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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의재 낙청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毅齋族叔洛清 ○乙丑 조카 인(麟)은 뜻이 이미 학문을 지향하고 재주 역시 우둔하지 않은데다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에 있어서는 사원 전체의 많은 인원 중에서 최고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청년들이 금수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인재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잘 가르치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며칠 만에 자못 문리가 진전되어 처음 타오르기 시작한 불과 같고 막 솟아 흐르기 시작한 샘과 같음을 보았습니다. 부채질하여 잘 타오르게 하고 깊이 파서 이끌어 준다면 들판을 태우고 바다에 도달하는 것을 끝내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이 비록 의리가 엄하다 할지라도 문을 닫고 홀로 배운다면 끝내 벗을 떠나 홀로 지내는 근심3)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졸졸 흐르고 토닥토닥 타오른들 어떻게 성대해지고 장구해지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소년의 학문은 야인이 농사짓는 것과 같으니 한번 때를 잃으면 다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지금 조카의 학문이 이른 단계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단계입니다. 야인이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데 있어 비용이 넉넉하지 않으면 동서로 달려가 빌려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해야 가을의 수확하는 시기에 그 이익이 열 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현명한 자손이 학문을 많이 한 이익은 백 배가 되는 데이겠습니까? 부디 한때의 얽매임 때문에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복과 이익을 장구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빨리 행장을 꾸려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처럼 학문이 얕고 누추한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을 성취시켜주는 지혜가 있지 않으니, 번거롭게도 이렇게 누누이 말하는 것이 진실로 매우 염치가 없습니다만 족친 간에는 틈이 없기 때문에 혐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할 때 조카의 스승이 되는 것은 혹여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일가는 국초(國初) 이래로부터 대대로 문학으로 행세하여 그 훌륭함이 나라에 알려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은 명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성한 몇 분이 세상을 떠난 후로 그 뒤를 잇는 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쓸쓸하고 적막하지 않겠습니까? 조카와 같은 자는 가망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적임자를 잘 길러서 성취시키지 않는다면 한 집안에게만 복과 이익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친족에게도 빛과 윤택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니,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麟姪, 志旣向學, 才亦不鈍, 至於勤讀一節, 全社衆員之最.顧今靑年禽犢之日, 得如此材, 亦非易事.善敎之, 可成好箇器物.來此幾日, 頗見文理進就, 若火始然泉始達, 噓煽之浚導之, 燎原放海之, 終可期也.家庭之敎, 雖云義嚴, 杜門獨學, 終不免離索之憂, 則涓涓燄燄, 何以保其盛且長也? 夫少年之學, 若野人之於農, 一失其時, 更不可追.今此姪所至, 乃農家種耘之際也.野人之於種耘, 費用不給, 則東借西貸, 無所不至, 以有秋之日其利十倍也, 況賢子孫富學之利, 乃百倍者乎? 幸勿以一時拘掣爲難, 須以永長福益爲念, 速爲治裝起送, 如何? 顧茲淺陋, 旣未有成物之智, 則煩此縷縷, 誠甚沒廉, 但在族親無間也, 故不以爲嫌.且自念爲渠師, 則或可能焉爾.吾宗自國初來, 世世以文行, 彬彬聞邦國, 迄于今餘韻未已.然老成幾箇人去後, 無年少者繼之, 則豈不落莫? 若此姪, 則可望者, 其人焉, 不有以培養成就之, 非惟一家之非福益, 亦全族之沒色澤, 并有以深諒千萬. 벗을……근심 원문의 '이삭(離索)'은 '이군삭거(離群索居)'를 줄여서 한 말로, 자하(子夏)가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지낸 지가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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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재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崔欽齋 丙寅 전에 들으니, 오진영이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류시키고 다시 보상금을 받는 것으로 수락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가 어지럽힌 문집을 행하려 할 때에 그 기염은 두려울 만했으니 오진영이 오늘날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로부터 선사의 심사(心事)가 더욱 어두워지고 화도수정본이 더욱 어지럽혀질 것이 통탄스러워 편치가 않습니다. 오직 이 일은 그가 문집 간행을 앞두고 그 도당들의 무함하는 문자를 내어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려는 것이고, 또한 문집 간행을 앞두고 그가 고친 원고를 내어 시비를 전도시키려는 것입니다.【오진영은 매번 내 원고가 한번 나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 오진영이 지금이 알맞은 때라고 하면서 이런 이유로 인가도 받고 고소도 하여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운데 누가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비록 손수 편정하신 화도본이 진본임은 해와 달처럼 분명하고 변론하여 꾸짖는 엄한 말이 서릿발처럼 매서우나 때가 바뀌고 국면이 전환되기 전에는 결코 간행할 방법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떨어집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단지 신포서(申包胥)의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길 것"48)이라는 말을 뇌일 뿐입니다. 비록 그러나 염려와 근심하는 도리는 마땅히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다하여 천명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제 우리의 급선무는 오직 서로 힘써 현동본을 베껴 써서 여러 곳에 보관하여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간에 변론하여 꾸짖은 문자들을 합하여 정리해서 백세를 기다리는 일은 바로 늦출 수 없는 일인데, 여러 사람들의 뜻은 태만하고 미력한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도 오히려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대단히 통탄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向聞, 震訴師孫拘畱, 受諾復徵償金, 得遂所欲.亂本將行, 其氣燄可畏, 震在今日, 宜其如此, 無足怪者.但從茲以往, 先師之心事愈昧, 手本愈亂者, 爲可痛不寧.惟是彼又將刊, 出其徒黨褠誣文字, 以眩人耳目矣.又將刊, 出渠稿以顚是非矣.【震每言吾稿一出, 都無事】 蓋彼時乎時乎, 以認以訴, 其鋒甚銳, 誰敢當也? 在此則雖手本眞本, 日星如也, 辨斥嚴辭, 霜雪如也.時移局換之前, 決無刊行之道, 念到于此, 不覺神鬱氣塞也.無已, 則但誦申包胥"天定勝人"之語乎.雖然, 慮患之道, 當盡吾力之所可及, 以待天命之處分.今日吾輩急務, 惟在競相傳寫玄本, 各藏諸處, 以備不虞.且合修前後辨斥文字, 以俟百世, 正不可緩, 而衆志漫漫, 瑣力不及, 只此不大難底事, 尚不能就, 極可痛歡. 하늘의……것 《사기(史記)》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勝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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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재에게 보냄 병술년(1946) 與崔欽齋 丙戌 상천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섬의 오랑캐를 쫓아 버려 조국을 회복하니 이에 우리들이 숨을 쉬고 몸을 운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시 그대 집에 가서 술을 따라 마시며 축하하고 싶었으나 질병이 근래에 심해지고 풍사(風邪)로 인한 현기증이 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올봄에 동생 두 명이 목숨을 잃고 딸 아이 하나가 죽어서 세 번의 겹친 초상을 당하여 병세가 더욱 참혹해졌습니다. 이에 중대한 일이 아니면 전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진실로 떨치고 일어나기 어려워 다만 혼자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제 다행히 세상의 운수가 이와 같고 정치의 책임은 자연 담당한 제공이 있는데, 사문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아, 지난날 음성 오진영의 재앙은 말하자니 치가 떨립니다. 저들이 우러러 떠받들었던 왜정(倭政)49)이 지금 이미 산산이 부서졌으니, 그가 스승을 무함한 "내가 죽은 뒤의 세상을 알 수 없으니,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는 말은 변론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밝혀질 것이고, 이로부터 우리들은 다소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오직 화도수정본의 원고를 발간하여 배포할 기회는 지금이 바로 그 때인데 당신과 나는 모두 가난하고 현재 동지도 없으니 이를 장차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깊이 근심하고 길이 한탄하여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할 때 존자도 똑같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뜻이 있는 자는 일을 끝내 이룬다."라고 말했으니, 이 일을 이룰 날이 끝내 없겠습니까? 한 말씀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은 선사의 생신입니다. 스승의 죽음을 간절히 통탄하다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토로함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헤아려 주시시라 믿습니다.오진영이 이미 강경하게 선사가 지산(志山 김복한)과 절교했다고 말하면서 존자가 홍성 전재(全齋 임헌회)의 문인 정윤영(鄭胤永)을 찾아가 뵌 것을 가지고 한 쌍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홍성파의 한 기둥으로 지산을 추대하고 또 대대로 좋게 지낸다는 것을 말하면서 "성구(聖九 김노동으로 김복한의 아들)는 초상을 만나 달려와 조문하지 않았으니, 부당하게 사람을 끊는 것이 이처럼 근거가 없다."【오진영이 김성장(김병헌)에게 답한 편지에 보인다.】하더니, 후에 다시 임경선(林敬善 임호철)에게 편지를 보내 손녀딸을 성구의 큰 아들과 혼인 맺기를 청하며 오 충정공의 후손과 선청(仙淸) 후손이 통혼하여 길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두루 들어 증명하다가 성구의 동생인 김명동의 꾸지람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그가 전후로 한 짓을 따져보면 어린아이요 제멋대로 휘두르는 맹인의 지팡이요 대낮에 출몰하는 도깨비라 터럭만큼도 선비의 기상이 없다고 말할 만하니, 본디 그와 더불어 말할 것도 못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공교롭게도 이런 사람을 만나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또한 우습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운기(運氣)와 관련이 있는지요? 上天悔禍, 屏逐島奴, 興復祖國, 於是乎吾輩可以吐氣容身.卽欲詣門酌酒相賀, 而疾病此甚, 風眩作崇, 忽於今春二弟并命, 一女化去, 三遭重制, 病加逆慘, 非事係重大, 萬不得已外, 誠難振作, 只自悲憐.第今幸世運如此, 政治之責, 自有當局諸公, 至於斯文之事, 其責在誰? 噫! 往日之陰禍, 言之齒酸, 彼所仰戴之誰家日月, 今旣破碎, 則其所誣師'命世不可知, 料量爲之'者, 可不辨而自明, 從此吾輩, 省得多少事矣.惟是華本手定稿刊布之機, 此正其時, 而尊與我皆赤貧, 現無同志者, 此將柰何? 深憂永歡, 夜不能寐.竊意尊亦一般也.古人云: "有志者, 事竟成." 此事之成, 竟無日乎? 願聞一言之敎也.今朝先師諱辰也.痛切山樑, 不覺吐衷至此.想垂諒也.震旣硬謂先師絶志山, 而斥尊以伏謁洪城全門鄭胤永一對矣.渠則乃以洪流一柱推志山, 又言世好, 而曰: "聖九, 遭喪不赴, 絶人不當, 若是無據."【見震答金聖章書】 後又致書林敬善, 請以孫女結昏於聖九長子, 歷擧吳忠貞公後與仙清後通婚而多吉者證之, 遭聖九弟明東之叱退, 究厥前後所爲, 可謂小兒盲杖晝出魍魎, 無一毫士子氣像, 本不足與言.而吾輩之巧值此人, 與之上下, 還可笑也.然是亦運氣攸關歟? 왜정(倭政) 원문의 '수가일월(誰家日月)'은 오진영이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에서 한 말로, 일본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하는 것이 문제가 없음을 말하면서 "자기 주머니 속의 지폐나 경향을 오가는 차표나 주고받는 편지에 찍힌 인장이 누구 집에나 비추는 해와 달 같은 것이다." 하였는데, '누구 집에나 비추는 해와 달'이 일본 총독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더 넓은 의미의 왜정으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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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호철에게 답함 정해년(1947) 答林敬善浩喆 ○丁亥 삼가 우리가 서로 허여함에 있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된 마음으로 권하고 경계하는 데 있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의나 갖추고 마는 것을 숭상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옛날에 성인이 학문의 도를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명(明)과 강(剛)을 말했으니, 이 두 글자는 공부하는 과정의 두 날개와 두 바퀴로 서로 필요로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집사를 살펴보면 강은 넉넉히 할 수 있는데 명이 혹 부족하니, 밝게 분별하는 측면에 마음을 더 쓰셔서 혹 조금이라도 치우침이 없게 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의 시비와 의리의 당부는 모두 마땅히 분별해야 하는 것인 만큼 먼저 내가 접촉하는 곳에서부터 신중히 생각하고 정밀히 살펴 눈앞의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구해야 하니, 몇 년 전에 선조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사가 무함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어찌 힘써 변론하기를 선조의 일과 같이 하지 않으십니까? 생각건대 그 속의 지극한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러므로 명이 혹 부족하여 마음을 더 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선사는 임종하기 전 며칠까지도 오히려 김씨의 뇌문에 대한 변론50)에 힘을 다했으니, 이것이 어찌 마땅히 법으로 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터이 돌봐주시고 인정해 주심에 감사하여 삼가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 의리를 붙여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더욱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라니, 존자께서 용서하고 양해하여 꾸짖지는 않으시겠지요? 竊惟吾人相與, 貴在實心勸戒, 不在尚往復備禮數而止焉.故敢呈一言.古之聖人說學問之道, 必曰"明剛", 其爲二字, 工程輪翼, 相須可知也.以澤述觀於執事, 剛則優能, 而明或不足, 幸於明辨上加意, 毋或少偏, 如何? 事之是非, 義之當否, 皆所當辨, 而先自我所接處, 愼思精覈, 以求目下當行之路, 若於年前尊先祖事, 不得以已者也.今於先師之受誣也, 則胡不力爲辨理, 若先祖事乎? 想以不深知裡許極致而然? 故曰: "明或不足, 而不可不加意也." 先師臨終前數日, 猶努力於金誄之辨, 此豈非所當法者耶? 感眷與之厚, 竊附切偲之義, 欲以少報.願遂觀善之益之, 尊意可恕諒, 不讁否. 김씨의 뇌문에 대한 변론 김씨는 김평묵을 말하고, 뇌문은 김평묵이 쓴 전재 임헌회의 제문을 말하는 듯하다. 김평묵은 화서학파로, 제문이 겉으로는 임헌회를 칭송하면서도 성리설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으므로 간재가 제문을 물리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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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경에게 보냄 경진년(1940) 與林子敬 庚辰 지난번에 존자의 뜻을 엿보니, "음성의 오진영이 비록 무함한 것이 있더라도 선사의 덕이 성대하여 사람들이 그 무함을 믿지 않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힘써 변론할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 임금과 고수(瞽瞍)가 북면하여 순 임금에게 조회했다."54)라는 말이나 "공자가 옹저와 척환을 주인으로 삼았다."55)라는 말은 제나라 동쪽 야인의 말입니다. 순 임금과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 군부(君父)의 조회를 받고 소인의 집을 주인으로 삼았다고 말한 것이고, 이런 말을 한 사람도 무식한 야인에 불과하였으니, 누가 그들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맹자는 오히려 거듭 말하여 한 번만 말하지 않아서 명백하게 변론하였습니다. 이제 선사의 성대한 덕은 순 임금과 공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무함한 자는 무식한 야인이 아니라 명망 있는 문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느슨한 의론과 단순한 말로써 소략하게 하여 변론한다면 스스로 그 사람을 믿고 무함을 믿지 않은들 스승의 덕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저 백리혜(百里奚)는 패자를 보좌하였는데, 어찌하여 맹자가 존경하여 우러러 봤겠습니까? 그렇지만 마침내 그를 위하여 애써 말해서 스스로를 팔아 진 목공에게 벼슬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론하였고 또한 명백한 증거와 정확한 근거가 없자 곧 이치상 그럴 리가 없다는 것으로 곧장 결단하여 반복해서 말하고 깊이 배척했으니 어찌 지극히 정밀한 인의가 아닌데 맹자가 그것을 했겠습니까? 옛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원망을 변론하고 비방을 밝혀 주는 것이 제일의 덕과 의리이다." 하였으니, 이 말을 한 사람은 맹자의 마음을 체득한 모양입니다. 이제 일세의 유현으로 우리의 부모요 스승이 되신 분에 대해 만약 크게 마음과 힘을 써서 명확한 유서에 근거하여 억울함을 변론하고 비방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선사 보기를 오히려 맹자가 백리혜에 대한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向覸尊意, 似以爲"陰雖有誣, 先師德盛, 人不之信, 而不爲損, 則不必力辨者." 然此決不然.夫謂"堯與瞽瞍北面朝舜", "孔子主癰疽瘠環"者, 齊東野人也.以舜孔之聖, 受君父之朝, 主小人之家云者, 而爲其說者, 不過無識之野人, 則人誰信諸? 然孟子猶重言複言, 不一言而明辨之.今先師德之盛, 不及舜孔, 誣之者, 非無識之野人, 而有名之門弟, 乃以緩論單辭, 略略置辨, 而自信其人, 不信誣, 無損師德, 豈不難哉? 且夫百里奚, 伯者之佐, 豈孟子之所尊仰哉? 然而乃爲之苦口, 辨不自鬻以要穆公, 而亦無明證的據, 則直斷以理之所無, 而反覆深斥, 豈其非仁義之至精, 而孟子爲之哉? 昔人以"爲人辨寃白謗, 是第一德義", 爲此言者, 其體孟子之心乎? 今於一世儒賢, 爲吾親師之地, 如不大用心力, 據明的之遺書, 而辨寃白謗, 是吾之視先師, 尚不若孟子之於百里奚也.其將謂何? 요 임금과……조회했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로, 순 임금의 의리를 의심하여 훼손하는 말이다. 공자가……삼았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로, 옹저와 척환은 임금 가까이에서 비위를 맞추어 주는 소인인데, 공자가 이들을 통해 벼슬을 구하려고 주인을 삼았다는 말이다. 이 역시 공자의 의리를 훼손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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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金允升 甲子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듯 천하의 마음과 천하의 문장도 하나로 똑같습니다. 이 마음으로 이 문장을 보고 이 이치를 궁구하여 똑같이 극치로 돌아간다면 마침내 서로 합치하지 못할 이치가 어찌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을 뿐이기 때문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힘을 헤아려 하라", "구애받지 말라"는 것과 형세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서찰 중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이며, 음성(陰城)의 죄를 감단한 것이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하여 끝까지 남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 답장에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고 답해주셨습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것은 천 명이 그렇게 여기고 만 명이 그렇게 여기어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진영(吳震泳)을 두터이 엄호하는 형의 입장으로는 당연히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하거나, 설령 조금 평가를 바꾼다 해도 또한 마땅히 "아마 혹 그럴 것 같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 명쾌하게 결단함이 한결같이 이런 수준에 이르러 이전 편지에 "선사를 무함한 죄를 억지로 자복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것과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을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이에 천하의 이치와 문장이 동일하고 시비의 공평함이 사람들 마음속의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지 않으면 절로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말이 사리에 맞는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여기서 그칠 수 있었는데, 마침내 다시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한다.",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굴레를 씌울 수 없다."는 등의 설로 화사첨족(畫蛇添足)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기서 또한 편사(偏私)를 극복하기 어려움과 앞서의 소견을 버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성을 엄호한다.'는 '호음(護陰)' 두 글자가 우리 형의 평생 고질병이 되어 곳곳에서 기회를 타고 일어남을 적이 한탄하는 바입니다.대저 말은 심성(心聲)이고, 글씨는 심획(心畫)입니다. 그러므로 고금 사람들의 성광(聖狂)과 선악(善惡)을 보고자 할 때는 오직 말과 글씨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만약 말과 글씨가 이와 같지만 마음은 이와 같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을 들어보면 사람이 어떻게 숨기리오."35)라는 가르침이 그릇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책에서 나타나고 조물주의 솜씨는 만물에 나타난다."는 설은 망령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는 것은 음성(陰城)의 글이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음성의 마음은 이미 궁구하여 말할 수 없으니, 우선 비록 마음을 따져서 죄를 용서하자고 말하더라도 혹 무의식인 잘못이었다고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가 있었다." 하였고, 두 번째로 송병진(宋秉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가 일찍이 인의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세 번째로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내게 명하여 힘을 헤아려 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네 번째로 자승(子乘 이병은(李炳殷))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매우 간절히 바른 말로 꾸짖고 정성으로 회유하여 그로 하여금 빨리 잘못을 고쳐 속히 돌아오도록 네 번이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오만하게 높은 자세로 앉아서 혹은 듣지 못한 척하며 한 해가 다하도록 답을 하지 않았고, 혹은 경쟁하는 습관이 있다고 꾸짖었으며, 혹은 내시의 불알이니 중의 상투니 하는 말로 조소하였고, 혹은 광천(狂泉)36)을 여럿이 마셨다고 욕을 해대었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설을 거듭 반복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에 더욱 힘을 썼으니, 천하의 고의적인 일이 끝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음성을 죄주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억지로 죄를 자복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음성을 엄호하는 고질병이 될 뿐만 아니라 혹 선사를 잊어버리는 큰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한 것에 대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왜의 달력을 함부로 비웃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발언을 너무 명쾌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형의 식견과 언론이 한때의 잘못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것이 그 유래가 매우 깊이니, 또한 괴이하게 여깁니다.근래에 조충현(趙忠顯)37)이 글을 지어 뭇사람들에게 호소하기를 "석농(石農)의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없다고 할 수 없고, 정재(靜齋)의 '유서(遺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여론의 분통과 공의(公議)의 성토를 받고 있습니다.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조충현의 "감히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비록 의심과 결론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멋대로 지어낸 것으로 성토하는 중론에 반대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형의 편지가 먼저 나왔고 조충현의 글이 뒤에 나왔다면, 혼자 앉아있었을 때에 명했다는 것은 진실이고 유서는 거짓이라는 흉악한 설을 우리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계도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장차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매 이미 두렵습니다.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 것은, 말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지만 말투 속에 억양이 너무 지나친 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랑캐의 정삭(正朔)을 사용한 김수홍(金壽弘)38)에 대해 꾸짖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족의 정을 끊게 한 것은 우암(尤菴)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수홍이 우암을 기롱하여 "남이 오랑캐의 정삭을 쓰는 것에 대해 조심하여 함부로 경멸하지 말라."고 했는데, 김수홍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자가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다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매 또한 놀라게 됩니다.대체로 보내준 편지의 전말을 모두 들어서 반복해 살펴보면,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한 구절 이외에는 모두 영남을 돕고 음성을 엄호한 것으로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의리를 상실하고 무함을 사실화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장본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에 "당인(黨人)을 논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우두머리가 어떠하고 쟁단의 일어나게 된 이유가 어떠한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과 "음성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고, 순재(舜在 성기운(成璣運))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고,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은 암암리에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우선 놔두고서 다만 무함 여부만 논했던 것은 문도와 관련된 것이냐 선사와 관련된 것이냐는 차이가 있고, 그만둘 수 있느냐 그만둘 수 없느냐는 같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형이 호남은 그르고 영남은 옳다 하여 무함한 죄까지 아울러 묻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감히 대략 사실을 진술하여 고명(高明)의 취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대저 처음에 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가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청간(清刊)하는 곳에서 인가를 힐난하였고, 세 번째는 음성을 성토하는 일에 의리를 제창했으니, 그 의리가 맑고 맑으며 말이 정당하고 정당한 자는 함재(涵齋) 김장(金丈)이니 진실로 호남 의론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경존(敬存)과 같은 자는 호남의 침묵으로 인하여 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온 자에 불과하니, 진실로 문망(文望)의 우열을 가지고 그 수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쟁단이 일어나게 된 이유 같은 것은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음성이 저에게 답한 편지에 상빈(傷貧)의 마음이 첫째이고, 뇌비(賂碑)의 유감이 둘째라고 하였는데, 형이 지적한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책을 간행하는 곳은 돈이 생겨나는 숲이 아니고, 정재(靜齋)도 평소 탐욕하다고 칭해지는 자가 아니니,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간행 장소를 다퉜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경존(敬存)이 뇌물을 주어 비문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뇌물을 받고서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입니까? 앞서 제창한 자가 있자 다시 이에 화답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이 글은 마땅히 삭제하고 다만 비(碑)를 강등하여 갈(碣)을 하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를 통해 최경존을 성토한 것이 아니라 실로 백대 뒤에도 우리 선사의 씻기 어려운 허물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문하의 제자가 감히 할 것이겠습니까? 스승의 문장을 돌아가신 뒤에 고치는 것은 변괴 중에 큰 것인데, 고칠 수 있고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법에 그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법을 미처 보지 못하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고쳤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선사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문하의 제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뇌비와 관련한 두 번째 유감은 최경존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유감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사에게 허물을 끼치고 선사를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경존의 잘못은 갈(碣)로 고치는 것을 경솔하게 허락한 날에 있었고, 예전의 비(碑)로 회복하고자 한 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동(玄洞)에서 발간한 것에 대해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시행한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호남의 침묵은 경존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현동에서 발간하는 일도 경존이 혼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청(完廳)의 해각(亥角)39)과 온 도의 동문들이 어찌 모두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암암리에 취하도록 해주었겠습니까? 만약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쟁단을 일으키는 혐의를 피하였다면, 외부의 방애가 없는 현동에서 발간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인가를 구걸한 영남의 일은 스승을 의리로 섬기며 허물을 고치는데 기탄이 없는 도리가 결단코 아니었으니, 큰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한 것은 원래 영남에 있었습니다. 3000원짜리 집을 주겠다는 감언에 원고가 갑자기 영남으로 넘어갔고, 600원 발간 비용을 마련한 의록(義錄)은 그 재물을 관장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일곱 성인은 모두 길을 잃었고40) 일만 대중은 눈이 없어서 스스로 여기기를 '병졸이 사적인 이익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장수의 원대한 계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원고를 출판하도록 유혹했다는 힐난이 전사인(田士仁)의 영남 편지에서 나왔고, 장재(掌財)를 가짜로 꾸몄다는 것이 탄로 나서 김정호(金楨鎬)가 그 액(厄)을 대신하였습니다. 처음에 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툼의 보루가 선명하게 솟아오른 것이니, 형세로 볼 때 반드시 닥치게 될 일이었습니다.완청(完廳)의 해각(亥角)은 "우리 인본(印本)만 유독 없겠는가. 인본이 없다면 경성에는 어찌 끝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라는 것은 오진영의 글에서 확고하게 말하였고, "하공(荷公 민영휘(閔泳徽))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성기운(成璣運)의 편지에서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꼭두각시의 본모습이 가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침묵해서 허락할 수 없었다."고 송병휘(宋秉徽)의 편지에서 드러나자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는 말은 깨짐을 면치 못하였고, "민장은 말이 없었다."고 조충현(趙忠顯)의 글이 나오자 "하공은 침묵하였다."는 것은 날조한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우리 형께서 "석농(石農)의 마음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다.'고 한 것은 과연 맑은 하늘의 백일과 같은 것이었으며, "순재(舜在)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다."고 한 것은 과연 빽빽한 그물을 사방에 둘러친 것이었으니, 정확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이 이에 대해 오히려 다시 말하기를 "다툼의 실마리는 호남에 있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성토하는 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라고 했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나는 우선 할 말이 없네만 인가와 침묵은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허(認許)'에 대해 '묵허(黙許)'라고 한 것은 저쪽에서 지어낸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하는데 저들은 알고서도 금지하지 않았으니, 나의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다만 침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실로 인가와 침묵을 동일하게 허락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청의 유무와 왜(倭)의 달력을 썼는지 여부는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찌 오십보백보로 개괄할 수 있겠습니까?당일에 허물의 있고 없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선사의 장례를 지낼 때에 그의 성모(誠慕)와 우리의 청초(淸楚)함에 대해서는 이미 들을 만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원고를 인쇄하는 것은 곧 전날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고, 지금의 도지사(道知事)는 곧 전날의 성모했던 해각(亥角)입니다. 그러니 장례를 지낼 때 방애가 없는 것과 함께 똑같이 일례로 삼아서 일찍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또한 임술년(1922) 겨울에 몸소 완청에 질문했던 자는 영백씨가 아니었습니까? 과연 하자가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영백씨가 먼저 알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금지하여 당일에 쓰지 말라고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형이 마침내 오늘에 뒤미처 비판을 한단 말입니까? 또한 하나의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형의 형제는 세상에서 원방(元方)과 계방(季方)41)처럼 우열을 다투기 어렵다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힘써서 첫 번째 의리로 삼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형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아우가 반드시 감히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뜻을 강행하여 어진 아우가 정성을 다해 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형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대저 선사를 무함한 것과 김용승(金容承)을 당(黨)으로 여긴 것은 그 죄에 경중이 있습니다. 만약 함장(涵丈)에게 진실로 김용승을 당으로 여긴 자취가 있다면 의당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살펴서는 안 되며, 하물며 김용승을 따라서 사우(師友)간으로 선사를 대하던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였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것은 7월 4일 대상(大喪)을 지낸 이후입니다. 날짜가 분명하고 마음의 자취도 선명한데, 영백씨는 어찌하여 선사를 무함한 음성 사람을 모두가 곡진하고 맹렬히 성토할 때 마음을 허여한단 말입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함재가 머리가 새하얗게 센 백수(白首)의 나이로 30살이나 아래인 정운한(鄭雲翰)의 부장(副將)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형이 영백씨게 고한 것에 정성을 다함이 있지 않아서입니까? 성토한 김모(金某) 무리의 중제(中弟)도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비록 스스로 말한 혐의가 있지만 의견을 다 펴서 말하지 않으면 도가 드러나지 않는 자리인지라 또한 감히 침묵하면서 도외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언급했을 뿐입니다. 天下之理一也,天下之心,天下之文,亦一同也.以此心見此文究此理,通歸于極致也,豈有終不相合之理乎? 惟其如是也,故請願自辱、料量不拘之勢不兩立,惡札中最緊節眼,而所以勘斷陰罪者,可謂斬釘截鐵,到頭無餘.而今承盛教,乃以"夫誰曰不然"答之."夫誰曰不然"者,豈非千人然之,萬人然之,無人不然之謂乎? 以兄護震之厚,宜其曰"未知其必然",雖使稍改品藻,且應曰"似或然矣".孰圖其明快斷決,一至於此,與前教"不可強服誣師之罪"者,若不出一人之口哉? 於是益信天下之理與文之一同,是非之公不外乎人心之所同然,而不如此自不得也.言之中倫,旣已若此,則斯可以止矣.乃復以"其心保無他意"、"不可勒以誣師"等說,添畫蛇之足,何哉? 於是又以知偏私之難克,已見之難舍,有如是矣.竊歎夫護陰二字,爲吾兄平生貞祟,而隨處闖發也.夫言者心聲也,筆者心畫也.故欲觀古今人之聖狂善惡,惟言與書是準.茍曰言書之如此,而心之不如此,"聽其言也,人焉廋哉"之訓謬矣,"人心著書,化工著物"之說妄矣.然則有罪者陰書而無他者,陰心旣是究說不得,且雖曰原心而恕罪,其或出於眚災也則哿矣.陰也則不然,一之而對靜齋言: "先師曾有認意." 再之而對宋氏秉眞言: "吾師曾有認意." 三之而答涵齋曰: "先師獨命料量爲之." 四之而答子乘曰: "先師嘗教不必深拘." 及夫正責誠喻,恳恳切切,俾改之速遄復者,累牘之四至也.則終是傲然高坐,或如不聞而終歲不答,或喝之以兢爭之習,或嘲之以宦睾僧髻,或罵之以狂泉衆飲.據其誣說之重複,自是之愈力,天下之怙,終未有加於此者.如此而謂罪陰者謂勒,則非獨爲護陰之貞祟,無或近於忘師之大故乎? 至以杏下之獨命,謂有無之未可知; 愼勿妄罵倭朔,謂勿發得太快.又怪夫兄之見識言論,非一時之差,其狐惑蠱食,所由來者深矣.近日趙忠顯爲文,呼於衆曰: "石農之獨命,不敢指以爲無; 靜齋之遺書者,不敢指以爲有." 方被輿情之駭痛,公議之討駁矣.兄之不知有無,趙之不敢謂無,雖有疑決之有間,其爲反對乎討以撰造之衆論,則一也.若使不幸而兄書先而趙文後,眞獨命僞遺書之凶說,謂非吾兄不知有無之語有以啟之,人將不信.念之到此,旣爲之凜然."發得太快"者,豈非言不悖理,而詞氣之間,抑揚太過之謂乎? 用虜朔之金壽弘,不但罵之,而教人滅親者,尤翁也.使壽弘而譏尤翁曰"愼勿妄滅人之虜朔",而恕壽弘者謂之"發得太快",則其果成說乎? 言之至此,又爲之駭然.蓋統舉來書首末而反覆之,"夫誰曰不然"一句外,無非右嶺護陰,而駸駸不覺喪義而實誣,此必有狐惑蠱食之本也.盛喻所謂"論黨人,先言其爲首者如何,爭端之所由起如何"及"陰城無所偏主,舜在周羅事機,敬存陰濟其私"者,果非此耶? 弟之姑閣湖嶺是非,但論其誣不誣者,以關門從關先師之有異,可已不可已之不同也.今見兄之非湖是嶺,而并與誣罪而不問,則安敢不略與陳質而俟明者之采棄乎?夫初不參於認議之席,再詰認於清刊之所,三倡義於討陰之役,其義之清乎清,其辭之正乎正者,涵齋金丈是已,實爲湖論之首也.如敬存者,不過因湖黙而不遠復者也,固不可以文望之優劣而易其首席.若爭端之所由起,則未知其何事.然陰城答鄙人書,傷貧之心一也,賂碑之憾二也,兄之所指,想亦不外乎此也.然刊所非生金之藪,靜丈非素號貪饕者,則欲求富而爭刊所,尺童之非可信,更不須說.至於謂敬存爲納賂而得文,則其受賂而作文者,誰也? 旣有唱之者,復有和之者,乃曰: "此文當拔,而但降碑爲碣." 此非以討崔,實所以證成先師難洗之累於百世也.是豈門弟之敢爲乎? 改師文於身後,變之大者,可改而不爲罪者,爲其證於國典也.國典未及目覩,而擅改無難,是豈有一分尊畏之心乎? 此又門弟之所不敢也.賂碑二憾,非獨崔之一人,乃千百人之所同然者,憾者何爲? 其累師輕師也.敬存之失,在於輕許改碣之日,不在欲復碑舊之日也.乃以玄刊,謂陰濟其私而設,湖之黙非出敬存之掌中,玄之刊非敬存之所獨也.完廳之亥角,一省之同門,豈皆陰濟敬存之私者歟? 若使敬存避濟私起爭之嫌,自外無礙之玄刊,同心乞認之嶺役,決非事師以義、改過勿憚之道也,有不爲罪之大者乎? 乃若潛釀爭端之根,元在乎嶺.三千圓家庄之甘言,稿忽踰嶺; 六百圓刊費之義錄,掌財有人.于斯時也,七聖皆迷,萬衆無目,自以爲兵不厭私將家之長算也.孰料其居無何,誑誘出稿之詰,出於田士仁之嶺書,假粧掌財之綻露,金楨鎬代其厄? 惟其始之潛釀爭根,故終之顯峙爭壘,勢所必至爾.完之亥角我印獨無! 印則未有,京豈終無? "分明是黙",據確於吳筆: "荷公(閔泳徽)擔黙",光增於成書.終無奈傀儡之本狀難掩.黙許不得,著於宋秉徽之書,而"分明是黙"不免見破; 閔丈無言,出於趙忠顯之筆,而"荷公擔默"歸於白撰.信乎吾兄所云"石農之心無偏主",果青天之白日也; "舜在之周羅事機",果密網之四匝也.吾兄於此尚復云"爭端之在湖,并不韙其討誣." 則亦復何哉? "我且忘言, 認與黙, 百步五十步之間",此又未然.對認許而曰黙許,自彼之所命名也.吾爲吾事而彼知之不禁,則自我言之,但可謂之黙,固不可謂認與黙同一許也.且申請之有無,彼朔之書否,不可同日而語也.烏得以百步五十步槩之哉? 若其當日瑕累之有無,雖不可知,然弟則以爲襄禮之時,彼之誠慕, 吾之清楚,旣有言足聽聞者.則今日之印稿,即前日之襄奉也; 今日之知事,即前日誠慕之亥角也.宜其與襄奉之無礙,同爲一例,而曾不致疑矣.且壬冬之躳質完廳者,非令伯氏乎? 果有瑕累乎? 則令伯氏當先知之,胡無一言禁止,使勿用於當日,而兄乃追譏於今日乎? 亦一可訝也.吾兄兄弟,世所稱元季方之難爲者.所自勉以爲第一義者,不以盡誠告其兄, 弟必不敢也; 硬行已志, 不聽賢弟盡誠之言,兄亦不爲也.夫誣師與黨金,罪有輕重,使涵丈實有黨金之跡,固不當舍重而察輕,况其從金師友處師未著之日也.絕金, 七月四日行祥之後也.月日斑斑,心跡昭昭,柰之何令伯氏之許心於誣師之陰人爾我相繾綣猛討? 夫絕金之涵齋, 以皓然白首, 不憚爲三十年少鄭雲翰之副將,無乃兄之所以告之者有未盡誠者歟? 所討金某輩中弟亦其一也.雖有自鳴之嫌, 不直不見之地,亦不敢隱黙而自外, 故此一及耳. 그 말을……숨기리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 上)〉에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고 눈동자를 살펴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기겠는가.[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광천(狂泉) 옛날 어느 나라에 광천(狂泉)이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미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남사(南史)》 조충현(趙忠顯) 자는 경서(景恕), 고종 병인년(1866)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양으로 주사를 지냈으며 평간공의 조견의 후손이며 청양에 거주하였다. 김수홍(金壽弘) 1601~1681. 자의 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와 청나라와 명나라 연호 사용 문제로 송시열과 반목하였다. 해각(亥角) 일본인 해각중장(亥角仲藏)으로, 1921년 8월 5일 ~ 1925년 8월 11일까지 2대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일곱……잃었고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의 "양성의 들판에 이르자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至於襄城之野, 七聖皆迷]"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길을 잃어 갈 곳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원방(元方)과 계방(季方) 진원방(陳元方)과 진계방(陳季方)은 형제인데, 둘 다 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원방은 형 노릇 하기가 어렵고, 계방도 동생 노릇 하기에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는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 난형난제(難兄難弟)는 누가 더 낫고 못함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를 이르게 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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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윤승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金允升 甲子 대저 음성(陰城)을 엄호하는 여러 사람들은 "언어와 문자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후 저들은 눈으로 유서(遺書)를 보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강태걸(姜泰杰)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것에 급급하여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의 실제 근거를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진천(鎭川) 경찰서에 선사의 무함을 성토한 사람을 고소하여 창암(蒼巖)과 신헌(慎軒)이 다시 조사를 당하게 되어 재앙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 인가와 그 고소가 음성(陰城)의 저 강태걸이 작성한 고소장 중의 오선생(吳先生)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처음에 오씨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아무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비록 네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다42)고 하겠습니다.함재장(涵齋丈 김낙두金洛斗)이 인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바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히 스스로 자립하여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에게 의지하여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을 위협하고 강제하여 선사를 무함하게 하였습니다.영백씨(令伯氏)가 완청(完廳)에 가서 질문했음에도 침묵한 것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오진영과 성기운(成璣運)이 보루를 만들어 경존(敬存)을 기다린 것으로 또한 그 잘못을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장소를 옮겨 간행하자는 의론을 먼저 제창한 것에 대해. 함재장이 어떻게 잘못을 억지로 지적하며 배척하여 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음성의 죄가 위협의 여부라면 음성의 편지가 그대로 있으니 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경존이 그 문도(門徒)을 시켜 침묵하게 만들어 문제를 일으켰고 사람들이 모두 그가 그랬다는 알고 있기 때문에 호당(湖黨)의 수죄(首罪)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경존이라 말한다. 지금 우리 형이 경존을 엄호하고자 하여 그 사실을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도리어 함재장을 수석이라 하고, 경존은 처음부터 침묵을 도모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형이 비록 이와 같이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믿겠습니까.호남 사람들의 주장은 '인가를 구걸하지 않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한다.[不乞認辨師誣]'는 여섯 글자일 뿐입니다. 함재장이 이 여섯 글자에 약간의 흠결이 있어서 수석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경존이 죄가 없다는 것은 내가 영백씨에게 증명하여 알 것입니다. 비록 이를 면하지 못하여 경존이 스스로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어찌 뒤집어씌워 호당의 수죄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우리 형이 반드시 침묵을 도모한 계획에서 경존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경존을 보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빼낸다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갈 자를 어느 자리에 놓고자 하는 것입니까? 형은 옛 친구에게 돈독히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종장(宗丈)을 생각지 않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리고자 한단 말입니까?함재장이 보여준 그동안의 한결같은 절의는 순수하여 하자가 없었으니, 원래부터 절로 호남 사람의 수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형은 경존의 문망(文望)이 오래도록 전 호남에 드러났다는 것으로 호남의 수석이라고 잘못 인식하였고, 또 침묵을 도모한 것이 경존의 중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함재장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말하였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그를 빠뜨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원래 수석이었던 함재장에 대해 침묵을 도모한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억지로 말하고 그가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진 것을 우려하였으니, 그렇다면 영백씨가 실로 추종하여 침묵을 도모한 뒤에 몸소 완청에 질문하고서 다른 말이 없었던 것은 어찌 더욱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함재장에 대해 간절히 근심하면서 영백씨에 대해서는 무심하단 말입니까?우리 형은 오늘의 전쟁을 천하의 의전(義戰)라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 수석이 된 자는 천추의 영광이라 말할 수 있으니, 반드시 종장으로 그 수석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것은 옛 친구는 박대하고 종장에게는 은혜를 파는 것이 됩니다. 옛 친구가 유독 유감이 없겠습니까?원수의 인간(認刊)을 배척하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전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이란 이름은 사실에 근거하여 정해지는 것이니, 무슨 은혜와 유감이 있겠습니까?선사는 애당초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정재장(靜齋丈)과 경존의 간절한 청을 고달프게 받아서 다만 경존이 스스로 지은 글에 잠시 착함(着銜)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선사에게 또한 무엇을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선사의 글에는 본디 《춘추》가 의리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정재와 경존의 간청을 괴롭게 받아서 허락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춘추》의리에 따르지 않고 다만 자손과 문인의 안면과 인정을 보고서 허락한 것이 될 뿐이니, 흡사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겠습니까? 위태롭고 위태롭습니다. 형의 말은 선사를 핍박하여 손상한다고 하겠습니다.영남 사람이 설령 이런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만약 경존이 중간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면 일이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단지 인간(認刊)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서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 통렬히 문죄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선사를 존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음성의 강태걸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일이 장차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깊이 유감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절절하게 인가를 받을 때를 살펴서 비루하게 그 실정을 슬피 호소하여 곤욕스럽게 경우 허락을 받았습니다.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뒤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상황을 말했다면 함재 등 여러 어른의 맑고도 바른 의리로 어찌 기꺼이 침묵했겠습니까? 또 당시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실상이 있었다면 영백씨가 어찌 가리고 숨겨서 말하지 않았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이 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날에 나오지 않았다가 마침내 오늘 잘못을 찾은 이후에 있었으니, 또한 괴이합니다.침묵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고 감히 선사의 장례 일로 비겨 의론을 하였는데, 이것은 하자가 없는 일이 또한 하자가 있는 일이 된 것이니 옳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한 '말재주 있는 사람[佞人]'43)이 바로 이런 부류인데, 우리 형이 마침내 이런 것을 배웠단 말입니까?음성 사람들은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방도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미 김경부(金敬父)를 시켜 완산을 한번 가라고 한 것과 영백씨가 당일에 말하지 않았던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말 등에 대해 지금 우리 형은 잘못이 있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잘못이 있는 것을 잘못이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고, 일찍이 말재주를 배운 자도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습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배척하지 않으십니까? 【후에 음성 사람이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선사의 성대한 덕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기 때문에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도가 있으니, 장례를 지낼 때에 잘못이 없었던 것과 같다. ……"고 하였다. 〇정묘년(1927) 6월에 추가로 기록한다.】함재장은 선사의 대상(大喪) 이후에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저의 편지를 우선 놔두고 영백씨가 급히 음성에 편지를 보냈던 망령된 것이었습니까? 오히려 다시 함재장이 김용승과 절교했는지 여부를 모르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함재장도 믿을 만 못하고 저도 믿을 만 못하고 영백씨도 믿을 만하지 못합니까? 夫護陰諸人之言,不曰"以言語文字罪人, 非所以原心"乎? 今焉以後,彼目見遺書,而曾不爲意,汲汲乎姜認之刊,結成認意、認教之實據,如此而尚可以原心乎? 訴討誣人於鎭川署,蒼巖、愼軒再當調査 禍機不測,如此而尚可以原心乎? 如曰其認其訴,非陰伊姜告文中吳先生諾之,何以區處始之受吳諾,終之承誰諾? 雖曰非汝, 旣作爾歌.涵齋丈之不欲認, 可謂至清至正.然不能自立別爲一論, 反倚敬存而脅勒石農以誣師.令伯氏之探質完廳而不言黙之疵累也,故雖以吳、成之設壘以待敬存者,亦不得執其疵累,而先倡移刊之議,涵丈何得以強摘疵累而斥之不用哉? 陰罪之脅勒與否,自有陰書在,吾不須言.敬存使其門徒圖黙以生梗,人莫不知其然,故語湖黨之首罪者,必以敬存爲言.今吾兄欲護敬存而不正言其實, 反以涵齋丈爲首席,以敬存爲初不知圖黙者.兄雖如此言之,人其信諸?湖人主義,"不乞認辨師誣"六字是已.涵丈於此六字,有些子欠點,而不得爲首席乎? 敬存之無罪,吾證於令伯氏而知之,雖或不免是,敬存自罪,烏得以冒作湖黨之首罪乎?吾兄必欲拔敬存於圖黙之計者,以其欲護敬存也.然護敬存而拔之,則代敬存而入者,欲置之何地? 兄可謂篤厚於故舊,然獨不念宗丈而欲陷於衆惡之地哉?涵丈之前後一節,粹然無瑕,元來自在之湖人首席也.蓋兄以敬存之文望久著全湖 錯認爲湖人首席,而又以圖黙爲敬存之重罪,故謂涵丈代敬存而入,而謂陷之於衆惡之地.夫以元來首席之涵丈,強謂代圖黙之敬存而入,而憂其陷於衆惡之地,然則令伯氏之實從圖黙之後而躳質於完廳而無異辭者,豈不尤陷於衆惡之地乎? 何其憂切於涵丈,而恝然於令伯氏也?吾兄以爲今日之戰,天下之義戰歟? 則其爲首席者,可謂千秋之榮光,必欲以宗丈易其首席,則是薄於故舊 而市恩於宗丈也,其爲故舊者獨無憾乎?斥讐認辨師誣,非義戰乎? 首席之名, 依實而定, 恩憾何有?先師則初不知其如此,而苦被靜丈與敬存之懇請,只假銜於敬存自撰之文也.先師乎亦何傷?先師秉筆,自有《春秋》.今曰苦被靜敬之懇而許之,夫不由自家《春秋》,只看子孫門人顏情而許之者,無乃疑若知其事者乎? 殆而殆而.兄言之逼傷先師乎?嶺人設有此失,若無敬存之中道生梗,則事不至此極.只恨認刊之不順就而痛罪生梗,亦異乎吾尊師也.今則陰之姜認刊將成,願勿深恨也.切切然瞷其納約之時,卑卑焉哀鳴其情,戛戛乎僅得其許.令伯氏探質完廳之後,若言切切卑卑戛戛之狀,如涵齋諸丈清正之義,豈肯用其黙? 且當時若有切切卑卑戛戛之實,令伯氏豈有掩諱不言之理? 此言不出於令伯氏探質之日,乃在今日覔疵之後,亦可異也.欲言黙之無累,敢將襄奉以擬議,是無瑕之事亦爲有瑕之事也, 其可乎? 夫子所謂侫人即此類, 而吾兄乃學此耶?陰人之謂有脫絆之道,故已令金敬父完山一行,令伯氏之所不言卑卑戛戛等說於當日者,今兄以爲有瑕.然則早已把有瑕作無瑕者,陰人與令伯氏也; 早已學侫人者,陰人與令伯氏也.何不以此而先斥之也?【後見陰人答徐某書曰: "先師盛德,人所共尊,故有脫絆之道,如葵時無累云云."○丁卯六月追識.】涵齋丈自祥以後,未知其絕金與否.鄙書姑置,令伯氏之馳書陰城,亦是妄歟? 尚復曰未知涵丈絕金與否乎? 涵丈不足信,此漢不足信,令伯氏亦不足信歟? 비록……지었다 《시경(詩經)》 〈상유(桑柔)〉의 "비록 내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도다.[雖曰匪予, 旣作爾歌]"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인데, 비록 스스로 잘못을 꾸며대며 말하지만 이미 사실을 밝혀 말하였다는 뜻이다. 말재주 있는 사람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자로가 자를 비읍의 수령을 삼자,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 하였다. 이에 자로가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하필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그러므로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였다.[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賊夫人之子. 子路曰有民人焉, 有社禝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是故惡夫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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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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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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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윤승에게 답함 정묘년(1927) 與金允升 丁卯 앞서 존형의 편지에 음성 사람이 선사를 무함한 죄를 잘못 뒤집어썼다고 여기고 안타까워하며 공개적인 성토가 억압이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안건입니다. 대체로 이른바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명하였다."는 것이 무함한 말임은 원래 명백하였는데, 다만 그가 "단지 지속을 논하였을 뿐이고 인가 여부를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但論遅速, 不及認否]",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踈忽]" 등의 말로 장황하게 덮고 꾸며냈기 때문에 비록 존형의 밝은 식견으로도 현혹됨을 면치 못하고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지난겨울에 또 그가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보았는데, 첫머리에 "바다를 건너갈 수 없었다."는 것으로 자신의 명백한 뜻을 밝히고, 끝에서는 "사실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를 따랐다.[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고 하였습니다. '불언지교' 네 글자는 비록 음성을 엄호하는데 공교한 자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여도 인가한 뜻으로 보지 않기가 어려울 듯하며, '기실(其實)'이라고 하고 '원종(原從)'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부족하거나 소홀한 뜻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음성의 입으로 방자하게 변명하더라도 아마도 더는 장황하게 꾸밀 수는 없을 것입니다."갑은 말은 저와 같고 을은 이와 같으니, 함께 한 길로 돌아감은 어느 때나 있을까.[甲言如彼乙如斯, 同歸一轍在何時?]" 이는 왕년의 존형이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구름 흩어지고 산이 솟아나야 진면목이 드러나니, 갑과 을이 같이 합치는 것 바로 이때일세.[雲歸山立呈眞面, 甲乙同符在此時]" 이는 또한 저의 화답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헤아려 보건대, 진면목이 들러나서 갑과 을이 같이 합치는 것은 이제 그 때를 정해야 합니다. 존형의 견해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답장에서는 확실하게 의심이 제거되어, 더는 번거롭게 피차간에 주고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방자하게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은 또한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듣기는 하였지만 또한 혹 그가 죄를 잘못 뒤집어썼다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지난날의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한 것과 같습니까? 이것은 수정본(手定本)이 본디 있으니 많이 따질 것도 없습니다. 다만 왕년에 영백씨(令伯氏)가 초록하여 보관한 회재(晦齋), 퇴계(退溪), 율곡(栗谷) 세 선생의 설을 가지고 의심난 것을 질문하고 진본(晉本)을 대조해 보면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前承尊喻,以陰人誤蒙誣師之罪見憫,而謂公討爲抑勒,至今爲未決之案矣.蓋其所謂杏下獨命之爲誣說,原自明白,但被渠以"但論遲速,不及認否"、"語欠區別,命辭疎忽"等說,張皇掩飾.故雖以尊見之明,不免眩惑,而未及勘破也.昨冬又得見渠答徐某書,首以"越海不得"明已清楚之意,終之曰: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教." "不言之教"四字,雖使工於護陰者置辨,恐難不以認意看,而其曰"其實"、曰"原從",又無半點欠缺、疎忽之意.到此之極,雖以陰口肆辯,似不能復飾張皇矣."甲言如彼乙如斯,同歸一轍在何時?" 非昔年盛作乎? "雲歸山立呈眞面,甲乙同符在此時." 又非拙和乎? 以弟料之. 眞面呈露,甲乙同符,今定其時,未知尊見云何? 幸以回教仰想,脫然祛疑,不復煩彼此往復也.至於恣改師稿,亦已聞知否? 抑雖聞之,而亦或憫其誤蒙,如前日認誣耶? 此則手定本自在,不須多辨.但將曾年令伯氏鈔藏晦退栗三先生說質疑,對照晉本,則可推其餘矣.并惟諒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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