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 종중에 보냄 무인년(1938) 與星齋宗中 戊寅 제가 듣건대, 지난번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34) 일로, 일이 분란이 많아 비석의 글자를 깎아내는 변고까지 있었다하여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고가 우리 종파 사람에게서 나왔다니 마음이 몹시 편치 않음이 또 어떻겠습니까. 곧 당사자가 사죄하고 또 종중에서 처벌하였다하니 그 일은 이미 잘 처리 된 것으로 압니다. 요사이 또 듣건대, 한 쪽 의론만으로 뒷면의 음기(陰記)를 갈아 없애려고 한다던데 과연 이런 말이 있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문중 일의 분란이 그칠 날이 없을까 두렵습니다.제가 일전에 여러 번 비문(碑文)의 일로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은 칭찬과 선양이 온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지 비단 칭호(稱號)에만 있을 뿐만이 아니니, 이 글의 칭양(稱揚)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을 받을 때 '선생'이라 불러주길 청하여, 받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이미 새겨서 세웠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글을 사양하고 쓰지 않으려 해도, 그 글을 지은 이가 세상을 떠났으니 일이 심히 의미가 없고, 글 또한 보낼만한 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등의 부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조상을 폄훼하고 선사를 높인다는 배척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아, 조상을 폄훼하는 것은 큰 악행입니다. 천하에 어찌 조상을 폄훼하는 악행을 하고서 능히 그 선사를 높이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제가 조상을 폄훼했다고 하는 것도 원래 그 실정이 아니며, 제가 선사를 높였다고 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종중의 조치가 마땅치 않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하였고, 위로 선조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니 실지로는 선조를 높인 일이지 선사를 높인 일이 아닙니다.만약 이 문장이 연재(淵齋)35)나 면암(勉菴)36), 송사(松沙)37), 약재(約齋)38) 같은 제현의 손에서 나왔을지라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의론을 세울 것입니다. 어찌 구구하게 저의 선사께서 지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좋구나, 고인(古人)의 말이여! 그 말에 이르기를 "천하는 본래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이 스스로 어지럽힌다."39)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앞면을 다시 새긴 것도 이미 옳지 않은데, 지금 또 사리를 궁구하지도, 사람들의 비난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뒷면을 갈아 없애는 것은 또한 안 될 일입니다. 어찌 모두 아무 일이 없는데 스스로 어지럽혀서 분란을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제가 오늘 첨존께 아뢰는 것은 전날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개 지켜온 견해가 전후로 한결같이 이와 같아 단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종중 일에 대한 걱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말씀 드리니, 실정이 아닌 배척과 외부의 비방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첨존(僉尊)께서는 천리의 자연스런 이치를 따라서 한 쪽의 부당한 논의를 무마하시어, 크게 그릇된 일을 하여40) 외부의 모멸을 받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竊聞向以仙隱洞遺墟碑事, 事多紛紜, 至有鑿碑之變, 萬萬可駭.而變出鄙派中人, 心切不安, 又如何哉? 旋聞當人謝罪, 而自宗中處罰, 則知其事已得當矣.近又聞一邊議論, 欲磨去後面陰記云, 未知果有此說否? 若爾則竊恐宗事之紛紜, 無有已時也.區區前此累以碑事與諸宗辨者.有曰:"文貴稱揚得當.不徒在稱號之間.而此文之稱揚, 則蔑以加矣.", 有曰:"受文時, 請稱先生而得之則善矣.念不及此, 旣已刻立, 則無辭可說矣.", 有曰:"雖欲退文不用, 旣不及作文家在世, 則事甚無謂, 文亦無可送處矣."之類, 不勝其多, 而至被貶祖尊師之斥矣.嗚呼! 貶祖大惡也.天下安有有貶祖之惡而能尊其師之理乎? 謂我爲貶祖者, 元非其情, 謂我爲尊師者, 亦非其實.特以恐宗中之擧措無當, 致人譏議, 上累祖先而然, 則實亦尊祖非尊師也.假使此文出於淵齋、勉菴、松沙、約齋諸賢之手, 亦當如是立論.豈區區爲鄙先師所作而然哉? 善乎, 古人之言! 曰:"天下本無事, 庸人自撓之." 向之改刻前面, 已是不可, 今又不究事理, 不恤人譏, 而爲磨去後面之尤不可者.則豈非皆無事自撓以致紛紜者乎? 澤述今日爲僉尊仰告者, 不過前日之與諸宗辨者.蓋所執之見, 前後一直如是, 斷無他意矣.宗事之憂, 不能自已, 有此瀝誠之言, 非情之斥.外來之謗, 有不可顧者.伏願僉尊循天理自在之理, 鎭一邊未當之論, 無至鑄大錯受外侮之地, 千萬幸甚.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의 유허비이다. ?간재집(艮齋集)? 권18에 「지포김문정공유허비음기(止浦金文貞公遺墟碑陰記)」로 실려있다. 간재가 이 비문을 지을 당시 '선생'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고 지은 것이 간재가 세상을 떠난 후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 좨주(祭酒)에 기용된 뒤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상소 10조를 바치며 진언하였다가, 다음날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 대전 회덕으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고,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문신이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1852~1916). 자는 회경(晦卿)‧영중(英仲), 호는 난곡(蘭谷)‧약재(約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흠모하여, 19살 때부터는 회덕(懷德) 남쪽, 우암이 기거했던 소재동에 자주 방문하였다. 저술로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천하는……어지럽힌다 당 나라 육상(陸象)이 한 말이다. 크게……하여 당 소종(唐昭宗) 연간에 위박 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羅紹威)가 주전충(朱全忠)과 연합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위부(魏府)의 아군(牙軍) 8천 인을 소탕하는 숙원을 풀었으나, 그 과정에서 주전충을 대접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탕진한 나머지 자신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후회하여 "6주 43현의 무쇠를 모아 줄칼 하나도 주조하지 못했다.[合六州四十三縣鐵, 不能爲此錯也.]"라고 말한 주성대착(鑄成大錯)의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唐昭宗天祐3年》 《北夢瑣言 卷14》 여기에서 착(錯)은 곧 옥석(玉石)을 다루는 도구인 줄칼[鑢]이라는 뜻과 함께 착오(錯誤)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나소위가 스스로 큰 착오를 빚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 주착(鑄錯)의 고사가 만회할 수 없는 중대한 실수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증전도인(贈錢道人)〉 시에 이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에는 한번 뜻이 쾌했어도, 일이 지난 뒤엔 부끄러움이 남는 법. 모르겠네 몇 주의 무쇠를 모아, 이 하나의 착오를 빚어냈는지.[當時一快意, 事過有餘怍, 不知幾州鐵, 鑄此一大錯.]"라고 표현한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