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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백윤한(白潤翰)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敎成 1935 白潤翰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한남서림 백두용의 아들 백윤한이 아버지 사후 장부를 정리하면서 『역대도』의 값을 수수하기 위하여 이교성씨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5년 한남서림 백두용의 아들 백윤한이 아버지 사후 장부를 정리하면서 『역대도(歷代圖)』의 값을 수수하기 위하여 이교성(李敎成)씨에게 보낸 간찰이다. 상대가 말씀한 것은 잘 알겠다고 인사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다소간의 거래가 있던 책자에 대하여 장적(帳籍)과 대조해 본 결과 조금도 차이는 없지만 역대도(歷代圖) 2책이 13원의 값으로 상대가 가지고 있다는 증서(証書)가 있어 상대에게 증서를 보내니 살펴봐 줄 것을 청했다.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은 만큼 서점의 사정이 전날과 다르다며 우리 서점 장부에 있는 상대의 돈이 17원이고 상대가 잠시 가지고 있는 책값의 증서에는 13원으로 적혀 있고, 장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3원을 감하여 10원으로 결정하였으니 남은 액인 7원과 증서를 함께 보낸다고 적었다. 만약 『역대도』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도로 돌려주어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책을 도로 보내준다면 10원을 돌려 드리겠다고 전했다. 백두용(白斗鏞,1872~1935)은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설립한 인물이다. 편지에 작성일자와 작성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백두용의 사망시기로 보아 1935년으로 보이며, 백두용의 글씨와 비슷한 서체로 보아 그 후손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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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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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21년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李仁敏)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辛酉四月 李商永 辛酉四月 李商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1년 4월 16일 이상영이 쓴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의 묘갈명과 서문 1921년 4월 16일, 통훈대부 행(行)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낸 이상영(李商永)이 쓴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李仁敏)의 묘갈명과 서문이다. 이인민(1330~1392)은 할아버지가 이조년(李兆年)이며, 백형이 이인복(李仁復), 중형이 이인임(李仁任)인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그러나 이상영은 이 묘갈명의 서두에서, 공은 국정이 어지러움을 보고 하루아침에 관직을 버리고 경산으로 돌아갔으니 이른바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不俟終日者)이었다고 하였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기미를 보고 떠나가서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見幾而作 不俟終日)"고 하였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 선생이 그에게 준 시에서 "돌아가도 되는데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한산(韓山) 옹이고, 머물러도 되는데 머물지 않는 사람은 제학(提學) 공"이라고 한 것과, "선생의 대의(大義)는 군신(群臣)을 움직였다."고 하고 또 "출처(出處)는 다만 대의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며, 공의 고상함은 헛되이 고상한 것이 아니라, 의(義)가 있으면서 고상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영은 1905년 11월 2일 을사오적인 박제순 등 역적들에게 국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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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4년 이종상(李鍾祥)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 陰十月 二十六日 李鍾祥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生員 南原宅 侍史開坼 甲子 陰十月 二十六日 李鍾祥 李生員 南原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4년 음력 10월 26일에 이종상(李鍾祥)이 족보의 일로 이생원 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 1924년 음력 10월 26일에 이종상(李鍾祥)이 족보의 일로 이생원 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지난 1922년 여름에 족손 이종상이 영남에서 대동보의 일을 맡았는데, 호남의 남북도에 종중의 임무로 차례로 찾아다니다가 처음 족대부의 병풍궤 아래에 옷자락을 들어 올려 경의를 표하였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하면서 안부를 묻고, 족손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문경공 파보의 일은 처음에 대동보의 역사와 함께 말들이 있었으나, 대동보는 이미 완성되었고 균형을 잡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본파이다. 본파 안에 신구의 보승(譜乘)이 없지 않으나 근래의 사실들이 소루하기가 매우 심하고 상세함과 소략함이 같지 않다. 계통의 단절과 후손과의 관계가 어긋난 것이 많다. 본파의 대동을 위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사람과 재물을 얻는 것은 고기를 잡는 사람의 공이니 이를 통찰해 달라고 하였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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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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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22년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의 고문(告文)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壬戌二月十一日 李冕容 雲谷 石洞 詩川 宗中 壬戌二月十一日 李冕容 雲谷 石洞 詩川 宗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2월 11일에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이 운곡(雲谷) 등의 종중에 위토 불법방매 등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이를 해결할 방도를 구하고자 보낸 고문(告文) 1922년 2월 11일에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이 운곡(雲谷) 등의 종중에 위토 불법방매 등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이를 해결할 방도를 구하고자 보낸 고문(告文)이다. 사건은 종팔(鍾八) 등이 서산 위토를 방매(放賣)하고 종일(鍾一) 등이 문경공 선조부군 부자의 영정과 상홀(象笏)을 고물상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을 곡성 신전(薪田) 종중에 보내 대책을 의논하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이 문제를 잘 실행해 나가려면 모든 종인이 이를 헤아려서 잘 조처할 만한 방도를 제시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 고문을 보낸 종중은 운곡과 석동(石洞), 시천(詩川) 등 3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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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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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종현(李鍾現)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鍾現 李鍾采 李鍾現 李鍾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문중의 유사 이종현이 이종채에게 근래의 문중 일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낸 간찰과 피봉 모년에 문중의 유사(有司) 이종현(李鍾現)이 가천의 이종채(李鍾采)에게, 근래의 문중의 여러 일에 대해 혹자의 말을 빌어 문제를 조목조목 제기하고, 자신 의견을 쓴 장문(長文)의 간찰이다. 날짜는 미상이다. 혹자가 말한 것에는, '귀 종중 일은 어찌 이처럼 창피한가. 문중 토지를 이전하는데 20인 명의의 공동소유로 하기로 하면서 시천파는 사람이 없어 1명이 참가하였다고 하고, 여기에 면 직원인 정순(正淳)이 마음대로 인감을 처리하여, 문장(門長)의 아들 교성(敎聲)이 이를 말하니, 정순이 종손이 어디에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의 문중은 무종손(無宗孫) 무문장(無門長) 무유사(無有司)라 이를 수 있다. 지난해 묘사(墓祀) 때 시천에서 한 사람도 헌관(獻官)을 맡을 만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종손이다. 지난해 목사(木寺)‧가천 두 파는 일하는 인원이 상경(上京)할 때 마음대로 쓴 경비가 5‧600원이었는데, 문장이 전혀 몰랐다고 하니, 무문장이 아닌가?' 하는 등의 내용이 있다. 발신인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 내용에는, '참판 공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止慈), 시촌(詩村) 공의 효우(孝友), 승지공·판서공·종사랑공의 그 형을 사랑하고 그 집안을 존중하여 천륜이 돈독함으로, 종서(宗庶)에 질서가 있고, 장자와 지차의 차례가 있었다. 비록 세대가 점점 멀어져 무복(無服)에 이르면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나, 우리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같은 자손이다. 그 자손 된 자가 만에 하나 어찌 우리 조상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겠는가. 선조의 자애와 효도‧우애의 윤리를 어기는 것은 즉 참판공 및 시촌공 4형제에 대한 죄인이다. 비록 저승의 선조라도 하늘에 영령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영령이 있다면, 이러한 자손은 마땅히 보이지 않게 죄줄 것이다. 남원 영광의 종족과 여러 장유(長幼)에게도 이를 고하여 이 일에 대해 알리기를 바란다.'는 등이 있다. 피봉 앞면에는 수신자 이종채(李鍾采)의 이름과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라는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종현의 주소지인 순천군 황전면 죽내리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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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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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종협(李鍾浹)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鍾采 氏 座下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1월 17일 족종 이종협과 종탁(鍾鐸)‧철협(喆協) 3명이 이종채에게 족보 간행사업에 관한 용건을 적어 보낸 간찰 1926년 1월 17일 족종(族從) 이종협(李鍾浹)‧종탁(鍾鐸)‧철협(喆協)이 가천의 이종채(李鍾采)에게 보낸 간찰로, 족보 간행사업의 진행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3년 뒤에 훌륭한 보책(譜冊)이 나오면 감격이라 하면 감격이고, 또한 가문에 새로운 광채를 더할 것이나, 족보간행 사업을 시작하고 여러 해가 되었고, 우리 본파는 인력을 투입하고 간행을 도와 완성을 고하고자 하는데, 귀 문중은 무엇을 찾느라 늦어지는가 하고 물었다. 족보의 규칙은 시대를 따라야 한다. 적서(嫡庶) 등을 말하지만, 분별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편집의 규칙에서도 층(層)에 10자, 높이는 9자 등으로 정해져 있는데, 귀 파(派)에서 따로 의견을 제시하니, 만약 누락되는 것이 없으면 미루지 말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속히 부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 고치고 내일 또 고쳐서 세월을 보내어 비용이 늘어나니 감당하기 어렵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보내는 날짜 위에는 발신인의 종파의 직인이 찍혀있다. 피봉 앞면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이종채(李鍾采)씨 좌하(座下)라 하였고, 뒷면에는 경성부 성주이씨보소(星州李氏譜所)에서 이종협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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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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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한시(漢詩) 초고(草稿)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지은 "삼산정사운"이라는 칠언율시와 "내팔경음"이라는 칠언절구 17수의 한시 초고 삼산정사(三山精舍) 7언율시와, 내팔경음(內八景吟)이라는 제목아래 7언절구 17수가 있다. 내팔경음에는 절구마다 각각 제목이 붙어 있는데, 방장청풍(方丈淸風), 영주조돈(瀛洲朝暾, 영주의 아침햇살), 봉래낙조(蓬萊落照), 화서천인(華瑞千仞), 수강벽립(壽崗壁立), 소요숙운(逍遙宿雲), 입암산성(笠岩山城), 명금초가(鳴金樵歌), 동림춘수(東林春水), 옥녀추월(玉女秋月), 갈령동송(葛嶺冬松), 조치훤성(鳥峙喧聲), 웅포환화(熊浦渙火), 만경연야(萬頃連埜), 칠보광명(七寶光明), 내장효종(內藏曉鍾) 등이다. 그러므로 내팔경은 전라도의 여덟 지역을 읊은 것이며, 지우고 수정한 곳이 여러 곳 있는 초고(草稿)이다. 이 시에서 삼산정사는 전남 곡성군의 "죽곡면(竹谷面) 삼태리(三台里)에 있는 강학소이다. 본관이 문화(文化)인 유태영(柳台永)이 종인(宗人) 동기(東基)과 친구 조은규(趙殷奎) 및 뜻이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건립하여 강학하던 곳이 있으나 여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방장산은 전북 정읍시와 고창, 전남 장성의 경계에 솟아 있으며, 영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부안의 변산(邊山)을 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고 하였다. 입암산성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이다. 옥녀추월의 옥녀봉은 전북 무주군 부남면(富南面)에 있다. 갈령은 전남 장흥군 장평면 녹양리 서남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웅포는 익산에 있는 지명이며, 만경은 만경의 넓게 이어진 들판이라는 뜻으로, 김제지역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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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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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5년 이종탁(李鍾鐸)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 陰六月 二十五日 李鍾鐸 李敎成 乙丑 陰六月 二十五日 李鍾鐸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음력 6월 25일에 이종탁(李鍾鐸)이 족보 발간의 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簡札) 1925년 음력 6월 25일에 이종탁(李鍾鐸)이 족보 발간의 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성주이씨보소(星州李氏譜所)에서 보낸 것으로 보아 종사(宗事)에 관한 용건인 것으로 보인다. 천륜은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종사와 보역(譜役)을 번거롭더라도 모두 살피는 것이다. 우리 문경공(文景公) 파보는 지난해 경성에서 시작하였다가 형편에 따라 여기로 옮겼다. 우리 파도 대동보에 빠질 수 없어 독려하고 있으며 단자를 올려 보낼 날이 아직 있다. 보소에는 현재 단자를 제출한 곳이 70여 가문이며 인원수는 3천5백여 명이다. 각각 백여 질의 보안(譜案)이 승낙되었는데, 쓸데없는 말들이 있다. 지체되지 않게 문중에 비용을 독촉해 단합해서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 외에 교정건과 대부님의 건강, 노원의 소송 등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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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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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3년 이정순(李正淳) 계약서 1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大正拾貳年陰三月貳拾九日 李正淳 李大容 大正拾貳年陰三月貳拾九日 李正淳 李大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92_001 1923년 음력 3월 29일 이정순이 작성한 참판공 상‧하대 위토의 도벼 사용에 대한 계약서 1923년 음력 3월 29일 작성한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 소재 참판공 상‧하대(上下代)의 위토 도벼(賭租)에 대한 계약서 첫 면이다. 계약서의 내용은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참판공의 아래 윗대의 위토(位土) 도벼 중에서 지용(支用)하는 제사에는 다음 사항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매년 도벼 수입 몇 십 섬(石) 중에서 지정(指定)은 6섬으로 하며, 6섬 중에서 4섬은 참판공 제사에 2섬은 시천공 등의 제사에 쓰되 예전대로 준용한다고 하는 것 등이다. 곡성‧보성 양 읍의 성주이씨 문중 대표자로, 보성군 문덕면 계약인 이정순(李正淳) 등 2인과 증인 2명, 그리고 성주이씨 문장 이대용(李大容), 동 종손 이교재(李敎在) 등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교성(李敎成) 등 연명인 21인의 이름을 기록한 연명록이다. 모두 이씨(李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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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26년 이형순(李亨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五月十八日 李亨淳 李 生員 南原宅 丙寅五月十八日 李亨淳 李 生員 南原宅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5월 18일, 족손 이형순이 자신의 7대조비 분묘 이장건으로 보성군 이생원댁(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 1926년 5월 18일, 족손(族孫) 이형순(李亨淳)이 자신의 7대조비 묘소의 이장에 대하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일로 보성군 이(李) 생원댁(남원댁)에 보낸 간찰이다. 상대와 한 촌내의 여러 집이 모두 평안한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객지에서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번에 올라 온 것은 안산(安山) 묘소를 살피기 위해 온 것이라며 성묘를 하고 보니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한편으로는 감탄하였다고 했다. 7대조비(代祖妣)의 산소에 사초(莎草)가 전무한 것을 보고 걱정하고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석동리(石洞里)로 옮겨 합장함이 좋겠다고 하였다. 무덤을 깨는 날은 이달 19일로 정하였고 합장일자는 21일 오전 8시가 될 것이라며 문중의 부형(父兄)들게 말씀드리고 시제에 참고하시며, 합장일자를 내려가서 다시 택하여 정하겠다고 하였다. 국한문 혼용체로 토(吐)를 한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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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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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0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집발간 통문(通文)과 제사(祭事)에 관한 초고(草稿)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庚午三月十九日 澹對軒儒會所 庚午三月十九日 澹對軒儒會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0년 3월 19일 담대헌 유회소에서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집발간을 위해 발문한 통문과 제사에 관하여 논한 초고 1930년 3월 19일 담대헌 유회소(澹對軒儒會所)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의 문집발간을 위해 발문한 통문이다. "우리의 도(道)를 전승하는 것은,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에게 달려있고, 사람이 죽으면 책에 달려있다. 우리 성사 선생이 우리를 두고 떠나가신지 이미 15년"이라고 하면서 송사선생 문집 발간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유회소의 도청과 도유사, 부유사, 사서, 도감, 감동 등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도청은 민치량(閔致亮)이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며, 조부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1896년 일본 세력을 구축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담대헌은 기정진(奇正鎭) 선생이 장성군 진원면 사무소 뒤편 고산 마을에다 1878년에 지은 정사(精舍)로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1931년 ?송사집?이 발간되었다. 이 통문의 뒷면에는 기일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함께 제사지내는 문제, 장지(葬地)에서의 산신제, 묘제 등 제례에 대해 논한 내용이 필사되어 있다. 작성한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다. 글의 첫머리에 "기일에는 옛날에 제사가 없었는데, 정자(程子)‧한위공(韓魏公)‧사마온공에 이르러 제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考妣)를 함께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묻자, 정자가 대답하기를 '한 분의 신위에만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朱子)도 가례(家禮)에서 한 분의 신위만 설치한다고 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 신위를 함께 설치하니, 마침내 나라의 풍속이 되었는데, ?오례의?라는 책은 개국 초기에 잘못 편찬된 두찬(杜撰)이다."라고 하면서 퇴계도 '어머니의 기일에 아버지 제사를 올리는 것은 존자(尊者)를 끌어들인다는 혐의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장사지낼 때의 산신제(山神祭)와 묘제(墓祭)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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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가짜 비문[贗碑文]'에 대한 간찰(簡札) 초안(草案)과 시문(詩文) 초안(草案)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가짜 비문[贗碑文]'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 간찰 초안과 주자가 황중본의 〈붕우설〉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이를 모방하여 지은 시 5수 '가짜 비문[贗碑文]'과 관련한 상대방의 문제 제기에 대해, 발신자가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 간찰이다. 발신하려고 한 간찰의 초안이거나 수신한 간찰의 일부로 보인다. 발신자명, 수신자명, 연기(年紀)가 모두 없다. 저희 집안인 곡성군의 면섭(冕燮)으로부터 나의 이름을 거론하고, '완지(莞誌) 간행소에 안비문(贗碑文)을 싣지 말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으로 안비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당초 임승모(任承模)의 변문(辨文)이 나오자, 안씨(安氏)는 사문난적(斯文亂賊) 등으로 원수처럼 성토하였으나, 필암서원(筆巖書院)에서는 '하서(河西) 비문을 모방했을 뿐 아니라 하서보다 낫다.'고 하였다는 등의 의견을 소개하고, 우암 송시열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호)의 말, 영송 김재홍(嶺松 金宰弘)과의 토론, 옛글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과 관련한 주자(朱子) 등의 말, 우암(尤庵)이 포은(圃隱)·정암(靜庵)·율곡(栗谷)·사계(沙溪)·하서(河西) 등을 평가한 말 등을 들어 이들 5명이 공자와 주자의 도통을 이었다고 하는 등의 의견을 진술했다. 안비(贋碑)에서 한 말인 '하늘이 사문(斯文)을 열었으니, 당세에 도를 행할 수 없으나 만세에 능히 전할 수 있다.'는 글의 취지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뒷면의 맨 처음에는 주자가 황중본(黃仲本)의 〈붕우설(朋友說)〉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이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밝혔다. 시는 '심산은 시 짓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心山非是愛吟詩]'로 시작하며, 내용에 천속(天屬)이 포함된 시 5수의 초고와 메모가 있는 초안이다. 시 5수의 첫구는 모두 '심산은 시 짓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심산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천속지합(天屬之合)인 부자‧형제 관계, 천속으로 말미암아 이어진 부부관계, 천속에 힘입어 온전한 군신관계, 천속에 힘입어 바른 붕우관계 등에 대한 시 5수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맹자(孟子)》 의 글 등을 적었다. 주자의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1의 〈발황중본붕우설(跋黃仲本朋友說)〉이다.(星州李氏譜所)에서 이종협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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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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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3년 이정순(李正淳) 계약서 2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大正拾貳年陰四月壹日 李正淳 李敎成 大正拾貳年陰四月壹日 李正淳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92_001 1923년 음력 4월 2일 이정순이 작성한 참판공 상‧하대 위토의 명의 이전수속에 대한 계약서 1923년 음력 4월 2일 이정순(李正淳)이 작성한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참판공 상‧하대(上下代)의 묘위토(墓位土)에 대한 명의 이전수속 계약서의 1면이다. 계약서 내용에는 '대지‧전답 19필지(1만3천558평, 토지가격 1,719엔(円))가 문장의 명의로 되어있었는데, 문중의 의론에 따라 공동소유로 이전 정리한다. 토지의 이전에 대하여 참판공 후손이 곡성파·가천파·시천파 합 3파인데, 종손은 시천파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전 문권에는 곡성파 10인, 가천파 10인만 기재되고 시천파 한 사람도 기재하지 않은 것은 대리인이 불민했던 것이므로. 다시 시천파 10인을 첨부하여 신청 정리한다. 이 10인을 더하여 신청정리에 드는 비용은 얼마인지를 묻지 않고, 앞에 기재한 곡성파 10인과 가천파 10인 개인 돈으로 쓰고 문중에는 요구하지 못한다. 앞에 기재한 곡성파 10인과 가천파 10인 중에 이 사항에 반대가 있을 때는 앞의 토지 13,558평을 옥척(沃瘠)을 3등분하여 2분은 참판공 위토, 일분은 시천공 등의 위토로 인정한다' 하는 등 여러 조항이 있다. 계약인은 곡성군 보성군 성주이씨 문중대표자 이정순(李正淳)으로 되어 있고, 이교성(李敎聲)‧이교재(李敎在) 앞(典)으로 되어 있다. 집필(執筆) 1인과 증인 2인의 서명이 있다. 글자체는 한문과 한글을 혼용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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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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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5년 이대순(李大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九月念八 李大淳 乙丑九月念八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9월 28일에 이대순(李大淳)이 종중 사람들에게 새로 간행된 족보와 '백순의 글'을 보낸다는 간찰(簡札) 1925년 9월 28일에 이대순(李大淳)이 종중 사람들에게 새로 간행된 족보와 '백순의 글'을 보낸다는 내용의 간찰이다. 면섭(冕燮)을 통해서 본 여러분들의 글이 우리 문중의 정수리의 침이 된다고 하면서, 이로 인해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묘답(墓畓)을 옮기는 일, 문경공 상홀(文景公象笏)의 일, 노원(蘆原)의 일 등은 매번 치열했는데, 지금 족보를 간행하는 일을 보면 '들불(燒原)'이 되지 못하고, 다만 차가운 불일 뿐이라고 하면서 '백순의 글(百淳書)'과 족보를 함께 보낸다는 내용 등이 있다. '백순의 글'은 백순의 입장에서 쓴 글로, 세 사람이 위탁한 일에서 종현(鍾現)과 같이 하여, 백순이 하나도 혼자 비용을 쓴 일이 없고, 서로 헤어질 때도 결산서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 이후 비용의 처리 등에 대한 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끝에서는 비록 백척간두에 있으나 의롭지 않은 종중 재산은 결코 탐하지 않았음을 단언하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하고, 백순은 그간 본 몇백의 손해는 놔두고도, 잘못 없이 종중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아 신분이 땅구덩이로 추락했으니 통탄하나, 이미 응송(應訟)하고 있으니 믿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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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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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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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35년 한남서림(翰南書林) 증서(証書) 1 고문서-증빙류-증서 昭和九年 陰九月十五日, 10.2.2 翰南書林 李敎成 昭和九年 陰九月十五日, 10.2.2 翰南書林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光化門 10.2.2 后4-8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음력 9월 15일, 전남 보성군의 이교성씨가 한남서림의 백두용씨에게 『역대계통도』, 『석봉서첩』을 가져가면서 대금을 보내기로 약정한 내용의 증서 1935년 음력 9월 15일에 전남 보성군의 이교성(李敎成)씨가 한남서림(翰南書林)의 백두용(白斗鏞)씨로부터 『역대계통도』, 『석봉서첩』을 가져가면서 대금을 보내기로 약정한 내용의 증서이다. 『역대계통도(歷代系統圖)』 2책의 금액은 대금 13엔, 『석봉서첩(石峰書帖)』 3책의 금액은 대금 5엔이라고 게시한 후 두 책자를 가져간다는 것, 9월 말일까지 대금을 보내기로 약속한다는 것, 만약 살 생각이 없을 경우 책자를 반송하기로 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증서의 서약자 이교성(李敎成)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살며, 증서의 수취자는 한남서림(翰南書林)의 백두용(白斗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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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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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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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종탁(李鍾鐸) 등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陰二月 十二日 李鍾鐸 丙寅 陰二月 十二日 鍾鐸 鍾浹 相元 相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음력 2월 12일에 이종탁(李鍾鐸) 등이 족보와 채무 관계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 1926년 음력 2월 12일에 이종탁(李鍾鐸) 등이 족보와 채무 관계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이다. 족보 간행의 일이 완공을 고할 듯하다. 같은 파가 한데 모인 날을 돌아보면 오직 귀 문중이 아직도 늦어져서 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수단도 끝내고 필사도 마쳐야 하는 지금 몹시 서운함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서산(西山)의 종중의 일은 귀 문중에서 헌토(獻土)하는 정성을 다했으나 아직도 보완되지 않았다. 당시 채무는 원금과 이자의 액수가 도리어 새 토지를 환매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평순(平淳)이 10원을 영수하기로 허락했으니 받아서 드리고 통찰한 후에 귀 문중에서 헌토 가액 및 수년 동안의 도조(賭租) 내에서 이 10원을 제하고 나머지 액수를 즉시 보내는 것이 맞겠다. 대종(大宗)의 제반 묵은 부채를 타결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신인은 이종탁 외에, 종협(鍾浹)·상원(相元)·상형(相衡) 등 4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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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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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24년 이종일(李鍾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 陰十月 二十五日(간찰)/陰十月 二十六日(피봉) 李鍾一 李冕容 甲子 陰十月 二十五日(간찰)/陰十月 二十六日(피봉) 李鍾一 李冕容 경성부 죽첨정 131번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4년 10월 25일 족손 이종일이 이면용에게 족보 편찬사업 관련내용으로 보낸 간찰 1924년 10월 25일 족손(族孫) 이종일(李鍾一)이 가천 이면용(李冕容)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집안 어른의 안부를 묻고, 족보편찬 일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홍순(洪淳)을 통해 안부를 들었고, 또 공의 의론(議論)으로 우리 문경공파(文景公派)의 족보를 기일에 맞춰 완성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며, 통찰해 주심에 칭송하는 마음에 끝이 없다고 하였다. 10월에 수운(壽韻)의 건강이 계절에 따라 좋은지, 집안이 모두 편안한지 묻고 자신은 그런대로 지낸다고 하였다. 보의(譜儀)는 두 번의 통유(通諭)에서 잘 알았으나, 그 파(派)에서 각자 작업하는 것은 오히려 산만하고 계통이 없으니, 경기에서부터 먼저 창도해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족대부(族大父)께서 감독하고 살펴주어서 이미 시작한 이 일을 완성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피봉 앞면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이면용씨 정좌하(李冕容氏 靜坐下)라 하였고, 뒷면에는 경성부 죽첨정(竹添町) 131번지 이종일, 음력 10월 26일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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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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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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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소원음(所願吟)〉 등의 시 초고(草稿)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519_001 〈홍백란〉, 《지비자집》의 〈경협골〉, 〈박인규에게 고하다〉, 〈소원음〉 등의 시 초고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수정한 초고이다. 작성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며, 모두 15편이다. 〈홍백란(紅白亂)〉 2수, 〈발문(發㦖)〉 2수, 〈증야죽박우(贈埜竹朴友)〉 3수, 《지비자집》의 〈경협골(勁脥骨)〉 5수,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 〈박인규(朴仁奎)에게 고하다〉, 〈소원음(所願吟)〉 등의 시가 있다. 〈경협골〉의 제목 밑에는 '주자(朱子)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자가 이 3자를 써주었다.'는 세주가 있어, 이 시를 쓴 배경을 설명하였다. 〈소원음〉은 칠언율시로 '공자를 배우고자 하면 이자(李子)로부터,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송자(宋子)로부터. 이자는 우리나라에서 공자를 잇고, 송자는 우리나라에서 주자를 이었네. 심산(心山)은 두 부자(夫子) 모두 배우기를 원하네.'라는 내용이며, 이 시의 밑에는 "석담(石潭, 율곡 이이)의 근원은 수사에서 나왔고, 화양(華陽, 우암 송시열)의 맥은 무이(武夷)를 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라는 시는 아래의 관련문서 마지막에 있는 〈있고 없음을 읇다[有無吟]〉, 〈장서실에서 쓰다[書于藏書室]〉와 같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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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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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2년 이종형(李鍾瀅)·이종석(李鍾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戌陰三月二十日 李鍾瀅 李敎成 壬戌陰三月二十日 李鍾瀅 李敎成 경기도 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음력 3월 20일, 종하 이종형·이종석 등이 이교성씨에게 선조 문경공 위토를 잃어버린 일과 관련하여 종중회의를 하기 위해 인천부 이철순가로 왕림해 줄 것을 청한 간찰(簡札) 1922년 음력 3월 20일, 종하(宗下) 이종형(李鍾瀅), 이종석(李鍾錫) 등이 선조 문경공 위토를 잃어버린 일과 관련하여 종중회의를 하기 위해 인천부 이철순가(李哲淳家)로 왕림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 씨에게 보낸 간찰이다. 선조 문경공 위토 견실사(見失事)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것이라며 별묘(別廟)터를 귀정(歸正)하던지, 위토(位土) 사건을 환퇴(還退)하는 방침을 연구하던지 결정하기 위하여 본년 4월 25일에 인천부(仁川府) 우각리(牛角里) 제1호 12번지 이철순의 집에서 방침을 규정할 수 있도록 왕림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그 곳에 왕림하는데에 들어가는 여비는 각기 종중에서 부담하도록 할 일이라고 추기해 놓았다. 간찰과 동봉되어 있는 별지(別紙)에는 피고(被告) 적자(賊子) 3인 중에 학순(學淳)은 이미 죽었고, 종팔(鍾八)은 현재 서대문 감옥에 있고, 만종(万鍾)은 지금 수색 중이라는 정보를 적어 놓았다. 국한문 혼용 문체를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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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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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백두용(白斗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七月一日, (昭和)10.7.30 翰南書林 李敎成 乙七月一日, (昭和)10.7.30 翰南書林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光化門 10.7.30 后4-8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7월 1일, 한남서림 백두용이 이교성에게 상대가 돌려준 책을 잘 받았으며, 원하는 책을 만들어 보내면 받을 것인지 묻고, 판매하고 있는 책의 가격을 전한 간찰(簡札) 1935년 7월 1일, 한남서림(翰南書林) 백두용(白斗鏞)이 돌려준 책을 잘 받았으며 상대가 원하는 책을 만들어 보내면 받을 것인지 묻고 판매하는 책 가격을 전한 내용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마와 더위가 성한 이때의 수해를 언급하며 안부를 묻고, 상대가 보내온 답장 편지를 여러 차례 읽으며 기뻤다고 인사하고 자신은 더위를 먹었고, 가족들은 별 탈이 없다고 인사했다. 상대가 보내온 『화동강목(華東綱目)』, 『서오경(書烏經)』, 『이락연원(伊洛淵源)』을 잘 돌려받았다고 전하고, 『매월당집(梅月堂集)』을 만들어 보낸다면 받으시겠냐고 물었다. 『율곡전서(栗谷全書)』가 현재 한 질 있는데 지본(紙本)은 경천연지(京川連紙)로 1권을 베껴서 채워 놓았으며, 총 책수는 24책으로 가격은 45엔이라고 적었다. 당시의 책 가격과 판매방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백두용(白斗鏞,1872~1935)은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의 설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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