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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면용(李冕容)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3월 24일에 이면용(李冕容)이 성첩(星帖)을 청하고자 보낸 간찰(簡札) 1925년 3월 24일에 이면용(李冕容)이 성첩(星帖)을 청하고자 보낸 간찰(簡札)이다. 사람들에게 옛 규범을 독실하게 지켜 모두 저쪽으로 달려가는 때에 오로지 우리만이 변하지 않은 땅에서 이 학문에 힘써 그 가풍에 명성이 있다. 궁벽지고 누추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이 혼인으로 맺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좌우에서 부지런히 중매해서 허락하였으니, 성첩(星帖)을 청한다고 하였다. 초본을 작성한 것이 있다. 수신자는 이홍순(李洪淳)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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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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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篤守古範於人 皆趨彼之時 專務斯學於我獨不移之地 其家風之有聲也 雖在僻陋亦耳乎聞矣 窃有通家之願幸固左右媒議之勤 伏蒙允從 仰請星帖耳春寒 只祈尊體百福 餘留不備 伏惟崇照 謹狀上乙丑 三月 卄四日李冕容 再拜[피봉]謹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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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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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涓吉) 단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신랑집에서 길일을 점쳐 정한 혼사 날짜를 신부집에 알려주고자 보낸 연길(涓吉) 단자 신랑집에서 길일을 점쳐 정한 혼사 날짜를 신부집에 알려주고자 보낸 연길(涓吉) 단자이다. 혼사 날짜는 1926년 12월 24일 오시이며, 전안(奠鴈)과 납폐(納幣)도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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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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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시기 조선선선로약도(朝鮮線線路略圖)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대한제국의 경성을 기점으로 사방의 철도노선을 그려놓은 인쇄본 조선선선로약도(朝鮮線線路略圖) 대한제국의 경성을 기점으로 사방의 철도노선을 그려놓은 조선선선로약도(朝鮮線線路略圖) 인쇄본이다. 평안북도 쪽으로는 압록주(鴨綠州)를 지나 봉천으로 가는 연결선이 있고, 함경남도 쪽으로는 경원에 못미처서 있다. 남쪽으로 대전에서 갈라져 경부선이 부산과 마산, 경주 불국사가지 연결되었으며, 호남선은 광주 송정과 나주를 거쳐 목포까지 연결되었다. 또 여기에는 각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도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지도가 눕혀져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고, 상단에는 두 개의 네모 칸에 하나는 극동교통지도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함경북도의 함경선(북부)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매우 자세한 여행 안내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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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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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김국환(金國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八月 十七日 金國煥 再拜 外舅主前 上候書 丙寅 八月 十七日 金國煥 外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8월 17일에 김국환(金國煥)이 외삼촌에게 자신의 근황과 가족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26년 8월 17일에 김국환(金國煥)이 자신의 성명 미상의 외삼촌에게 공부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삼촌을 떠난 지가 반년이나 되었는데 그사이 지극한 더위에 장마는 길어지고 문후의 일 또한 막연하여 저의 그리운 마음에 전해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평소보다 배나 더하였는데 삼가 요즈음에 인편이 와서 편지를 받고 부모님 모시는 체후가 좋으시고 여러 형제의 안부도 모두 좋아서 경사스러움을 알았으니 삼가 매우 위안되는 제 마음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저는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있어서 이 때문에 다행입니다만, 공부하는 것은 재주의 뿌리일 뿐만이 아닙니다. 게으르게 내쳐두면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 빌미가 되니 다만 책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외삼촌의 바람에 만분의 일도 부응하지 못해 항상 죄송하던 즈음에 삼가 하문해 주시는 편지를 받고 진실로 가르침을 받고서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감격합니다. 감히 가슴으로 받지 못하여 신교(新校)가 독서 하는 곳으로는 방해가 되겠지만, 모두 이것이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여 피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처리할 수 있는 오묘한 도리가 있다면, 도리어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찾아뵐 기약이 20일 그믐 즈음에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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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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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문(李敎文)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至月 卄三 罪從侄 敎文 拜 至月 卄三 李敎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某年) 11월 23일에 이교문(李敎文)이 숙부에게 안부와 함께 일의 비용 등의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모년(某年) 11월 23일에 이교문(李敎文)이 남성(南省)에 사는 숙부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워하던 즈음에 편지를 받고 체후가 좋으심과 가족들이 모두 좋으심을 알았으니 위안되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체류가 무료하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관하는 바의 일은 본래 쉽지가 않으니 어찌 기한을 정해서 할 수 있겠습니까? 일하러 가는 자의 내 답답한 마음은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교지 두 장을 간신히 다시 내었으니 처음에 어찌 빼두어서 끝내 힘을 다하여 맏이가 이일을 언급한 것은 도리어 눈썹을 찌푸리니 돈의 일에 대해서는 사람을 보내어 받아온다면 엽전 천 냥을 지급할 것입니다. 이로부터 집환(執換) 한다면 내일 마땅히 5전 이천오백 냥씩 넘겨줄 것이니 이것으로 헤아려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지난번 신판관(申判官)이 표를 바꾸어 보낸 뒤로 또 8백 냥을 채운다면 전후의 합이 이천 냥입니다. 지 씨에게 환간(換簡)해서 부친 것을 찾아서 보낸다면 매우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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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김재식(金宰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 四月 九日 査弟 金宰植 謝上 乙丑 四月 九日 金宰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4월 9일에 김재식(金宰植)이 사돈에게 혼례를 치르고 돌아와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간찰(簡札) 1925년 4월 9일에 김재식(金宰植)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자녀들의 혼례를 치르고 돌아와 사돈으로부터 문안하는 편지를 받고서 소식을 전하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지를 받고 여러 줄의 말을 쪼개보니 정말로 먼저 내 마음을 잡은 것 같습니다. 편지를 들고서 고요히 생각하여 그 까닭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사형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니 나 또한, 사형의 말로서 사형의 편지에 답장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부끄럽고 도리어 우습습니다. 사형의 어머니께서 날마다 편안하시고 형제들도 봄이 깊어 즐거운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지극히 하례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행히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시고 혼사가 잘 이루어져서 노친과 아이들을 데리고 탈 없이 돌아왔습니다. 신부의 정숙한 거동은 집안에 성대하게 소문이 났으니 과연 지난번 들었던 것에 비길 만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다행이고 한편으로 부럽습니다. 다만 저의 아이가 아직 젖먹이라 의방(義方)의 교육이 부족한데 지금 순실(淳實)하다 칭찬을 받으니 도리어 얼굴이 두꺼워집니다. 뜻밖의 인편이 와서 서둘러 돌아가느라 급히 이렇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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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문(李敎文)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某年 閏月 二十六日 罪文侄 再拜 南省宅 某年 閏月 二十六日 李敎文 南省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윤달 26일에 이교문(李敎文)이 사또에게 전하는 편지와 맡은 일의 비용 등의 소식을 숙부에게 전하는 간찰(簡札) 연호를 알 수 없는 해 윤달 26일에 이교문(李敎文)이 남성(南省)에 사는 숙부에게 안부와 함께 자신의 사연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워하던 차에 편지를 받고서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이 풀렸습니다. 요즈음 종조부(從祖父)의 환후가 아직도 여전하다니 염려가 됩니다만, 부모 모시며 약을 달이는 것 외에 다른 손상은 없으시다니 제 마음에 흡족하여 멀리서나마 축원합니다. 저는 객지의 일로 마음 쓰고 있는데, 날마다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옛글에 전해드린 바대로 거듭 부탁하니 사또가 편지를 받고서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새우의 선물은 어찌 제게까지 미칠 수 있었습니까? 객지에 사는 저의 위장을 갑자기 깨어나게 하시니 감사함이 다른 때보다 백배입니다. 듣기로는 거기에 온 자가 물건을 사서 와야 할 돈을 범했다고 하는데, 그자는 노자로 쓸 돈이 있는데도 어떻게 이 돈까지 쓰는 데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것은 비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분 두 개와 담배 두 갑 중에 한 건을 먼저 사서 보냅니다. 본 사또에게 보낼 편지와 기록한 종이는 일을 주관하는 자에게 주었으나 지금 숙직하고 있으니 4~5일을 기다린 뒤에 차례에 따라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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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김택경(金澤卿)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己卯 四月 初九日 金澤卿 李敎成 己卯 四月 初九日 金澤卿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9년 4월 9일에 김택경(金澤卿)이 이교성(李敎成)에게 상 중의 안부와 이사의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39년 4월 9일 강릉(江陵) 중산(重山)에 사는 김택경(金澤卿)이 보성군 가천(可川)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상(喪) 중의 안부와 이사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택경(澤卿)은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 올립니다. 수년 이래 편지가 격조해서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난번 돈형의 집안에 남순(南淳)의 답장 편지를 받고서 선부군(先府君)의 상사가 작년 10월에 났음을 알았습니다. 소식을 듣고서 놀랍고 지극히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었으며, 또 정읍으로 이사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형의 오래 묵은 계획이니 과연 은혜롭게 좋은 곳으로 돌아갔습니까? 계획하는 것과 같았는지요? 독하고 망극한 고통에 이사의 번잡함까지 더해져서 기력이 손상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윤(令胤)은 근래에 무슨 일을 하는지요? 공부를 폐하지는 않았는지요? 모든 일을 하는 데 절선(節宣)의 뜻을 더해서 효의 경계를 손상하게는 하지 말아서 어두운 가운데 어머니의 염려에 위안이 되게 하십시오. 택경(澤卿)은 그런대로 지내서 옛 모양과 같으니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당신의 관소에서 선부군(先府君)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돌보아주시는 은택을 입었는데, 도리어 한세상을 돌아보니 당신의 노성(老成)하신 전형(典型)의 행실이 장차 존몰(存沒)의 감정을 쓸어버린 듯하니 어찌 오로지 따듯한 사사로움 때문이겠습니까? 세상의 끝에 앉아서 포복의 정성도 이루지 못하고서 편지 한 통으로 위문을 대신하니 이와 같이 범범하고 송측한 마음이 지극하여 멀리 있는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상주가 현재 머무르는 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이렇게 남순(南淳) 친구에게 부탁해서 전달하니 잃어버리지 않고 곧바로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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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양기영(梁紀永)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寅 至月 十一日 弟 梁紀永 拜拜 戊寅 至月 十一日 梁紀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8년 11월 21일 양기영(梁紀永)이 친구에게 늙어가는 소회와 함께 금강산 여행을 제안하는 간찰(簡札) 1938년 11월 21일 양기영(梁紀永)이 성명 미상의 친구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60이 얼마인가? 이 또한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나, 옛날에 연배를 논하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독 형과 나만 근력이 좋아서 먹고 마시는 기거가 좋아 희수의 나이도 바랄만하니 반드시 칠 팔십 늙은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위안됩니다. 산천이 비록 떨어져 있으나 정신은 매양 그리워합니다. 뜻밖에 그대의 아들이 방문하여 편지를 받고서 편지에 가득 재미있는 말을 하시니 머리를 붙들고 어깨를 부딪치며 부지런히 일할 때의 아름다운 풍경과 다르지 않아서 밥을 뿜어내고 포복절도하는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안부가 평안하심을 이로써 알았으니 이는 형의 복입니다. 저는 강건하지만,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렇게 백발이 되어 늙은이의 모습을 하는 것은 결코 늙은 사람의 뜻이 아닐 것이다. 다만 형께서 금슬의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니 내가 고독하게 잠자는 모습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집안에 층층이 쌓인 복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을 자랑하시는 말씀은 자기 밭의 싹이 큰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께서는 욕심이 많은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저는 과연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巴家] 부유함이 있어서 땔나무하는 소와 물 긷는 말, 곡식과 돈 그리고 다할 수 없는 풀밭을 널리 차지하여 산을 등지고 물에 임하여 있으니 어찌 유람을 다닐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갖추지 못했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저는 새봄에 형께서 빛나게 방문해주시기를 기다리니, 함께 지팡이를 짚고 손을 잡고서 서호의 장도를 구경하고 금강산의 절경을 소요하고 상량하면서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찌 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형께서 먹고사는 일에 고착되어 쾌연히 버리고 오지 못할까 염려되니 우습습니다. 보내주신 담배는 모두 친구의 정겨운 맛이니 보답할 물건이 없어 연초 이첩을 보내드리니 산야의 맛과는 다를 것입니다.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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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 榴月 晦日 査生 尹琪燮 拜手 長谷 靜棣座 辛 榴月 晦日 尹璂燮 長谷 靜棣座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6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사위와 함께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는 간찰(簡札) 1901년 6월 30일에 이호(伊湖) 사는 윤기섭(尹琪燮)이 장곡(長谷)에 사는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소식을 전하며 사위와 함께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돈이 된 후로 아직 편지를 한 번도 못 하여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편지에 민첩하지 못하였는데 요즈음에 그리움이 평소에 배가 됩니다. 삼가 묻건대 요즈음 체후가 만왕하시고 가족들도 모두 복되신지요? 우러러 그리운 마음으로 제 마음이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어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제 몸도 안 좋아서 어려운 상황이 안타깝고 염려가 되니 나머지는 어찌 번거롭게 말하겠습니까? 봄 사이에 왕림하라는 말씀을 끝내 져버려서 오히려 매우 슬픕니다. 사위는 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묘연하게 눈에 있어 우리들의 정이 모인 것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껄껄 웃을 뿐입니다. 서늘해질 때 눈을 돌려 사위를 데리고 왕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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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丑 五月 晦日 査生 尹琪燮 拜手 辛丑 五月 晦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5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가뭄 중의 농사형편 등 제반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01년 5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들의 안부와 가뭄의 농사 상황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이 막히고 계절은 더욱 뜨거워지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이 바람에 임하여 점점 지극합니다. 삼가 요즘에 정양하는 체후가 때를 따라 좋으시고 사위도 부모 모시고 공부를 잘하며 형제들의 사이도 크게 왕성할 것으로 생각하니 그리움에 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어버이께서 여름을 당한 이후로 항시 편하지 못하고 저 또한 더운 계절에 먹지 못하는 증세가 날로 심합니다. 식구들은 큰 사고 없이 온전하니 작은 근심이 이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식은 잘 먹어서 다행입니다. 올여름 가뭄의 근심으로 최근까지 농사가 많이 늦어져 씨를 뿌릴 날도 고르지 못하니 진실로 앞으로 큰 염려가 될 것인데 존장의 농장 상황도 그러하신지요? 최근에 듣건대 한강 북쪽까지 들판이 텅 빈 언덕이 되었다고 하니 매우 두렵습니다. 나아가 뵙고 싶으나 이런 지경에 연유하여 불쌍히 여기지 못할 책임을 호소할 뿐입니다. 음력 7월에 서늘한 기운이 생기면 사위에게 이때 보낼 것을 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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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이광사(李匡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己巳 九月 初吉 少弟 李匡師 拜手 己巳 九月 初吉 李匡師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49년 9월 1일에 이광사(李匡師)가 사돈에게 일상의 소식과 개인적 부탁 등을 당부하는 간찰(簡札) 1749년 9월 1일에 이광사(李匡師)가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의 안부와 일상의 소식과 개인적 부탁 등을 당부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추위가 심한 이때 정사를 돌보시는 안부는 좋으시신지요? 매우 위안 되고 그립습니다. 지난번에 듣건대 사위가 왔다길래 곧바로 가서 만나 기거를 자세히 물으니 어제 과거 급제자의 방이 나왔는데 높은 점수로 합격하였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둘째 사위의 혼사가 동지 16일에 있고 연길 날짜도 좋으시다니 하례 드립니다. 저는 부모님 모시고 전과 같이 지내고 두 형의 병도 더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다행입니다. 이번에 가는 단유(檀宥)는 원수(元帥)의 후손입니다. 저의 집안일로 해마다 금성(錦城)에 갈 때 긴 여정에 양식의 비용을 집안의 힘으로 지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찾아뵙게 할 것이니 존형의 읍에서 금성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계산하여 양식의 비용을 넉넉하게 성첩(成帖)하여 주시기를 부디 바랍니다. 그로 하여금 돌아올 때 찾아뵙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이 사람의 부탁을 져버려서 월중(越中)의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 수 없으니 모쪼록 조용히 보존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혼사는 반드시 태수(太守)가 서울에서 받을 것이니 이 때문에 미리부터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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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66년 이문용(李汶容)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十月 初四日 李汶容 仲季父主前 上白是 初四日 謹封 丙寅 十月 初四日 李汶容 仲季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6년 10월 4일에 이문용(李汶容)이 중(仲)·계부(季父)에게 자신의 근황과 강화도사건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866년 10월 4일에 이문용(李汶容)이 중(仲)·계부(季父)에게 자신의 근황과 강화도사건 소식을 전하는 간찰이다. 안부를 묻고, 종조카는 이런 어수선한 시절을 당하여 부득이 나가서 양주의 서산공의 묘소 아래에 붙어살다가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겠는가? 가장 긴급한 것은 먹을 것이 부족하고 적에게 해를 당할까 하는 것이다. 살아서 내려가고자 해도 노비(路費)가 백여 금을 내려가지 않고 또 빈손으로 진퇴할 수 없다. 근기(近畿)의 골짜기 마을로 깊이 들어가고자 하나 이것도 돈이 있은 후에야 경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배가 강화도에서 성을 쳐부순 후에 적의 소굴이 되어 조금도 동정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병사는 근 만 명이 포구의 가에 진치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전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소멸과 국가의 안정을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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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성주이씨 이병희(李炳熺) 대표의 문중결의서와 회문(回文)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大正八年陰三月八日 李源澤 大正八年陰三月八日 李源澤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9년 음력 3월 8일 성주이씨 이병희(李炳熺)를 대표로 하는 문중결의서와 4월 26일에 작성한 종중 재산 고소 관련 사건에 대한 회문(回文) 1919년 음력 3월 8일 성주이씨 이병희(李炳熺)를 대표로 하는 문중결의서와 4월 26일에 작성한 종중 재산 고소 관련 사건에 대한 회문(回文)이다. 회문에서 사건의 발단은 대종회 때 3파의 공의가 안산에 재각(齋閣)을 세우는 일을 의논했는데 다시 새로 비석을 새기자고 한 사실이다. 그런데 저들이 탈을 잡아 고소했는데, 대종 중 토지재산을 영영 억탈할 마음을 먹고 홀로 마음대로 했다. 이 오현(梧峴) 금내의 큰 소나무 60여 주도 마음대로 방매하였다고 한다. 이에 여러 문파와 종씨들이 힘을 합쳐 금하게 하니, 보(甫)·죽(竹) 두 곳의 이병양·병동·주희·병오·동희 5인이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농담하면서 "세 지파가 의리를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한다. 백 개의 지파라도 부족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분노가 막심이다. 이 사실을 조사해야 한다는 공동의 의견을 회보하니, 결의서에 날인을 하여 종중의 일을 완성하자고 하였다. 이 회보는 1919년 4월 26일 날짜가 작성된 것이다. 추신이 있는데, 그동안 5위(位)에 대한 궐향(闕享)은 제상(祭床) 5좌(座)와 신주를 만들고 올해부터 치제할 것이며, 종토 재산에 대해 고소하는 날은 다시 고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원택(李源澤) 등 7명의 이름을 열기하였다. 이어서 문중결의서를 작성하였다. 이는 음력 3월 8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결의서가 채택되고 나서 회보를 만든 것이다. 결의 내용은 문중 유사의 해임건이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다. 농서군공의 후손 백중계 3파의 문중이 공유하는 재산을 관리하는 유사는 본년도부터 이우정과 이병일, 이종탁 등을 3파의 문중 유사로 선임하였으니, 종전 유사 이병양과 이주희에 대해 관리 위임을 해제하는 뜻으로 결의한다고 하였다. 대표는 이병희(李炳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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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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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9년 인산 영각 성주이씨 대종회의 회문(回文)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己未二月初四日 安山大宗中 宗員 己未二月初四日 安山大宗中 宗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9년 2월 4일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적손 문제에 관한 종회 개최를 통보하고 종답 사건을 설명하고자 작성한 회문(回文) 1919년 2월 4일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적손 문제에 관한 종회 개최를 통보하고 종답 사건을 설명하고자 안산 영각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작성한 회문(回文)이다. 농서군공의 적손으로 옥과 송강동 재승(再承)이 형망제급(兄亡弟及)으로 여맥을 잇고 있으나 아무개의 후사로 지목되었다고 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겨울에 이병희와 이원식이 추원(追遠)의 정성으로 정적(正嫡)을 맞이해 돌아왔다. 족보와 교첩, 문적 등 다방면으로 찾아본 결과, 모두 이 아이가 사대부가로서 정적을 계승한 것이 맞다고 하고 종중의 의논이 사론(士論)에 부응되었다. 또 각 읍 문중의 문적을 봐도 정적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백보와 죽서 두 곳에서 부당하다고 하여 재판 중에 있다. 사람들이 이를 개탄하는 가운데 부득이하게 대종회를 이달 초6일에 열기로 하였으니, 이에 이를 통고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별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죽서파 4·5인이 종답과 송추를 방매하거나 나누어 먹은 사건과 적손 사건의 재판에 대한 전말을 전하고 있다. 또 영가(影閣)의 5위에 대한 궐향에 대해 통분하면서 금년부터 다시 봉사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발신자는 안산 영각 대종회이며, 대표 이하의 명단이 열거되었다. 대표는 유학(幼學) 이도추(李道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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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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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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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3년 나성백(羅星栢)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 三月 十七日 羅星栢 癸酉 三月 十七日 羅星栢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3년 3월 17일에 나성백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일상의 안부와 소식을 전하며 사위를 보내겠다는 내용을 담은 간찰(簡札) 1933년 3월 17일에 나성백(羅星栢)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일상의 안부와 소식을 전하며 사위를 보내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만나고 이별한 뒤의 돌아가시는 행차가 이미 가벼우셨는데 소식이 막힌 것은 진실로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한날 남짓 만에 전해 들은 소식에 건강치 못하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완쾌되셨는지요? 삼가 알지 못하건대 화창한 봄날에 체후가 다시 한결같이 편하고 좋으시며 여러 형제도 평안하신지요? 위안되고 그리운 마음 간절하여 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시고 그런대로 지내니 매우 다행입니다. 드릴 말씀은 인편을 빌려서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비록 돌아왔으나 조금 장애 되는 일 때문에 지금 이렇게 빈손으로 종을 보내니 살펴 주십시오. 사위를 보낼 것이니 쌓였던 회포를 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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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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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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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3년 6월 23일 박제현(朴濟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巳 六月 念三日 朴濟鉉 癸巳 六月 念三日 朴濟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93년 6월 23일에 박제현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안부와 소식을 전하며 말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은 간찰(簡札) 1893년 6월 23일에 박제현(朴濟鉉)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안부와 소식을 전하며 말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를 생략합니다. 가뭄 뒤에 비가 오고 비가 온 뒤에 무더위가 오고 만난 뒤에 편지가 오고 편지가 온 뒤에 소식이 막히니 어떻게 이와 같습니까? 하늘과 사람이 고르지 못하던 즈음에 편지를 받으니 기쁜 마음이 마취 갈증에 샘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이러한 때 존장의 효도하시는 체후가 보호되고 식구들의 안부도 모두 편안하시며 며느리도 탈 없이 부모 모시고 편안함을 알았으니 위안되고 그리운 마음 기도하던 마음에 흡족합니다. 저는 옛 모습과 같이 그런대로 지내는데 다만 한갓 같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보낸 바의 말은 세상에 백락(佰樂)이 없으니 어찌 천리마인지를 알겠습니까? 혹시라도 늙은이를 잃어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마땅히 말씀하신 대로 마구간에 두어야 하지만 저의 집의 말은 이미 방매(放賣)하여 말씀하신 바에 부응하지 못하니 헤아려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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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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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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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더없는 즐거움(樂莫樂)〉 등의 시 8수(首) 초고와 하서 김인후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칠언절구 8수의 시 초고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절의 등을 논한 글 이 문서는 칠언절구 8수의 시 초고와 하서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 등 2종이 앞뒷면에 수록되어 있다. 앞면은 〈더없는 즐거움(樂莫樂)〉과 〈두려움 없는 두려움(畏莫畏)〉에 대해 읊은 시 칠언절구 8수(首)이다. 지우고 고친 곳이 많은 초고(草稿)이다. 〈더없는 즐거움〉에는 성인(聖人)과 같은 즐거움, 천명(天命)의 즐거움, 대인(大人)의 즐거움, 의론이 바른(論正) 즐거움, 바름을 지키는(守正) 즐거움 등을 들고 있다. 〈두려움 없는 두려움〉은 부박(浮薄)을 두려워함, 순순히 하지 않음(不順)을 두려워함, 멋대로 함을 두려워함 등을 읊었다.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큰 화가 내려질 것이라는 등의 교훈적인 내용을 담았다. 뒷면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선생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이다. 안우산(安牛山, 안방준)이 중봉(重峰)에 대해 찬한 글에, "도덕‧절의(節義)‧문장을 겸비한 자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언뜻 보면 그럴듯하나 자세히 살피면 그렇지 않다. 무릇 절의가 있는 사람은 도덕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서, 천하에 절의가 없는 도덕은 없기 때문에 어폐가 있고, 문자를 쓰는 법이 아니다.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자'라고만 하면 선생을 칭하는 자리가 거기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중하며 수양한 것도 또한 출처(出處)를 온전히 한 것이지만 해마다 통곡할 뿐이라고도 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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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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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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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97년 이교영(李敎永) 제문(祭文) 1 고문서-시문류-제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527_001 1897년 10월 20일 이교영(李敎永)이 5대조 할머니 증숙인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 1897년 10월 20일 이교영(李敎永)이 5세부터는 친진(親盡)으로 1년에 한 번 묘제를 지내게 된 5대조 할머니 증(贈) 숙인(淑人)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의 초고이다. 친진은 성현이 정한 예(禮)이고, 즉 이(理)이고 또 정(情)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1880년 자신이 정읍 두승산(斗升山) 아래 안영리로 이사한 뒤 1881년에 처음 세향(歲享)을 시작했는데, 난리로 혹은 형세로 제사에 참례(參禮)하지 못한 것이 이미 16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금년 봄 제사에 대해 들었으나 서로 다른 언덕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하나의 지방(紙榜)으로 오세조 고비(考妣) 묘 옆에 합쳤다고 하니, 세향은 반드시 묘소에서 하는 것인데 이같이 하면 어찌 묘제의 이름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것이 연례(年例)가 되어 여전히 묘향(墓享)을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은 시천(詩川)의 한 종인(宗人)에게서 나온 것이고 편리함으로 집안사람들을 선동하였다고 하였다. 그간 제사에 참예하지 못한 죄는 뒤미처 후회해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자신이 잔약한 바탕으로 가난하고 이룬 것이 없으나 또한 한줄기 선조의 기운을 이은 사람이라, 삼가 대강을 논하여 바로잡겠다고 하는 내용의 제문이다. 이 제문은 아래의 관련문서 중 〈1897년 이교성(李敎成) 제문(祭文)〉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글씨체가 다르고 수정 흔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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