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祗承玉圈緋衣之賜。荐降馹召之命。疏辭。仍陳科弊。感題。 草萊病伏一閑身。不謂虞旌降紫宸。非是經綸能濟世。只要獻曝露心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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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後登眺【在龍山時】 陌頭花柳態分明。春色依然畵玉京。公子乘黃雲外出。佳人粉白鏡中行。銅江水合龍唫穩。瓊窟風回虎睡輕。此日登臨偏意氣。小山詩與郢門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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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情疏【甲寅】 伏以天眷我東。遐籙川至。今年。卽我大王大妃殿。暨惠慶宮。聖壽稱慶之年也。惟我殿下。以孺慕之誠。不匱之思。乃於月正元日。誕擧告頒之儀。至設餙喜之科。無內無外。咸與同慶。猗歟盛哉。盖自今以往。歲歲年年。無非稱慶獻賀之日。而式至于億萬年。無疆之休也。凡在八域。含生之類。孰不蹈舞歡抃於壽域太和之中也。仍伏念臣。卽遐鄕一賤品耳。少習功令之文。晩竊科第之名。衰年旅宦。纔周一朞。不幸命途畸窮。猝得風眩之症。轉成僵蹶之形。支節不收。語音艱澁。多般藥治。終無顯效。遂不得不載歸鄕廬者。于今十有一年矣。宛轉於牀席之間。絶意於人世之事。虛負平生之志願。自分聖世之棄物矣。不意銓衡之臣。不知臣之無用。而累擬臺省之望。亦我聖明之主。不以此爲罪。而輒勤除授。累降馹召之命。至以犬馬之齒。恰滿七十。遽陞下大夫之列。嗚呼臣一自病伏之後。蹤跡無由及於城闉。聲息未嘗通於卿宰。而前後恩造。若是曠絶。苟非日月之明。無幽不燭。無遠不及。至使疲癃殘疾之類。咸囿於煦濡生成之中。則如臣遐土。老病之棄物。何以得此於君父之前也。臣嘗仰感俯怍。泣語家人。曰遐鄕之士。抱紅牌而求易一名。遊於京洛。而積年奔走者。何限而或有終身不得者。今吾百無一能。病又廢蟄。則今世之人。夫孰知此身之生在地上。而卽署臺啣。次第兠攬。玉圈緋衣。又復輝映。榮已極矣。願亦足矣。是誰之賜。是誰之德。天地雨露。殆若偏霑於一物。頂踵毛髮。岡非㴠育於至化。雖使闔門世世。糜身粉骨。何能仰報聖德之萬一也。只父子兄弟。相對感泣而已。臣之自來。所被恩數。旣出尋常萬萬。則固當擔衣登途。一肅恩命。粗伸區區之義。而況値今年邦慶荐臻。環東土數千里。跛躄瘄聾。擧皆欣欣胥告。于于盡起。當此春和之節。臣之病勢。稍勝於寒沍之令。戶庭之間。猶能扶杖行步。則夙宵耽結之忱。豈不欲寸寸前進。仰瞻殿陛之尊。俯慰螻蟻之悃。而千里脩程。費得浹月。鞍馬之役。實非疲癃衰軀之不自量力。率爾可辦者。故徊徨躑躅。只自悼傷。非但耽結之懷。如石塡胸。抑亦逋傲之罪。無以自贖。臣若怵分畏義。終末一暴此狀於聖明之下。則雖以天日之照臨。何敢望曲察俯恕。而臣之逋傲之罪。於是尤大矣。玆敢政不避僭越之誅。略陳縣途之章。伏乞天地父母。諒臣無隱之忱察。臣悲苦之狀。仍命有司。治臣逋傲之罪。以爲爲人臣。忘恩負義者之戒焉。臣無仕瞻天望聖。激切屛營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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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疏 伏以臣。狗馬賤疾。積年沈痼。到今尤劇。一縷殘喘。敢效將死之鳴。伏願殿下。發憤聖志。勸政圖治。博選賢士。輔導儲宮。先定宮府內外一軆。遵節財用。愛養民力。一視遐邇。蒐羅才俊。恩威相濟。維繫人心。凡此五者。善爲施行。則國家之事。可以有爲。伏願殿下。不以人廢言。臣雖死歸地下。庶可瞑目矣。伏念。臣生逢堯舜。庶幾身見斯道之行。而十年一疾。竟不逭之。而至于今日。命也奈何。然而生爲堯舜民。死亦何恨。神昏氣塞。不能成語。臨紙涕泣。謹遺疏以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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酬南坡令兄見贈。【四首】李農隱爆【康翎縣監】 夙歲襟期凌朔皐。可歎衰老聖世遭。功名晼晩題黃紙。志業蹉跎曳綠袍。作行何心雲出峀。逢秋却羡雁飛高。新來學士頭兼白。莫笑何卽滯小曹。鶴唳淸聲在几皐。知音斯世苦難遭。經年卽署添華髮。新貴朝班多紫袍。數頃郭田蘇子累。一帆蒼海季鷹高。自嘯自詠君休笑。從古詩人隱小曹。我家何在在江皐。繞屋雲山揔周遭。偶爾名登紅桂籍。遽然身着綠荷袍。一官久滯東園直。岸夢遙牽南斗高。千里故人同作客。源源詩酒又隣曹。千秋已死九方皐。縱有纖離怨未遭。天祿校書終白首。杜陵耽句困靑袍。北山夜雨宮鴉定。南國秋風旅雁高。榮利世間皆外物。他時烟月屬吾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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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崖令兄子敏。以新恩訪余於岬寺。以七絶五首志喜奉贈。愼松園師浚【直長】 文章聲價動南州。百戰荊場到白頭。得雋終看竪赤幟。從前落招作悠悠。十年閉户石崖中。今日榮光稽古功。今榜得人堪足詑。詞宗應屬亞元公。丹心已許立身初。溫飽區區意自疎。事到手頭須合義。應知得力在看書。三丁燭下幷驅心。渡灞昔來月岳深。長篴一聲生馬首。風流頓覺賁雲林。驪歌一曲隔雲泥。愁聽離鶯喚友啼。厚祿他時書斷否。吳州月色夢中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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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疊前韻贈子敏。同上 孔明曾不棄崔州。豈帝麻斤作話頭。倘得朋來眞是樂。世間榮辱任悠悠。淸標宛對赫蹄中。近日應多秉燭功。判得自家康濟事。人間何羡作候公。殘雪騷騷臘月初。寒梅一樹影扶疎。閒中可惜空消日。祗自研朱點易書。雲泥不隔伯牙心。世路何論山海深。通塞榮枯元有命。莫敎鵬翼笑鷦林。秋雨長安十日泥。晨雞何處兩三啼。羊腸亦有康壯路。素履行時也不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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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朴進士文煥 南國江山間氣收。蒼茫雲水永平洲。須從道學淵源得。肯把文章事業求。曾藿三時悲莫退。姜衾百載樂無由。煌煌寵秩丹旌字落。日招招望美樓。氣像楓山立。精神石瀬鳴。疇昔兄師誼。居然一夢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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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吳進士燧 豊山華族文蟬聯。渼上源流有活泉。孝友淳眞鄕里服。文章卓犖士林傳。纔修實錄身先退。荐拜淸班病未痊。發軔長途終莫展。克家餘責付螟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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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沈校理能憲 德業文章一世尊。南中華閥數公門。高名朝野兼三達。懿範家庭備五敦。滄海收雲龍忽逝。蓋田餘地玉猶存。尋常士友咸於悒。誰贖百身作九原。公卧君恩重。公歸世事悲。淚霑哀輓去。芳草暮春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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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洪注書樂浚【改名羲俊吏判文穆】 天降人英佑世道。恢恢器局弁鄕邦。湖中走卒知名字。洛下諸生誦句章。長枕大被同四友。白蓮紅桂貫三場。藤床卧歷銀臺職。可惜經綸病未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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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上洪持平于敏淸几。宋彩雲欽書【府使】 壬子初夏。南倉歷路。荷洪持憲攀荊相待。兼有送我鄕行二首瓊琚。盛意不可孤忘。拙走和還。不如水瓜之味淡而無窮也。時維四月百花殘。三見紅櫻愧木還。身似浮萍無定處。心如飛鷁下深灘。亟章【二字缺】脑襟滌。杯酒攀荊誼意寬。卄日鄕由方伯假。田園逆招反家官。非營五柳先生行。只爲候門穉子迎。四百長亭餘古宅。紫荊好處聽兒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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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南坡先生 洪淵泉奭周【文簡公】 古有不遇時。多悲歌慷慨之士。或隱於漁樵。伏於山澤之間者。往往。此所以志士賢人。怨時之莫知。而疾沒世名不稱者歟。吾師南坡子。好學有文。又其性卓越感古。志不在區區。每讀古書詠古史。論及古豪傑。如屈原司馬遷之徒。抱名當世。而戚戚不得志。終身轗軻而不遇賢君。未嘗不長太息而扼腕也。旣而又自勉之曰。子桑戶。棬樞之士耳。負書擔囊。試策于京師者屢矣。偶得良有司。【大提學金陽澤試士取先生】擧進士時。公年三十有四矣。遂遊於太學。【先生自中進士置京第於晦洞焉。】匹馬而下上鄕洛者。倐已十有餘星霜矣。於是。得以結交洛中諸君子。相與從事於詩文之場。吾得以師之。有以識公之志。盖要得一小縣。幸以全城之養。得奉老母。備甘毳耳。然後。將退耕於山海之岸。垂釣於滄浪之上。傲遊浮世之外。偃仰山水之間耳。然公旣寡合於世。世亦無知公者。彈鋏無憑驩之魚。十上多蘇秦之窮。其如古豪傑之士。不遇時而然耶。荊山之玉。必竢和氏之剖而後。價稱四海。騏驥之馬。必待伯樂之御而後。能致千里。公之文宏深幽遠。讀不能便曉其義。必又得哀有司而後。能擢秀拔萃。正笏明時然後。天下之人。皆得以誦公之文。服公之賢。有蘭棘梟鳳之別矣。雖閭巷之婦孺。亦皆賀有司之得人。豈有懷騏驥荊玉之寶。而無伯樂和氏之遇者哉。吾子勉乎哉。豈無時哉。莫作悲歌慷慨之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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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奇吏參在祐 自是當世傑。負望南州人。文章寔餘事。孝友出天眞。好托契久。高山仰止頻。衣冠憐古貌。談見和淳。晩進龍頭選。方成魚水隣。忽然困二竪。呻吟過十春。荷恩徒感激。殫誠懷憂嚬。三品貴可言。七耊壽無倫。殄瘁詩忽成。經術嗟未伸。餘生將安放。英風從此淪。萬事嗟何及。懷舊爲沾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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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金進士學淳【吏判文簡】 淸朝得一老臣賢。歸卧田園樂暮年。雁塔功名成白首。鯉庭詩禮保靑氊。士稱石崖榮啣煥。師在溪湖學問傳。忠孝家聲昆季幷。琢磨世誼友朋聯。春深陋巷貪何歎。風凜高門慶自綿。葵藿貞忱今杜老。鶴鸞淸響古坡仙。茂陵接隔吟佳病。香社雲空失好緣。何處靑山理玉骨。遙天哭立涕漣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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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五世祖考石崖先生德業文章。鳴一代之盛。擧才行。擢嵬科。遇知於正祖。方成魚水之會。遽謝病歸。馹召頻繁。而未赴。輸囷經綸。惟囊封而陳。正祖。嘉納優批。褒賞者累。爲正廟名臣。其爲學之要。居家之節。事君之懇。形於文辭。而傳焉者。不爲不多。中經欝攸。擧歸散佚。本生考石川公。蒐輯編次。方謀入梓。未果而歿。舍弟錫憙。尤加搜剔。得其所未傳者多。合而成書。庸圖壽傳。嗚呼先生。學問德業。上爲君知。後有諸賢之撰述。小子何敢疊牀焉。惟夙夜兢惕。母負堂構之責。小子之畢生事也。甲辰孟秋節。五世家孫復憙謹識。君子。先德行而後文章。文章。固君子之餘事也。然其能窮理盡性。蘊之爲德行。非惟才之力。學文之功。居多焉。且一言一行之能有述於後。非文辭。莫可形容。文爲載道之器。關重於身之前後。有如是焉。故有德者。必有文傳焉。我先子石崖先生。以渼上賢徒。爲正廟名臣。其德行之形於文章者。不可不傳也。高王考南崖先生。未卽刋布而早世。于先子沒後五年。歲月浸久。經亂見佚者多。先君子石川公深致慨然。盡注平生精力。收輯序次。尙未鑱梨。飮恨而歸。不肖謹述先志。搜於淵源各家。得略干篇。合而手寫石印。嗚呼。周甲之年。神耗眼眵。畵不能精。且多訛舛。可爲慨歎。其可曰。對揚我先子遺謨。曁我先考遺志乎。錫憙謹識。石崖先生文集卷之六【題跋】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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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31권15책 後滄集 後滄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국역 後滄先生文集 乙未 乙未 [1955] 金澤述 석판본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15 12行30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 정읍 이평 부안김씨가 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 발행한 근대유학자 김택술의 문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해제 1. 개요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은 일제강점기 항일(抗日) 운동가이자, 유학자, 문장가, 교육자로서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특히 당대 저명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고제자(高弟子)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빼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하늘에서 준 재능이 높고 밝으며, 재주와 성실함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장은 일찍이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묘를 3년 동안 하였다. 글을 짓고 후학을 길렀으니 한 시대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을 따라 목숨을 지켜 도를 잘 실천하는 의를 강설하였다. 공은 경술년 합방 이후 왜적이 공의 효행을 듣고 금잔을 하사하여 포상할 적에,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왜적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았으나 현명하게 대처하고 행동했다. 왜적의 칙령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음은 물론 배급한 식량마저도 물리쳐 먹지 않았다. 태산(정읍 이평면 산명) 위 황량한 산등성이 위에 흙집을 짓고 솔잎을 먹으면서 ‘금화곡수양아(金華哭首陽餓- 금화를 통곡하며 수양산에서 은거하던 백이처럼 굶어 죽겠다.)’라는 여섯 글자를 부절로 삼아 정절로써 삶을 마쳤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김택술은 누구보다도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고 학문적 깊이도 있었으며, 효심도 지극했고 의로움을 지녀 항일운동에도 동참했으며, 지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편고동문검공(徧告同門僉公)〉에서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과 방이다. 도학을 하지 않고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지만, 도학을 하면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니, 그의 가치관이 도학과 절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문인과 유림들은 김택술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享祀)하였다.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2. 행력 김택술의 본관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이다. 조고(祖考)는 김석규(金錫圭)이고, 선고(先考)는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이며, 선비(先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1884년(고종 21년) 6월 6일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滄東)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종현(鍾賢)이고, 호(號)는 후창(後滄)이다. ‘후창’이란, 간재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일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써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모방하여 남송(南宋) 주자(朱子, 1130~1200)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후창이라 한 것이다. 곧 주자의 고향이 창주(滄洲)이므로 창주병수(滄洲病叟)의 호와, 창주정사(滄洲精舍)가 있었으니 주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88년(고종 34) 14세에는 감시(監試)에 응하고, 남은 노잣돈으로 『문선(文選)』, 『사문유취(事文類聚)』, 벼루 등을 구매하여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이로 보면, 그의 학문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15세가 되던 해에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900년(고종 37) 17세, 천안(天安) 금곡(金谷)에 가서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행하였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의 〈선고벽봉군가장(先考碧峰君家狀)〉에 따르면, “경자년 가을, 전선생께서 변산에 있는 월명암에 머물러 계셨으니, 부친이 나에게 명하여 선생을 가서 알현하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나를 아껴 몸소 부친을 방문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것을 청하라고 권하였는데, 부친께서는 집에서 스승을 청하는 것은 성의가 없고 또 예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날을 가려 폐백을 갖추고 사백여 리를 넘어 천안 산중에 있는 간재선생을 배알하고 연분을 청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실제 몇 달 후, 김택술은 천안에 찾아가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906년(고종 43) 23세, 정읍(井邑) 태인(泰仁)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을 위로하고 간재선생의 서신(書信)을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언행을 마음에 간직하여 본받기 위해 〈서신록(書紳錄)〉을 기록하였다. 1908년(순종 2) 25세, 일제의 지배 아래 있는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신념으로 왕등도(王登島)에 들어가 거처할 섬을 찾다가 8, 9월 계화도(界火島) 장자동(壯子洞)에 머물렀다. 김택술 또한 계화도를 방문하여 간재선생의 문고(文藁) 편집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의 검열이 덜 미치는 북간도(北間島)를 두고‘유학자들이 참으로 살만한 땅’이라고 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북간도로 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915년 32세, 일제가 은사금(恩賜金)을 보낸 것을 물리쳤다. 이듬해, 부친 벽봉선생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1918년 35세에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지었다. 이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학문이 자연스럽게 부합한다는 주장을 전집(全集) 내용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점을 추출해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에 간재 선생은 김택술의 이 저술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1922년, 39세에는 호남 유림으로 추대되어 대표로 충청북도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현 충북 괴산)을 방문하여 〈화양동유록(華陽洞遊錄)〉을 지었다. 화양동에는 만동묘(萬東廟)뿐만 아니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가 있어 기호(畿湖) 유림들의 성지였기에 유학자 김택술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유학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간재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25년 정읍 만종재(萬宗齋)에서 강학을 시작하였다.〈강규(講規)〉, 〈교과규칙(敎課規則)〉, 〈시고규칙(試考規則)〉 등을 지어 교육과정과 운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교과규칙〉을 살펴보면 반(班)을 학업의 정도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분반하였으며, 반마다 과목과 교재를 규정하였다. 1924년 41세, 동문수학하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간재선생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총독부(總督府)의 승인 아래 문집 『간재사고(艮齋私稿)』을 추진한 일이 발생하자, 현동묘하(玄洞墓下)에서 동지 59명과 함께 그를 성토하였다. 일찍이 간재선생은 문집 간행에 대하여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내지 말라.”고 하였기에 문집 간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진영을 둘러싼 영남(嶺南)의 학자들은 왜인 관청의 출판 인가를 받아서라도 출간을 늦출 수 없으며 이 또한 선사 말년에 받은 유명(遺命)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택술을 비롯한 호남(湖南)의 학자들은 왜적에게 출판 인가를 받아 출간을 하는 것은 스승의 높은 학덕과 의리를 욕보이는 일이며, 인가를 받아 출간해도 괜찮다는 유명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로, 이는 선생을 속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김택술은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간재선생의 유고를 편찬하고 교정하여, 스승이 직접 확인한 원본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1926년 43세, 오진영을 주축으로 한 영남지방 문인들이 간재선생의 문집을 재편집하여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경남 사천 용산정(龍山亭)에서 납활자(鈉活字)를 이용하여 간재선생 진주본(晉州本)을 발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김택술은 〈간재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私稿晉州本考辨錄)〉을 지어 수정본(手定本)과 진주본(晉州本)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진주본이 간재의 본뜻과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34년 51세 때,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자신과 자손들을 향해“제사란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모시는 것으로, 자손이 항상 조상에게서 명령을 듣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예법에 따라 항상 제사 때는 주부(主婦)가 남편 다음에 아헌례(亞獻禮)를 올려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혼인의 중요성,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그 집안의 가법을 살펴야 하지 문벌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4년 71세 2월 18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明德理) 산수동(山水洞)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동생인 척재(拓齋)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은 “아, 형님의 풍채는 난새가 우뚝 서 있는 듯, 학이 고고하게 서 있는 듯. 가슴속의 도량은 맑은 가을물인 듯, 개인 날의 달빛 같았습니다. (중략) 슬프고 외로운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쓸쓸하고 외로운 이 몸은 물가로 산속으로 헤매며 길이 끝나 돌아갈 곳 없는 듯하고 소경이 안내자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슬픔을 표출하였다. 3. 작품 김택술의 학문적 연원은 선고인 김낙진에 있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 『예기(禮記)』, 『좌전(左傳)』, 『논어(論語)』, 『시경(詩經)』 등을 모두 외우게 했으니, 어릴 적 가학(家學)이 매우 깊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다 깊은 학문 연원은 간재선생에게 있다. 17세에 친자(親炙)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배울 수 있었기에, 그의 학문은 간재의 영향이 매우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문집의 1/3은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 치발(薙髮)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緇衣)는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치의〉를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치의를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일과 함께 말씀하셨으니, 치의와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〇 선생께서 답서에서 “치의를 입는 것과 치발을 하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라고 했다. 을사년(1905) 10월, 간재선생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조선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치의-을 입을 것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발령-치발-의 시행이다. 물론 이 단발령은 1896년 2월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이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이후 1897년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위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는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러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경중과 시비를 논하고 있으나 모두 오랑캐의 법도라는 것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김택술은 자신의 의견을 스승에게 전하는 글도 있고, 의혹이 생겨 질문하는 글도 있으며, 어려움, 슬픔, 기쁨 등 그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스승과 글을 통해 교감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잡저(雜著)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성리설이다. 이미 400년 전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까지 치부되었던 성리론이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개를 들고 더욱 진중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릇 정학(正學)은 주리(主理)이다. 이학(異學)은 주기(主氣)이지만 주리(主理)는 일찍이 기(氣)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로부터 송나라 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心)으로써 기(氣)에 속한다고 했고, 또 마음이 주재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기(氣)를 주장하는 사람이 일찍이 이(理)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씨는 여래(如來)가 바로 성(性)이라고 하였고, 고자(告子)는 생(生)을 성(性)이라고 말했고, 식색(食色)이 성이라고 하였고, 육상산(陸象山)은 이(理)가 이미 드러났다는 설을 두었고, 왕양명(王陽明)은 심(心)의 본체가 곧 천리(天理)라는 설을 두었다.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주리자는 반대로 주기를 주장한 것 같고, 주기자는 반대로 주리를 주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상을 궁구해보면, 공명(空明) 영각(靈覺)은 불씨의 이른바 성(性)이고, 지각(知覺) 운동(運動)은 고자의 이른바 성이고, 육상산의 이른바 차리(此理)는 마음의 맑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왕양명의 이른바 천리(天理)는 마음의 양지(良知)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사가(四家)가 인식한 이(理)와 성(性)은 우리 유가의 이른바 기(氣)이고 심(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가가 그들을 주기(主氣)라고 여기는 것이다. 1903년, 김택술의 나이 40에 지은 것으로 그의 성리설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주리주기대(主理主氣對)〉이다. 요컨대, 성리설에 있어서 김택술은 정학이 바로 주리(主理)임을 밝히고, 불교, 고자, 육상산, 왕양명에서의 성(性)이나 이(理)가 주기론(主氣論)임을 밝히고 있다. 위의 작품 외에도 〈기질성문답(氣質性問答)〉에서는 본연성을 밝고 뜨거운 태양에 비유하고, 기질성을 구름이나 기류에 따라 어둡거나 추운 것에 비유하여, 기상이 태양의 본체를 손상시킬 수 없듯이 본연성이 기질성에 불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지니고 있는 핵심 사상이며, 이를 훗날에 더욱 일목요연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잡저 가운데 〈관조선사(觀朝鮮史)〉는 주목할 만하다. 1936년 편찬된 김경중(金暻中, 1863~1945)이 저술한 『조선사(朝鮮史)』를 김택술이 읽고 자신의 견해를 225조항으로 역사를 비평하였다. 그는 『조선사』의 명칭에 관한 문제를 시작으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들과 절의에 대해 논평하고, 명(明)나라 조정의 조선에 대한 정책, 조선 군주의 처신, 위정자의 실정 및 불교, 사치풍조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산문 외에, 김택술의 작품 가운데 한시 또한 주목된다. 그 방대한 양은 물론이고, 작품성 역시 뛰어난 시가 많기 때문이다. 본서에 1.336수, 속집에 169수 도합 1,505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천여 수가 넘는 문인들이 많지 않으니, 시인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해 대나무 하나 구하여 나무를 작은 밭 주변에 심었지 식구들은 밭을 잘 가꾸려다 실수로 쳐서 온전한 나무 없구나 올해 죽순이 다시 나와 커다랗게 의연히 서 있다네 아 대나무의 사물됨을 초췌하여 때를 만나지 못함을 뜻 있는 선비의 가련함으로 김택술의 감정의 결이 잘 드러나 있는 〈죽(竹)〉이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대나무를 매개로 하여 현인(賢人)과 지사(志士)의 불우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주제이다. 그가 주로 창작한 영물시가 죽(竹), 송(松), 매(梅) 등이 많은데, 이는 그의 절의를 투사함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시라는 장르로서 리듬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이야기하듯 심회를 말하고 있고, 또한 송풍(宋風)의 화려한 전거(典據)라든지, 험벽(險僻)한 글자 등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바로 시언지(詩言志)의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산문 중에 〈겨울 국화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기록하다 [見冬菊識感]〉라는 작품에서는, ‘겨울’을 일제강점기를 빗대었고, ‘국화’를 선비의 절개를 비유하였다. 곧‘가을’은 숙살(肅殺)을 의미하는데, 오히려 시들지 않는 서리를 맞은 국화의 고귀함을 말하고 또 서리를 넘은 눈 속의 국화를 말하고 있으니, 곧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넘어선 비장함이 엿보이며 선비의 지절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과도 잘 조응한다. 속집에서는 『사백록(俟百錄)』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이 주목된다. 서명의‘사백(俟百)’은 『중용』제29장의 “백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서 물어봐도 의혹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의미이다. 내용은 동문 오진영이 문중 사림에게 끼친 화(禍), 의발 전수에 대한 허위, 진주 간행본의 오류 등에 대한 논의이다. 또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는 정도(正道)로 입각한 국가를 ‘정통(正統)’, 정도를 따르지 않은 국가는 ‘변통(變統)’이라 하여 정통성을 고찰한 책이다. 예컨대, 하(夏)나라는 정통 439년, 주(周)나라는 정통 867년, 명(明)나라 정통 278년 등이며, 진(秦)나라는 변통 15년, 진(晉)나라는 변통 37년 원(元)나라는 변통 88년 등 국가의 정통 여부를 통해 그 정체성을 고찰한 것이다. 4. 문집 『후창집(後滄集)』은 본집 31권 15책, 속집 11권 5책, 합 42권 20책의 석판본이다. 1955년 아들 김형관(金炯觀)과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연구자 박술철은 『후창집』의 판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으니 소중한 자료가 된다. ① 『후창집(後滄集)』 총15책, 김택술, 창동서원발행추정(전주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刊寫者未詳), 목판본(木版本) 31권(卷)15책(冊). ② 『후창집』 총14권, 김택술, 심천서실장본(心泉書室藏本-전북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 석판본 29권 14책, 총 15책 중 제 10권 1책 유실. ③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총4권, 김택술, 목판본, 본집 31권 15책. ④ 『후창집』 총1권, 김택술,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영인본(影印本), 1988. 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총 4권, 김택술, 1997, 순창인쇄소(전주소재) ⑥ 기타 저서로는 『중동국통정변유무연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1권과 『사백록(俟百錄)』1권이 있다. 본집(本集)은 권두(卷頭)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별마다 목록이 따로 있다. 크게는 편지, 잡저, 운문과 묘도문자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권1부터 권12까지는 서(書) 536편이 있다. 권1과 권2는 네 편을 제외하면, 모두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주로 경학, 성리학, 예학 등에 관한 학문적 논설이다. 이 외의 편지는 석농 오진영과 간재 선생의 문집에 관련하여 논쟁한 부분이 많다. 권13부터 권19에 이르기까지 잡저(雜著) 101편이 있다. 김택술의 사상, 학문, 학규(學規)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남산재유제군(南山齋喩諸君)〉, 〈덕천서사규약(德川書社規約)〉 등은 근대 서사(書舍)의 학제(學制)와 수학 과정 및 운영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오진영의여서병갑서변(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은 오진영의 서신을 조목조목 논변한 것이다. 〈간재선생사고습유편집범례(艮齋先生私稿拾遺編輯凡例)〉와〈간재선생년보편집범례(艮齋先生年譜編輯凡例)〉 등은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문집과 별도로 편집한 간재선생문집의 편집 범례이다. 권20에는 서(序) 42편이 있다. 권21에는 기(記) 32편, 제발(題跋) 20편, 명(銘) 15편, 잠(箴) 8편, 찬(贊) 4편, 혼서(昏書) 5편, 자사(字辭) 24편, 애사(哀辭) 1편이 있다. 권22에는 제문(祭文) 37편, 고축(告祝) 16편, 상량문(上梁文) 8편, 비문(碑文) 5편이 있다. 권23과 권24는 묘갈명(墓碣銘) 30편, 묘지명(墓誌銘) 3편, 묘표(墓表) 28편이 있다. 권25는 행장(行狀) 19편, 가장(家狀) 4편, 전(傳) 11편이 있다. 권26부터 권31에 이르기까지 시(詩)가 1,336수, 부(賦)가 2편, 사(辭)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운문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장편고체(長篇古體) 등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시상(詩想)은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로서 사문(師門)의 옹호와 국난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실과 양심을 묘사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속집(續集)의 권두에는 김준영(金駿榮)이 1903년 4월에 김택술에게 써 주었던 〈증김종현서(贈金鍾賢序)〉를 서문으로 대신하였고, 아들 김형관(金炯觀)이 발문을 붙였으며 별도로 『사백록』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를 편집하였다. 속집 역시 크게 편지, 잡저 및 기타, 운문과 연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권1부터 권3까지 서(書) 98편이 있다. 권4는 잡저(雜著) 23편, 권5는 서(序) 6편, 기(記) 12편, 제발(題跋) 8편, 명(銘) 2편, 잠(箴) 1편, 찬(贊) 1편, 혼서(昏書) 1편, 고축문(告祝文) 3편, 제문(祭文) 3편, 상량문(上梁文) 2편, 묘갈명(墓碣銘) 4편, 묘지명(墓誌銘) 1편, 묘표(墓表) 7편, 유사(遺事) 1편, 전(傳) 2편 등이 있다. 권6은 시(詩) 169수, 권7과 권8은 연보(年譜)가 부록(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5. 맺으며 본서는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살았던 근현대 유학자 김택술의 문집 『후창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낸 책이다.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과 시대적 간극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문학적 형상화라든지, 역사관이라든지, 자연관, 처세관 등은 그 간극이 더욱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멸망, 국권 수탈, 광복, 6.25동란 등 격변의 시간 속에서, 김택술은 수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 중기에나 치열하게 논쟁이 거듭될 만한 성리설을 비롯하여, 국가의 정통이냐 변통이냐의 정통성에 대한 사관, 사회적 문화 현상에 대한 관점, 유가적 수양론과 절의, 근대의 서당교육사, 근대 유학자의 장례문화 등 적은 시간 속에 많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 바로 『후창집』이다. 이러한 소중한 자료를 번역하고 주석을 내어 준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앞으로 본서가 근현대 문화사를 연구하고 밝히는 데 많은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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