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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 족숙에게 올림 무진년(1928) 上涵齋族叔 戊辰 고모, 자매, 조카딸로 개가한 자는 복을 끊는다고 하신 말씀은 이끌어주시는 가르침을 중히 받았으나 감히 견해를 바꾸어 가르침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인정과 천리에 관계되어 구차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잘것없는 견해를 말씀드려 질정을 받겠습니다. 핏줄로 이어진 지친이 죽어 복을 끊을 수 있는 경우는 반드시 큰 악행을 저질러 생전에 이미 그 은혜가 끊어진 경우입니다. 가령 족숙의 고모, 자매, 조카딸 중에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어서 개가한 자가 있다면 과연 문득 배척해 버리고 절대로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정으로 따져 볼 때 차마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천리와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살아서 은혜가 끊어졌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어서 복을 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또 살아서 비록 은혜가 끊어지지 않았더라도 죽어서 마땅히 복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제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개가한 어머니에 대해 복을 낮추어 입는 것으로 방증을 세워 "삼년상은 비록 낮추나 대공·소공복에 해당하는 상은 끊어야 하는 것이 맞다."라고 하심에 이르러서는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는 자식의 어머니입니다. 이미 아버지의 처가 되지 못했으니, 자식이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고,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으면 복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차마 복을 입지 않을 수 없어서 복을 낮추어 입는 것은 나를 낳아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모가 시집을 가면 상복을 입지 않습니다. 대체로 어머니가 개가를 하여 복을 낮추는 것은 아버지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니 복을 낮추지 않으면 오히려 아버지를 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하늘이니 끊을 수 있는 도리가 없습니다. 저 고모, 자매, 조카딸이 끊은 지아비는 나와 무슨 중한 관련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가 끊은 지아비 때문에 나의 지친의 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끊은 지아비를 보기를 나의 아버지처럼 중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정과 천리의 편한 바는 아닙니다. 또 만약 개가한 것이 살아서 은혜가 끊어져 죽어서 복이 끊어진 경우에 해당한다면, 정자(程子)는 반드시 과부가 된 조카딸을 시집보낸 일을 태중대부의 행장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자(朱子)는 반드시 유공작(柳公綽)이 사위를 택하여 과부를 시집보낸 것을 《소학》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숙경(何叔京)의 묘문에 반드시 그 딸이 나점(羅點)에게 개가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는 대현입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감히 자신을 믿지 말고 스승을 믿으라."137) 했으니, 조카도 족숙께 또한 이런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姑姊妹女姪改適者絶服, 重荷提諭, 敢不改見而從敎.但此有關人情天理, 而不可苟然了當者.故復陳瞽見, 而就質焉.夫天屬至親死, 可以絶服者, 必其元惡大憝, 生前已絶其恩者也.假使叔主有姑姊妹女姪之貧竆無託而改適者, 果能輒斥去之, 絶不對面乎? 求之人情而所不忍者, 必其天理之所不合者也.如曰"生當絶恩"則已, 不然則死, 不可以絶服也.如又曰"生雖不絶恩, 死當絶其服", 則非吾所敢知也.至於以稼母降服, 立旁證而曰: "三年之喪, 雖降, 功服之喪, 當絶, 的矣", 則恐又有不然者.父之妻者, 子之母也.旣不得爲父妻, 則子不可以謂母, 不可謂母則可以無服.然而不忍不服, 降其服而服之者, 以有生我之恩故也.故繼母嫁則不服.蓋母嫁而降者, 以其絶於父也, 不降, 猶絶其父也.父者, 子之天也, 無絶道也.彼姑姊妹女姪所絶之夫, 於吾有何關重? 若爲其絶夫, 而不服吾至親, 是視其所絶之夫, 重之若吾父者.然亦非人情天理之所安也.且若改適者之當生絶恩死絶服者, 程子必不載嫁寡甥女之事於太中行狀, 朱子必不記柳公綽擇壻嫁嫠於小學, 何叔京墓文必不錄其女改適羅點也.程朱大賢也.古人云 "不敢信己而信其師", 姪於叔主, 亦不能無望焉. 감히……믿으라 《근사록(近思錄)》 권3 〈치지(致知)〉에, 정이(程頤)가 문인(門人)에게 답하기를 "공자와 맹자의 문인들이 어찌 모두 현철(賢哲)이었겠는가. 진실로 보통 사람들도 많았으니, 보통 사람으로서 성현(聖賢)을 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겠지만 오직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구한 뒤에 얻었는데, 지금 제군들은 나의 말에 대해 조금만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다시는 생각해 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끝내 다르게 되는 것이다. 곧바로 버려두지 말고 다시 생각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하는 방법이다.〔孔孟之門, 豈皆賢哲. 固多衆人 ,以衆人觀聖賢, 弗識者多矣, 惟其不敢信己, 而信其師. 是故求而後得, 今諸君於頤言, 纔不合 則置不復思, 所以終異也. 不可便放下, 更且思之, 致知之方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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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 종장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懶齋宗丈 丁巳 불초한 제가 지금 《예기》를 읽으며 매번 긴요하지 않은 의문점을 제기하여 어른의 귀를 더럽힘에, 문득 넓은 전거와 자세한 해석을 보여주셨으니 참으로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인자함152)을 받았습니다. 다만 수집하고 찾으실 적에 노쇠하신 정력이 한 배나 소비되셨을 것을 생각하니, 노인을 편안히 모시는 도에 흠이 있지는 않았을까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학문을 익히는 것은 천하의 공도(公道)입니다. 하나의 이치와 하나의 의리는 진실로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통해 의혹을 변론할 수 있으니,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은 진실로 마땅히 그 실마리를 상세히 드러내 밝혀 자신의 수고로움을 잊어야 하고, 또한 마땅히 끝까지 질문을 철저하게 하여 다른 사람의 수고로움을 안타깝게 여길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하물며 전례(典禮)는 성인의 학문 중에서 큰 절목입니다. 천하에 있어서는 치란의 이유가 되고 나라와 가정에 있어서는 흥망이 달려 있으며, 사람에 있어서는 사람과 짐승의 분별이 되니, 어찌 더욱 마땅히 강구하여 밝혀서 잠시도 버려두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때는 어느 때입니까?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사방이 깜깜하고 도깨비와 이리같은 자들이 야유하고 날뛰어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우상 숭배라 하고, 검은 양복을 상복이라 하고, 형수와 간통하는 것을 종사를 잇는다 하고, 지아비를 버리는 것을 자유라 하고, 군신이 평등한 것을 자유라 하고, 부자(父子)간에 재산을 두고 송사(訟事)하는 것을 일반적인 일이라 하고, 내외간에 구별하는 것을 나쁜 풍속이라 하니, 말할 수도 있으나 말하면 추해집니다. 오호라, 세운이 더렵혀지는 것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에 선성(先聖)이 남겨준 제도를 강구하여 서책에 실어놓아 하늘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릴 것이니, 이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머뭇거리며 시간만 보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종장께서 부지런히 가르치시는 것은 진실로 저를 사사로이 해서가 아니며 제가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도리어 이기적인 사심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밝히 알아주심에 저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었습니다. 삼가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나무라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澤述不肖, 見在讀禮, 每提不緊疑題, 仰瀆崇聆, 輒蒙博據詳剖以示之, 固荷不倦之仁.但想蓃索之際, 向衰精力, 一倍耗費, 大悚有欠安老之道也.然講學者, 天下之公道也, 一理一義, 苟有因問難答述, 而可以辨惑, 益人者, 固當詳發其端, 而忘己之勞也, 亦宜竆質到底, 而不暇憫人之勞也, 况典禮, 乃聖學中大節也.在天下而爲治亂之由, 在國與家而爲與亡之係, 在人而爲人獸之分, 豈非尤當講明而不暫舍者乎? 且此時, 何時? 太陽西沒, 四郊昏黑, 魍魎狐狸, 捓揄跳踉, 以祭先謂(食+高】魔, 以黑裝謂服喪, 以烝嫂謂繼宗, 以棄夫謂自由, 君臣平等爲自由, 父子訟財爲常事, 內外防閑謂惡俗, 所可道也, 言之醜也.鳴呼, 世運之汙, 吾無如之何矣.乃講先聖之遺制, 而寓之簡編之中, 以俟天復之日, 是吾人之責也.其不可虛徐也審矣.然則宗丈之勤敎, 固非私我也, 澤述之感荷, 反不免有我之私也.知照所及, 聊暴蘊衷, 竊想樂聞而不誚也. 가르침에……인자함 이 말은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묵묵히 마음속에 새겨 두고, 배움에 싫증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 셋 중 어느 하나인들 내가 제대로 하는 것이 있겠는가?〔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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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찬 홍섭 만사 ○스승의 명을 받잡아 쓰다. 挽鄭聖燦【洪燮○承師命作】 말세에 백성 일어나지 않으니 世衰民不興뉘라서 사람의 직분을 닦을까 誰歟修人職아 현명하신 정공이여 嗟哉鄭公賢지행은 금석을 뚫을 만하네 志行透金石젊은 시절 힘들게 보내셨어도 少日困傷哉부지런히 밭갈고 글도 읽으셨네 孜孜耕且讀짧은 도롱이로 아침 비 뚫고 短蓑披朝雨오래된 등잔으로 추운 밤 버티셨지 古檠趨霜夕어머니께서는 연세가 많으셨기에 北堂歲月晩쌀을 짊어진 채148) 백리의 협곡도 갔지 負米百里峽부모님 돌아가신 지 삼 년이 흘러도 風樹經三年지극한 아픔 아직도 무어라 말할 수 없지 至痛尙何說명성과 실상이 서로 따랐기에 名與實相隨고을에 좋은 여론 가득했네 輿論播鄕邑뒤늦게 구옹의 문하에 이르러 晩及臼翁門도를 구함에 얼마나 부지런히 했나 求道何勤篤마음은 선입견149)을 경계하며 心地戒畦畛행동은 먹줄과 자귀150)를 따랐네 步趨遵繩尺덕에 나가는 수업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進修方未已중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구나 中途遽折輻구천에서 일어날 길이 없으니 九原無由起아름다운 규범을 어느 곳에서 얻을까 懿範何處得거친 뇌사로 쓸쓸한 바람을 의지하니 荒誄憑凄風벽성151)은 아득하여 끝이 없네 碧城杳無極 世衰民不興,誰歟修人職.嗟哉鄭公賢,志行透金石.少日困傷哉,孜孜耕且讀.短蓑披朝雨,古檠趨霜夕.北堂歲月晩,負米百里峽.風樹經三年,至痛尙何說?名與實相隨,輿論播鄕邑.晩及臼翁門,求道何勤篤?心地戒畦畛,步趨遵繩尺.進修方未已,中途遽折輻.九原無由起,懿範何處得?荒誄憑凄風,碧城杳無極. 쌀을……채 자로부미(子路負米)의 줄인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는 가난하여 매일 쌀을 등짐으로 져서 백 리 밖까지 운반하여 그 운임을 받아 양친을 봉양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선입견 원문 '규진(畦畛)'은 선입견을 말한다. 먹줄과 자귀 목수가 사용하는 도구로서, 법칙을 뜻한다. 벽성 김제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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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느낀 바 있어 4수 驪州有感【四首】 밝은 모래 비췻빛 벽엔 큰 강물 흐르니 明沙翠壁大江流동방 천년 넘은 승경의 고을이로다 左海千年絶勝州지나는 사람 이곳 들러 우두커니 서 있다가 行人到此空佇立세 의로움164) 떠올라 생각은 아득해지리 生三之義思悠悠두 능의 송백나무는 아득한 하늘 아래 있고 二陵松柏參天長더러운 비와 바람에도 홀로 푸름 띠고 있네 腥雨羶風獨帶蒼요순 시대 정치에 주나라 의리마저 존숭하니 唐虞之治尊周義오랜 시간 전대의 왕들을 잊을 수가 없구나 前王百世未能忘우리 조상 그해에 이 고을 계셨으나 吾祖當年寄此鄕조정의 순리들 온전히 잘하지는 못했네 漢朝循吏未全芳한 조각 타루비 지금 어디에 있는가 淚碑一片今安在산새와 강물고기 또한 상서롭지 않구나 山鳥江魚也不詳-15대조 첨지공의 휘는 보칠이다. 일찍이 이 고을에서 지내시며 정사를 잘 펼쳐 선정비가 있다.-대로사165) 안에는 대로를 높이 받들어 大老祠中大老尊평생 이단 물리치고 정도 보호한 위대한 공 남아있네 生平衛闢偉功存지금 천하는 인륜의 도리가 파괴되었으니 綱常打破今天下다만 구천에서 일어날 길 없음을 한하노라 只恨無由起九原 明沙翠壁大江流,左海千年絶勝州.行人到此空佇立,生三之義思悠悠.二陵松柏參天長,腥雨羶風獨帶蒼.唐虞之治尊周義,前王百世未能忘.吾祖當年寄此鄕,漢朝循吏未全芳.淚碑一片今安在,山鳥江魚也不詳.【十五代祖 僉知公 諱甫漆 嘗寄是鄕 有善政碑】大老祠中大老尊,生平衛闢偉功存.綱常打破今天下,只恨無由起九原. 세 의로움 군(君)ㆍ사(師)ㆍ부(父)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를 말한다.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다. 1785년 정조가 영릉(寧陵)에 행차하다가 생전의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곳에서 영릉을 바라보고 효종을 기려 통곡하며 후진들에게 북벌(北伐)의 대의를 주장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우를 짓도록 하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건물이 지어진 그 해에 사액(賜額)되었는데, 송시열에 대한 존칭으로 '대로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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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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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의 자극궁8) 시에 차운하다 次李白紫極官詩 내가 들으니 사람에겐 마음이 있는데 我聞人有心비유컨대 저 바람에 흔들리는 대같지 譬彼風動竹놓아버리면 먼 곳9)으로 달아나고 放去奔天淵거둬들이면 한 줌도 되지 않는다네 斂來不盈掬마음을 찾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 求之問何術진실로 그 홀로를 삼가는 데10) 있네 亶在謹其獨하늘은 점점 저물어가는데 看看天向晩미친 바람 마침내 잠잠해질까 狂風迄可宿길흉은 다 이미 정해졌으니 休咎皆前定수고롭게 점11)을 치지 말자 勿用勞筮卜다만 듣건대 칠일뢰12)이니 但聞七日雷중도로 홀로 돌아오길 원한다 했네 中行願獨復슬프도다 길을 잃은 수레여 哀哉迷途車어찌 그리도 분분히 서로 엎어지나 一何紛相覆괴안13)을 나는 꿈꾸지도 않았는데 槐安我不夢기장밥14)은 공연히 절로 익었구나 黃梁空自熟 我聞人有心, 譬彼風動竹.放去奔天淵, 斂來不盈掬.求之問何術, 亶在謹其獨.看看天向晩, 狂風迄可宿.休咎皆前定, 勿用勞筮卜.但聞七日雷, 中行願獨復.哀哉迷途車, 一何紛相覆.槐安我不夢, 黃梁空自熟. 이백의 자극궁 이백(李白)이 지은 이 시의 원래 제목은 〈심양의 자극궁에서 가을날의 감회를 읊다[尋陽紫極宮感秋作]〉이다. 이백은 50세가 되던 해인 750년 가을에 심양에 머무르며 노자(老子)의 사당인 자극궁에서 읊은 것인데, "사십구년의 잘못은 한번 가면 다시 돌이키지 못하네.[四十九年非, 一往不可復.]"라고 하였다. 이후 후세 사람들이 나이가 50세에 이르면 흔히 이 시를 차운하였다. 먼 곳 원문의 '천연(天淵)'은 높은 하늘과 깊은 연못인데, 여기서는 아주 먼 곳을 지칭한 것이다. 홀로를 삼가는 데 원문의 '근기독(謹其獨)'은 '신기독(愼其獨)'과 같은 말이다. 홀로 있을 때나 혼자만 아는 것에 삼가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자사가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하였다. 점 원문의 '서복(筮)'은 시초(蓍草)로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칠일뢰(七日雷) 7개월 만에 양기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 즉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남을 말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괘사(卦辭)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라고 하였는데, 그 단전(彖傳)에 "'그 도(道)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함'은 하늘의 운행이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라고 하였다. 괴안(槐安) 덧없는 인생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술을 마시고 괴목나무[槐樹]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들러 공주에게 장가들어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지내는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꿈속의 괴안국이 바로 나무 밑동의 개미굴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類說 卷28 南柯太守傳》 기장밥[黃梁] 이 역시 덧없는 인생을 비유한다.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 일찍이 한단(邯鄲)의 객점에서 도사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궁곤한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이 주머니 속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면 소원대로 영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객점 주인은 기장밥[黃粱]을 찌기 시작하였는데, 노생은 이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꿈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한 평생을 소원대로 잘 살았으나, 꿈을 깨고 나니 객점 주인이 짓고 있던 메조밥이 다 익기도 전이었다고 한다. 후에 이를 '황량몽' 또는 '한단몽(邯鄲夢)'이라 하여 덧없는 인생이나 부귀영화를 비유하게 되었다. 《枕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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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7 卷之二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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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남이 방문해서 2수 竹南見訪【二首】 죽남이 가뿐히 지팡이 짚고 남으로 오니 竹南南到竹筇輕때마침 겨울 하늘에는 달이 한창 밝았네 適値冬天月正明정겨운 식사에 생선 맛 빠졌다고 어찌 꺼리랴 情飯豈嫌魚闕味얼굴 보고 얘기하니 편지 기다릴 것도 없구나 面談不待鴈傳聲섣달 눈 속에 미리 손질한 매화 나막신 찾았는데 豫治臘雪尋梅屐중양절엔 국화 띄운 술잔을 헛되이 저버렸구나24) 虛負重陽泛菊觥무슨 일로 함께 노쇠하게 되었는가 同作衰頹緣底事처음 만났던25) 옛날을 회상해보네 回思前日蓋初傾백리 길 들러주니 우정이 가볍지 않아 百里相過誼不輕두 눈동자 문득 햇빛처럼 빛났다네 雙眸忽與日光明한 겨울에 눈도 없으니 하늘은 무슨 뜻인고 深冬無雪天何意먼 변방엔 혼미한 연진 속에 전투 소리뿐 絶塞迷塵戰有聲세도를 도운 동로26)의 붓을 누가 붙들꼬 扶世誰持東魯筆근심이 일어 또 두릉27)의 잔에 술 따르네 有憂且斟杜陵觥쌓인 회포 다 말하고도 다시 잠 못 드나니 積懷說盡還無寐일어나서 하늘 가에 기우는 북두성을 보네 起視天邊北斗傾 竹南南到竹筇輕, 適値冬天月正明.情飯豈嫌魚闕味, 面談不待鴈傳聲.豫治臘雪尋梅屐, 虛負重陽泛菊觥.同作衰頹緣底事, 回思前日蓋初傾.百里相過誼不輕, 雙眸忽與日光明.深冬無雪天何意, 絶塞迷塵戰有聲.扶世誰持東魯筆, 有憂且斟杜陵觥.積懷說盡還無寐, 起視天邊北斗傾. 중양절엔……저버렸구나 중양절에 서로 만나 술을 마시지 못했다는 뜻이다. '중양(重陽)'은 '중양절(重陽節)'로 이날에는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풍습이 있었다. 《續齊諧記》 처음 만났던[蓋初傾] '경개(傾蓋)'는 서로 처음 만나 일산(日傘)을 기울이며 인사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하였다. 동로(東魯) 동로(東魯)는 공자(孔子)가 출생한 중국 동쪽의 노(魯) 나라인데 공자를 비유한 것이다. 두릉(杜陵)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그의 조상이 두릉에 살았고 자신도 두릉 부근에 살았기에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으로 자호하였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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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다음날 밤에 元日翌夜 적적한 초당에서 등불 하나 밝혀놓고 寂寂茅堂一燭明신정에 부응하느라 삼경까지 앉았네 爲酬新正坐三更화수회41) 모임 이루니 정담이 세세하고 會成花樹情談細청하42)의 시를 토하니 협기가 뻗치구나 詩吐靑霞俠氣橫이른 봄 매화와 버들의 시샘을 점차 보는데 春早漸看梅柳妒흉년이라 북과 징소리43)는 듣기 어렵네 年荒罕聽鼓鉦鳴무슨 일로 좋은 때에 홀로 깨어있는가 佳辰獨醒緣何拘도가 어긋났으니 요즘 굴평44)을 배우네 錯道伊來學屈平 寂寂茅堂一燭明, 爲酬新正坐三更.會成花樹情談細, 詩吐靑霞俠氣橫.春早漸看梅柳妒, 年荒罕聽鼓鉦鳴.佳辰獨醒緣何拘, 錯道伊來學屈平. 화수회 원문의 '화수(花樹)'는 당(唐)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에서 유래하여, 친족끼리 화목한 모임을 묘사한 말이다. 이에 대해 잠삼(岑參)은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를 지어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하였다. 청하(靑霞) 청운(靑雲)과 같은 말로 고원한 뜻을 비유한다. 남조(南朝) 시대 시인 강엄(江淹)의 〈한부(恨賦)〉에 "성대한 청하의 기이한 뜻이, 긴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버렸네.[鬱青霞之奇意, 入脩夜之不暘.]"라고 하였는데, 이선(李善)은 "푸른 노을의 기이한 뜻은 의지가 높은 것이다.[青霞奇意, 志意高也.]"라고 해석하였다. 《文選 卷16 恨賦》 북과 징소리 새해를 축하는 농악 소리를 말한다. 굴평(屈平) 전국 시대 초(楚)나라 충신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屈原)이다. 이름이 평(平)이고 자(字)가 원(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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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경(崔元敬) 갑렬(甲烈)의 자사(字辭) 【신묘년(1951, 대한민국33)】 崔元敬【甲烈】字辭 【辛卯】 최씨 댁의 선비 崔氏之彦,이름은 갑렬(甲烈)이네 其名甲烈,원경(元敬)으로 자를 써 迺以元敬,그의 품덕을 표현하네. 用表厥德.다만 그 자를 푸는 말을 維其字辭,관례하던 날 못 붙여서 未遑冠日,이십 년이 지난 지금 後二十年,내가 그것을 기워 넣네. 余補其闕.인물을 헤아릴 때는 人物之數,갑이 그 첫째이고, 甲爲第一,하늘의 길에서는 그것이 其在天道,사덕(四德)의 첫머리 원(元)이고, 四德之元,사람의 성품에서는 그것이 在乎人性,오상(五常)의 첫머리 인(仁)이니, 五常之仁,하늘의 원(元)과 사람의 인(仁) 天人元仁,그 이치는 벼리가 같네. 其理同倫.선비가 인을 하는 것은 士之爲仁,하늘을 본받고자 함이니, 欲以希天,존심(存心) 성찰하여 극기복례하며 存省克復,마음이 깨끗하여 티끌이 없고, 心淨無塵,온갖 일을 다 절도에 맞추며 萬事中節,수많은 선(善)을 다 온전히 갖추면, 衆善俱全,그 뒤의 의례지신(義禮智信)은 義禮智信,어찌 일일이 다 말하겠는가. 何待條言.천도(天道)의 머리인 원(元)과 若天之元,그 밑의 형(亨) 리(利) 정(貞) 亨利貞根,만약 이들을 갖춘다면 苟能如此,이는 첫째가는 사람이네. 是第一人.인을 할 때는 어떻게 하나 爲仁以何,전일한 경(敬)이면 족하니, 一敬足焉,경(敬)을 하는 방도는 敬之之方,서책에 다 담겨있네. 方冊俱存.오, 원경(元敬)이여 於乎元敬,으뜸 공경에 애쓰시라! 曷不勉旃! 崔氏之彦, 其名甲烈, 迺以元敬, 用表厥德。 維其字辭, 未遑冠日, 後二十年, 余補其闕。 人物之數, 甲爲第一, 其在天道, 四德之元。 在乎人性, 五常之仁, 天人元仁, 其理同倫。 士之爲仁, 欲以希天, 存省克復, 心淨無塵。 萬事中節, 衆善俱全, 義禮智信, 何待條言。 若天之元, 亨利貞根, 苟能如此, 是第一人。 爲仁以何, 一敬足焉, 敬之之方, 方冊俱存。 於乎元敬, 曷不勉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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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오 동선의 자사 【임오년(1942)】 孫昌午【東宣】字辭 【壬午】 손씨 댁에 수재 있어 維孫氏秀,그 이름은 동선(東宣)이네, 其名東宣,창오(昌午)를 자로 드리니 欽之昌午,어떻게 그를 격려할까, 曷以勖旃.동(東)을 펼쳐[宣] 오(午)방에 이르러 賓東致南,밝은 해[日] 겹쳐 짓네[昌].299) 書著日次,어려서 배워 장년에 행함은 幼學壯行,맹자가 말한 사람의 일이네. 孟道人事.하늘을 보면 인간의 일 아니 觀天知人,그 이치는 하나이네, 厥理一致,사람이 하늘을 본받으면서 以人法天,어찌 이름의 뜻을 생각 않으랴. 盍思名義.옛 사람의 말 또 있으니 亦有古語,그 뜻 정심하고 간절하네, 義更精切,소년 시절의 공부는 少年之學,막 떠오르는 해처럼 하라. 如方升日.밝고 힘차지 않으면 不有明健,실다운 열매 맺지 못하는 법, 其何能實,정밀히 살피고 힘차게 나아가 精察邁往,제 때를 놓치지 말소. 及時莫失.하늘에 구름 있으면 維天有雲,태양의 빛 가리우고, 太陽其翳,사람이 사심 품으면 維人有私,밝은 덕이 가려지며, 明德斯蔽,구름 개면 하늘이 맑고 雲捲天朗,사심 사라지면 마음이 밝아지네. 私盡心明.해를 취해 공부를 비유하며 取日喩學,이처럼 간절히 당부하네. 到此丁寧.공부 이루고 도(道)가 높으면 學成道尊,이를 일러 성인이라 하니, 斯謂成人,덕을 세상에 펼치고 德宣于世,몸에 복이 창성하리. 福昌于身. 維孫氏秀, 其名東宣, 欽之昌午, 曷以勖旃。 賓東致南, 書著日次, 幼學壯行, 孟道人事。 觀天知人, 厥理一致, 以人法天, 盍思名義。 亦有古語, 義更精切, 少年之學, 如方升日。 不有明健, 其何能實, 精察邁往, 及時莫失。 維天有雲, 太陽其翳, 維人有私, 明德斯蔽。 雲捲天朗, 私盡心明, 取日喩學, 到此丁寧。 學成道尊, 斯謂成人, 德宣于世, 福昌于身。 동(東)을……짓네[昌] 관례의 주인공 손(孫)군의 이름 '동선(東宣)'과 자(字) '창오(昌午)'의 문자 의미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동(東)은 '해[日], 양(陽), 동(動), 봄, 나무[木], 주인'을 가리키기도 하며, 선(宣)은 '펼침, 넓음, 드러냄, 밝음'등을 뜻한다. 창(昌)은 '밝음[明], 좋음[善], 바름[正當], 드러남[顯], 흥성(興盛)' 등을 뜻하며, 오(午)는 남방을 뜻하며, 남(南)은 '남(男), 생육(生育), 여름, 금(金)'을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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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외종형에게 드리다 2수 呈晩棠外兄【二首】 천 가닥 흰 머리에 눈발 날리는데 霜鬢千莖撲雪華고향산천 백리 길이 서쪽에 비겼네 故山百里路西斜회갑에 성대히 수답함이 다투어 풍속 이루는데397) 盛酬回甲爭成俗도리어 고풍의 불식가398)에게는 어울리도다 還可高風不食家사업에는 이제 기틀이 이미 사라졌지만 事業如今機已息마음 공부는 늘그막에 얻는 것 점점 많네 心工到老得滋多인생은 스스로 참된 지취를 찾아야 하니 人生要自尋眞趣풍검이 어떤 지는 굳이 물어볼 것이 없네 豊儉無煩問幾何이별은 왜 이리 급박하고 만남은 왜 이리 느린가 別何遽遽會何遲모두 뜬 인생이라 정해진 기약이 없는 탓이라네 總爲浮生無定期봄 하늘 나무와 저녁 구름399) 얼마나 보았던가 幾望春天雲暮樹가을 밤 달 밝을 때에는 견디기 어렵다네 不堪秋夜月明時귀밑머리에 눈서리 내려 함께 노쇠해가는데 鬢邊霜雪同衰老눈 아래 풍진 세상은 또 난리를 겪는구나 目下風塵又亂離다만 걱정은 돌아가서 서로 노력하는 것인데 但恐歸歟相努力만년의 공부가 단지 기운 잔에 물 붓는 격이 될까 두렵네 晩工只怕注傾巵 霜鬢千莖撲雪華, 故山百里路西斜.盛酬回甲爭成俗, 還可高風不食家.事業如今機已息, 心工到老得滋多.人生要自尋眞趣, 豊儉無煩問幾何.別何遽遽會何遲, 總爲浮生無定期.幾望春天雲暮樹, 不堪秋夜月明時.鬢邊霜雪同衰老, 目下風塵又亂離.但恐歸歟相努力, 晩工只怕注傾巵. 회갑에……이루는데 당시에 회갑연에서 시를 수답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뜻이다. 불식가(不食家) '불식(不食)'은 선대가 대대로 덕을 베풀고 아직 그 보답을 다 받지 못한 것을 말한다. 만당 외종형을 지칭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삼괴당명(三槐堂銘)〉에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대대로 덕을 쌓은 신하로서 후하게 베풀고 그 보답을 먹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그런 뒤에야 그 자손들이 문덕을 지키는 태평성세의 군주와 천하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國之將興, 必有世德之臣, 厚施而不食其報, 然後其子孫, 能與守文太平之主, 共天下之福.]"라고 하였다. 봄……구름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장안에서 강남 지역을 떠도는 이백(李白)을 그리며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시에 "위북에는 봄 하늘 숲이 푸른데, 강동에는 저물녘 구름 떠가리. 어느 때 한 동이 술 마시며, 문장을 자세히 토론해 볼까.[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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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한탄하다 歎世 물쌀 급한 서강에 시커먼 바람 몰아치는데 潮急西江打黑風천지가 컴컴하여 흐리멍덩하게224) 보이네 乾坤黲瀆視夢夢부친의 권위를 쳐서 없애니 머리가 아래에 있고 親權撲滅頭居下여자의 지위를 높여 밝히니 달이 동쪽에 있네 女位高明月處東분수를 범하면서 감히 성스런 주공225)을 꾸짖고 犯分敢訶周孔聖윤리를 멸하면서 즐겨 헛된 불소226)를 숭상하네 蔑倫樂尙佛穌空어찌하면 큰 목탁227) 얻어서 다시 세상 보전하고 安得大鐸環全世사람마다 귀먹은 두 귀를 깨우쳐 줄 것인가 警破人人兩耳聾 潮急西江打黑風, 乾坤黲瀆視夢夢.親權撲滅頭居下, 女位高明月處東.犯分敢訶周孔聖, 蔑倫樂尙佛穌空.安得大鐸環全世, 警破人人兩耳聾. 흐리멍덩하게 원문의 '몽몽(夢夢)'으로, 하늘이 아무런 뜻이 없는 듯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 〈정월(正月)〉에 "백성들은 지금 위태로운데, 하늘을 보면 흐리멍덩하기만 하네.[民今方殆, 視天夢夢.]"라고 하였다. 주공(周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를 말한다. 불소(佛穌) 부처와 예수를 말한다. 큰 목탁[大鐸] 세상을 깨우칠 지도자를 비유한 것이다. 목탁(木鐸)은 정교(政敎)를 베풀 때 길에 가지고 다니면서 울리며 대중들을 교화하는 도구인데, 《논어》 〈팔일(八佾)〉에 의(儀) 땅의 봉인(封人)이 공자를 만나 뵙고 나와서 공자의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공자가 자리 잃은 것을 무엇하러 걱정하는가. 천하가 무도해진 지 오래이니, 하늘이 장차 부자를 목탁으로 삼을 것이다.[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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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4 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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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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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의 여러 공들에게 두루 알림 【59인이 연명하여 당시에 인쇄해 배포한 글은 이 글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함께 첨삭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상세히 살펴보라. 1924년 7월】 徧告同門僉公 【五十九人聯名當日印布文, 就此本而衆共添刪者, 覽者詳之. 甲子七月】 일찍이 듣건대,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이니, 절의를 지녔으되 도학이 없는 사람은 있거니와 도학을 지니고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의 선사(先師)이신 간재(艮齋) 선생의 도학과 절의는 본래 한 시대의 공론(公論)이 있을 만큼 트집을 잡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진영(吳震泳)1)의 무함하는 말과 무함하는 글이 한번 나옴으로부터 선사의 울타리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하였으니, 집이 어찌 홀로 온전할 수 있겠는가.아, 선사께서는 곤궁하고 지위가 없어 쌓은 경륜을 펼칠 수 없었지만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좋지 않은 때를 만나 축축하게 독기 낀 바닷가 머나먼 곳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친 자정(自靖)2)의ㅣ 의리가 단청처럼 빛나서 늠름한 의리를 신명(神明)에게도 질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사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마음과 정신이 깃든 수고(手稿)를 가지고 일제(日帝)에게 인허를 청원하여 간행하고자 한 것은 이미 문인(門人)으로서 매우 사려 깊지 못한 것이고, 비록 먼 미래를 염려하고 오래도록 전함을 도모하는 것이 혹 매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선사께서 신령이 있다면 반드시 크게 나를 단죄하실 것이다. 내가 죄를 짊어지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 저 오진영은 자기의 생각을 펴고자 감히 선사를 무함하고 끌어와 증거로 삼았다.인허를 성토한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또 이병은(李炳殷)3)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소자(小子)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에 대해 분부하셨음을 말한 것들인데, 계해년(1923) 3월 11일에 화도(華島)4)에서 선사의 둘째 아들인 전화구(田華九)를 상대로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받는 것에 뜻이 있으셨다."라고 주창하며 말한 것과 서로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이른바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는 것은 곧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의 실상이고,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는 곧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는 것의 표상이다. 말과 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선사께서 다른 사람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셨다는 일을 성립시켰으니, 이는 선사에게 미루고 핑계대어 자신에 대한 성토를 막은 것이다. 이리하여 조롱과 모욕이 거리에 넘쳐나고, 헐뜯음과 꾸짖음이 하늘까지 퍼져서 희디흰 우리 선사의 태양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인품이 암흑처럼 어두워져 해명할 수 없게 되었으니, 선사를 무함한 죄가 또한 너무나 지극하다. 문하에 찾아와 직접 수학한 제자라면 어느 누군들 명목장담(明目張膽)5)하여 변론하고 성토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무릇 사랑하는 것 중에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은 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에 선계(先系)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없다. 그러나 선사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라는 맹세와 호적에 올리지 말라는 경계가 준엄할 뿐만이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의(大義)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것들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문고에 대해서 인허를 구걸함이 의리를 파괴함이 되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분부하셨다면 이는 문고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나 선계보다 더 클 뿐만이 아니고, 또 대의의 관계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선사의 학문이 결코 이와 같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렇게 심적(心跡)상의 확실한 증거가 이미 뚜렷하고, 더욱이 만년(晩年)에는 "급하게 문고를 간행하지 말고, 저들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두 통씩이나 손수 써서 정중하면서도 엄절하게 둘째 아들에게 주어 삼가 지키게 하였다. 하나는 "만약 청원하여 간행ㆍ배포한다면 이는 결단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6)"고 하셨고, 하나는 "급급하게 세상에 전하여 스스로 욕됨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들이 근거로 삼아 그를 배척하는 것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그가 근거 없이 무함하는 말과 글이 어찌 식자(識者)의 귀와 눈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다만 말세의 풍속은 흉보기를 좋아하고 떠도는 소문은 안정시키기 어려우며, 천 사람의 입을 거치면 공론이 되고 오래도록 전해지면 사실이 되니, 진실로 그런 염려가 없을 수 없기에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을 그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가 식경보의(息黥補劓)7)하여 무함을 자복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새롭게 할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끝내 스스로를 옳게 여기는 것이 더욱 심하여 조금도 후회의 싹을 틔우지 않았고, 심지어 제사에서 쫓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자복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은 또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가르침, 이것도 한때의 말이고, '헤아려서 하라.'는 가르침도 한때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선사에 대한 무함이 더욱 깊어져서 성토하는 일을 늦출 수 없는 이유이다. 이에 감히 우러러 통보하니, 삼가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이 한목소리로 함께 성토하여 선사의 대의를 밝히고 사문(斯文)의 한 줄기 맥을 부지해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다. 竊嘗聞節義者, 道學之藩籬, 道學者, 節義之堂室, 有節義而無道學者有矣, 未有有道學而無節義者也. 惟我先師艮齋先生之道學節義, 自有一世之公論而無有間然者矣. 一自吳震泳誣言誣筆之出, 先師之藩籬幾乎破矣, 堂室何得以獨全哉? 嗚呼! 先師窮而無位, 未能展布所蘊, 逮乎晩年, 遭値不辰, 瘴海萬里, 一心獻靖, 炳然之丹, 凜然之義, 可以質神明也. 乃於山頹之未幾, 欲以心神所寄之手稿, 請認而刊之者, 已是門人不思之甚, 且雖慮遠圖久之或出於萬不得已, 當曰: "先師有靈, 必大罪我. 我且負罪, 爲之猶可說也." 噫, 彼震泳欲伸己意, 敢誣引先師爲證, 答金洛斗討認之書曰: "今春三月,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世不可知, 文稿, 君須自料量爲之.'" 又書李炳殷曰: "先師嘗敎小子曰: '聞業印者自認則著書者無關云, 如此則似不必深拘.'" 此皆先師曾有認敎之謂, 而與癸亥三月十一日對先師仲子華九於華島倡言先師曾有認意者互相發也. 其所謂"認意"者, 卽"認敎"之實也, "認敎"者, 卽"認意"之表也. 以言以書, 白空撰出, 以成先師敎人認刊之擧, 是推諉先師, 以禦討己也. 於是嘲侮載路, 譏罵漲天, 皓皓我先師之日光玉潔, 歸於窣窣黑地而莫之解. 其陷師之罪, 吁亦極矣. 凡在及門之徒, 孰不明目張膽, 思所以辨討哉? 夫愛莫愛於親遺, 重莫重於先系. 然先師沈尸之誓不譜之戒不啻峻嚴者何哉? 爲其大義之愛重有大乎此故也. 獨於文稿也, 不拘乞認之爲破義, 而敎人自量爲之, 是稿之愛重, 非惟加於親遺先系, 又有大於大義之係也. 吾知其先師之學, 決不如是也. 此其心跡上確證, 旣昭昭矣. 且況晩年"勿急刊稿, 勿干彼認"之訓, 二度手筆, 鄭重嚴截付之仲子而謹守之. 一則曰: "若請願而刊布, 決是自辱, 愼勿勉從." 一則曰: "勿汲汲傳世, 以自取辱." 吾輩之所以據而斥之者, 亶在於此. 彼無據之誣言誣筆, 安足以亂識者之耳目? 但末俗好譏, 流言難定, 千口成公, 久傳成實, 誠不無其慮, 辨之討之, 在所不已, 而尙冀其息黥補劓, 而自服其誣, 自新厥躬矣. 終是自是愈甚, 少不萌悔, 至被黜祀而終不服. 其徒又有言"自辱之訓, 彼一時也, 料量之敎, 此一時也." 此所以先師之誣愈深而討擧之不容緩也. 玆敢仰通, 伏願僉君子, 齊聲共討, 以明先師大義, 以扶斯文一脈, 千萬幸甚.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정(自靖) 나라가 망했을 때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칠 것이니,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은둔하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전라북도 완주(完州) 출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자승(子乘)이며, 호는 고재(顧齋)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를 가리킨다.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한일합방 이후에 자정(自靖)의 의리를 지키기기 위해 군산도(群山島)로 갔다가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명목장담(明目張膽) 눈을 밝게 하고 담을 넓힌다는 뜻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일을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만약 …… 말라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ㆍ배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는 말이 보인다. 식경보의(息黥補劓) 자자의 흔적을 지워 주고 잘린 코를 보완해 준다는 뜻으로 개과천선(改過遷善)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조물자가 내 이마에 가해진 묵형의 흔적을 없애 주고 나의 베어진 코를 보완해 주어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선생의 뒤를 따르게 해 주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庸詎知夫造物者之不息我黥而補我劓, 使我乘成以隨先生耶?〕"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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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동문의 여러 공들에게 알림 【119인이 연명하였다. 1925년 11월】 敬告同門諸公 【百十九人聯名. 乙丑十一月】 아, 사문(斯文)의 궁액(窮厄)과 변괴(變怪)가 거듭해서 나오더니 진주(晉州)에서 인가를 받아 간행하는 일이 있게 됨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선사께서는 문고(文稿)의 일로 유서(遺書)와 엄중한 훈계를 남기셨는데, 하나는 "청원하여 간행ㆍ배포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맹세코 마지막 명을 지키고,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라고 하셨고, 다른 하나는 "염려할 만한 일이 있으니, 어찌 대번에 세상에 전하여 스스로 욕됨을 취하겠는가. 또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니, 부디 정밀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8)"고 하셨다. 아, 이것은 선사께서 일생 동안 주장하신 것으로 천지의 법칙이요,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무릇 떳떳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믿고 따르지 않겠는가.불행하게도 오진영(吳震泳)은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데 급급하여 선사를 끌어들이고 증거를 무함하여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계실 때에 문고를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명하셨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분부하셨다." 하여 선사로 하여금 남의 의심을 깊이 받게 하였다. 유서를 보았을 때에는 오히려 뉘우쳐 자복하지 않고 도리어 공론과 성토를 받으며 발행했던 인본(認本)이 팔리지 않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고소의 변고를 일으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또 조홍순(趙弘淳) 등으로 하여금 다시 유훈(遺訓)을 범하게 하여 멋대로 인허를 받아 인쇄하게 함으로써 선사의 도의로 하여금 갑자기 매몰되게 하였다. 그가 호종(怙終)9)하면서 거리낌 없이 저지른 악행은 진실로 이루다 주벌할 수 없을 정도이거니와 조홍순 등이 선사의 유훈을 버리고 오진영에게 붙어서 인허의 무함을 실행한 죄 또한 용서할 수 있겠는가.선사의 유서에 또 "글을 버리고 취함에 기준이 없이 그것으로 일을 마치는 자는 어버이를 섬김이 효성스럽지 못하고 스승을 섬김이이 의롭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정본(定本)에는 한 편의 글도 함부로 첨가할 수 없으니, 만약 안면이나 사사로움에 얽매여 다시 변통을 행한다면 이는 어버이와 스승을 차마 죽이고, 지각이 없는 썩은 백골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저 오진영은 마음대로 글자를 고치고 사사로움에 얽매여 첨가해 넣었으며, 시대의 의리에 관계된 글이나 구절을 하나하나 삭제하여 전고(前稿)와 후고(後稿)10)를 훼손하고 선사께서 손수 교정하신 본(本)을 어지럽혔으니, 차마 스승을 죽이려는 마음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인가. 난본(亂本)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주어 일을 마친 조홍순 등도 또한 "스승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증거를 무함한 것은 선사를 무함하는 것이고, 유훈을 배반한 것은 선사를 배반하는 것이니, 그것을 한 번 하는 것도 큰 죄인데 하물며 그것을 두 번 세 번 하는 자가 어찌 사람마다 함께 성토할 사문(師門)의 난적(亂賊)이 아니겠는가. 오진영의 지시와 부추김을 받들어 앞뒤에서 바쁘게 뛰어다녔던 자들이 어찌 먼저 다스릴 난적의 당이 아니겠는가. 돈을 보조하여 찬성했던 동문과 스스로 성토하지 못하고 굳이 성토할 필요가 없다고 주창했던 자들이 어찌 모두 그의 무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은 무함하고 배반한 죄를 일제히 성토하고 바꾸고 어지럽혀진 본(本)을 수습해 깨끗하게 하여 공경히 유서를 따르고 삼가 정본(定本)을 지킴으로써 유명을 어기고 썩은 백골을 속이는 죄에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嗚呼! 斯文窮厄變怪疊出, 至有晉州認印事而極矣. 先師以文稿事有遺書嚴訓, 一則曰: "請願刊布, 決是自辱. 誓守末命, 愼勿勉從. 此紙別藏, 以俟後憑." 一則曰: "有可慮之端, 柰何遽欲傳世, 以自取辱? 又有難言之事, 幸惟精思而審處焉." 嗚呼! 此先師一生所主, 天地之經, 《春秋》之義也. 凡有彛性者, 孰不信服? 不幸有震泳者, 急於認刊, 援師誣證曰: "先師曾有認意." 又曰: "先師獨命文稿自量爲之." 又曰: "先師嘗敎不必深拘." 使先師厚受人疑, 及見遺書, 猶不悔服, 反憾公討所發認本未售, 以至有告訴之變矣. 今又使趙弘淳等, 再犯遺訓, 肆然認印, 使先師道義, 剗地埋沒, 彼其怙終無憚之惡, 固不可勝誅, 而弘淳等棄訓附震以實認誣之罪, 又可容乎? 先師遺書又曰: "去取無準, 以之了事者, 事親不孝, 事師不義." 又曰: "定本無得妄添一篇, 若拘於顔私, 復行通變, 是忍死其父師, 而欺其朽骨無知." 噫, 彼震泳恣意改竄, 拘私添入, 時義文句, 一一刪出, 毁前後之稿, 亂手定之本, 其忍死師之心, 胡寧至此? 而弘淳等之聽用亂本而了事者, 亦可曰"有師"乎哉? 誣證者, 誣師也, 倍訓者, 倍師也, 一之大罪, 況再之三之者, 詎不爲師門之亂賊人人共討者乎? 凡承震指嗾, 奔走先後者, 詎不爲亂賊之黨先治者乎? 與同門之助金贊成者及不能自討而倡不必討者, 安得不幷爲其黨與也? 伏願僉君子, 齊討誣倍之罪, 收洗變亂之本, 恪遵遺書, 謹守定本, 毋同歸於違末命欺朽骨之罪, 幸甚. 염려할 …… 처리하라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문인겸시자손(告門人兼示子孫)〉에 "또 염려할 만한 일이 있다. 요즘 세상 사람의 마음은 사물을 사물로 보지 않고 오직 사람을 업신여긴다. 비록 노사(蘆沙)나 한주(寒洲)와 같은 명망으로도 또한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만났으니, 어찌 다른 사람과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대번에 후세에 전하여 스스로 욕됨을 취하겠는가. 또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니 감히 종이와 먹 사이에 형용할 수 없다. 단지 자손에게 말하여 한두 사람에게 은밀히 전하게 할 뿐이다. 부디 정밀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且有可慮之端, 近世人心, 未嘗以物視物, 而惟人之是侮, 雖以蘆寒之人地, 且遭焚毁之說, 柰何不量人己, 遽欲傳世以自取辱也? 又有難言之事, 不敢形之於紙墨閒者, 只以言於子孫, 使之密告於一二人而已, 幸惟精思而審處焉.〕"라는 말이 보인다. 호종(怙終) 믿는 구석이 있어서 죄를 저지르거나 반복해서 끝까지 죄를 저지른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의(에) "과오로 인하여 죄를 저지르거나 불운으로 인하여 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여 풀어 주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 죄를 저지르거나 반복해서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을 시킨다.〔眚災肆赦, 怙終賊刑〕"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전고(前稿)와 후고(後稿) 1906년에 산정(刪定)해 두었던 문고(文稿) 36책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초고(草稿)를 합하여 산정한 25책을 '전고(前稿)'라 하고, 1913년 이후의 글을 산정(刪定)‧편차(編次)한 것을 '후고(後稿)'라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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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의 동지들에게 돌려 알림 【1926년 5월】 輪告同門同志 【丙寅五月】 근년 이래 오진영의 변고에 대해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첫 번째 일으켰을 때에는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는 것과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선사를 무함했고, 두 번째 일으켰을 때에는 검국(檢局)11)에 고소하여 무함을 변론한 사람들에게 재앙을 끼쳤으며, 세 번째 일으켰을 때에는 진주(晉州)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무함을 실행하였으니, 아, 그 흉악함이 지극하다. 우리들이 변론하고 성토하며, 배척하고 절교한 것 또한 스승을 높이는 직분을 거의 다했다고 이를 만하다.근래에 들으니, 그가 또 선사의 총손(冢孫 맏손자)인 전사인(田士仁 전일효(田鎰孝))에게 고소를 제기하여 잡아 끌고 가서 가두어 놓고 징금(徵金) 칠백 원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참으로 이른바 살무사와 도마뱀처럼 마음이 악랄하고 승냥이와 이리처럼 성정이 잔인하다 하겠다. 선사를 무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사의 맏손자까지 해치기에 이르렀으니, 선사의 맏손자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데 선비들에게 화를 끼치는 것쯤이야 어찌 거리끼겠는가. 이것을 말하자니 입이 더러워지지만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그러나 이런 결과를 불러들인 데에는 전사인도 또한 죄가 있다. 만약 전사인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오진영을 배척했을 적에 빨리 자신의 몽매와 미혹을 책망하고 오진영의 죄상을 하나하나 들어서 사묘(祠廟 사당(祠堂))에 아뢰고 사우(士友)에게 알린 다음에 삼가 유서를 근거로 하여 글로 진주에서 인쇄하는 일에 대해 성토함으로써 철거하여 그만두게 했어야 했다. 그런 뒤에 사문(師門)의 갖가지 큰일들을 실마리를 잡아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계책을 이렇게 내지 않고 도리어 용동(龍洞)에 간행소를 설치하여 그와 대적하였고, 대적하다 격파할 수 없게 되자 당시의 법을 빌려 고본(稿本)을 차압(差押)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되자 끝내 또한 허물을 본받아 인허를 내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어그러짐이 심한 것인가.아아, 용동과 진주에서 인허를 받아 간행한 본(本)이 함께 나오게 되어 선사의 뜻과 일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현동(玄洞)에서 초록한 본과 친정(親定)한 본을 조심스럽게 간직하였다가 때를 기다리고 기회를 타서 도모할 만하면 도모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것을 껴안고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끝내고 만다면 사라져서 전할 수 없게 되는 것에 어찌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아,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이 처음 나오던 때에 어찌 판본에 새겨 인쇄하는 법이 있었는가. 죽간과 칠만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중천에 뜬 태양과 별처럼 빛나고 있다. 우리 선사의 글은 심종(心宗)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성리(性理)의 바름을 돌이켜서 참으로 사서와 육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될 수 있기에 하늘이 돕고 귀신이 보호할 것이니, 나는 결단코 전해지지 않을 우환이 없음을 알고 있다. 더욱이 종이와 먹으로 필사한 글이 전해지기 쉬움은 죽간과 칠에 견줄 정도가 아니며, 더욱이 천운(天運)이 순환하는 바와 도모하는 바가 앞날을 기약하기 쉬움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자신할 수 있다. 年來震泳之變, 尙何言哉? 一擧而誣先師以認意認敎, 再擧而訴檢局, 構禍辨誣人, 三擧而設晉印, 以實其誣, 噫, 其凶極矣. 吾輩之辨討斥絶, 亦可謂庶得尊師之職矣. 近聞彼又構訴先師冢孫田士仁, 拘引之囚, 係之徵金七百圓, 眞所謂虺蜴爲心, 豺狼成性. 陷師不已, 至戕師孫. 師孫尙如此, 其禍士奚恤? 道之汙口, 寧可無言? 然其所以致此者, 士仁亦有罪焉. 若士仁悟其見欺而斥震也, 亟宜責己昧惑, 數震罪狀, 告之祠廟, 喩之士友, 奉據遺書, 文討晉印, 使之撤罷可也. 然後師門種種大事, 可有就緖也. 計不出此, 乃設龍刊而對敵之, 對敵而不能破, 則乃借時法而差押稿本, 然且不能, 則終亦不免效尤而出認, 一何舛錯之甚也? 嗚呼! 龍晉之認刊幷出, 而先師之志事愈昧矣. 然非吾力之所可如何, 惟當謹藏玄鈔親定本, 待時乘便, 可圖則圖, 否則抱此終身已矣. 或疑終於此而已, 則其於泯無傳焉何? 噫, 四書六經之時, 何曾有印板法乎? 以簡以漆, 傳至于今, 日星中天也. 吾師之文, 撥心宗之亂, 反性理之正, 洵可作四六階梯, 天相神護, 吾知其決無無傳之患也. 況紙墨之易傳, 非簡漆之比, 況天運之所循環, 所圖之易前期乎? 是可以自信也. 검국(檢局) 일제 강점기에 검사(檢事)가 일을 보던 검사국(檢事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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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의 여러 공들에게 돌려 알림 【1934년】 輪告同門僉公 【甲戌】 맹자가 "나는 말을 안다."라고 말하고서 피음사둔(詖淫邪遁)을 모두 들었으니,12) 대체로 진실로 말을 알지 못하면 피음사둔이 올 때에 삿된 말을 바른 말로 여기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이 맹자가 반드시 먼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전에 말을 안 이유이다. 훗날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고 널리 변론하기를 좋아하여 공이 성문(聖門)에 존재하고 덕이 후세까지 전해진 것은 모두 말을 아는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끝내 또한 피음사둔에 귀결됨에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지난날 오진영이 선사의 분부라 일컬으면서 은행나무 아래서의 말을 만들어 냈을 때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무함한 말인지 몰랐다. 무함한 말이라고 배척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진영은 "말에 구별이 부족했고, 말을 가림에 소홀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치우치고 부정한 말인 줄 몰랐다. 치우치고 부정한 말을 논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또 꾸며대는 말과 근거 없는 말로 이리저리 피하고 숨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취하고 버리는 데 헷갈렸다. 심지어 그의 죄를 성토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행동이다거나 일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런 의론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처음에 말을 알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무함한 말을 보호하고 난적(亂賊)을 따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오진영이 전에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말씀하신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세 가지가 불가하니, 그 첫 번째는 진실로 그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 것입니다.13) 보내주신 편지에서 비록 제가 의론을 일으키며 처음 시작했다고 하셨지만 그에 앞서 여러 벗들이 의론하여 결정했던 것이고,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번 봄에 홀로 오래도록 앉아계시는 것이 마치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기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니, 하교하시기를, '문고를 어찌하고자 하는가?' 하셨습니다.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한 50년 뒤에는 할 수 있을까?……또 그대들처럼 노성(老成)한 사람이 다 떠나고 나면 다시는 관장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모르지기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이어서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말하였는데, "헤아려서 하라."는 말 속에는 본래 "말없는 가르침"의 뜻과 맥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뒤에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헤아려서 하라.'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원래 서병갑에게 답한 편지에 근본을 두고 온 것이다. 그런데도 또 "말에 구별이 부족했고, 말을 가림에 소홀했다."고 한 것에서 속내가 보이 듯 정상이 다 드러났으니, 어찌 굳이 말을 아는 사람을 기다린 뒤에야 이와 같음을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서병갑에게 답한 편지가 나오기 전에 일찍부터 성토하여 다시는 어떤 의심도 없었던 이유이다.서병갑에게 답한 편지가 이미 나온 뒤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선사를 무함하고, 치우치고 회피하며, 꾸며대고 근거 없는 말인 줄 모르고 "그도 또한 선사를 높였다."라고 말하였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어찌 일찍이 요(堯)와 순(舜)을 높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맹자가 조금의 힘도 남기지 않고 마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처럼 그들을 배척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근본적인 문제에서 미세한 잘못이 있게 되면 끝에 가서 생기는 폐단은 반드시 어버이와 임금을 없이 여겨 짐승이 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니, 지난날에 요와 순을 높였던 일을 다시 말할 겨를이 있겠는가.지금 오진영은 이미 천 리만큼이나 잘못되었으니, 그 폐단이 이를 곳은 저절로 끝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유서를 거짓이라 말한 것과 선사의 문고를 차마 고친 것, 감히 사류(士流)에게 화를 끼친 것, 선사의 손자를 잡아 가두는 것 등 허다하게 그지없는 재앙과 극에 달한 악행들 또한 평범한 짐승의 짓일 뿐만 아니라 효경(梟獍)14) 같은 짐승의 짓이라 하겠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말이 경박하고 지나쳤다."는 것으로 끝내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와 스승에 대해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마음15)이 있는 자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도 오늘날 세상에 어진 사람이 많은 것인가. 아, 괴이하도다.무릇 뜻을 함께하는 우리 선비들이 난적(亂賊)으로 귀결되지 않고 피음사둔의 무리가 되지 않는 데 뜻이 있다면 어찌 추성(鄒聖 맹자)의 밝은 가르침을 본받아 여러 말들을 두루 살펴보고 삿된 말인가 바른 말인가 궁구하여 배척할 것은 배척하고 권면할 것은 권면함으로써 우리 선사의 좋아하고 싫어함의 바름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孟子曰: "我知言." 詖淫邪遁, 皆擧之矣. 蓋以苟不知言, 則詖遁之來, 其不以邪爲正者幾希矣. 此孟子所以必先知言於養氣之前者也. 凡其他日, 闢楊墨博好辯, 功存聖門, 德流後世, 皆以知言一事也. 否則終亦歸於淫邪而不自覺知矣, 豈不危哉? 向者震泳之稱師敎而做出杏下之說也, 人多不知其爲誣說. 其有以誣說斥之者, 則震謂"語欠區別, 命辭疏忽." 人多不知其爲詖邪. 其有以詖邪駁之者, 則又以飾辭遊說, 左右逃遁, 人多眩於取舍. 至有以聲討厥罪爲過擧生事. 至今此論猶未息也. 此皆其初由於不知言, 而卒至於護誣從賊也. 震泳先答徐柄甲書有曰: "垂喩刊集事, 三不可. 其第一則誠有然者. 故鄙欲越海. 而來敎雖謂賤子發論創始, 其先諸友議定矣,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也." 又曰: "今春獨坐久之, 若有所思. 震趨而前. 敎曰: '文稿欲何爲?' 未及對, 先曰: '限五十年後爲之乎?, 云云, 且君輩老成人去盡, 更沒人管, 須自料量爲之.'" 旣曰: "原從不言之敎." 繼之曰: "須自料量爲之." "料量爲之"之中, 自有"不言之敎"之意脈包在者, 不其明乎? 後答金洛斗書"杏下料量爲之"之說, 原本於答徐書而來者. 然且曰"語欠區別, 命辭疏忽"者, 肺肝如見, 情狀畢露, 何待知言之人而後知其如此也? 此所以答徐書未出之前, 早行聲討而無復有疑者也. 答徐書旣出之後, 人猶有莫知其誣師詖遁飾遊之說, 而曰: "彼亦尊師." 夫楊墨何嘗不尊堯舜? 而孟子斥之, 不遺餘力, 如不共戴天之讐者何也? 蓋其本原之際, 微有差失, 則其末流之弊, 必至於無父君爲禽獸矣. 向之所尊, 尙復暇得以言哉? 今震之所繆, 已在千里, 其弊之至, 自不待末流而可見. 卽謂僞遺書忍改師稿敢禍士流縛囚師孫等許多窮凶極惡, 又不但爲尋常禽獸, 而爲梟爲獍矣. 然且人猶有以語言薄過了之者, 此等人無乃有不是之心於其父師者耶? 何今世之多賢也? 吁亦異矣. 凡我同志之士有志於不爲亂賊之歸詖遁之黨者, 何不法鄒聖之明訓, 以遍觀乎諸說而究竟其所至, 可斥者斥之, 可勸者勸之, 以昭我先師好惡之正? 千萬幸甚. 맹자가 …… 들었으니 피음사둔(詖淫邪遁)은 말의 네 가지 폐단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말을 안다.〔我知言.〕' 하였다. …… 공손추가 '무엇을 일러 말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말하기를,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가려 있는 살상을 알며, 지나친 말에서 빠져 있는 실상을 알며, 부정한 말에서 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실상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한 실상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하였다."라고 한 구절의 일부분을 인용한 말이다. 첫 …… 것입니다 일제의 인가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서 간재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했던 일을 말하는 듯하다. 효경(梟獍)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새이고, 경(獍)은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다. 전하여 흉악해서 인륜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부모와 …… 마음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순이 어버이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행하자 고수도 기뻐함에 이르렀다.〔舜盡事親之道, 瞽瞍底豫.〕"라는 고사에 대해 북송의 이학가(理學家)인 나중소(羅仲素)가 《소학》 〈가언(嘉言)〉에서 "다만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只爲天下無不是底父母〕"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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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137) 채환께 올리는 제문 【임자년(1912)】 祭朴受卿【彩煥】文【壬子】 오호! 공이 우리 집안에 장가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공과 만났습니다. 그때는 내가 이 갈던 일곱여덟 살이어서 책선(責善)하고 보인(輔仁)하던 벗은 아니었지만 서로 좋아하던 정은 굳고 깊었습니다. 그 후 팔구년이 흘러 공은 우뚝히 두각을 드러낸 훌륭한 선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글공부에 어두워 고기 어(魚)자와 노나라 로(魯)자를 구분 못하고 있다가 공의 도움으로 영주(瀛洲) 산에 들어가 몇 달 동안 함께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무식의 더께가 조금이나마 열린 것은 다 공이 고치고 도와준 덕분이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함부로 옛 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는데, 공은 여러 경전을 융회관통하고 제자서를 널리 열람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 내는 경지에 나아가며 세밀한 예경이나 작은 절차에 급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앎을 먼저하고 실행을 뒤에 하는 학문의 대방(大方)이었으니, 몽매한 채 문견이 없으면서 표방(標榜)을 먼저 세운 나와 다른 점은 천양지차보다 더 컸다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바른 문로(門路)와 돈독한 지수(持守)가 중요한지라, 문견이 넓어도 바름에로 나아가지 못하면 의리(義理)와 이욕(利欲)을 구분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껴주시는 마음을 믿고 나의 부족한 견해로 간절히 말하며 귀의할 스승을 함께 하자 권하였는데, 공은 본래 품은 뜻이 있었던지라 흔연히 따라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공의 조용한 자세, 깊은 지식과 확고한 지수(持守)는 사우(師友)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고, 공도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을 한번 얻어 2년을 계속 앓더니, 팔순 노친을 둔 삼십대 장년이 이렇게 홀연히 멀리 떠나버리다니!아! 세상 천지의 모든 물건은 다 그 시작과 끝이 있으니, 초목 같은 미물도 반드시 봄에 싹이 올라 가을되어 익건만, 유독 이 사람은 뿌리를 이미 단단히 내렸는데 그 열매를 얻지 못하다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몇 년 이래로 우리의 도학은 더욱 고단해져서, 많은 유학에 뜻을 둔 사람들이 흩어져 떨어져 가니 이것은 참으로 한없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물며 공은 아름다운 자질과 깊은 학문이 속류를 뛰어넘는데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까이 알아주는 사람이었으니, 이제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 때문에 더더욱 크게 부르짖으며 깊이 슬퍼합니다. 공의 밝은 혼령도 의당 나의 아픈 마음을 살피고, 시절의 액난을 가엾어 하시겠지요. 오호! 눈물은 다해도 말은 다할 수 없고, 말은 다해도 정은 다하지 못합니다. 나물 제수에 술 한 잔 딸아, 몇 줄의 거친 말로 삼가 한두 가지만 고합니다. 환히 밝은 영혼, 임하여 흠향하소서! 嗚呼! 余自公之委禽鄙族, 始與公識。 時在齠齔, 雖非有切偲輔仁之益, 而其相愛則固深矣。 後八九年, 已嶄然出頭, 蔚爲儁士。 余爲蒙學, 不分魚魯, 而荷公之惠, 得與攻苦于瀛洲山中爲數月, 識之蒙者得以少啓, 蓋以得公切偲之輔也。 已而余承庭訓, 妄意古人爲己之學。 公方融會群經, 博覽諸子, 將以進於詳說反約之境, 而不汲汲乎曲敬細行。 此固學問先知後行之大方, 而視如余之貿貿然無聞而先立標榜者, 不啻天淵矣。 然學貴於門路正而持守篤, 聞見旣博而不能就正, 則不無義利理欲之眩。 故雖以余之陋見, 猥恃相愛之心, 而眷眷然欲同其依歸, 則公固有志者, 乃能翕然而從之。 於是, 凝然之姿、淵然之識、確然之守大爲師友之許讓, 而公之自期者亦不淺淺也。 孰知奇疴一祟, 二載沈綿, 三紀壯年、八耋膝下忽然長逝也耶? 噫! 天地之於物也, 有始有終, 至於草木之微也, 必春生而秋成。 獨於斯人也, 旣培壅其根, 而不使之食其實, 抑又何哉! 降自數歲, 吾道益孤, 有志斯學者多見零落, 此固所以痛惜不已者, 矧公之美質邃學超出流輩, 而與余相知之密非他人比者, 又將如何? 此尤所以大號而深慟者也。 靈若不昧, 亦應鑑我之衷, 而憫時之厄也。 嗚呼! 淚有盡而辭不盡, 辭有盡而情無窮。 一酹菲奠, 數行蕪辭, 謹告一二。 惟靈赫赫, 庶幾歆格。 박수경 박채환(朴彩煥)의 자는 수경(受卿)이며, 김택술(金澤述)의 종숙(從叔)인 김낙준(金洛俊)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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