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이교섭(李敎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昭和)9.7.25 李敎燮 李敎成 (昭和)9.7.25 李敎燮 李敎成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4년 6월 10일에 이교섭이 석품(石品)의 광폭과 후박, 대금, 비용처리, 전보식(電報式)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4년 6월 10일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이교섭(李敎燮)이 경성 남대문 밖 길야정(吉野町) 1정목(丁目) 118번지에 사는 이교환(李敎煥) 방의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썼으며 날짜는 미상이다. 석품(石品)의 광폭(廣幅)과 후박(厚薄)이 매우 졸렬하지 않으니 모양이라도 다시 갈고 새기는 것을 기약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고, 영남의 종중이 비를 세운 것에 관해 언급하고서 양문(兩門)에서 600원에 한하여 분배하여 수금하기로 하였고 석품대(石品代)는 200원으로 한정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여 의사를 묻고 있다. 비석에 들어간 돈에 대해서는 결과가 선하고 선하지 않고를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다시 갈고 새기는 일에 전면의 글자는 그대로 두고 후면 및 좌우의 글만 갈 것이며, 여러 종인과 함께 일할 때에 우리 문중의 배당금을 기약한대로 낼 것이라 하였다. 전의 비용을 들이고 다시 새기는 비용은 여러 방도로 종중에서 출역하여 큰일을 마치되 제종(諸宗)이 분담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홀로 감당하더라도 그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서찰의 끝부분에는 '후면은 다시 새긴다.[更刻後面]'는 것과 '다시 새로 작성한다.[更新作成]'는 전보식(電報式)이 적혀 있으며, 한자 옆에 한글로 음을 적었다. 만약 형편이 괜찮으면 전보를 특별히 배달로 부치라는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