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만오정 시에 차운하다 주인은 최원숙 만열이다. 次晩悟亭韻【主人崔元淑滿烈】 만년에 초연히 초가 정자 하나 짓고 晩節超然一草亭달밝은 창가에 깨어 허령269)을 깨닫네 明牕惺惺悟虛靈구름 머문 영주산270)은 선가의 인연 깊고 瀛岑雲宿仙緣重물결 맑은 초강271)은 속된 기운 깨우네 楚澤波淸俗氣醒정말 공교로운 시율은 기로를 흥기시키고272) 詩律眞工夔老興보수 같은 자손들은 사가에 푸르구나273) 兒孫寶樹謝家靑풍진의 땅은 지금 또 삼분 세상274)이니 風塵今亦三分世흑모를 쓴 것이 어찌 관녕275)뿐이리오 白276)帽何曾獨管寧 晩節超然一草亭, 明牕惺惺悟虛靈.瀛岑雲宿仙緣重, 楚澤波淸俗氣醒.詩律眞工夔老興, 兒孫寶樹謝家靑.風塵今亦三分世, 白帽何曾獨管寧. 허령(虛靈) '허령불매(虛靈不昧)'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명덕장(明德章)의 주에서 "밝은 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에 수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영주산 '영잠(瀛岑)'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영주산(瀛州山)을 가리킨다. 초강 '초택(楚澤)'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초강(楚江)을 가리킨다. 기로를 흥기시키고 음률에 뛰어나다는 뜻이다. '기로(夔老)'는 '기(夔)'를 가리키는데, 순 임금 때 음악을 관장하는 악정(樂正)을 맡아 오음(五音)ㆍ육률(六律)를 바로잡았다. 《書經 舜典》 보수……푸르구나 훌륭한 자손이 많다는 뜻이다. '사가보수(謝家寶樹)'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보수(寶樹)'는 옥수(玉樹)와 같은 말로 남의 집 훌륭한 자제를 비유한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섬돌 앞 뜰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삼분 세상 천하가 위(魏), 촉(蜀), 오(吳)로 나뉘어 다투던 세상으로 난세를 비유한다. 흑모를……뿐이리오 자신도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청빈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관녕(管寧)'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40년 가까이 지냈다. 명제(明帝)로부터 태중대부(太中大夫), 광록훈(光祿勳) 등의 제수가 있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청빈을 달게 여겨 항상 '검은 모자[皁帽]'만 착용하고 지냈다고 한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白 '皁'자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천태산에서 감회가 있어서 2수 天台山有懷【二首】 쇠한 나이엔 가는 봄 아까워 정말 괴로운데 衰年正苦惜殘春늘 한스럽네 천시는 사람 기다리지 않는구나 每恨天時不待人가슴 속엔 공연히 만 권의 책을 간직했으니 胸裏徒然藏萬卷술잔 앞에서 원하노니 취해 천 순배 해야지 樽前但願醉千巡척지금성의 손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280) 擲金孫綽今安在산가지 쌓는 마고는 분명 정신이 있는가281) 積筭麻姑定有神어여뻐라 시냇물은 얼마나 맑고 시원한가 憐爾澗流何淸洌한 바가지 마셔보니 내 입술이 상쾌하네 一瓢試酌爽吾唇나의 생애는 오십도 차지 않았는데 我生不滿五旬春회상해보니 까마득해 옛사람 같구나 追想茫茫若古人이곳 저곳 풍파에 오랜 세월 놀라고 南北西風驚百劫아 육아와 양괴282)의 고통에 세 번 곡을 했네 亐莪樑痛哭三巡비방의 발길질 감내해 그래도 뼈대는 남았고 堪來謗踢猶餘骨가난의 마귀 대적하여 아직도 정신은 지켰네 敵去貧魔尙守神어리석은 마음으로 세상 살며 무엇을 했나 度世癡心還爲底신선의 술이나 가지고 내 입에 들이켜야지 思將仙釀入吾唇 衰年正苦惜殘春, 每恨天時不待人.胸裏徒然藏萬卷, 樽前但願醉千巡.擲金孫綽今安在, 積筭麻姑定有神.憐爾澗流何淸洌, 一瓢試酌爽吾唇.我生不滿五旬春, 追想茫茫若古人.南北西風驚百劫, 亐莪樑痛哭三巡.堪來謗踢猶餘骨, 敵去貧魔尙守神.度世癡心還爲底, 思將仙釀入吾唇. 척지금성의……있는가 천대산의 멋진 풍경을 읊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인다. 원문의 '척금(擲金)'은 '척지금성(擲地金聲)'의 줄인 말로 매우 뛰어난 문장을 비유하고, '손작(孫綽)'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은 진(晉)나라의 문장가이다. 손작이 〈천태산부〉를 지은 뒤에 친구인 범영기(范榮期)에게 "그대는 시험 삼아 이 글을 땅에 던져 보게나, 의당 금석 소리가 날 것일세.[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56 孫綽列傳》 산가지……있는가 천태산은 선녀가 내려올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마고(麻姑)'는 전설 속의 선녀 이름이다. 마고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부름을 받고 내려와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서 보니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待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於往昔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神仙傳 卷7 麻姑》 육아와 양괴 돌아가신 부모와 스승을 슬퍼한 것이다. 원문의 '육(莪)'은 《시경》 〈육아(蓼莪)〉 시를 가리키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전에 잘 봉양하지 못하였음을 슬퍼한 시이다. '양(樑)'은 '산량퇴괴(山梁頹壞)'를 말한 것으로 스승의 죽음을 뜻한다. 《禮記 檀弓上》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제 여안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季弟汝安 戊辰 편지를 보니 품행이 단정치 못한 것을 뉘우침이 자못 절실하구나.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나간다면 무슨 덕인들 세울 수 없겠는가. 요즘 들어 일마다 세세한 절목(節目)은 때마침 우연히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세세한 행동에 신중하지 않으면 끝내 커다란 덕에 누를 끼치고, 잠시 풀어 놓으면 천 리로 달아난다. 세세한 절도가 우연히 그렇다고 하여 통렬히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 또한 이 잘못을 끊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젊고 팔팔하기는 고사하고 더군다나 이젠 늙었다. 지금 뜻한 바를 보니 깨우친 것이 많구나.엄숙하고 통명(通明)한 사람은 人之齊聖술을 마셔도 온공(溫恭)히 이겨내거늘 飮酒溫克저 어둡고 어리석어 알지 못하는 자들은 彼昏不知한결같이 취함이 날로 심해지도다 壹醉日富각기 너의 위의를 경건히 할지니 各敬爾儀천명은 다시 오지 않느니라80) 天命不又이는 옛사람이 형제를 경계시키는 시이자, 실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말이다. 지금 마땅히 이 시를 희생 위에 올리는 글81)로 삼아서 지금부터 관을 덮을 때까지 맹세코 범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 일 하나를 마치면 다른 허물을 고치는 것도 쉬이 힘을 얻을 것이다. 주자가 말한 "한결같이 밖으로 내달려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모두 술을 끊은 예를 기준으로 하여 끊었습니다."82)라고 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어떠한가?앞의 편지에서 스승의 학문을 이어 담당하고 후생을 고무시켜 나아가게 할 사람이 없는 것으로 "사문(斯文)이 길이 어두워지고 천도(天道)가 의지할 데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가 없다고 하여 필시 천하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육조(六朝)와 오대(五代)의 수백 년간에 성인의 학문을 이어서 후학을 고무시켜 나아가게 한 이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끝내는 송(宋) 나라 제현이 사도(斯道)를 창명(昌明)하는 데 이르렀으니, 지난 일에서 징험할 수 있다. 또 천하는 지극히 넓고 태어나는 사람은 지극히 많으니, 일방(一方)에서 떨쳐 일어나 의연히 도를 담당하는 이가 없으리란 걸 어찌 알겠는가. 이제 눈앞의 한 문하에 사람이 없다고 미루어 단정해 버린다면, 일세(一世)의 사람을 모조리 기만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또 하늘이 나에게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품과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은 마음과 굳세고 씩씩하며 바르고 빼어난 형체를 부여해 주었다. 만약 과연 일문(一門)과 일세에 사람이 없다면, 내가 품부 받은 선과 여러 미덕으로 유독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없겠는가. 익주(益州)는 피폐하고 유선(劉禪)83)은 암약(闇弱)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공명(孔明)이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운이 영영 끝났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성패(成敗)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84)라고 말하고는, 몸소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였다. 하물며 사도(斯道)는 하늘이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으리니, 국가의 흥망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른바 "하늘이 변하지 않으니, 도 역시 변하지 않는다.",85) "천년이 되어도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항상 그러한 도의 이치이다."86), "양(陽)에는 다하는 이치가 없다."87) 등의 설은 천고의 격언이다.도를 배운다는 선비가 어찌하여 믿음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성급히 스스로 억측하여 단정하는가? 이는 일세를 속이고 천하를 버리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혹 이로 인하여 풀이 죽고 타성에 젖어 마침내는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버리는 부류로 돌아갈까 저어되니,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과 시비를 따지고 다투지 않아야 함은 참으로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이는 다만 일이 자기 한 몸에 관련된 것일 때 말이고, 부형(父兄)과 선사(先師)에 관련된 것이 있다면 자제와 문생 된 자로서 어찌 편안히 아무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세교(世敎)와 학술의 커다란 관건에 미쳐서는 더욱 입을 닫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그러므로 맹자는 양주(楊朱)ㆍ묵적(墨翟)에 대해서, 주자는 육구연(陸九淵)88)ㆍ진량(陳亮)89)에 대해서 일찍이 '시비를 다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금일에 있어서는 '부강(富强)한 것이 윤리나 강상보다 중하다.'거나 '예수가 공자보다 성인이다.'라는 등의 일종의 괴이한 논의는, 우리가 마땅히 다투고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에 해당한다. 다만 덕이 정립되지 못하고 식견이 투철하지 못하며 필력이 장대하지 못하면 우선 날카로움을 비축했다가 발휘해야 될 것이다. 대개 이 두 가지 조목은 네가 세상의 도에 절망하고 자기 편한 데 안주하여 큰 성취에 방해될까 염려되어 나도 모르게 말이 여기에 이르렀다. 헤아려서 주의하길 바란다.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은 참으로 갑작스레 마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이 진실로 함께 모이면 몸이 하나로 모이지 않더라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너와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선성(先聖)의 도이고, 힘쓰는 것은 선인(先人)의 가르침이며, 좋아하는 것은 경전(經傳)의 의리(義理)이고, 싫어하는 것은 세속의 더러움과 비루함이다. 빛깔 없는 아가위 꽃90)이 두 곳에서 서로 비추고, 소리 없는 질 나발과 젓대91)가 날마다 서로 화응하니, 그 함께 모임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만약 지상(志尙)은 길이 다르고, 호오(好惡)는 취향이 다르다면, 비록 탁자를 같이 하고 이불을 나란히 하여 밤낮으로 함께 한들 어찌 그 마음이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서로 위로하며 천천히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동기와 골육이 구렁에 나뒹구니 세상을 사는 즐거움이 더욱 싫습니다."라는 말에서는 우려가 매우 깊고 천륜의 정이 지극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사가 절박하고 뜻이 애상(哀傷)하니 어찌하여 굳이 그리하는가? 무릇 몸이 구렁에 있음은 지사(志士)가 잊지 않는 것이고, "하늘이 살리고 하늘이 죽인다."92)는 것은 달인(達人)의 말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다소 유쾌해질 것이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어서는 마땅히 아귀(餓鬼)가 되어야지, 다시 수귀(愁鬼)가 되어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93)라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치에 닿은 견해이다.옛사람이 또 말하기를, "곤란이 극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데 이르면,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슬기롭게 스스로 마음을 너그러이 풀어놓으라."94)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가 비록 곤궁함이 심하나 또한 앉아서 서책을 보고 학도를 지도하고 여력으로 조금이나마 집안을 다스려 여전히 먹고 입으며 죽지 않으니, 밭을 갈거나 삯일을 하거나 등짐을 지면서 자질구레한 재물을 얻어 입에 풀칠하는 자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이로 헤아려 보면 한바탕 더욱 유쾌해질 것이다. 일전에 규모를 조금 바꾸어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겠다고 말한 것은 너의 지상(志尙)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것이 일시의 충동에서 일어난 것이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털끝만큼의 생각이라도 아직 마음속에 있다면 일찍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무릇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고루 네 갈래 신분의 백성이지만 청탁(淸濁)과 아속(雅俗)의 품격이 절로 다르다. 성인의 "채찍을 잡는다."95)는 말 역시 유래가 있는 말이지만 실제에서 나온 게 아니라 다만 부귀는 결코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평소에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일에 몸을 굽혀 나아가서 종신토록 좋아할 즐거움을 버릴 수 있겠는가.사람의 앎에 있어서 자신을 아는 데 밝은 것을 귀히 여긴다. 스스로 예전을 징험하고 장래를 헤아려 보면, 우리의 타고난 복과 심력이 과연 풍족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다만 현재의 분수를 따라 살아감만 못할 것이다. 만약 앞으로 생활이 조금 풀린다면 참으로 싫지 않겠지만, 끝내 여기서 그치더라도 편안히 여길 뿐 다른 게 없다. 불행히도 구덩이 속 시체가 되어도 또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천명을 알며, 덕을 세우고, 자신을 이루는 도가 될 것이다. 어떠냐? 見書, 以行修未端, 悔懊頗切.稱此以進, 何德之不可立哉.至於近日, 事事細節, 時適偶爾.然不矜細行, 終累大德, 晷刻放之, 千里其奔.其不可以細節適爾而不痛懲也, 審矣.吾亦未斷此失, 迄至于今, 舍曰少壯, 矧玆老大.今見所志, 警發多矣."人之齊聖, 飮酒溫克.彼昏不知, 壹醉日富.各敬爾儀, 天命不又." 此古人兄弟相戒之詩, 而實爲吾輩準備語也.今當以此詩作牲上載書, 從玆至于蓋棺, 誓不相犯焉, 已矣.了此一事, 他過之改, 亦易得力.朱子所謂"一種向外走作, 心悅之者, 皆準止酒例絶之"者, 可庶幾矣.如何如何? 前書, 以無有承當師學而鼓進後生者, 謂"斯文之永晦、天道之無恃, 從可知矣." 此非以無道必天下而棄之者乎? 六朝五季數百年間, 不見有承聖學而鼓進後學者.然卒至於有宋, 諸賢倡明斯道, 已事可驗也.且天下至廣, 人生至衆, 安知不有奮起一方, 毅然任道者.而乃以目前一門之無人, 而推斷而已, 則不幾於盡欺一世之人乎? 且天賦我以純粹至善之性, 虛靈不昧之心, 强壯正秀之形.若果一門一世之無人焉, 則以我所稟之備善衆美, 獨不可以當此任乎? 夫以益州疲弊, 劉禪闇弱, 孔明非不知其無可如何.然而不曰:"國運永訖.", 但曰:"成敗非所逆覩.", 而自盡鞠躬盡瘁之力.而况斯道之極天罔墜, 非比國之有興亡.若乃所謂"天不變, 道亦不變."、"千秋必返, 道之常."、"陽無可盡之理."等說, 千古之格言也.士之學道者, 胡不信及乎此, 而遽自臆斷也.是則非惟欺一世、棄天下.恐或因此而沮喪偸墮, 終歸於自欺自棄之科, 可不省哉.不宜與人較爭是非, 固如所喩.然此但以事涉一己者言, 若有關於父兄、先師者, 則爲子弟、門生者, 豈可晏然無事而已.且若至於世敎、學術之大關, 則尤爲不容含黙者.故孟子之於楊ㆍ墨、朱子之於陸ㆍ陳, 曾不以不宜較爭是非已之.在今日則如"富强重於倫綱"、"耶蘇聖於孔子"等一種怪論, 吾輩在所當爭而不可已者也.但德未立, 識未透, 而筆力未壯, 且可蓄銳而發之耳.蓋此二款, 有慮汝之望絶世道, 安於自便, 有妨大就.故不覺言之至此, 想諒加意也.團聚之樂, 固難猝辦.然心苟團聚, 則身不團聚, 何病焉.彼此所志者, 先聖之道;所勉者, 先人之敎;所好者, 經傳義理;所惡者, 世俗汚陋.隔色棣花, 兩地交暎, 無聲塤篪, 逐日相和, 其爲團聚, 孰加於此.如使志尙殊途, 好惡異趣, 雖同卓聯被, 以日以夜, 安能捄其心之燕越哉? 用是相慰而徐圖之, 可也."同氣骨肉, 宛轉溝壑, 益厭生世之樂."之喩, 可見憂慮之遠、倫情之至.然辭涉切迫, 情犯哀傷, 何必乃爾也.夫身在溝壑, 志士不忘, 天生天殺, 達人有言, 思之到此, 多少快活.且昔人云:"死當爲餓鬼, 不宜復爲愁鬼, 以一身供兩役." 此眞理到之見.昔人又云: "到困極難勘處, 常將不如我者, 巧自寬解." 今吾輩雖窮甚, 亦坐而看書, 課學徒, 餘力略些幹家, 猶得喫著不死, 其視耕田行傭負任而得零財糊口者, 可謂遠勝.以此算來, 更快一場.前以少變舊規經營些業見告.揆以汝之志尙, 知是發於一時衝激, 非由中而出也.然不免一毫念頭尙在裏許, 則不如早早刷刷棄去之也.夫士農工商, 均爲四民, 淸濁雅俗, 品格自殊.聖人"執鞭", 亦有爲之言, 非出實際, 特以明富之決不可求.則吾輩安可俯就平日不屑之業, 分却終身所好之樂乎? 人之有知, 貴其自知甚明.試自驗前量來, 吾輩之福分心力, 果能豊足者乎? 不如且隨現分活去.如得前頭稍紓, 則固所不厭.終止於斯而已, 亦安之無他.不幸而至爲溝中瘠, 又無如之何矣.此當爲安分、知命、立德、成身之道.如何如何? 엄숙하고……않느니라 《시경》 〈소완(小宛)〉의 시 구절이다. 희생……글 《맹자》 〈고자 하〉에 다음 구절이 보인다. "오패 중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가장 강성하였는데,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에서 제후들을 모아놓고 희생을 묶어, 그 위에 맹약하는 글을 올려놓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의식을 하지 않고 명령하였다." 한결같이……끊었습니다 《주자대전》 권31 〈답장경부(答張敬夫)〉에 나오는 대목으로 일부 생략되었다. 유선(劉禪) 중국 삼국 시대 촉(蜀)나라 유비(劉備)의 아들이다. 소열제(昭烈帝) 유비가 죽자 제위를 이어받은 그는, 제갈량(諸葛亮) 등 어진 신하들이 죽은 뒤 황호(黃皓) 등 간신을 중용하여 국정을 문란하게 하다가 나라를 잃었다. 성패(成敗)는……아닙니다 제갈량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이……않는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나니,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도 또한 변하지 않는다.[道之大原, 出於天, 天不變, 道亦不變.]" 라고 하였다. 천년이면……이치이다 "千秋必返 理(古)之常"이란 말이 순경(荀卿)의 말로 전하여 온 것 같다. 양(陽)에는……없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라고 하였다.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자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ㆍ상산(象山)이다. '심즉리(心卽理)' 설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유교의 고전인 육경(六經)조차도 '내 마음의 주각(註脚)'이라 하여 주자와 대립하였다. 진량(陳亮) 1143~1194. 자는 동보(同甫), 호는 용천선생(龍川先生)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강력히 반대하여 1183년 절교를 이끌어 낸 송나라의 학자 관료이다. 그는 주희와 친하면서도 학문적 지향은 달랐으니, '사공지학(事功之學)'을 주장하여 실제적인 공용(功用)과 효과를 중시하고 이학가(理學家)들의 '의리(義理)'를 실질이 없는 빈말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서로 《용천문집(龍川文集)》ㆍ《용천사(龍川詞)》 등이 있다. 아가위 꽃 아가위 꽃은 《시경》 〈상체(常棣)〉에 "아가위 꽃 그 꽃송이 울긋불긋 아름답네. 오늘의 모든 사람 중에 형제보다 좋은 건 없네.[常棣之華, 卾不韡韡.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우애 있는 형제를 가리킨다. 질나발과 젓대 서로 가락이 잘 맞는 두 개의 관악기로서 보통 형제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 〈소아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 불고, 아우는 피리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 하였다. 하늘이……죽인다 《주자어류》 권132에 보인다. "어떤 이가 호방형(胡邦衡)이 신주(新州)에 17, 8년간 있어도 아무 탈 없는 것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이 살리고 하늘이 죽이는 것이니, 도의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죽어서는……된다 《송자대전》과 김규오(金奎五, 1729~1791)의 《최와집(最窩集)》에 따르면,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 유배지에 있을 때 어떤 이가 전혀 근심 어린 빛이 없는 까닭을 묻자, 답한 말이라 한다. 곤란이……갖는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 초록된 《복수총서(福壽叢書)》라는 책의 질병을 물리치는 열 가지 방법 중 세 번째 "늘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와 흡사하다. 채찍을 잡는다 《논어》 〈술이(述而)〉에 보이는 공자의 말이다. "만약 부가 추구해서 되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가 하겠지만, 만일 추구해서 될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子曰 :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제 여안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季弟汝安 庚午 보내온 편지에 괴로운 상황은 반도 못 읽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 비록 그렇지만 천하의 일이란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다. 최근 한두 가지 목격한 일로 보면 괴로움이 되돌아 즐거움이 되는 경우가 있더구나. 한번 들어 보거라. 어떤 사람은 억척스럽게 이익을 도모하여 봄에 꾸어주고 가을에 거두면서 은혜와 원한이 교차하고,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와 자고 먹는 것을 제 때 못하면서, 겨우 터전과 재산을 일궜지만 도적이 집으로 들어와 칼날이 몸에 닿으니, 그것을 면한 사람은 다행이다.어떤 사람은 자식이 돈 쓰는 것을 금하다가 독살을 당하거나 자식을 명토(名土)로 옮겼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그 망하지 않은 것은 재물이지만, 그 집안은 망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재물이 없고 가난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런 근심에 이르렀겠느냐. 우리들이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집안에 앉아서 글을 보고 있으니 가령 구덩이에 빠져 죽더라도 저들이 칼날과 독으로써 하는 것에 비하면 또한 복되지 않겠느냐.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곧바로 스스로 행복하여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어떠냐? "변복(變服)은 변형(變形)의 조짐이다."고 논한 것은 옳다. 혹자는 치의(緇衣)ㆍ고구(羔裘)를 끌어들이고 우리나라는 푸른색을 숭상하여 문제가 없다고들 하는데 잠꼬대라고 이를 만하다. 저들은 이미 예의를 썩은 흙덩이로 여기는데 우리는 다행히 옛 옷을 입고 있고, 저들이 이미 강토(疆土)를 빼앗았는데도 우리는 나라를 아끼고 있다. 가죽이 남아 있지 않고서 털을 어떻게 전하겠느냐. 그 푸른 것이 장차 검어지고, 검은 것은 장차 자를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처음부터 변복령에 복종하면 끝내 도망하여 벗어날 수 있겠느냐. 근래 절구 시 하나에 뜻을 드러내어 지어보았다.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온 지 몇 천 년이 되었는가 殷師東來幾千年흰 옷을 숭상하는 유풍이 오늘까지 전해졌네 尙白遺風此日傳하물며 우리 상을 당한 자손들이 矧我孤哀當室子차마 검은 옷을 몸에 입을 수 있겠는가 忍將黑服著身邊저들에게 할 답을 갖춘 셈이니 깊은 말은 하지 않고 우선 여기까지 만하겠다. 來章艱苦之狀, 讀之未半, 不覺淚雨.雖然, 天下事有乘除.以近日一二目擊事觀之, 有可以回苦作樂者矣.試聽之, 有人矻矻孜孜, 以利爲謀, 春散秋斂, 恩怨交至.晨出夕歸, 寢食失時, 僅得基業, 而暴客入室, 白刃逼身, 其得免者, 幸也.有人禁子用錢, 幾遭其所毒, 移子名土, 又遭其所訴.雖其不亡者財, 而其家則不可謂不亡矣.使二人者無財而貧, 豈至此患乎? 吾儕雖云艱寠, 尙得坐屋裏看文字, 卽使有塡壑而死, 視彼以刃以毒者, 亦不爲福乎?念之至此, 卽可以自幸而不以爲戚也.如何如何? "變服爲變形之兆."所論, 是矣.或者引緇衣羔裘, 我國尙靑而爲無傷, 可謂夢囈語也.彼旣糞壤禮義, 我幸其爲古衣;彼旣奪取疆土, 我愛其爲國尙.則皮之不存, 毛將安傳? 其靑者將黑, 黑者將薙, 吾無疑也.始服其令, 終其逃脫乎! 近有一絶詩, 見志曰:"殷師東來幾千年, 尙白遺風此日傳.矧我孤哀當室子, 忍將黑服著身邊." 爲備答彼, 故不欲深言, 而姑及此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재 전장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靜齋田丈 癸酉 현동의 묘에 석물이 없다는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한탄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삼백 원의 돈이 진실로 모으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으기 어려운 것은 의론입니다. 이제 사인(士仁)이 이장하고자 하고 순형(舜衡)이 힘을 쓰고 있으니, 비록 정성과 힘이 있는 자라도 누가 이 일에 기꺼이 참여하여 돈만 쓰고 구설을 초래하려고 하겠습니까? 기이하도다! 한쪽 사람의 무함으로 선사의 평생 절의가 사라진 마당에 동문의 그 많은 재물로 고용한 사람들이 손을 댄 난본(亂本)을 간행하면서 유어비어와 이간하는 말로 스승 집안 형제들의 불화를 초래하는 바람에 장사지내는 날 즉시 갖출 수 있었던 석물을 십여 년이나 오래도록 까마득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이 잔인합니다. 용동에서 간행한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우리 어른이 그 일에 참여한 것은 지금에 이르러 뒤늦은 후회가 있지 않으십니까? 시세와 의리로 헤아려 보건대, 이장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사인이 마음을 돌리기만 한다면 석물의 비용을 마련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 없을까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부디 정성을 들여 사인의 마음을 돌려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성의 오진영이 한창 스승을 무함할 때에 사인이 그들 편이 되었던 것은 사실 한때 미혹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함재 어른을 찾아가 전날의 잘못을 사죄하고, 제 동생을 찾아와 저에게 그러한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사람이 이미 잘못을 깨달으면 마땅히 이전의 허물을 추궁하지 말고 합심하여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듣건대 올가을 선사의 기일에 임참봉(任參奉)이 우리 어른의 허물 때문에 제사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진실로 자식의 도리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조카와 화합하지 못하는 뜻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율곡이 말하기를, "한 집안 사람이 불화하는 것은 다만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88) 했으니, 이 말을 생각해 볼만 합니다. 비록 그러나 제 견해로 헤아려 본다면 우리 어른이 선대의 일을 성취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는 것으로 석물보다 더 급한 게 있습니다.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이것이니, 왜입니까? 석물은 훗날에 정성과 힘이 있는 자가 있다면 가능하고, 가장과 연보는 우리 어른처럼 사실을 두루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완급을 결국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玄阡石儀之闕, 誠如下喩所歎.然三百圓金, 實非難合.所難合者, 議論也.今士仁欲緬遷, 而舜衡宣力焉, 雖有誠力者, 孰肯與於是役, 費金而招口哉? 異哉! 一邊人之誣了, 先師生平節義銷了,同門幾多物力, 印出手分之亂本, 而以游辭間言, 致師家骨肉之不和.使此葬日, 卽具之石儀, 茫然於十餘年之久, 其心忍矣.至於龍刊之事, 又何爲而然者? 吾丈之與其役, 至今不有追悔乎? 大抵揆以時勢義理, 緬葬不可爲者.如得士仁回意, 則石儀之運謀出力, 不患無人.幸積誠而回之, 如何? 方陰之誣師也, 士仁之右彼, 實爲一時之惑.年前來謁涵丈, 謝前日迷錯, 訪見舍弟, 傳意鄙生而去.人旣覺悟, 不宜追咎, 而同心圖後事, 可也.聞"今秋師忌, 任參奉以吾丈之累, 不參祀有言"云, 如此者, 固爲子道之不安, 亦不爲示不和令姪之意乎? 栗翁言"一家之人不和, 只爲誠意未盡." 此可思也.雖然料以淺見, 吾丈所痛先事未就, 有尤急於石儀者.家狀年譜, 是也, 何也? 一則後日之有誠力者, 可能, 一則非吾丈之備知事實者, 不可能.二者之緩急, 竟如何? 願有以深諒焉. 한 집안……때문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40 〈자경문(自警文)〉에 보인다. 〈자경문〉에는 화(和)가 아닌 화(化)로 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위헌에게 답함 答洪韋軒 저번에 편지를 올릴 때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솔직하게 무릅쓰고 말씀을 드렸으니, 오직 큰 허물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바다와 같은 도량으로 용서해주시고 옛날 강론했던 우의와 오늘날의 연고를 말함에 진실한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조금도 간극이 없으시니 군자의 아량은 못난 제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문집의 분배가 거의 다 끝난 뒤에 특별히 경소의 문집을 보내주셨으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이 어른은 참으로 제가 공경하여 우러르는 분입니다. 또한 일찍이 저의 집에 왕림하여 사문의 작고하신 뒤의 연보를 작성하는 일에 대해 논의한 적도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후인의 도리에 있어 이미 돌아가신 분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 약간의 도움이나마 미치지 못했으니, 마땅히 현재 비석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주어야 하는데 가슴 아프게도 빈털터리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2원을 보내드리니, 돈이 비록 매우 부끄러워 땀이 나지만 그래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당신의 조카 복경(復卿 김인영)이 이미 죽었다 들었습니다. 비록 신구(新舊)의 학문으로 길을 달리하여 바람난 말과 소가 서로 관심이 없듯 먼 관계이지만 옛날 같은 문하에 있었고 또 나이도 동갑인 정의를 생각할 때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간재의 문하에 옛날 홍씨, 이씨, 김씨가 있어 '세 명의 갑신생[三甲申]'으로 일컬어졌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당(陰黨)이 이로 인하여 내가 홍 아무개를 보러 갔던 일을 가지고 총독부 내의 한 자리를 구하러 간 것이라고 무함하였으니, 아, 얼마나 심한 짓입니까? 들으니, 복경이 정재(靜齋 전화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람이 선사를 오래도록 따라 뜻에 터득한 바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소의 존경하는 뜻을 표하고 다시 스스로 겸손해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무함한 자의 말과 같다면 어찌 복경의 이러한 편지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단지 한 차례 웃음거리에 붙일 일이며, 족히 말할 것이 못됩니다. 向日奉書, 未及量度, 率直冒瀆, 惟大何是懼.乃蒙海恕, 講昔之誼, 語今之故, 眞意藹然, 少無間隔, 方知君子雅量, 非淺腹所料.又承另惠敬所稿於分帙幾盡之餘, 尤以爲感.此丈, 固生所敬仰.亦曾臨獘廬, 議及師門百歲後年譜事矣.在生之道, 旣未及略助於往者之刊役, 則宜用力於目下之碑事, 而傷哉! 赤手柰如之何? 此呈二圎, 金雖甚愧汗, 猶賢乎已否.令姪復卿, 聞已不淑云.雖新舊殊途, 馬牛之不及, 然念昔同門同庚之誼, 豈不悲傷? 人皆知艮門舊日有洪李金三甲申之稱.故陰黨因是, 誣此漢以往見洪某求督府內一窠任.噫! 何其甚也? 聞復卿與靜齋書, 語及此漢以其從師之久, 意有所得, 致多少敬意, 更有自歉之意云, 若如誣者之言, 豈有復卿此書之理乎? 雖然, 只可付之一笑而不足道也.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위헌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洪韋軒 己卯 지난해 섣달에 편지를 올릴 때 외람되게도 존자의 선친 겸와공에 대한 찬사(贊辭)를 지어 올리고, 주제넘고 경솔하여 누를 끼친 것이 그 죄가 가볍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말은 간단하고 뜻은 갖추어졌으니, 어찌 감복하지 않겠는가?" 하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몇 사람이 아끼고 보호하여 서로 종유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인데 가난하고 병이 들어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셨으니, 다정하신 인자의 말씀은 못난 저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생애 어느 날에나 어른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친구가 서로 사귈 때는 모름지기 서로 아끼고 보호하는 중에 덕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는 한 가지 일이 있어야만 진정한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된다고 여겼는데, 매번 보면 사람들이 이것을 서로 베풀어 행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간혹 먼저 베풀어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아낀다고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원수처럼 틈이 벌어진 뒤에야 그만두니, 이런 세상의 이런 풍습을 장차 어떻게 해야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지요? 집사께서 이에 대해 만약 묘한 계책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의 자는 종현(鍾賢)이고 호는 후창(後滄)이니 모두 선사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후창이라고 한 것은 중봉(重峯)이 호를 후율(後栗)로 한 일6)을 모방하여 저에게 주자가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했던 일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자 하여 권면하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비록 감히 감당할 수는 없으나 선사의 뜻은 학자로 하여금 반드시 스스로 성현을 기약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그 곡절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기에 급급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김택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주자의 뒤를 계승하는 것에 비길 수 있는가? 그 죄는 죽일 만하다." 하니, 자못 가소롭습니다. 客臘奉書日, 猥呈尊先謙窩公贊辭, 方懼僭率奉累獲罪匪輕, 乃蒙"言簡意備, 胡不感服"之喩.事出不圖, 自幸無已.又喩以"吾儕幾人, 愛護相從, 今日急務, 而貧病莫遂." 藹然仁者之言, 區區無似, 亦所願言, 而未知此生何日造拜軒下否也.竊嘗以爲朋友相與, 須於愛護之中, 有德勸過規一段事, 乃爲眞愛獲, 每見人之以此相施者, 鮮矣.其或有先施者, 則非惟不認爲相愛, 竟成仇隙而後已焉.此世此習, 又將如何而可銷也? 執事於此, 如有妙術, 願聞之也.賤字鍾賢, 號後滄, 皆先師所命.而其云後滄者, 倣重峰號以後栗之事, 欲其後於朱子之滄洲而勸勉之也.顧雖不敢當, 先師意則乃使學者, 必以聖賢自期也.或者不知曲折, 急於擠人, 乃曰: "金澤述, 何敢自擬於後朱子也? 其罪可誅.", 殊可笑. 중봉(重峯)이……일 중봉은 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서 율곡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또 다른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양일에 천태산에 올라서 선사의 〈등계화산〉 시에 차운하다 2수 重陽日 上天台山,次先師登繼華山韻【二首】 달빛을 띠고 산을 올라 세속을 벗어나니 帶月登臨出俗塵이날을 어겨 좋은 절기 못 즐길까 걱정했네 恐違此日賞佳辰곱디고운 국화 늘어져 중양절 맞았는데 姸姸菊朶重陽節슬금슬금 세월 흘러 반백의 나이되었네 鼎鼎年光半百人강호에서 실의한 옛 친구들 몇이던가 落魄江湖幾朋舊길에서 보는 것마다 모두 새로움 생기네 觸眸道路盡生新나는 용산음202) 흉내내기 부끄러워서 吾流愧學龍山飮서풍에 떨어지는 두건203) 기다리지 않네 不待西風落帽巾관산을 멀리 보니 비린내 먼지로 어둑하고 關山極目暗腥塵무슨 일로 좋은 절기에 난세를 탄식하는가 底事佳辰歎不辰중구일의 바람 서리는 노년을 재촉하는데 重九風霜催晩歲삼천리 강토에는 오래도록 사람도 없구나 三千疆土久無人수백 년의 옛 의관을 어찌 바꾸리오만 百年那變衣冠舊온 세상이 날로 달로 새로움을 다투어 자랑하네 擧世爭誇日月新국화는 피고 시도 지었는데 술은 누가 보내주나 菊發詩成誰送酒모름지기 가벼운 두건을 씻어 술을 걸러야지204) 且須漉用洗輕巾 帶月登臨出俗塵, 恐違此日賞佳辰.姸姸菊朶重陽節, 鼎鼎年光半百人.落魄江湖幾朋舊, 觸眸道路盡生新.吾流愧學龍山飮, 不待西風落帽巾.關山極目暗腥塵, 底事佳辰歎不辰.重九風霜催晩歲, 三千疆土久無人.百年那變衣冠舊, 擧世爭誇日月新.菊發詩成誰送酒, 且須漉用洗輕巾. 용산음 이백의 시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을 가리킨다. 그 시에 "중양절날 용산에서 술을 마시니, 국화가 쫓겨난 신하 비웃네. 바람결에 떨어지는 모자 취하여 바라보고, 사람을 붙잡는 달빛 춤추며 사랑하노라.[九日龍山飮, 黃花笑逐臣. 醉看風落帽, 舞愛月留人.]" 하였다. 떨어지는 두건 진(晉)나라 때 맹가(孟嘉)가 일찍이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한번은 환온이 9월 9일에 용산(龍山)에서 잔치를 열어 막료들이 모여 즐겁게 놀았는데,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맹가의 모자가 날아갔는데도 맹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풍류를 마음껏 즐겼다. 이에 환온이 손성(孫盛)에게 글을 지어 맹가를 조롱하게 하자 맹가가 곧바로 화답하였는데, 그 글이 매우 아름다워 모두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후에 이 고사로 인하여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겨났다고 한다. 《晉書 卷98 孟嘉列傳》 두건을……걸러야지 도연명(陶淵明)은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쓰고 있던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나서 다시 머리에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宋書 隱逸列傳 陶潛》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구월 십삼일 큰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에 우박이 내리다 九月十三日 大雷電風雨雹 때는 입동 오일 전 時維立冬前五日천기가 평상과 어찌 이리 다른가 天氣一何變厥常그제부터 비가 처음 내리더니 自從大昨雨初下저녁에 바람과 우박 섞여 기세가 더 심해지네 晩雜風雹勢更長큰 천둥과 큰 번개 순식간에 일어나서 大雷大電頃刻起번쩍번쩍 콰당콰당 팔방을 울리네 爗爗轟轟震八方농가는 수확 일로 날로 바빠지는데 田家穡事日以忙응당 수많은 곡식 상자를 손해보리라 應見損却百千箱옛날 주나라의 시월지교 시에 在昔周詩十月交불안하고 불길하며 또 좋지 않다 했네208) 不令不寧幷不臧지금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 是時民生陷塗炭하늘이 재앙을 내려 군왕을 경고한다네 天將災譴警君王이렇게 청구209)에 임금 없는 날을 만나고 遭此靑邱無君日남아난 백성도 없으니210) 내 마음 상하네 靡有孑遺我心傷모르겠네 이 경고는 끝내 누구를 위함인가 不知此警竟爲誰무단히 옥황상제를 노엽게 한 게 아닌가 無乃徒然怒玉皇아니면 또 곧장 신의 도끼와 칼날을 잡고 抑亦直把神斧刃흉한 괴수 한 번 쳐서 골수를 베려함인가 一擊兇酋劈腦漿탁한 세상 굽어보며 티끌을 말끔히 씻고 俯鑑濁世淸塵埃좋은 곡식 가려 취하고 쭉정이 날려야지 選取嘉穀揚粃糠선택은 상제 마음에 달려 감히 말 못하나 簡在帝心未敢言하토의 천한 선비는 진실로 두렵구나 下土賤士誠恐惶 時維立冬前五日, 天氣一何變厥常.自從大昨雨初下, 晩雜風雹勢更長.大雷大電頃刻起, 爆爆轟轟震八方.田家穡事日以忙, 應見損却百千箱.在昔周詩十月交, 不令不寧幷不臧.是時民生陷塗炭, 天將災譴警君王.遭此靑邱無君日, 靡有孑遺我心傷.不知此警竟爲誰, 無乃徒然怒玉皇.抑亦直把神斧刃, 一擊兇酋劈腦漿.俯鑑濁世淸塵埃, 選取嘉穀揚粃糠.簡在帝心未敢言, 下土賤士誠恐惶. 옛날……했네 천둥 번개의 기상 이변은 좋지 않은 징조로 임금이 경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저 월식이야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 일식이야말로 어찌 이리 좋지 않은고.[彼月而食, 則維其常, 此日而食, 于何不臧.]"라고 일식의 변고를 말하고, 이어 "번쩍번쩍 우레와 번개 불안하고 불길하도다. 백천이 비등하고 산마루 높은 곳이 무너지도다.[爗爗震電, 不寧不令, 百川沸騰, 山冢崒崩.]"라고 하였다.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이칭으로 청구(靑邱)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남아난 백성도 없으니 재해로 백성들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가뭄이 너무 심하여 밀쳐낼 수 없네.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벼락처럼 여기고 천둥처럼 여기네. 주나라의 백성이 남은 이가 없거늘, 호천상제가 나를 남겨 두지 않으리라.[旱旣大甚, 則不可推. 兢兢業業, 如霆如雷. 周餘黎民, 靡有孑遺. 昊天上帝, 則不我遺.]"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현광438)에게 화답하다 和玄狂 기인439)은 본디 스스로 기인을 좋아하니 畸人本自好畸人무슨 뜻으로 날마다 자주 찾아오는가 底意相尋日日頻몸소 이르러 격의 없으니 예의 생략하나 親到無間除禮節만날 때에 이견 있어 진리를 찾는다네 見時有異覓詮眞온갖 지략은 헛된 일이 되었고 萬般志略歸虛事반평생 계책은 자문하지 않은 걸 썼네440) 半世生謀用弗詢유연히 한번 웃다가 그대로 좌망441)하니 一笑悠然因坐忘산중엔 나도 모르게 이미 늦은 봄이네 山中不覺已殘春 畸人本自好畸人, 底意相尋日日頻?親到無間除禮節, 見時有異覓詮眞.萬般志略歸虛事, 半世生謀用弗詢.一笑悠然因坐忘, 山中不覺已殘春. 현광(玄狂) 田鎰中(1891~1936)의 호이다. 전북 부안 출신이며, 간재(艮齋) 문인이다. 저서에 《현광유고(玄狂遺稿)》가 있다. 기인(畸人)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자공이 묻기를 '감히 기인(畸人)에 대해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기인이란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도 하늘과는 서로 짝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인이 인간에 있어서는 군자이고, 인간의 군자가 하늘에 있어서는 소인이 되는 것이다.'[子貢曰:敢問畸人. 曰:畸人者畸於人而侔於天, 故曰天之小人, 人之君子. 人之君子, 天之小人也.]"라고 보인다. 계책은……썼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옛날의 역사에서 상고해 보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고, 여러 사람에게 자문해 보지 않은 계책은 쓰지도 말라.〔無稽之言, 勿聽, 弗詢之謀, 勿庸.〕"라고 한 순(舜) 임금의 말이 나온다. 좌망(坐忘) 도가(道家) 용어로, 주객(主客), 물아(物我), 선악, 시비의 차별상을 모두 잊고 자연의 대도(大道)와 합치하는 정신세계를 말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자신의 사지(四肢)의 존재를 잊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물리쳐 형체가 있는 육신을 벗어나고 마음의 지각(知覺)을 버리고 대도(大道)와 동화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한다.[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현광과 함께 산에 오르다 2수 同玄狂登高【二首】 한가롭게 부질없이 노는 사람 되지 않으려 閑來不作謾遊人운자 뽑아 자주 산에 오르지만 싫지 않다네 拈韻登高未厭頻풍진은 안정되기 어려워 때로 또 일어나고 難定風塵時復起세월이 흘러가듯 절기는 다시 새로워지네 若流歲月序還新그대는 무슨 일이 많아 작별하려 하는가 君胡多故將爲別나 또한 무능하여 마음만 서글플 뿐이네 我亦無能但悵神청전449) 마련해 술을 산 건 취하려는 게 아니라 沽酒辦靑非取醉호탕한 흥취 일으킬 인연이 없을 것 같아서지 只嫌豪興却無因몇몇 사람과 더불어 내 마음을 풀었는데 少人可與暢吾心매양 현광과 한바탕 읊조리곤 하였지 每得玄狂爲一吟난리가 극도에 달할 땐 운세 회복을 생각하고 亂到極時思運復선비가 곤궁에 처할 때 사귐의 깊이를 보네 士當窮處見交深일찍이 걱정 가난이 그대를 옥으로 만든다450) 들었고 曾聞玉汝憂貧語또 금인의 경계하고 신중하라는 잠언451) 읽었네 且讀金人戒愼箴해 저물자 다시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았는데 向晩更登高處坐산새가 흥겹게 지저귀며 나를 위로해주네 山禽慰我好懷音 閑來不作謾遊人, 拈韻登高未厭頻.難定風塵時復起, 若流歲月序還新.君胡多故將爲別? 我亦無能但悵神.沽酒辦靑非取醉, 只嫌豪興却無因.少人可與暢吾心, 每得玄狂爲一吟.亂到極時思運復, 士當窮處見交深.曾間玉女憂貧語, 且讀金人戒愼箴.向晩更登高處坐, 山禽慰我好懷音. 청전(靑錢) 청동으로 만든 엽전을 말한다. 걱정……만든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가난과 비천과 걱정과 근심은 하늘이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해서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는 말이 나온다. 금인(金人)의……잠언(箴言) 쇠로 만든 사람으로, 말을 삼가는 상징으로 쓰인다. 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는데 오른쪽 섬돌 앞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 금인이 서 있고 그 등에는 "옛날에 말을 신중히 했던 사람이다."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卷3 觀周》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초겨울 달밤에 3수 初冬月夜【三首】 삼경의 눈달에 한 창문이 차가워라 三更雪月一牕寒뜰 나무가지는 비고 국화도 시들었네 庭樹枝空菊亦殘물결 고요한 강가엔 물고기 평온히 꿈꾸고 波靜江干魚夢穩이엉 얹은 산집엔 새가 편안히 깃들었네 茅添山屋鳥棲安푸른 등 사방에는 모두 훌륭한 선비인데 靑燈四座皆佳士천 가닥 흰 머리에 홀로 옛 관 썼구나 白髮千莖獨古冠즐거운 마음으로 보면 순경이 많나니 樂意看來多順境세상이 촉도처럼 험난해도237) 근심 않네 未愁人世蜀途難맑은 밤은 서재에 오르기 가장 좋아 淸宵最可上書欄푸른 하늘에 달빛을 볼 수 있어서지 爲有靑天月色看눈 가운데 솔의 마음은 전체가 굳고 雪裏松心全體固가을 끝의 산색은 십분 단정하구나 秋餘山色十分端세상의 정은 때로 무단히 나옴을 느끼나니 世情時覺無中發늙은이 회포는 즐거운 곳238)에서 느긋하네 老抱還從樂處寬당부컨대 청년아 나를 저버리지 말라 寄語靑年莫負我서로 기약한 건 한 때의 기쁨 만은 아니네239) 相期不但一時歡초가집이 소쇄하고 청산에 가까우니 茅齋瀟灑近靑山도리어 거동240)이 세상을 벗어났구나 却是行藏出世間식량을 싸온 서생이 가을 지난 뒤 모이고 裹糗書生秋後集약속을 지킨 시객은 한 낮에 돌아오네 證期詩客日中還초심을 쉽게 저버리고 어찌 몸을 마치랴 初心易負寧終己늘그막 학문 더욱 공들여 잠시도 등한하지 않으리 老學加功暫不閒청진을 말하려다 곧바로 잊었으니 欲說淸眞旋已忘망연히 스스로 기쁜 얼굴 지을 뿐 嗒然只可自怡顔 三更雪月一牕寒, 庭樹枝空菊亦殘.波靜江干魚夢穩, 茅添山屋鳥棲安.靑燈四座皆佳士, 白髮千莖獨古冠.樂意看來多順境, 未愁人世蜀途難.淸宵最可上書欄, 爲有靑天月色看.雪裏松心全體固, 秋餘山色十分端.世情時覺無中發, 老抱還從樂處寬.寄語靑年莫負我, 相期不但一時歡.茅齋瀟灑近靑山, 却是行藏出世間.裏糗書生秋後集, 證期詩客日中還.初心易負寧終己, 老學加功暫不閒.欲說淸眞旋已忘, 嗒然只可自怡顔.. 촉도처럼 험난해도 '촉도난(蜀途難)'는 '촉도난(蜀道難)'을 말한다. 촉도(蜀道)는 중국 사천성(泗川省)인 촉 땅으로 가는 길인데, 매우 험준한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세로(世路)의 험난함을 촉도에 비유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아아 험하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噫吁嚱,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했다. 즐거운 곳 안빈낙도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가 누항(陋巷)에 지내며 도를 즐거워한 것을 두고 공자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있는 것을 남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 하였다. 《論語 雍也》 서로……아니네 일생 동안 공부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자는 뜻이다. 거동[行藏] 행동거지를 말한 것이다. 본래 '행(行)'은 세상에 나와 도를 행하는 것이며, '장(藏)'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제 여안에게 보냄 신미년(1931) 與季弟汝安 辛未 형관(炯觀)의 혼사가 여태 정해지지 않아 아마 듣고서 불쌍히 여기리라 생각된다. 대개 "가난이 문둥병보다 추하다."고 옛 속담에 말하였고, '구학문(舊學問)은 부패했다.'는 것이 지금 세상의 공론이다. 이 두 가지를 겸하였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코를 막고서 달아나려 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도리어 가리고 분별하는 바가 있으니 말하자면, "나에게는 세 가지 취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같은 성씨, 기년복(朞年服) 이상의 상(喪)을 당한 이, 부조(父祖)가 몸을 훼손한 이는 마땅히 맞지 않아 합치되기 어렵다."이다.나를 힐난하는 이가 말하기를, "본관이 다르고 성이 같은 혼인은 나라의 풍속에 유래가 오래되었고, 선현도 이를 면하지 못하였소. 거상(居喪) 중에 혼인하는 것은 학문에 독실하고 덕이 훌륭한 사람들도 근래에 많이 행할 뿐만 아니라, 저쪽에 상제(喪制)가 있는 것은 절로 저쪽 일에 속하지, 그대가 어찌 거기에 관련이 있소. 부조(父祖)가 몸을 훼손한 것은 대성(大姓)과 거족(巨族) 중에는 거의 집집마다 있는 것이오. 그대는 후생으로 학문이 남보다 아래고 친족도 번성하지 못하면서 구구히 이 세 가지 조건을 지켜서 굽히지 않으니, 심하오, 그대가 시국에 우활하여 일을 그르침이여!"라고 하였다.이는 공리(功利)로 말한 것이지 도의(道義)의 논의는 아니다.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변하지 않는 도[天經]에서 비롯되고, 성인의 가르침에 확립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 선 왕조에서 법으로 금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여기는 것은 고려의 풍속이 흘러 전해온 때문인데 선현이 면하지 못한 것은 심력이 미치지 못해서이다. 선비의 입신(立身)과 행기(行己)는 절로 정격(定格)이 있으니, 어찌 전례의 미진한 것으로 준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상례 중에 시집이나 장가가는 것은 《소학》에서 엄밀히 따지고96), 《가례》에서 분명히 금하였다.97) 요즘 학문하는 집안마저 무릅쓰고 행하니 의(義)를 팽개치고 도(道)를 어김이 심한 것은 애초에 말할 수도 없다. 저쪽에서 예를 범하는 것은 비록 저쪽 일에 속하지만, 우리가 그와 더불어 혼인하면 우리가 저쪽의 죄를 만드는 것이니 또한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몸의 훼손 여부는 화(華)ㆍ이(夷)의 큰 경계(境界)이다. 천하가 어지러워 더 이상 제한이 없음은 내 힘으로 구원할 바가 아니나, 오직 나는 자손이 화(華)를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먼저 오랑캐 모습을 취한 이가 존귀한 장인과 친밀한 시아버지가 된다면, 비단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자식에게서 중정(中正)함을 빼앗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 가지 관문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觀兒婚事, 尙此未定, 想聞之憫然也.蓋"貧醜於癩.", 古諺云然.舊學腐敗, 今世公論.兼此二者, 人之見我, 將掩鼻而走也.我乃反有所揀別, 而曰:"吾有三不取.同姓也, 有朞以上喪也, 父祖毁形也, 宜乎其戛戛而難合也."有譏余者曰:"貫異姓同之昏, 國俗尙矣, 先賢亦不免焉.乘喪而昏, 不惟篤學長德, 近多行之, 彼之有喪, 自屬彼事, 子何與焉? 至於父祖毁形, 大姓巨族之殆乎家家有者也.子以後生, 學出人下, 族又不盛, 區區守此三關而不撓, 甚矣, 子之迂局敗事也!" 此就功利上說, 非道義之論也.不取同姓, 出於天經, 而立於聖敎, 亦粵我先王朝法禁也.國人之滔滔, 因麗俗之流傳, 先賢之不免, 是心力之不及.士子立身、行己, 自有正格, 豈可以前例之未盡者爲準乎? 喪中嫁娶, 嚴討於《小學》之書, 明禁於《家禮》之篇.近日學家之冒行, 棄義悖道之甚者, 初不可說.彼之犯禮, 雖屬彼事, 我與之昏, 則我成彼罪, 亦不敢爲也.形之毁否, 華夷大防.天下淪胥, 無復制限, 非吾力之所捄, 惟是我欲子之守華也.而先取夷形者, 作其丈人之尊、半父之親, 非惟吾心之不安, 亦豈不奪中於子乎? 此三關者, 決不可得以踰也. 상례……따지고 《소학》 〈명륜(明倫)〉에 "여자는 다섯 가지 취하지 않음이 있다. 역적 집안 자식은 취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집안 자식은 취하지 않는다. 대대로 형벌을 받은 이가 있으면 취하지 않는다. 대대로 나쁜 질병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장자를 잃었으면 취하지 않는다[女有五不取.逆家子, 不取 : 亂家子, 不取 : 世有刑人, 不取 : 世有惡疾. 不取 : 喪父長子. 不取.]"라는 구절이 보인다. 《가례》에서……금하였다 《가례》 〈혼례(昏禮)〉에 "본인과 혼례를 주관하는 이가 기복제 이상의 상제가 없으면 혼례를 할 수 있다.[身及主昏者, 無朞以上喪, 乃可成昏.]"라는 구절이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제 여안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季弟汝安 甲戌 자유(子由)가 초 3일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도를 구하는 간절함과 학문을 하는 근실(勤實)함, 이는 근래 노소(老少)중에서 비할 데가 없을 게다. 어찌 그 경쾌한 발굽이 한껏 내달리다가 중도에 넘어지고, 아름다운 곡식이 이미 이삭을 틔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할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 애석하고 애석하구나.7월 중 그 아이가 나를 보러 이곳에 왔었는데 내가 너의 병을 간호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네가 불행히도 학문을 달성하지 못할까 몹시 걱정하고 우려하며 돌아갔단다. 아직 몇 십일도 되지 않아 그 아이가 이렇게 되다니, 사람일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해보면 성인이 수(壽)를 오복(五福)의 으뜸에 둔 것이 어찌 평생 배부르고 편안한 것을 취한 것이겠느냐. 대개 그 덕업을 다하고 사람의 분수를 다 채우고자 한 것이다. 유호덕(攸好德 덕을 지키기를 좋아한다)98)과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죽음)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안자가 장수하지 못하여 세상을 교화하지 못한 것이 천고의 한(恨) 가운데 하나란다.지난번 너의 병은 필시 불행이라고 이를 만하였는데 마침내 무사하였다. 이는 어찌 하늘이 너를 오래 살게 하여 뜻과 소원을 달성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름지기 '하늘이 나를 이처럼 아끼는데도 내가 만약 저버리면 참으로 사람이 아님'을 항상 생각하여라. 또 '내가 만약 그때 자유처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면 어쩌겠는가?'를 항상 생각하여라. 환난 속에서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고난 속에서 십배면려(十倍勉勵)하는 것이 지극히 옳고 옳을 것이다. 子由以初三日, 不幸長逝矣.念渠求道之切, 爲學之勤, 此近老少無與爲比.豈意其快蹄方馳而中倒, 嘉穀旣秀而不實? 惜哉 惜哉! 七月中, 渠爲見余來此, 聞余往救汝病, 恐汝不幸而未究其學, 深致憂慮而歸.曾未幾旬, 渠乃至此, 人事誠不可測.因思聖人居壽於五福之首者, 豈取其飽安終身哉? 蓋欲其造極德業充盡人分也.觀於攸好德考終命, 其意可知.所以顔子無壽而未化, 爲千古一恨.向日汝病, 可謂必無幸矣.而竟得無事.安知非天欲壽汝而俾究志願耶? 須常思"天愛我若此, 而我若靠負, 眞非人也.又常思'我若當時溘然若子由者, 奈如之何? " 百折不回於顚沛之際, 十倍加勉於艱難之中, 至可至可.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 《서경》 〈홍범〉에, "오복은 첫 번째는 장수이고 두 번째는 부이며 세 번째는 강녕이고 네 번째는 덕을 좋아함이며 다섯 번째는 고종명이다.[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재 전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3월 與靜齋田丈 乙丑三月 보내주신 편지의 숱한 내용이 오진영과 화해한다는 주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가 제 생각으로는 화해〔和〕라는 한 글자를 글 첫머리에 제목으로 둘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가 만약 흔쾌히 선사를 속인 죄를 자복한다면 수용하여 용서하는 것이 옳으나 그가 화해하자고 말한다면 불가합니다. 이에 우리 어른께서 저쪽의 자복을 기다리지 않고 화해를 허락하며 저쪽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가서 만난다면 원한을 푸는 것을 급히 하고 부모를 잊는 것을 쉽게 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우리 어른의 동빙한설〔冬氷雪〕같은 엄함으로 어찌 홀연 점진적이지 않은 따스한 바람과 단비를 지으신단 말입니까? 삼가 싹트고 자라는 공은 보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아, 우리 어른의 이번 일은 이익에 유혹되어서도 아니고 재앙이 두려워서도도 아닙니다. 오로지 진실로 양쪽을 수습해서 뒷일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그 마음과 형세의 측은함을 어찌 모른다 하겠습니까? 다만 문집을 간행하고 비석을 세우는 등의 일은 후인들이 선사를 높이 받드는 것일 뿐이고, 도의와 지절은 선사를 선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선사의 뒷일을 도모하고자 하면서 먼저 그 선사가 되게 하는 도의와 지절을 깨뜨린다면 비록 문집이 천하를 두를 만큼 많고 큰 비석이 백 척 높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선사의 실상이 있고 없음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일이 바른데서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동쪽을 수습하려다가 서쪽이 흩어지고 처음을 도모하려다가 끝이 망가지는 꼴이 되어버리는 데이겠습니까? 우리 어른께서 만약 옛 덕을 간직하여 확고하게 지켜서 사당(邪黨)을 엄히 배척하고 시비를 밝게 판정한다면 반드시 인심이 모두 복종하고 후사가 이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나 만약 한번이라도 저들이 스승을 무함한 죄를 흔쾌히 자복하기 전에 저들과 화합한다면 선사를 아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간옹의 도의는 이처럼 우뚝한데, 아들 아무개는 처음에는 음성의 속임수를 배척하다가 마침내는 음성 쪽에 붙어 아부하니, 삼패문(三悖文)186)이 아무개를 배척한 말이 전부 허언은 아니구나." 할 것이며, 선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오진영이 죄를 자복하지 않았는데 아무개가 먼저 그 그릇됨을 깨닫고 화해를 구걸했다. 그렇다면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을 받았다는 것은 오진영이 속인 것이 아니라 간옹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심히 구애될 필요 없다'는 말도 오진영이 속인 것이 아니라 간옹을 실제로 그런 말을 했고, 신해년의 유서는 간옹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아무개가 위조한 것이다. 간옹의 의리 없음이 이와 같구나!" 할 것입니다. 우리 어른이 천추에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선사가 영원히 다른 사람의 의심을 면하지 못한다면 지하의 원혼이 그 억울함을 언제나 씻을수 있겠습니까? 우리 어른의 현명함으로 어찌 조금도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우리 어른께서 일찍이 조카 사인(士仁 전효일)에게 편지를 보내 정모(鄭某)의 화해설을 비난하시며 "오늘 선친을 배반하고 내일 천사만종(千駟萬鐘)187)을 얻을지라도 만약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를 통하여 우리 어른이 이익에 유혹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일이 천사만종보다 그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전에 엄히 꾸짖었던 화합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연사(練祀)에 참여한 제공에게 올린 편지에서 "만약 의외의 일이 있다면 제가 마땅히 자임하고 제공들에게는 누를 끼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것으로 어른이 재앙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 고소한 재앙은 우리 어른만 홀로 당하고 여러 사람들이 감당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찌 갑자기 제공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뜻을 굽혀 홀로 당하지도 않은 화를 미리 염려하신단 말입니까? 우리 어른께서 보낸 그간의 문자가 산처럼 쌓여있고 백세의 공론이 우레처럼 매서운 데다가 또 이로운 바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후사에 유익할 것도 없는데, 어찌 그리 고달프게 이전의 절개를 버리고 기꺼이 오늘날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의 의롭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으려 하십니까? 절대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호라, 제가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변론하고 성토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마침내 저들 무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했습니다만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속담에도 있으므로 한바탕 웃음거리로 치부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어른이 갑자가 태도를 바꿈에 이르러서는 스승의 무함을 씻느냐 마느냐가 크게 관련되어 있는 만큼 한번 고하고 두 번 고해서 들어주지 않으시면 마땅히 세 번을 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을 고하면 이미 자주 간하는 것이 되어 혹여 우리 어른께서 저를 소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또한 훌쩍훌쩍 울고 싶을 뿐입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 어른은 친히 선사의 유서를 받은 사람이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를 리가 있겠습니까? 구구한 저의 근심이라 결국엔 지나친 염려가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어른이 저들에게 죄를 자복하도록 하신 것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하지 않고 다만 선사께 누를 끼친 것으로 하고, 저들이 묘에 고하고자 하는 것도 무함한 것을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허물하는 것일 뿐인데, 우리 어른은 또한 시간이 지나면 효과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께서 전날 힘을 다해 오진영을 성토한 것은 다만 선친에게 누를 끼쳤기 때문이고 선친을 무함했기 때문이 아니며, 다만 저들이 스스로 실수한 허물 때문이고 선사를 무함한 죄 때문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반복해서 생각해도 끝내 우리 어른의 의중을 알지 못하겠으니, 또한 망연하여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살펴 답장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下喩, 縷縷無非和震主意, 竊以爲和之一字, 劈頭已是不著題.彼若快服誣師之罪, 則容而赦之, 可也, 其曰和之, 則未可也.乃吾丈不待彼服而許和, 不待彼來而往會, 不幾乎急於解仇, 而易於忘親乎? 以若吾丈大冬氷雪之嚴, 何其忽作無漸之和風甘雨也? 竊恐不見生成之功, 而反致災戾也.噫, 吾丈此擧, 非爲利誘也, 非爲禍怵也.亶出於收拾兩邊, 用圖後事, 則其情勢之戚, 豈云不知? 但刊稿竪碑等事, 後人之尊奉先師也, 道義志節, 先師之所以爲先師也.欲圖先師之後事, 而先破其所以爲先師者, 則雖文匝環海, 豐碑百尺, 其於先師之實之無有焉何哉? 而况事不出正, 人不見服, 將收之東而散之西, 圖之始而敗之終乎? 吾丈若能食舊而貞, 嚴斥邪黨, 明定是非, 則必見人心之翕服, 後事之利濟也.若一與彼和於快服誣罪之前, 其知先師者則必曰: "艮翁道義, 若是其卓, 其子某, 始斥陰誣, 而終焉比附陰邊, 三悖文斥某之言, 不是全虛.", 其不知先師者則必曰: "震不服罪, 某先覺其非而乞和, 然則杏下獨命, 非震之誣, 艮翁實有之, 不必深拘, 亦非震誣, 艮翁實有之, 辛亥遺書, 非艮翁手筆, 某之僞造也, 若是乎艮翁之無義也." 吾丈之得罪千秋, 猶是小事, 先師而永不免人疑, 則泉下之寃, 何時可雪? 以吾丈之明, 豈不少念乎此乎? 吾丈曾與令姪士仁書, 斥鄭某和好之說, 不曰: "今日背先人, 明日得千駟萬鐘, 苟有人心者, 何可爲也乎?" 吾以是知丈之不爲利誘也.但未知今日之事, 有何大於千駟萬鐘者, 而許前日嚴斥之和乎? 又呈練祀諸公書, 不曰: "若有意外之事, 則某當自任而不累諸公"乎? 吾以是知丈之不爲禍怵也.但今日震訴之禍, 未必吾丈之獨當.而諸人之不擔, 何遽屈不累諸公之志, 預慮不獨當之禍乎? 吾丈前後文字, 山堆如也, 百世之公論, 雷厲如也.且無所利也, 無所怵也, 無所益於後事也, 何苦而欲棄前節, 甘受今與後不義之斥乎? 絶不敢知也.鳴呼, 生不自量度, 從事辨討, 竟遭罔測之辱於彼輩, 賊反荷杖, 諺或有之, 付之一笑者久矣.至於今日吾丈之忽然改度, 師誣洗否之大關係焉, 一告再告而不見聽, 則當三告, 三告則已數, 而或遭吾丈之疎遠.念到于此, 又欲啜其泣矣.雖然吾丈是親受先師遺書之人, 豈有至此之理? 區區之憂, 知其終屬過慮也.但細觀下喩, 吾丈所以敎彼服罪者, 不以誣師, 而止以累師; 彼之所欲告基者, 不以服誣, 而止以引咎, 而吾丈又望其時月見效.然則吾丈前日盡力討震者, 但以累親, 而不以誣親, 但以彼自失之咎, 而不以誣師之罪乎? 反覆思惟, 終不識吾丈之意, 則又惘然無以爲懷也.綂賜深鑑, 下答千萬. 삼패문(三悖文) 3인의 패륜적 문건으로 오진영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의 우익을 자처한 최원(崔愿), 김세기(金世基), 정운한(鄭雲翰)의 서신을 말한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재 전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4월 與靜齋田丈 乙丑四月 지난 그믐에 답장을 올리며 온 정성을 다했고, 또 답장을 내려주시라고 청했는데 아직까지 잘잘못을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할 때 오진영과의 화해가 서리 내리면 곧 얼음이 얼 듯 이미 굳어진 것 같습니다. 비루한 제가 따뜻한 봄볕이 아니니 어떻게 해빙시킬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입장에서는 도리를 다 할 뿐이고, 들어주고 말고는 기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보내 세 번에 이르고, 세 번을 보내 효과가 없다면 그만둘 뿐입니다. 아, 우리 어른은 피눈물을 뿌리며 부친의 무고함을 변론하고 의로운 깃발을 휘날리며 음성의 도적을 성토한 전정재(田靜齋)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성토하던 도끼를 돌려 폐백으로 만들고 광명을 잃어 안개 속을 헤매신단 말입니까? 천만 번 그 까닭을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진영이 죄줄 만한 것이 없어 앞에서 성토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문집 간행을 그대가 헤아려서 하라', '인가 받는 것을 구애하지 말라' 하셨다는 오진영의 글과 '나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다', '절대로 따르지 말라' 하신 유서의 내용은 끝내 얼음과 숯처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오진영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른의 선고(先考)요 선사(先師)를 어디에 두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일찍이 인가를 받을 뜻이 있으셨다.〔曾有認意〕'는 네 글자는 우리 어른이 직접 들은 것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고소를 당한 화가 헤아릴 수 없어서입니까? 그렇다면 군자는 의리에 있어서 진실로 사는 것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이 있는데, 하물며 이 몸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돌려드리는 것이니 부친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물며 사림이 공적으로 다함께 받은 화이고 우리 어른이 홀로 담당할 일도 아닌 데이겠습니까? 저쪽을 수습하는 것이 뒷일을 도모하기에 이로워서입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의리를 바르게 하여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혀 공을 계산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군자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하물며 부친을 모함에 빠뜨린 자의 힘을 이롭게 여겨 부친의 뒷일을 도모한다면 부친의 혼령이 어찌 기꺼이 편안해 하시겠습니까? 가족의 보호와 화합을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부자와 숙질은 본디 친속이니, 진실로 외부 사람인 오진영을 기다린 이후에 보호하고 화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오진영은 내 부친의 큰 절개를 파괴시킨 자이니, 오진영과 화해하여 가족을 보호하고 화합하는 것을 구한다면 가족을 화합한 방법이 곧 내 부친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뿌리가 보존되지 못하는데 가지가 장차 어떻게 전해지겠습니까?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단 하나도 오진영과 화합할 의리가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어른께서 마침내 이와 같이 하고자 하신다면 이것은 또한 운수 소관이지 인력으로 될 일은 아니겠지요. 오호라, 일신의 이기기 어려운 사욕은 천 길의 구덩이로 떨어지기 쉽고, 한때의 잘못된 견해는 영원한 공론의 성토가 두려우니, 한 사람과 구차히 화합하여 온 세상의 버림과 배척을 받을 것이 부끄럽습니다. 우리 어른께서 다시 십분 생각하여 후회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심정으로 말을 다하여 이렇게 까지 하였으니, 만약 그르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부디 속히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去晦上覆, 旣罄衷悃, 又請賜答, 尙不聞皂白.竊想和震之霜氷已堅矣.鄙生之非陽春, 何足以解之? 但在我者, 有可以盡其道, 其聽與否, 有不可必.故一之再之, 以至于三, 三而無效, 則可以已矣.噫, 吾丈非灑血淚而辨親誣, 麾義旗而討陰賊之田靜齋乎? 胡爲乎回斧銊而作皮幣, 失光明而困霧霾乎? 千萬思量其故, 不可知也.謂震無可罪, 而前討之誤也耶? 則'料量''不拘'之震筆, '自辱''勿從'之遺書, 終是氷炭之不相容.謂震無罪, 則置尊先考先師於何地? 而况'曾有認意'四字, 非吾丈之親聞者乎? 爲訴禍之罔測也耶? 則君子之於義, 固有舍生而取之者, 而况此身還是親之遺體, 爲親而致死, 亦復何惜? 而况士林公共之禍, 而非吾丈之所獨當者乎? 爲收拾彼邊, 利圖後事也耶? 則正誼不謀利, 明道不計功, 固君子處事之方, 而况利陷親者之力, 圖親之後事, 則親之靈, 豈肯安乎? 爲家族之保合也耶? 則父子叔姪, 本是天屬, 固非待外人吳震泳而後, 可保合者.而况震是破壞吾親之大節者? 和震而求保合, 則其所以合家族者, 乃所以破壞吾親也.本之不存, 支將安傳乎? 以此以彼, 以東以西, 一不見其有和震之義, 吾丈乃欲如此, 是亦運氣攸關, 而非人力之致歟? 鳴呼, 一己之難克, 千仞之坑塹易陷, 一時之誤見, 千古之公討可畏, 一人之苟合, 擧世之棄斥, 是羞.切乞吾丈更加十思, 勿致後悔焉.情不自己, 極言至此, 如不爲非, 幸亟賜答.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일전에 편지를 보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할 뜻을 표명하겠다 하신 말씀은 근래에 이미 실행하셨는지요?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은 우리 어른이 실제 주도하셨으니 절교는 사실 오래 전에 한 것이라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검사국에 소환되는 재앙이 있었을 때 한 번 편지가 있었고, 신도(新都)의 모임 때 한 번 만난 이후에 현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실 삼아 말하기를, "정재가 나와 이미 화해했다." 하니, 이전의 편지와 만남은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고, 이후의 식사대접은 비록 갑자기 벌어진 일이나 법도가 엄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니, 그래서 저쪽의 그럴 법한 말을 초래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어른이 선친이 무함 당한 것에 대한 통분이 유명(幽明)을 관통하여 저쪽을 끊을 마음이 금석처럼 단단하겠지만 누가 기꺼이 그러한 자취를 버리고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려 하겠습니까? 만약 계화도 사원에서 처음 제사 지냈던 날에 제창하여 논하기를, "춘추의 법은 난적(亂賊)을 다스릴 때 먼저 그 무리를 다스리니, 무릇 오진영의 당이 되는 자들은 제사 지내는 뜰에 들이지 말라." 했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서 대의가 밝게 드러났을 것이니, 누가 감히 이론을 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들으면 자연 간담이 서늘하여 다시는 감히 구실 삼아 말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봄에 또한 이 무리를 모두 끊어낸 것을 알게 되어 자연 번거롭게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원 사람들의 논의를 앞장세워 "오진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이것은 괴수만 섬멸하고 협박을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견해입니까? 조조(曹操)가 그 괴수가 되니 목을 베고, 순욱(荀彧) 등의 무리는 협박을 못 이겨 위협에 따랐을 뿐이니 징벌하지 말라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도와 이루고 스승의 원고를 같이 고친 자들은 모두 오진영과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당사자만 제거하고 그와 한 몸인 사람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제거한 사람은 한 명의 오진영이고, 같이한 사람은 수많은 오진영이니, 오진영은 말 한 마디 낯빛 한 번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국면을 온전히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은 실제로 의리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의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쁜 사심이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까? 뒤이어 음성의 괴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신이(愼李 신헌(愼軒) 이기환(李起煥))의 입에서 나와 우리 어른에게 의중을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 사람만 제거한다는 말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하는 말을 가지고 감히 일찍이 선사의 친아들을 시험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어찌 오진영을 배척함이 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른이 이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기환에 있어서는 이전에 성토를 제창했던 사람으로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진영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니, 그가 말한 "선사가 있으면 오진영이 없고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라는 수많은 엄정한 문자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요? 스스로 그 문자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죄를 감단(勘斷)한다면 자연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우리 어른께서 기롱하신 것처럼 세 토막을 내야 할 사람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만약 우리 어른이 빨리 편지를 보내 오진영과 절교한다고 표명한다면, 이기환이 감히 다시는 청하지 못할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나의 효를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기환이 악에 빠지는 것을 구하는 어짊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投書, 表絶陰震之喩, 近已實行否? 蓋討震之役, 吾丈實主之, 絶固久矣, 更不須言.但前有檢禍時一書, 新都會一面後, 有玄洞一飯之饋, 故彼得以藉言曰: "靜齋與吾已和." 前之書面, 固爲鑄錯.後之饋飯, 雖出倉卒, 失管不嚴則有之, 所以來彼近似之言也.雖吾丈先誣之痛, 貫徹幽明, 絶彼之心, 堅如金石, 孰肯舍其跡而諒其情乎? 若於華院始祭之日, 倡論曰: "春秋之法, 治亂賊者, 先治其黨, 凡爲震黨者, 勿入祭庭." 名正言順, 大義昭著, 孰敢異論乎? 使彼聞之, 自應膽落, 不復敢藉言, 衆人觀之, 亦知幷絶其黨, 而自不煩投書.惜乎, 其未也! 創院人之論曰: "除震一人外, 其黨皆可與同, 是爲殱厥渠魁, 脅從罔治之義." 噫, 此何見也? 謂曹操爲渠魁而誅之, 彧群輩爲脅從而罔治, 是果成說乎? 凡助成認誣, 同改師稿者, 皆與震一體人.若但除當人, 而與其一體, 是所除一震, 而所同者衆震, 震則不動聲色, 而坐定全局矣.未知爲此論者, 實昧義而然歟? 抑知其非義, 而不勝邪私之發歟? 從而至於欲致書陰魁之說, 出於愼李之口, 而詢及吾丈, 則又知除一人之云, 初非眞心.夫以忘師附賊之言, 敢嘗試於先師親子, 而無忌憚者, 豈非以見其斥震之不嚴而乃爾乎? 吾丈於此, 正可以自反也.在李則以前日倡討之人, 忽然改頭, 欲降于震, 則其所謂有先師則無震泳, 有震泳則無先師等, 許多嚴正文字, 將何以區處? 自以其文自勘其罪, 自不得容其身, 不但如吾丈所譏, 爲三截人而已也.雖然今若吾丈亟投書而表絶震, 則李不敢復請.非惟盡吾事親之孝, 亦爲捄李陷惡之仁, 如何如何?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심 전장희순에게 보냄 與鍊心田丈熙舜 ○乙亥 을해년(1935)삼가 며칠간 살펴보니, 사견(士狷)189)을 거친 충고를 받아들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와 밝은 창가에 앉아서 다시 정밀히 생각해 보니 의리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이미 견고하니, 어른이 말씀하신 사견의 말에 이치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견고하다는 어른의 말은 어른이 전한 말이다.】 이 일의 시비는 처음에 알기 어려우니, 다만 약간의 사심에 가리어서, 나재(懶齋) 어른이 스승을 폄하한 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으로 저를 꾸짖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꾸지람을 당한 이후로부터 황공스러웠으니, 생각해보건대 이것은 부북첨좌(扶北僉座)가 한결같이 말한 공적인 성토입니다. 저번 편지에 당신께서 나재 어른의 편지가 비정한 꾸짖음이라 했고, 신재(愼齋) 어른도 그렇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완전히 명교의 죄인이 되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고, 감격하여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만 크게 한스러운 것이 있으니, 당초에 음성을 성토하는 일은 신재 어른이 창의(倡義)하고 이 몸은 조수로서, 속임을 분별하고 원고를 고증하여 적을 목 베고 무리를 다스리는데 한 문장 한 의리도 그와 함께 하여 서로 상의하여 합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맹세하기를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열전을 함께 한다.'190) 했습니다. 오늘날 영구(嬰臼)191)처럼 의론이 잘 맞던 우리(신재와 후창선생)들이 의론이 다르게 되었고, 순원(巡遠)192)처럼 의기투합하던 우리들이 화합을 잃어서, 의견이 달라지고 정의(情誼)193)가 이렇게 벌어져서 이 지경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히 옛날 글상자를 열어서 신재 어른이 당시에 주었던 시 두편을 얻었습니다. 시에서 말하기를. "그대 오문(吾門)에 명성이 자자한데, 그리워하여 초강(楚江)194)길로 내방하였네. 속임을 변론하고 가르침을 밝혀 스승의 도를 신장시키고, 예를 익히고 경서를 논하여 후생을 창도했네. 춘추대의로 엄격함을 드러내었건만, 사악한 많은 말은 공평하지 않았네. 부끄럽게도 나는 한 일 없이 머리만 세었는데, 사귀는 정이 자상하여 상정에 지나치도록 경계하였네."라고 하였고, 또 시에 이르기를 "갑자기 스승이 돌아가시어 애통하며 통곡하니, 어찌 제자들이 다른 길을 걸었겠는가. 원수를 받아들여 원고를 발간하니 인심이 죽고, 인가를 성토하는 편지가 오니 사기가 살아났네.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 스승을 핑계 대니 음성의 죄가 크고,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름을 부추기니 사람들의 의론은 공평하네. 시비는 절로 정해지니 한탄할 필요 없겠지만, 다만 나의 행실이 실정에 부합할까 두렵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에 당을 다스리는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같지 않음이 오늘날 본 바와 같았다면, 추중(推重)하는 말과 서로 믿는 정이 시편에 나타남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대체로 제가 본 바로는 오늘날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종전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나만 홀로 이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신재 어른도 똑같이 공공의 문자를 만듦에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같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에서 말한바 "어찌 제자들이 길을 달리할 것인가."라는 말은 음성의 당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까? 《시경》에서 말한 "아 슬프도다, 권여(權輿)195)를 잇지 못함이여"196)라는 말은 지금을 이르는 것입니다. 펼쳐서 서너 번 읽음에 큰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시에 차운하여 쓰기를 "그때에 우리 어른은 의로운 소리를 제창했으니, 눈앞에는 단지 다른 길이 없었네. 《춘추》197)로 무리를 다스리는 것이 어찌 심하다 하리오, 《서경·우전(虞典)》에는 완악한 사람도 썼으니 함께 살고 싶어서였네. 무릇 인을 행함에 끝까지 하기는 드무니, 언제나 공평하게 하기를 생각했기 때문이네. 벗에게 선을 권하는 은근한 말은, 속히 회복하여 옛정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었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공을 그리다 만나지 못한 채 가을이 되어서, 북쪽을 바라봄에 멀고멀어 삼십 리 길이네. 비록 주장하는 것은 오늘과 다르지만, 공론이 후생에게 있을까 두렵네. 곤란한 말로 항상 괴로워하니 다른 사람이 믿지 않고, 허물이 이와 같음을 보니 뜻이 평안하지 않네. 끝내는 깊은 속임을 씻어내기 어려울까 두려우니, 푸르고 푸른 미륵봉은 정이 있는 듯하네.'라고 했다. 오호라, 이를 보니 이놈의 정이란 게 또한 슬픕니다. 우리 어른은 매번 내가 고집스러운 것으로 독부(獨夫)198)가 될까 불쌍히 여겼고, 동문들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뜻은 감동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큰 재앙에 붙어있기보다는 의리상 독립하여 두려울 것이 없을 뿐입니다. 아, 내가 어찌 다른 사람과 절교하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 이기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 속에는 반드시 심히 그만두지 못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시대에 나의 마음을 알아줄 종자기(鍾子期)가 없다면 마땅히 훗날 나의 글을 알아줄 양자운(揚子雲)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고치시기를 내가 날마다 고대하고 있다."199)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열통의 편지는 한 번 만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으니, 거의 신재 어른과 한번 말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려 했는데, 한번 이견(異見)이 있은 뒤로부터는 말과 소의 거마 소리가 서로 미침이 없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스승을 폄하한 자를 용서해줬다는 죄목을 얻어서 진실로 사우간을 추종하기 어렵게 되어, 읍에서 바람이나 쐬고 있으니,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竊覸日者, 自經士狷忠告, 似有採納之意未知.歸坐明牕, 更加精思, 知義理之不容已如堅, 丈所道, 狷言有理之悟否【堅丈語之所傳】.蓋此事是非, 初不難知, 只爲些私所蔽.以至有懶丈, 斥我以恕貶師之書矣.自遭此斥, 惶惶恐恐, 意謂此是扶北僉座, 一辭公討者矣.昨承, 吾丈以懶書爲非情之斥, 愼丈亦以爲然云.於是乎, 自幸不全爲名敎罪人, 感之而繼泣也.但有大可恨者, 當初討陰之役, 愼丈倡議, 此漢助手, 辨誣考稿 誅賊治黨, 一文一義, 無不與之, 互商合.決誓'以生同義而死同傳'矣.孰知今日, 嬰臼異論 巡遠失和, 意見之殊, 情誼之豁, 乃至於此乎? 偶閱舊篋得, 愼丈當日贈詩二首.詩曰: "有子吾門籍籍聲, 相思來訪楚江程.辨誣昭訓伸師道, 講禮論經倡後生.大義春秋揭嚴截, 衆言邪詖不公平.愧余無得空頭白, 交情偲偲戒過情." 又曰: "遽見山頹痛失聲, 奈何諸子異蹊程? 納讐稿出人心死, 討認書來士氣生.脫己諉師陰罪大, 斥邪扶正物論平.是非自定未須嘆, 只恐我行孚實情." 若於其時治黨與否之不同, 如今日所見者, 推重之辭, 交孚之情, 安得見於詩篇, 有如此者耶? 蓋此漢所見, 匪今斯今, 從前如茲.非惟我獨如此, 愼丈同製公共文字亦然.非惟同製文字, 此詩所云, "奈何諸子異蹊程"者, 非指陰黨乎? 詩云, "吁嗟乎不承權輿" 今之謂也.披閱三四, 不勝太息, 而次其詩曰: "當日吾公倡義聲, 眼前只此無他程, 麟經治黨豈云甚, 虞典書頑欲幷生, 大抵爲仁鮮究竟, 總緣有意作公平, 偲偲籍籍殷勤語, 遄復耑希見舊情." 又曰: "思公不見感秋聲, 北望迢迢一舍程, 縰然所主殊今日, 可畏公論在後生, 困言常苦人無信, 觀咎其如志未平, 終恐深誣難洗得, 蒼蒼彌峀若爲情." 鳴呼 觀於此, 此漢之情, 其亦戚矣.吾丈每以我之固執, 憫其爲獨夫而懼其不容於同門, 見憐之意可感.然竊自附於大過之時, 義獨立而無所懼耳.噫, 吾豈好絶人, 亦豈好勝人者哉? 其中必有甚不得已者存焉, 如無幷世之子期, 當有後世之子雲矣.雖然孟子有云, "庶幾改之, 予日望之"諺.又云, "十書不如一面." 尙欲與愼丈一番盡言, 俾無餘憾, 而一自異見之後, 非惟馬牛之風不相及.念此得恕貶師之目者, 誠難追從於士友間, 臨風於邑, 情不知裁. 사견(士狷) 《유재집(裕齋集)》 〈전사견(田士狷) 일중(鎰中)에게 답함〉 참고. 생사동전(生死同傳)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열전에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5 영구(嬰臼) 영구(嬰臼)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삭(趙朔)의 문객(門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을 말한다. 진나라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살해하자 공손저구는 정영과 함께 조삭의 고아를 세울 일을 논의하였다. 그래서 정영에게는 조삭의 아들을 안고 산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영아(嬰兒)를 데리고 달아나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하게 하였다. 결국 공손저구는 가짜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살해되고, 조삭의 아들은 정영에 의해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권43 〈조세가(趙世家)〉 쓰러뜨리려 해도 넘어지지 않을 듯이 꼿꼿한 그림 속의 나무를 공손저구와 정영의 절개에 비유한 것이다. 순원(巡遠) 당나라의 명신(名臣)인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병칭이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안녹산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187 〈충의열전(忠義列傳) 장순(張巡)〉 정의(情誼)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情)을 말한다. 초강(楚江)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투신자살한 소상강(瀟湘江)을 가리킨다. 시국을 걱정하며 자결한 굴원의 충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김택술의 처지를 굴원에 빗대서 한 말이다. 권여(權輿) 사물 또는 일의 시작이나 시초를 뜻하는 말로,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權〕를 먼저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의 판자〔輿〕부터 먼저 만드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못함이여 《시경(詩經)》 〈진풍(秦風) 에 보인다. 인경(麟經) 《춘추(春秋)》의 별칭이다. 《춘추(春秋)》가 애공(哀公) 14년의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독부(獨夫) 독부(獨夫)는 하늘도 버리고 백성도 버려 외롭게 된 통치자라는 뜻인데, 《서경(書經)》 〈태서 하(泰誓下)〉에 폭군 주(紂)를 독부로 명명하고 그의 죄악상을 나열한 내용이 나온다. 왕께서……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심 전장에게 보냄 與鍊心田丈 乙亥 을해년(1935)요새 들으니, 상중에 있는 박현암(朴玄岩)이 김용승(金容承)을 초치하여 자기 조고의 묘갈문을 받는다고 하니 사문의 일이 날마다 그릇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이미 음성의 적도 골수당과 화합하고, 이 박현암이 또 스승을 배반한 사람에게 묘갈문을 받으니, 의리(義理)와 시비(是非)가 혼란하여 뒤집힌 것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일전에 사견(士狷)과 함께 백천재(百千齋)에 며칠간 머무를 때, 편지를 써서 박현암에게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창암(蒼岩) 어른이 선사에게 열복(悅服)200)하여 성심으로 섬긴 것은 실로 문인들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처럼 스승을 존경한 덕이 있는 분의 행적을 스승을 배반한 자로 하여금 쓰게 한다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하고 말이 쓰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 일은 반드시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열어준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 공들이 앞에서는 무함을 성토하고 뒤에서는 일을 같이 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어찌 여러 공들이 어제는 그르나 오늘은 옳다고 여겨 간옹이 조금은 그럴 뜻이 있었나 의심하고 이것이 김용승이 물러나와 스스로를 결백하게 한 것이라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박현암이 우리 어른과 변론할 때, 옆에서 자세히 들었는데, 이런 뜻이 있는 듯했습니다. 일이 만약 이렇게 나간다면 창암 어른이 죽은 뒤의 일만 낭패일 뿐만 아니라,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도 어찌 가일층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今聞玄岩朴哀, 延致金容承, 受其祖考墓文云, 師門之事, 可謂日益非矣.扶北諸公, 旣和同陰賊之骨黨, 此哀又謁文於陪師之人, 義理是非之混倒, 一至於此乎? 日前, 與士狷留百千齋數日, 爲喩此哀, 止此事爾.蓋蒼岩丈之悅服先師而誠事之, 實門人之不及, 以若尊師之德, 令倍師者狀之, 則豈不誤乎? 而誠不見孚, 言不見用, 以至於此, 夫何言哉? 雖然此事未必非扶北諸公啟之也, 何也? 諸公前討誣而後同事, 人之見此, 豈不以諸公爲昨非今是, 而疑艮翁之不免些意, 是容承之退出自潔也乎? 向此哀與吾丈辨論時, 從傍細聽, 似有此意矣.事若出此, 非但蒼丈身後事之狼狽, 爲先師辨誣者, 豈不一層加難矣乎? 痛矣痛矣. 창암(蒼岩)이 선사에게 열복(悅服)하여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오고, 또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이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신미년(1931) 答李愼軒 辛未 인용하신 농옹(農翁 김창협)이 누원(樓院 박세당)을 방문한 일9)은 저도 항상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10)면 어찌 다만 '도가 같지 않다[道不同]'는 세 글자로 멀리할 뿐이겠습니까? 공자와 주자 두 부자(夫子)를 인용하여 근거로 삼은 것은 마땅히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합니다. 노자와 육씨(陸氏 육상산)는 비록 허무와 선학의 수종(首宗)으로 그 깊은 학문과 높은 행위는 또한 당세 사람들의 추대와 인정을 받았지만 따질 만한 점도 있고 공경할 만한 점도 있는 것은 다만 그 견식과 언론이 처음에 잘못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끝내 수종이 되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노자와 육씨가 요임금, 순임금, 공자, 맹자를 업신여겼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 부자가 오히려 또한 예를 묻고 강론을 주도11)했겠습니까? 어른의 근래의 일은 아마도 농옹의 활달한 도량을 심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만 농옹을 사모하여 본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所引農翁訪樓院事, 澤述所尋常蓄疑者.旣云慢侮前賢, 則豈可但以道不同三字豁略之? 其所引孔朱二夫子爲據者, 正合更商也.老子陸氏, 雖爲虛無禪學之首宗, 其邃學高行, 亦自爲當世推服, 而有可問可敬者.特以其見識言論, 差於其始, 被人尊尚, 而作首宗於其終爾.如使老子陸氏, 謾侮堯舜孔孟, 未知二夫子猶且問禮主講耶? 尊之近事, 恐難服農翁豁量, 而慕效之, 如何如何? 농옴……일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에 "제 아우에게 보내신 편지에 제가 누원(樓院 박세당(朴世堂))에 대하여 노숙함을 존경하고 명망을 사모하여 30리를 달려가 찾아뵈어 존경하는 정성을 나타냈으며 조금도 배척하는 언사가 없다가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의 문집이 출간된 이후로는 노여움을 품고 그 부친까지 미워하면서 이런 보복을 하였다고 하셨는데, 이는 더더욱 우습습니다……누원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물러나 곤궁한 처지를 굳게 지켰으니 이는 말세에 찾아보기 어려운 절조입니다. 저는 이 점을 진정 높이 받들었던 것이고 그분의 연세가 또 아버님과 동갑이셨으니 어찌 존경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다만 그분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所與舍弟書, 謂姪於樓院, 尊其老慕其名, 委拜一舍之地, 以展尊仰之誠, 略無排斥之辭, 及士元文集出後, 有所慍怒, 而移及其父, 爲此報復, 尤極可笑.……樓院之恬退固窮, 誠末世之所難得. 姪於此固嘗推挹, 而其年又先人同甲也, 豈不可尊. 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 김창협은 "다만 그분(박세당)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말하였다.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 두 부자가……주도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고 주자가 육상산과 도에 대하여 강론한 일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