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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비의 생신날에 느낀 바 있어서 先妣生日有感 늦가을 구월 십사일을 맞으니 晩秋値小望홀연 어머님 생각211)에 슬프구나 忽忽悲蓼蓼너에게 묻노니 느낀 바 무엇인가 問爾何所感우리 어머니 이 날에 태어나셨네 我毋降此日정사년212)에 나셨으니 그로부터 上距丁巳歲사년에 칠십을 더한 세월이구나 四齡加七十가령 올해에 살아계셨어도 如令在今歲오히려 크게 늙은 나이213) 아니네 尙不至大耋비록 현달한 영예는 받들지 못해도 縱無奉顯榮기쁨을 드리기를 기약했었다네 庶期致歡悅자식들은 밭 갈면서 글을 읽고 諸子兼耕讀손자와 증손은 난옥214)으로 자라네 孫曾長蘭玉애통하다 풍수215)의 변고여 痛哉風樹變어느덧 십오년이 흘렀구나 遽然十五曆음성과 용모는 어제 새벽 같은데 音容如昨晨이 생에 어찌 다시 뵈리오 此生寧復覿불효의 죄를 추궁하자면 追究不孝罪낱낱이 세는데 머리카락 다 뽑아야하리 枚數可擢髮풍흉간에 좋은 밥과 고기를 못 올렸고 豊歉闕梁肉동하간에 서늘하고 따듯하게 못 해드렸네216) 冬夏違涼燠일념으로 부인의 도리를 행하시고 一念執婦道조심하는 마음으로217) 백발 되셨네 惴惴到頭白이 때문에 육순을 사시면서 所以生六旬잠시도 쉬실 때가 없으셨지 曾無片時息끝내 하늘로 돌아가신 날은 竟至歸天日시어머니보다 겨우 삼일 뒤였네 後姑僅三夕사람들은 효성의 감응이라 하나 人言孝感致나의 한스럼움은 끝이 없다네 我恨罔有極서쪽으로 연곡의 묘도 바라보나 西望蓮谷阡무덤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네 九原不可作눈물이 가을비와 함께 섞여서 淚和秋天雨종일토록 한없이 떨어진다오 盡日長滴滴 晩秋値小望, 忽忽悲蓼蓼.問爾何所感, 我毋降此日.上距丁巳歲, 四齡加七十.如令在今歲, 尙不至大耋.縱無奉顯榮, 庶期致歡悅.諸子兼耕讀, 孫曾長蘭玉.痛哉風樹變, 遽然十五曆.音容如昨晨, 此生寧復覿.追究不孝罪, 枚數可擢髮.豊歉闕梁肉, 冬夏違涼燠.一念執婦道, 惴惴到頭白.所以生六旬, 曾無片時息.竟至歸天日, 後姑僅三夕.人言孝感致, 我恨罔有極.西望蓮谷阡, 九原不可作.淚和秋天雨, 盡日長滴滴. 어머님 생각 원문의 '육륙(蓼蓼)'은 《시경》 〈육아(蓼莪)〉의 시를 가리킨 것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그 시에 "길고 긴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저 나쁜 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하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정사년 1857년(철종8)이다. 크게 늙은 나이 원문의 '대질(大耋)'은 연로함을 지칭하는데, 여기서는 80세를 가리킨다. 난옥(蘭玉) 귀한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말한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비유하자면 지란 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謝玄》 풍수(風樹)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서늘하고……해드렸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모든 자식이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조심하는 마음으로 원문의 '최최(惴惴)'로, 《시경》 〈소완(小宛)〉의 "두려워하여 조심함은 깊은 골짜기 굽어보듯, 전전긍긍함은 얇은 얼음 밟는 듯.[惴惴小心, 如臨于谷, 戰戰兢兢, 如履薄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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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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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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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주자의 생일218) 朱子生日 사문을 없애지 않아219) 운이 다시 새로워지니 不喪斯文運復新회옹이 태어나신220) 게 마침 이 날이었네 晦翁岳降適玆辰공자와 맹자221) 이후 둘도 없는 선비이고 尼輿以後無雙士하늘과 땅 사이에 운수가 매여있는 몸이네 天地之間有數身해가 밝고 구름 트이 듯 큰 도를 알았고 日朗雲開知道大털끝 나누고 실도 쪼개 듯 참 공부 보았네 毫分縷析見工眞천년만에 탄신일222)이 거듭 돌아왔으니 重回千載懸弧日후인에게 남긴 풍성한 공을 감히 잊으랴 敢忘豊功在後人 不喪斯文運復新, 晦翁岳降適玆辰.尼輿以後無雙士, 天地之間有數身.日朗雲開知道大, 毫分縷析見工眞.重回千載懸弧日, 敢忘豊功在後人. 주자의 생일 주희(朱熹)는 중국 남송 고종 건염 4년(1130) 경술년 9월 갑인일(음력 15일)에 태어났다. 사문을 없애지 않아 '사문(斯文)'은 유학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광(匡) 땅에서 곤궁에 처했을 때,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 바에야,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회옹이 태어나신 '회옹(晦翁)'은 주자의 호가 회암(晦菴)이므로 높여 칭한 것이다. '악강(岳降)'은 '유악강신(維岳降神)'의 준말로, 산의 신령함을 받고 태어났다 뜻이다. 《시경》 〈숭고(嵩高)〉에 "태산이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후를 내셨도다.[維岳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 원문의 '니여(尼輿)'는 공자의 자인 중니(仲尼)와 맹자의 자인 자여(子輿)를 합칭한 것이다. 탄신일 원문의 '현호(懸弧)'는 남자의 생일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內則)〉에 "자식을 낳음에 남자일 경우는 문 왼쪽에 뽕나무 활을 걸고, 여자일 경우는 문 오른쪽에 수건을 건다.[子生, 男子設弧於門左, 女子設帨於門右.]"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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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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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5년 연재 송병선(宋秉璿)의 두 번째 상소 사본 고문서-소차계장류-상소 宋秉璿 1905 宋秉璿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5년 11월에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을사조약을 반대하고 역적을 토죄할 것을 청하는 두 번째 상소의 사본 1905년 11월에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을사조약을 반대하고 역적을 토죄할 것을 청하는 두 번째 상소이다. 『淵齋先生文集』 권4, 疏, 請討凶逆疏[再疏] 11월 20일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비답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록』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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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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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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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만휴당463)공의 순효비를 석동464)으로 옮겨 세울 때 차운한 시 晩休堂公純孝碑移建席洞時次韻 큰 절개를 지닌 만휴 어르신 大節晩休翁많은 사람이 외어서 전하네 誦傳萬口公지극한 정성은 왕맹465)의 자취와 같고 至誠王孟蹟곧은 도는 급주466)의 풍도와 같았네 直道汲朱風억울함을 당한 사정을 차마 말하리오 忍說遭冤屈효성과 충성을 더욱 표창하였네 彌彰襃孝忠정려문과 비석을 이곳으로 옮기니 旌碑移此地관리의 책임을 종중에서 져야 하리 課責在宗中 大節晩休翁, 誦傳萬口公.至誠王孟蹟, 直道汲朱風.忍說遭冤屈, 彌彰襃孝忠.旌碑移此地, 課責在宗中. 만휴당(晩休堂) 김억일(金億鎰, 1544~1604)의 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중임(重任)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석동(席洞) 전북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석동을 말한다. 왕맹(王孟) 효자로 유명한 삼국 시대 진(晉)나라 왕상(王祥)과 오나라 맹종(孟宗)을 가리킨다. 왕상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고,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 《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孫晧》 《晉書 王祥列傳》 급주(汲朱) 급암과 주운(朱雲)을 가리킨다. 급암은 전한 무제 때의 간신(諫臣)으로 직간을 했으나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회양 태수로 있다가 죽었다. 《史記 汲黯列傳》 주운은 전한 성제 때 사람으로 간사한 자인 장우(張禹)를 처형하기를 황제에게 청하자 황제가 노하여 주운을 끌어내게 하였는데 그가 어전의 난간을 잡고 버티니 난간이 부러졌다. 《漢書 朱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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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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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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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후태 군에게 주다 贈徐君厚泰 내가 서씨의 아들을 사랑하는데 我愛徐氏子맑고 온화해 정말 좋아할 만하니 淸溫眞可欲필력은 용과 뱀이 움직이는 듯하고 筆力龍蛇動문장의 물결은 강물을 쏟은 듯하네 文瀾江河沃또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을 두고 復志爲己學나의 창동 서당을 찾아왔으나 訪我滄東屋돌아보건대 난 적임자가 아니었기에 顧余非其人기꺼이 빈 골짜기로 달아났었지 喜在逃空谷그대는 활 쏘는 법469)을 아는가 君知射法否온 마음으로 정곡을 가리켜야 하니470) 一心指正鵠누구나 하면 또한 이처럼 되거늘471) 有爲亦若是어찌 순임금과 문왕만 그렇겠는가 舜文彼何獨밝고 강함은 오교472)를 다스리며 明强總五敎성의와 격물은 팔조목의 요건인데473) 誠格要八目어떤 것으로 철두철미할 수 있는가 何物徹頭尾또 하나의 경이 있으면 충분하리라 又有一敬足세상에는 끝맺음을 잘한 이 드문데474) 世人鮮克終시장에서 매 맞는475) 치욕 왜 생각지 않는가 盍思撻476)市辱도의 명맥이 철류477)처럼 위태로우니 道脈危綴旒오싹하여 몸에 소름이 돋는다네 凜然身生粟이처럼 인재가 부족할 때를 만나 當此乏材日선비는 절로 금과 옥이 될 수 있으니 士可自金玉힘써 아홉 길 산을 이루려478) 하면 勉成九仞山이전의 공적 쌓은 것을 버리지 말게 毋棄前功築통달하면 조양에서 우는 봉황479) 되고 達爲朝陽鳳곤궁하면 흉년에 곡식이 되리라 窮作荒年穀서재 창문에 가을이 또 돌아왔으니 書牕秋又至그댈 위해 깊이 마음으로 부탁하네 爲君深心屬 我愛徐氏子, 淸溫眞可欲.筆力龍蛇動, 文瀾江河沃.復志爲己學, 訪我滄東屋.顧余非其人, 喜在逃空谷.君知射法否? 一心指正鵠.有爲亦若是, 舜、文彼何獨?明强總五敎, 誠格要八目.何物徹頭尾? 又有一敬足.世人鮮克終, 盍思撻3)市辱?道脈危綴旒, 凜然身生粟.當此乏材日, 士可自金玉.勉成九仞山, 毋棄前功築.達爲朝陽鳳, 窮作荒年穀.書牕秋又至, 爲君深心屬. 활 쏘는 법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인한 자는 활쏘기 하는 것과 같으니, 활을 쏘는 자는 자신을 바로잡은 뒤에야 발사하여 발사한 것이 맞지 않더라도 자신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신에게서 찾을 뿐이다.〔仁者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정곡(正鵠)을 가리켜야 하니 《중용장구》 제14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활쏘기는 군자다운 데가 있으니, 정곡을 맞히지 못했거든 자기 몸에 반성하는 것이니라.[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라고 하였다. 누구나……되거늘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 임금과 같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말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오교(五敎)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의하면, 아버지는 의롭고[父義], 어머니는 자애롭고[母慈], 형은 우애하고[兄友], 아우는 공손하고[弟恭], 자식은 효도하는[子孝] 다섯 가지를 말한다. 성의(誠意)와……요건인데 《대학》 삼강령(三綱領)의 구체적 덕목을 말한 것이다. 팔조목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을 이른다. 끝맺음을……드문데 《시경》의 〈대아 탕(蕩)〉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命)이 믿을 수 없음은 처음에는 선(善)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선으로 마치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는 말이 나온다. 시장에서 매 맞는 원문의 '달시(撻市)'는 사람이 많은 저잣거리에서 매를 맞는 것으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뜻한다. 이윤이 "내가 나의 군주를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되게 하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부끄럽기가 마치 저잣거리에 매를 맞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書經 說命下》 撻 底本에는 "橽". 문맥을 살펴 수정. 철류(綴旒) 유(旒)는 깃술이고 철(綴)은 매단다는 말이다. 곧 깃술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임금이 권위를 잃고 신하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국가의 위태로움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아홉……이루었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가 되어,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온다. 조양(朝陽)에서 우는 봉황 인품이 출중하고 정직하며 감히 간언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 자라네 저 산의 동쪽에서〔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했다. 撻 底本에는 "橽". 문맥을 살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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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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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추노문서(推奴文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문중의 비적(婢籍)에서 벗어난 여자종에 대해 하소연하면서 찾아서 추봉하고 추급하라는 추노문서 문중에 탈비(脫婢)한 여비에 대하여 하소연하면서 찾아서 추봉(推捧)하고 추급(推給)하라는 문서이다. 8대조(八代祖)부터 조고(祖考)까지 투매(偸賣)의 폐단이 있어 남은 것은 다만 11두락(斗落)뿐이어서 수십 년 지내던 봉향(奉享)도 못할 정도로 염려가 되고 있다면서 그동안의 쇠락하게 된 과정을 기술하였다. 가뭄으로 산지기의 결역(結役)도 못주어 결국 다른 마을로 가버릴 때에, 선산 묘지의 결복(結卜)에 선공후사의 의리를 발휘하여 문중의 전답을 헐값에 팔아 납부하였고, 여자종들이 환퇴하였을 경우에 시천(詩川)‧가천(可川)‧목사동(木寺洞)은 각각 50냥씩 할당하였다. 그런데 제동(齊洞)의 이학삼(李學三)이 이를 몰래 막고 희롱하는 것을 조종하였다. 게다가 가세가 탕패(蕩敗)하는 것을 문중에서 억눌렀는데 여자종 네 명의 모녀가 이백 냥을 2명의 여자종에게 부탁하여 보성(寶城)의 땅을 차례로 빌려서 비적(婢籍)에서 빼려는 마음으로 투매를 하였다. 목사동(木寺洞) 이인순(李仁淳) 집에서는 아이 때부터 이십여 년 된 문노가 4, 5대 유래한 노비이건만 자신의 호적의 끝자락과 대명률(大明律) 전답(田畓) 문기(文記)에 함께 기록된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어서 찾지 못하니 억울하다고 하였다. 이에 이학삼 쪽의 100냥과 이자 1백 40냥과 이인순 쪽의 매비 200냥과 이자 1천 8백 냥을 일일이 추급(推給)하여 주고 잡아서 엄히 징치하며 본전의 이자를 일일이 추봉하여 공연히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도록 할 일이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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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어느덧 흐른 세월 居然 어느덧 사십 칠의 나이에 맞는 봄 居然四十七年春단지 깨닫나니 성성한 백발 새롭네 但覺星星白髮新창동리244)에 견문이 고루한 몸인데 孤陋見聞滄洞里구문245)의 이웃에 명성만 허황되네 浮虛聲望臼門隣청조의 선비 건학246)을 몹시 미워하고 絶憎乾學淸朝士진대의 백성 연명247)을 몰래 사모하네 竊慕淵明晉代民창가의 눈이 분분해 울타리 국화 시드는데 牕雪紛紛籬菊老근심스레 무슨 일로 맑은 새벽에 앉아있나 悄然何事坐淸晨 居然四十七年春, 但覺星星白髮新.孤陋見聞滄洞里, 浮虛聲望臼門隣.絶憎乾學淸朝士, 竊慕淵明晉代民.牕雪紛紛籬菊老, 悄然何事坐淸晨. 창동리(滄洞里) 전북 정읍시 이평면(梨坪面) 창동리(滄東里)로 김택술의 고향이다. 구문(臼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를 가리킨다. 김택술의 스승인 전우의 호가 구산(臼山)이다. 건학 서건학(徐乾學)으로 청(淸)나라 강희제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벼슬이 형부 상서(刑部尚書)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여 경학은 물론 사학(史學), 여지(輿地), 예제(禮制) 등에 정통했으나 자주 뇌물을 받고 사익을 추구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학문에 있어서는 정주학(程朱學)을 존숭하였다. 연명 도연명(陶淵明)으로 진(晉)나라 은사(隱士)이다. 동진(東晉)이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작품에 연호를 쓸 때는 여전히 '영화'를 사용하여 진나라에 대한 충정을 드러냈다.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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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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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겸재 어른 형재 를 애도하다 挽謙齋金丈【亨載】 옛날 공과 나의 부친은 昔公與吾親교분이 얼마나 친밀했던가 交契一何密형제처럼 모친을 찾아뵙고249) 拜母若弟兄교칠250)처럼 마음을 허여했네 許心若膠漆내가 부친을 잃은251) 뒤부터는 小子自失怙공을 사모함이 배나 간절했지 慕公一倍切때로 와서 책상 아래에 절하고 時來拜床下정성스런 가르침 자세히 받들었네 款誨承纖悉공 또한 우리 집을 들르셨으니 公亦過弊廬존망의 이별은 생각지도 않았네 不以存亡別내 부친보다 다섯 살 많았으나 五歲長吾親건강하여 질환도 없으셨다네 健康無諐疾내 부친을 어디서 보려나 吾親何處見생각하니 마음이 꺾이는구나 念之寸心折칠십 살은 세상에 드문 바라 七十世所稀부친의 벗들 차례로 졸하셨네 先友次第沒공이 홀로 장수를 하여 公獨躋遐齡우러르면 영광전252)처럼 우뚝했지 仰若靈光屹오호라 공 또한 떠나시다니 嗚呼公且逝우리 마을이 빈 집 같구나 吾鄕若虛室공이 옛날 내 부친을 곡할 때 公昔哭吾親시신에 다가가 몹시 슬퍼했네 臨尸以悲絶지금 내가 선친 기일을 만난 터라 今我値先忌빈을 한 후일에야 비로소 달려갔네 始赴殯後日저승과 이승이 어제 오늘 사이라 幽明今昔間굽어보고 쳐다보며 마음 비통하네 俯仰心慟怛세상의 도가 날로 더럽고 떨어져 世道日汚下고을의 순박한 풍속도 사라졌구나 鄕黨淳風滅공의 효우의 행실을 생각하니 思公孝友行가정은 항상 화락하고 기뻐했지 家庭常和悅종족들은 그 규범을 따랐으니 宗族遵規範일자를 그은 듯이 분명했었네 較然如畵一일을 논할 땐 이치가 상세했고 論事理詳明남을 위할 땐 계모가 충실했네 爲人謀忠實이 덕을 다시 볼 수 없으니 此德不復覩시절을 아파하며 거듭 근심하네 傷時重惙惙다만 구원의 넋 위로할 것 있으니 但有慰九原후손이 계승할 수 있어서네253) 箕裘能繼述후중한 언동은 사람들이 높이고 言動推厚重문장은 더욱 간결하다네 藻翰更簡潔서로 돕고 권면하길254) 기약하니 庶期相輔責세교를 길이 잃지 않으리라 世交永不失 昔公與吾親, 交契一何密.拜母若弟兄, 許心若膠漆.小子自失怙, 慕公一倍切.時來拜床下, 款誨承纖悉.公亦過弊廬, 不以存亡別.五歲長吾親, 健康無諐疾.吾親何處見, 念之寸心折.七十世所稀, 先友次第沒.公獨躋遐齡, 仰若靈光屹.嗚呼公且逝, 吾鄕若虛室.公昔哭吾親, 臨尸以悲絶.今我値先忌, 始赴殯後日.幽明今昔間, 俯仰心慟怛.世道日汚下, 鄕黨淳風滅.思公孝友行, 家庭常和悅.宗族遵規範, 較然如畵一.論事理詳明, 爲人謀忠實.此德不復覩, 傷時重惙惙.但有慰九原, 箕裘能繼述.言動推厚重, 藻翰更簡潔.庶期相輔責, 世交永不失. 모친을 찾아뵙고[拜母] 가까운 벗 사이를 비유한 것이다. 한(漢)나라 범식(范式)과 장소(張劭)가 친하게 지내다가 각자 향리로 돌아갈 때, 2년 뒤에 범식이 장소의 모친을 찾아가 뵙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마침 그날이 돌아오자 과연 범식이 찾아와서 마루에 올라 모친에게 절을 한[升堂拜母] 뒤에 즐겁게 술을 마시고 떠나갔던 고사를 말한다.에게 인사를 올리고 즐겁게 회포를 푼 뒤 이별했다 한다. 《後漢書 獨行列傳 范式》 교칠(膠漆) 아교와 옻칠인데, 아교로 붙이면 떨어지지 않고 옻으로 칠을 하면 역시 떨어지지 않으므로 굳은 우정을 비유한다. 후한(後漢)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가 돈독한 우정을 발휘하자, 사람들이 "교칠이 굳다고 하지만, 진중과 뇌의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칭찬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獨行列傳 雷義》 부친을 잃은 원문의 '실호(失怙)'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까.[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였다. 본래 호(怙)와 시(恃)는 모두 '믿는다'는 뜻이나, 후세에서 이 시구를 근거하여 부친을 여읜 것을 실호(失怙), 모친을 잃은 것을 실시(失恃)라고 한다. 영광전 원문의 '영광(靈光)'은 영광전(靈光殿)으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나 인물을 상징한다. 영광전은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산동성 곡부(曲阜)에 건립했는데,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가 지은 〈노영광전부서(魯靈光殿賦序)〉에 "서경(西京)의 미앙(未央)과 건장(建章)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靈光巋然獨存]"라고 하였다. 후손히……있어서네 훌륭한 후손이 돌아가신 공을 이으리라는 뜻이다. 원문의 '기구(箕裘)'는 키와 갖옷으로 후손이 선대의 세업(世業)을 잇는 것인데 여기서는 후손을 비유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야공(冶工)의 자식은 반드시 배워서 갖옷을 만들 줄 알고, 훌륭한 궁인(弓人)의 자식은 반드시 배워서 키를 만들 줄 안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하였다. 서로 돕고 권면하길[相輔責] 두 집안의 자제들이 벗으로서 '보인(輔仁)'과 '책선(責善)'을 하겠다는 것이다. 《논어》〈안연(顔淵)〉에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하였고,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선행을 권하는 것은 벗의 도리이다.[責善, 朋友之道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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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백 규삼 을 애도하다 挽崔明伯【圭三】 아 군은 속된 무리가 아닌지라 嗟君非俗輩오늘에 살면서 옛날에 뜻을 두고 生今志古昔상심하여 추격258)을 미워하고 傷心憎鶖鴂분발하여 봉액259)을 따르네 挺身追縫腋나는 실로 오랜 벗260)이었으니 而我實久要맺은 교분은 금석처럼 견고했네 結交堅金石선조를 위해 얼마나 성근졌던가 爲先何誠勤땅을 처분하여 묘역을 구할 때 斥土求塋域내가 운수에 매였다고 말하면 我謂係數運그대는 마음과 힘에 달렸다 했지 君言在心力비록 중도에는 조금 지나치다 해도 縱云些過中효도 생각에는 원래 끝이 없다네 孝思元靡極어찌 생각했으리 천 척의 솔이 豈意千尺松바람도 없는데 하루 저녁에 꺾일 줄 不風摧一夕꿈인가 참인가 도무지 가릴 수 없어 夢眞俱不辨푸른 하늘 쳐다보며 넋을 잃은 듯하네 仰蒼如失魄더는 무슨 말을 다시 하리오 尙何復爲言중당261)께서 백발로 계신다오 重堂垂髮白귀신이 참으로 어질지 못하고 鬼神眞不仁천리도 진실로 예측키 어렵네 天理誠難測보시라 뜰아래 빼어난 자제들을 請看庭下秀푸르고 푸른 네 포기 난초262) 자라네 靑靑四蘭植그 전형263)이 여기에 남아 있으니 典型留在玆집안의 명성은 응당 적막하지 않으리 家聲應不寂그대 돌아간들 또한 무슨 유감 있겠나 君歸亦何憾이것이 황천의 넋을 족히 위로하기를 此足慰窀穸 嗟君非俗輩, 生今志古昔.傷心憎鶖鴂, 挺身追縫腋.而我實久要, 結交堅金石.爲先何誠勤, 斥土求塋域.我謂係數運, 君言在心力.縱云些過中, 孝思元靡極.豈意千尺松, 不風摧一夕.夢眞俱不辨, 仰蒼如失魄.尙何復爲言, 重堂垂髮白.鬼神眞不仁, 天理誠難測.請看庭下秀, 靑靑四蘭植.典型留在玆, 家聲應不寂.君歸亦何憾, 此足慰窀穸. 추격(鶖鴂) '추(鶖)'와 '격(鴂)'은 모두 새인데 악인이나 이단의 무리를 비유한 것이다. 《시경》 〈백화(白華)〉에 "무수리는 어량에 있는데, 학은 숲속에 있도다.[有鶖在梁, 有鶴在林.]"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무수리와 학은 모두 물고기를 먹이로 하나, 학은 무수리에 비하면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다. 지금 무수리는 어량에 있고 학은 숲속에 있으니, 무수리는 배부르고 학은 굶주린 것이다." 하였다. '격(鴂)'은 때까치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지금 남만의 때까치 소리를 하는 사람의 말이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자의 주에 "소리가 나쁜 새이다."라고 하여 이단의 무리를 비유하였다. 봉액(縫掖) 소매가 넓은 옷으로 공자가 봉액한 옷을 입었다 하여 유복(儒服)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학을 비유한 것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입은 복장이 유자의 복장이냐고 공자에게 묻자 "나는 노나라에 살 때에는 소매가 너른 옷을 입었습니다.[丘少居魯, 衣逢掖之衣.]"라고 하였다. 《禮記‧儒行》 오랜 벗 원문의 '구요(久要)'는 오래된 약속을 말하는데 곧 오랜 친구의 뜻으로 쓰였다.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이익 앞에서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며, 오래된 약속일지라도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라고 하였다. 주자의 주에 "구요(舊要)는 오래된 약속이다.[久要, 舊約也.]" 하였다. 《論語 憲問》 중당(重堂) 조부모를 가리킨다. 네 포기 난초 네 명의 자손을 비유한 것이다. 난초는 귀한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말한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섬돌 앞 뜰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전형(典型) 자손이나 제자의 모양과 행동이 그 조상이나 스승을 닮은 틀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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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을 보내며 送士狷 비를 빚는 봄 하늘에 석양이 가까워지니 春天釀雨近斜陽객 보낸 강 정자엔 뜻이 더욱 유장하네 送客江亭意更長노택의 창고는 어디에서 얻을까 魯宅囷倉何處得수양산 고사리만 공연히 향기롭네 首山薇蕨亦徒香전신은 원래 당시를 슬퍼했던 의론이니286) 錢神元是傷時論명교가 따라서 낙지의 고향임을 알리라287) 名敎從知樂地鄕제 힘으로 먹고산 고풍은 서자의 일인데288) 食力高風徐子事그대를 위해 만금의 방술로 가져다 주노라 爲君持贈萬金方 春天釀雨近斜陽, 送客江亭意更長.魯宅囷倉何處得, 首山薇蕨亦徒香.錢神元是傷時論, 名敎從知樂地鄕.食力高風徐子事, 爲君持贈萬金方. 전신은……의론이니 진(晉)나라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당시 금전만능의 세태를 풍자한 것을 말한다. '전신(錢神)'은 금전을 비유한 것이다. 〈전신론〉에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더구나 사람에 있어서랴.[有錢可使鬼, 而況于人乎.]"라고 하였다. 명교가……알리라 '명교(名敎)'는 유교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왕징(王澄), 호무보지(胡毋輔之) 등은 모두 제멋대로 하는 것을 통달한 것으로 여겨서 그중에는 벌거벗고 다니는 자도 있었다. 악광(樂廣)이 그를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명교 안에 본래 낙토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名敎中自有樂地, 何爲乃爾也.]" 하였다. 《晉書 卷43 樂廣列傳》 제……일인데 서치(徐穉)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서치는 동한(東漢)의 고사(高士)로 학문이 깊고 지조가 높아 남주 고사(南州高士)라 일컬어졌다. 가난하였는데 '항상 스스로 농사를 지어 자기 힘으로 번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常自耕稼, 非其力不食]', 자주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後漢書 徐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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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제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三從弟 丙子 옛날 말에 이르기를 "엎어진 둥지에는 온전한 알이 없다."104)고 하였다. 한 번 나라가 망하고부터 슬프게도 우리 백성이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이치와 형세가 그러하다. 비록 그렇다 해도 어려움을 먼저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오늘날 먼저 우리 가문부터 이산(離散)의 난을 당할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느냐? 봄에 네가 만주로 들어갈 때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전송하며 잊지 못하는 정 때문에 목이 메었단다.이제 만 리 밖에서 안부 편지를 받으니 희비가 엇갈려 뭐라 할 말이 없구나. 내가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살아, 남을 도울 힘이 없기에 가까운 친척의 이산을 앉아서 보고만 있자니 이미 견디기 어렵구나. 낯선 강산과 어렵고 힘든 생계에 생각이 미치면 너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그려 볼 수 있구나. 다만 땅이 넓고 비옥하여 풍요롭고 배부를 희망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구나.다만 또 생각건대, 옛사람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고자를 매달고 쑥대로 만든 화살을 쏘아, 뜻이 사방에 있음을 보였다.105) 그러니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넓은 하늘 아래에 삶에 어디인들 안 되겠는가. 이것으로 너그럽게 이해하면 회포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땅이 비옥하고 음식이 풍족한 즐거움으로 또한 족히 만나는 곳에 따라 편안한 것임에랴?그건 그렇다 치고 또 너의 정으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노친께서 집에 계시고, 밤낮으로 그리워하시니, 예(禮)에 부모가 살아계시면 멀리 나다니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거늘106) 하물며 처자를 거느리고서 멀리서 살 수 있겠는가? "차라리 건업(建業)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武昌)의 물고기를 먹지 않고,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다."107)는 것은 고향 땅을 몹시 그리워한 이의 말이다. 하물며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땅에 대해서이겠는가? 몇 년 동안 부지런히 일하여 약간의 재물을 얻으면 빨리 정리하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곤궁한 처지는 네가 이역에서 겪는 고생과 별반 차이가 없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다. 다만 문중의 여러 집안이 하나하나 두루 편안한 것이 다행이다. 멀리서 너무 염려치 말거라.《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체 없는 데서 본다."108)고 하였다. 이는 본시 먼저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부모의 목소리나 형체를 기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슬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는 더욱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한다.《논어》에 이르기를, "부모는 오직 그 병을 걱정한다."109)고 하였다. 대개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데가 없지만, 오직 그 질병을 늘 근심한다. 너는 다른 나라에서 충신(忠信)을 말하고, 독경(篤敬)을 행하는 것 이외에, 병이 있으면 부모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것을 가장 염두에 두어라. 행로가 위험할 때에는 방비를 단단히 하고, 풍토가 맞지 않으면 섭생에 신중을 기하여라. 비록 만 리 밖에 있지만, 부모의 목소리와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듣듯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장의 의무니 절대 소홀히 하지 말거라. 古語云:"覆巢, 無完卵." 一自國亡, 哀我民生, 死亡無日, 理勢然也.雖然, 難不欲先當, 人之情也, 豈意今者先自吾門, 當離散之難哉? 春間, 君之入滿也, 吾以淚眼送之, 不忘之情, 如物在喉.今得萬里外安信, 悲喜交集, 無以云喩.吾赤貧爲生, 無力及人, 坐見至親之離散, 旣所難堪.念及生面江山、間關營生, 則君之難堪, 又可想也.但地廣而肥沃, 豊飽有望云, 是可幸也.第又念之, 古之人, 男子生, 懸以桑弧, 射以蓬矢, 以示志在四方.然則人之生, 居廣天之下, 何所不可.以此寬譬, 可以忘懷.況土肥食豊之樂, 亦足以隨遇而安者乎? 此則然矣, 又論以君之情, 則有不然者.老親在堂, 日夜以思, 在禮, 父母存者, 遠遊尙不爲, 況率妻子遠居乎? "寧飮建業水, 不食武昌魚;寧還建業死, 不止武昌居.", 甚懷故土者之言.況於父母在之故土乎? 惟望數年勤勞, 略得物力, 亟捲而歸焉耳.吾之窮途狀況, 與君之殊方辛酸, 不甚遠, 無足言.惟以門內諸家一一均安爲幸.勿勞遠念也.《記》曰:"聽於無聲, 視於無形." 此本以先意承志, 不待父母之聲形者言.然遠離膝下者, 尤當深省也.《論語》曰:"父母唯其疾之憂." 蓋父母愛子之心, 無所不至, 惟以其疾病, 常以爲憂.君在他邦, 言忠信、行篤敬以外, 最以有疾貽親憂爲念.行路危驗之際, 極其防慮;水土不服之中, 極其愼攝.雖在萬里之外, 如視聽父母之聲形於目前, 是爲當下義務, 十分毋忽. 엎어진……없다 한(漢) 나라 공융(孔融)이 사형을 당할 때 8세와 9세 된 두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두 아들이 "부서진 둥지 아래 다시 온전한 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大人豈見覆巢之下, 復有完卵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옛사람은……보였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으로 쏘면서 장차 이처럼 웅비(雄飛)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나라의 임금이 세자를 낳으면 사인(射人)이 뽕나무로 만든 활로 쑥대로 만든 화살 여섯 개를 천지 사방으로 쏘았다.[國君世子生, 射人以桑弧蓬矢六, 射天地四方.]"는 구절이 보인다. 부모가……않거늘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가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서 노닐지 말 것이요, 나가서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처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차라리……않겠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손호(孫皓)가 도읍을 건업(建業)에서 무창으로 옮기자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원망이 높았다. 이에 육개(陸凱)가 "차라리 건업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의 물고기는 먹지 않겠네.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네.[寧飮建業水, 不食武昌魚 : 寧還建業死, 不止武昌居.]"라는 민간의 동요를 들어 상소한 일이 있다. 《三國志 卷61 吳書 陸凱傳》 소리……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더라도 부모의 의도를 먼저 헤아려 그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는……걱정한다 《논어》 〈위정(爲政)〉에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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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복에게 보냄 병진년(1916) 寄炯復 丙辰 벼는 참새를 쫓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란다. 일을 맡아 대응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실지다. 이미 그 일에 대응할 적에는 그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다하는 것이 또한 학문에 실로 힘을 얻는 방법이다. 진대사(陳大士)는 농사를 지으며 시를 읊어110)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단다. 조문열공(趙文烈公)111)은 고기 잡고 나무 하며 글을 읽어 문묘에 배향되었지. 이것이 모두 옛사람의 뛰어난 심력(心力)이다. 너의 나약한 근간과 유약한 뜻으로 비록 여기까지 바라지는 못하겠다만, 그러나 늘 스스로 용기를 내어 고인의 발자취 중 만분의 일이라도 뒤따르기를 어찌 감히 잊겠느냐. 모름지기 일에 응하는 여가로 조금이라도 학업을 정하여 자세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읽으면서 손을 빌릴 곳이 있으면 네 아비에게 보이도록 하여라.네 아우 또한 조금이라도 일과(日課)를 주어 풀어놓은 돼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 현자가 이르길 "독서는 가문을 일으키는 근본이다."112)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그 말이여! 무릇 사람의 집안에 문자가 한 번 끊어지면, 비록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이고 자손이 벌떼처럼 흥하여도 그 적막하여 떨치지 못함은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니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한 집안에는 모름지기 다스리는 기강이 있어야 천지가 뒤집히는 데에 이르지 않는 법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너의 계부(季父)가 곧 한 집안의 주인이다. 남녀노소 모두 오직 그 지시를 따라야 하거늘 하물며 너는 어떻겠느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형제의 아들은 내 아들과 같이 본다."113)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형제 또한 당연히 자기 아버지와 같단다. 네가 집에 있는 날에는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에 있어 털끝만큼도 명을 어기지 말거라.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稻曰驅雀, 係不得已.當事而應, 自是學問實地.旣應其事, 則盡其應事之方, 又是學問實得力處也.陳大士服田而哦詩, 名聞天下;趙文烈漁樵而讀書, 升祀聖廡.此皆古人絶倫之心力.汝之弱幹脆志, 雖不敢以此爲望, 然常自賈勇追古人步武之萬一, 安敢忘也? 須於應事之暇, 少定課業, 靜思劇讀, 俾有藉手見乃父. 汝弟亦少授日課, 無至爲放豚, 可也.昔賢云:"讀書, 起家之本.", 旨哉, 言乎! 凡人門戶, 文字一絶, 雖金帛山積, 子姓蜂興, 其蕭索不振, 莫此爲甚, 可不寒心哉! 一家之內, 須有統紀, 不至天飜地覆.吾旣在此, 則汝之季父, 乃一家之主.內外少長, 惟其指使是從, 況在於汝乎? 禮曰:"兄弟之子, 視之若吾子." 此旣然矣, 則父之兄弟, 亦當視之猶吾父.汝於在家之日, 一言一事, 毫勿違命也.若不如此, 非所以敬汝父也. 진대사(陳大士) 명나라 진제태(陳際泰, 1567~1641)이다. 대사(大士)는 자이다. 호는 방성(方城)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아버지가 농사일을 시키면 책을 몸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 《明史》 卷288 列傳 第176 文苑4 조문열공(趙文烈公) 조헌(趙憲, 1544~1592)의 시호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경기도 김포 출생이다.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독서……근본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화순(和順)은 제가(齊家)의 근본이요, 근검(勤儉)은 치가(治家)의 근본이며, 독서(讀書)는 기가(起家)의 근본이요, 순리(順理)는 보가(保家)의 근본이다.[朱子曰:和順齊家之本, 勤儉治家之本, 讀書起家之本, 循理保家之本.]"라고 하였다. 형제의……본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상복에 있어서 형제의 아들 즉 조카에 대한 복을 내 아들과 같이 한 것은 대체로 끌어당겨 올린 것이고, 수숙의 사이에 복이 없는 것은 대체로 밀어내서 멀리 한 것이다.[喪服, 兄弟之子猶子也, 蓋引而進之也, 嫂叔之無服也, 蓋推而遠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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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복에게 보냄 寄炯復 네가 돌아간 지 이제 십일 남짓 되었구나. 몇 가지 허물을 고치고 몇 가지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듣기로 효자는 밝은 대낮이라 하여 절도(節度)를 펴고 어두운 밤길이라 하여 행실을 태만히 하지 않는다더구나. 네가 만약 내 곁을 떠났다고 그 행실을 태만히 한다면, 어찌 다만 효도를 하지 못할 뿐이겠느냐. 장차 패역한 자식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네가 바로 지금 마땅히 면려해야 할 것을 조목조목 적어 보내니, 이를 보고서 정성을 다하고 힘을 쏟아 병자가 낫기를 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노력하되, 배부른 이가 밥을 대하는 것같이 등한히 하지 말거라. 만약 이를 믿지 않는다면 평생을 그르치니 마땅히 깊이 염두에 두어라.첫째, 어머니를 공경하라. 자식이 부모를 섬길 적에 비록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다는 의(義)로써 아버지를 먼저 하고 어머니를 뒤로 하지만, 그 존경하는 마음은 어찌 차별을 두는 이치가 있겠는가. 내가 여염의 자식을 보건대, 아이가 젖 먹이 때부터 그 어머니에게 친압(親狎)하여 자라서도 이 버릇이 여전히 남아있어, 부름에 답하거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기 아버지에게 감히 이르지 못하는 것을 곧 자기 어머니 앞에서는 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점점 그 명을 어기고, 그 좋아하는 바를 거슬러 불효에 크게 빠진 뒤에야 그친다. 이는 다른 게 아니라 모범을 듣고 보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너는 비록 여항에서 자랐고 나이 또한 어리지만, 읽고 왼 것은 성현의 말씀이고 공경히 법식으로 삼은 것은 사우(師友)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가정에서 행하는 바가 혹시 여항의 자식이 하는 바를 면하지 못한다면, 이는 크게 경계할 만하다. 속담에 말하기를, "세 살 때 잘못된 버릇은 여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하였다. 어찌 일찍 도모하지 않겠느냐!둘째, 교유에 신중하라. 무릇 사람의 삶은 선과 악이 일정하지 않다. 선한 사람을 따라 사귀면 선으로 나아가고, 악한 사람을 따라 사귀면 악으로 나아간다. 비유하면 물건 중에서 흰 것이 붉은 데 물들면 붉어지고, 옻칠에 물들면 검어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맹자는 타고난 아성(亞聖)이었음에도 무덤과 저자 가까이에서 따라 노닐 때는 무덤 만들고 장사하는 허물을 면하지 못하다가, 학궁(學宮) 옆으로 이사한 뒤에야 읍양(揖讓)하는 모습을 익혔다.114) 자천(子賤)은 탁월한 자질이 아니었지만 노(魯) 나라의 군자에게서 선(善)을 취하였고,115) 호향(互鄕) 또한 인륜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나, 나쁜 것을 익혀 더불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해졌다.116) 이로 말미암아 보면 교유에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어린 나이라 교유가 넓지 않아 이로운 벗 세 사람과 해로운 벗 세 사람117)은 비록 다 갖추어 논하지 못하나, 또한 마을 또래 중에서 행실이 단정하고 배움이 기민한 이를 택하여 교유하여라. 만일 들뜨고 조급하며 방만한 이를 보거든 몸을 돌려 멀리하여라. 입으로 비속하고 외설스런 말을 하고 손으로 도박을 하는 이는 곧 잡된 부류와 패역한 무리이다. 만일 한 번 그 속에 발을 들이면 몸은 재앙을 만나고 집안은 패망할지니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만하다.셋째, 위의(威儀)를 중후하게 하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하셨다.118) 여형공(呂滎公)119)이 말하기를 "응대하는 말이나, 행동거지의 경중은 귀천(貴賤)과 수요(壽夭)가 이로부터 나누어진다."120)라고 하였다. 그러니 위의의 경중은 비단 이 학문 성패의 기틀일 뿐 아니라 또한 종신토록 길흉의 부적(符籍)이다. 너의 자질과 바탕이 섬약하여 이미 남에게 경시를 당하는데 하물며 거동마저 예로써 하지 않는 게 많다면, 학문을 성취하는 것과 스스로 길(吉)과 복(福)을 구하는 것은 나는 어려울 것이라 안다. 지금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다만 구용(九容)121)으로 자신의 계책으로 삼아라. 옛사람이 이르되, "구용이 근엄치 않으면 이는 몸이 없는 것이다."122)라고 하였으니, 훌륭하구나, 이 말이여!넷째, 도량을 넓혀라.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도량을 넓고 크게 해야 남의 선(善)을 수용하여 자기의 모자란 것을 보완하고, 남의 허물을 포용하여 자기의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거드름피우며 자기만 옳다 하고 강퍅하게 남을 거부하는 이는 비록 행하는 바가 다 옳아도 자신만 좋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물며 거드름 피우거나 강퍅한 것은 반드시 천리(天理)의 공정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움에 관련된 것임에랴!내가 너를 보건대, 또한 도량이 넓지 못한 사람 중 하나다. 남이 범함이 있으면 참으로 포용하려 들지 않고, 잘 인도하는 사람은 혹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덕을 나아가게 하는 데 해가 되기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만약 순임금이 남의 선을 취한 것,123) 중유(仲由)가 허물을 듣기를 잘한 것,124) 안연(顏淵)이 남이 자기에게 허물을 범한 데 대하여 따지지 않은 것,125) 맹자가 세 가지를 스스로 돌아본 것126)에 대해서 능히 마음을 두고 힘을 쓴다면 자기를 닦는 것과 남을 수용하는 것 두 가지 모두 그 이르는 경지가 지극할 것이고 덕의 나아감은 막지 못할 것이다.다섯째, 기억하고 외우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라. 기억하고 외우는 것을 덕행과 견주면 비록 말단이지만, 기억하고 외지 않으면 어떻게 옛사람의 지극한 가르침과 성법(成法)을 살펴 덕행을 향상시키는 밑천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기억하고 외는 것은 실로 뒤로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고 일생의 세월은 유한하다. 유한한 세월로 무궁한 의리를 궁구하는데 어찌 느슨한 마음과 느긋한 힘을 들여서 얻을 수 있겠느냐? 무릇 으뜸가는 성인인 주공(周公)도 아침에 글 백 편(篇)을 읽었고127), 나면서부터 안 공자도 가죽으로 엮은 《주역》이 세 번이나 끊어졌으니 달리 무슨 이야기를 더하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아주 절실한 심력을 써서 읽는 것과 외는 것을 날마다 일과를 세워 혹시라도 빠짐이 없게 하여라.아, 한마디 말이 때로 종신토록 행하는 데 밑천이 되기도 한다. 청춘에 배움을 잃으면 족히 백발 노년에 후회를 불러올 것이다. 근면과 태만 사이의 득실이 이와 같으니 염두에 두고 힘쓰라. 汝歸今十日餘矣.未知改得幾款過惡, 做得幾款工夫.吾聞孝子不以昭昭伸節, 不以冥行惰行.汝若以離吾側而惰其行, 豈惟不得爲孝, 而將不免悖子之歸矣.玆條錄汝當下所當勉者, 寄往.見此, 發精振力, 汲汲若病者之求瘳, 毋沁沁若飫者之對飯也.如不信此, 誤却生平, 宜深念之.其一:敬慈母.子事父母, 雖以家無二尊之義, 先父而後母, 然其尊敬之意, 則豈有間然之理? 余見閭巷人子, 自孩提乳哺時, 以親狎其母, 及乎稍長, 此習猶存.應對承奉, 大不若敬厥父, 所不敢告厥父之事, 乃敢恣行無憚於厥母前.駸駸至於方厥攸命、拂厥攸好, 大陷不孝而後已.此非他, 無聞見模範而致然也.汝雖生長閭巷而年且幼, 所誦讀者, 聖賢也;所矜式者, 師友也.而家庭所行, 乃或不免閭巷子所爲, 此大可戒也.諺云:"三歲悖習, 八耋猶在." 盍早圖之! 其二:愼交遊.夫人之生, 善惡非一定.從善人交, 則趨於善;從惡人交, 則趨於惡.譬如物之白者, 染於丹則赤, 染於漆則黑.是故孟子, 以天生之亞聖, 從遊墓、市之傍, 則不免於築埋、賈衒之失, 徙舍學宮之側, 然後乃習揖讓之容.子賤非卓越之資, 而取善於魯之君子.互鄕亦秉彝之人, 習非而致難言之惡.由此觀之, 交遊可不愼乎? 汝是童年, 交遊不廣, 三益三損, 雖未及備論, 亦於同閈儕類中, 擇端行敏學者, 交之.若見浮躁放慢者, 引身遠之也.至於口發鄙褻之言、手執睹2)技之戱者, 直是雜類悖徒.若一涉跡其間, 身其逢殃, 家用敗亡, 可畏可畏! 其三:重威儀.孔子曰: "不重則不威, 學則不固." 呂滎公曰:"辭令、容止之輕重, 貴賤、壽夭之所由分." 然則威儀之輕重, 非惟此學成敗之機, 亦終身吉凶之符也.汝質幹纖弱, 固已爲人所輕, 而況動之多不以禮, 其於成就學問、自求吉福, 吾知其難矣.今不要多談.只可把九容作家計.昔人云:"九容不謹, 是無身." 旨哉, 言乎! 其四:恢度量.人須弘大其量, 有以受人之善, 用補己闕;容人之過, 使化己善.若訑訑是己、悻悻拒人者, 雖所行皆是, 不過爲自好之人.況其訑訑、悻悻者, 未必出於天理之公, 而涉於一己之私乎! 以余觀汝, 亦一量不廣底人也.人之有犯, 固不肯容;善導之人, 或不肯受.吾以爲進德之害, 莫此爲甚.若能於大舜之取人善、仲由之喜聞過、顏淵之犯而不較、孟子之三自反, 留心而用力焉, 則修己、容物, 兩極其至, 而德之進也, 莫禦矣.其五:勤記誦.記誦視德行, 雖曰爲末.然非記誦, 何以考古人之至訓成法, 用資德行之進乎? 記誦實不可後也.天下之義理, 無窮;一生之歲月, 有限.以有限之歲月, 究無窮之義理, 豈容致緩心徐力而可得乎? 夫以周公之元聖, 朝讀百篇;孔子之生知, 韋編三絶, 他尙何說哉? 汝須煞用緊實心力, 所讀所記, 逐日立課, 罔或闕漏也.嗚呼! 一言之得, 或資終身之行.靑春之失學, 足以招白首之噬臍.勤慢之間, 得失如此.念哉勖哉! 맹자는……익혔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무덤 근처에 집을 정하자 맹자가 매장하는 놀이를 하고, 시장 가까이 집을 정하자 맹자가 장사하는 놀이를 했으므로 결국 학교 가까이로 이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자천(子賤)……취하였고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자천(子賤)을 두고 평하면서 "군자답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하였다. 호향(互鄕)……악해졌다 호향은 춘추(春秋) 시대의 한 고을 이름이다. 풍속이 나빠서 그 고을 사람과는 함께 선(善)을 논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고을 동자가 공자의 덕에 감화되어 찾아가자 공자가 그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論語 述而》 이로운……사람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것이 세 종류의 벗이고 손해되는 것이 세 종류의 벗이다. 정직한 벗, 성실한 벗, 견문이 많은 벗은 유익하고, 한 가지에만 익숙한 벗, 아첨을 잘하는 벗, 말을 잘하는 벗은 손해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矣.友便辟、友善柔、友便佞, 損矣.]"라고 하였다. 공자께서……하셨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여형공(呂滎公) 여형공은 송나라 학자인 여희철(呂希哲)의 봉호로, 자는 원명(原明)이고 여공저(呂公著)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손복(孫復)ㆍ호원(胡瑗) 등에게 종학하였고 나중에는 이정(二程)과 장재(張載)에게 수학하였다. 응대하는……나누어진다 《소학》 〈가언(嘉言)〉에 여형공이 말하기를 "후생으로 처음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기상을 알아야 한다. 기상이 좋을 때는 온갖 일이 마땅하다. 기상이란 응대하는 말과 용모와 거동의 가볍고 무거움, 빠르고 느긋함에서 족히 볼 수 있다. 군자와 소인만이 여기서 나누어질 뿐 아니라 귀하고 천함, 수명의 길고 짧음 또한 이를 말미암아 정해진다[後生初學, 且須理會氣象.氣象好時, 百事是當.氣象者, 辭令容止輕重疾徐, 足以見之矣.不惟君子小人, 於此焉分, 亦貴賤壽夭之所由定也.] 하였다. 구용(九容) 옛날 군자가 수신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바르게, 입은 신중하게, 말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똑바르게, 숨소리는 고르게, 설 때는 의젓하게, 낯빛은 단정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용이……것이다 김택술의 스승 전우(田愚)의 문집 《간재집ㆍ후편속집》 권4 〈정태수(鄭兌秀)에게 답하는 편지 을묘〉에 "유방채가 말하기를, '구용을 닦지 않으면, 이는 몸이 없는 것이다. 구사를 신중히 하지 않으면, 이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군자가 의용을 닦아서 인도를 세우고, 생각을 신중히 하여 천덕에 도달한다.' 하였다.[劉邦采曰:九容不修, 是無身也.九思不愼, 是無心也.君子修容, 以立人道, 愼思以達天德.]" 라는 구절이 보인다. 유방채(劉邦采, ? ~ ?)의 자는 군량(君亮), 호는 사천(師泉)으로 강서(江西) 안복(安福) 사람이며, 왕수인(王守仁)에게 수업하였고, 《역온(易蘊)》이라는 저술이 있다. 순임금이……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대순(大舜)은 이보다 더 위대한 점이 있었으니, 자기에게 훌륭한 면이 있으면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 타인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다.[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라는 말이 나온다. 중유(仲由)가……것 중유는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로(子路)이다. 이 내용은 《맹자》 〈공손추 상〉에 "자로는 남들이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말해주면 기뻐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라고 보인다. 안연(顏淵)이……것 이 구절은 《논어》 〈태백(泰伯)〉에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옛날에 나의 벗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는 증자의 말이 보인다. 《논어집주》의 '나의 벗'은 안자(顔子)를 가리킨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것 《맹자》 〈이루 하〉에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대하기를 난폭한 행동으로써 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인(仁)하지 못하며 내 반드시 예가 없는가 보다. 이러한 일이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한다. 그 스스로 돌이켜 인하였으며 스스로 돌이켜 예가 있었는데도,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한가 보다 한다. 스스로 돌이켜 성실하였으되,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다면 군자는 말하기를 '이 또한 망인일 따름이다.'라 하나니 이와 같다면 금수와 어찌 구별하겠는가. 금수에게 또 무엇을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有人於此,其待我以橫逆,則君子必自反也,我必不仁也,必無禮也. 此物,奚宜至哉?其自反而仁矣,自反而有禮矣,其橫逆,由是也,君子必自反也,我必不忠,自反而忠矣,其橫逆,由是也,君子曰:此亦妄人也已矣,如此,則與禽獸奚擇哉?於禽獸,又何難焉?]"라고 하였다. 주공(周公)도……읽었고 《예문유취(藝文類聚)》 권55 〈독서〉 조에 "묵자(墨子)가 말하기를, '주공은 아침에 백 편의 글을 읽고, 저녁에 칠십 명의 선비를 만났다.'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睹 원문 "睹"는 '賭'의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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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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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형복에게 보냄 신유년(1921) 寄炯復 辛酉 일전에 부탁한 "책을 읽어라, 도량을 너그럽게 하라, 술을 경계하라."는 세 가지 일은 과연 생각해 보았느냐? 사람들은 "집안일을 주관하면 독서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나는 '집안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더욱 독서에 힘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대저 독서는 다른 게 아니라 이를 밑바탕으로 해서 용무에 응함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로지 독서만을 일삼으면서 용무에 응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경우엔 오히려 조금 느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안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하루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의 일에 응대할 것을 잃고, 이틀 책을 읽지 않으면 이틀의 일에 응대할 것을 잃으니, 어찌 더욱 독서가 급한 것이 아니겠느냐.네가 가난한 집안 살림을 맡아 비록 바쁘다고는 해도, 몸소 낫이나 호미를 잡을 정도는 아니니 진실로 뜻만 있다면 어찌 겨를이 없는 걸 걱정하겠느냐. 다만 네가 근면하고 독실함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옛 사람 중에 넓고 큰 도량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스린 분은 더할 나위 없지만, 너그럽고 온화함에 힘쓰고 성급하고 경박한 것을 경계하여 한 집안을 태평하게 하는 것이 또한 불가능하겠느냐.대개 집안에 있어서 너그럽고 온화하지 않으면, 부모에게는 효를 잃게 되고 집안사람에게는 덕을 잃게 되어, 끝내 은혜로운 정의는 야박해지고 형제간은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좁은 도량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못지않다. 유관(劉寬)은 더럽혀진 옷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고128), 왕공(王公)은 검은 먼지를 싫어하지 않았다.129) 이것은 타고난 자질에 달려 있어 비록 여기에 미치기는 쉽지 않겠지만 동래(東萊)가 통렬하게 이전의 습관을 고쳤듯130) 본인이 만약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어려워 못하겠느냐. 네가 빨리 고치지 않으면 덕에 누가됨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될까 내 몹시 우려되는구나.술이라는 물건은 마시면 안 된다하면 너무 편협한 듯하고, 마셔도 된다하면 함부로 행동하기 쉬우니 당연히 기혈(氣血)의 허실과 심력(心力)의 강약을 살펴 대처해야 할 것이다. 만약 기운이 좋고 마음이 왕성하여 함부로 행동할 염려가 없다면 그뿐이지만, 만약 행여 그렇지 않은데도 좋아하면 이는 짐독(鴆毒)131)이다. 너는 몸이 약하여 기운이 충실하지 못하고 나이가 어려 뜻이 굳세지 못하다. 나는 네가 차라리 심히 편협하여 문제가 될지라도 행여 짐독을 가까이하지 않기를 바란다.아, 글을 읽지 않으면 만사(萬事)는 이치를 잃고 인도(人道)는 무너진다. 도량이 너그럽지 못하면 친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집안일은 엉망이 된다. 술을 경계하지 않으면 일신(一身)이 법도를 잃어 재화(災禍)는 예측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네가 마땅히 급선무에 두어야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열거하여 거듭 부탁하니, 부디 네 마음에 깊이 새기고 면려하여 소홀하지 않길 바란다. 日前所囑 "讀書、寬量、戒酒"三事, 果能動念否? 人言幹家務, 不暇讀書, 余謂'幹家務者, 尤當急於讀書也.' 何也? 夫讀書非爲他也, 欲資此而不失應務也.其專事誦讀, 而無應務之煩者, 猶可少緩.至於幹家者, 一日不讀, 則一日之務失其應;二日不讀, 則二日之務失其應, 豈非尤急者乎?汝之食貧幹蠱, 雖曰"滾沓.", 不至躬執鎌鋤, 苟有其志, 豈患無暇? 只在汝勤篤如何耳.古人之弘量大度, 安邦濟民者, 尙矣, 至於務寬和, 戒急遽, 以底一家泰平者, 亦不可能乎!蓋居家而不寬和, 則失孝於父母, 失德於家衆, 終至恩義衰薄, 骨肉乖異.其非狹量攸濟, 又不下爲國也.劉寬之不恚汚服, 王公之無嫌埃墨.係是天分, 縱難及之, 東萊之痛改前習, 我苟欲之, 何難而不爲? 汝不速改, 非惟累德不細, 亦恐有妨遐福, 吾深慮之.酒之爲物, 以爲不當飮則似太偏, 以爲當飮則易至亂, 當量其氣血虛實, 心力强弱而處之.若我氣實心强, 無慮乎亂則已, 苟或未然而嗜之, 是鴆毒也.汝淸弱而氣未實, 年少而志未堅.吾欲汝寧失太偏, 而無或近鴆毒也.噫, 書不讀, 則萬事失理, 而人道壞矣.量不寬, 則九族失和, 而家政戾矣.酒不戒, 則一身失度, 而禍不測矣.此三者, 汝當下之急務.故另擧申勖, 幸體若心, 勉旃毋忽. 유관(劉寬)은……않았고 유관(劉寬)은 후한(後漢)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이다. 그가 화를 내는지 시험해 보려고 시비(侍婢)를 시켜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그의 조의(朝衣)에 엎지르게 하였을 때 안색을 변치 않고 "혹시 손을 데지나 않았느냐.[羹爛汝手]"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後漢書 卷55》 왕공(王公)은……않았다 동진(東晉) 때 사람인 왕도(王導)이다. 동진 성제(成帝)의 장인인 유량(庾亮)이 서쪽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도 조정의 권력을 주무르자, 왕도가 불쾌하게 생각하여 서풍이 불면 그때마다 부채를 들어 바람을 막으며 말하기를 "원규(元規 : 유량의 자)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히려 하는구나." 하였다. 《晉書 권86 王導傳》 동래(東萊)가……고쳤듯 여조겸(呂祖謙)의 호이다. 《심경부주》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주자(朱子)가 "지난번에 여백공을 만났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 그가 젊었을 적에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언짢게 여겨 집안의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곤 하였는데, 뒷날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 단지 《논어》 한 책을 가지고 조석으로 익히 보다가, '자기를 책망함은 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함은 적게 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마음속 생각이 한순간에 평온해짐을 깨달았으며,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분노를 폭발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向見呂伯恭說 少時性氣粗暴, 嫌飮食不如意, 便打破家事, 後日久病, 只將一冊《論語》, 早晩閑看, 至"躬自厚而薄責於人.", 忽然覺得意思一時平了, 遂終身無暴怒.此可爲變化氣質法.]"라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짐독(鴆毒) 집안에 액을 가져온다는 상징적인 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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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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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형태에게 부침 갑자년(1924) 寄炯泰 甲子 네 자질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세가 막혀 끝내 그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고 그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게 하였구나. 아비로서의 도를 잃은 게 부끄러워 내 마음이 끊어지는 듯하다. 비록 그렇지만 천도(天道)를 이용하고 지리(地利)를 의지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공자가 내린 가르침이다. 산에서 땔나무를 하고 물에서 물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한공(韓公)이 칭송133)하였다. 네가 만약 이것을 할 수 있다면 백행의 근원이 효니, 곧 학문은 다른 데서 구할 게 없다. 하물며 하루 종일 밤새도록 책을 읽을 만한 작은 틈도 없겠느냐. 네가 만약 뜻이 있다면 예관(兒寬)이 책을 지니고 밭일을 하고134) 중봉(重峯)이 아궁이 불에 비추며 읽은 것135)도 넉넉히 할 수 있을 게다. 나는 비록 아비의 도를 잃었으나 너는 옛날 사람의 아름다운 자취를 바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하여 기억하도록 하여라. 汝之才質, 非不可爲者, 形格勢禁, 竟使蓬其首而胝其手.愧失父道, 我心若折.雖然, 用天因地, 以養父母, 孔聖垂訓.樵山漁水, 以供甘旨, 韓公有贊.汝若能此, 百行有源, 卽此是學, 不可他求.況非終晷通宵, 無片隙之可讀者乎? 汝若有志, 兒寬之帶經鋤田, 重峯之燎竈照讀, 可優爲也.吾則雖失父道, 望汝以古人懿蹟, 須深念記取也. 한공(韓公)이 칭송 당(唐)나라 때의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이 안풍(安豐)에 살았는데 그의 청렴함과 효행이 워낙 우뚝하여 문장가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란 노래를 지어 "딱하다, 동생이여! 아침에 나가 농사짓고, 밤에 돌아와 고인의 책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 못하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아, 부엌에서는 맛난 음식 차리고 당에 올라서는 부모의 안부 살피네. 부모는 근심이 없고, 처자식은 원망이 없네.[嗟哉, 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칭송하였다. 《小學 善行》 예관(兒寬)……하고 한(漢) 나라 예관(兒寬)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던[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 고사가 있다. 《漢書 兒寬傳》 중봉(重峯)……것 조헌(趙憲, 1544~1592)이다. 중봉은 밭갈이 하면서도 쉬는 사이에 글을 읽었고, 일을 나가면 먼저 책을 올려놓을 받침을 架設하였으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면 잿 속에서 불을 골라 빛을 밝혀 글을 읽다가 꺼진 다음에 그만두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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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 전장에게 보냄 與鋉心田丈 戊寅 무인년(1938)우리 어른께서 매번 말씀하시길, 제가 다른 사람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니, 규칙을 두어야 하고,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은 성인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른이 이것으로 저를 격려하는 것은 덕으로 사랑하는 뜻이 매우 두터움으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주자(朱子)가 양씨(楊氏)의 '본분 이외에 한 터럭의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201)는 말을 인용하여 '성인도 너무 심하지 않았다.'는 뜻을 해석했으니, 본분 이외에 더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분에 가함이 없는 것을 비난하면 비록 엄할지라도 그것을 너무 심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가함과 불가함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한 마땅히 성현의 말과 행동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 유비(孺悲)가 뵙기를 청함에 질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다시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 부름에 이르렀으니202)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진항(陳恒)이 임금을 시해하고 다른 나라에 있었는데, 목욕재계를 하고 토벌하자 청한 것203)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향원이라고204) 일컬어지는 사람은 마땅히 선한 사람이라 일컬을 수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서 들어가지도 않고 느끼는 것도 없었고, 또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 말하니,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양웅(揚雄)과 묵자(墨子)도 또한 인의를 배운 사람인데, 맹자가 부모도 무시하고 군주도 무시하는 금수라고 비난하기205)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한 듯합니다. 야인으로 호사자(好事者)의 말은 마땅히 물을 만한 것도 못되는데 힘을 써 변론하여 깨트려 크게 말하여서, "공자 같은 사람이 옹저(癰疽)와 내시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으면206), 어떻게 공자(孔子)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맹자가 중니(仲尼)를 일컬어서 너무 심하지 않다고 여겼으니, 스스로 그가 행한 것을 믿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유원성(劉元城: 유안세(劉安世))이 소인을 너무 강하게 공격하여 만 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원우(元祐)207) 때 제현들이 채(蔡)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해서 시구(詩句)로써 죄를 주기에 이르렀으니,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동한(東漢)의 당인들이 '무모하게 물을 건너다가 이마까지 빠졌으니'208),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자가 원우 때의 인물을 논함에, '유원성은 중도를 얻었다 하고 시구(詩句)로 채 씨를 죄를 준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나로 하여금 동한 시대에 살게 했다면, 반드시 범방(范滂)과 양구(陽球)209)와 같은 재앙에 빠졌을 것이라 하고, 당중우(唐仲友)를 탄핵함에 이르면, 항소를 여섯 번 올림에 조목을 40개 나열하고도 너무 심하다 여기지 아니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모두 일이 대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큰 죄를 범해서, 이와 같이 아니하면 천하의 의리를 밝힐 수 없고, 후세에 재앙과 근심을 막지 못함은 본분에 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눈이 헷갈려서 살펴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듣건대, 사생은 만법의 근원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의 윤리가 한 번 무너지면 만법(萬法)이 모두 무너지는 것은 형세 상 반드시 이르게 됩니다. 오늘의 일은 사생의 큰 윤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를 없애는 것은 큰 죄로, 공자·맹자·주자의 세 성현 때와 비교를 해봐도 큰일이지 작은 일이 아니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치를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고 기를 충실하게 기르지 못했으니, 불인(不仁)한 악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지 못하지만 본분에 대하여 흠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성현에게 받은 글로써 헤아려 보건대 본분에 터럭만큼을 가하여 되돌아오는 것이 너무 심하다 말한다면 진실로 깨우쳐 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나는 단지 있던 일에 근거하여 저들이 말과 일로 속이며 범한 큰 것으로 논했을 뿐입니다. 일찍이 다른 일까지 동시에 언급해서 미세한 것까지 다 거론하기를, 마치 채씨를 죄주고 당중우를 탄핵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의 일상적인 보통 감정의 견해로 헤아려 보더라도 마땅히 또한 너무 심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할 때 사람이 학문을 하는 까닭은 단지 간단히 옳은 것을 구하고 이치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치를 따르기를 구하고, 이치에 따라서 생과 사, 화와 복, 비난과 칭찬,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돌아본다면, 이것은 남쪽의 월나라를 가려하면서 말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들어가려 하는데 문을 닫는 것과 같아서, 끝내 이루어질 이치는 없습니다. 스스로 학문하는 처음의 마음을 버려서 일생을 그르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금년에 이런 이치를 얻어서 이 뜻을 철저히 지키다보니 마침내 거의 한 부를 얻어서 지하에서 선성과 선사를 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은 이런 말을 들으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어른이 저를 사랑한 것은 이처럼 두터운데 내가 보답할 바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고서 저버리는 것이니 내가 어찌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의 덕성과 온화하고 후덕함은 자못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니, 활달한 기운을 거두어 들여서 차마 공핍(空乏)하게 하리오! 이 학문을 한지 오십여 년이 되어, 널리 사랑하는 인(仁)이 아름답고, 장자(長者)의 기품과 큰 덕의 아름다움이 있고, 우뚝하니 군자의 지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리를 정교하게 하고 간절하게 함에 이르러서는 못을 끊듯 쇠를 자르듯 거처(去處)를 분명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힘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충 보아가면 시비의 근원이 어긋나는 것이 작지 않고, 학문을 쌓은 효과도 거두기 어렵습니다. 근래 의론 같은 경우, 당신의 견해가 이와 같아서, 돌아보면 생각하는 것이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논리에 따라 사실을 규명하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출입을 간단히 하고, 경전을 가까이 하기를 삼가 권하여 말년에 식견을 밝게 하고 행실을 높이해서 우뚝 세우는 효과가 있기를 바랐는데, 들어주질 아니하여 매우 속상했습니다. 지금 저의 병이 오래도록 낫질 않습니다. 나이는 비록 어른보다 적다하나 갑자기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전부 말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 어른은 선친의 친구라고, 다시 진진의 친함210)을 더 보탠 것이 아니지만, 평범한 다른 동문이라면 어찌 감히 이것으로써 진언하겠습니까. 이것을 잘 살피어 깊이 마음 쓰기를 바랍니다. 吾丈每謂, 澤述疾惡已甚, 有所規飭, 夫已甚者, 聖人之所不爲也.丈之以是勉之者, 出於以德之愛意甚厚矣, 豈不知感? 但朱子引楊氏'本分之外, 不加毫末之語', 以釋'不爲已甚'之義, 則加於本分之外者, 乃可謂之已甚, 其於本分無加者斥之, 雖嚴不可謂之已甚也, 明矣.然則加與不可, 何以知之? 亦當以聖賢之言與行知之.孔子於孺悲請見, 旣辭以疾, 至復取瑟而歌, 則似若已甚.陳恒弑君事, 在他國, 則至於沐浴請討者, 似若已甚.鄊里所稱謹愿之人, 宜若可謂善者, 而旣謂過門, 不入而不感, 又至謂德之賊也, 則似若已甚.楊墨亦學仁義者也, 而孟子至斥以無父無君之禽獸, 則似若已甚.野人好事者說, 宜若不足問者, 而亦用力辨破, 至於大言之, 曰: "若孔子主癰疽侍人, 何以爲孔子." 則似若已甚然.而孟子旣稱仲尼, 以不爲已甚, 則自信其所行者, 又可知矣.劉元城攻小人太強, 以至萬死之域, 可謂已甚.元祐, 諸賢, 憂蔡之難制, 至於罪之以詩句, 則可謂已甚.東漢之黨人, 是過涉之滅頂者, 可謂已甚.而朱子論元祐人物, '以元城爲中, 而罪蔡以詩句, 不以爲非.' 又至謂使我當東漢, 必陷於范滂陽球之禍, 至於按唐仲友則狀, 至六上條列四十, 而不自以爲已甚, 何哉? 凡此皆以事關大義.人犯大罪, 不如此, 不足以明義理於天下, 防禍患於後世, 而有所欠於本分, 故也.誠非夫夫淺腹眯眼之所能窺測也.蓋聞, 師生者, 萬法之源.然則師倫一斁, 萬法皆斁, 勢所必至.近日之事, 事關師生之大倫.人犯亡師道之大罪, 視孔孟朱三聖賢時, 事有大焉而非細者, 不其明乎? 澤述也, 見理未徹, 養氣未充, 其於不仁之惡, 實未知, 其無所欠於本分.然竊以所受乎三聖賢者揆之, 謂加乎本分而歸之已甚, 則誠不知其所喩也.且吾只據有事以來, 彼之言與事, 誣犯之大者, 而論之而已.未嘗有幷及他事, 悉擧纎細, 如罪蔡按唐之爲者.則雖度以夫, 夫常情之見, 宜亦不謂之已甚也, 審矣.自惟人之所以爲學, 只是欲斷斷然惟是之求.而惟理之從欲求, 從理而有一毫顧念於死生禍福毀譽利害之間, 則是猶適越而北轅, 欲入而閉門, 而卒無有成之理.自負爲學之初心, 而誤了一生, 豈不可哀? 此年以來, 見得此理, 徹底守得此志, 到頭庶有一副所得可籍手, 以見先聖先師於地下, 而無愧矣.未知吾丈聞此, 又以爲如何也.仍念丈之愛我者如此其厚, 而我不思所以報之, 則是受人恩而負之者, 我豈忍爲? 丈之德性和厚自是天禀, 而斂其豪豁之氣, 忍其空乏! 此學, 蓋五十年子茲矣, 雖其泛愛之仁, 休休然, 有長者之風, 大德之閑, 亭亭然, 有君子之操.然至於義理精切, 斬釘截鐵去處, 未甚致力, 竊恐如此放過則是非之源, 所差不細, 而積學之效, 難以收得也.至若近日議論, 合下所見如是, 非有所顧念, 而然循論究實, 亦爲之有是懼焉, 故已嘗奉勸以簡出入 親經傳, 管取晩年識明行高, 卓然有立之效, 而未見採聽, 甚所憫然.今則賊疾彌留, 竊恐年雖少丈, 溘然則先, 故敢畢言之, 噫非吾丈旣爲先人之友, 又忝秦晉之親, 而非凡他同門之地, 安敢以此進之也? 倘有以諒此深心焉. 본분지외(本分之外) 맹자께서 "중니는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으셨다'에 대한 주석으로 양씨 왈, '성인이 하는 바는 본분의 밖에는 털끝도 더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맹자가 참으로 공자를 알지 못했다면 능히 이렇게 칭하지 못했을 것이다.〔孟子曰: 仲尼不爲已甚者, 楊氏曰: 言聖人所爲, 本分之外, 不加毫末, 非孟子眞知孔子, 不能以是稱之〕'라고 주자가 양씨의 말을 인용하여 풀이하였다.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공자(孔子)께서……이르렀으니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유비(孺悲)가 공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는 병이 있다고 거절하시고, 명령을 전달하는 자가 문밖으로 나가자 거문고를 가져다 노래를 불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셨다.〔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라고 하였다. 거문고를 연주한 이유는 병 때문에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진항(陳恒)……청한 것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역(弑逆)하자, 공자가 목욕하고 조정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고(告)하기를,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죽였으니, 그 놈을 토벌하소서.〔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향원(鄕愿) 그 지방 인심에 영합하면서 가장 점잖은 체하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향원은 덕을 해치는 사람〔鄕愿德之賊〕"이라 하였다. 무부무군(無父無君) 임금과 어버이를 모두 부정한 극악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과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공자……삼았으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주자의 주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 사구를 하다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 대부인 사마상퇴(司馬向魋)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가 화를 피하려고 미복 차림으로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를 주인으로 정하신 것이다. 맹자의 말은 공자가 이렇게 곤액을 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인 삼을 사람을 가리셨는데, 하물며 제나라나 위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어찌 옹저(癰疽)나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하는 일이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원우(元祐) 송나라 철종의 연호로 1086~1094까지 사용되었다. 무모하게……빠졌으니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 상육(上六)의 효사(爻辭)이다. '지나치게 건너 이마까지 빠져 흉하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過涉滅頂凶無咎〕. 범방과 양구 후한 때의 명사이다. 범방은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일어난 당고(黨錮)의 옥사 때 옥중에서 죽었고, 양구는 영제 광화(光和) 2년(179)에 위위(衛尉)로 있으면서 조절(曹節)과 장양(張讓) 등 환관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진진지호(秦晉之好) 춘추시대에 진(秦)과 진(晉) 두 나라가 대대로 혼인을 하니, 뒷 사람이 연인(連姻)을 들어 진진지호(秦晉之好)라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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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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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재 병주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金危齋炳周 ○癸亥 부모가 돌아가심에 형제같다는 말씀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을 대단히 극진하게 말한 것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거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아! 한번 벗을 사귀는 도가 사라진 뒤로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1) 풍조를 볼만한 곳이 없게 되었는데, 오직 어른이 세태를 뛰어넘어 이처럼 진실하고 간절한 가르침을 주시니, 경건한 마음으로 공경히 받든 나머지 또한 이런 의리를 널리 전달하여 동문제자의 마음속에 골고루 전하고 싶습니다. 뛰어난 재주와 두터운 덕이라고 장려하신 것은 어찌하여 걸맞지 않음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만약 한두 가지 취할 만 점이 있는데 군자가 사람을 칭찬하여 시험해보려는 뜻에서 나와 곧바로 편지에 써서 드러내 칭찬한다면 어찌 오만한 마음을 열어주어 진덕수업(進德修業)2)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곧 형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만 혹여 세상의 풍조에 관계가 된다는 것을 어른께서는 혹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무릇 이런 일은 반드시 서로 도와서 강론하고 익힌 후에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학문은 반드시 강론한 이후에 밝아진다." 했고, 또 "벗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했으니, 하물며 이제 스승이 돌아가신 뒤이겠습니까? 이후로는 편지로든 만나서든 장점을 인정하지 말고 오직 단점을 책망하여 하나의 깨진 기물(器物)이 되지 않도록 해 주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저는 스승을 20년간 따랐지만 텅텅 비어 하나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강가에 집을 지었으나 목말라 죽는 처지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충분한 국량이라 일컬으며 발휘하는데 감히 참여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보살펴주시고 아껴주심을 입었으니, 가르침을 받을 때에 질정하고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감히 터득한 하나의 견해를 드려서 태양 아래의 등불 같은 미력이나마 돕지 않겠습니까? 親沒兄弟之喩, 說到天理人情十分盡頭, 令人感激, 幾乎淚下.噫, 一自友道之喪, 切偲之風, 無地可見.惟丈超出世習, 有此眞切之敎, 虔心祗奉之餘, 亦願廣將此義, 均播於同門諸子心田中也.才儁德厚之獎, 胡不稱之至此? 如使有一二可取, 而出於君子譽人有試之意, 直於書尺顯揚, 豈不啓侈心而妨進修乎? 只此便是不以兄弟視, 而或涉世風也.丈或未之思歟? 大抵此事, 必待麗澤講習而後就.故曰: "學必講而後明." 又曰: "未有不須友而成者." 而況今日山頹之後乎? 自後書面, 毋長之是與, 惟短之是攻, 俾不作一箇破器物, 至仰.澤述從師二十年, 空空無一得, 眞所謂家河而渴死者, 何充量之是稱, 而發揮之敢與哉? 雖然, 旣荷眷愛, 承誨之際, 有可質疑者, 敢不效一得之見而助日下之燈也? 절시(切偲)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간절하고 자상하며 화락하면 선비라 부를 만하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절절시시'를 줄인 말이다. '절절시시'는 붕우에게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 것을 말하고 '이이여야'는 형제에게 화락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진덕수업(進德修業) 《역경(易經)》의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덕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는다. 충신은 진덕하는 방법이요, 말을 닦아서 그 정성을 세움은 업에 거하는 방법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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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신헌 기환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李愼軒起煥 ○乙丑 저는 통문의 본래 초안이 제 손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저들의 원수가 되어서 첫째는 스승의 명을 속여서 묘표를 고쳤다는 모함을 당했고, 둘째로는 거상(居喪)에서 무례하다는 무함을 당했으니 한 번 두 번 당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세 번째로 말을 지어냈다는 모함을 당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출인(出認)과 물인(勿認) 두 가지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말한 것으로 갑자년 3월 13일에 모현재(慕賢齊)7)에서 강의가 끝난 이후에 권순명과 함께 잘 때에 들은 것이 아닙니까? 또한 어른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여 공공연히 통문에 기록해 넣은 것이 아닙니까? 권순명이 자신들의 통문에는 본래 이런 말이 없는데 우리들에게 속았다고 하여 자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첫째는 간사한 소인이고, 둘째는 하늘이 그 혼백을 빼앗은 것이고, 셋째는 슬퍼할 만한 따름이다." 하였다. 아! 하늘에는 거울이 있고 오장(吾丈)에게는 또 귀가 있으며, 이 사람에게는 입이 있고 저들에게는 또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습니까? 저들이 어른에게 말하여 원수를 나로 삼은 것은 그들 마음이 이미 교묘한 것이고 5개월 동안에 일찍이 한 번도 질문이 없었는데 먼저 정운한 무리를 시켜 나라에 배포하게 하고 "권순명이 억울하게도 김택술에게 헤어짐을 당했다."라고 말하니 그 마음이 더욱 험악합니다. 저들에게서 나온 것이 저들에게 돌아간 꼴이 되었으니 옛말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모함을 꾸밀 때 '마음에 내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라고 했으니, 부끄러운데도 썼다면 이것은 이른바 간악한 소인이고 부끄럼이 없이 썼다면 이것은 하늘이 그 혼을 빼앗아간 것입니다. 다만 널리 배포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멀게 하는 것은 알되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은 슬픈 것일 뿐입니다.【'기위(其謂)' 이하는 도리어 권순명의 편지 가운데 말을 쓴 것이다.】 그들은 일찍이 함재 어른을 문서로 모함했으니 간사한 자들이고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서 말을 지어냈다 의심하니 이것은 참으로 간사한 소인배의 모습이니 크게 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 저들이 어른에게 분명히 말한 것을 감히 어른에게 묻지 않고 억지로 내가 조작한 말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어찌 참으로 슬프지 않겠습니까? 내가 한번 두 번 받은 모함은 단지 내 일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변론하든 변론하지 않던 깊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로 받은 모함은 나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출인과 물인이라는 말은 크게 선사와도 관련이 돼있으니 어른이 친히 그들의 말을 들은 것에 대하여 증명하여 분별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증명하여 분별하겠습니까? 이에 널리 배포해주기 바랍니다. 빨리 답장을 하여 그 증명을 확실히 하고 그 분별을 명확히 하여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澤述以通文本草之出自鄙手, 大爲彼之讐視, 一之而遭幻命改表之誣, 再之而遭居喪無禮之誣, 一遭再遭, 猶不可言, 而復三之而遭造言之誣乎? 出認勿認兩般看, 非丈所云, 甲子三月十三日, 慕賢齋講罷後, 與權純命, 同宿時所聞者乎? 而又非丈之言於衆中而公共記入通文者乎? 權乃謂渠本無此言, 而爲我所誣, 投書子貞曰: "一則奸譎小人, 二則天奪其魄, 三則可哀也已." 鳴呼! 上天有鑑, 吾丈又有耳.此漢有口, 彼亦有心, 其然, 豈其然乎? 彼之發言於丈, 而移讐於我者, 其心已巧, 五朔之間, 曾無一質, 而先使鄭雲翰輩, 布之國中曰: "權純命枉被金澤述之所手分." 其心更可陰也.出乎爾者, 反乎爾, 古語毫不爽矣.其謂"金澤述構誣之時, 得無內愧於心乎?", 愧而書之, 是所謂奸譎小人, 無愧而書之, 是天奪其魄也.徒知廣布之足以瞎人眼目, 而不知適所以自誣自陷, 可哀也已.【其謂以下, 反用權書中語.】彼曾是誣涵丈以文書, 作奸者, 以已己心度人心, 疑其造言, 此固奸細之情熊, 不足大怪.而今以彼之明言於丈者, 不敢問之於丈, 而強謂此漢之造言者, 絶不近人情, 則豈不眞可哀也哉? 蓋此漢一遭再遭之誣, 只關吾之一身, 辨不辨, 不須深究, 至於三遭之誣, 非惟關於此漢, 其出認勿認之云, 有大關先師者, 不於丈之親聞彼言者證之辨之, 將於何而證辨之? 茲以仰怖幸乞.亟賜回敎, 確其證明, 其辨有以落彼奸膽, 而鮮人眩惑也. 모현재(慕賢齊)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사우(祠宇)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광(李洸)이 향풍을 바로잡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직한 남산동백발회(南山洞白髮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식(李植)이 종조부인 이광의 백발계를 다시 조직하여 향풍을 길러 향약을 실천하였는데, 한동안 기능이 약화되었으나, 1862년(철종 13) 옛날 백발회 유지에 모현재를 창건하고, 동계(洞契)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또한 항일투쟁을 벌여 일본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구로회원(九老會員)이 있으며, 백발회비각과 구로회 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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