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경서구옹어후〉 뒤에 삼가 쓰다 【계유년(1933)】 謹題先師敬書苟翁語後後 【癸酉】 나의 돌아가신 선생님께서는 김감역(金監役)162)이 임전재(任全齋)163) 어르신을 위해 쓴 제문(祭文)을 물리치셨다. 신구암(申苟菴)164)은 이에 크게 놀라워하며 말하기를, "호안국(胡安國)165)이 진회(秦檜)166)와 좋은 관계였던 것은 진회의 악행이 드러나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진회는 호안국(胡安國)을 한림원(翰林院)의 강연(講筵) 자리를 추천하였지만, 호 문정이 굳이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진회가 잘못 된 사람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시골 서생이 있는데 그의 스승이 별세하자,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제문을 쓰면서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를 한 겨울의 송백에 비유한 문구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골 서생이 크게 꾸짖기를 '어떻게 우리 스승님을 역적 진회(秦檜)에게 붙은 호안국(胡安國)에 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제문을 물리쳤습니다. 천하에 이와 같이 어긋나고 망령된 자가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선생님께서는 〈경서구옹어후(敬書苟翁語後)〉에 말씀하시기를 "구암 어른은 김 모(김평묵)가 '부귀한 부끄러움은 씻기 어려움,'167) '권력과 세태에 아첨함.'168) '국화와 푸른 대나무의 절기(節氣)',169) '연꽃 옷과 혜초 허리띠'170), '윤화정(尹和靖)171)이 정이천(程伊川)의 가르침을 굳게 지켰음', '덕을 절제하여 임금의 부름을 받음', '천지간에 홀연히 그 순수함이 사라졌음',172) '처음에는 공(임헌회)과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마침내는 문도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斯文)을 계승하였음' 등 갖가지 은어(隱語)173)로 칭찬인 듯 기롱인 듯 말을 한 사실을 듣지 못하셨다. 다만 호안국을 한겨울의 송백에 견준 것을 공격하는 문장만을 보셨다. 그런 까닭에 나더러 어긋나고 망령되다 꾸짖으신 것이니, 그 전후 사실과 곡절을 실답게 듣는다면 구암 어른 또한 응당 빙긋이 웃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맞는 말씀이다.또 말씀하시기를 "제문을 물리친 일은 정축년(1877, 고종14)과 무인년(1878)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그 후 수 십 년 동안 어른이 한 말씀도 질책 받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 때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174) 어른께서 일찍부터 나를 매우 아껴 주었는데, 제문을 물리친 일을 듣고서는 이성을 상실한 사람으로 여기셨다. 그 뒤에 김 아무개의 험한 말과 은밀한 자취를 모두 알게 되자 다시 원래대로 나를 대하셨다." 구암 어른의 일이 그랬듯이, 이 일도 또 그러하였다.선사께서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미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들처럼 구옹(苟翁)을 사모하였고, 구옹은 (나를) 아들처럼 보셨다."고 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어찌 다만 세속의 스승과 제자의 도의였을 뿐이리오?" 라고 하였다. 구암(苟菴)을 위해 지은 제문에서도 이르기를 "문하를 40년 간 왕래하였는데, 가르치고 아껴줌이 은근하고 정성스러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으셨다."고 하였으니, 정의(情誼)의 친밀함과 도의(道義)로 권면함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사께서 제문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구암은 그것이 망령된 패악인 줄을 알고 마음에 놀랐다면 응당 곧 급한 글을 달려보내 알렸어야 하고, 때가 늦었다면 응당 이후에 만나서 꾸짖으셨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신의 원고에 써서 크게 꾸짖으신 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그 후에 경당 서응순(絅堂徐應淳)의 경우처럼 의혹이 해소되었다면, 마땅히 서로 만나는 날에 어제의 의문과 오늘의 깨달음을 터놓고 다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 글을 전혀 산삭하지 않은 것은 또 어째서인가?선사께서는 "이 글은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에도 싣지 않았고, 재속(再續)․삼속(三續)․사속(四續)․오속(五續)에도 싣지 않았으며 아울러 별집(別集)에도 싣지 않았는데, 습유(拾遺) 원고에서 보였다면 그것은 구암 어른이 일찍이 이미 의심을 거두고서 내버려둔지 오래였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셨다. 이는 틀린 말씀이 아니다. 그렇지만, 구암의 정력이 늙을수록 강하고 총명하여 구십 이후에도 저술을 지속하여 백여 책이나 되고, 몸소 교감(校勘)하고 선사(繕寫)하면서 다수가 손수 서사한 것이어서 그 모두가 교정본(校訂本)에 나타났을 터인데, 어찌 거기에 눈길이 닿지 못해 산삭(刪削)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또 이 당시는 선사 또한 명성과 지위가 이미 현저한 상태여서 제문을 물리치신 것은 평생의 큰 일이었는데 문집 가운데 이것을 수록하셨다. 어쩌면 혹시 이것이 보통의 글 속에 묶여서 그 유무를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얼핏 교감을 빠뜨린 것이 아닐까? 이들 모두가 의문이다.선사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주자(朱子)가 오백풍(吳伯豊)175)이 한탁주(韓侂冑)176)에게 아부한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 황간(黃幹)177)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어찌 일찍이 안자(顔子)가 환사마(桓司馬)178)의 가신(家臣)이 되고자 하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한 것은, 뒤에 오백풍의 입지가 탁월한 것을 알고서, 도리어 탄상(歎賞)한 것이다. 이는 오공(吳公)에게 진실로 손해될 바가 없고, 주자에게서도 그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볼 수 있으니, 황간의 편지를 어째서 굳이 없애려고 하겠는가?"라고 하셨다.이는 선사께 손해될 바가 없고, 구암의 글을 삭제할 필요가 없다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다만 구암에게는 문집 가운데 끝내 도리어 탄상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기에 그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더욱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구암을 의심했다면 사안이 참으로 의아스러웠겠지만, 선사께서 구암에게 가르침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스승처럼 대하였다면, 어찌하여 제문을 물리친 일의 옳고 그름을 한 번 묻지 않은 것일까? 이는 사전에 의심할 바는 못 되었고, 제문을 보고 마음으로 헤아려 그것을 물리침이 당연함을 명확히 알았으니, 사후에 문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암의 말씀이 없어 서로 견해가 같은 것이라 생각하셨으니, 어떻게 문집의 글 속에서 크게 꾸짖고 있는 줄을 알아 질문하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선사께서 구암을 대하심에는 스스로를 믿듯 남을 믿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구암이 선사를 대함에는 스스로 처신하고 상대를 대우하는 모두가 아직 진정[誠]은 아니었다. 대저 의리(義理)의 공정함은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차이가 없고, 반드시 서울이라 밝고 시골이라 어두운 것은 아니다. 굳이 시골 서생이라 이름 붙여 비하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특히 의심스럽다." 라고 하였다.또 어떤 이는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그러면 안 된다. 선사께서 구암을 얼마나 존중하고 신뢰했는가? 또 이 일에 대해 앞서 이미 이와 같이 설명되었는데, 그대는 까마득한 후배로서 어찌 감히 다시 논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구암은 진실로 유림의 존장이다. 선사께서 매번 성리학의 충신으로 허여하셨는데, 그를 존중하고 신뢰함에 작은 틈도 없었던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이 한 가지 일은 본인 스스로에 관계된 일이니 단지 이와 같이 판단해 둘 수 밖에 없다. 가령 구암이 전재(全齋)를 처우함에 이와 같은 바가 있었다면, 그의 소견에도 반드시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릇 선사의 문인된 이들이 구암을 경앙하는 것을 두고는 당연히 그 속 사정에 짐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申苟菴以先師却金監役祭全翁文爲大駭而曰: 胡文定之與秦檜善, 在惡未露之前, 詞掖講筵, 檜之所薦, 而堅不欲就, 則已有見其不可矣。 今有一鄕生, 於其師之沒, 有引康侯大冬語, 以祭其師者。 鄕生大叱喝曰: 詎可以吾師比之於附賊檜之胡安國, 却其祭文? 天下固有如此悖妄者哉! 可駭也已! 先師書其後曰: 苟翁不及聞金某所爲貴恥難洗, 媚竈媚世, 黃花綠竹, 荷衣蕙帶, 和靖緊守伊川之說, 儉德被旌, 坤忽其純, 及始雖與公參差, 終得門徒爛漫, 允紹斯文等種種隱語似贊似譏之實, 而但見斥逐康侯大冬之文, 故以悖妄呵叱之矣。 若其實聞前後曲折, 則苟翁亦應莞爾而笑矣。 此固然矣。 又曰: 却文在丁戊間, 而厥後數十年, 翁無一言見責者。 彼時絅堂徐丈嘗甚愛愚, 及聞却文, 以爲喪心人。 其後悉知金之險詞陰跡, 還復如初。 苟翁之事亦然, 此亦然矣。 但先師此書之首, 旣云子之慕翁, 翁之視子。 世人皆曰: 奚但世俗師生之義已乎? 祭苟菴文亦云: 往來門屛四十年, 敎愛勤惓, 始終無二, 則其情誼之密、道義之勉, 宜其無所不至矣。 苟菴之聞先師却文也, 知其悖妄, 而駭之於心, 則當卽馳書喩之, 旣不及則應有面責於後。 不然而獨自書之己稿, 而大斥之者, 何也? 如其後之祛疑若徐絅堂, 則亦當道破昔疑今悟於相見之日, 不然而幷不刪其文, 又何也? 先師謂此文不載於元集、續集, 不載於再續、三續、四續、五續, 幷不載於別集, 而乃見於拾藁, 則苟翁之早已破疑, 而棄之久矣。 此非不然, 但苟菴精力老愈剛明, 九十以後修正著述爲百餘冊, 親自校勘繕寫多出於手筆者, 俱有見於校本, 豈有照管未到而不刪之理? 且是時先師亦名位已著, 而却文其生平大事, 集中此錄。 豈係尋常文字, 無關有無, 易致失勘者耶? 此皆可疑也。 先師又曰: 朱子誤聞吳伯豊附韓之說, 與勉齋書云: 曷嘗見顔子爲桓司馬家臣? 後知其立卓然, 還復歎賞。 此於吳公固無所損, 而朱子則益見其至公之心。 黃書何苦欲去之? 此爲無損於先師, 苟文不必刪之證則固矣。 但在苟菴, 則終不見還復歎賞語於集中, 益見其至公之心則恐未也。 有疑苟菴事誠可疑, 先師之於苟菴, 亦自認爲受敎, 而視之若師, 則何不以却文事當否一問而質之者? 此不足疑事前, 而見文度心, 明知其爲當却, 則不必問事後。 而苟菴無言, 則意其彼此同見, 何以知集中大斥而質問之? 吾故曰: 先師之於苟菴, 自信信人, 終始無他。 苟菴之於先師, 處己處人, 兩皆未誠也。 且義理之公無地方遠近之殊, 未必京明而鄕闇, 但論是非足矣。 其必目以鄕生而鄙夷之, 何也? 此尤可疑也。 又有謂余者曰: 子無以爲也, 先師之尊信苟菴爲何如? 且於此事已有解說若是, 子以眇然後輩, 何敢復有所論? 余曰: 苟菴固儒林碩匠也。 先師每以朱門忠臣許之。 其所以尊信無間者, 實在於是。 且此一著, 事關自己, 只得如此斷置。 若使苟菴處全翁有如此者, 其所見亦必有異也。 然則凡爲先師門人者之敬仰苟菴, 自當有斟酌於其間者矣。 김감역(金監役)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이다.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임전재(任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말한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성리학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전우(田愚)의 스승이다. 신구암(申苟菴) 신응조(申應朝, 1804~1899)를 말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구암(苟菴)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상현(常顯)의 아들이다. 유학자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호안국(胡安國) 북송 말기의 관료ㆍ학자이다. 1074~1138, 자는 강후(康侯), 호는 청산(靑山), 시호는 문정(文定)이며, 무이선생(武夷先生)ㆍ호문정공(胡文定公)으로 통칭된다. 성리학자 양시(楊時)의 제자이다. 진회(秦檜) 1090~1155, 자는 회지(會之)이다. 남송의 재상으로 여진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매국 간신의 상징인물이 되었으며, 그의 사후에 시호ㆍ작위의 수여와 박탈이 반복되었다. 부귀……어려움[貴恥難洗] "무도(無道)한 나라에서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고 한 《논어》〈태백(泰伯)〉편의 말을 응용하였다. 권력……아첨함[媚竈媚世] "아랫목 귀신[王]에게 애교떨기 보다는, 부엌 귀신[權臣]에게 아양떠는 것이 낫다[與其媚於奧, 寧媚於竈。〕"라는 한 《논어》의 말을 응용하였다. 국화……절기(節氣) 김평묵은 임헌회에게 "녹색의 대나무는 겨울 눈 속에 꼿꼿이 서있고, 노란 국화는 급한 찬바람을 견딘다.[綠竹挺寒雪, 黃花耐急風。]"는 구절을 담은 시를 증정하였었다. 연꽃……허리띠[荷衣蕙帶] 신선의 옷을 형용한 말로, 시끄러운 세속을 떠나온 은자를 가리킨다. 《초사(楚辭)》〈구가(九歌)〉편에 "연잎 옷에 혜초 띠 매고, 문득 왔다가 홀연히 가네.[荷衣兮蕙帶, 儵而來, 忽而逝。]"라는 구절이 있다. 윤화정(尹和靖) 북송 사람으로 이름은 돈(焞), 자는 언명(彦明), 호는 화정처사(和靖處士)이다. 성리학자 정이천(程伊川)의 문인이다. 덕을……사라지고 임헌회가 왕의 부름을 받았고 갑자기 별세한 일을 말한 것이다. 은어(隱語) 이상의 '연꽃 옷'에서부터 '계승하였음'까지의 말들은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任憲晦)를 위해 쓴 제문 〈제임전재헌회문(祭任全齋憲晦文)〉에 사용된 자구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서응순(徐應淳) 1824~1880,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심(汝心), 호는 경당(絅堂)이며,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후손이다. 간성군수 재임기간(1874~1878)에는 성긴 베옷을 입었고, 4월에는 보리밥으로 백성과 생활을 같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오백풍(吳伯豐) 오필대(吳必大, ?~1198)로서, 백풍은 그의 자이며, 남송 시대 주자의 고족(高足) 제자이다. 한탁주(韓侂冑) 1151~1207, 자는 절부(節夫)인 남송 시대의 권신(權臣)으로 국사를 전횡(專橫)하고 성리학을 위학(僞學)이라 공격하며 주자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황간(黃幹) 1152~1221,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斋)인 남송 시대 주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환사마(桓司馬) 사마향퇴(司馬向魋)를 말하는데, 춘추시대 송나라 경공(景公)의 총애를 받은 대부로서, 송나라를 방문한 공자를 죽이려하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