示, 幷與斧堂之不免疑, 則是雖數世之後貧單遷徙之故.然盛衰顯晦, 亦有數存焉, 非人力之致歟.竊不勝後承之慨恨也已.謹識如右, 俾俟壇碑改竪日, 鐫之于陰.歲在壬申仲秋日, 十世孫澤述謹書. 구고에서……들렸으니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는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 학덕이 임금에게 알려진다는 말이다. 자손에게……법도 '이모(貽謨)'는 이모(貽謀)와 같은 말로 조상이 자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남겨 주는 것을 뜻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豊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조금을 알 수 있다 《진서(晉書)》 권80 〈왕헌지열전(王獻之列傳)〉에 "대롱을 통해 표범을 보기 때문에, 때로 표범의 무늬만을 본다.〔管中窺豹 時見一班〕"라는 말이 나온다. 詩는 時의 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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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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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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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순80)이 이신헌81)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나서 【1937년】 觀田士順與李愼軒書 【丁丑】 작년 여름에 종이 뭉치 속에서 지난해 현동(玄洞)에 간행소(刊行所)가 설치되었을 때의 문부 (文簿) 1계(呇)을 얻고, 이미 편집한 책자(冊子) 중에서 칼로 도려낸 〈회ㆍ퇴ㆍ율삼선생설질 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 전편(全編)을 얻었다. 붉은 점으로 글자를 헤아린 모양을 보니 확 실히 문고(文稿) 중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마침내 진본(晉本)과 대조해보니 한 구도 서로 어 긋난 것이 없었다.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등본 사고(謄本私稿) 【죽은 동생이 보관한 것이다.】의 〈분언(㤓言)〉 가운데 "서자가 있다. 운운. 친아들이 있음에도 족질을 세워 후사로 삼는다.[有庶子云云有親 子而立族姪爲嗣]"라는 한 구절이 "서자가 있다. 운운.[有庶子云云]"이라는 다섯 글자를 검은 색으로 묶고, 끝에 "친아들은 서자를 가리킨다[親子指庶子]"라는 다섯 글자의 소주(小註)가 없으니, 이것은 또 누가 한 것인가? 진본(晉本)은 단지 "자운운유친(子云云有親)"의 다섯 글 자를 삭제하고 "서자가 있는데 족질을 세운다. 운운.[庶子而立族姪云云]"라고 했을 뿐이니, 언제 한 글자라도 고친 적이 있는가. 이것으로 유추하면 다른 것도 또한 세 모퉁이를 반증 하여 알 수 있으니, 어찌 굳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길고 짧음을 비교하고 다투어서 변장 자(卞莊子)가 틈을 엿보는 기회를 주겠는가.82) 【정축(丁丑 1937)년 3월 3일】현동본(玄洞本)의 후고초(後稿鈔)는 선사께서 임술년(1922) 여름에 직접 편수한 화도본(華島本)83)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편지의 속의 말과 같다면 이는 〈삼선생설질의(三先生說質疑)〉의 "갱안(更按)" 이하 334자의 문장이 본래 화도본에 실려 있었는데, 현동에서 초본을 만들 때에 화도본에 의거하여 베껴 넣었다가 바로 도려내고 이어 전본(前本)의 "연즉(然則)" 이하 122자의 옛 글을 기재한 것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진영(南軫永)의 글에서 어찌하여 "개본(改本)이 원래 대고(大稿)에 들어있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개본이 선사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라고 말하며, 어찌하여 "원고(原稿)에 의거하여 판각에 부쳤다."라고 말하지 않고, "서로 의론하여 판각에 부쳤다."라고 말한 것인가? 오진영의 편지에서 어찌하여 "선사께서 원래 대고에 넣으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선사께서 명하시어 원고를 베껴 수본(手本)을 남진영에게 부쳐 보낸 것인데, 지금 첨가해 넣은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인가?이른바 "현동에서 간행할 때의 문부"는 정재(靜齋)와 전사견(田士狷)이 주관한 것이니, 만약 작년 여름에 문부 중에서 칼로 도려낸 종이를 얻었다면 어찌하여 감히 전사견에게 묻지 못하고, 지금 전사견이 죽은 뒤에서야 운운하는 것인가? 만약 과연 칼로 도려낸 것이라면 이쪽에서 문고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진주본(晉州本)84)을 단죄한 것을 되돌려서 현동본을 단죄하지 않고, 도리어 단지 "어찌하여 굳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길고 짧음을 비교하고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으로 그 실정을 알 수 있다.전사순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신해년(1911) 유서는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 조고(祖考 전우(田愚))의 문하에는 조고의 필법을 모방하는 것에 일등 선수가 많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 사람의 유서가 그의 부친 정재(靜齋)가 내놓아 배포한 것인데,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인지상정에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사람이 이와 같으면서 지금 이렇게 운운하니, 또한 어찌 심각하게 논의할 것이 있겠는가. 이신헌(李愼軒)은 식견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그의 말을 믿고서 선생의 자취와 몸을 숨기고 보호할 계책으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현동에 있지 않아서 전혀 모르다고 스스로를 변론하고 또 이 일이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물으니, 이것이 한탄스럽다.〈분언(㤓言)〉에서 운운한 것을 보면, 선사께서 '서자'라 말씀하시지 않고 반드시 '친아들'이라 말씀하신 것은 친아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도리에 해가 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니, 이미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에 상세히 기록하였다.이신헌이 전 편지에서 이르기를, "저쪽에서 '사고(私稿)를 정리하여 바로잡는 것은 전적으로 이견(而見 오진영)을 믿는다.[私稿釐正, 專恃而見]' 여덟 글자로 뭇사람을 호령하니, 이 사람이 이 입으로 어떻게 항거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그렇지 않다. 대체로 후고(後稿)에 있어서는 직접 교감하시지 못한 때라면 혹 이런 유훈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임술년(1922) 여름 에 직접 교감하신 이후라면 이미 때가 지나서 근거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전고(前稿)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가 도리어 이를 빙자하여 어려움 없이 전고와 후고를 고치니, 매우 통탄스럽다. 또 "정리하여 바로잡는다."라는 것이 어찌 고쳐 짓는 것을 말하겠는가. 昨夏於堆紙中, 得昔年玄洞刊所時文簿一呇, 而得〈晦、退、栗三先生說質疑〉全編之刀割拔出 於旣編之冊子中者. 觀其朱點計字之貌樣, 則確是自文稿中割出者也. 遂與晉本對照, 則無一句 相違, 此未知何故也. 此中所藏謄本私稿【亡弟所藏】〈㤓言〉中"有庶子云云有親子而立族姪爲 嗣"一節, 墨括"有庶子云云"五字, 而末無"親子指庶子"五字之小註, 此又誰人所爲也? 晉本但 削"子云云有親"五字, 而爲"庶子而立族姪云云"而已, 何嘗改一字耶? 以是類推, 則他亦可三隅 反, 何必呶呶校長爭短, 以授卞莊子之窺隙耶?【丁丑三月三日】玄洞本後稿鈔, 出於先師壬戌夏親編華島本者也. 若如此書中言, 是謂〈三先生說質疑〉"更按"以下三百三十四字之文, 本載華島本, 而玄鈔時, 旣依華本寫入而旋割之, 乃以前本"然則"以下百二十二字之舊文載之者也.然則南軫永之文, 何以不曰"改本元入大稿", 而乃曰"改本藏在師宅"? 何以不曰"依原稿付鋟", 而曰"相議付鋟"也? 吳震泳之書, 何以不曰"先師元入於稿", 而曰"先師命之, 寫稿而手本付與南軫永, 今添入者是也"? 所謂"玄刊時文簿", 靜齋士狷之所主也. 若於昨夏, 得刀割紙於文簿中, 則何以不敢問於士狷, 而今乃云云於士狷身後也? 若果刀割, 則何不以此邊亂稿罪罪晉本者, 反罪玄本, 而乃只曰"何必呶呶校長爭短耶?"也? 此可以知其情也. 順也嘗對人言辛亥遺書是僞造而曰: "吾祖考門下, 摹倣祖考筆法者, 一等善手多有." 其人遺書, 是其父靜齋所出布者. 而其言如此, 是豈常情所及乎? 人也如是, 今此云云, 又何足深論? 愼軒見不及此而信其說, 先生避跡護身之計, 貽書于余, 自辨以不在玄洞全不識, 又問以此事未知緣何而然, 是可歎也. 〈㤓言〉云云, 先師不曰"庶子"而必曰"親子", 所以明舍親子立他子之爲害理之意, 已詳於〈考辨錄〉.愼軒前書謂"彼以'私稿釐正, 專恃而見'八字, 號令於衆, 此人此口, 如何抗拒?" 此殊不然. 蓋在後稿, 未及親勘之日, 則容有此訓, 自壬戌夏親勘以後, 則已過時而不足爲據, 而況於前稿乎? 彼乃藉此而無難改於前後之稿, 甚可痛也. 且"釐正"豈改撰之謂乎? 전사순(田士順)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손자인 전일건(田鎰健)을 가리킨다. 이신헌(李愼軒) 간재 전우의 문인 이기환(李起煥)을 가리킨다. 어찌……있겠는가 같은 편끼리 조그만 이해득실을 위해 싸우다가 다른 편 사람에게 이득을 주고 만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변장자(卞莊子)는 춘추 시대에 용맹하기로 이름난 노(魯)나라 대부인데, 소를 잡아먹고 있는 두 마리 호랑이를 보고 사냥하려다 옆 사람의 조언에 따라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워 기운이 빠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 힘들이지 않고 두 마리를 모두 잡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화도본(華島本) 전우(田愚)가 계화도에서 지낼 때에 직접 편정한 원고를 가리킨다. 진주본(晉州本) 1926년 10월에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집(艮齋集)을 가리킨다. 《한국문잡총간 간재집 해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의 문고를 읽고 느낌이 있어 표출하고 삼가 안설을 붙이다 【1938년】 讀先師文稿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 【戊寅】 학문의 폐단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흥분하여 다투는 것입니다. 흥분하여 다투는 사람은 가슴 속이 편안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자기의 주장을 요구하여 지난 시대 성현의 말씀과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묻지 않고 한결같이 자기의 소견에 따라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할 뿐입니다.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사 람은 도리어 단지 몸가짐을 삼가고 이름을 아껴서 눈으로 삿된 말과 그릇된 행동이 바른 도 를 깎아 먹는 것을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 행한 곳도 또 한 볼 만한 것들이 많은데, 끝까지 구차스럽게 대강대강 할 생각만 있습니다.【〈김봉수(金鳳 峀)어른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 오진영의 일을 가지고 논하면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문고를 인허 받는다는 것으로 선사의 절개를 무함하고, 자기의 의견으로 선사의 문고를 고치기까지 하였으니, 흥분하여 다투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를 무함하는 패륜적 행동이 바른 도를 깎아 먹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고 말하지 않는 자로 말하면 선사의 도를 보호하지 못한 죄와 선사의 도를 해치는 죄는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구차하게 편안함만을 훔치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께서 이 두 가지 폐단을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먼 미래를 염려해서일 것이다.오로지 이익과 손해만을 살피는 폐단은 임금을 버리고 친부모를 뒤로 하며, 스승을 배반하 고 벗을 파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이어당(李峿堂) 어른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일의 공적에 대한 마음과 명예ㆍ이익에 대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그 폐단이 임금을 잊고 원수를 받들며, 선사를 무함하고 벗에게 화를 끼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무릇 옛날 이래로 이단의 학문을 하는 선비는 후대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문 밖에 있지만,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방 안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묵씨(墨氏)는 요(堯) 와 순(堯)을 종주로 삼았으니, 묵씨는 공자와 맹자의 방 안에 있는 것이고, 육씨(陸氏)는 추 (鄒)나라와 노(魯)나라를 높였으니, 육씨는 정자와 주자의 방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유자(儒者)가 분별하고 물리쳤다는 말을 직접 들었으면서도 오 히려 그것을 바른 학문으로 인식했던 것이고, 성현(聖賢)은 세상 사람들이 빠지는 것을 눈으 로 보고 죽기를 각오하고 복수하는 원수처럼 그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고, 후대에 도를 아는 선비가 나와서 바로잡은 뒤에야 비로소 방 안과 문 밖, 삿됨과 바름의 구분이 있게 되어 다시는 합쳐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음성(陰城)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도 또한 선사를 높였는데, 어찌하여 방 안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인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우리 유가들이 이단을 변박하는 것은 다만 도리에 당연한 일로 여겨서 할 뿐이지, 우리의 말이 행해질지 행해지지 않을지, 다른 사람이 따를 것인지 거스를 것인지, 저들의 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비교하여 나아가거나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맹자와 주자의 시대에 저들이 진실로 그들을 두려워 한 적이 없었으니, 비록 맹자나 주자라 할지라도 또한 감히 온 천하 에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곧바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의 사람은 많고 선생의 사람은 적으며, 그의 세력은 강하고 선생의 세력은 약하니, 선생이 비록 그를 변박할지라도 선생의 말이 행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그들의 이간질하는 말과 조장하는 말, 무함하는 언사, 악다구니 소리는 변박할수록 더욱 심 해져서 단지 자신만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니 망령된 말에 붙여두는 것만 못합니다. 오랜 시 간이 지나고 나면 옳음과 그름은 저절로 밝혀질 것이고, 비록 사람은 밝게 알지 못 한다 하 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하늘이 있으니, 내 심군(心君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년에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니다.【〈안혼재(安渾齋)에게 답 합〉】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과 이승욱(李承旭) 및 그 일당의 무함하는 말과 악다구니 소리에 대해 또한 일찍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다만 그 일이 선사와 관계된 것은 끝까지 그만 둘 수 없을 뿐이다.우리 어른께서 이른바 "전자로 보면 강론에서의 작은 과실로 여겨 참아야 하고, 후자로 보 면 사문의 큰 변고로 여겨 힘껏 성토해야 한다. 다만 전모(田某 전우(田愚))가 진심으로 감 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옆에서 본 사람들이 그것을 사심의 작용에서 나온 것이고 당연한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길까 염려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고 이를 만합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한 뒤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불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사를 무시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놈'ㆍ '농사꾼 늙은이', '선사를 무시함'은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런데도 전자로 보면 작은 과실로 여겨 참을 뿐만이 아니었고, 게다가 여러 해 동안 그를 공경하고 믿으며, 아끼고 보호하였다. 심지어 선사의 문고를 교정할 유사(有司)로 정해 망첩(望帖)으로 그를 초빙까지 하였다. 자기를 성토한 뒤에 이르서야 비로소 그의 죄를 드러내 성토하였으니, 어찌 사심(私心)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김용승은 결국 선사를 배반하였으니, 그가 당연히 진심으로 감복한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오진영의 심술(心術)이 그러할 뿐이었다.김(金)이 처음 이런 괴이한 논의를 했을 적에 그 마음에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습니 까.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이렇게 감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애를 써서 물 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처음에 "헤아려서 하라."거나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 "말없는 가르침", "하늘은 만물을 낳고 성인은 법을 세우셨다.", "꺼리지 않으시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 등의 말로 선사를 무함할 적에 그 마음이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는가. 뒤에는 도리어 "말에 구별이 부족했다."거나 "말을 가림에 소홀했다." 등의 말로 감출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호남의 선비들이 애를 써서 물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대체로 선생의 문집이 저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절대로 선선생(先先 生)께서 동문과 문인에게 처리하신 뜻이 아닙니다. 저는 선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 하실까 염려되니, 매우 통탄스러운 일입니다.【〈조참판(趙參判)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숙재(肅齋)에 대해 그 분이 선사의 동문이 됨에도 오히려 문집이 다른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을 매우 비통하고 한탄스럽게 여기셨고, 심지어 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군자들은 친한 스승의 문집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난하게 고쳐지고 삭제되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보면서 일찍이 통탄스럽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차라리 시호(諡號)가 없을지언정 시장(諡狀)은 결코 그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임경유(任景孺)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몇 해 전에 내가 전일효(田鎰孝)85)가 오진영에게 선사의 행장(行狀)을 짓게 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말하기를, "차라리 행장이 없을지언정 행장을 결단코 선사를 무함한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일이 사문(師門)과 관계되니, 한 줌의 숨이 아직 끊어지기 전에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고 문고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혹자는 일이 여러 해 오래 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만두어도 된다고 하였다. 나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말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일찍이 명나라 유학자 고경일(高景逸)86)의 말을 보니, "기개와 절의가 있으면서 학문을 하 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학문을 하고서 기개와 절의가 없는 사람은 있지 않다. 학문을 하고 도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교화에 해됨이 적지 않다."라고 하 였는데, 이 말이 아름답긴 하지만 미진한 점이 있다. 대체로 만약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 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으니, 그 '학문'이라 한 것은 단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명성일 뿐이다. 【〈왕사간(王司諫)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가령 음성 오진영의 말처럼 선사께서 진실로 인허를 받으려고 생각하고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면 이는 이른바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어떤 사람은 음성의 오진영을 보호하고 본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비록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선사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또 심지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뒤에 선사가 될 수 있으니, 만약 구구한 작은 신의와 절개에 얽매어 도를 후대에 전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군자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 천리가 어두우지고 인심이 사악해짐이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인가?지금 저 사람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내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만약 조금이라도 원망하 고 두려워하는 싹이 보인다면 이것이 장애가 될 것이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어찌 이른바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87)는 것이겠으며, 어찌 이른바 "마음이 평 탄하여 여유가 있다."88)는 것이겠는가. 내심 스스로 우리들이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 서 묵묵히 도를 체득하는 공부를 해나가야지, 단지 문자로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 네. 【〈벗 이명(李明)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음성 오진영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나의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비록 스스로 원한과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컨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다."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끝날 것이다.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선사의 가르침을 마치 오늘 얼굴을 대하고 명을 받드는 듯하다.한쪽 사람들이 내가 선비가 상(喪)을 치르는 동안에 의(義)를 주창하는 것은 중도에서 지나 친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습니다.【〈김광국(金光國) 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내가 그가 지은 〈정절사전((鄭節士傳)〉89) 뒷부분의 의논 가운데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 말한 것에 대해 논변한 것으로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다. 선사께서 바로 의를 주창한 사람을 논변하신 것은 단지 그가 상을 치르는 사람이 중도에 맞는지 여부만을 논변하고 일의 옳고 그름을 논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부당하다. 하물며 나는 단지 그 글의 의논이 의를 해친 점이 있다는 것만 논변했고, 애초에 절사(節士)의 일은 거론하지도 않았으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어찌 더욱 부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내가 선사의 뒤를 따라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을 얻은 것은 분수에 영광이나, 단지 그의 마음 씀이 험악함을 볼 뿐이다.이렇게 사문이 분열된 때에는 벗들이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큰 변고가 아 니라면 또한 잘못을 포용함으로써 교유의 도를 온전히 할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은 사실 주 희와 송시열 두 선생의 뜻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의 이 편지를 끌어와 오진영과 김용승(金容承)을 단절한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아, 스승을 무함하고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고 작은 흠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선사께서 정윤영(鄭胤永)ㆍ신계(申桂)ㆍ이승욱(李承旭) 세 사람을 단절한 일을 보지 않는 것인가?90) 여기에서 이른바 '작은 흠'이란 신이산(申梨山)이 가평 김평묵의 형편없음을 알면서도 단지 뚜렷하게 단절을 통고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신이산은 매번 제문을 배척해 물리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격동하여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으켰다고 하는데, 내가 내심 생각하기에 이 일은 단지 옳은가 옳지 않은가 를 논변해야지 격동시키고 촉발시켰는가는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해(利害)상의 말 인 듯합니다. 【〈정명신(答鄭命新)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인 중에 오진영과 김용승을 성토하고 단절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일으켜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어나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하겠는가?다만 신이산이 조정의 의론을 둠으로써 이승욱의 헐뜯음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평묵의 세력 이 더욱 성대해지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오늘날의 재앙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자신을 탓하지 않고 반대로 도를 곧게 하여 행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니, 이것이 무 슨 식견이고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하의 변고가 다만 중간에 선 자가 조정의 의론을 두었기 때문에 오진영의 무함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용승의 배반이 더욱 어그러져 큰 재앙을 이루게 한 것 또한 선사의 이 말씀과 같은 점이 있다.지난번에 한 벗이 나를 보고 "그대가 제문을 물리치고자 한 것은 어설픈 일이라 이를 만하 다. 저들의 기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에 임 해서 이치의 옳고 그름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되고, 단지 사람의 강약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학문이라 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하고, 그 뒤로 여러 차례 변론을 마지않자, 사람들 중에 진실로 저들의 형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도록 권면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치의 옳음과 그름을 보고 진퇴를 결정할 뿐, 사람의 강약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지 않은 것고 또한 선사의 마음과 같았을 따름이다. 과연 전에는 고소의 재앙을, 뒤에는 무함의 치욕을 면치 못했으니, 지난날에 그만두도록 권면했던 자가 스스로 앞을 내다보는 명철함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찌 그 사이에서 한 터럭만큼의 원망이나 후회가 있겠는가.무릇 횡포와 패역이 오면 세상의 교화와 도술(道術)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또한 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임석영(林奭榮)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 쪽의 횡포와 패역이 올 적에 선사를 무함하는 것과 문고를 어지럽히는 것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일체 받아들였을 뿐, 변론하여 다스리지 않았다.자경(子敬 김용구(金容九))이 명도(明道)는 왕안석(王安石)과 절교하지 않았고, 이천(伊川) 은 소동파(蘇東坡)와 다투지 않았다91)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명도의 덕과 도량이 넓 고 컸지만 만약 왕씨가 부모와 스승을 기롱하고 모욕했다면 그를 대우함이 반드시 달랐을 것입니다. 또한 저 김(金)과 유(柳)의 문인(門人)92)들이 소동파로 자처했다면 저 또한 그들 과 다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자신들을 공자ㆍ주자의 정통을 전수받았다 고 말하지만 성리(性理)의 의론과 출처(出處)ㆍ사행(事行)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과 어긋나니, 유자(儒者)된 자로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최종화(崔鍾和)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 사람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한 것은 그가 선사를 무함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평소의 고제(高弟)가 아니고, 또 전발(傳鉢)93)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호남 사람의 변론도 또한 굳이 이처럼 힘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전발의 고제로 자처하여 스승을 무함하였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힘써 변론한 것이다.한쪽이 바르고 다른 한쪽이 치우치거나 한쪽이 공정하고 다른 한쪽이 사사로우면 반드시 다 툼이 있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옆에서 본 사람들이 모름지기 시비하는 방향을 정밀하게 살피고, 또 모름지기 이쪽저쪽의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 함을 세밀하게 본 뒤에 좇을 것인지 등질 것인지 나의 길을 정하고, 도울 것인지 억누를 것 인지 나의 힘을 베푸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양쪽을 옳게 여기거나 혹은 모 두를 그르게 여기는 것은 선현이 기롱한 "낙(洛)도 옳고 촉(蜀)도 옳으며, 원우(元祐)도 그르 고 희풍(熙豊)도 그르다.94)"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의 이치겠으며, 성 인의 법이겠습니까. 【〈임장우(林章佑)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호남도 스승을 높였고, 영남도 스승을 높였으며, 영남도 일을 그르쳤고 호남도 일을 그르쳤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시비하는 방향을 살피지 않고, 또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상의 평온함과 험악함을 보고서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을 선사의 말씀처럼 하지 않는 것인가? 【정도현(鄭道鉉)이 김홍재(金弘梓)를 대하여 말하기를, "의론은 호남이 옳다." 하였으며, 전기진(田璣鋠)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싸움에서 호남이 승리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호남이 영남에게 곤욕을 받아 고소의 화를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어찌하여 호남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자, 전기진이 말하기를, "'싸움의 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전기진이 말하기를, "호남의 문자는 주로 일을 의론하고, 영남의 문자는 주로 사람을 타격한다. 이것이 진실로 공론(公論)이다. 그래서 승리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정도현과 전기진은 함께 영남에 거처하여 영남을 편드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시비의 방향 및 말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함에 대한 구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끝내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한탄스럽다.】단지 전장(奠章)95)을 조목조목 밝혀서 스승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리면 되는데, 끝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사이에서 과실로 인한 잘못[眚]과 일부러 지은 죄[怙]의 구 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쩌지 못했다. 이에 분열된 까닭을 버려두고 주위를 둘러보다 다 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흘러 떠도는 것들을 주어모아 내 몸을 더럽히고 후배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 을 볼 수 있다.【〈관서(關西)의 제생(諸生)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음성 오진영의 말에 진실로 선사를 무함한 사실이 없었다면 그의 무리들이 단지 오진영의 본문(本文)에 나아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주변을 둘러보아 다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터무니없는 것을 억지로 뒤집어씌워 호남 사람을 더럽히고 한 시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더욱 스승을 무함한 죄가 유심(有心)의 일부러 지은 죄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만약 화서(華西)96)가 율옹(栗翁 이이(李珥))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할 생 각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 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약 화서가 주자에 대해 독실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진실함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 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 기는 어려울 듯하다.【〈화문이자론(華門二子論)〉】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과 후대 사람 중에 오진영의 일을 논하는 자가 어찌 "만약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참으로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과 인허에 대한 분부가 없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변론하는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지나치게 염려한다고 지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식견과 사려가 없단 말인가.윤철규(尹喆圭)가 거짓으로 칙령(勅令)을 전해서 빈사(賓師)를 유인해 쫓아낸 것97)에 대해 조정에서 비록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보(章甫 유생)들은 성토해야 한다.【〈쇄 묵(瑣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퇴계의 이른바 "통문(通文)을 돌려 상소하는 것은 유생의 일이 아니다."는 것은 유생이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으로 말한 것이지, 사문(斯文) 중에 일이 있어도 서로 알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호남 사람이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미 퇴계의 본래 취지를 잃은 것이다. 지금 또 선사의 말씀으로 보건대 장보들이 윤철규를 성토하는 것은 조정에서 그의 죄를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또한 그것을 허여한 것이니,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이 유생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식견이 없음을 더욱 볼 수 있다.유자(儒者)는 저서(著書) 수십 권에 곡필(曲筆)을 용납하여 고금(古今)의 한 사람도 원통하거 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받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후대에 응당 어진 자손을 얻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사 람을 논하면서 행적을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까지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늘의 형 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니, 신중해야 한다.98)"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과 그의 무리들은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글의 혐의를 꾸미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나를 무함한다. 내가 그에 대해 설사 진실로 혐의할 만한 행적이 있더라도 혐의를 피하여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것은 제자로서의 직분이 아니니, 진실로 이것으로 마음을 무함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애초에 혐의할 만한 행적이 없는데, 도리어 거짓을 꾸미고 뒤집어씌워서 억지로 애매모호한 행적을 만든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마는 "행적까지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형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돌이켜볼 것이다.고금(古今)의 일을 낱낱이 헤아려보면 온갖 병폐는 그 근원이 어느 한 가지도 우리 유학자 들이 소문[聞]과 현달[達]의 변별99)을 밝히지 못하고, '진실[誠]'과 '거짓[僞]'의 기미를 살피 지 못하며,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는 것100)에 있어서는 최고의 완전한 도 리로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고선사묘문(告先 師墓文)〉】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이 이미 온갖 병폐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음성의 오진영을 일과 공적을 중요하게 여기고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배척하신 것은 단지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니, 훗날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먼 곳의 사람에게 던져 준 것"과 "선사를 무함하여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것", "선사의 문고를 고치고 어지럽힌 것", "일작(日雀)에게 돈을 구걸한 것", "동문을 일망타진한 것"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여 가두는 것" 등 온갖 죄악을 빚어낸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저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없겠 습니까. 단지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원망 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도 감히 평소의 지조를 바꾸어서 따르지 못하고 있 으니, 그 정상이 또한 참으로 슬픕니다. 만약 집사처럼 인품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했었다면 사문(斯文)에는 붙들어 세우는 도움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몸에는 주먹질과 발 길질이 가해지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께서는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여 일을 맡을 마음은 없고 이렇게 외롭고 미천하며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시 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사께서는 스스로 맡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시기까지 하시니, 더욱 옳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신 앙여(與申仰汝)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음성 오진영의 무함과 어지럽힘에 대해 만약 인품과 지위가 있는 동문의 노성(老成)한 사람이 변론과 성토의 일을 맡았다면 저쪽의 방자함을 거두어 선사의 도의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두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고서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면서 이렇게 나처럼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경솔한 자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함으로써 원망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고 재앙과 근심이 몸에 가해지게 하는 것인가? 비록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정상이 또한 진실로 슬프다 하겠다. 아아, 옛적에 선사와 같은 인품과 지위로도 오히려 이러한 탄식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의 소자(小子)처럼 인품과 지위가 낮고 미천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한쪽 사람이 또 저의 제문(祭文)에 있는 음양(陰陽)과 같은 마음과 행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 을 가지고 신(神)을 업신여긴 것이라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음양(陰 陽)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상반되듯 마음과 행적이 모순된다는 말101)은 농옹(農翁 김창협 (金昌協))이 일찍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비기어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입 니다. 부친에게 사용했던 말을 선사에게는 베풀 수 없다고 말하니, 저는 그것이 무슨 말인 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이 호남의 통문(通文) 중에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을 반복했다는 말이니, 이 때문에 선사께서 반드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를 하지 않으셨음을 깊이 밝히려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할 부분까지 언급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선사의 이 가르침을 읽고서도 남에게 뒤집어씌운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인가? 대체로 그의 심술이 선사의 이른바 "한쪽 사람"과 한 꿰미에 꿰어져 있는 것이 자못 같은 기운을 전해 받고 같은 탯줄에서 태어난 것과 같다.일찍이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일이 없겠지만 지금 사우(士友)의 뒤를 따라 그 학설을 듣고 서도 이와 같이 따지지 못하고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입 니다. 맹자가 남과 변론하고 논쟁한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성인이 옳고 이단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할 때에 만약 화를 불러들일까 두려워하여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다. 변론을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선사께서 이러한 사실이 없고 그의 말이 무함임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이다.제가 내심 엿보건대 집사의 뜻은 회니(懷尼)의 논쟁102)과 호락(湖洛)의 변론103)을 징창(懲 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릇 인물(人物)의 삿됨과 바름의 사이나 강론의 같음과 다름 의 즈음에서 일체 화합을 주된 것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못 삿됨과 바름을 분별하 고 같음과 다름을 나누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화합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사의(私意)와 인욕(人欲)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에 나와 전일중(田鎰中)이 오진영과 화평할 것을 권면하는 사람들이 어찌 선사의 '사의와 인욕'이라는 가르침에 송연(竦然)하지 않겠는가.집사께서도 또한 그의 제문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 는 것으로 처신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만약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괜찮을 것입 니다. 그러나 지금 부친과 스승이 모욕을 받았는데도 단지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다니 요.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함이 단지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진실로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는 것으로 처신할 뿐이지만, 선사와 관계된 것이라면 감히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어 선사의 심법(心法)을 어그러지지 못하게 할 것이다.집사가 형제처럼 처우한다고 하지만 자기와 관계된 것이면 노여워하고, 선사와 관계된 것이 면 편안하게 여기십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부르고,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했을 때에는 일이 선현과 선사에게 있었기에 편안하게 여기더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할 때에는 일이 자기에게 있게 되자 노여워하면서 비로소 그의 죄를 발설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선사의 영령 앞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게 하였다. 선사의 이 말씀은 마치 오진영의 심술을 먼저 내다보고 미리 말씀하신 듯하다.옛적에는 주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주자를 어지럽 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안에 있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옛적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안에 있다. 스승의 문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말에 쉽게 변론하지 못한다. 그 말을 변론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변론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오백풍(吳伯豊)104)은 주자 문하의 안연(顔淵)이다.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 연호) 연간에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사문의 칭찬을 자주 받았다. 우옹(尤翁 송시열)이 지은 창랑(滄浪)의 글에 이성보(李誠父)ㆍ오백풍 등의 말이 있었는데, 뒤에 대윤(大尹 윤선거(尹宣擧))의 청으로 그것을 삭제하였다.105) 우옹이 빗대어 견준 것과 대윤이 삭제를 요청한 것이 어찌 오백풍이 진실로 권세를 좇는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단지 그에게 일찍이 한탁주(韓侂胄)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을 뿐이었다. 【〈수현재우기(守玄齋偶記)〉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람들 중에 "오진영이 비록 선사를 무함했다 하더라도 선사가 진실로 이러한 사실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는 데, 이는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다. 오백풍이 비록 권세를 좇는 허물이 없고 단지 그가 일찍이 한탁주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하더라도 글의 저작에서 삭제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비록 실제적인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일찍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무함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백풍처럼 글에서 삭제당하는 일을 받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적이 이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대체로 절교를 알리는 편지는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106)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의 제문을 해명한 문자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한 구절도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송조(宋朝)의 네 현인107)에 대해 교묘하게 사설(辭說)을 지어 장황하게 늘 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단지 이것으로 보건대 그 마음이 어디 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에서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고 성토한 글은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와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라는 말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에서 해명한 말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변박하고 성토한 사람의 신상에 나아가 교묘하게 사설을 지어 죄안(罪案)을 억지로 만들고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다. 단지 이것만 보더라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선사께서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적이 없었다고 여기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꺼리는 것이 있어 감히 말을 함부로 하면서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라는 말이 나옴에 이르러서야 호남 사람들이 겨우 고소의 재앙에서 벗어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운을 잃은 채 다시는 성토할 힘이 없게 되자 이에 오진영은 다시 서병갑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담하게 분명히 말없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큰소리치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문인과 자제들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다른 사람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큰 의리를 잊는다면 스승과 제자의 인륜은 이로부터 폐지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륜이 폐지되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108)도 또한 의지하여 설 곳 이 없게 될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우리 문하의 여려 사람들이 이 가르침에 대해 마음속으로 송연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가르침을 보고서도 오히려 송연해할 줄 모르다면 성인의 이른바 "나도 어찌할 수 없다.109)"라는 사람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이러한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정자ㆍ주자ㆍ율곡ㆍ우암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선비 된 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 마디 말을 꺼내어 도를 지킬 계책으 로 삼지 못한다면 성현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무함하는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간옹(艮翁 전우(田愚))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제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도를 지킬 계책으로 삼지 못한다면 이는 간옹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당세의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바로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한 때문인데, 고상한 제문 (祭文)을 들추어낸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창칼의 위협을 가하며 쫓아내기를 바라는데 이르 렀습니다.【〈심치대(沈致大)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한쪽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함 때문인데, 억지로 문고를 압류한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검국(檢局)110)에 고소하여 큰 재앙을 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옛적 선사와 오늘날 소자가 만난 재앙이 똑같구나.근세 유자(儒者)들의 의론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성인의 문하를 어지럽히는 적도와 왕가(王家)에 재앙을 끼치는 역도로 몰고, 사람을 칭찬할 때에는 고금에 유일한 사람이며 공 자나 주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니, 나는 그러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리들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부모를 파멸시킨 적자(賊子)와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으로 몰고, 오진영을 칭찬할 때에는 식견과 문장이 선사보다 뛰어나며, 또 우옹(尤翁 송시열)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켜세우니, 이것은 미워할 만한 나쁜 습관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의(私意)와 객기(客氣)에 빠져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분별없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이니, 미워할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여겨야 할 것이다.지난번에 인보(仁父)111)와 이견(而見 오진영)이 나에게 출사하여 나라의 보존을 도모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를 꾀하지 않는 것으로, 가릉(嘉陵)의 여 러 사람들112)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화((華)와 경(敬) 두 아이에게 부침〉】지난번 이견이 처음 왔을 때에 맹사간(孟士幹)의 뜻을 전하며 "아무개 어르신이 한번 일어 나시면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또 서울에는 아무개와 아무 개가 의지할 만하고, 대궐 내에는 모궁(某宮)이 통할 만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군자가 큰 일을 하면서 어찌 모궁을 좇아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견이 다시 와서 "아무개 사람이 근래에 이미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하기에, 내가 "어진 무리들이 헤아 려서 의지할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가소롭다."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오진영【이견(而見)은 그의 자이다.】이 행한 것과 선사께서 물리친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이런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스승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멀리 있는 사람에게 투척하여113) 선사로 하여금 목멜 생각을 품고서 변고를 대비하시게 한 변고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이 일 이전에는 선사께서 때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내셨는데, 이 일 이후에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며, 또 그의 도당인 권순명(權純命)이 기록한 〈치명록(治命錄)〉 중에 "오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셨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그의 도당은 또다시 오진영은 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변박하고 성토하는 것은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일찍부터 이미 "도의를 꾀하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것과 "끝내 일을 만들 것이다."고 우려하신 것에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주자의 경우도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르다는 까닭으로 마침내 임율(林栗)의 탄핵 상소를 만 났고114), 또 육구연(陸九淵)의 문인들이 원수처럼 보는 것을 당했는데115), 섭씨(葉氏)가 또 한 일찍이 편지로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주자는 오히려 말을 다하지 못한 것 을 스스로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한즉, 모름지기 저 사람이 남과 논쟁하는 것이 공공의 도 의를 논쟁하는 것인지 사사로운 생각을 논쟁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하는데, 논쟁하는 이유는 묻지 않고, 오직 논쟁하는 것만을 그르게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국가의 정토(征 討) 및 성인군자가 스스로 정도를 지키려다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받거나 다른 사람의 모함 에 빠지는 것과 혹 누군가 정도를 해치는 것을 보고든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 탄핵하고 초야 에 있으면 배척 하려다 도리어 화를 만나는 것, 이러한 것은 마치 밭의 짐승을 잡아서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난 형상116)과 같은 것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비록 천지조화의 기운으로도 또한 음기가 지극히 성대해고 심지어 양기와 다투다 둘 다 패하여 함께 손상되 는 이치가 있게 됨을 면치 못한다. 기수(氣數)의 융성과 쇠퇴가 이와 같다면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도 또한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설사 공부자(孔夫子)께서 지금의 시대에 사 신다 하더라도 아마 면치 못하실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 다면 군부(君父)에게 예의가 없고 성인(聖人)의 도에 화를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굳이 공격하여 성토함으로써 그와 승부를 겨룰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자가 있게 될 것이니, 그것이 국가와 세도(世道)에 해가 됨이 어찌 다른 사 람과 논쟁하는 것보다 백배나 크지 않겠는가. 아, 애통할 따름이다.【〈쟁유공사설(爭有公私 說)〉】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청컨대 우리 동문의 여러 사람들은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오진영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것으로 무함하여 선사의 도의를 잃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성리의 학문이 다른 까닭 정도일 뿐이겠는가. 그가 고소한 재앙이 비록 혹독하다 하더라도 문인 된 입장에서 어찌 이것을 두려워하면서 말을 다해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쟁하는 것이 공(公)인지 사(私)인지 묻지 않고, 오직 논쟁만을 그르게 여겨서야 될 뿐이겠는가. 또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와 같지 않은가? 어찌하여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고 세도(世道)에 재앙을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굳이 공격하여 성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선사의 글을 익숙히 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이른바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어찌 차마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陳相)을 본받아 추성(鄒聖 맹자(孟子))이 배척한 사람117)이 되겠습니까. 또 어찌 차마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 서 감히 쫓아내지 못하여 민옹(閩翁 주자(朱子))이 싫어한 것118)을 답습할 수 있겠습니까. 【〈제전재선생문(祭全齋先生文)〉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의 동문 천오백 사람 중에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부모와 스승에게 무례함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는 자들도 또 세상에 넘쳐나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감히 옛적부터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단지 선사의 말씀처럼 민옹이 싫어한 것을 행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지금 그의 글을 보니, 곧바로 소자(小子 제자의 겸칭)를 편벽되고 방탕한 말을 하는 음란하 고 사악한 도당이라고 배척하였고, 또 쫒아내야 한다고 의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그 렇긴 하지만 만약 선생의 가르침이 소자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구황 (九荒)119)에 쫓겨나 죽을지언정 마음은 진실로 달고 즐겁게 여겨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 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오진영의 도당과 김세기(金世基) 무리들의 글을 보니, 곧바로 이 몸이 스승의 명을 무함하고 미혹시켜 남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는 간흉(奸凶)이며,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예의가 없는 패악한 무리라고 배척하였다. 또한 이미 검사국에 고소당하는 재앙까지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만약 선사의 도가 소자로 말미암아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니, 또한 선사께서 당시에 전옹(全翁 임헌회)에게 도리를 다한 마음과 같을 뿐이다.오늘날 선비들이 대부분 묘적(墓籍)의 등록120)을 인허 받는 것을 명예와 절개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명예와 절개를 위해 부조(父祖)의 유해 (遺骸)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인정과 천리에서 마땅히 나올 바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 산 사람을 능멸해 죽일 것이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묘를 파서 옮길 것입니다. 일단 묘가 파괴된다면 그 재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 전(大典)》에 "시체를 더럽히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죄가 같다."고 하였으니, 자손이 묘 적을 등록하지 않아 시체의 혼백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변고를 당하게 한다면 이는 부 조가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통분을 참 고 원한을 머금은 채 절박하여 마지못해 산다.121)"는 남긴 가르침을 마지못해 사용한 것입 니다.【〈송회연(宋晦淵)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매번 선사께서 묘적의 등록을 인허 받으신 것을 문고를 인허 받도록 한 가르침의 증거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온당한 것이겠는가. 묘적을 등록하지 않는 재앙은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됨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고는 간행하지 않고 필사하여 보관해두면 아무런 일이 없을 따름이니, 어찌 이른바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재앙이 있겠는가. 그가 억지로 끌어다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이 진실로 그의 정상인데, 사람 중에 그의 말에 현혹되어 분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매우 가소롭지 않은가.질문하신 "제가 죽은 뒤에 누가 도를 전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은, 저 스스로도 소견이 없는데, 다른 것이야 다시 어찌 물을 것이 있겠습니까. 정문(程門)의 제자들에 대해 서 회옹(晦翁 주희(朱熹))은 그들이 스승을 배반하고 이단에 빠졌다고 말하였으니 도를 전수 하는 어려움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병암(炳庵)122)이 병이 없었을 때에 저는 그의 학문이 깊 고 식견이 바르며, 지조가 굳고 덕이 두터워 위로 전옹(全翁 임헌회)의 실마리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벗이 불행하게도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나머지 제자 들 중에는 아직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구구한 제가 선숙(禪宿)123)의 눈물을 감당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노인오(盧仁吾)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에 얼마나 말이 비통하고 슬픈가. 도를 전할 사람이 없음을 근심함에 얼마나 말이 심각하고 절실한가. 바로 공자가 안연(顔淵)을 잃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124)"와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125)"라는 탄식을 한 것과 천고토록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오진영은 어찌하여 차마 진본(晉本)126)에서 이것을 삭제해 없애버린 것인가. 아, 불인(不仁)함이 심하다. 일찍이 삼천(三千)의 제자들이 애공문(哀公問)과 안연사(顔淵死) 등의 장을 《노론(魯論)》127)에서 삭제해 없앴다고 하던데, 이런 이치가 있어서인가? 또한 큰 변고라 이를 만하다.선사께서 신장(愼狀)128)을 삭제하도록 명하신 뜻은 글이 사실과 어긋났다고 여겨서가 아니 라 단지 본가(本家)에서 글과 편지를 받고 답장이 없자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 런 것인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네. 존선사(尊先師) 서(徐) 어른129)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우리 외가(外家)가 신원(伸寃)된 뒤 첫 유현(儒賢)의 글이기에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감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외가(外家)가 가난이 심하여 예 물 없이 편지만으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어렵게 여겼기에 이 때문에 오래도록 답 장 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네.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 계셔서 이런 곡절을 아뢰었다면 어찌 허락 하지 않았겠는가. 이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네."하셨네. 내가 그 분의 효심을 중시하여 속편 (續編)에 넣기로 논의하였는데, 서 어른께서 나로 하여금 원편(原編)에 넣을 것을 다시 생각 해보도록 하신 것이네.【〈임윤만(答任潤萬)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신장은 전옹(全翁 임헌회)께서 임종하실 때에 삭제토록 명하신 것인데, 선사께서 《집촉록(執燭錄)》130)에 실어 놓으신 것은 오히려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고, 논의하여 속편(續編)에 넣으셨다가 뒤에 또 결국 원편(原編)에 넣으셨다. 그런데 음성의 오진영은 도리어 선사께서 손수 교정하신 신도비(神道碑)131)를 바꾸어 묘갈(墓碣)로 고쳐 일컬으면서 이는 국전(國典)에 있다고 하였지만 끝내 국전에서 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타고난 천성이 괴이하고, 일 처리가 망령된 것이 원래 보통 사람의 마음에서 나올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전을 빌려 핑계를 대며 사람을 압도할 구실로 삼은 악한 마음을 볼 수 있다.유상준(柳相俊) 군이 영형(令兄) 동만(動萬)132)과 사사로이 상의하여 결정하고 마침내 초고 (草稿)를 사사로이 판각하여 덕이 높은 어른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軆)인가? 비록 전에 정한 간행소의 공임(公任)과 장재(掌財)를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 만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몰래 간행한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네. 서 어른께서 그 소식을 듣고 전담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어 쩔 수 없이 통문을 발송하여 성토한 것이었네.【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 에야 성토하였으니, 또한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전재(全齋) 문하의 여러 공들이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려 했던 유경당(柳敬堂 유상준)을 성토한 일에 대해 마지못해 한 것이라 하셨고, 다시 "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으니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오진영이 선사의 절개를 무함한 경우는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죄가 백배가 될 뿐만이 아닌데, 또한 편지를 보내 고치도록 권면하자, 사양하고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쪽의 의론은 인의를 함께 행하였다고 칭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중(過重)함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두 공으로서도 형편없는 사람이면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두 공을 가려 뽑아 그들을 고제 (高第)의 제자로 세운 것이 어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하신 것이 되지 않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도당들이 선사의 이 편지를 인용하여 오진영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배척하는 것은 선사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유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오진영은 이미 스스로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쳤으며, 사림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였으며, 누구의 집에나 비추는 해133)를 떠받드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그를 배척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형편없는 사람이 되겠는가. 설사 그들의 말처럼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가려 뽑았다 하더라도 제요(帝堯)는 숭곤(崇鯀)을 가려 뽑았고134), 주공(周公)은 관(管)ㆍ채(蔡)를 가려 뽑았지만135) 모두 사람을 알아보지 것에 귀결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적이 있고, 다시 말년에 그가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신 적이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선배들은 다른 사람의 악(惡)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선(善)을 말하지 않는 것을 천지가 만물 을 생장시키는 마음과 서로 같지 않다고 여겼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구제할 만한 재물이 없으니, 우선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드날리지 않는 것이 만물을 생장 시키는 천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것이네. 지금 우리들은 다시는 더불어 성 리(性理)에 대해 말하지 말고, 망령되고 잘못된 심술과 언행은 털끝만큼도 입과 붓끝에 올려 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이 심제(心弟)가 성사(性師)를 배우는 도이네. 나는 여기에서 이견 (而見) 그대가 식견이 있는지 식견이 없는지, 덕이 있는지 덕이 없는 지를 증험하려고 하니, 이견이여, 이견이여, 공경히 듣고 삼가 지키게나. 【나는 본성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그대의 마음에 합당할 만한 것이 있지 않지만 이 한 마디 말은 이견 그대가 평생 스승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네. 분수에 넘는 말을 했으니, 나의 죄를 잘 알고 있네. ○ 〈오진영(吳震泳)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것은 선사께서 오진영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 끝과 소주(小註)의 말로 보건대 그를 염려하심이 깊고, 그를 경계하심이 절실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꺼이 살펴 들어 공경히 따르지 않고 끝내 훗날 무한한 변괴를 만들어낸 것인가? 또 진인(晉印)136) 중에 이견(而見)을 두 번 부른 것과 소주 여덟 글자를 삭제한 것에서도 또한 그가 기쁘게 듣지 않았던 마음을 볼 수 있다.내 스스로 정력을 헤아려보건대 세상에 오래있을 사람이 아니네. 평생 이룬 것들이 전부 변 변찮아서 일컬을 만한 것이 있지 않고, 오직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 것이 '성(性)' 한 글자에 있기에 감히 뭇사람을 따라 깎아내리지 않았다네. 이로 인해 당시 유림(儒林)에 죄를 얻음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처럼 높았지만 또한 끝내 원망과 후회가 없음은 서로 따르는 여러 군들 이 들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네. 내 마음을 전적으로 그대 이견에게 부탁하니, 힘 을 다해 주지(主持)하고, 매우 공경하고 삼가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노부의 눈이 감길 수 있을 것이네. 기미년(1919) 3월 상순(上旬) 79세에 계화도에 은둔하며 지내는 병든 늙은이가 공경히 말하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이 편지 중에 이견에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말씀이 있고, 또 문고에서 편지의 년월을 갖추어 쓴 것은 특별한 예에서 나오는 일이다 하여 의발을 전수한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경계한 말이고, 그를 인정한 말은 아니다. 또한 선사의 함자를 위조해 서명하여 선사로 하여금 목을 맬 생각을 하시게 했던 사건 전이었고, 그 뒤로 삼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도록 다시는 이 편지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글이 없었으며, 게다가 이기환(李起煥)에게 보낸 편지에 "아무개가 일의 공적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권순명(權純命)의 〈치명록(治命錄)〉에 "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된다."는 말씀이 있으니, 이 편지를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권순명은 그의 당인데도 오히려 이러한 기록을 두었으니, 더욱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 만약 이런 기록이 이쪽에서 나왔다면 그가 또 선사의 명을 무함하고 현혹했다고 말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집안사람 중에 어버이를 죽인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집안사람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 또한 감히 말한다. "동문 중에 인허를 내라고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선사를 무함하여 대의(大義)를 더럽힌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동문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는가."내가 신(申)과 절교한 것으로 신의 무리에게 무함을 받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김의 형제는 귀가 막히고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이 아니면서 어찌하여 듣지 못한 것인가?【〈최병 심(崔秉心)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이미 연서(聯書)로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하고, 또 그의 〈고현천문(告玄阡文)〉137)을 변론하였다. 또 박진호(朴震鎬)에게 말하여 그 조부(祖父)의 글을 받지 말게 하여 박진호의 의심과 노여움을 받고 김용승의 무리인 박인규(朴仁圭)에게 무함을 당하는데 이르렀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오진영의 무리는 도리어 나를 김용승과 일당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연서로 절교한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니, 매우 가소롭다. 이것은 진실로 그의 무리들이 비록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니, 오직 사람을 밀쳐내는 일생의 장기(長技)이다.김평묵(金平默)이 나의 제사문(祭師文)을 본 것이 병자년(1876, 고종13) 계동(季冬 12월)이 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문리(文理)에 통달하지 못해 그것이 신기(新奇)한 것을 만들어 내고 어려운 일을 구차하게 해내는 것인 줄 몰랐다가 정축년(1877)에 자신의 뇌문(誄文)이 물리 침을 당한 뒤에야 문리에 비로소 통달하여 그것이 세 정승과 여섯 현인을 배척한 것임을 활 연하게 깨달았던 것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크나큰 죄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공격한 때에 있지 않고, 김평묵의 제문을 받지 않은 날에 있습니다.【〈아무개에게 보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전(傳)ㆍ표(表)의 일로 오진영과 서로 관련된 것이 임술년(1922) 겨울이었다. 내가 만약 선사의 명을 현혹하려다 그의 다스림과 바로잡음을 받았다면 이 당시에 어찌하여 한 마디 하문(何問 힐문(詰問))은 없고, 반대로 앞뒤의 논설이 다르다 하여 스스로 송구스럽다는 편지가 있고, 이어 갑자년(1924) 가을에 그의 선사에 대한 무함을 성토한 뒤에야 비로소 명을 현혹시켰음을 깨닫고 그것을 단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죄는 명을 현혹한 때에 있지 않고, 오진영을 성토한 날에 있는 것이다. 병자년(1936) 여름 김세기(金世基)의 흉문(凶文)에 이르러서는 명을 현혹한 것이 또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 아, 선사를 무함하여 다른 사람의 성토를 받은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성토한 자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도둑질해 놓았다가 주인이 찾아서 가지고 감을 당한 도둑이 도리어 주인이 도둑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오늘날 선비들이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校宮 향교(鄕校))를 보존하고 오히려 스스로 성 현을 높인 공으로 자처하니,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화도만록(華島漫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교궁을 보존하는 것과 자기의 문고를 간행하는 것 중에 그 경중(輕重)과 대소(大小)가 과연 어떠한가? 선사께서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을 보존하는 것을 오히려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자기의 원고를 간행하여 매우 부끄러움이 없는 행위를 무릅쓰려고 하시겠는가. 흉악하고 흉악하도다. 무함하는 자의 말이여.주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고상하고 신묘한 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인이 그 것을 숨긴다면 이는 성인이 대단히 형편없는 사람이니, 불충(不忠)과 불신(不信)을 성인이 제일 먼저 범한 것이다." 하였네.【〈정세구(鄭世求)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주자의 이 말은 성인은 숨김이 없다는 것을 심하게 말한 것이다. 오진영은 자신을 성토하는 글 중에 선사께서 혼자 있을 때 명한 일이 없음을 심하게 말한 "만약 일을 비밀리에 해야 해서 몰래 한 사람에게 부탁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심술(心術)과 견식(見識)이 모두 매우 우매한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선사를 논박(論迫)하는 패악한 말이라 단죄하였고, 선사께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가 없었음을 심하게 말한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不忠)을 반복하신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 단죄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또한 주자의 이 말에 대해 논박하는 패악한 말이 위로 성인에게 미쳤다고 할 것인가?한 가문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아주 악랄한 소인이 아니라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네. 오늘날과 후세 사람들이 이견을 소인이라 이른다면 그대는 의심할 것이 없는 군자이네. 그 렇지 않다면 그대가 어느 곳으로 가서 발을 붙이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계셔서 오진영이 59명을 전주(全州) 검사국(檢事局)에 고소하고, 사손(嗣孫)을 진주서(晉州署)에 압송해 가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셨다면 반드시 이 말로 정세영(鄭世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융흥(隆興) 초에 화의(和議)138)가 결정된 뒤에 한무구(韓無咎 한원길(韓元吉))ㆍ이덕원(李德 遠)139)이 모두 지킬 바를 잃었는데, 오직 왕가수(王嘉叟) 등 여러 사람만이 오히려 정론(正 論)을 견지하였으니140), 선생이 위원리(魏元履)141)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주자대전표의 (朱子大全標疑)〉】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무구ㆍ이덕원은 모두 당시 명망을 지닌 사람임에도 또한 절개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고, 유독 왕가수 한 사람만이 있었으니, 나 택술은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의론에서 진실로 느끼는 바가 있다. 아, 주자가 아니면 어느 누가 홀로 정론을 지키는 것이 귀중한 일인 줄 알겠는가.나라가 이미 망하고 임금이 이미 폐해졌으니, 신하가 장례를 치르면서 어찌 길흉을 논하겠 는가. 자손과 문하생들은 단지 다툼이 없는 땅을 구하여 매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효도 이며 도의(道義)이다.【다른 사람과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이 어찌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가 아니겠는가. ○ 〈경구에 부치고 아울러 제생에게 보이다[寄敬九幷示諸生]〉】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이미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을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로 여기셨으니, 어찌 문고를 간행하기 위해 저 일본에게 나아가 청원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인허를 낼 생각을 하시고 인허를 내는 분부를 하셨겠는가. 이것이 일찍이 문고의 간행을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유서(遺書)를 남기신 이유이다. 學問之弊有兩端, 一是苟偸, 一是熱閙. 熱閙者, 胸中不安貼, 凡事要自主張, 不問前言往行如 何, 一任自己所見, 胡叫妄作而已. 苟偸者, 又却只是謹身惜名, 目見邪說詖行剝蝕正道, 而不 敢開口指陳, 其行處亦多可觀, 終是苟簡底意思在. 【〈與鳳峀金丈〉】澤述謹按: 以近日吳震泳事論之, 胡叫妄作之不已, 而至於誣師節以認稿, 改師稿以己見, 熱閙之弊一至於此. 若其目見誣師悖行剝蝕正道, 而不敢開口指陳者, 不閑師道之罪與害師道之罪, 相去不遠, 苟偸之弊, 一至於此. 先師之言此兩弊, 其慮遠哉.專察利害之弊, 至於遺君後親倍師賣友.【〈答峿堂李丈〉 下同.】澤述謹按: 震泳不勝事功之心名利之念, 其弊至於忘君戴讐陷師禍友, 可不畏哉?凡古來異學之士, 由後人視之, 固是門外, 自當時觀之, 猶在室中. 且如墨氏宗堯舜, 是墨氏在 孔孟室中. 陸氏尊鄒魯, 是陸氏在程朱室中. 惟其如是, 故世人親聞儒者之辨闢, 而猶認爲正學. 聖賢目見世人之陷溺, 而攻之如血讐. 此在當時, 不知孰爲得失, 而後世知道之士, 出而正之, 然後始有中外邪正之分, 而不可以復合矣.澤述謹按: 人多譏澤述辨陰震者, 曰: "彼亦尊師, 胡爲乎室中之鬪?"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如何哉?凡吾儒之辨異端者, 只認爲道理當然而爲之, 不可較吾說之行否它人之從違彼勢之强弱, 而爲之 前却也. 孟朱之時, 彼固未嘗畏之. 雖孟朱亦未敢便道擧天下無一人不從吾說者矣.澤述謹按: 人又有譏澤述辨陰震者, 曰: "彼衆子寡, 彼强子弱, 子雖辨之, 子說其能行諸?"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何如哉?彼之間言長語誣辭惡聲, 愈辨而愈甚, 徒自憤懣耳, 不若付之忘言. 久則是非自明, 縱人未明得, 亦須有天在, 正不當煩惱我心君也. 此比年所受用.【〈答安渾齋〉】澤述謹按: 澤述於震承及其黨之誣辭惡聲, 亦曾受用先師此訓而得力矣. 但其事關先師者, 則不容終已耳.吾丈所謂"由前則以爲講論薄過而忍之, 由後則爲師門大變而力討之, 非但田某之不心服, 亦恐 傍觀者, 以爲出於私心之作用, 而非出於義理之當然"者, 可謂刺著他痛處.澤述謹按: 震泳之於金容承討己誣師之後, 曰: "此人年前呼漢農老." 又曰: "此人心中無先師久矣." 漢農老無先師, 何等大罪? 而由前則不惟以爲薄過而忍之. 且多年敬信愛護, 至定校正師稿有司望帖而聘之. 至於討己之後, 始乃發其罪而討之, 豈非私心作用哉? 雖然, 承則終於倍師, 非渠之所當不心服. 但震之心術則然耳.金之當初爲此怪論也, 其心豈復有忌憚? 而今乃爲此遮藏之計. 此則某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 無其功也.澤述謹按: 震泳之當初"料量爲之""不必深拘""不言之敎""天地生物, 聖人立極""不諱公言"之說而誣師也, 其心豈復有忌憚? 後乃以"語欠區別""命辭疏忽"等說爲遮藏之計. 此則湖南之士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無其功.大抵先集是彼之手分現化, 絶非先先生所以處於同門與門人之意. 吾恐先先生之目, 將不瞑於地 下, 甚可痛哉. 【〈答趙泰判〉】澤述謹按: 先師於肅齋, 以其爲先師之同門, 猶以文集之被人手分現化, 深致痛恨, 而至謂先生之目, 不暝於地下. 胡乃今之君子, 於親師文集之被人無難改削也, 恬視而曾無痛恨之意也? 絶可怪也.寧可無諡號, 諡狀決不可使其人作也. 【〈與任景孺〉 下同.】澤述謹按: 年前, 澤述聞田鎰孝使震泳作先師行狀之說, 亦曰: "寧可無行狀, 行狀決不可使誣師人作也.事係師門, 一息未絶之前, 豈容放過?澤述謹按: 澤述於辨師誣正稿亂, 其心亦如此而已. 或以事在年久, 迄可已矣. 規余者, 視先師此言, 謂如何哉?嘗見明儒高景逸之言, 曰: "氣節而不學問者有之, 未有學問而不氣節者. 若學問而不氣節, 這 一種人, 爲世敎之害不淺." 此言美矣, 然而未盡. 蓋若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 其曰"學問", 只是外面聲華而已.【〈與王司諫〉】澤述謹按: 使先師誠有認意認敎, 如陰震之說, 是所謂"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者. 嗚呼! 豈其然乎? 或者護法陰震之不已, 至有謂"雖有認敎, 不害爲先師"者, 又至有謂"有認敎, 然後爲先師, 若拘牽於區區之小諒細節, 而不思道之傳後, 不足謂大君子"者. 噫! 天理之晦, 人心之邪, 乃至於此乎?今於彼人罔極之誣, 反而求之吾心, 如見些子怨恨恐㥘底苗脈, 卽此是窒碍, 何等苦腦? 豈所謂 "無入而不自得"? 豈所謂"坦蕩蕩"? 竊自謂吾人正當於難處險處, 默默加體道之功, 不可只於 文字上做家計也.【〈答李友明〉】澤述謹按: 澤述於陰震罔極之誣, 反求吾心, 雖自謂無怨恨恐㥘, 然要之至於"無入而不自得""坦蕩蕩", 然後乃已, 先師正當於難險處加功之訓, 如承今日面命矣.一番人以某之言士子喪中倡義似過中云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答金光國〉】澤述謹按: 震泳以澤述論渠所作〈鄭節士傳〉後論中混華夷爲說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 先師是直論倡義之人, 以其只論居喪者之中否, 而不論其事之是非. 罵者之言, 猶爲無當. 況澤述但論其文議論之有害義, 而初不論節士之事者, 則罵者之言, 豈非尤無當乎? 嗚呼! 澤述從先師後而得排節義之目, 於分榮矣, 只見彼用心之險也.當此斯文分裂之日, 朋友雖有小疵, 苟非大故, 亦可以含垢藏疾, 以全交道, 此實朱、宋兩先生 之意也.澤述謹按: 人有引先師此書, 謂吳震泳金容承不當絶. 噫! 誣師倍師非大故而是小疵乎? 豈不觀先師絶鄭申李三人之事乎? 此所謂"小疵", 指申梨山之知嘉金無狀而特不能顯然告絶而言耳.梨每以斥逐祭文, 爲激成惡心, 挑發禍機. 某竊謂此事, 只論是與不是, 不得說激觸, 此似是利 害上言論也.【〈答鄭命新〉 下同.】澤述謹按: 吾門之謂討絶吳金爲激成惡心挑發禍機者, 視此訓, 謂何如也?特以梨山有調停之論, 使李讒益肆, 金勢益盛, 所以成今日之禍. 今乃不以自咎, 反歸罪於直道 而行者, 不知此是何等見識議論也.澤述謹按: 吾門之變, 特以中立者有調停之論, 故使吳誣益肆, 金倍益悖, 以成大禍者, 亦有如先師此說也.向有一朋友, 見謂"君之欲退其文, 可謂疏矣.彼中氣勢, 何可當也?" 然則吾人臨事, 不當視理 之是非, 以爲進退, 只看人之强弱, 以爲前却矣, 此爲何等學問?澤述謹按: 澤述始討陰震也, 其後之累辨不已也, 人固有以彼勢不可當勸止者矣. 然吾只以當視理是非爲進退, 不看人强弱爲前却, 亦如先師之心已矣. 果不免訴禍於前, 誣辱於後. 向之勸止者 自謂有先見之明. 然我何有一毫怨悔於其間哉?凡橫逆之來, 除却關係世敎與道術者外, 且當容之.【〈答林奭榮〉】澤述謹按: 澤述於震邊橫逆之來也, 除却關係誣師亂稿者外, 只得一切受之, 而不辨理矣.子敬謂明道不絶王安石, 伊川不校蘇東坡. 鄙謂明道德量宏大, 然使王氏譏侮父師, 則其待之必 別矣. 且彼金柳門人以東坡自處. 則某亦不與之校矣. 今彼自謂孔朱正傳, 而性理議論, 出處事 行, 咸乖聖訓. 則爲儒者者, 安得無言?【〈與崔鍾和〉】澤述謹按: 湖人之與陰震絶者, 以其誣陷先師故爾. 且彼若非平日高弟, 而又不以傳鉢自處, 則湖人之辨, 亦不必如此之力矣. 惟其自處以傳鉢之高弟而誣師, 則人不能不信. 故辨之不得不力也.一正一偏, 一公一私, 必不免於有爭. 傍觀者, 須精察於所以是非之方, 又須細看彼此言辭之溫 暴氣像之平險, 而後以定吾向背之理, 施吾扶抑之力可也. 不然而或兩是之, 或幷非之, 先賢 所譏"洛也是, 蜀也是, 元祐也非, 熙豊也非"之說也. 是豈天命之理與聖人之法乎?【〈答林章 佑〉】澤述謹按: 今之爲湖亦尊師, 嶺亦尊師, 嶺亦誤事, 湖亦誤事之說者, 胡不察所以是非之方, 又看言辭溫暴 氣像平險, 而向背扶抑, 如先師之說也? 【鄭道鉉對金弘梓言: "議論則湖是." 田璣鋠對余言: "嶺湖之戰, 湖勝." 余曰: "湖受嶺困, 至遭訴禍, 何謂湖勝?" 田曰: "非謂戰勝之勝, 謂理勝之勝." 余曰: "何謂?" 田曰: "湖之文字主論事, 嶺之文字主打人, 是固公論也. 故謂之勝." 鄭與田, 俱居嶺而右嶺者, 其言如此. 則非不知所以是非之方及言辭溫暴氣像平險之分, 而終不能知所擇於向背扶抑之間, 是可歎也.】但就奠章, 條而晳之, 以白其師心之無它可也. 終無奈有心之於無心, 有眚怙之別. 於是舍其 所以分裂之故, 顧而之它, 裝飾其疑, 似掇拾其流傳, 以爲汙衊賤身疑眩後進之計. 可見用心 之苟且勞矣.【〈答關西諸生〉】澤述謹按: 使陰震之說, 苟無誣師之實, 爲其徒者, 但就震之本文, 條晳其不爲誣師, 可也. 乃顧而之他, 裝飾其疑, 似抑勒其無據, 以爲汙衊湖人疑眩一世之計. 可見其用心之苟勞, 而尤見其誣師之罪出於有心之怙也.使華西之於栗翁, 眞有心悅誠服之意.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 子苗脈矣. 使華西之於朱子, 眞有篤信不貳之實.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 難謂其無些子苗脈矣.【〈華門二子論〉】澤述謹按: 今與後人論震泳事者, 亦豈不曰"使艮齋眞無認意認敎, 則其高弟,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子苗脈矣." 此余所以深懼而不得不辨者. 或者指余爲過慮, 何其無識慮也?尹喆圭之詐傳勅令而誘逐賓師也, 朝廷雖不勘核, 章甫却當聲討.【〈瑣墨〉 下同.】澤述謹按: 退溪所謂"通文上疏, 非儒者之事", 以儒者干預朝政而言, 非謂斯文中有事而不相告也. 今有引此以非湖南之通文以討震者, 已失退溪本旨矣. 今又以先師說觀之, 章甫之討尹喆圭, 因朝廷不勘其罪而行之, 則是不可謂非干預朝政者而亦許之, 尤可以見謂通文討震非儒者事者之無識也.儒者著書數十卷, 不可用曲筆, 寃枉古今一人, 可謂接承天地好生之心, 後世應得賢子孫. 昔人 言: "今之論人, 有幷跡而誣之, 那能論心? 此天譴鬼責所係, 愼之."澤述謹按: 陰震及其徒黨誣我以辨師誣出於文字之修嫌. 我之於渠, 使實有可嫌之跡, 避嫌而不辨誣, 非爲人弟子之職, 固不可以此而誣其心, 而況初無可嫌之跡, 乃構捏抑勒, 强成疑似之跡者乎? 渠何不懼? 然却顧於"幷跡誣之, 那能論心? 天譴鬼責所係"之訓也乎.歷數古今, 萬般弊病, 其源無一不出於吾儒之未晰乎聞達之辨, 不審乎誠僞之幾, 至於事求可功 求成, 而不以第一等十分道理自爲而爲人也.【〈告先師墓文〉】澤述謹按: 事求可功求成, 已足以致萬般弊病, 而況先師嘗斥陰震以事功爲重而不計道義者, 非但事求可功求成而已, 則宜其釀成後來"僞署師銜, 投諸遠人""誣師認敎""改亂師稿""乞錢日雀""網打同門""押囚師孫"萬般罪惡也.某亦有血肉之身, 豈無自私之理? 只爲見得尊師衛道, 不容不爾, 故目見仇謗溢世, 而不敢變素 守以徇之, 其情良亦戚矣. 苟得人地如執事者爲之, 則斯文有扶植之助, 而自身無拳踢之加. 乃 執事自占便宜, 而無任事之心, 使此孤賤陋劣者代之, 是豈君子公正之心乎? 執事不惟不自任, 乃或反助彼勢, 無乃尤不可乎?【〈與申仰汝〉 下同.】澤述謹按: 今於陰震之誣亂, 如得同門老成有人地者, 任辨討之事, 則可以戢彼邊之恣肆, 而明先師之道義. 胡乃皆自占便宜, 反助彼勢, 使此人微言輕如澤述者任之, 以致仇謗溢世, 禍患加身也? 雖以尊師衛道之不容不爾而然, 然其情良亦戚矣. 嗚呼! 以伊昔先師之人地, 猶有此歎, 況於如今小子之卑微乎?一番人又以某祭文有陰陽心迹之語, 謂之慢神, 以此爲大罪. 然陰陽離合心跡矛盾之說, 農翁嘗 以擬之於文谷, 以明其必不然也. 用之於父者, 謂不可施於師, 某不識其何說.澤述謹按: 陰震以湖南通文中"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語, 所以深明先師必無認敎"者, 謂上及不敢言之地, 以此爲大罪. 何不讀先師此訓, 而自服勒人之罪乎? 蓋其心術與先師所謂"一番人"者, 一串貫來, 殆若一氣而傳, 同胎而生也.惟是未嘗爲學, 便都無事, 今旣從士友之後, 與聞其說, 便如此計較不得, 才涉計較回互, 便是 靠負聖賢之敎也. 且孟子所以與人辨爭, 只要人知聖人之爲是, 異端之說爲非爾.澤述謹按: 今之辨師誣也, 若恐其致禍, 才涉計較回互, 便是靠負先師之敎也. 其所以爲辨, 只要人知先師之無是, 而彼說之爲誣爾.愚竊覵執事之意, 似是懲創於懷尼之爭湖洛之辨. 故凡於人物邪正之間講論同異之際, 一切以和 同爲主, 殊不知分別邪正, 剖判同異, 令不相混淆, 乃是自然之和, 不然只是私意人欲而已矣.澤述謹按: 近日之勸澤述及田鎰中與吳震泳平和者, 豈不竦然於先師私意人欲之訓也乎?執事亦非不知彼文之可惡, 而惟欲以彼自不是處之. 此若只關己事則可, 今乃父師受侮, 而只以 此一句冷語了之.澤述謹按: 震泳之誣, 只關己事者, 則固以彼自不是處之已矣, 其關於先師者, 則不敢以一句冷語了之, 以戾於先師心法也.執事兄弟之處之也, 在自家則怒之, 在先師則安之.澤述謹按: 震泳於容承年前, 呼漢農老, 心中久無先師也, 事在先賢先師則安之, 及其討己之誣師也, 事在自家則怒之, 始發其罪, 又使人拳踢於先師靈前. 先師此言, 若先見震之心述而豫言之者矣.昔之亂朱子者, 在朱門之外, 今之亂朱子者, 在朱門之內.澤述謹按: 昔之誣師者, 在師門之外, 今之誣師者, 在師門之內. 在師門之內, 故其說有未易辨者, 其說有未易辨者, 故其辨之不得不力也.吳伯豊, 朱門之顔淵也, 慶元間, 樹立卓然, 屢被師門之稱奬矣. 尤翁之作滄浪文字, 有李誠父 吳伯豊等語, 後以大尹之言而削去之. 夫尤翁之比擬, 大尹之請刪, 豈以伯豊眞有趨勢之累? 只 爲其嘗有附韓之謗也.【〈守玄齋偶記〉 下同.】澤述謹按: 人有言"震泳雖誣師, 師實無是實, 則人誰信之?" 此不思之甚也. 吳伯豊雖無趨勢之累, 只爲其嘗有附韓之謗, 至削去於文字之作. 則先師雖無實地之累, 安知其不以嘗有認敎之誣, 受後人之刪於文字如吳伯豊耶? 區區竊有是懼焉.蓋其告絶之書, 以爛漫參差之說爲主, 而彼邊文字之分疏祭文者, 無慮累萬言, 而終無一句就此 分明道破者, 只須就宋朝四賢, 巧爲辭說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其心所在, 可見矣.澤述謹按: 湖南辨討陰震之文, 以認意認敎之說爲主, 而彼邊分疏之言, 無慮累萬言, 而終無就此分明道破者, 只就辨討人身上, 巧爲辭說, 勒成罪案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可見其心. 不以先師爲無認敎, 而猶有所忌憚, 而不敢放言謂有矣. 及至震答徐柄甲書"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說出, 而湖人僅脫訴禍, 垂頭喪氣, 無更討之力. 則於是震再與徐書, 放膽大言明有不言之敎, 至於無所忌憚矣.爲門人子弟者, 見其如此, 而避與人失和之小嫌, 而忘爲師辨誣之大義. 則師生之倫, 自此廢矣. 師生之倫廢, 則三綱九法, 亦無所賴而立矣.澤述謹按: 吾門諸人之避與震失和之小嫌而不辨師誣者, 能不竦然心目於此訓矣乎? 目見此訓, 而猶不知竦然, 此聖人所謂"吾未如之何也"者. 復何言哉?此而不闢, 程朱栗尤之道, 將不得行矣. 身爲士子,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靠負了聖賢敎育之恩也.澤述謹按: 震誣而不闢, 艮翁之道, 將不得行矣. 爲其弟子者,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是靠負了艮翁敎育之恩也.其所以得罪於當世,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抉摘高文, 遂至於戈㦸相加, 竄逐是擬.【〈答沈 致大〉】澤述謹按: 澤述所以得罪於一邊,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勒執其文, 遂至於訴之檢局, 加以大禍. 嗚呼! 昔之先師今之小子同一所遭.近世儒流議論誣人, 則驅之以聖門亂賊王家凶逆, 稱人, 則推之爲古今一人孔朱齊等, 余甚憫 之.澤述謹按: 震之徒黨誣人, 則驅之以滅父賊子千古小人, 稱震, 則推之以見識文章優於先師, 又至幷侔於尤翁. 此其可惡之惡習. 然其實困於私意客氣, 不自脫出, 爲是狂悖, 則非可惡也, 伊可憫也.頃者, 仁父而見以出而圖存見勸. 此是功業爲重, 不計道義者, 却與嘉陵諸人, 不甚遠也.【〈寄華 敬二兒〉】頃者而見之初來也, 傳孟士幹之意云: "某丈一起, 則國中士流皆響應. 又京中則有某某可仗, 闕內則有某宮可通." 余謂: "士君子有爲, 詎可從某宮做事?" 及而見再來却言: "某人比已剃 髮, 誠是意外." 余曰: "賢輩所擬以爲可仗者如此, 誠可笑也."澤述謹按: 觀此震泳【而見其字】之所爲先師之所斥, 則其爲人何如也? 爲其有此根子, 所以後來致得僞錄師銜, 投諸遠人, 使師懷繯待變之變也. 蓋此事以前, 先師時致愛重之意, 此事以後, 則不復然. 而更有渠黨權純命所記〈治命錄〉中"吳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矣. 然而渠徒方且謂震是先師傳鉢之人, 而指辨討者爲傷先師知人之明, 殊不知先師知人之明, 早已在"不計道義"之斥"終有事爲"之慮矣.至於朱子, 又以性理學問異同之故, 遂遭林栗之彈章, 又見陸門之仇視, 而葉氏亦嘗以書誚其與 人爭辨, 而朱子猶以未盡其言自恨矣. 然則須看他與人爭, 是爭箇公道, 爭箇私意, 不問其所以 爭, 惟以爭爲非而已. 則自古國家之征討及聖人君子之自守其正, 而被人詆訾, 被人擠陷, 或見 人害正, 而立朝則擧劾, 在野則擯斥, 而反遭其害, 此似獵取田禽而噬腊遇毒之象, 柰何避之? 雖以天地造化之氣, 亦未免有陰盛之極, 至與陽爭, 兩敗俱傷之理. 氣數盛衰, 旣如此, 則人事 是非, 亦何獨不然? 假使孔夫子居今之世, 恐也不免. 苟欲避與人爭競之嫌, 則將見無禮於君 父, 貽禍於聖道, 而不惟不能攻討, 而又有倡爲不必攻討以與彼角勝之說者. 其爲國家世道之 害, 豈不百倍於與人爭競者乎? 噫, 其可痛也已.【〈爭有公私說〉】澤述謹按: 請我同門諸人試思之. 震泳之誣以認敎, 亡師道義, 奚但性理學問異同之故乎? 彼之訴禍雖酷, 爲門人者, 豈可畏此, 而不盡言而辨之乎? 不問所爭之是公是私, 惟以爭爲非而已乎? 又試思之. 師不與君父等乎? 胡爲乎欲避與人爭競之嫌, 見無禮於父師, 貽禍於世道, 非惟不能攻討, 又倡爲不必攻討之說乎? 諸人非不熟讀先師之書, 猶然如此何哉? 怪事怪事. 無乃所謂"書自書, 我自我"者耶?豈忍效陳相之變於夷, 而爲鄒聖之所斥? 亦豈忍見無禮於父師, 拱手坐視而不敢逐, 以蹈閩翁之 所惡乎?【〈祭全齋先生文〉 下同.】澤述謹按: 吾同門千五百人中, 其爲變夷之陳相者, 固不足言, 其見無禮於父師而拱手坐視者, 又滔滔皆是, 可勝歎哉? 澤述之不敢自古便宜者, 只爲懼蹈閩翁之所惡如先師之言而已.今見其文字, 直斥小子爲詖淫之說淫邪之黨, 而又有行遣之論者矣. 雖然, 使先生之敎, 由小子 而不墜於地, 則雖竄死九荒, 其心誠甘樂之, 不自以爲悔也.澤述謹按: 今見震徒世基輩文字, 直斥此身爲誣幻師命, 抑勒人罪之奸凶, 亂常無禮之悖類. 亦已遭檢訴之禍而幾死僅生矣. 雖然, 使先師之道, 由小子而不墜, 雖死無悔, 亦如先師當日盡分於全翁之心而已.今之士多認墓籍爲損名節而不肯爲, 爲自己名節, 不顧父祖遺骸, 恐非人情天理之所宜出也. 彼 始也, 陵夷我人, 不從則終必掘移矣. 纔一破基, 其禍不可言. 《大典》: "汙穢尸軆, 與殺人同 罪." 則子孫不籍, 而至使軆魄, 遭罔測之變, 是與父祖被殺同, 此如何可忍? "忍痛含寃, 迫不 得已"之遺訣, 不得已而用之矣.【〈答宋晦淵〉】澤述謹按: 震每以先師許墓籍爲認稿敎之證, 此何所當也? 墓不籍之禍, 至於與父祖被殺同固也, 稿不刊而寫藏, 則斯無事已, 豈有所謂"與父祖被殺同"之禍者耶? 彼之强引掩罪, 固其情態, 人有眩於其說而不知辨者, 豈不可笑之甚哉?所詢"某身後, 誰可得其傳?"者, 某自無所見, 其它更何問也? 程門諸子, 晦翁且謂其倍師而淫 異, 甚矣, 傳道之難也. 炳庵無恙日, 某意其邃學正識, 堅操厚德, 可以上續全翁之緖. 此友不 幸遽九原矣. 自餘諸子, 未有可擬望者, 區區不勝禪宿之淚爾.【〈答盧仁吾〉】澤述謹按: 此於悼人云亡, 何等痛傷語? 憂道無傳, 何等深切語? 正與孔子失顔淵而發"未聞好學", "噫, 天喪予"之嘆, 千古同情, 震何忍刪沒於晉本乎? 噫, 其不仁之甚矣. 曾謂三千之徒, 刪却哀公問顔淵死等章於魯論者, 有是理也乎? 亦可謂變之大者.先師命削愼狀之意, 非謂文字爽實, 只因本家受文得書而無答, 則疑其不以爲重而然也. 尊先師 徐丈言: "此是吾外家伸寃後一初儒賢文字, 不容不傳後, 何敢不重之? 但外家貧甚無幣, 難於 空簡致謝, 所以久無答也. 先師在世, 而稟此曲折, 豈不見許? 因而泣下." 某重其孝思, 議入續 編, 而徐丈令某更思之.【〈答任潤萬〉下同】澤述謹按: 愼狀是全翁臨終時命削, 而先師至載於〈執燭錄〉者, 猶以不得已之故, 而議入續編, 後又終入原編. 陰震則乃變動先師所手定之神道碑, 改稱墓碣, 謂是有國典, 而竟未見國典. 於此可見賦性乖異, 處事妄錯, 元非常情所出, 亦見其籍託國典, 作壓倒人欛柄之惡心也.柳君相俊與令兄動萬私相議定, 遂將草稿暗地開板, 不令長德一人知之. 此何等事軆? 雖仍前定 刊所公任掌財, 然事至於此, 不得不歸於私印矣. 徐丈聞之, 專書令止之, 不從, 不得已發通聲 討.【書止, 不從, 然後聲討, 亦見仁義幷行.】澤述謹按: 先師於全門諸公聲討柳敬堂私印師稿之擧, 旣以爲不得已, 更謂"書止不從, 然後聲討, 見仁義幷行"者如此矣. 若震之誣陷師節, 比私印師稿, 其罪不啻百倍, 而亦書勸改, 謝不從, 然後聲討. 胡爲乎一邊議論, 非惟不以仁義幷行贊之, 至謂過重已甚乎? 絶可怪也.二公而爲無狀人, 則先師所以簡拔二公於衆人之中, 而立之爲高第弟子者, 豈不爲眼不識人之失 矣乎?擇述謹按: 震黨有引先師此書, 謂斥震爲無狀人, 歸先師於眼不識人, 此不知類也. 震也旣自爲誣師改稿, 禍士林押師孫, 戴誰日之人, 則豈待人斥之而後爲無狀? 假使先師簡拔衆中如彼之言, 帝堯簡拔崇鯀, 周公簡拔管蔡, 而幷不歸於眼不識人, 而況先師早有不計道義之斥, 更有末年終有事爲之慮者乎?前輩以稱人之惡, 不稱人之善, 爲與天地生物之心不相似. 我輩無財可以濟人, 且樂道人之善, 毋揚人之惡, 爲少助天地生物之心. 今我輩再勿與之言性理, 若其心術言行之妄錯, 一毫不可掛 於口頭筆尖, 是爲心弟學性師之道矣. 某於是將以驗而見之有見無見有德無德, 而見! 而見! 其 敬聽而謹守之哉.【某性癡昧, 未有可以當盛心者. 至此一言, 不妨作而見平生之師也. 僭越之 言, 知罪知罪. ○〈與吳震泳〉 下同.】澤述謹按: 此先師與吳震泳書也. 以書末及小註之語觀之, 其慮之也深, 戒之也切矣. 其柰不肯審聽敬循, 終致後來無限變怪何? 又就晉印中刪再呼而見及小註末八字, 亦可見其不喜聞之心矣.某自量精力, 非久於世者. 平生成就, 全然鹵莽, 未有可以稱述者. 惟赤心所重, 在一性字, 而 不敢隨衆貶降, 因以得罪於時儒, 直與須彌高, 而亦終無怨悔也. 相從諸君, 無不聞知, 鄙心全 託而見, 極力主持, 十分敬愼, 得而不墜於地, 則老夫之目, 可以瞑矣. 己未三月上旬, 七十九 歲, 華遯病叟敬言.澤述謹按: 震以此書中有全託而見語, 且備書年月於文稿, 事出特例, 作傳鉢之據. 然此亦戒之之辭, 非許之之辭. 亦在僞署師銜, 使師懷繯之前矣. 其後日月至於三四年之久, 而無復愛重文字如此書者, 更有與李起煥書言"某人以事功爲人所笑"權純命〈治命錄〉"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 則其不可以此書爲據也明矣.【權是渠黨, 猶有此錄, 其爲可信益明. 如使此錄出於此中, 則安知渠又不以爲誣幻師命乎?】同室有弑父者, 豈復可以同室待之?澤述謹按: 澤述亦敢曰: "同門有誣師以認敎而汙衊大義者, 豈復可以同門待之?"余以絶申爲申黨所構誣, 無人不知, 金之兄弟, 非耳塞神昏者, 如何不聞?【〈答崔秉心〉】澤述謹按: 澤述旣聯書絶容承矣, 又辨其告玄阡文矣. 又言於朴震鎬, 勿受其祖文字, 而至遭震鎬之嫌怒, 承黨朴仁圭之構誣矣. 此無人不知, 震黨乃罪余以黨承, 而謂聯絶爲僞, 絶甚可笑也. 此固渠輩雖知之, 若不聞也, 而惟以擠人之一生長技也.金之見余祭師文, 在丙子季冬. 此時文理未達, 而不及知其爲創新苟難, 乃至丁丑自家誄文見却 之後, 文理始達, 而豁然覺其斥三相六賢者耶? 然則余之大罪, 不在於攻華西, 而在於不受金文 之日矣.【〈與某〉】澤述謹按: 澤述以傳表之事與震泳相關, 在壬戌冬. 我若幻師命, 而被渠釐正. 則此時何無一言之何問, 而反有以前後貳論自悚之書, 乃甲子秋, 討渠誣師之後, 始覺其爲幻命而罪之耶? 然則澤述之罪, 不在於幻命, 而在於討震之日矣. 至於丙子夏世基凶文, 則幻命又變爲誣師. 噫, 誣師而被人討者, 反謂討之者爲誣師, 是猶竊盜而被主人推去者, 反謂主人爲盜也.今之士, 請願於彼, 得存校宮, 尙自居以尊聖之功, 可謂無恥之甚者矣.【〈華島漫錄〉】澤述謹按: 存校宮之與刊己稿, 其輕重大小果何如也? 先師以請願於彼而存校宮者, 尙謂無恥之甚, 而況請願於彼, 以刊己稿, 而冒無恥之甚乎? 凶矣凶矣, 誣者之言也.朱子嘗言: "若有高妙底道理, 而聖人隱之, 是聖人大無狀, 不忠不信, 聖人首先犯著."【〈答鄭世 求〉 下同.】澤述謹按: 朱子此言, 甚言聖人之無隱也. 震泳以討文中"若謂事宜秘密, 暗託一人, 則是幷與心術見識而昧昧"之甚言先師無獨命者, 罪之以論迫先師之悖言, "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甚言先師無認敎者, 罪之以上及不敢言之地. 然則其亦將以朱子此言, 爲論迫悖言上及聖人也乎?網打一門, 非小人之甚者, 必不爲也. 今與後之人, 謂而見爲小人, 則子爲君子無疑, 不然, 子 向何處著脚?澤述謹按: 使先師在世, 而目見震泳之告訴五十九人於全檢, 押囚嗣孫於晉署, 則必不以此言責鄭世永矣.隆興初, 和議已決, 韓無咎李德遠, 皆失所守. 而獨王嘉叟諸人, 尙持1)正論, 見先生與魏元履 書.【〈朱子大全標疑〉】澤述謹按: 韓、李皆當時負望之人, 而亦未免失守, 獨有王嘉叟一人. 澤述今日湖嶺之論, 實有所感矣. 嗚呼, 非朱子, 孰知獨守正論之爲貴也哉?國已亡而君已廢矣, 臣子之葬, 何論吉凶? 子孫門生, 只求不爭之地而埋之, 是爲孝且義矣.【與 人訟山而就彼決之, 豈非貽辱父師之罪乎? ○〈寄敬九幷示諸生〉】澤述謹按: 先師旣以訟山而就彼決之爲貽辱父師之罪, 則豈有以刊稿而就彼請願, 不以爲辱, 而有其意有其敎乎? 此所以早有請願刊稿決是自辱之遺書也. 전일효(田鎰孝)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장손이다. 고경일(高景逸) 경일은 명(明)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어떤……없다 《중용장구》 제14장에 "군자는 현재 처한 위치에 알맞게 행동할 뿐이요, 그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현재 부귀하면 부귀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고, 현재 빈천하면 빈천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현재 이적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고, 현재 환난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한다. 따라서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라는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마음이……있다 《논어》 〈술이(述而)〉에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한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라는 공자의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정절사전(鄭節士傳) 정승원(鄭升源, 1868~1934)이 일제의 삭발에 항거하여 목을 매 순절한 것에 대한 전기이다. 정승원의 자는 덕여(德汝)이고, 본관은 영일(迎日)로, 일제가 강제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자 1934년(67세) 10월에 "이 백의(白衣)와 백발(白髮)을 보존하여 지하로 돌아가 부모를 뵐 것이다.〔存此白衣白髮, 歸見父母地下.〕"라는 말과 절명시(絶命詩),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고 한다. 《石農集 卷31 鄭節士傳》 어찌하여……것인가? 정윤영이 윤봉래(尹鳳來)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에서 전우를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에 비유하면서 그와 절교하지 않으면 순욱(荀彧)이나 가충(賈充)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신계(申桂)와 이승욱(李承旭)의 말을 가져와 전우를 욕하고 꾸짖는 일이 있었는데, 윤봉래가 대의와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전우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전우가 어쩔 수 없이 동문들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들과 연명으로 절교를 통고하는 세 편의 편지를 써서 정윤영과 신계, 이승욱에게 보냈다. 《艮齋先生文集後編續 卷2 答李活俊兼示北省諸賢》 명도(明道)는 …… 않았다 명도는 정호(程顥, 1032~1085)의 호이고, 이천은 정호의 동생인 정이(程頤, 1033~1107)의 호이며, 소동파는 소식(蘇軾, 1036~1101)을 가리킨다. 이들은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왕안석(1021~1086))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며 구법(舊法)을 주창한 대표적 학자들로, 정이 형제는 낙당(洛黨)을 주도하고, 소식은 촉당(蜀黨)의 영수가 되어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김(金)과 …… 문인 김평묵(金平默, 1819~1891)에서 류중교(柳重敎, 1832~1893)로 이어지는 문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유중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으로 이항로의 사후에 김평묵을 스승으로 섬겼다. 전발(傳鉢) 불가(佛家)에서 사용하는 전의발(傳衣鉢)의 줄임말로, 스승의 도학을 전수 받음을 비유한다. 낙(洛)도 …… 그르다 낙은 낙양(洛陽) 출신 정이(程頤)를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을 가리키고, 촉은 촉 출신인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蜀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고 구법(舊法)을 주장하면서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원우는 철종(哲宗)의 연호인 원우 연간에 집권한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舊法黨)을 가리키고, 희풍은 신종(神宗)의 연호인 희령(熙寧)ㆍ원풍(元豐) 연간에 득세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인 원우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당쟁이 극심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전장(奠章) 김평묵이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祭文)을 말하는 것으로, 제문 가운데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다는 이유로 전우에게 거부당했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초명은 광로(光老)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과거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에 전념하여 최익현(崔益鉉)ㆍ김평묵(金平默)ㆍ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으며, 천거로 동부승지ㆍ공조참판ㆍ경연관 등을 지냈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철규(尹喆圭)가……때 빈사(賓師)는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송병선이 고종 황제에게 시정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동의를 받아내고 다시 대궐에서 상소하려고 하자, 경무사(警務使) 윤철규가 그를 속여 일본 헌병대로 넘겨 고향으로 이송시킨 일이 있었다. 고향으로 이송당한 후 송병선은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늘날 …… 한다 명나라 여곤(呂坤, 1536~1618)이 지은 《신음어(呻吟語)》 3권 〈응무(應務)〉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문과 …… 변별 《논어》 〈안연(顔淵)〉에 "현달[達]이란 정직함을 바탕으로 삼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잘 헤아려 몸을 낮추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한다. 소문[聞]이란 얼굴빛은 인(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일은 …… 구함 《맹자집주(孟子集註)》 〈양혜왕 장구 하(梁惠王章句下)〉 제15장 장하주(章下註)에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여 지혜와 도모의 말단에서 기필을 취하고 천리의 올바름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凡事求可功求成, 取必於智謀之末, 而不循天理之正者, 非聖賢之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음양(陰陽)이 …… 말 《농암집(農巖集)》 11권 〈상중구(上仲舅)〉에 보인다. 회니(懷尼)의 논쟁 회덕(懷德)에 거주했던 송시열(宋時烈)과 이성(尼城)에 거주했던 윤증(尹拯) 사이에서 일어난 사제 간의 대립을 말한다. 송시열이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윤선거의 처신을 언급하자 윤증이 그것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송시열이 거절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여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호락(湖洛)의 논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한 논쟁을 말한다.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주장한 한원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호서(湖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론(湖論)이라 하였고,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한 이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洛下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 하였다. 오백풍(吳伯豊) 오필대(吳必大, ?~1198)로, 백풍은 그의 자이다. 주희(朱熹) 문하의 고제(高弟)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저서로 《사해집(師海集)》이 있다.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집권할 때에 오백풍이 벼슬에 임명되자 주희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으며, 뒤에 주자의 학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자 오백풍은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우옹이 …… 삭제했다 이성보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아들인 이신보(李信甫)이다. 송나라 간신 용대연(龍大淵)ㆍ증적(曾覿)이 집권할 때에 간관(諫官)의 직에 임명되자, 주희(朱熹)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다. 창랑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들이자 윤선거(尹宣擧)의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의 호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성문준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처신이 분명하지 못함을 책망하자 성문준이 사과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 일을 주희에게 의심받던 이성보와 오백풍의 일에 비교하여 창랑의 묘갈(墓碣)에서 "이성보ㆍ오백풍도 일찍이 주문(朱門)에 의심받았으나 끝내 명인이 되었으니, 일시의 득실로 천하의 선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윤선거(尹宣擧)가 이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한 일을 말한다. 《宋子大全 卷36 答尹汝望吉甫, 卷174 成滄浪公墓碣銘》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 《간재선생문집 전편속(艮齋先生文集前編續)》 6권 〈독수재윤공행장(篤守齋尹公行狀)〉에 "감역(監役) 김평묵(金平默)이 선사(先師)에게 바친 뇌문(誄文)은 사문(師門)의 남은 도통과 출처어묵(出處語默)이 크고 작게 어긋났다는 것을 서두로 삼고, 종국에는 문인(門人)의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斯文)을 이었다는 것을 결어로 삼았으니, 선사를 유문(儒門) 밖으로 몰아낸 것이 분명하다. 나와 공이 서공(徐公) 및 여러 동문들과 함께 회의하여 그의 뇌문을 물리쳤다.〔金監役平默, 致誄先師, 以師門緖餘, 出處語默, 大小參差, 做頭, 終以門人小大爛漫, 允紹斯文, 爲結語, 其驅先師於儒門之外, 明矣. 愚與公與徐公及諸同門, 會議而逐之.〕"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평묵(金平默)의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 "사문의 남은 도통과 시사(時事)의 어묵이 …… 어찌 어긋남이 없겠는가. ……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을 이었네.〔師門緖餘, 時事語默, …… 豈無參差? …… 小大爛漫, 允紹斯文.〕라는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 송조(宋朝)의 …… 현인 사마광(司馬光)ㆍ윤화정(尹和靖)ㆍ호안국(胡安國)ㆍ정이(程頤)을 말한다. 김평묵은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를 이 네 현인에 견주어 "윤화정처럼 사설(師說)을 굳게 지키고, 부옹(涪翁 정이)을 법삼았네. 맑은 행실과 굳은 절개는 속수옹(涑水翁 사마광)과 같고, 한 겨울 송백(松柏) 같은 기상은 강후(康侯 호안국)의 기풍이 있었네.〔和靖緊守, 涪翁之則. 淸修苦節, 如涑水翁. 大冬松柏, 有康侯風.〕"라고 하였다.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삼강은 유교 사회의 기본 덕목이 되는 세 가지 강령으로, 군신 간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자간의 도리인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부간의 도리인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구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나도 …… 없다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른 소리로 깨우쳐 주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로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귀중하다. 완곡하게 이끌어 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궁구하는 것이 귀중하다. 좋아하기만 하고 궁구하지 않거나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런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하였다. 검국(檢局) 일제 강점기 때 검사가 일을 보던 검사국(檢事局)을 가리킨다. 인보(仁父)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자이다. 호는 용암(勇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石農集 권31 勇庵金公行狀》 가릉(嘉陵)의 …… 사람들 가릉은 지금의 경기도 가평으로, 이곳에 거주한 김평묵(金平默)과 그의 문인 유중교(柳重敎)를 말하는 듯하다. 훗날 …… 투척하여 1919년에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뒤에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연명으로 장문의 글을 지어 보낼 때,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에게게 여기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지만 간재가 참여하지 않자 오진영이 간재의 이름을 거짓으로 서명하여 보낸 일을 말한다. 주자의 …… 만났고 임률(林栗)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시강에서 당시 병부 낭관(兵部郎官)으로 있던 주자와 《주역(周易)》과 〈서명(西銘)〉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자 상소하여 주자의 도학(道學)을 공격한 일을 말한다. 육구연(陸九淵) …… 당했는데 육구연의 제자였던 조건(曹建)이 주자의 문인이 되어 육구연의 학문을 버리고 주자의 학문에 전념하다 죽자, 주희가 그의 묘표(墓表)에 육구연과 관계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인해 육구연의 문인들이 크게 노한 일을 말한다. 《宋元學案 卷18 滄洲諸儒學案》 마른 …… 형상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나 허물은 없다.〔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오랑캐로 …… 사람 유학자(儒學者)인 진량(陳良)을 스승으로 섬겼던 진상이 등(藤)나라에서 만이(蠻夷) 출신 농가자류(農家者流) 허행(許行)을 만나고서 스승의 도를 배반하고 허행의 제자가 되자, 맹자가 "나는 중화의 법을 써서 오랑캐의 도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랑캐에게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라고 진상을 비난한 고사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부모와 …… 것 송(宋)나라 간신 채확(蔡確)이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 때 〈하일유거개정(夏日遊車蓋亭)〉시 10수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오처후(吳處厚)가 이 시는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방(誣謗)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공척(攻斥)하여 문언박(文彦博)이 채확을 영교(嶺嶠)로 내쫓으려 하자, 범순인(范純仁)이 문자를 들추어내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니라고 말리면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속담을 소홀히 하고, 받는 대로 돌려주기를 좋아한다는 경계를 위배하면 스스로 재앙과 실패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라고 논한 것에 대해 주자가 "만약 후세에 군친(君親)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서 쫓아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이 말 때문일 것이다.〔使後世見無禮於君親者, 拱手坐視而不敢逐, 則必此言之爲也.〕"라고 비판한 내용을 가리킨다. 《朱子大全 卷37 答鄭景望》 구황(九荒) 천하를 상징하는 구주(九州)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세상 끝을 비유하는 말이다. 묘적(墓籍)의 등록 일제 강점기 때 묘지대장인 묘적계등본(墓籍屆謄本)에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분묘의 위치, 사망자의 씨명(氏名), 사망년월일, 제주(祭主)의 주소와 씨명, 참고사항 등 묘지에 관한 제반 사항이 기록되어 있고, 묘지 약도가 그려져 있다. 일제 통감부는 1912년에 식민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 조사령(土地調査令)을 반포하면서 선조의 무덤에 대해서도 묘적을 등록하도록 강요했다. 통분을 …… 한다 주희(朱熹)의 〈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에 나오는 말이다. 남송(南宋)이 금(金)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여 화친을 구걸하고 복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한 말이다. 《朱子大全 卷24 與陳侍郞書》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 1842~1907)의 호이다. 자는 덕경(德卿)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전우(田愚)의 문인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숙(禪宿) 학식이 높은 노숙한 선승(禪僧)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편지의 수신자인 노인오(盧仁吾)를 가리킨다. 학문을 …… 못했다. 《논어》 〈옹야(雍也)〉 애공문(哀公問)장에 나오는 말이다. 애공(哀公)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하는지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하였다. 아 ……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안연사(顔淵死)장에 나오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말하기를,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噫, 天喪予, 天喪予.〕" 하였다. 진본(晉本) 1926년 10월에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의 문집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노론(魯論) 《노논어(魯論語)》를 말한다. 이것 외에 《제논어(齊論語)》, 《고문논어(古文論語)》 등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신장(愼狀) 신의묵(愼宜默, 1768 ~ 1821)의 행장(行狀)인 〈석성현감신공행장(石城縣監愼公行狀)〉을 말하는 것으로, 《고산집(鼓山集)》에 실려 있다. 서(徐) 어른 서정순(徐政淳)을 말한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신의묵의 외손자이고,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장인이며, 둘째 아들 임감재(任坎宰)의 스승이이다. 전우(田愚)와 함께 《고산집(鼓山集)》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문집총간 고산집 해제》 집촉록(執燭錄) 《성전집촉록(星田執燭錄)》을 말한다. 1876년 임헌회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전우(田愚)에게 당부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신도비(神道碑) 〈소윤최공신도비(少尹崔公神道碑)〉를 말한다. 동만(動萬)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호이다. 누구의 …… 해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誰家日月照臨〕'의 줄임말로, 세상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후창집》 권14 〈독송자대전유감이표출지근부안설(讀宋子大全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에 "오진영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말하기를, '주머니 속의 화폐가 왕래하고, 차표와 편지에 도장이 찍히며,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떠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震大書特書曰: '囊中紙貨往來, 車票書詞附印, 誰家日月照臨.' 此豈非戴日本者乎?〕"라는 구절이 보인다. 제요(帝堯)는……뽑았고 숭곤(崇鯀)은 숭백(崇伯)에 봉해진 곤으로, 요 임금의 신하이며, 우왕(禹王)의 아버지이다. 요 임금 때에 홍수(洪水)가 나자 그에게 다스리게 하였는데, 9년이 되어도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書經 堯典》 주공(周公)은……뽑았지만 관(管)ㆍ채(蔡)는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이자 성왕(成王)의 숙부인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말한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한 뒤에 주공이 섭정할 때에 그들을 관(管)과 채(蔡)에 봉하여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감독케 하였는데, 관숙선과 채숙도는 '주공이 어린 왕에게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다.〔公將不利於孺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書經 周書ㆍ金縢》 《史記 卷35 管蔡世家》 진인(晉印) 1926년에 문인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간재의 문집을 활자(活字)로 간행한 진주본(晉州本)을 말한다. 고현천문(告玄阡文) 김용승(金容承)이 간재 묘소에 올린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말한다. 융흥(隆興) …… 화의(和議) 융흥은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연호(1163~1164)이며, 화의는 금(金)나라의 요청에 응해 맺은 강화(講和)를 말한다. 이덕원(李德遠) 송(宋)나라 문신 이호(李浩, 1116~1176)로, 덕원은 그의 자이다. 건창(建昌) 사람으로, 소흥(紹興 고종(高宗) 연호) 12년(114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태상승(太常丞), 사농 소경(司農少卿), 이부 시랑(吏部侍郎), 태상시 주부(太常寺主簿) 등을 지냈다. 《宋史 卷388 李浩列傳》 오히려 …… 견지하였으니 저본에는 '尙指持正論'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指'를 '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위원리(魏元履) 송(宋)나라 문신 위섬지(魏掞之, 1116~1173)로, 원리는 그의 처음 자이다.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간재(艮齋)이다. 건양(建陽) 사람으로, 호헌(胡憲)에게 사사하였으며, 주희(朱熹)와 교유하였다. 《宋史 卷459 魏掞之列傳》 持 저본에는 '指'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持'로 교감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자대전》을 읽고 느낌이 있어 표출하고 삼가 안설을 붙이다 【1938년】 讀《宋子大全》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 【戊寅】 하늘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고, 땅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있으며, 사람은 군자와 소인이 있으니, 사방의 만물은 종류에 따라 모이고 무리에 따라 나누어집니다. 이와 같이 갈려 나누어진 뒤에는 이쪽 사람의 행위가 반드시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저쪽 사람의 행 위가 반드시 모두 그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돕고 그른 것을 억제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엄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원우(元祐)의 제현(諸賢)이 채확(蔡確)을 억제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그의 시구(詩句)로 죄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주자(朱子)가 그다지 그르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범충선(范忠宣)을 옳지 않다고 여겼 던 것은 어찌 선악의 큰 구분이 이미 정해진 까닭에 주선하는 도리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142)【〈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 오진영은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쳐 사림에 재앙을 준 사람이고, 호남 사람은 무함을 변론하고 문고를 바로잡다 재앙을 입은 사람이니, 선악의 큰 구분이 이미 정해졌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오히려 "호남이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영남이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다."고 하니, 대체로 우옹(尤翁)의 이 의리를 모르는 것이다.오늘날 의론하는 사람들이 "저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히 윤선거를 공격하는 것인 가?"라고 한다면 신도 또한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특한 말로 정도를 해치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일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렇다면 신의 행위도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상소(上疏)〉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의논하는 사람들도 또한 말하기를, "김택술 그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노성(老成)하여 명망을 지닌 오진영을 공격하는 것인가?" 하였다. 대저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친 것이 어찌 사특한 말로 정도를 해친 것을 사람이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사문의 제자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우옹의 말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인가.설사 신의 이런 뜻이 폄악(貶惡)을 감추고자 하는 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그렇지 않 은 점이 있습니다. 양호(陽虎)가 말하기를, "부자(富者)가 되려면 인(仁)을 행하지 못하고, 인을 행하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143)"고 했습니다. 양호의 의도가 진실로 부자가 되려는 마 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가 인을 행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天理)입니다. 그런 까닭에 맹 자가 특별히 취하여 표장(表章)한 것입니다. 저 무리들이 과연 효묘(孝廟 효종)의 덕이 참으 로 세실(世室)144)로 삼기에 마땅하다고 여겼다면 어찌 감히 이런 의론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말하며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145)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논자(論者)들이 또 말하기를, "모(某)가 오진영을 배척한 것은 혐의를 꾸미려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나는 오진영에 대해 본래 혐의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전혀 온당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진실로 천리이다. 논자들이 과연 선사에 대해 인허를 낼 의향과 인허를 내라는 분부가 없다고 여겼다면 어찌 감히 이런 변론이 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그 말을 아울러 폐기할 수 있겠는가.삼가 듣건대 근래에 헌신(憲臣)이 소를 올려 이이(李珥)가 머리를 깎았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김장생(金長生)을 끌어다 증거로 삼았다146)고 합니다. 신도 또한 일찍이 고(故) 문충공(文忠 公) 신(臣) 장유(張維)의 문집(文集)에 고(故) 지사(知事) 신(臣) 조위한(趙緯韓)의 말이 기록 되어 있는 것147)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과연 신의 스승이 운운한 바가 있었다고 하 는데, 신은 이에 대해 항상 매우 의아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장유는 김장생 의 뛰어난 제자인데, 그가 조위한의 말을 듣고서 어찌하여 김장생을 위해 그것이 무함임을 통렬하게 변론하지 않고, 단지 이이만을 위해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했겠습니까.설사 이이가 참으로 그런 일을 했다 하더라도 또한 김장생은 그것을 증언하지 않았을 것인 데, 하물며 전혀 그런 일이 없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적에 섭공(葉公)이 말하기 를, "우리 무리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것을 증언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길, "우리 무리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르다. 어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 습니다.148) 가령 김장생이 그런 말을 했다면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언한 사람과 무엇 이 다르겠습니까.또 헌신(憲臣)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일은 행적이 확실하지 않아 변론할 것 도 못 된다. 그런 까닭에 김장생도 또한 그 일을 말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또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은 실상을 상세히 진달했다."고 말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은 실상을 상세히 진달했는데, 김장생만은 그 일을 말했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일까요? 신은 내심 김장생을 위해 원통하게 여깁니다. 고명(高明)한 제자로서 그 일을 증언했다면 이이가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끝내 변론할 수 없게 될 것이 니, 이이가 당한 무함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암(尤庵)은 율곡(栗谷)이 머리를 깎았다는 무함과 사계(沙溪)가 스승이 머리를 깎았음을 증언했다는 무함에 대해 입이 고달프도록 변론하여 밝혔고, 심지어 이처럼 임금에게 아뢰는 글까지 있었다. 이것을 끌어와 오늘날 우리 문하의 일을 논한다면 변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절로 분명하다. 설사 간옹(艮翁 전우(田愚))께서 참으로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오진영은 그것을 증언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전혀 그런 분부가 없음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진영은 오히려 강력하게 그것을 증언하기를, "죽음에 이를지언정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그 자식이 훔쳤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는 일은 당시에 행적이 확실하지 않아 변론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우옹은 오히려 이와 같이 말했는데, 하물며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말은 대의(大義)에 관계된 것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 오진영은 한쪽에서 일컫는 고명한 제자인데, 고명한 제자로서 증언했다면 간옹께서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은 끝내 변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간옹께서 당한 무함이 얼마나 혹독하겠는가.옛적에 범조우(范祖禹)는 이천(伊川 정이(程頤))을 순전한 스승으로 섬긴 것은 아니었지만, 이천이 무함을 당했을 때에 범조우가 즉시 변론하여 바르게 하지 않자, 주자가 오히려 이를 꾸짖었습니다.149)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순전한 스승으로 섬긴 분이 아니었는데도 주자는 오히려 즉시 변론하여 바르게 하지 않았다 하여 꾸짖었다. 오늘날 간옹을 순전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도리어 해가 갈수록 스승의 무함이 더욱 깊어지는데도 끝내 변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변론하여 바르게 하는데 종사하는 동문을 꾸짖으니, 주자에게 죄를 얻음이 도리어 어떠하겠는가.천지 사이에 음(陰과 양(陽) 두 사물은 서로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군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 인이 있고, 바른 의론이 있으면 반드시 삿된 의론이 있으니, 그 강약(强弱)과 승부(勝負)의 형세는 서로 갈마들고 변화하여 군자와 바른 의론이 반드시 약해지고 지게 되며, 소인과 삿 된 의론이 반드시 강해지고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소자(邵子)의 시에서 이른바 "양은 하나 이고 음은 둘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이른바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약해지고 졌던 것이 항상 펴지고, 강하고 이겼던 것은 반 대로 굽혀지게 되니, 이 또한 필연(必然)의 이치입니다, 대저 이른바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는 오르내림 이 있고, 운행하는 기운은 오르고 넘어짐이 있기 때문에 펴져야 할 것이 크게 펴지지 못하 고, 굽혀져야 할 것이 반드시 완전하게 굽혀지지 않으니, 이 또한 이치가 간혹 그러한 것입 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 도를 주장하는 사람이 진실로 옳음과 그름, 삿됨과 바름의 근 원을 밝혀 삿되거나 그른 것은 억누르고, 옳거나 바른 것은 높여서 군자를 위해 꾀하고 소 인을 위해 꾀하지 않는다면 천지를 본받아 치도(治道)를 닦아 이루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천하에 춘추(春秋)의 의리가 없고, 간옹(艮翁)이 춘추의 학문이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일에 대해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이며, 어느 쪽이 바른 의론이고, 어느 쪽이 삿된 의론인지는 변론하지도 않아도 분명하니, 그 승부와 굴신(屈伸)도 또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다만 밝은 하늘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맑아질 기약이 없으니, 이른바 "이 도(道)를 주장하는 사람이 옳고 그름의 근원을 밝혀서 그른 것은 억누르고 옳은 것은 높인다."는 것이 과연 어느 때나 나올지 모르겠다. 아아!음류(陰類 소인)와 양류(陽類 군자)는 하나의 큰 편론(偏論)이고, 삿됨과 바름은 하나의 큰 붕당(朋黨)이니, 편론을 좋아하여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지나치게 곧게 하는 것은 진실 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붕당을 싫어하여 모호하게 양쪽 다 옳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일을 해 치게 됩니다. 그러나 편론과 붕당 중에도 또한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움의 구분이 있으니, 작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하지만 큰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가벼운 것은 생략해도 되지만 무거운 것은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백강(白江) 이상국(李相國)에 올린 편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옹(尤翁)의 이 말을 기준으로 하면 편당(偏黨)은 본래 좋지 않은 제목은 아니다. 다만 편당한 것이 삿된지 바른지를 볼 뿐이다.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中立)"이란 것이 어찌 이른바 "붕당을 싫어하여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이 더욱 일을 해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움의 구분을 말한다면 선사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인허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치는 것에 대한 변론은 하지 않을 수 없고 생략할 수도 없는 것이고, 문인과 관련된 부분 위에서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 다툼은 하지 않아야 하고 생략해도 되는 것이다.그가 주자의 문하에 죄를 얻었으니, 바로 스스로 하늘의 벌을 받을 난적(亂賊)인데, 그의 무 리들이 끝내 창을 거꾸로 돌려 귀순할 줄을 모르고 있네.【〈유무중(與兪武仲)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휴(驪鑴 윤휴(尹鑴))가 주자를 업신여기고 거만스럽게 대하면서 《중용》을 고쳐 주를 달았기 때문에 우옹(尤翁 송시열)이 주자의 문하에 죄를 얻은 난적이라 한 것이다. 오늘날 음성의 오진영은 겉으로 간옹을 존숭하면서 이미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무함하고 게다가 대고(大稿)의 본문(本文)을 고쳤으니, 그의 업신여김과 거만스러움이 심하다. 이를 간옹의 문하에 죄를 얻은 난적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돌려 귀순할 줄 모르니, 어쩌면 그렇게도 미혹된 것인가.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이 윤휴의 당이 된 것을 배척한 것에 대해 어느 누가 지나쳤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지나친 줄 모르겠고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네. 【〈조사달(趙士達)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음성의 오진영 및 오진영의 당이 된 사람들을 배척한 것은 스스로 그것이 지나친 줄 모르는 것도 또한 우옹에게 받은 바가 있다.주자가 일찍이 당시의 재상(宰相)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충사(忠邪)의 구분을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고, 소장(消長)의 경계를 믿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며, 게다가 자기 한 몸의 이익과 손해의 사사로움으로 그 사이에서 뒤엉킨다면 오늘날 이른바 '공평함을 지킨다.'는 것이 도 리어 소인의 세력을 깊이 도와 군자의 병통을 만드는 것이니, 끝내 저쪽 당은 나날이 성대 해지고 이쪽 세력은 나날이 고립되어 천하의 일이 머지않아 행해질 수 없게 됨을 볼 것입니 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노형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주자의 말과 모든 것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인가요.【〈민태수(答閔台叟)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이른바 "중립(中立)"이란 사람들이 삿됨과 바름의 구분을 살피지 않고, 게다가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으로 뒤엉킨다면 공평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을 돕는 것이다. 하물며 겉으로는 중립을 하면서 마음은 사실 저들을 돕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도 또한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영남의 당이 나날이 성대해지고 호남의 세력이 나날이 고립되는 이유이다.저쪽과 이쪽을 화합시키는 것은 오직 정명도(程明道)와 같은 덕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 고, 그 나머지 사람은 타니대수(拖泥帶水)150)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네. 이것이 바로 천리 (天理)와 인욕(人欲)이 서로 비슷하나 실제로는 다른 것이니, 주자의 말이 상세하네.【〈이계 주(李季周)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에 아무개와 아무개가 나와 오진영이 화합하기를 바라면서도 그 말하는 것이 명백하게 분별한 조건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타니대수(拖泥帶水)를 면치 못하여 천리와 비슷하지만 인욕이다.151)"는 것이 아니겠는가.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말하기를, "만약 이 놈이 없었다면 주자는 우 리 나라에서 아성(亞聖)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여흉(驪兇 윤휴)은 참다운 유자(儒者)가 되었 을 것이며, 홍타시(洪打豕)152)는 천하의 정의로운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였네. 집사께서 이 말을 듣는다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리라 생각하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말하기를, "만약 이 놈이 없었다면 간옹은 참으로 인허를 내라는 분부가 있는 것처럼 되어 대현(大賢)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음성의 오진영은 선사의 문고를 간행한 큰 공적이 있게 될 것이며, 일본(日本)은 천하에 정의로운 군주가 될 것이다." 하였다. 【오진영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말하기를, "주머니 속의 화폐가 왕래하고, 차표와 편지에 도장이 찍히며,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153)"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떠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것을 장난삼아 한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래에 또 말하기를, "신중히 처신하여 다른 사람의 왜삭(倭朔)154)을 함부로 꾸짖지 말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말을 바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유생의 갓을 쓰고 유생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유생의 갓을 쓰고 유생의 옷을 입은 동문의 사람을 일본의 관아에 나아가 고소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머리로 떠받들며 정의로운 군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주자는 원우(元祐)155)의 인물을 논하면서 원성(元城)156)을 중도(中道)로 여겼습니다. 지금 살 펴보건대, 원성이 소인을 공격한 것이 너무나 강하여 만사(萬死)의 지역에 이르게 되었으 니,157) 너무 심했다고 이를 만하지만 주자는 중도로 허여하였으니, 어찌 당시에 처리한 것 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 오늘날에는 단지 편의만 차지하고서 스스로 중도를 얻었다고 여기니, 이런 풍습이 한번 성대해질까 매우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박화숙(朴和叔)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이 이와 같은데도 오늘날 간옹의 문도들은 오히려 음성의 오진영을 변론하여 성토하는 데 죽을힘을 다하는 것을 중도에서 지나침이 너무 심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앞의 말을 고려하지 않는 이 사람들에 대해 어찌하겠는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을 성인(聖人)의 무리라 하였고,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도 또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반드시 사사(士師)158)가 아니더 라도 그들을 주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159) 하물며 오늘날 존형 같은 분은 얼마나 중요 한 자리에 있는데 도리어 지언(知言)과 양기(養氣)160)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물러나 핑 계 대며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반드시 지언하고 양기하여 반드시 맹자와 같은 뒤에야 비로소 이단(異端)을 물리칠 수 있다면 이는 반드시 사사인 뒤에야 비로 소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다 사라지지 않을 인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에 또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했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 또 "그렇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나의 학문을 닦아야하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곳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 이외에 다시 무슨 학문이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학문을 하고서 선사의 무함조차 변론하지 않는다면 학문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는 지언과 양기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물러나 핑계 대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이니,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어찌 어두워지고 이지러져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이 사람이 주자를 공격해 배척했으니,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며, 그의 당이 되어 도왔던 사람은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먼저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문고를 고쳐 어지럽혔으니, 이는 간옹 문하의 난적이며, 그의 당이 되어 도왔던 사람은 춘추의 법으로 논한다면 또한 먼저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집사께서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기미에 밝아 머뭇거리고 관망하면서 기꺼이 몸소 맡으 려 하지 않고, 이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이 일을 맡게 하시니, 이것이 어 찌 인자(仁者)의 대단히 공정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사께서는 단지 이 책임을 맡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돕고 계시니, 한때의 영화와 명예는 기뻐할 만하지만 훗날 의 공의(公議)는 어찌하시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말은 선사께서 신앙여(申仰汝)에게 보내 편지 속의 말뜻이고 게다가 더욱 엄중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중간적 입장을 지키며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읽는다면 마치 차가운 물을 등에 끼얹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양주(楊朱)는 의(義)를 행하는 것을 배운 자였으나 위아(爲我)에 치우쳤고, 묵적(墨翟)은 인 (仁)을 행하는 것을 배운 자였으나 겸애(兼愛)로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쓰는 근본을 보면 어찌 삿됨이 있겠습니까. 모두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근본적 인 부분에서 미세하게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가 그 화를 미루 어 말하여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게 되어 짐승이 되는 데로 빠질 것이라고 하면서 말로 그 들을 물리치는 데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161) 맹자가 어찌 그들의 본정을 살 피지 않고 이런 가혹한 의논을 했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설자(說者)는 "오진영도 또한 선사를 존숭한 사람이니, 그 마음 쓰는 것을 근본을 따져보면 어찌 삿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공적(功績)을 기뻐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끝내 선사를 무함하여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았고 문고를 고쳐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였으며, 동문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일본의 관아에 구속시킴으로써 세력을 확장하여 스승도 없고 군주도 없는 지경에 귀결되는 데 이른 것이니, 또 그 화를 미루어 볼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범한 것이다. 어찌 말로 물리치는 데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의 본정을 살피지 않고 이런 가혹한 말을 했겠는가.들으니 집사께서 오늘날 의논은 차라리 모호하게 했으면 한다고 했다는데 내심 깜짝 놀라고 비통하게 탄식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집사께서 주자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 고 윤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지나친 때문일 것입니다. 대저 혼연渾然)하여 모남이 없는 것 이 어찌 주자가 바라지 않는 바가 아니겠으며, 또한 할 수 없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하여 피음사둔(詖淫邪遁)162)이 함께 일어나 서로 내달리면서 하 늘에 닿고 길을 막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담언(談言)과 논설(論說)이 어쩔 수 없이 명백하고 통절하여 세상의 정도에 어둡고 사도에 빠진 자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비록 이 로 인해 거짓된 학문이 되고 역도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거의 면치 못했지만 또한 후회하 지 않았던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혼연渾然)하여 모남이 없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겠으며,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다만 천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인심이 더욱 사특해져서 선사를 믿지 못하고 오진영을 너무나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 중에 심지어 "만약 유서(遺書)의 내용처럼 인허를 내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면 선사는 일절(一節)의 선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석농(石農 오진영)의 말처럼 반드시 홀로 계실 때 인허를 내도록 분부함이 있는 뒤에야 비로소 도(道)가 크고 의(義)가 정밀한 참된 현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자가 명옥(明玉)인 서진영(徐鎭英)이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크게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휩쓸리듯 그 말을 따랐다. 이것이 피음사둔이 하늘에 닿고 길을 막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명하게 논설하고 통렬하게 변론했던 것이고, 이것으로 노비가 되고 간교한 사람과 풍속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거의 검사국(檢事局)의 옥에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또한 후회하지 않았던 것이다.주자가 일찍이 순숙(荀淑)의 도가 매우 성대함을 논하였고163), 순상(荀爽)과 순욱(荀彧)이 역 적(逆賊)에게 붙은 것164)에 대해서는 또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하여 말하기를, "당 시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도 또한 자연히 일종의 의논을 두어 꾸미고 덮음으로써 갑작스럽게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그른 줄 깨닫지도 못하고 참으로 옳은 것 으로 여기게 하였으니, 삿된 말이 마구 유행하는 것이 이 때문에 홍수나 사나운 짐승의 해 보다 더 심한 것이다. 근래에 책을 읽다가 이 생각이 분명함을 깨닫게 되니 앉으나 서나 자연히 놓을 수 없었다. 비록 이것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곤궁하여 죽을 줄 알 지만 진실로 달게 여기며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오늘날 집사의 이 른바 "모호(糢糊)함"이 어쩌면 그렇게도 주자의 이른바 "덮어버림[蓋覆]"과 딱 맞는지요. 이 것이 아마 병통이 든 근원일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순상과 순욱이 역적에게 붙는 일로 인해서 거슬러 올라가 그의 부형과 사우에게 본래 일종의 삿된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렇다면 문인이 인허를 낸 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의 스승이 혹 인허를 낼 생각이 있었다고 의심하는 것도 또한 염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짊어지고 변론하였으니 선사의 마음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문인들의 입으로 크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를 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하고, 또 인허를 내지 말라는 유서는 위조(僞造)라 하니, 사람들이 이것을 근거로 곧장 선사를 논하는 것이 어찌 다만 자손으로 인해 그 부조(父祖)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것에 비할 뿐이겠는가. 天有陰陽, 地有華夷, 人有君子小人, 方以類聚, 物以群分. 如此剖判之後, 一番人所爲, 未必 盡善, 一種人所爲, 未必盡非. 然扶抑之道, 則不可不嚴. 故元祐諸人, 憂蔡確之不可制, 至按 以詩句. 雖似已甚, 然朱子不甚非, 而反以范忠宣爲不是者, 豈以淑慝之大分已定, 則左右之道, 有不得不然耶?【〈上安隱峯〉】澤述謹按: 陰震誣師改稿而禍士者也, 湖人辨誣正稿而被禍者也, 淑慝之大分已定矣. 說者猶謂"湖未必盡是, 嶺未必盡非." 蓋不知尤翁此義者也.今之論者若曰: "渠是何人, 而敢攻宣擧?"云爾. 則臣亦有說焉. 朱子曰: "邪說害正, 人人得而 攻之, 不必聖賢." 然則臣之所爲, 亦不爲全無所據矣.【〈上疏〉 下同.】澤述謹按: 今之論者亦有曰: "金澤述渠是何人, 敢攻老成負望之吳震泳也?" 夫誣師改稿, 豈非邪說害正, 人人得而攻之者乎? 況凡在師門弟子之列者乎? 爲此說者, 何不少致意於尤翁之言乎?設使以臣此意爲出於欲掩貶惡之云, 亦有所不然者. 陽虎曰: "爲富不仁, 爲仁不富." 陽虎之 意, 實出於爲富之意, 而其爲仁之言, 則實天理也. 故孟子特取而表章焉. 渠輩果以孝廟之德爲 果宜於世室, 則何敢以此議之出於臣, 而倡言排之哉澤述謹按: 論者又有謂"某之斥震, 出於修嫌之私." 我於震本無可嫌, 則此固萬萬不當. 設有然者, 其爲師辨誣, 實天理也. 論者果以先師爲無認意認敎, 則何敢以此辨之出於我, 幷與其言而廢之哉?竊聞比者, 憲臣投疏, 提起李珥落髮之說, 而引長生爲證. 臣亦嘗見故文忠公臣張維文集, 有記 故知事臣趙緯韓之言矣. 其言果以臣師有所云云也, 臣於是常不勝甚疑訝也. 維乃長生之高弟 也, 其聞緯韓之言, 何不爲長生痛辨其誣, 而只爲珥分疏耶?設使珥眞有此事, 亦不當自長生證之, 況萬萬無此乎? 昔葉公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 使長生果爲此, 則與證父攘羊者何異?且憲臣引張維說, 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 故長生亦言之." 若然則何以又曰: "諸臣備陳不 落髮之實狀也." 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 而獨長生言之云者, 亦獨何心也? 臣竊爲長生寃痛也.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珥之落髮, 終不可辨明, 珥之所遭, 何其甚也?澤述謹按: 尤庵於栗谷落髮之誣、沙溪證師落髮之誣, 苦口辨明, 至有告君之文者如此. 引此以論今日吾門之事, 則不待辨而自明矣. 設使艮翁眞有認敎, 不當自震泳證之, 況萬萬無此乎? 然而震泳猶且强證之曰: "臨死不易辭." 是父不攘羊其子證之者也. 且落髮之事, 當時有以爲粗迹而不足辨者, 尤翁猶如此說. 況認敎之說, 爲大義之所關乎? 嗚呼! 震一邊之所稱高明,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艮翁之認敎, 終不可辨, 艮翁之所遭, 何其酷也?昔范祖禹於伊川, 非純師也. 伊川之被誣也, 祖禹不卽辨理. 則朱子猶且譏之.澤述謹按: 於非純師之地, 朱子猶以不卽辨理譏之. 今之純師艮翁者, 乃經年閱歲, 師誣益深, 而不惟終不之辨, 反譏同門之從事辨理者, 其得罪於朱子者, 顧何如也?天地之間, 陰陽二物, 不能相無. 故有君子, 則必有小人, 有正論, 則必有邪議. 其强弱勝負之 勢, 迭相推盪, 而君子與正論, 必弱且負, 小人與邪論, 必强且勝. 此邵子詩所謂"陽一而陰二" 者也. 然於久遠之後, 則有所謂"不泯"者存. 故弱而負者常伸, 强而勝者反屈, 此亦必然之理也. 夫所謂"不泯"者, 何也? 天理人心也. 然世道有升降, 運氣有騰倒. 故當伸者, 不能大伸, 宜屈 者, 不必全屈, 此亦理之或然者也. 雖然, 主張此道之人, 苟明是非邪正之源, 抑彼而尊此, 爲 君子謀, 而不爲小人謀, 則所以範圍天地, 陶成治道也, 無難矣.澤述謹按: 天下無春秋之義, 艮翁非春秋之學則已. 不然, 今於湖嶺之事, 孰爲君子? 孰爲小人? 孰爲正論? 孰爲邪議? 不辨而明矣. 其勝負屈伸, 亦推此可知. 然但皓天不復, 河淸無期, 未知所謂"主張此道之人, 明是非之源, 而抑彼尊此"者, 果何時而出耶? 噫!陰陽一箇大偏論, 邪正一箇大朋黨, 喜偏論而矯枉過直者, 固不足道, 惡朋黨而含糊兩可者, 尤 害於事也. 然偏黨之中, 亦有大小輕重之分焉, 小者不當爲, 而大者不得不爲也, 輕者在所略, 而重者不可略也.【〈上白江李相國書〉】澤述謹按: 準以尤翁此說, 則偏黨本非不好題目, 但看所偏黨者, 是邪是正耳. 湖嶺之間, 所謂"中立"者, 豈非所謂"惡黨兩可之尤害事"者耶? 若言其大小輕重之分, 則關先師分上, 誣認改稿之辨, 不得不爲而不可略者也, 關門人分上, 互有得失之爭, 不當爲而在所略者也.彼得罪於朱門, 正是亂賊之自干天誅者. 而其徒終不知倒戈而歸順.【〈與兪武仲〉】澤述謹按: 驪鑴侮慢朱子, 改註中庸. 故尤翁謂得罪朱門之亂賊. 今陰震名尊艮翁, 而旣誣以認敎, 又改大稿本文, 則其爲侮慢甚矣. 此不可謂得罪艮門之亂賊乎? 而其徒終不知倒戈而歸順, 何其迷也?至於美村黨鑴之斥, 則人孰不以爲過? 然不自知其爲過, 而猶以爲不及.【〈與趙士達〉】澤述謹按: 澤述於陰震及黨震者之斥, 不自知其爲過者, 亦有所受於尤翁矣.朱子嘗責時宰曰: "忠邪之分, 察之有未明; 消長之誡, 信之有未篤, 而又以一身利害之私, 參錯 乎其間, 則今之所謂'持平'者, 乃所以深助小人之勢, 以爲君子之病. 終見彼黨日盛, 此勢日孤, 天下之事, 將有不可爲者." 今者老兄之言, 何其與朱子說一切相反耶?【〈答閔台叟〉】澤述謹按: 今之所謂"中立"者, 旣不察邪正之分, 又參以一身之私, 則其云持平者, 乃所以助彼, 而況名爲中立, 而心實在於助彼者, 亦有其人乎? 此所以嶺黨日盛, 而湖勢日孤.和合彼此, 惟有明道之德者能之, 其餘則未免拖泥帶水. 此正天理人欲相似而實異者, 朱子之言 詳矣.【〈與李季周〉 下同.】澤述謹按: 近日, 某某之欲我與震和合, 而其所以爲說者, 無條件別白, 此非所謂"未免拖泥帶水, 而似天理而非2)人欲"者歟?竊不自遜, 私語於心, 以爲"如無此漢, 則朱子於東方, 不得爲亞聖, 而驪凶爲眞儒, 洪打豕爲天 下義主矣." 執事聞之, 想發一大笑.澤述謹按: 澤述竊不自遜, 私語於心曰: "如無此漢, 則艮翁眞有認敎, 不得爲大賢, 陰震眞有刊師稿之大功, 日本爲天下之義主矣."【震大書特書曰: "囊中紙貨往來, 車票書詞附印, 誰家日月照臨." 此豈非戴日本者乎? 渠以此爲戱言, 然其下又言"愼勿妄罵人之倭朔" 則此豈非正言者乎? 且以冠儒服儒之人, 就訴冠儒服儒之同門人於日府, 則豈非頭戴以爲義主者乎?】朱子論元祐人物, 以元城爲中. 自今觀之, 元城攻小人太强, 以至萬死之域, 可謂已甚, 而朱子 許以中道, 豈非以當時所處理當如是耶? 今日只占便宜, 而自以爲得中, 此風一盛, 甚可憂懼. 【〈答朴和叔〉 下同.】澤述謹按: 朱宋之論如此, 而3)今爲艮翁門徒者, 猶以盡死力於辨討陰震, 爲過中已甚. 吾於此人之不恤前言何哉, 可嘆也已.孟子以能言距楊墨者爲聖人之徒. 而朱夫子亦以爲弑君之賊, 不必士師而誅之. 況今日如尊兄, 何等地位, 而乃以未能知言養氣, 退托而不爲之所耶? 若必知言養氣, 必如孟子而後, 乃能攘斥 異端, 則是必士師然後乃治弑君之賊, 人類幾何不盡哉?澤述謹按: 今又有明知震之誣師者, 又謂"然而吾則自修吾學, 故不參於是非之場." 吾未知明是非之外, 復有何學. 且學而不辨師誣, 焉用學爲哉? 此退托以未能知言養氣而加甚焉者, 天理人心, 其何不晦蝕而無餘哉此人攻斥朱子, 則是斯文亂賊也. 其黨助者, 論以《春秋》之法, 則當先受罪矣.澤述謹按: 震也誣陷先師, 改亂師稿, 則是艮門亂賊也. 其黨助者, 論以《春秋》之法, 則亦當先受罪矣.執事明於利害禍福之幾, 依違觀望, 不肯身任, 而使愚妄者, 代受此事, 此豈仁者大公之心乎? 執事不但不任此責, 乃反助彼勢, 一時榮名則可喜, 而柰後世之公議何?澤述謹按: 此卽先師與申仰汝書中語意, 而又加嚴焉. 今湖嶺之間, 間立依違者讀此訓, 得無如冷水澆背矣乎?楊朱學爲義者也, 而偏於爲我, 墨翟學爲仁者也, 而流於兼愛. 本其設心, 豈有邪哉? 皆以善而 爲之耳. 特於本源之際, 微有毫釐之差. 是以孟子推言其禍, 以爲無父無君而陷於禽獸, 辭闢之 不少假借. 孟子豈不原其情而爲是刻核之論哉?澤述謹按: 說者謂"震亦尊師者也, 本其設心, 豈有邪哉?" 此非曰"不然." 但於本源之際, 有喜功好名之差. 是以終而至於誣師而禦人之口, 改稿而衒己之能, 禍同門拘師孫於日府, 以張其勢, 歸無師無君之境, 則又不待推其禍而身親犯之. 豈得不辭而闢之不少假借乎? 亦豈不原其情而爲是刻核之論哉?聞執事以爲今日議論, 寧爲糢糊. 竊不勝愕然而駭, 衋然而嘆也. 此蓋執事以朱子信不及, 而信 尹太過之故也. 夫渾然無圭角, 豈非朱子之所不欲? 亦非所不能爲也? 只以世衰道微, 詖淫邪 遁, 幷起交馳, 以至於滔天而塞路, 故其談言論說, 不得不明白痛切, 以牖世之昏蔽陷溺者. 雖 以此爲僞學爲逆魁, 幾不免而亦不悔.澤述謹按: 渾然無圭角, 豈非我之所欲? 亦豈不能? 只以天理愈晦, 人心愈邪, 不信先師而信震太過者, 至有謂"若如遺書之禁認, 先師不過爲一節之士, 必有獨命之認敎, 如石農之言, 然後乃爲道大義精之眞賢者."【徐鎭英字明玉大言於衆中】, 而人皆靡然從之. 此非詖淫邪遁滔天塞路而何? 所以不得不明論痛辨, 而以此爲奴爲奸人敗俗人, 且幾不免於檢獄之瘐死, 而亦不悔矣.朱子嘗論荀淑之道甚盛, 而至於爽彧之附賊, 則又溯其源而論之曰: "當時父兄師友之間, 亦自 有一種議論, 文飾蓋覆. 使驟而聽之者, 不覺其爲非而眞以爲是. 邪說橫流, 所以甚於洪水猛獸 之害. 年來讀書, 只覺得此意思分明, 參前倚衡, 自不能舍, 雖知以是爲人所惡, 終窮而死, 誠 甘樂, 不自以爲悔也." 噫, 今日執事所謂"糢糊", 何其與朱子所謂"蓋覆"者符合耶? 此其受病 之源也.澤述謹按: 因爽彧之附賊, 而溯而疑其父兄師友之自有一種邪論. 則因門人之出認, 而人之疑其師之或有認意, 亦足可慮. 然我負其罪而爲之, 則足以明師之心. 今乃自門人之口而大言之曰: "吾師曾有認敎", 又以勿認之遺書爲僞造. 則人之據此而直論其師者, 豈但因子孫而溯論其父祖之比而已哉? 원우(元祐)의……아니겠습니까 원우는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연호로,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을 했던 시기이다. 제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반대하고 사마광(司馬光)의 구법(舊法)을 지지했던 문인(文人)과 학자들을 말한다. 채확(蔡確)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적극 지지했던 인물로, 일찍이 안륙현(安陸縣)에 있는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 때에 "높도다 이름난 신하 학증산이여, 상원 연간에 말은 충직했고 지조는 곧았네〔矯矯名臣郝甑山, 忠言直節上元間.〕"라는 시구를 지어, 선인태후를 측천무후에 비하고, 자신을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세우도록 간하여 정권을 잡은 학처준(郝處俊) 증산(甑山)은 봉호임))에 가탁하였다. 이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범조우(范祖禹), 우정언(右正言) 유안세(劉安世) 등이 이 시구를 논박하여 그에게 죄를 물어 귀양 가게 했는데, 범순인(范純仁 충선(忠宣)은 시호임)이 귀양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여 채확을 구원하려고 하자, 주희가 그를 비판하여 "훗날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계책이다."고 하였다. 《宋史 卷471》 《宋子大全隨箚 卷3》 부자(富者)가 …… 못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말이다. 세실(世室) 공덕(功德)이 있는 임금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지 않고 대대로 종묘(宗廟)의 신실(神室)에 봉안하는 것을 말한다. 1683년(숙종9)에 당시 영중추부사였던 송시열은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드러내고자 친진(親盡)에 이르지도 않은 효종의 신실(神室)을 세실로 삼도록 상소하여 숙종이 허락한 일이 《국역 숙종실록》 9년 2월 21일 기사에 보인다. 저 …… 있겠습니까 세실(世室)은 공덕(功德)이 있는 임금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지 않고 대대로 종묘(宗廟)의 신실(神室)에 봉안하는 것을 말한다. 1683년(숙종9)에 당시 영중추부사였던 송시열은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드러내고자 친진(親盡)에 이르지도 않은 효종의 신실(神室)을 세실로 삼도록 상소하여 숙종이 허락한 일이 《국역 숙종실록》 9년 2월 21일 기사에 보인다. 헌신(憲臣)이 …… 삼았다 헌신은 홍수주(洪受疇: 1642~1704)를 가리킨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이이(李珥)와 송익필의 문인이며,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과 노론계 인물들의 스승이다. 이 상소는 《숙종실록》 16권 11년 5월 26일 3번째 기사에 보인다. 고(故) …… 것 《국역 계곡만필》 제2권 〈세상에서 율곡이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世傳栗谷剃髮者妄也]〉에 "조 승지 지세(趙承旨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字)임)가 나에게 말하기를,'율곡(栗谷)이 입산(入山)할 때에 머리를 깎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기에, 내가 일찍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임)에게 물어 봤더니, 사계는 머리를 깎은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하였다." 라는 내용이 보인다. 옛적에……하였습니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옛적에……꾸짖었다 범조우(范祖禹, 1041~1098)는 북송(北宋)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순부(淳夫)·몽득(夢得)이며, 화양(華陽) 사람이다.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사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문인으로 역사학에 뛰어나 사마광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였다. 주희(朱熹)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한 편지에서 범조우에 대해 논하기를, "일이 일어난 당시에 변론하지 못하고 몇 년 지난 뒤에 밝혔으니, 이는 강직함이 부족하여 정이(程頤)와 소동파(蘇東坡) 양쪽 모두를 따르려는 사심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하게 여긴 것이 정이에게 있었던 까닭에 끝내 의리를 공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不能辨之於當時, 而發之於數年之後. 此則剛强不足, 不免乎兩徇之私者. 而其所重在此, 故卒不能其義理之公也.〕"라고 하였다. 《宋史 卷337 范鎭列傳》 《晦庵集 卷35 答呂伯恭》 타니대수(拖泥帶水) 진흙을 끌고 물을 띤다는 뜻으로, 질퍽거리는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할 뿐 명확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찬리와 …… 인욕이다 저본에는 '似天理而非人欲'으로 되어 있으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非'는 연문(衍文)인 듯하여 번역하지 않았다. 홍타시(洪打豕) 금한(金汗)의 이름으로 청(淸) 나라 태종(太宗)을 말한다. 주머니 …… 비추네 화폐와 도장, 해와 달은 모두 일제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제의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해야 함을 나타낸 말이다. 왜삭(倭朔) 왜의 정삭(正朔 책력(冊曆)) 즉, 일본의 연호를 말한다. 원우(元祐) 북송(北宋) 철종(哲宗)의 전반기(1086~1093)의 연호로, 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宋史 卷242 后妃列傳》 원성(元城)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원성(元城)으로 좌천되어 원성 주부를 역임한 바 있기에 이렇게 칭하였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원성이 …… 되었으니 소인은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등 간신들을 가리키고, 만사의 성은 원성처럼 한번 귀양 가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을 말하는 듯하다. 원성은 유안세(劉安世)로, '전상호(殿上虎)'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국사를 논함에 강직하였고, 장돈(章惇)이나 채경(蔡京) 등 간신들을 신랄하게 탄핵했다가 광동과 광서 등 영외(嶺外)로 일곱 번이나 귀양 갔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사사(士師)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 옥사 등을 관장했던 관직의 이름이다. 맹자는 …… 하였습니다 《맹자》 〈등문공 하〉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춘추》의 법에 난신적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일 필요는 없다는 것과 같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이 나온다. 지언(知言)과 양기(養氣) 지언은 말이 도리에 맞는지를 파악하여 말의 이치와 마음의 병폐를 아는 것이고, 양기는 인의(仁義)를 쌓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부동심(不動心)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공손추의 물음에 맹자가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대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 양주(楊朱)는 …… 것입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하여 양주의 자기중심주의와 묵적의 겸애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부정(不正)한 말의 네 가지 대표적 병폐로, 편벽된 말[詖辭]ㆍ방탕한 말[淫辭]ㆍ부정한 말[邪辟]ㆍ도피하는 말[遁辭]를 가리킨다. 말을 안다[知言]는 것에 대한 물음에 맹자(孟子)가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대답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자가……논하였고 순숙(83~149)은 순자(荀子)의 11세손으로, 자는 계화(季和)이고, 낭릉후상(朗陵侯相)에 봉해졌다. 그의 검(儉)ㆍ곤(緄)ㆍ정(靖)ㆍ도(燾)ㆍ왕(汪)ㆍ상(爽)ㆍ숙(肅)ㆍ부(敷) 등 여덟 아들이 모두 명망이 뛰어나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 일컬어졌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주희(朱熹)는 순숙의 어짊을 지극히 칭찬하여 '추월한강(秋月寒江)'이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85 聚星亭畫屏賛》 순상(荀爽) …… 것 순상은 순숙의 여덟 아들 중에 한 명으로, 동탁(董卓)이 전횡하던 조정에 몸담았고, 순욱은 순숙의 손자로,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고 조조(曹操)의 신하가 된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62 荀爽列傳》 《後漢書 卷70 荀彧列傳》 非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연문(衍文)인 듯하다. 而 저본에는 '而而'로 되어 있는데, 중첩된 것으로 보아 '而'로 교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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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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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숙제 여직187)에게 올리는 제문 祭叔弟汝直文 병술년(1946) 2월 6일은 나의 셋째 아우 여직(汝直)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큰형 후창(後滄) 노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살고자 하는 뜻이 없는 듯하다가 그 후 139일이 지난 6월 27일 경자일(庚子日)에야 비로소 글을 짓고 곡하며 말한다.아아, 그대의 죽음은 하늘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완성하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나고 죽음은 사람의 일 가운데 큰 것인데, 지친(至親)을 잃음에 이르러서는 천명을 모르는 채 감정에 휩쓸려 지나치게 슬퍼하면, 이는 이치에 통달한 군자가 아니다. 노력을 다하지 않고서 천명이라 핑계대고 조금의 근심도 없으면, 이는 도리를 해치는 잔인한 사람이다.그대의 죽음은 과연 하늘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인가, 하늘인가? 그대 같은 선량한 사람을 어이하여 하늘이 장수를 막았단 말인가? 하물며 이미 경술년(1910)에서 계축년(1913)까지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가물가물 힘없이 죽어가던 재난의 강과, 계미년(1943)에 크게 번진 역병 음증(陰證)의 위태로운 바다를 건넜는데, 어떻게 올봄 육칠일 사이에 별 까닭이 없는 빌미를 끝내 이기지 못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사람 때문이었을까?나는 늙고 혼미한 생각으로 전날에 효험을 보았던 방도를 이번에 다시 쓰고 있었네. 다만 그 때 온 집에 환자가 가득 차 있는 바람에 그대를 잘 돌보지 못하고 때를 놓쳐 잘못된 것일까? 대개 하늘의 도는 헤아리기 어렵고, 사람의 윤리는 다하기 어려우니, 하늘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알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대가 평소 본디 허약하였고, 집안 선조들이 대대로 장수를 못 하셔서 반백년의 두 분 뒤에 아버님이 계셨다. 그래서 그대는 아들 셋에 두 며느리를 얻어 손자 하나를 슬하에 두었는데 그들에게는 조부와 증조부가 안 계셨다.188) 그대는 이 일에 서운해 말고, 하늘이 하는 일을 편안히 받아들이소. 나는 품행이 잘못되어 신명(神明)께 죄를 받았으니, 그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딸(수원백씨 백만기(白萬基)의 처)이 세상을 떠났고, 둘째 형 여호(汝昊)189) 내외도 다 세상을 떠났다네. 이것은 모두 나에게 내린 벌인데 아우 내외와 딸에게까지 화가 미친 까닭이니, 내 어찌 감히 그대의 죽음을 사람 때문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용서하겠는가?아아! 나의 이 모든 말을 그대는 알까 모를까? 나 또한 네 번의 상례로 넋이 달아나 죽을 날이 가까우니, 지하에서 만날 날이 멀지 않았네. 그런데 오늘은 중복(中伏)의 절기여서 성재(星齋)190) 종회(宗會)에서 전편(專便)의 사람을 보내 와 달라 청하네. 중제(重制)191)의 상복을 입은 몸으로 갈 수 없는데다, 또 전에 이날이면 매번 그대와 함께 가던 일이 생각나니, 이제 어떻게 차마 홀로 가겠는가? 어쩌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린 감회로 에이는 아픔이 갑절이네. 집에 새로 빚은 술이 있어 한 잔 붓고 궤연(几筵)에 고하지만 글이 내 마음을 다 하지 못하고, 곡해도 슬픔을 다 드러내지는 못하고 다만 간과 쓸개가 재가 될 뿐이요, 머리카락과 수염이 다 희어졌을 뿐이네. 영령은 여기 와서 이 형의 마음을 살펴주소! 維丙戌二月六日, 我叔弟汝直觀化之辰也。 伯兄後滄老夫悲不自勝, 如無欲生, 乃以厥後百三十有九日, 六月二十七日庚子, 始爲文而哭之, 曰: 嗚呼! 汝之死, 天耶, 人耶? 人有恒言, 謀事在人, 成事在天。 死生人事之大者, 凡於至親之喪, 不知命而任情過慟, 非達理之君子, 謀不盡而委命恝然, 是害理之忍人。 汝之死, 果天乎, 人乎? 而吾果爲何如? 人也, 天也? 以汝善良, 胡爲乎天遏其年, 且旣濟乎庚戌癸丑跨歲奄奄萬口無幸之津, 癸未大癘陰證末境之海, 而不得於今春六七日無何之祟者, 何也? 人也? 吾豈老悖不復用前日已效之謀於今日乎? 但時値患者盈室, 於汝則涉於緩不及者爲咎歟? 大抵天道難測, 人倫難盡, 其天其人何以知之, 知之亦何所益? 惟是汝素質虛弱, 家世無壽, 半百有二, 加於先子, 三子二婦一孫之在膝, 祖曾未有。 汝可無憾乎此, 而安其天。 吾則行已悖戾, 獲罪神明, 汝死未幾日, 季女化去, 昊弟內外幷沒, 此皆所以降罰於吾, 而禍及弟女, 豈敢以汝死之非人自恕乎? 嗚呼! 凡此所言, 汝其知乎, 否乎? 吾亦禠魄於四喪, 死亡無日, 地下相見, 不遠伊邇。 第今朝中伏俗節, 星齋宗會遣使專請, 身有重制, 旣不可往, 且念前此是日每與汝往, 今何忍獨行? 適感時事, 倍切痛割。 家有新釀, 酹告象生, 文不能盡意, 哭不能盡哀, 只有肝膽作灰, 須髮成雪而已。 靈庶來格, 諒乃兄心! 여직(汝直) 셋째 아우 김만술(金萬述)의 자이다. 앞 〈자사(字辭)〉의 주석 참조. 집안 선조……안 계셨다 김택술(金澤述, 1884~1954)과 셋째 아우 김만술(金萬述, 1895~1946)의 증조부 김석규(金錫圭, 1804~1835, 32세)와 조부 김경순(金景淳, 1825~1867, 43세)은 반백년(50세)을 못 누렸고, 부친 김낙진(金洛進, 1859~1909)도 겨우 반백을 넘겼다. 김만술은 세 아들 형수(炯洙, 1916~1975) 형락(炯洛, 1922~1959) 형방(炯坊, 1932~?, 출계(出系))과 첫째ㆍ둘째의 두 며느리, 그리고 여섯 살배기 손자 대중(垈重)을 두고 있었다. 여호(汝昊) 김택술 사형제의 둘째인 김봉술(金鳳述, 1887~1946.4.28.)의 자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며, 부인은 평택임씨(1885~1945.3.19.)이다. 성재(星齋) 최북(崔北, 1712~1786)이다. 본관은 무주(茂朱),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등이다. 조선 영조(英祖) 연간의 화가로, 당대의 명류들과 교류하였다. 중제(重制) 9개월 이상을 입는 무거운 상복으로 대공복(大功服) 이내의 친인척 상례에 입는다. 대공친(大功親)에는 종형제자매와 장자부(長子婦) 이외의 자부ㆍ질부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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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축문 告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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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조 매죽당 부군192)의 묘갈을 다시 세운 데 대해 고하는 글【임오년(1942)】 告十三世祖梅竹堂府君墓碣改竪文【壬午】 삼가 아룁니다 伏以비석에 새긴 글이 顯刻之文지난 숙묘조에 粤在肅廟외손193)인 撰自宅相이 충숙공194)에 의해 지어졌는데 李忠肅公세월이 멀어짐에 글자가 없어져서 歲遠字湮읽을 수가 없으므로 不可以讀오랫동안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였으나 久圖改竪힘이 모자라 이루지를 못하였습니다 力綿未成이제 여러 자손들이 今玆諸孫함께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協議同力좋은 돌을 새로 장만해 新具美石옛 묘갈문(墓碣文)을 새기니 用刻舊文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풍도가 懿行高風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永傳來許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서 謹以酒果정성을 펴 경건히 고합니다 用伸虔告삼가 고합니다 謹告 伏以顯刻之文, 粤在 肅廟, 撰自宅相李忠肅公.歲遠字湮, 不可以讀, 久圖改竪, 力綿未成.今玆諸孫, 協議同力, 新具美石, 用刻舊文, 懿行高風, 永傳來許.謹以酒果, 用伸虔告.謹告. 매죽당(梅竹堂) 부군(府君) 김종(金宗, 1471~1538)을 가리킨다. 자는 사앙(士仰)이다. 외손(外孫) 원문은 '택상(宅相)'이다. 진(晉)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외가(外家)인 영씨(甯氏)에게 양육되었는데, 집터의 풍수를 보는 이[相宅人]가 "장차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다.[當出貴甥.]"라고 예언하였다. 위서는 외조모를 위해 이 예언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후에 사도(司徒)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晉書 卷41 魏舒列傳》 '택상'은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나중에는 '외손'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 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를 가리킨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 또는 칠정(七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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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와 5대 조고비의 묘에 고하는 축문【정묘년(1927)】 告六世五世祖考妣墓祝文【丁卯】 삼가 아룁니다. 伏以선사를 체천195)하는 것은 先祀遞遷집안의 체통을 드러낸 것으로, 著之家體풍속에 따라 제도를 이루어서 因俗成制후대 사람들이 따른 것입니다. 後世式遵《송자대전》을 상고해보니 爰攷大全사손의 대까지 한정하는데 限嗣孫代진실로 정론인 것이요, 寔爲論定옛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據之古經체천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遷出乎情옛 제도를 헤아려 보면 중요한 일로, 稽古體重그 극치를 궁구해 보니 究厥極致유래가 있음을 압니다. 知在攸從또한 후대의 어진 이들이 亦越後賢이미 취사함이 있습니다. 已有取舍생각하건대 조고비는 念祖考妣자손들이 번성하여196) 孫麗有綿제방에 천사한 경우가 遷祀諸房수십 년인지라, 于數十祀이에 모두 구차하게 되어 迨玆幷窶예를 행하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爲禮實難삼가 옮겨 장사 지낸 뒤에 謹移喪餘해마다 한 번씩 묘소에 제사를 받드니, 歲一薦墓마음은 비록 억제하지만 情雖有抑예를 따져보면 마땅한 일입니다. 禮則是宜형세상의 이유로 생긴 일이지만 事出勢緣도리어 귀결은 올바름을 얻었으니, 反歸得正일에 나아가는 처음에 卽事之始감히 그 사유를 아룁니다. 敢告厥由존령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尊靈鑑臨부디 재앙을 내리지 마소서. 庶不降戾부디 흠향하소서. 尙饗 伏以先祀遞遷, 著之家體, 因俗成制, 後世式遵.爰攷《大全》, 限嗣孫代, 寔爲論定, 據之古經.遷出乎情, 稽古體重, 究厥極致, 知在攸從, 亦越後賢, 已有取舍.念祖考妣, 孫麗有綿, 遷祀諸房, 于數十祀.迨玆幷窶, 爲禮實難.謹移喪餘, 歲一薦墓, 情雖有抑, 禮則是宜.事出勢緣, 反歸得正, 卽事之始, 敢告厥由.尊靈鑑臨, 庶不降戾.尙饗. 체천(遞遷) 종손(宗孫) 집 사당에서 봉사(奉祀)하는 대수(代數)가 다한 선조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보통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옮기는데, 최장방은 4대 이내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 번성하여 원문은 '유면(有綿)'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緜)〉에 "번성한 큰 오이와 작은 오이여.[緜緜瓜瓞]"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오이 덩굴이 끝없이 뻗어나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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