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영이 이원재에게 답한 편지에 대한 변론 【1927년 10월】 吾震泳答李遠齋書辨 【丁卯十月】 선사께서 전옹(全翁)30)의 문집에 얼마나 많은 문자를 산정(刪正)하셨습니까. 그런데 심(沈)이 나 이(李) 같은 여러 사람들이 원수로 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이승욱(李承旭)이 "간 재(艮齋)가 전옹의 문집을 고쳤으니, 이것은 간재의 문집이지, 전옹의 문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무함하고 모욕한 것에 대해서 집사께서는 혹 듣지 못했는지요?선사께서 전옹의 문집을 산정하신 것은 산정이 온당한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원수로 대하는 것은 사사롭고 망령된 것이다. 오진영이 선사의 문고를 산정한 것은 진실로 산정이 온당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하물며 첨가하고 고치기까지 한 것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들이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은 공정하고 참된 것이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전옹의 글을 고친 적이 없으니, 이승욱의 말은 진실로 대부분 무함과 모욕이다. 오진영은 실제로 선사의 글을 고쳤으니, 그가 고친 것은 어찌 간재의 문집이 아닌 오진영의 문집이 아니겠는가. 그가 망령되게 삭제하고 첨가하며 고친 부분은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에 있으니, 그 사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응당 가져다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하나 들어 말할 겨를이 없다.집사께서는 비록 "선사께서 직접 스스로 수정하셨다."라고 하셨지만, 선사께서는 "후고 (後稿)31)가 겨우 책을 이루긴 했으나 정본(定本)은 아직 아니다."라고 하셨고, "후고는 정 신이 혼미하여 수정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하셨으며, "사고(私稿)를 정리하여 바로잡는 것 은 전적으로 이견(而見 오진영)을 믿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평소 말씀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손수 정중하게 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 자신의 말이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게 한 분부가 자기 자신의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리하여 바로잡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과 어구가 겹쳐서 늘어져 있는 것이나 고증과 근거가 사실에 어긋난 것, 글자가 빠진 것, 잘못된 것, 어긋난 것, 뒤섞여 있는 것 등의 부분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어찌 자기 마음대로 고쳐 짓도록 허여한 것을 말하겠는가. 선사의 둘째 아들 정재(靜齋)가 항상 말하기를,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박죽천(朴竹川)의 신도비(神道碑)의 초고를 완성하시고 오진영에게 수정하거나 윤색하도록 명하셨는데, 오진영이 조금도 겸양이나 삼감이 없이 고치고 삭제하여 거의 절반이나 줄여버렸다. 오진영이 떠난 뒤에 선인께서 '이와 같은 것은 오히려 묘갈(墓碣)로 삼기에도 부족하니, 모두 되돌려놓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선사께서 일찍이 나에게 훈계하시기를, "이견의 글은 기이함을 숭상하니, 부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보면 선사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는 매번 후고는 아직 정본(定本)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며 다른 사람을 막는 파병(欛柄 칼자루)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미 정본을 이루었다."라는 가르침이 있는 전고(前稿)32)에 대해서도 또한 멋대로 손을 놀려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컨대 〈분언(㤓言)〉이나 〈신혁균서(申赫均書)〉, 〈전불관전(田不關傳)〉 등의 글을 고치거나 삭제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전고이다.】 여기에서 그의 말이 곤궁함을 볼 수 있다.삭제가 온당하지 않는데 삭제한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삭제가 온당한데 삭제하지 않는 것도 또한 죄가 됩니다. 삭제가 온당한지 여부를 모르면서 삭제한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삭제가 온당한 줄 알면서도 삭제한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더욱 죄가 됩니다.그는 대고(大稿)에 대해 삭제가 온당하지 않는 것들을 삭제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려움 없이 첨가해 넣는 것을 차마 범하여 썩어 백골이 된 선사의 가르침을 속였으며, 게다가 자기의 생각으로 고치기까지 하였으니, 죄가 또 첨가한 것보다 더 크다. 우리들이 변론하고 성토할 때에 삭제가 온당하지 않은 것을 삭제한 것에 대해 단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첨가하고 고친 것에 대해서 더욱 단죄하였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요란하게 단지 삭제의 온당함과 부당함만을 말하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는 아마도 글을 교정함에 삭제하는 전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현혹하는 수단이다.오늘날의 변론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의 변론이 있을 것이고, 사람의 변론이 있지 않으 면 반드시 하늘의 변론이 있을 것입니다.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그가 먼저 말했으니 일이 줄어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진본(晉本)33)이 이미 출간되었고, 수본(手本)도 또 남아 있으니, 들어 대조해보면 그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훗날의 논변과 하늘의 논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즉시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논변될 수 있을 것이다.'고쳤다[改]'라는 한 글자는 내 알 바 아닙니다. 이것으로 선사를 무함한 자눈 이승욱의 무 리이고, 이것으로 이놈을 무함한 자는 집사의 측근입니다. 이놈이 외람되게도 선사의 뒤를 따라 이런 죄목을 얻었으니, 분수에 영광입니다.그가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고, 또 옹정(甕井)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선사께서 홀로 계실 때 스스로 헤아려서 하도록 명하셨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라고 선사를 무함한 것을 가지고 사람이 성토했을 때에 곧바로 큰 소리 치며 말하기를, "내 입으로 말한 것을 듣지도 못했고, 내 손으로 쓴 것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찌하여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으로 나를 무함할 수 있는가?" 하였는데, 지금 "'고쳤다[改]'라는 한 글자는 내 알 바 아니다. 이것으로 이놈을 무함했다."라는 이 말도 말의 느낌이 똑같다. 이는 바로 그가 늘 하던 버릇이니, 어찌 상대하여 변론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가 일마다 매번 자신을 선사에게 비기는 것이 정말 통탄스러울 뿐이다. 아, 순(舜)ㆍ우(禹)를 본받았다는 왕망(王莽) 같은 사람이나 문왕(文王)에 의탁했다는 조조(曺操)와 같은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34)훗날에 척안(隻眼)과 거벽(巨擘)35)이 "이(李) 아무개가 오(吳) 아무개를 죽였다."라고 크게 쓸 것이니, 집사께서 무덤 속에서 일어나신들 아마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척안과 거벽은 수본일 뿐이니, 어찌 훗날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벌할 수 있는 것이 《춘추(春秋)》의 법이니, 어찌 다만 이 아무개뿐이겠는가. 하늘의 태양이 환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덤 속은 말하지 말라."심(心)이 곧 성(性)이요, 성이 곧 심이다."라는 말은 모름지기 《주자대전(朱子大全)》 70권 끝에 나아가서 한 번 읽고, 열 번 읽고, 백 번 읽고, 천 번 읽어보면 확실히 정자의 말이고, 왕양명(王陽明)의 말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런 뒤에 와서 나를 친다면 나는 그것을 공손히 받을 것이다.이 한 조목은 백 번 천 번 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진영의 견해가 옳다. 그러나 문고를 어지럽힌 일을 견해가 옳은 것과 함께 논해서는 안 된다. 이원재는 무슨 까닭으로 고치거나 첨가한 많은 진장(眞贓 확실한 증거)들을 버려두고 단지 이것을 들어 질문한 것인지 내심 괴이하게 여긴다.〈회퇴율삼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로 전 호남이 쾅쾅거려 일곱 성인이 모두 길 을 잃었다36)고 들은 것 같습니다. 비록 환혼단(還魂丹) 한 알을 바치고 싶지만 아마도 명 월주(明月珠)를 어두운 곳에 던져주는 꼴이 될 뿐입니다.37)변론이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에 보인다.제가 도리어 절로 괴이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 있는데, 사오 년 이래로 호남 사람이 나를 황 천(黃泉)에 묻고자 하여 푸른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어지럽힐 때에 과연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겠는가. 스스로 황천에 묻히고서 사람들이 묻고자 했다고 말하니, 이것이 참으로 괴이하고 우습다. 또 최원(崔愿)ㆍ 김세기(金世基)ㆍ정운한(鄭雲翰)의 무리로 하여금 유서를 여자 종이 석개(石介)의 편지38)를 위조한 것처럼 위조한 것이라고 무함하게 하고, 무함을 변론한 사람들을 지극히 흉험하고 아주 패악한 말로 무함하게 하였는데, 이 당시에도 또한 과연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을 황천에 묻고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묻었다고 말하니, 이것이 또 괴이하고 우습다.전(田)의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과, 최(崔)의 답서와, 성(成)의 투고(投稿) 등 병사를 옮겨가듯 허다한 공격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꿔가며 번갈아 나오고 서로 생겨나더니 선사의 문고를 멋 대로 고쳤다는 커다란 죄목이 뒤이어 나왔습니다.단지 이른바 "은행나무 아래의 말"만 보더라도 이미 선사를 무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는 것은 과연 누가 쓴 것인가? 그런데도 오히려 "전(田)이 인허를 받으려고 생각했다. 최가 답한 편지이다."라고 하니, 만약 꿈속의 잠꼬대가 아니라면 바로 사람을 속여 다 귀머거리로 만들려는 것이니, 대단히 괴이하고 우습다. "성이 투고했다"는 것도 또한 말하지 말고, 아울러 사림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압송한 일도 두 강(姜)에게 핑계대지 말라. 정재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어찌하여 검국(檢局)에 들어간 것인가? 처음에는 강과 절교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끝까지 절교하지 않은 것인가? "진주의 인쇄는 오 아무개가 주장한 것이다."라는 글이 어찌하여 그의 무리에서 나온 것인가? 이조원(李祖遠)이 선사의 손자를 압송한 것이 통쾌한지 아닌지로 권순명을 기롱하였는데, 어찌하여 얼굴만 붉힌 채 답변하지 못한 것인가? 【이조원이 권순명을 기롱한 말은 이창난(李昌煗)이 전해 준 것이다.】하늘이 혹 모진 목숨을 빌려준다면 또 무슨 죄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애써 일으 키는 분란이 그칠 때가 없을 듯합니다. 일 많은 화아(化兒 조물주)가 나의 한 가닥 모진 목 숨을 쥔 채 많은 담대한 남자들을 가지고 노니, 이 때문에 괴이함과 웃음이 그치지 않습니 다.이미 선사를 무함했고, 사림에 화를 끼쳤으며, 선사의 손자를 압송했는데, 끝내 또 문고까지 고쳤다. 하늘이 만약 그로 하여금 늙도록 죽지 않게 한다면 또 어떤 죄악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일 많은 조화의 아이가 고집 세고 사나운, 대담한 남자 한 명을 태어나게 하고, 많은 무리들을 장난삼아 나오게 해서 세도(世道)에 화를 끼침이 그칠 때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웃을 마음은 없고 단지 괴이함과 탄식만이 절절할 뿐이다. 先師於全翁集, 刪正幾多文字? 而爲沈李諸家仇對何也? 至若李承旭之謂"艮改全集. 是艮集, 非全集."之誣辱. 執事其或未聞歟?先師之刪正全翁集, 當刪正者也, 諸家之仇對, 私而妄也. 震泳之刪先師稿, 固多不當刪者, 而況添之改之乎? 吾輩之辨討, 公而眞也. 先師不曾改全翁文. 旭說固多誣辱也. 震泳則實改先師文, 其所改者, 豈非是震集非艮集也乎? 其妄刪添改處, 有〈晉本考辨錄〉在. 欲知其實者, 自應取覽. 今不暇枚擧.執事雖曰: "先師親自修整." 先師則曰: "後稿僅能成冊, 而定本則未也." 曰: "後稿神迷, 不暇 修整." 曰: "私稿釐正, 專恃而見." 雅言不啻, 而手筆鄭重. 是何得爲自道? 而非實如今來喩 也.雖使釐正之訓, 非盡出於自道, 其曰"釐正"云者, 指辭語疊蔓考據爽實及漏誤舛錯等處而言, 豈許其任自改撰之謂乎? 先師仲子靜齋常曰: "先人草定朴竹川神道碑, 命震泳修潤. 震泳略無謙愼, 改之刪之, 減得幾半. 震去後. 先人曰: '如此則爲墓碣, 猶不足, 皆還存'" 先師嘗訓澤述曰: "而見文尙奇, 愼勿效也." 觀此二者, 可知先師心也. 且渠每諉以後稿未成定本爲禦人欛柄. 然則其於前稿有旣成定本之訓者, 亦多恣行手勢何也?【如改刪〈㤓言〉〈申赫均書〉〈田不關傳〉之類, 皆前稿.】 於此可見其說之窮也.不當刪而刪, 固罪也. 當刪而不刪, 亦罪也. 不知當刪與否而惟刪之罪, 固罪也, 知其當刪而惟 刪之罪, 尤罪也.渠於大稿, 非惟刪不當刪, 又無難添入忍犯, 欺其朽骨之訓, 又至於改之以己意, 則罪又大於添也.吾輩辨討, 非惟罪其刪不當刪, 尤罪其添之改之也. 渠乃譊譊然只說當刪不當刪而以張皇之, 蓋以校文有刪之之例故也. 此眩人手段也.不有今辨, 必有後辨, 不有人辨, 必有天辨.吾所欲言, 渠先道之, 覺得省事. 然晉本旣出, 手本又在, 擧以照準, 則渠之有罪無罪, 不待後辨天辨而卽可以辨乎今人矣.改之一字, 非吾所知也. 以此誣先師者, 承旭輩也, 以此誣此漢者, 執事側也. 此漢猥從先師後 而得此目, 於分榮矣.渠答徐柄甲書, 分明說"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又答甕井書, 分明說"先師獨命自量爲之", 及人之討以誣師有認意, 則輒大言之曰: "不聞吾口語, 不見吾手筆, 何得誣吾以誣師也?" 今此"改之一字, 非吾所知, 以此誣此漢"之云, 卽同一口氣. 乃渠恒習, 何足對辨? 但渠事事每自擬於先師者, 絶可痛也. 噫, 王莽之學舜禹, 曺操之托文王, 何代無之?後有隻眼巨擘, 大書: "李某殺吳某." 執事冢中起來, 却恐未易矣.隻眼巨擘, 手本是已, 何待後日? 人人誅之, 《春秋》法也, 豈但李某? 皇天白日, 赫赫臨之, 休說冢中."心則性, 性則心", 須就朱子大全七十卷末, 一讀十讀百讀千讀, 確然是程語而非王語. 然後來 打之, 吾當恭受之.此一款, 不待百讀千讀而震泳之見却得是, 不可以其亂稿而幷與其得是者而論之也. 竊怪夫遠齋, 何故舍多改添眞贓, 而特擧此而質問也.似聞以〈晦退栗三先生說質疑〉, 全湖洸洸, 七聖皆迷, 雖欲獻還魂丹一粒, 而恐爲明月珠之暗投 耳.辨見〈晉本考辨錄〉鄙却自有怪笑者, 自夫四五年來, 湖南之欲埋我黃泉, 而不見靑天也.誣師亂稿之時, 果見頭上靑天乎? 自埋黃泉而謂人埋之, 此眞怪笑. 且使愿世基雲翰輩誣遺書以女奴石書之僞造, 誣辨誣人以窮凶絶悖之語, 此時亦果見頭上靑天乎? 埋人黃泉而謂人埋渠, 此又怪笑田之認意, 崔之答書, 成之投稿, 許多移兵之擊, 改頭換面, 迭出互生, 擅改師稿之一大罪目踵 生矣.但就所謂"杏下說"觀之, 已足以知誣師矣. 而況"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者, 果是誰書乎? 而尙曰: "田之認意, 崔之答書." 若非夢中囈語, 正是欺人盡聾, 大可怪笑. 成之投稿, 且休說. 幷與禍士林押師孫而莫諉兩姜. 靜齋與渠書, 胡爲而入檢局? 始謂絶姜, 胡爲而不終絶也? "晉印吳某主張"之文, 胡爲而出渠黨也? 李祖遠之譏權純命以押師孫快否也, 而胡爲面赤不能答也?【李譏權之語李昌煗所傳】天或假頑命, 不知又生何罪, 諸位之勞攘, 恐無已時. 多事化兒把我一縷頑命, 玩弄許多膽男子. 是以怪笑之不已耳.旣誣師矣, 禍士林矣, 押師孫矣, 終又改稿矣. 天若使渠老而不死, 則又不知作得何許罪惡也. 多事化兒生得一箇頑戾膽男子, 弄出許多徒黨, 貽禍世道, 無已時也, 天意何居? 是則笑之無心, 而只切怪嘆也已. 전옹(全翁)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가리킨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명로(明老)이며,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후고(後稿) 간재의 글 중에서 1913년 이후의 글을 산정(刪定)ㆍ편차(編次)한 것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전고(前稿) 간재의 글 중에서 1906년에 산정(刪定)해 두었던 문고(文稿) 36책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초고(草稿)를 합하여 산정한 25책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진본(晉本) 1926년 10월에 간재의 문인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의 문집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순(舜)ㆍ우(禹)를 …… 없겠는가 순ㆍ우ㆍ문왕은 중국 고대 태평시대 때 성인으로 추앙받은 임금이고, 왕망ㆍ조조는 중국 역사에서 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한 대표적 인물이다. 척안(隻眼)과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일곱 …… 잃었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황제(黃帝)가 구자산(九茨山)에 가서 대외(大隗)를 만나 보고자 할 때,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양성(襄城)의 들녘에서 길을 잃어 물어볼 곳도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호남의 학자들이 진주본의 〈회퇴율삼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이 세 분들의 주장이 바르게 전달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환혼단(還魂丹) …… 뿐입니다 이 분들의 주장에 대해 변론하여 바로잡고 싶지만 도리어 논란만 키우게 될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환혼단(還魂丹)은 기사회생시키는 선약(仙藥)을 말하는데, 보통 중병을 치료하는 양약(良藥)의 뜻으로 쓰인다. 명월주(明月珠)를 어두운 곳에 던진다는 말은 밤중에 명월주를 행인에게 던져 주면 고맙게 생각하는 대신 칼을 먼저 뽑아 들려고 한다는 '명주암투(明珠暗投)'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여자 …… 것 원문의 '여노석서(女奴石書)'를 번역한 것이다. 송나라 때 간신 하송(夏竦)이 자기를 배척한 석개(石介)를 무함하고자 여자 종으로 하여금 석개의 필체를 모방하여 위조 편지를 쓰게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