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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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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국진에게 답함 병자년(1936) 與鄭國振 丙子 지난번 선장(仙庄 상대의 집)에 나아가 달을 감상하고 시를 읊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벌써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섣달이 되어 거의 일 년이 다 되었습니다. 풍조(風潮)가 더욱 심해져서 성학(聖學)이 장차 끊어지고, 인심이 더욱 변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와 그대들이 비록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서 덕을 세우고 학문을 전하며 윤리를 바루고 의리를 돕는 방도를 강구해 밝히더라도 오히려 공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만나고 편지를 보내는 것도 모두 막혀 걸핏하면 한 해를 넘기니, 어떻게 우뚝한 지혜를 세우고 확연한 논리를 세워 조금이라도 쓰러져가는 풍속을 구하겠습니까? 바라보아도 다가갈 수 없어서 진실로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노형은 고명한 견해와 강직한 기운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일반사람보다 뛰어납니다. 덕과 학문을 닦고 세상에 법도를 맑게 하는데 마땅히 스스로 이룸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치는 반드시 궁구한 이후에 더욱 밝아지고 기운은 반드시 함양한 이후에 더욱 굳세게 됩니다. 이치가 더욱 밝아져서 지극한 밝음에 이르고 기운이 더욱 굳세져서 지극한 굳셈에 이른 이후에 그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자는 강학(講學)이 아니면 할 수가 없고, 강학을 하고자 한다면 붕우와 서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형은 방술이 갈래가 많고 응대하는 것이 매우 번잡합니다. 도는 비록 여기에서도 볼만한 것이 있으나 만약 이같이 한다면 혼란스럽게 세월만 보내며 그칠 때가 없으면, 아마도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공부에 정밀함을 다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굳센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형은 이 점에 유의하여 응대는 조금 줄이고 강학은 조금 늘려서 이것을 중시하고 저것을 경시하며 이것을 주인으로 삼고 저것을 손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되면 정치하게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방도에 있어서 이미 절반은 이루게 될 것입니다. 현광(玄狂)은 지난 섣달에 선장에서 함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어찌 갑자기 죽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의 높은 재주와 바른 의론을 다시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당(吾黨)의 불행이고 음당(陰黨)의 기뻐할 바이니, 옛사람의 이른바 "하늘도 이 무리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준다."라는 경우란 말입니까. 아! 슬픕니다. 曩造仙庄,賞月賦詩,居諸幾何,窮臘冰雪,恰滿一周矣.風潮益甚,聖學將絕; 人心益渝,大義難明.當此時也,吾儕若爾人,雖日夕聚首,講明立德傳學正倫扶義之方,猶懼不克奏功.乃者面書俱阻,動輒經歲,其何以立卓然之知,立確然之論,而少救靡然之俗乎? 瞻望靡及,良可於邑如.老兄者,高明之見,剛直之氣,得之天資,超乎凡輩.其於修德學而淑世程也,宜有以自成而不須乎人.但理必窮而後愈明,氣必養而後愈剛,愈明而至於至明,愈剛而至於至剛而後已.欲如此者,非講學不能; 欲講學,非朋友麗澤不能也.竊覸兄方術多門,酬應甚煩,道雖於此,亦有可觀,然若如此紛汨度日,無有已時,則吾恐其無以致精於窮理養氣之功而至至明至剛之域也.願兄加意於此,就酬應而減却分數,就講學而添却分數,要使此爲重而彼爲輕,此爲主而彼爲賓,則其於致精窮養之道,思過半矣.玄狂是客臘仙庄鼎坐中一人,豈意其遽爾觀化? 其高才正論,更於何而得見? 此吾黨之不幸而陰黨之所喜也,古人所謂天亦爲此曹報仇者耶? 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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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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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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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4년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李箕斗) 호구단자(戶口單子)(87세) 고문서-증빙류-호적 甲午 李箕斗 甲午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94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가 관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94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가 관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내용은 호주의 가족구성과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는 모두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이며, 나이가 87세(무진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본관 아래에는 고(故)자를 써서 고인임을 나타냈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유원, 조가 증통정대부이조참의 국진, 증조가 증통훈대부사복시정 규명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장자가 면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46세(기유생)이다. 맏며느리는 조씨인데, 나이가 51세(갑진생)이며 본관이 한양이다. 차자는 우용인데, 직역이 유학이며 나이가 37세(무오생)이다. 둘째며느리는 나씨인데, 나이가 41세(갑인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천구질에는 비 2명과 노 1명이 기재되어 있다. 비는 둑덕(51세)과 분순(31세)이며, 노는 부문(35세)이다. 끝에 적은 신묘식(辛卯式)은 신묘식년의 호적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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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5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巳七月十七日 尹璂燮 乙巳七月十七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5_001 1905년 7월 17일에 윤기섭이 가천 사돈께 며느리의 유종과 자신이 더위로 인해 설사를 앓은 것과 가을걷이 등에 관한 내용으로 보낸 간찰 1905년 7월 17일에 사하(査下) 윤기섭(尹璂燮)이 가천(可川) 사돈께 며느리의 유종(乳腫)과 자신이 더위로 인한 설사를 앓은 것과 가을걷이에 관한 내용을 말한 안부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윤기섭이 자신의 사돈에게 가을이 되어 안부가 어떠한지 자세히 묻고, 어버이의 안부는 건강상의 위태로움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상대방의 딸이자 자신의 며느리는 유종으로 다섯 달 정도 고생했는데 아직 완쾌가 안 되었고, 자신은 더위로 인한 설사병이 걸려 고생하고 있다. 올해 농사는 도처에 거둘 것이 있어 크게 다행이라고 하고 사돈의 농장은 어떠한가 물었다. 지난번에 뵙고 나서 노쇠해져 생긴 병이라 생각되지만 이제 해로워지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니, 철에 따라 몸조리 잘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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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巳六月初二日 尹在晉 乙巳六月初二日 尹在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05년 6월 2일에 윤재진이 안부를 여쭙고 자신과 권속들의 처지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협지가 있다는 간찰 1905년 6월 2일에 윤재진(尹在晉)이 안부를 여쭙고 척손(戚孫)인 자신과 권속(眷屬)들의 처지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협지가 있다는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자신은 다행히 병이 없고 권속들의 근심은 때마다 끊이지 않는데 더위 때문에 건강하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 나머지 말씀드릴 것은 협지에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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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後滄先生文集 後滄集 後滄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문집 국역 後滄先生文集 乙未 金澤述 乙未 金澤述 석판본 15 반곽 유계 12행30자 註雙行 상하2엽화문어미 정읍 이평 부안김씨가 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 발행한 근대유학자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문집 1. 개요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은 일제강점기 항일(抗日) 운동가이자, 유학자, 문장가, 교육자로서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특히 당대 저명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고제자(高弟子)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빼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하늘에서 준 재능이 높고 밝으며, 재주와 성실함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장은 일찍이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묘를 3년 동안 하였다. 글을 짓고 후학을 길렀으니 한 시대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을 따라 목숨을 지켜 도를 잘 실천하는 의를 강설하였다. 공은 경술년 합방 이후 왜적이 공의 효행을 듣고 금잔을 하사하여 포상할 적에,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왜적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았으나 현명하게 대처하고 행동했다. 왜적의 칙령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음은 물론 배급한 식량마저도 물리쳐 먹지 않았다. 태산(정읍 이평면 산명) 위 황량한 산등성이 위에 흙집을 짓고 솔잎을 먹으면서 '금화곡수양아(金華哭首陽餓- 금화를 통곡하며 수양산에서 은거하던 백이처럼 굶어 죽겠다.)'라는 여섯 글자를 부절로 삼아 정절로써 삶을 마쳤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김택술은 누구보다도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고 학문적 깊이도 있었으며, 효심도 지극했고 의로움을 지녀 항일운동에도 동참했으며, 지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편고동문검공(徧告同門僉公)〉에서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과 방이다. 도학을 하지 않고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지만, 도학을 하면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니, 그의 가치관이 도학과 절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문인과 유림들은 김택술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享祀)하였다.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2. 행력 김택술의 본관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이다. 조고(祖考)는 김석규(金錫圭)이고, 선고(先考)는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이며, 선비(先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1884년(고종 21년) 6월 6일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滄東)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종현(鍾賢)이고, 호(號)는 후창(後滄)이다. '후창'이란, 간재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일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써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모방하여 남송(南宋) 주자(朱子, 1130~1200)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후창이라 한 것이다. 곧 주자의 고향이 창주(滄洲)이므로 창주병수(滄洲病叟)의 호와, 창주정사(滄洲精舍)가 있었으니 주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88년(고종 34) 14세에는 감시(監試)에 응하고, 남은 노잣돈으로 『문선(文選)』, 『사문유취(事文類聚)』, 벼루 등을 구매하여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이로 보면, 그의 학문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15세가 되던 해에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900년(고종 37) 17세, 천안(天安) 금곡(金谷)에 가서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행하였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의 〈선고벽봉군가장(先考碧峰君家狀)〉에 따르면, "경자년 가을, 전선생께서 변산에 있는 월명암에 머물러 계셨으니, 부친이 나에게 명하여 선생을 가서 알현하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나를 아껴 몸소 부친을 방문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것을 청하라고 권하였는데, 부친께서는 집에서 스승을 청하는 것은 성의가 없고 또 예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날을 가려 폐백을 갖추고 사백여 리를 넘어 천안 산중에 있는 간재선생을 배알하고 연분을 청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실제 몇 달 후, 김택술은 천안에 찾아가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906년(고종 43) 23세, 정읍(井邑) 태인(泰仁)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을 위로하고 간재선생의 서신(書信)을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언행을 마음에 간직하여 본받기 위해 〈서신록(書紳錄)〉을 기록하였다. 1908년(순종 2) 25세, 일제의 지배 아래 있는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신념으로 왕등도(王登島)에 들어가 거처할 섬을 찾다가 8, 9월 계화도(界火島) 장자동(壯子洞)에 머물렀다. 김택술 또한 계화도를 방문하여 간재선생의 문고(文藁) 편집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의 검열이 덜 미치는 북간도(北間島)를 두고'유학자들이 참으로 살만한 땅'이라고 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북간도로 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915년 32세, 일제가 은사금(恩賜金)을 보낸 것을 물리쳤다. 이듬해, 부친 벽봉선생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1918년 35세에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지었다. 이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학문이 자연스럽게 부합한다는 주장을 전집(全集) 내용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점을 추출해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에 간재 선생은 김택술의 이 저술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1922년, 39세에는 호남 유림으로 추대되어 대표로 충청북도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현 충북 괴산)을 방문하여 〈화양동유록(華陽洞遊錄)〉을 지었다. 화양동에는 만동묘(萬東廟)뿐만 아니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가 있어 기호(畿湖) 유림들의 성지였기에 유학자 김택술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유학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간재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25년 정읍 만종재(萬宗齋)에서 강학을 시작하였다.〈강규(講規)〉, 〈교과규칙(敎課規則)〉, 〈시고규칙(試考規則)〉 등을 지어 교육과정과 운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교과규칙〉을 살펴보면 반(班)을 학업의 정도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분반하였으며, 반마다 과목과 교재를 규정하였다. 1924년 41세, 동문수학하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간재선생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총독부(總督府)의 승인 아래 문집 『간재사고(艮齋私稿)』을 추진한 일이 발생하자, 현동묘하(玄洞墓下)에서 동지 59명과 함께 그를 성토하였다. 일찍이 간재선생은 문집 간행에 대하여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내지 말라."고 하였기에 문집 간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진영을 둘러싼 영남(嶺南)의 학자들은 왜인 관청의 출판 인가를 받아서라도 출간을 늦출 수 없으며 이 또한 선사 말년에 받은 유명(遺命)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택술을 비롯한 호남(湖南)의 학자들은 왜적에게 출판 인가를 받아 출간을 하는 것은 스승의 높은 학덕과 의리를 욕보이는 일이며, 인가를 받아 출간해도 괜찮다는 유명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로, 이는 선생을 속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김택술은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간재선생의 유고를 편찬하고 교정하여, 스승이 직접 확인한 원본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1926년 43세, 오진영을 주축으로 한 영남지방 문인들이 간재선생의 문집을 재편집하여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경남 사천 용산정(龍山亭)에서 납활자(鈉活字)를 이용하여 간재선생 진주본(晉州本)을 발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김택술은 〈간재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私稿晉州本考辨錄)〉을 지어 수정본(手定本)과 진주본(晉州本)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진주본이 간재의 본뜻과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34년 51세 때,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자신과 자손들을 향해"제사란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모시는 것으로, 자손이 항상 조상에게서 명령을 듣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예법에 따라 항상 제사 때는 주부(主婦)가 남편 다음에 아헌례(亞獻禮)를 올려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혼인의 중요성,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그 집안의 가법을 살펴야 하지 문벌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4년 71세 2월 18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明德理) 산수동(山水洞)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동생인 척재(拓齋)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은 "아, 형님의 풍채는 난새가 우뚝 서 있는 듯, 학이 고고하게 서 있는 듯. 가슴속의 도량은 맑은 가을물인 듯, 개인 날의 달빛 같았습니다. (중략) 슬프고 외로운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쓸쓸하고 외로운 이 몸은 물가로 산속으로 헤매며 길이 끝나 돌아갈 곳 없는 듯하고 소경이 안내자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슬픔을 표출하였다. 3. 작품 김택술의 학문적 연원은 선고인 김낙진에 있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 『예기(禮記)』, 『좌전(左傳)』, 『논어(論語)』, 『시경(詩經)』 등을 모두 외우게 했으니, 어릴 적 가학(家學)이 매우 깊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다 깊은 학문 연원은 간재선생에게 있다. 17세에 친자(親炙)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배울 수 있었기에, 그의 학문은 간재의 영향이 매우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문집의 1/3은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 치발(薙髮)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緇衣)는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치의〉를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치의를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일과 함께 말씀하셨으니, 치의와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치의를 입는 것과 치발을 하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라고 했다. 을사년(1905) 10월, 간재선생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조선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치의-을 입을 것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발령-치발-의 시행이다. 물론 이 단발령은 1896년 2월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이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이후 1897년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위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는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러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경중과 시비를 논하고 있으나 모두 오랑캐의 법도라는 것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김택술은 자신의 의견을 스승에게 전하는 글도 있고, 의혹이 생겨 질문하는 글도 있으며, 어려움, 슬픔, 기쁨 등 그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스승과 글을 통해 교감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잡저(雜著)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성리설이다. 이미 400년 전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까지 치부되었던 성리론이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개를 들고 더욱 진중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릇 정학(正學)은 주리(主理)이다. 이학(異學)은 주기(主氣)이지만 주리(主理)는 일찍이 기(氣)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로부터 송나라 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心)으로써 기(氣)에 속한다고 했고, 또 마음이 주재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기(氣)를 주장하는 사람이 일찍이 이(理)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씨는 여래(如來)가 바로 성(性)이라고 하였고, 고자(告子)는 생(生)을 성(性)이라고 말했고, 식색(食色)이 성이라고 하였고, 육상산(陸象山)은 이(理)가 이미 드러났다는 설을 두었고, 왕양명(王陽明)은 심(心)의 본체가 곧 천리(天理)라는 설을 두었다.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주리자는 반대로 주기를 주장한 것 같고, 주기자는 반대로 주리를 주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상을 궁구해보면, 공명(空明) 영각(靈覺)은 불씨의 이른바 성(性)이고, 지각(知覺) 운동(運動)은 고자의 이른바 성이고, 육상산의 이른바 차리(此理)는 마음의 맑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왕양명의 이른바 천리(天理)는 마음의 양지(良知)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사가(四家)가 인식한 이(理)와 성(性)은 우리 유가의 이른바 기(氣)이고 심(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가가 그들을 주기(主氣)라고 여기는 것이다. 1903년, 김택술의 나이 40에 지은 것으로 그의 성리설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주리주기대(主理主氣對)〉이다. 요컨대, 성리설에 있어서 김택술은 정학이 바로 주리(主理)임을 밝히고, 불교, 고자, 육상산, 왕양명에서의 성(性)이나 이(理)가 주기론(主氣論)임을 밝히고 있다. 위의 작품 외에도 〈기질성문답(氣質性問答)〉에서는 본연성을 밝고 뜨거운 태양에 비유하고, 기질성을 구름이나 기류에 따라 어둡거나 추운 것에 비유하여, 기상이 태양의 본체를 손상시킬 수 없듯이 본연성이 기질성에 불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지니고 있는 핵심 사상이며, 이를 훗날에 더욱 일목요연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잡저 가운데 〈관조선사(觀朝鮮史)〉는 주목할 만하다. 1936년 편찬된 김경중(金暻中, 1863~1945)이 저술한 『조선사(朝鮮史)』를 김택술이 읽고 자신의 견해를 225조항으로 역사를 비평하였다. 그는 『조선사』의 명칭에 관한 문제를 시작으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들과 절의에 대해 논평하고, 명(明)나라 조정의 조선에 대한 정책, 조선 군주의 처신, 위정자의 실정 및 불교, 사치풍조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산문 외에, 김택술의 작품 가운데 한시 또한 주목된다. 그 방대한 양은 물론이고, 작품성 역시 뛰어난 시가 많기 때문이다. 본서에 1.336수, 속집에 169수 도합 1,505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천여 수가 넘는 문인들이 많지 않으니, 시인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해 대나무 하나 구하여 나무를 작은 밭 주변에 심었지 식구들은 밭을 잘 가꾸려다 실수로 쳐서 온전한 나무 없구나 올해 죽순이 다시 나와 커다랗게 의연히 서 있다네 아 대나무의 사물됨을 초췌하여 때를 만나지 못함을 뜻 있는 선비의 가련함으로 김택술의 감정의 결이 잘 드러나 있는 〈죽(竹)〉이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대나무를 매개로 하여 현인(賢人)과 지사(志士)의 불우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주제이다. 그가 주로 창작한 영물시가 죽(竹), 송(松), 매(梅) 등이 많은데, 이는 그의 절의를 투사함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시라는 장르로서 리듬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이야기하듯 심회를 말하고 있고, 또한 송풍(宋風)의 화려한 전거(典據)라든지, 험벽(險僻)한 글자 등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바로 시언지(詩言志)의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산문 중에 〈겨울 국화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기록하다 [見冬菊識感]〉라는 작품에서는, '겨울'을 일제강점기를 빗대었고, '국화'를 선비의 절개를 비유하였다. 곧'가을'은 숙살(肅殺)을 의미하는데, 오히려 시들지 않는 서리를 맞은 국화의 고귀함을 말하고 또 서리를 넘은 눈 속의 국화를 말하고 있으니, 곧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넘어선 비장함이 엿보이며 선비의 지절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과도 잘 조응한다. 속집에서는 『사백록(俟百錄)』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이 주목된다. 서명의'사백(俟百)'은 『중용』제29장의 "백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서 물어봐도 의혹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의미이다. 내용은 동문 오진영이 문중 사림에게 끼친 화(禍), 의발 전수에 대한 허위, 진주 간행본의 오류 등에 대한 논의이다. 또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는 정도(正道)로 입각한 국가를 '정통(正統)', 정도를 따르지 않은 국가는 '변통(變統)'이라 하여 정통성을 고찰한 책이다. 예컨대, 하(夏)나라는 정통 439년, 주(周)나라는 정통 867년, 명(明)나라 정통 278년 등이며, 진(秦)나라는 변통 15년, 진(晉)나라는 변통 37년 원(元)나라는 변통 88년 등 국가의 정통 여부를 통해 그 정체성을 고찰한 것이다. 4. 문집 『후창집(後滄集)』은 본집 31권 15책, 속집 11권 5책, 합 42권 20책의 석판본이다. 1955년 아들 김형관(金炯觀)과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연구자 박술철은 『후창집』의 판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으니 소중한 자료가 된다. ① 『후창집(後滄集)』 총15책, 김택술, 창동서원발행추정(전주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刊寫者未詳), 목판본(木版本) 31권(卷)15책(冊). ② 『후창집』 총14권, 김택술, 심천서실장본(心泉書室藏本-전북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 석판본 29권 14책, 총 15책 중 제 10권 1책 유실. ③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총4권, 김택술, 목판본, 본집 31권 15책. ④ 『후창집』 총1권, 김택술,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영인본(影印本), 1988. 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총 4권, 김택술, 1997, 순창인쇄소(전주소재) ⑥ 기타 저서로는 『중동국통정변유무연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1권과 『사백록(俟百錄)』1권이 있다. 본집(本集)은 권두(卷頭)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별마다 목록이 따로 있다. 크게는 편지, 잡저, 운문과 묘도문자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권1부터 권12까지는 서(書) 536편이 있다. 권1과 권2는 네 편을 제외하면, 모두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주로 경학, 성리학, 예학 등에 관한 학문적 논설이다. 이 외의 편지는 석농 오진영과 간재 선생의 문집에 관련하여 논쟁한 부분이 많다. 권13부터 권19에 이르기까지 잡저(雜著) 101편이 있다. 김택술의 사상, 학문, 학규(學規)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남산재유제군(南山齋喩諸君)〉, 〈덕천서사규약(德川書社規約)〉 등은 근대 서사(書舍)의 학제(學制)와 수학 과정 및 운영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오진영의여서병갑서변(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은 오진영의 서신을 조목조목 논변한 것이다. 〈간재선생사고습유편집범례(艮齋先生私稿拾遺編輯凡例)〉와〈간재선생년보편집범례(艮齋先生年譜編輯凡例)〉 등은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문집과 별도로 편집한 간재선생문집의 편집 범례이다. 권20에는 서(序) 42편이 있다. 권21에는 기(記) 32편, 제발(題跋) 20편, 명(銘) 15편, 잠(箴) 8편, 찬(贊) 4편, 혼서(昏書) 5편, 자사(字辭) 24편, 애사(哀辭) 1편이 있다. 권22에는 제문(祭文) 37편, 고축(告祝) 16편, 상량문(上梁文) 8편, 비문(碑文) 5편이 있다. 권23과 권24는 묘갈명(墓碣銘) 30편, 묘지명(墓誌銘) 3편, 묘표(墓表) 28편이 있다. 권25는 행장(行狀) 19편, 가장(家狀) 4편, 전(傳) 11편이 있다. 권26부터 권31에 이르기까지 시(詩)가 1,336수, 부(賦)가 2편, 사(辭)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운문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장편고체(長篇古體) 등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시상(詩想)은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로서 사문(師門)의 옹호와 국난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실과 양심을 묘사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속집(續集)의 권두에는 김준영(金駿榮)이 1903년 4월에 김택술에게 써 주었던 〈증김종현서(贈金鍾賢序)〉를 서문으로 대신하였고, 아들 김형관(金炯觀)이 발문을 붙였으며 별도로 『사백록』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를 편집하였다. 속집 역시 크게 편지, 잡저 및 기타, 운문과 연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권1부터 권3까지 서(書) 98편이 있다. 권4는 잡저(雜著) 23편, 권5는 서(序) 6편, 기(記) 12편, 제발(題跋) 8편, 명(銘) 2편, 잠(箴) 1편, 찬(贊) 1편, 혼서(昏書) 1편, 고축문(告祝文) 3편, 제문(祭文) 3편, 상량문(上梁文) 2편, 묘갈명(墓碣銘) 4편, 묘지명(墓誌銘) 1편, 묘표(墓表) 7편, 유사(遺事) 1편, 전(傳) 2편 등이 있다. 권6은 시(詩) 169수, 권7과 권8은 연보(年譜)가 부록(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5. 맺으며 본서는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살았던 근현대 유학자 김택술의 문집 『후창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낸 책이다.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과 시대적 간극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문학적 형상화라든지, 역사관이라든지, 자연관, 처세관 등은 그 간극이 더욱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멸망, 국권 수탈, 광복, 6.25동란 등 격변의 시간 속에서, 김택술은 수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 중기에나 치열하게 논쟁이 거듭될 만한 성리설을 비롯하여, 국가의 정통이냐 변통이냐의 정통성에 대한 사관, 사회적 문화 현상에 대한 관점, 유가적 수양론과 절의, 근대의 서당교육사, 근대 유학자의 장례문화 등 적은 시간 속에 많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 바로 『후창집』이다. 이러한 소중한 자료를 번역하고 주석을 내어 준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앞으로 본서가 근현대 문화사를 연구하고 밝히는 데 많은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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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보 제중에게 보냄 정축년(1925) 與文聖甫濟衆 ○丁丑 좌하가 연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오현수언(五賢粹言)》의 간행을 인가받는 것은 후일에 원고의 간행을 인가받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저와 사견(士狷)에게 말하기를 "'불언지교(不言之教)'는 석농(石農)이 쓰지 않아야 되었는데 썼다.'라고 하였는데, '본래 없었다.'라고 하지 않고 '쓰지 않아야 되었다.'고 했으니, 이는 선사가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전 편지 후면(後面)에 이를 변론했으나 들어주질 않은지라, 일찍이 좌하가 선사의 뜻을 모르고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민망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만났을 때 제가 좌하에게 "지금도 과연 선사가 인의와 인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라 물었더니, 좌하가 대뜸 대답하기를 "선사가 이미 '문고를 50년 뒤에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어찌 인의와 인교를 말씀을 이치가 있었는가?."라고 하였고, 제가 말하기를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서로 헤어지게 되어 친구 이경좌(李敬佐)와 함께 사천(沙川)에 이르러 이별할 때에 제가 다시 질문하여 말하기를 "아까 말씀하신 인의와 인교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 이미 분명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뒤에 반드시 다시 변동함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하는 기쁘게 듣고 다른 말씀은 없었고,. 저 또한 좌하가 끝내 선사의 마음에 어둡지 않고 선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아, 이전의 걱정과 이후의 다행함이 어찌 나의 견해와 같거나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모두 좌하에게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큰 관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선사 휘일(諱日)이기에 이것이 생각나서 한 번 편지로 말씀드려 본 것입니다. 만일 편지가 사실과 어긋나면 일일이 분변하여 보여주셔도 무방합니다. 座下年前對人言: "先師言《五粹》認印開後日認稿之路." 是謂先師有認意矣.昨秋對僕與士狷言: "不言之教,石農不當書而書之." 不云本無而云不當書,則是謂先師有認教矣.僕前書後面以辨而不見聽,則未嘗不憫座下不知先師而見欺於人矣.今春之遇,僕問座下: "至今果認先師有認意、認教乎?" 則座下遽答曰: "先師旣有文稿五十年後爲之之命,則豈有認意、認教之理?" 僕曰: "分明如是." 旣而爲之相送,同李友敬佐至沙川而別,僕又質曰: "俄者所說無認意認教, 旣云分明如是,則後必不復變動矣." 座下喜聽而無他說,僕又以幸座下終不昧師心負師恩矣.噫! 前之憫後之幸,豈爲與我同不同而然哉? 蓋皆爲座下師生之大關也.適茲先師諱辰,念及於此,爲一告之,如書不以實,不妨一一辨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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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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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율 노용에게 답함 을묘년(1915) 答宋景栗鲁容 ○乙卯 상중(喪中)에 경복(輕服)을 벗을 때 착용하는 복장은, 저의 생각에는 포건(布巾)과 직령(直領) 이외에는 아마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형도 이미 그렇게 여겼으면서 또한 어찌하여 상중에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으로만 국한하여 의심하는 것입니까?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최질(衰絰)을 착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 것이니, 경복을 벗을 때 잠시 최질을 벗을 수 있다면 포건과 직령 차림이 어찌 통용하는데 편치 않은 점이 있겠습니까? 확대하여 말하면, 출행(出行)을 할 때에 최질을 착용하면 속인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데, 이것 또한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에 국한하고 또한 그 때가 아니라 하여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다만 선조를 제사지낼 때에는 포건 위에 평량자(平涼子)를 가하고, 출행할 때에는 포건 위에 방립(方笠)을 씁니다.】 길복(吉服)에는 옥색(玉色)을 쓴다는 등의 설은 비록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중용》 16장의 '성(誠)' 자는 '이(理)'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듯합니다.77) 그런데 선사가 《혹문(或問)》의 주자가 후씨(矦氏)의 설을 변론한 것78)을 인용하여 이(理)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의심하셨으니,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하겠습니다. 喪中除輕服時所著服,弟意布巾直領外,恐無他道.兄旣然之,又何以喪中祭先之服局定而疑之耶? 祭先時,不可著衰絰, 故布巾直領; 除輕服時,可暫脫衰絰,則布巾直領, 有何不安於通用耶? 廣而言之,則出行時,衰絰駭俗, 故布巾直領,此亦可局定於祭先之服而亦非其時疑之耶?【但祭先,則布巾上加平涼子; 出行,則布巾上加方笠.】吉服玉色等說,雖云有據,恐難從也.《中庸》十六章"誠"字,似當以"理"看.而先師引《或問》辨矦氏說而疑非直指爲理, 未敢質言. 중용……듯합니다 《중용(中庸)》 16장의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이른다. 음양의 합하고 흩어짐이 진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발현되어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誠者, 眞實無妄之謂. 陰陽合散無非實者, 故其發見之不可揜如此]"라고 한 구절의 '성' 자를 가리킨다. 주자가……것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참조하면, 후씨는 "귀신은 형이하자이니 성이 아니다. 귀신의 덕은 성이다.[鬼神形以下者, 非誠也; 鬼神之德則誠也]"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귀신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 때문이고, 성이 스스로 하나의 물이 되고 별도로 귀신의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후씨는 귀신과 그 덕을 나누어 두 개의 물로 만들고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하고 있다.[鬼神誌德所以盛者, 蓋以其誠耳, 非以誠自爲一物而別爲鬼神之德也. 今侯氏乃析鬼神與其其德爲二物, 而以形以上下言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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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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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기유년(1909) 上艮齋先生 己酉 상(喪)을 당하여 선산(先山)에 합장한 경우, 매번 최질(衰絰)24)을 하고 새로 쓴 무덤을 살피는데, 선조(先祖)의 묘에 대해 절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흉복(凶服)25)을 입고 선조에게 절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분묘와 사당은 똑같지 않으니, 잠시 최질을 하고 선영(先塋)을 살피는 것도 일의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효대(絞帶)에 대하여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는 두 겹으로 꼬은 두 가닥으로 하는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례(家禮)》에는 이미 마승(麻繩) 한 가닥을 쓰고 중간을 굽혀서 합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례편람(家禮便覽)》에서 말한 네 가닥을 서로 겹치도록 하는 제도에 따라 행하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효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점에 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강론하도록 한다."순목(順目)과 역목(逆目)을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제 생각으로는 순목은 네 가닥이 한곳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고, 역목은 네 가닥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향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아도 되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맞다."최복(衰服)이 해어져서 입을 수 없다면 비록 연제(練祭)26) 이전이라도 다시 만들어도 됩니까? 노나라 소공(昭公)은 한 해에 세 번 최복을 바꾸어 입었는데, 이를 두고 군자가 비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훼손되고 해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한 벌만 입고서 해를 마쳐야 합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이 맞다." 遭喪祔葬先山者, 每以衰絰展省新墓, 而先墓則不拜未安, 又不可以凶服拜先祖, 如何則可乎?○ 先生答書曰: "墓與廟不同, 暫用衰絰, 展省先塋, 亦事勢之不得已也."絞帶, 鏡湖雖以二重兩股爲是, 然《家禮》旣有用麻繩一條, 中屈合之之文. 故依《便覧》四股相重之制行之, 未知如何?○ 先生答書曰: "絞帶, 未知當如何. 俟後熟講."順目逆目, 何以辨之? 竊意順目是四股同歸一處, 逆目是四股分歸各處, 如此看是否?○ 先生答書曰: "是."衰服弊, 不可服, 則雖練前, 亦可再製乎? 魯昭公一歲三易衰, 君子譏之. 然則雖毀弊, 只服一件以終歲可乎?○ 先生答書曰: "來示得之." 최질(衰絰) '최(衰)'는 상중에 입는 삼베옷으로 참최복(斬衰服)과 자최복(齊衰服)이 있다.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요질(腰絰)이 있다. 흉복(凶服) 상장(喪葬)의 의례에서 입는 복장을 말한다. 일반적인 옷과는 그 모양이 조금 이상하고 괴상하다. 연제(練祭) 소상(小祥)을 뜻한다. 삼년상에서 1년째에 지내는 제사이다. 소상 때에는 연관(練冠)과 연의(練衣)를 착용하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연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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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 甲寅 한희녕(韓希甯 한유(韓愉))은 혼백(魂魄)과 정신(精神)은 기질(氣質)에 속한다고 했는데【《우산집(尤山集)》7권 13판〈조사흠(趙士欽)에게 답한 편지〉에 보임】, 이것은 정세(精細)함이 결여된 부분입니다. 삼가 저는 혼백과 정신은 사람의 혈기(血氣)가 응집된 것이고, 기질은 사람의 자성(資性)이 품부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혼백과 정신의 병은 약물(藥物)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고, 기질의 병은 의리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둘을 섞어서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기질과 정신, 혼백에 관해서는 보내준 편지에서 논변한 것이 맞다. 다만 희녕은 이 편지에서 허령(虛靈)이 혼백, 정신, 기질과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것은 융통성 있게 봐야 한다. 만약 그대의 설을 들어 비판한다면 희녕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논어》에서 "대체로 임금의 물음[君問]에 모두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임금을 높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의 말입니다. 그런데 계강자(季康子)의 물음에도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쩌면 혹시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계강자의 권세와 지위 때문에 본래 어쩔 수 없어서입니까? 권세와 지위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공자 문인의 절조로는 반드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군신의 대절을 어찌 서로 살피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어》에서 계강자가 묻고 '공자대왈'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마도 계씨의 가신이 기록한 것이고, '자왈(子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인 듯하다." 韓希甯謂魂魄精神, 屬乎氣質【見《尤山集》七卷十三板〈答趙士欽書〉】, 此欠却精細處也. 竊疑魂魄精神是人之血氣所凝也, 氣質是人之資性所禀也. 故魂魄精神之病, 非藥石不可醫, 氣質之病, 非義理不可治, 恐不可混說也.○ 先生答書曰: "氣質與精神魂魄, 來書所辨是矣. 但希甯此書, 是欲言虛靈與魂魄精神氣質之非一類故云爾. 此宜活看. 若擧盛說以詰之, 希甯又不待詞畢而點頭矣."《論語》'凡君問, 皆稱孔子對曰者, 尊君也', 此朱子《集註》也. 季康子問, 亦稱孔子對曰者, 何也? 豈或記者之偶爾? 抑以季氏之勢位, 而自不得已歟? 謂勢位而然, 則以孔門人之所操, 必不至如此, 謂記者之偶爾, 則似此君臣大節, 豈有不相照管之理乎?○ 先生答書曰: "《論語》康子問而稱孔子對曰, 疑是季氏家臣所記. 其稱子曰者, 它人所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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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한규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趙受卿瀚奎 ○丁丑 근래에 일이 있어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세 차례입니다. 《예기(禮記)》에서는 "예(禮)는 왕래하는 것을 숭상하니, 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비례이고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 또한 비례이다"79)고 했습니다. 선사가 만년에 사방에서 편지로 질문하니 걸핏하면 글상자가 넘쳐서 뚜껑을 덮기도 어려웠습니다. 답장편지를 보낼 때면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오히려 힘써서 대략 빠르게 답장하니 젊은 사람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형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도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영남에서는 일반적인 학규(學規)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선성(先聖)이 '예는 왕래를 숭상하고' 선사도 질문을 하면 반드시 답장했었던 도를 다시 바라지는 못하겠네요.올여름 초에 어쩌다 온 답장은 때가 지난 이후에 희망이 끊어진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 놀라고 감격스러움은 옴에 따라 답장하는 일반적인 예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80) 치변(薙變)81)으로 인하여 몸을 숨기고 교제를 멈추어서 답장이 지체됨을 알았으니, 지난번 줄곧 망령되게 잘못 헤아려서 불공하게 생각한 것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변란에 대처하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멀리 옛사람을 예로 들 것도 없이 단지 요즘 세상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본디 수립한 것이 있어서 편안히 앉아서 초연히 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문 같은 경우에 최경존(崔敬存)은 참으로 최상이었으니, 난리에 임하여 굽히지 않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82) 담양의 이복일(李復一)【이름은 광우(廣雨)이다. 내가 이절사전(李節士傳)을 썼다】과 진천(鎭川)의 정덕여(鄭德汝)【이름은 승원(升源)이다. 음성의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썼다. 내가 그 후론(後論) 중의 '말에 의를 해치는 것이 있다'고 논하여 음성 오진영에게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 지목 당하였다】는 또한 씩씩했으니, 목을 찔러 거의 죽음으로서, 저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고향의 안윤성(安允成)【이름은 재욱(在旭)이다. 내가 안의사시(安義士詩)를 썼다】은 더욱 기특합니다. 그간 숨어서 피하는 한 가지 일은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염려하여 거의 여러 해 동안 편지도 끊고 왕래도 않고야 마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절애고도에 숨는 것보다 깊숙한 것은 없으나,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이설(異說)이 시끄럽게 날뛰는 것을 염려하고, 유학이 쇠락하는 것을 한탄함에 이르러 또한 홀로 선을 지키는 것83) 외에 세도를 근심한 것이 심원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가 식견이 밝고 행실이 고망84)한 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묘한 생각으로 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헤아림에 도리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말고, 또한 즐겁지 않을까 두려워 화를 내지 않으며, 잘 안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또 두세 번 한두 개 문구의 타당치 못한 점을 개정하라는 것에 대하여 말단의 일이라 여기는데 실망했다고 하시니 제가 들은 것과는 다릅니다. 치평(治平)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방법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작은 한 생각과 작은 한 이치와 용렬한 한마디 말에 대해서도 오히려 스스로 부족한 점을 구하는데, 하물며 문장이란 마음을 드러내고 이치를 나타내며 말의 정밀한 것이어서 더욱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천하에 심리(心理), 언문(言文), 자수(自修)의 공에 대해 실수가 있으면서도 세도(世道)를 붙잡은 자는 없습니다. 형께서 깊이 헤아려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하고, 타당하지 않은 문장을 바르게 고치는 것을 말단의 일이라 여기며 그것을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 되겠습니까? 형은 이 점에 대하여 만약 타당함과 타당하지 못함의 시비, 고침과 고치지 않음의 맞음과 그릇됨을 논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강론의 한 실마리가 되리니, 저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덮어놓고 따를지 어길지를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또 이미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어찌 한가롭게 평상의 문구를 논함에 그치리오?" 라고 하였습니다. 논문은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이고 제 평생의 뜻은 아닙니다. 오호라! '심상(尋常)'이라는 두 글자를 추론하여 말한다면 그 폐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선비가 의리를 엄하게 밝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교훈을 긴요하게 여겨도, '심상'이란 문구로 간주하여 수용한 것이 없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모와 스승을 적으로 여기는 문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상한 문구로 간주하여 변란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나쁜 습관으로 이른바 유술을 떨쳐 일으키고 동문을 보합85)하려 한다면 결단코 이루어질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종기를 치료함에 있어서 피고름과 썩은 살을 씻어버린 후에야 살이 생겨나서 피부가 온전히 붙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심상한 일로 보아서 다 제거하지 않고 간혹 나의 피와 살이라 여겨 감싸고 안타까워한다면, 살이 돋고 피부가 완전히 붙는 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거의 드물 것입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因有事,致書于兄者,凡三度矣.禮曰: "禮尚往來,來而不往,非禮,往而不來,亦非禮." 先師晚年,四方書問,動輒溢篋,以艱於覆 答有時發書太息,猶必力疾略 謝及於少輩,而弟於兄三施,而一不見報,則意嶠之南 自有一般學規,有異乎? 先聖禮尚往來,先師有問,必答之道者,不復有望矣.今夏之初,何來巍覆,出於過時之後,斷望之餘,則其爲驚感,已非隨往隨復恒例之可比.又以知間緣薙變,隱身息交,以致稽報,則深悚夫向來妄揣繆度之爲不恭也.然吾儕之處此變也,何至如是? 不待遠據古人,只以并世言之,素有樹立,安坐超免.若吾同門之崔敬存,則固太上也,臨難不屈舍生取義,若潭陽之李復一【廣雨 ○弟爲作李節士傳】,鎮川之鄭德汝【升源.○陰作鄭節士傳.弟論其後論中,語有害義者,被排節一之目於陰.】亦可壯也,刺頸幾殊,使彼畏服,若鄙鄉之安允成【在旭○弟爲作安義士詩】,更可奇也.其間隱避一事,又可爲也.然不宜惴惴過慮,幾多年斷書闕禮而後已也.夫隱莫深於先師之絕島,而何嘗如是乎? 至於慮異說之喧騰,歎儒學之衰獘,則又以見自守獨善之外,爲世道憂者深遠,此正仁者之心也.然而以弟爲識明行高望,其有深慮妙算之可救者,則非惟爲擬人不倫之失,亦恐有不恱者之移怒,而不得爲智者之言也.但又以再三改正於一二文句之未穩,爲末事,而謂之失望,則異乎吾所聞.夫治平之本,在於誠意,誠意之方,在求自慊,一念之微,一理之細,一言之庸,猶求自慊.而況文者心之著,理之顯,言之精,而尤不可茍焉者乎.天下未有失於心理言文自修之功,而能扶世道者,則高明深妙,雖非其人,其以改正未穩之文爲末事,而謂之失望者,亦豈爲理到之言? 兄於此,若論穩與未穩之是非,改與不改之當否,則是固爲講論之一端,弟當虛心愼思以覆從違今也.不然,旣以改本爲善,而又槪斷之曰: "當此之時,何暇論尋常文句而止哉?" 論文固弟向日之書,而非弟平生之志也.鳴呼! '尋常'二字若推而言之,其獘有不可勝言者.今之士子,於嚴明義理,喫緊愛人之訓,旣不免看做尋常文句,而無所受用.至於目下有翻天地,賊父師之文字,亦且看做尋常文句,而不以爲變,由今之弊習,以求所謂振起儒術保合同門,則決無有成之理.譬如治瘇然,膿血朽肉消洗棄之,然後肌可生起,皮可完合.若視爲尋常,而不盡去,或認爲吾血肉,而護惜之,則不惟生起完合之無日,其不傷人也者 幾希矣,兄以爲如何? 예(禮)……비례이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편의 기록이다. 간연(間緣) 불교철학에서 사람과 사물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緣)이라 하여,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분류하였다. 등무간연은 직전의 원인으로,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편지에 답장하기 이전의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치변(薙變) 1895년 을미년에 시행된 단발령을 말한다.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 1917년 왜정(倭政)이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으나,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일제는 토지 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사적인 단식 투쟁으로 이겨냈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독선(獨善)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하였다. 고망(高望) 위고망중(位高望重)의 줄임말, 지위가 높고 명망이 크다는 뜻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문의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크게 화합하게 됨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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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열에게 보냄 병오년(1906) 與崔性武長烈 ○丙午 경초(勁草)88)와 한송(寒松)89)은 예로부터 만나기 드뭅니다. 오늘날 글을 읽는 선비들은 모욕하고 공갈하는 풍조에 쓰러지고, 포승과 총칼에 넘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이미 유문(儒門)에 종사하고서 숨기고 꺼리면서 다시 움직이지 않거나 떨고 두려워하면서 후회하는 자가 있으며, 유문에 종사하고 싶지만 주저하면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명(高明)은 이런 상황에서 비록 머리 위에 철륜(鐵輪)90)이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장차 떨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조정에서 사학(邪學)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마신(馬伸)이 정문(程門)에 의탁하여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천이 말하기를 "시론이 바야흐로 달려져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라고 하니, 마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91) 그 뜻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돈독합니까.제가 고명(高明)이 마신의 뜻으로 뜻을 삼고 전적으로 간옹(艮翁)의 문하에 의탁하여 배우길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일 뿐이다."92)라고 하였습니다. 윤리를 말미암고 공맹의 가르침을 따라는 것이 정직함이고,. 오륜을 폐하고 공맹을 배반하는 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비록 산다고 해도 오히려 죽은 것이며, 정직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아갈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며 정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사는 것이 아니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ㄸ한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가 돌아와서 도가 밝혀지고 교화가 행해져서 한 세상의 태평이 유자(儒者)의 손에서 나와서 저 패도(悖道)와 이유(異教)가 모두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천만 속히 도모하기 바랍니다. 勁草寒松,邃古罕覯.今讀書之士類,未免侮嚇恐喝之風所偃,縲絏刀銃之威所推,或有已從儒門而隱諱不復動者,惴惧以爲悔者,欲從儒門而趑趄不敢進者.不識高明於此,雖轉鐡輪於頂上,將奮不顧慮,而直前做去也否? 伊川先生被朝廷之攻以邪學也,馬公伸欲依程門學,伊川曰: "時論方異,恐貽子累." 對曰: "使伸得聞道死無憾." 此其志何等誠篤!鄙欲令高明以馬公之志爲志,專依艮翁之門而學焉,夫何故? 吾夫子曰: "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 倫常之道,鄒魯之教,是直也; 倫常是斁,鄒魯是背,是不直也.不直而生,雖生猶死; 爲直而死,雖死猶生.此可以知所往矣, 況爲直而未必死,不直而未必生乎? 不惟是也, 又安知不一治運回,道明教行,一世昇平出於儒者之手,而彼悖道異教, 皆條爾消滅也耶? 惟高明千萬亟圖之. 경초(勁草)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63〈소우열전(蕭瑀列傳)〉 한송(寒松) 사혼은 그의 조카 사영운(謝靈運)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혼의 풍운은 하늘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고, 엄숙함은 차가운 바람을 맞서는 소나무를 같다.[混風韻爲高日望葵, 蕭如寒風振松]"라고 하였다. 《예문유취(藝文類聚)》권88 철륜(鐵輪) 쇠로 만든 수레바퀴로, 불교에서 지옥의 악귀(惡鬼)를 제압하는 무서운 형구(形具)이다. 또는 철륜발(鐵輪拔)의 준말로 수미(首尾)에 칼날이 달린 병기로 말 위에서 적을 쳐 죽이는 데 쓰인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이……하였습니다 정자(程子)의 학파가 위학당(僞學黨)으로 몰려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마신은 자신과 연루될까 염려한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십여 차례 반복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면서 "저가 도를 듣게 된다면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경우이겠습니까."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9 사람이……뿐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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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에게 답함 무신년(1908) 答崔性武 戊申 고명(高明)이 유학(儒學)에 뜻을 두었으나 질병에 얽매어 각고하게 실행해 나가지 못하니 애석할 뿐입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또한 공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나금계(羅錦溪)의 문인에 아픈 사람이 있었는데, 금계가 묻기를 "병중에 공부가 어떠하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다만 아프지 않을 때와 같이 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으로 인하여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단코 병이 나아질 가망이 없고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소설(小說)의 각병법(却病法)93)에 "늘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라고 했고, "조물주가 생활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는데, 병을 만나 조금 한가하게 되었으니 도리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방법은 매우 묘합니다. 만약 마음에 일단의 번뇌가 생겨나서 쫓아 보내지 못한다면 다만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몸을 살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장자(張子)는 "빈궁과 걱정 속에 처하게 함은 너를 옥(玉)으로 이루어 주려 함이다."94)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병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를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니, 병이 어찌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것에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평소 병을 달고 살면서도 크게 성취하는데 해가 되지 않았던 고인(古人)이 있었으니, 명나라의 석계도(席啟圖)와 우리나라의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가 이들입니다.고명은 병 때문에 조금도 기운이 꺾이지 말고 점점 동심인성(動心忍性)95)하는데 힘을 기울여 분수에 따라 공부를 해서 순조롭게 배우길 좋아하여 병을 잊는다면 덕이 진보하여 얼굴이 맑아지고 몸이 윤택해지는 날에, 저 두 아이[二豎子]96)가 어찌 그 재주를 멋대로 부릴 수 있겠습니까? 편지에 타고난 명이 허약함을 탄식하는 말이 있었는데 우울한 뜻이 있는 것 같기에 대략 이리 언급한 것이니 또한 깊이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 高明有志此學,而爲疾病所嬰,不能刻意做去,爲之慨惜.然病中亦未嘗無工夫.昔羅錦溪門人有病者,錦溪問: "病中工夫何如?" 對曰: "甚難." 曰: "只如不病時,便是工夫." 此謂不可因病而有煩躁憂慮之心也.蓋有煩躁憂慮之心,則決無痊差之望,愈往而愈甚.小說却病法曰: "常將不如我者,巧自寬鮮." 又曰: "造物勞我以生,遇病稍間,反生慶幸." 此二法甚妙.如遇心下一段煩惱,排遣不去,儘好風咏軆察也.張子有曰: "貧賤憂戚,庸玉汝成." 茍不至於病,不能省事,此何足爲治心養性之害乎? 故昔人有平生善病而不害大就者,明之席啟圖、我國之成牛溪是也.高明勿因病而少挫其氣,漸加動忍之力,而隨分施功,馴致嗜學而忘病,則德進睟面潤身之日,彼二竪子者,安能恣其伎倆耶? 來書有咏嘆賦命脆薄之語,似不免有悶鬱之意, 故聊此奉及,應亦深諒也. 각병법(却病法) 《지봉유설(芝峯類說)》 〈질병조〉를 참조하면, 병을 물리치는 8가지 방법[却病八法]을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제시한 방법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방법이다. 빈궁과……함이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보인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의 성질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 그가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두 아이[二豎子] 두 아이는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가 고황(膏肓 : 심장과 격막의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좌전(左傳)》 成公 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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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부 사익에게 보냄 을유년(1945) 與吳翼夫士益 乙酉 밝은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조국이 광복을 맞았으니, 만백성이 똑같이 경하하는 마음을 어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큰 경사를 함께 하는 것은 피차간에 현재 상황이니, 길함과 흉함, 고통과 즐거움은 물을 것도 못 됩니다. 국가의 정책은 본디 책임자가 있으니, 산림의 서생은 다만 좋게 시작하고 좋게 끝마쳐서 태평시대가 길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로서 여러 가지 계책도 이때에 미쳐서 시원하게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문하에서는 선사의 문함을 완전히 변론하지 못하였으니, 수고(手稿)를 간행하는 일과 난본(亂本)을 거두어 없애는 일을 마땅히 차례로 해야 할 것인데,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몇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이 일을 우러러 물을 수 있는 자는 형배(兄輩) 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아, 저 음성(陰城 오진영)은 내리 비춰주던 일월(日月)이 깨져 떨어졌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우러르겠습니까? 진실로 가련합니다. 그가 무함한 말 가운데 이른바 '세상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헤아려 하라.'는 것은 어찌 가장 핵심적인 대목으로서 통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원수 오랑캐가 탐하고 포학하여 약소국을 삼키고 교만하고 패려궂어 강대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서는 비록 아녀자와 어린애라도 모두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선사의 명철함으로 일찍이 망할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앞날을 알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선사가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왜가 망한다면 내일 죽더라도 절대 유한이 없으리라.[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라고 하였고, 또 육검남(陸劔南)113)의 "왕의 군대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에, 가제(家祭)를 지낼 적에 아버지께 고할 것을 잊지 말아라.[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는 시를 외우며 말하기를 "이는 먼저 내 마음을 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아시고 기다린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대개 "오늘 이후에 세상이 어찌 될 수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더욱더 그가 무함한 것임을 드러내어 분별할 것도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입니까. 우리들은 이미 만백성과 함께 경축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경축할 것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사의 무함이 절로 명쾌하게 설욕되지 않겠습니까? 두 형의 고명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회신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皓天悔禍,祖國興復,萬姓普慶,何可形喻? 大慶所同,彼此現境,休咎苦樂,不足問也.國家政策,自有任者,林下書生,但願善始克終,永奏太平而已.惟是事關斯文種種猷爲, 及此可以霈然行去,而在吾門,則辨誣之未盡,手稿之刊行,亂本之收洗,當次第有事,而未知同志者幾人.今日可以仰問此事者,非兄輩而誰也?噫! 彼陰照臨之日月破落矣, 將於何而依仰? 誠可哀也.蓋彼誣中所謂"世不可知,料量爲之",豈非最爲眼目而可痛者乎? 觀夫讐夷之貪虐而吞弱小、 驕悖而侵強大,則雖婦孺皆知其必亡,以先師之明,曾不知其亡,而曰"世不可知"也乎? 先師嘗有詩曰: "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 又誦陸劔南"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之詩曰: "此先獲我心." 其知倭之必亡而待之者,豈不較然乎?蓋"當今日而後,世不可知"之云,益見其爲誣而無待乎辨矣,何幸何幸! 吾輩旣與萬姓同慶之外,別有可慶者,豈非師誣之自底快雪乎? 未知二兄雅見以爲如何? 幸回教之也. 육검남(陸劔南) 검남은 육유(陸游)의 호이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후에 자신의 시집을《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하였다. 시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아(示兒)〉로 《검남시고》권85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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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어떤 사람의 장자(長子)가 벙어리 병을 앓고 상처(喪妻)하고 자식도 없는데, 형편상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없어 그 부친이 차자(次子)의 자식으로 장자의 후사(後嗣)를 세우고자 하여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례증해(家禮增解)》 〈종법(宗法)〉조에 기재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가 말한 '장자가 폐질(廢疾)을 앓고 있더라도 차자에게 전중(傳重)해서는 안 된다'는 설【권1 22판에 보임】에 근거하여 후사를 세우라는 뜻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지자(支子)52)여서 전중할 것이 없다면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비록 지자라 하더라도 그의 장자된 자가 다른 죄악이 없고 질병으로 인해 부친의 뒤를 이어 부친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집안의 대사와 관계된 것이니 자세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전중할 수 없을 때는 본래 가씨(賈氏 가공언(賈公彦))의 학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자는 비록 벙어리이지만 이미 인도(人道)가 있어 아내를 맞아 아들을 낳을 수 있는데 아들이 없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 후사를 세울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매옹(梅翁 성직(成稷))은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아내를 맞았는데도 아들 없이 죽는다면 마땅히 그를 위해 후사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논하였고, 또 신독재의 설을 인용하여 이는 바꿀 수 없는 의론이라고 하였다. 그대가 의심한 바 그 부친이 지자라서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론의 경우, 이는 고례(古禮)로 살펴보면, 대종(大宗)의 후사는 되어도 소종(小宗)의 후사는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예(禮)의 큰 강령이다. 후세에는 비록 방계(傍系)나 서계(庶系)이더라도 모두 그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데 진실로 바른 예(禮)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폐질에 걸린 자는 장차 부친을 잇는 종자(宗子)가 될 것이니 그 끊기는 대를 잇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듯하다." 有人長子有瘖瘂之疾, 而喪妻無子, 勢不能再娶, 其父欲以次子之子立後而來問. 故小子據《家禮增》解宗法條所載, 愼獨齋長子病廢, 不可傳重於次子之說【見卷一卄二板】, 以立後之意答之. 而更思其父支子, 無重可傳, 不當爲之立後歟? 又思其父雖支子, 爲其長子者, 無他罪惡, 而以有疾不得繼後, 以奉其父之祀, 是豈天理人情之所安乎? 此係人家大事, 伏乞詳示.○ 先生答書曰: "長子廢疾不傳重, 固有賈氏說. 然今此子雖瘖瘂, 而旣有人道娶妻, 可以生子而無子, 命也, 惡可不立後者? 梅翁論長子廢疾, 娶婦無子死, 當爲之繼後, 又引愼齋說, 以爲不易之論矣. 所疑其父是支子, 不當爲長子立後之論, 此以古禮則有後大宗而不爲小宗後, 是爲禮之大經也. 後世則雖支庶, 皆爲之立後, 誠非禮之正者. 然今此廢疾者, 將爲繼禰之宗, 恐難禁其繼絶也." 지자(支子) 적자(嫡子)를 제외한 자식들과 첩에서 난 자식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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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려 박창현의 편지를 논함 을묘년(1915) 上艮齊先生論朴昌鉉書 乙卯 박창현의 편지에 성현(聖賢)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발명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1기질지성이라는 명칭은 장자(張子 장재(張載))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는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天地之性)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53) 이미 잘 돌이키라고 말했다면 이미 기(氣)와 섞인 좋지 않은 사물인 것인데, 지금 애당초 이른바 잘 돌이키는 공부 없이 곧바로 그 섞이지 않은 체(體)를 보라고 하니, 그 섞이지 않은 체가 바로 천지지성입니다. 잘 돌이키는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천지지성이 저절로 있게 된다면 역시 순선(純善)한 성이니 어찌 굳이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총명예지(聰明睿知)를 운운한 것에 대하여-2기질은 비록 청명(淸明)하고 순수(純粹)하더라도 도리어 지각(知覺)과 정의(情意)가 없는 것입니다. 무릇 지각과 정의가 있는 것은 바로 심(心)의 능력입니다. 대개 총명예지는 지각, 정의가 있는 것과 관계되니 심이라고 할 수 있지 기질이라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다만 성인(聖人)의 기질은 청명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그 심이 이로 인해 총명예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대학》의 서문에서 기품(氣稟)이 같지 않음에 대하여 말하고,《중용장구》에서는 나면서부터 아는[生知] 자질로 말하였던 것입니다.박창현의 편지에 품부받은 곳에 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通蔽開塞]이 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3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은 바로 발용(發用)한 뒤의 일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품부받은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품부받은 곳에서 이 성(性)이 이미 기(氣)를 따라서 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이 있다면 이른바 모든 선의 근본이 되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어느 곳에다 안배한단 말입니까? 만약 '단독으로 가리키면 본연지성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미 가리고 막힌 성이 어떻게 갑자기 형체를 바꾸어 순선(純善)하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인용한 농암(農巖)의 설 운운한 것은 '생지위성(生之謂性)'장에서, 성을 말하는 순간 바로 이미 성이 아니라고 한 말을 풀이한 듯합니다. 그리고 '리(理)는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理固無不善]'는 한 구절로 맨앞에 문장을 만든 것은 아마도 기질지성으로 간주한 듯합니다. 그리고 기질에 부여되는 순간 바로 형기(形氣)를 겸한다고 한 것은 문제가 있는 설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저의 얕은 견해로는 기질을 품부받고 형기를 겸했다는 것을 가지고 대번에 문제가 있는 설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박창현의 편지에 정자(程子)가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는 말을 논한 데 대해 운운한 것에 대하여-4정자가 '성은 서로 비슷하다'는 말을 논할 때 개와 소 그리고 사람의 성이 어찌 각각 서로 다른 성을 품수(稟受)하였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대개 상지(上知)와 하우(下愚), 개와 소 그리고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氣質)을 품수하였기 때문에 그 성이 운용(運用)하는 데에 드러나는 모습이 그 기질에 따라 각각 다르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것입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을 통괄하여 말한 것인 천명(天命)의 성과 성선(性善)의 성의 경우에는 또 기질에 있는 이 리(理)로 말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이 편지의 뜻처럼 기품(氣稟)에 따라 리가 다르게 나타나는 측면에 입각하여 본연지성 하나만 가리킨 것이겠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오행이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五行各一其性]'라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5오행(五行)이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는 말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이전 천지의 조화(造化)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도구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 기질에 따라 품수받았다고 말한 것은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 본연(本然)의 기질에 따라 각각 하나의 성을 갖춘 것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이른바 리(理)의 분수(分殊)라는 것이니 선악(善惡)과 편전(偏全)이 있는 사람과 사물의 기질지성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를 인용하여 기품에 따라 리가 같지 않다는 설을 증명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단지 기질지성만 논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6기질지성을 품수한 곳으로부터 말하자면, 저 또한 어찌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품수한 자가 기질이 같지 않으므로 성이 발현하는 것이 또한 기질에 따라 같지 않게 됩니다. 다만 이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최초에 서로 같지 않은 리를 품수하였다고 곧바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쟁론(爭論)하는 부분은 품수와 발용의 측면이 같지 않다는 데 있지 않고, 바로 서로 다른 리를 품수하고 서로 다른 기를 품수하는 차이에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리가 기질 속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이유로 기질지성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대개 하늘에 있는 리가 사람의 기질 속에 있으면서 애초에 말할 만한 편전(偏全)과 선악(善惡)이 있은 적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본연지성이고, 그 기질에 따라 자체로 편전과 선악이 있는 하나의 성이 되는 데 이르른 뒤에야 기질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기질에 막 떨어진 것을 가지고 곧바로 기질지성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본연지성이라는 것은 그저 하늘에 있는 리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사람의 측면에서는 영원히 말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朴書聖賢發明氣質之性云云氣質性之名, 肇自張子而其言曰: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旣曰善反之, 則已是雜氣不好底物事, 而今初無所謂善反之功, 而直曰見其不雜之體, 不雜之體, 卽天地之性也. 不加善反之功, 而天地之性自存, 則亦是純善之性, 何必曰'氣質之性, 君子有不性者'乎?朴書聰明睿知云云氣質雖淸粹, 却無知覺情意者也. 凡有知覺情意者, 乃心之能也. 蓋聰明睿知, 係是有知覺情意者, 則可謂之心, 而不可謂之氣質也明矣. 特以聖人之氣質, 淸明純粹, 而其心因此而能聰明睿知. 故《大學》序對氣稟不齊而言,《中庸章句》以生知之質言歟!朴書稟受處, 有通蔽開塞云云通蔽開塞, 正是發用以後事, 而今以之言於稟受處. 若於稟受處, 此性已隨氣而有通蔽開塞, 則所謂萬善一源之本然性, 何所安頓乎? 若曰單指則本然性云, 則吾未知旣蔽旣塞之性, 安能驀地幻形純善乎?【所引農巌說云云, 似是解'生之謂性'章'纔說性時便已不是性'之語. 而其以理固無不善一句, 劈頭立文者, 似以氣質性看做. 而其曰'纔賦於氣質, 便兼形氣'之云, 是病痛說. 然淺見恐未可以賦氣質兼形氣, 遽做病痛說也. 未知如何?】朴書程子論性相近云云程子論性相近, 犬牛人性, 何嘗言禀受各異之性耶? 蓋曰上知下愚犬牛人之氣質禀受各異, 故其性之發於運用者, 隨其氣質而各異, 此所謂氣質性云爾. 至於天命性性善, 通聖凡而言者, 則又以此理之在氣質者言, 而此所謂本然性云爾. 何嘗就隨氣禀異理之中, 單指本然性, 如此書之意乎?朴書五行各一其性云云'五行各一其性', 此以人物未生前, 造化發育之具言. 其曰'隨其氣質所禀'云者, 謂隨其金木水火土本然之氣質, 而各具一性, 此卽所謂理之分殊也, 非所以論有善惡偏全底人物氣質性也. 今引此以證隨氣稟理不同之說, 不亦異乎?朴書但論氣質性云云氣質性之從稟受處說, 吾亦何嘗謂之不然? 然其所禀受者, 氣質之不同也. 故性之發見者, 亦隨氣質而不同. 但不直謂原初禀得不同之理, 如此書之說也. 然則今此所爭, 不在於從禀受從發用之不同, 正在於禀異理禀異氣之不同也. 且詳其意, 以此理墮在氣質中者, 認做氣質之性. 蓋在天之理, 在人氣質之中, 初未嘗有偏全善惡之可言, 則此卽所謂本然性也. 至於隨其氣質, 而自爲偏全善惡之一性, 然後乃可謂氣質性也. 若不待自爲一性, 而直以才墮氣質者, 做氣質性, 則所謂本然性者, 只可言於在天之理, 而永無就人上說時矣. 기질지성이라는……하였습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가 있게 된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2 〈위학(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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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을해년(1935) 答吳士益 乙亥 제가 천하가 중화세계인데 유자가 능히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는 말로 세도(世道)에 해가 된다고 여긴 것은 감히 가혹하다 할 수 없으니 그 말의 실수를 취한 것에 불과하여 마치 죄를 판단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 죄를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형은 말의 병통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식견의 병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형은 시험 삼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니, 말이 이미 병통이 있다면 심술(心術)의 병통이라 말한다 해도 또한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식견의 병통이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형은 이른바 유자는 중화되지 않은 이전에 얻은 호칭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중화되지 않은 이후에 이 칭호를 얻어야 할 자를 아울러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화되지 않았을 뿐 유자는 아니니 가볍고 천하게 될 여지가 너무 심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기에 위 문장에서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유자와 똑같이 천하에 중요한 관건이 되게 하여 천하의 중화인을 다 모아서 모두 오랑캐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자를 중화인이 될 수 없는 자와 똑같이 유자라고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은 또한 중화인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어서 유자의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화인이 곧 오랑캐인이라는 것이 위 문장의 '천하가 오히려 중화이다'라는 것에 해가 될 뿐만이 아니니, 또한 어찌 병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말기에 허형(許衡)이라는 유자의 명성이 얼마나 성대했습니까. 만약에 허형으로 하여금 빠르게는 북송의 전성시기에 태어나게 하고 늦게는 명나라 황제가 나라를 건국한 때 태어나게 하여 홀로 오랑캐 제도를 행하게 했다면, 그가 평일에 유자의 이름이 있었던 까닭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천하를 즉시 오랑캐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섞어서 유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형이 대신하여 해명한 음성 오진영의 설을 가지고 말을 해보면,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된다는 것은 단지 유자에게 달려있고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자가 유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중화인이기 때문이니 다만 중화인이 되는 것은 유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다시 오랑캐가 되는 것이 유자의 손에 달려있고, 어찌 반드시 다시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합니까.【천하에는 중화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유자가 중망(重望)을 받는 것은 다만 중화인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오랑캐 사람이 되는 것에도 있으니, 오랑캐가 되었는데도 귀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이것은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되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설이 아닙니까. 어찌 다만 제가 중화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몸을 두지 못할 곳으로 내몰아낸다고 합니까. 끝내 음성 오진영의 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래 이와 같기 때문에 형도 또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이와 같이 하였고 이를 통하여 스스로 반성한다면 저의 의론이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형은 세도에 해롭다는 네 글자를 듣고서 매우 놀랐으나 어찌 생각이 이런 점에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양묵(楊墨)의 폐해가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주자는 "그 본심을 베푸는게 어찌 사악함이 있겠는가.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서 유자의 설을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과 비교할 따름 있겠습니까. 이것이 만약에 평상시의 편지와 글자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오히려 일시의 말의 병통으로 돌려서 반드시 깊이 논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장은 입언하여 전해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 일은 절개를 우뚝 세웠고 그 작업은 심력을 다하여 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추존하여 식견이 선사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그 말의 실수가 이와 같으니 그 해로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 점이 어쩔 수 없이 깊이 논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다만 형 또한 이미 자세히 보고 의심스럽게 여기고 말의 병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끝내는 훤하게 깨달을 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弟之以"天下華而儒不能華,則天下即夷"之語,爲世道之害者,非敢爲苛刻,不過就言論失,如斷獄者之聽其辭,而勘其罪也.兄乃以爲可謂語病,而不可謂識見之病,兄試思之.言者心聲也,言既有病,則謂之心術之病,亦無不可.而況不可謂識見之病乎? 兄謂其所謂儒指不華前,所得稱號而言,非謂并指不華後,當得是稱也者,非曰不然.然則不華已矣,非儒已矣,其可輕賊甚矣.有何所重,而與上文能不夷之儒,同一關重於天下,而蓋盡天下之華而并夷之乎? 能不夷者,旣可與不能華者,同謂之儒,則是亦可華可夷者,而非復儒者本面矣.然則,非但此華即夷之爲有害,上文天下猶華,亦安得而無病乎? 夫許衡儒名,何等盛也? 如使衡早生北宋全盛之世,晚生明帝建國之際,而獨行胡制,則以其平日儒名之故,謂宋明天下即夷可乎? 是非混華夷爲儒而何? 且以兄所代解陰吳說者言之,有曰 '爲華爲夷,只在乎儒,不在乎天下',夫儒之所以爲儒者,以其爲華也,但曰'爲華在乎儒',足矣.何必復曰'爲夷在乎儒',何必復曰'不在乎天下也' 【天下之中有華在】 然則,儒之負有重望,不只在於爲華,而亦在乎爲夷,爲夷而可且重之,則是非可華可夷可儒者之說乎? 何獨以弟之斥以可華可夷可儒者,謂歸人於不容身之地也? 蓋以終無柰陰說本自如此,故兄亦自不得不如此,因此而自反,則可以知弟論之非苛刻也.且兄以'世道之害'四字,聞甚瞿然,何不思之至此? 夫楊墨之害,至於無父無君,然朱子謂: '設其本心,豈有邪哉? 特微有差失.' 今此混華夷爲儒之說,豈但微有差失之比而已? 此若出於尋常書詞之間,則猶可歸之一時語病,而不必深論也.今也則不然.其文則立言之傳久也.其事則立節之卓爾也,其作則專致之心力也.其從之推尊,則見識優於先師者也,而其言之差失乃如此,其害庸有極乎? 此所以不得不深論也.但兄亦既謂細看可疑,又謂之語病,則終有了悟之日矣.惟是之俟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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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崔性武 丁巳 제가 젊었을 때에 학자들 사이에 나아가 놀면서 성 안의 준수한 사람들과 사귐이 많았습니다. 얼마 후에 시대가 변하여, 빈부가 기세를 달리하니 발걸음이 멀어지고, 신구(新舊)가 길을 달리하니 희망97)은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어져 세상의 버림을 받은 채 혼자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형이 옛 사귐을 변하지 않고 샘물이 끊임없이 뒤를 잇듯이 계속해서 달마다 시간마다 이런 은혜를 두터이 베풀어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이런 은혜는 세인들의 비당(比黨)98)이 하는 짓과는 같지 않으니 참으로 추구하는 도(道)가 같고, 지닌 뜻이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단지 이전에 왕래한 것에 대하여, 애써 보답하려고 변폭99)하는 허례를 꾸미겠습니까? 간을 뽑고 적심(赤心)100)을 이끌어내어 서로 이택101)의 바탕으로 삼아서, 지니고 추구하는 것을 더욱 굳건하고 더욱 바르게 하기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청사년간(青蛇年間)102)에 태잠(台岑)에서 풍욕하며, 창강에서 눈 밟고 달구경 하자던 우리 두 사람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 이후로부터 나는 초상(初喪)의 재앙에 정신을 빼앗기고 근심과 가난이 피부를 찔러서 여러 해 동안 심난하게 이룬 것이 없었습니다. 형 또한 병에 핍박을 받아 이전의 공부와 인사를 익힐 겨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마음먹었던 일에 부합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 크게 개탄하였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산 이후로,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지고, 일찍이 겪었던 염병과,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것들은 혼연히 전생의 일처럼 잊혀지고, 미래의 경영과 도모로 바라거나 즐거운 것들 또한 모두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몸을 단속하며 이치를 연구하여 선인의 유체(遺體)103)를 완성하고, 옛사람의 실마리를 궁구하여 찾으니, 비유하자면 겨울을 겪은 나무가 눈서리에 온갖 타격을 받았지만 오직 생의(生意)가 있음에 잘 배양하여 해치지만 않는다면 거의 꽃과 잎이 피어나고 가지와 줄기가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의 뛰어남과 민첩함은 말세에 드물게 보는 것이니, 하늘이 내려준 상서로움을 얻어서 묵은 병을 점점 제거하고 날마다 기를 따른다면 다소 막힌 뜻이 장차 반드시 강하고 굳세게 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주와 뜻으로 처음에 발원(發願)을 생각하고 조금 쉬었던 발걸음을 일으켜서 상스러운 세속의 정을 끊어버리고 고명한 곳에 마음을 두어 명교(名教)104)로써 즐거움을 삼고,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105), 삼가 한 삼태기가 부족함106)도 없게 한다면, 우뚝한 성취는 옛사람과 우열을 다툴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이 졸렬하고 누추한 사람도 이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마지막 불빛을 더할 것이니107) 어찌 일찍이 도모하지 않습니까? 만약 다시 헛되이 천천히 가면서 지체한다면 눈 깜빡할 사이조차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겨우 몇 년만 지나면 강사(强仕)108)의 나이가 되고, 형 또한 이모(二毛)109)의 나이가 될 것입니다. 성인의 이른바 '40세가 되어도 알려지는 것이 없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110)는 것으로 논해보면 마땅히 이렇게 끝날 것만 같습니다.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111)와 거백옥(蘧伯玉)의 지비(知非)112)는 군자에게 칭도되고 현자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우리들이 여기에서 종사할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한번 하면 나는 백 번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하면 나는 천 번 한다.'는 것은 비록 애써 힘쓰는 자를 위해서 말한 것이지만, 나이가 많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욱더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더불어 사귐에 서로 힘써 수양하고 서로를 경계하여 이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澤述少日,出遊翰墨間,獲交省內雋秀者,多矣.旣而,時移世變,或貧富異勢,足跡齊蜀,或新舊殊塗,襟期燕越,見棄于世,踽涼自遣.惟兄不渝舊交,源源過從,以月以時,此惠諒厚,不省所以效報也.然故人此惠,非若細人之比黨爲也.實以所趨者同道,所執者同志也.區區豈敢徒爲尚往來,務報施以餙邊幅之虛禮? 將抽肝輸赤,互資麗澤,以求所執 所趨之 愈堅愈正焉,可也.仍念往在青蛇年間,台岑風浴滄江雪月,吾兩人所期者.顧何事自是厥後,我則喪禍奪魄,憂貧剝膚 攸攸數載 憒憒無成.兄亦爲二竪子所逼,未暇溫理前功人事之多.故夙心之難副.蓋有如此者,而俯仰穹壤,堪可浩慨,廬此以來,百念俱灰,曾經之疢疾,凡可憂可苦者,渾忘若前生事,來頭之營謀,凡可欲可樂者,亦舉不入於胷中.惟欲飾身研理,用成先人之遺體,究見古人之緒意,譬如經冬之樹,飽喫霜雪打撲而,惟有生意者,存善培養,而不戕賊,則庶見敷花葉,而達枝幹矣.吾兄之俊敏,固叔季之罕覯,而獲天降祥,宿祟漸袪,向日隨氣,少沮之志,將必日以強堅矣.以若之才之志,念初發之願,起少歇之脚,絕情於猥俗,玩心於高明,以名教爲樂地,將聖訓作佩服,不敢半塗而廢,愼無一簣之虧,則多就之卓,將伯仲古人.而如拙陋者,風斯下而附末光也,何不早早圖之? 如復虛徐而稽緩,則轉眄之間,日月不待矣.今弟纔過數歲,是強仕之齡; 兄亦洽滿二毛矣.以聖人所謂 '四十無聞,不足畏.'者,論之,宜若終於斯而已者.但衞武之抑戒,伯玉之知非,見稱於君子,而不害爲賢者,則吾輩於此,可以知所從事矣.蓋'人一己百,人十己千',雖爲困勉者設,年紀遲大如吾輩者,尤不可以不勉.願與交修胥勖,庶不枉度此生也. 금기(襟期) 가슴으로 품는 기대, 희망, 뜻을 가리킨다. 비당(比黨) 이익을 위하여 어울려 지내는 무리. 변폭(邊幅) 변폭(邊幅) 또는 표폭(表幅)이라고도 쓴다. 이는 겉을 휘갑쳐서 꾸미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간을 뽑고 피를 보내어 상대방에 충심(忠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택(麗澤)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주역(周易)》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청사년간(靑蛇年間) 1905년 을사년(乙巳年)을 말한다. 유체(遺體) 부모가 남겨준 몸이라는 뜻으로, 자기 몸을 일컫는 말이다. 명교(名敎) 유가(儒家)가 정한 명분(名分)과 교훈을 준칙(準則)으로 하는 도덕관념. 중도에 그만두다 《중용(中庸)》 제11장의 "군자들은 도(道)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지만,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라는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자포자기한다'는 말은《논어(論語)》〈양화(陽貨)〉의 집주(集註)에 "이른바 하등(下等)의 어리석은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자포(自暴)하는 자와 자기(自棄)하는 자이다……자포하는 자는 학문을 거부하여 믿지 않고, 자기하는 자는 학문을 끊고 배우지 않으니 성인이 함께 살더라도 이런 사람을 변화시켜 선(善)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정자(程子)의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한 삼태기(一簣) 《논어(論語)》 〈자한(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말광(末光) 해와 달이 지면서 내뿜는 희미한 빛. 미력(微力)을 비유한 말로,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구자시표(求自試表)〉에, "반딧불 촛불은 하찮은 빛이지만, 해와 달에 광휘를 더하리이다.[螢燭末光 增輝日月]" 한 데서 온 말이다. 강사(强仕)의 나이 4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 上)〉에 "나이 사십을 강이라고 하니, 이때에 벼슬길에 나선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이 나온다. 이모(二毛) 이모지년(二毛之年)의 줄임말. 흰 머리카락 두 올이 나는 나이 곧 백발이 나기 시작하는 나이로 32세를 말함. 서진(西晉)의 학자 반악(潘岳)이 산기성(散騎省)에서 숙직하며 '추흥부(秋興賦)'를 지어 읊기를 "서른두 살에 처음 흰 머리카락 두 올을 보았네."라 읊은 데서 유래하는 말임. 최장렬은 1887년생으로 1917년에 31세였다. 40세가……없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니,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억계(抑戒) 시 《시경(詩經)》에 실려 있는 위 무공(衛武公)의〈억계(抑戒)〉 시이다. 위 무공은 늙어서도 〈억계〉 시 12장을 지어 항상 곁에서 외우게 해서 마음을 깨우치고 신하들로 하여금 늙었다고 멀리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 거백옥(蘧伯玉) 지비(伯玉知非)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육십이 되었을 때,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고쳤다는 고사를 말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라는 말이 나온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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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부 해룡에게 보냄 무인년(1938) 與吳翼夫海龍 ○戊寅 옛날 30년 전에 같은 방을 쓰면서 학업을 같이 할 때 서로 기약한 것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이윽고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천지가 뒤엎어지고, 세상 일이 다단하여 학업에 둔 뜻도 해이해졌습니다. 비록 이후에도 계속 만나서 일찍이 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옛날에 했던 것처럼 경전(經傳)을 강론하여 정미한 뜻을 찾고 명리(名理)를 상의하여 극치를 궁구해서 이른바 서로 기약한 것을 구하는 일은 아마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형은 비록 학문을 표방한 적은 없었지만 덕기(德氣)를 하늘로부터 타고났고 효우(孝友)를 가정에서 행하여, 밖으로는 뭇사람과 화합하면서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었고 안으로는 의리를 밝혀 시비를 아셨으니, 이것은 그 이름은 없지만 그 실지는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한갓 이름만 달고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어서 걸핏하면 허물이 있고 재앙이 또한 뒤따르는 자로서는 부끄러울 뿐입니다.선사가 돌아가신 뒤에는 변괴가 거듭 출연하고 의리가 캄캄하게 막혔습니다. 선사를 오래 따라서 독서를 더욱 많이 한 자는 그 견해가 더욱 어긋나며 그 마음이 더욱 험하여, 선사를 무함함에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 선사를 따른 것은 의리를 듣기 위함이고, 책을 읽는 것은 심술을 밝히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저는 형의 친동생이 아니지만 편지를 조금 읽어보니, 곧 "만약 '간옹(艮翁)이 인의(認意)와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절의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고, "인의와 인교에 관한 설이 있고부터 많은 사람들이 간옹을 의심하였다. 먼저는 유서(遺書)가 있다 하여 절의(節義)라는 명성을 취하였고, 뒤에는 홀로 앉아계실 때 명한 것이 있다 하여 원고의 간행을 인가하는 사사로움을 이루었는데, 매우 불행한 일이다. 간옹의 문인들은 마땅히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에 관한 설에 대해 분명히 분별하고 통렬히 배척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선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만 선사가 온전히 선사가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얼마나 명쾌하며 얼마나 엄정합니까! 이에 사람의 견식과 심술에는 본디 등급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앞서 우러러 칭찬했던 "그 이름은 없지만 그 실지는 있다."고 한 것을 더욱더 증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또 영재종(令再從) 두남(斗南 오해겸(吳海謙))은 명민하고 민첩한 자질로 선사를 오래도록 따르고 책을 많이 읽은 것이 우리 형에 비교하면 어찌 몇 배가 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이처럼 명쾌하고 엄정한 반면, 두남은 도리어 저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정견(定見)을 바꿨으니, 나는 진실로 그 사이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남을 위해 근심하는 것이 형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진실로 깊습니다. 이것은 천고토록 우리 사문(斯文)의 큰일로서 사정(邪正)을 구분하고 주적(主賊)을 판별하는 것이니 관련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이 때문에 깊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실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은 집안의 친척이니 어찌 제가 벗으로서 근심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모쪼록 때때로 의리에 근거하고 이치를 논하여 명백하게 고하여 깨우쳐서 두남이 의리가 아닌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를 두남과 함께 보고, 제가 두남에게 보낸 편지도 가져다 보아서 기어코 반복해서 논변하여 실효를 거두기를 기대합니다. 憶昔三十年前,同牕聯業也,所相期者果如何? 旣而邦運不幸,滄桑翻覆; 世故多端,志業廢弛.雖其源源相從,未嘗不在此事之中,至於講質經傳, 精義是索, 商確名理, 極致是究, 以求所謂相期者,如曩時之爲,則蓋未之有也.竊念吾兄雖無學問之標榜,然德氣禀於天,孝友行於家,外和於衆而自有所守,內明於義而知其是非,是則可謂無其名而有其實.而如弟之徒然佣名而無所實得,動輒有咎而禍亦隨之者,知所愧也.屬當山頹之後,變怪疊出,義理晦塞,從師愈久而讀書愈多者,其見愈差,其心愈險,其所以誣陷先師者,無所不至.噫! 從師所以聞義理也,讀書所以明心術也,胡爲而至此? 絕不可曉也.若吾,兄之非親弟而少讀書, 則乃曰"若云艮翁有認意、認教,則大傷節義",曰"自有認意、認教之說,人多有疑以艮翁.先有遺書取節義之名,後有獨命濟認稿之私者,甚是不幸.爲艮翁門人者,當於認意、認教之說,明辨痛斥,不使毫髪近於先師,然後先師爲先師".凡諸說何其明快! 何其嚴正! 乃知人之見識心術本自有品第,而向所仰贊"無其名有其實"者,尤可驗矣.且也令再從斗南之聰明敏達,從師久讀書多,視吾兄奚啻倍蓗? 然而兄則如是明嚴,斗則却眩彼說而忽改定見,吾誠不知所以爲說於其間.然爲斗而憂者,加於爲兄而喜者,則誠有之.此是千古斯文大事,邪正之分,主賊之判,所關甚重,故憂之不得不深,言之不得不切也.兄在同堂之親,豈下如弟朋友之憂? 望須時時據義論理,明白告喻,俾不陷於非義,如何? 此書與斗同看,弟與斗書亦取看,期於反覆論辨,以收實效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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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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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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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순형 기진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田舜衡璣鎮 ○乙亥 지난번 이별한 것이 꿈만 같은데, 어느 날에나 다시 만나겠는지요? 멀리 그려 마지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문(斯文)의 시비(是非)가 있은 이래로 마침내 무한한 추악한 제목을 얻게 되었으니, 비록 집에 앉아있다 하더라도 집안에서도 척연히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항상 감히 불초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저를 방문한 자가 있더라도 또한 감히 기뻐하는 마음을 두지 못하고 문득 두렵고 곤란한 마음이 생겨서 다시 어떤 책망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었고, 또 헤어지고 나서는 다시 전하는 말이 있어서 다시 무슨 죄를 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웠습니다.지난번에 형이 은혜롭게 방문했을 때에는 평소의 정의와 멀리서 찾아온 부지런함을 생각하니, 어찌 기쁜 마음에 신발을 거꾸로 신고 악수114)를 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로서는 실로 처음에 조금 두렵고 곤란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니, 화살에 맞은 새가 굽어진 나무만 보고도 놀란다고 하는 것115)이 어찌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그 모습을 보고서는 비록 그 곤름(囷廪)116)을 다 기울이지 않고 또한 그 성부(城府)를 완전히 열지는 않았지만117), 사사로이 생각하기를 과연 평소에 바라던 바를 저버리지는 않았고 점점 간담을 서로 보여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여겼습니다.그리고 형이 다시 방문했을 때에 저는 이미 먼저 두렵고 곤란한 마음을 끊어버렸으니, 이미 말씀을 듣고 얼굴을 볼 일이 없었고, 또한 곤름을 기울고 성부를 열지 않아도 흔쾌히 저의 간담을 열어 보이는데 더는 여지를 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지 않음이 있었는데, 이는 내가 머뭇거리고 의심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갑자기 쉽게 마음을 쏟아낼 수 없었던 때문입니다. 형은 혹 이점에 대하여 저를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아니한지요?대개 형은 호남(湖南)과 음성(陰城) 사이에 대해 일찍부터 그 시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만 저계야(褚季野)118) 같은 자가 형과 서로 잘 지내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같은 길을 가게 됨을 면치 못했을 뿐이니, 이것은 진실로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근래에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의 입언(立言)이 해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략 변론하였는데, 형은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진영이 변론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자, 형은 또 그렇지 않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그 잘잘못의 소재를 분명코 알 수 있었습니다. 오진영이 다시 내가 절의를 배척하는 사설(邪說)을 한다고 여겨서 오랑캐의 재앙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는데, 형은 이에 대해 또 어떻게 여기십니까?근년 이래로 비록 평범한 말이라도 입을 떠나기만 하면 허물이 곧바로 따라서 생겨납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시비와 관련된 것은 그 그림자만 대략 언급하여도 엄한 꾸짖음이 사방에서 닥칩니다. 비록 평소에 매우 친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도 매번 살펴주지 않고 비정하다고 하니, 일단의 애타는 심정을 누구와 함께 말하겠습니까? 매번 자문하고 자답할 뿐입니다.형이 멀리 영남으로부터 서해의 바닷가까지 와서 생사를 묻고 다시 마음을 위로해 주시다가, 얼마 안 되어 이별하여 가셨는데, 어찌 저로 하여금 한 번 기쁘게 했다가 한 번 슬프게 하십니까? 근래는 더욱 무료하여 애오라지 지난날에 다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써서 보내니, 또한 장차 이를 이어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형은 아마 제가 형을 서운하게 하지 않았음을 아실 것입니다. 向別如夢,不知從者何日返抵耶? 區區遠溯不已.第念自有斯文是非以來,遂得無限醜題,雖坐在自家,家裡未嘗不惕然愧恨者多.是以尋常不敢以不肖面目自露於人.其或有相訪者,亦不敢有欣喜之心,而輒生畏難之意,以爲不知復有何等責問也,又懼夫退而不知復有傳說而使重得何罪也.往者,兄之惠然見顧也,揆以平日情誼及其遠于之勤,則奚啻欣喜倒屣握手而已哉? 而弟實不能初無絲毫畏難之心,豈其傷弓之鳥見曲木而驚是耶? 及聽其言而觀其貌也,則雖不盡傾其囷廪,而亦不全閉其城府,私竊以爲果不負平昔所望而漸有可以肝膽相示之路頭矣.及兄之再訪也,弟已先絕畏難之心,則已無事於聽言觀貌矣,亦且無待於囷廪之傾、城府之開,快將我肝膽相示,無復有餘.而却猶未然,非我有所趑趄疑殆而爾,實緣凌遽未易輸寫者.兄或於此,不以爲簡我,尚未可知也.未知不然否.蓋兄於湖陰之間,非不早燭其是非者,但有褚季野者,與兄相善,故不免與之同歸耳,此固不必再言者.至於近日吳作《鄭節士傳》,弟見其立言之有害,故不得已有所略辨者,兄旣不以爲非.吳之於辨有所云云者,兄又不以爲然,則得失所在,斷可見矣.吳復以我爲排節義之邪說,而與於夷禍之甚者,兄於此又以爲如何? 年來雖尋常說話,纔脫於口,吝輒隨生.況其稍涉是非者,略及影響,誅責四至.雖號平日相親之厚、相識之甚者,每不見察,加以非情,一段耿耿,向誰與語? 每自問自答而已矣.兄遠自嶺表以來西海之濱,旣問死生而復論心曲,而不須臾而別,則安得不使我一喜而一悵也? 近益無聊,聊將往日未盡輸寫之萬一以去,且將繼此而有言矣.兄庶幾知我之不簡兄也. 신발을……악수 《구당서(舊唐書)》 〈유업전(劉鄴傳)〉에 유업(劉鄴)이 찾아오자 너무도 반가워 신발을 거꾸로 신고 영접했던 이덕유(李德裕)의 고사가 있다. 화살에……것 화살을 맞아 본 경험이 있는 새는 활을 당기는 시늉만 하여도 그만 놀란 나머지 공중에서 떨어지고 만다는 뜻으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과 비슷한 우화이다. 《전국책(戰國策)》 〈금책(楚策) 4〉 곤름(囷廪) 곳간 : 균름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인데, 여기서는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아래의 성부(城府)도 마찬가지이다. 그 성부(城府)를……않았지만 원문은 '不全閉其城府'인데, 문맥을 살펴 '閉'를 '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저계야(褚季野) 저계야는 입으로 시비를 말하지 않으나 속으로는 시비(是非)가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칭찬하여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서,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자여 달준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全子與達準 ○辛酉 허명(虛名)의 비유는 자신을 말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북방(北方) 풍기(風氣)의 질박함은 남토(南土)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좌하는 자실과 모습이 순박하니 반드시 외면을 힘쓸 분이 아니니, 진실로 감히 외람되게 대낮에 등불 같은 도움조차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허명' 이 두 글자는 근세 유문(儒門)의 공통된 근심거리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저 이름은 유적(儒籍)에 올려놓았지만 전혀 계책이 없는 자는 말할 거리가 못됩니다. 그런데 주성(州省)에서 명망을 받고 있는 모모(某某)의 경우는 성리(性理)의 심오함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천인(天人)의 함의도 극치까지 궁구하지만 그 마음과 몸가짐을 살펴보면 간혹 주위 사람의 의심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에 대해 모여서 따지고 변론하여 예(禮)를 제정한 본뜻에 훤할 것 같지만 그 집에서 행하는 것을 살펴보면 간혹 이해가 걸려 있을 경우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 배운 바를 미루어 자신과 집안에 적용하는데도 오히려 어긋남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어찌 《대학》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실지를 함께 논하길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바야흐로 또한 가득히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실학(實學)으로 자처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취할 경우에도 또한 그 실견(實見)과 실덕(實德)이 어떠한가를 묻지도 않고, 한갓 언어문자의 풍부함으로 모두 똑같이 실학이라고 하며,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하게 되면 후세 또한 실학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어찌 오늘과 후세에 어찌 조금의 도움이 없겠습니까마는, 명망과 실지가 서로 걸맞는다고 말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세속의 조롱과 업신여김을 부르고 도술이 비하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한 가지에 대해 우리들은 정히 주제로 삼아 더욱 힘을 써서 자신의 처신과 남을 살핌에 있어 이런 풍조에 갇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虛名之喻, 認出自道.北方風氣質實, 非南土之比,座下之資貌淳樸,必非務外者,則固不敢猥獻晝燈之下助矣.第此二字,爲近世儒門之通患則久矣.彼掛名儒籍,全没猷爲者, 已不足道.其在某某之佣望州省者,理邃性奧, 毫分縷析,天人之蘊, 期究極致, 觀其用心行己, 則或不能絕旁人之疑.常節變目,聚訟居辨,制禮本旨,若將瞭然,觀其行之家庭,則或失守於利害之際.推其所學,用之一己一家,猶齟齬若此,尚何望與論《大學》治平之實乎? 然而方且充然自多,處之以實學; 人之取之也,亦不問實見實德之如何,徒以言語文字之富,僉同謂之實學; 遺文傳之後世,後世亦以爲實學.是其言論風旨,豈無少裨於今與後, 而謂之名實之相稱,則末也.此所以來世俗之嘲侮而道術之汙下也.此一著,吾輩正宜做題加勉, 處已與觀人, 求其不囿於此風也.未知尊意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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