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의 여러 공들에게 두루 알림 【59인이 연명하여 당시에 인쇄해 배포한 글은 이 글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함께 첨삭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상세히 살펴보라. 1924년 7월】 徧告同門僉公 【五十九人聯名當日印布文, 就此本而衆共添刪者, 覽者詳之. 甲子七月】 일찍이 듣건대,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이니, 절의를 지녔으되 도학이 없는 사람은 있거니와 도학을 지니고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의 선사(先師)이신 간재(艮齋) 선생의 도학과 절의는 본래 한 시대의 공론(公論)이 있을 만큼 트집을 잡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진영(吳震泳)1)의 무함하는 말과 무함하는 글이 한번 나옴으로부터 선사의 울타리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하였으니, 집이 어찌 홀로 온전할 수 있겠는가.아, 선사께서는 곤궁하고 지위가 없어 쌓은 경륜을 펼칠 수 없었지만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좋지 않은 때를 만나 축축하게 독기 낀 바닷가 머나먼 곳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친 자정(自靖)2)의ㅣ 의리가 단청처럼 빛나서 늠름한 의리를 신명(神明)에게도 질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사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마음과 정신이 깃든 수고(手稿)를 가지고 일제(日帝)에게 인허를 청원하여 간행하고자 한 것은 이미 문인(門人)으로서 매우 사려 깊지 못한 것이고, 비록 먼 미래를 염려하고 오래도록 전함을 도모하는 것이 혹 매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선사께서 신령이 있다면 반드시 크게 나를 단죄하실 것이다. 내가 죄를 짊어지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 저 오진영은 자기의 생각을 펴고자 감히 선사를 무함하고 끌어와 증거로 삼았다.인허를 성토한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또 이병은(李炳殷)3)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소자(小子)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에 대해 분부하셨음을 말한 것들인데, 계해년(1923) 3월 11일에 화도(華島)4)에서 선사의 둘째 아들인 전화구(田華九)를 상대로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받는 것에 뜻이 있으셨다."라고 주창하며 말한 것과 서로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이른바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는 것은 곧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의 실상이고,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는 곧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는 것의 표상이다. 말과 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선사께서 다른 사람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셨다는 일을 성립시켰으니, 이는 선사에게 미루고 핑계대어 자신에 대한 성토를 막은 것이다. 이리하여 조롱과 모욕이 거리에 넘쳐나고, 헐뜯음과 꾸짖음이 하늘까지 퍼져서 희디흰 우리 선사의 태양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인품이 암흑처럼 어두워져 해명할 수 없게 되었으니, 선사를 무함한 죄가 또한 너무나 지극하다. 문하에 찾아와 직접 수학한 제자라면 어느 누군들 명목장담(明目張膽)5)하여 변론하고 성토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무릇 사랑하는 것 중에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은 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에 선계(先系)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없다. 그러나 선사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라는 맹세와 호적에 올리지 말라는 경계가 준엄할 뿐만이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의(大義)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것들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문고에 대해서 인허를 구걸함이 의리를 파괴함이 되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분부하셨다면 이는 문고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나 선계보다 더 클 뿐만이 아니고, 또 대의의 관계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선사의 학문이 결코 이와 같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렇게 심적(心跡)상의 확실한 증거가 이미 뚜렷하고, 더욱이 만년(晩年)에는 "급하게 문고를 간행하지 말고, 저들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두 통씩이나 손수 써서 정중하면서도 엄절하게 둘째 아들에게 주어 삼가 지키게 하였다. 하나는 "만약 청원하여 간행ㆍ배포한다면 이는 결단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6)"고 하셨고, 하나는 "급급하게 세상에 전하여 스스로 욕됨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들이 근거로 삼아 그를 배척하는 것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그가 근거 없이 무함하는 말과 글이 어찌 식자(識者)의 귀와 눈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다만 말세의 풍속은 흉보기를 좋아하고 떠도는 소문은 안정시키기 어려우며, 천 사람의 입을 거치면 공론이 되고 오래도록 전해지면 사실이 되니, 진실로 그런 염려가 없을 수 없기에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을 그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가 식경보의(息黥補劓)7)하여 무함을 자복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새롭게 할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끝내 스스로를 옳게 여기는 것이 더욱 심하여 조금도 후회의 싹을 틔우지 않았고, 심지어 제사에서 쫓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자복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은 또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가르침, 이것도 한때의 말이고, '헤아려서 하라.'는 가르침도 한때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선사에 대한 무함이 더욱 깊어져서 성토하는 일을 늦출 수 없는 이유이다. 이에 감히 우러러 통보하니, 삼가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이 한목소리로 함께 성토하여 선사의 대의를 밝히고 사문(斯文)의 한 줄기 맥을 부지해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다. 竊嘗聞節義者, 道學之藩籬, 道學者, 節義之堂室, 有節義而無道學者有矣, 未有有道學而無節義者也. 惟我先師艮齋先生之道學節義, 自有一世之公論而無有間然者矣. 一自吳震泳誣言誣筆之出, 先師之藩籬幾乎破矣, 堂室何得以獨全哉? 嗚呼! 先師窮而無位, 未能展布所蘊, 逮乎晩年, 遭値不辰, 瘴海萬里, 一心獻靖, 炳然之丹, 凜然之義, 可以質神明也. 乃於山頹之未幾, 欲以心神所寄之手稿, 請認而刊之者, 已是門人不思之甚, 且雖慮遠圖久之或出於萬不得已, 當曰: "先師有靈, 必大罪我. 我且負罪, 爲之猶可說也." 噫, 彼震泳欲伸己意, 敢誣引先師爲證, 答金洛斗討認之書曰: "今春三月,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世不可知, 文稿, 君須自料量爲之.'" 又書李炳殷曰: "先師嘗敎小子曰: '聞業印者自認則著書者無關云, 如此則似不必深拘.'" 此皆先師曾有認敎之謂, 而與癸亥三月十一日對先師仲子華九於華島倡言先師曾有認意者互相發也. 其所謂"認意"者, 卽"認敎"之實也, "認敎"者, 卽"認意"之表也. 以言以書, 白空撰出, 以成先師敎人認刊之擧, 是推諉先師, 以禦討己也. 於是嘲侮載路, 譏罵漲天, 皓皓我先師之日光玉潔, 歸於窣窣黑地而莫之解. 其陷師之罪, 吁亦極矣. 凡在及門之徒, 孰不明目張膽, 思所以辨討哉? 夫愛莫愛於親遺, 重莫重於先系. 然先師沈尸之誓不譜之戒不啻峻嚴者何哉? 爲其大義之愛重有大乎此故也. 獨於文稿也, 不拘乞認之爲破義, 而敎人自量爲之, 是稿之愛重, 非惟加於親遺先系, 又有大於大義之係也. 吾知其先師之學, 決不如是也. 此其心跡上確證, 旣昭昭矣. 且況晩年"勿急刊稿, 勿干彼認"之訓, 二度手筆, 鄭重嚴截付之仲子而謹守之. 一則曰: "若請願而刊布, 決是自辱, 愼勿勉從." 一則曰: "勿汲汲傳世, 以自取辱." 吾輩之所以據而斥之者, 亶在於此. 彼無據之誣言誣筆, 安足以亂識者之耳目? 但末俗好譏, 流言難定, 千口成公, 久傳成實, 誠不無其慮, 辨之討之, 在所不已, 而尙冀其息黥補劓, 而自服其誣, 自新厥躬矣. 終是自是愈甚, 少不萌悔, 至被黜祀而終不服. 其徒又有言"自辱之訓, 彼一時也, 料量之敎, 此一時也." 此所以先師之誣愈深而討擧之不容緩也. 玆敢仰通, 伏願僉君子, 齊聲共討, 以明先師大義, 以扶斯文一脈, 千萬幸甚.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정(自靖) 나라가 망했을 때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칠 것이니,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은둔하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전라북도 완주(完州) 출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자승(子乘)이며, 호는 고재(顧齋)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를 가리킨다.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한일합방 이후에 자정(自靖)의 의리를 지키기기 위해 군산도(群山島)로 갔다가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명목장담(明目張膽) 눈을 밝게 하고 담을 넓힌다는 뜻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일을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만약 …… 말라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ㆍ배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는 말이 보인다. 식경보의(息黥補劓) 자자의 흔적을 지워 주고 잘린 코를 보완해 준다는 뜻으로 개과천선(改過遷善)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조물자가 내 이마에 가해진 묵형의 흔적을 없애 주고 나의 베어진 코를 보완해 주어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선생의 뒤를 따르게 해 주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庸詎知夫造物者之不息我黥而補我劓, 使我乘成以隨先生耶?〕"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