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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丑 十月初七日 再從姪 李鐺 李敎成 辛丑 十月初七日 李鐺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1년 10월 7일에 재종질(再從姪) 이당(李鐺)이 곡식값의 폭등과 토지가격의 추락, 금전(金錢)의 예조(預兆) 등에 관한 내용으로 숙부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이미 찾아와 주시고 또 이렇게 안부까지 물어주심에 연성(鍊成)이 간절하다고 하고 행패(行斾, 행차)가 순조롭기를 빌었다. 재종조부, 조모 등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여러 번 음식이 자주 비어 슬픈데다가 며느리도 잘 먹지 못하여 오래도록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보낸다고 하였다. 시세(時勢)는 곡식값이 다음 달 사이에 폭등할 것이니 기일을 잃지 말아야 하고 토지가격은 이후에 매우 떨어질 것이다. 금전(金錢)이 도로 막힐 기미가 있어 은행에서 이미 거둬들인 예조(預兆)가 있었다고 하였다, 쌀의 시세는 이 달부터 다음 달까지 좋거나 좋지 않거나 할 것이라고 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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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김재식(金宰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正月十九日 弟 金宰植 癸酉正月十九日 金宰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3년 1월 19일에 김재식(金宰植)이 맏손자가 세상을 떠난 흉사에 애통해하고 위로하고자 보낸 간찰(簡札) 하늘이 이미 태어나게 하였으니 완전하게 이루는 것은 누구의 뜻이며 이미 태어나서는 도로 빼앗는 것이 조물주가 시기함에 있는가 한탄하고, 자신이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도 믿을 수 없고, 공자와 주자가 이숙(鯉塾)의 모임을 잃은 것도 천리가 본래 이와 같고, 그대가 슬퍼하여 지나치게 상심하니 옆 사람의 위로와 비유가 이르러도 복씨[자하]가 아들을 잃고 실명에 이른 지경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친상은 날이 다하면 오히려 효도를 상함이 있어 경계하는데 아이를 잃은 마음은 부모께서 물려주신 신체를 훼손할까 두려운 것이 독로(篤老)의 슬픈 정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슬픔을 너그럽게 누그러뜨려 주시기를 멀리서 바란다. 아드님이 손자와의 갈림길에 임하여 송별하고 돌아옴에 더욱 슬플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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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이태식(李駘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寅 三月 卄八日 弟 李駿植 李敎成 壬寅 三月 卄八日 李駿植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2년 3월 26일에 이태식(李駘植)이 산수(山水)의 흥취에는 얻은 것이 적지 않다는 존형이 한 번 행차하여 주기를 바라는 등의 내용으로 존형(尊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자신의 이번 행차가 일에는 헛되이 가고 오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산수(山水)의 흥취에는 얻은 것이 적지 않다고 하고, 존형처럼 안목을 갖추었다면 노닐며 감상한 것을 모두 감당할 것인데 하물며 산속의 주인이 안목을 갖추려고 하니 한결같이 와서 정녕(丁寧)하게 긴요히 부탁한 것이 두세 번뿐만이 아니니 형이 이럴 마음이 있다면 이처럼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알맞은 때에 한 번 행차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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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2월 11일 계본(啓本) 崇德二年十二月十一日 啓本 037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계본(啓本): 각 진포(鎭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 등에 대한 올해 추동등포폄(秋冬等褒貶)의 제목(題目).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臣) 나덕헌이 근무 실적을 평가한 결과를 보고하는 일 때문에 삼가 올립니다."전에 도착한 병조의 관문(關文)에 이르기를,'주상으로부터「변장(邊將) 등의 실적을 허위로 평가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하여 보고하면, 잘 근무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이나 부장(部將)에 제수하고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거나 군사와 백성을 침탈한 사람은 군대에서 늙게 하여 권장하거나 징계하는 뜻을 보여주라.」라고 승전(承傳)을 받았다. 해당 변장 등의 실적을 일시에 주상께 보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도내 변장 등의 실적을 열거하고 삼가 격식을 갖추어 보고합니다."화량진수군첨절제사(花梁鎭水軍僉節制使) 이인노(李仁老) : 진실한 마음으로 직무를 보았으며, 재능에 여유가 있다.[誠心供職才能有裕]덕포진수군첨절제사(德浦鎭水軍僉節制使) 최준천(崔峻天) : 조심스럽게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군졸들을 위로하고 보살폈다.[奉職謹愼撫恤軍卒]철곶진수군첨절제사[鐵串鎭水軍僉節制使] 박한남(朴翰男) : 철곶진을 새로 설치하여 아직 직무를 보지는 못하고 있으나, 직무를 잘 수행하려고 마음먹고 있다.[新設未就留心盡職]정포수군만호(井浦水軍萬戶) 정연(鄭?) : 주장에게 나아가도록 권유하였으며, 비분강개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勸進主將慷慨赴亂]영종포수군만호(永宗浦水軍萬戶) 최형립(崔亨立) :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현재로서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평가할 수 없다.[到任未久時無能否]숭덕(崇德) 2년(16327, 인조 15) 12월 11일, 수군절도사 겸 통어사 신 나덕헌.▶ 어휘 해설 ◀❶ 승전(承傳) : 국왕으로부터 받은 전교(傳敎)나 전지(傳旨)를 가리킨다. 승정원이 국왕의 전교를 받으면 이를 실행할 관사에 전해주기 위해서 전지로 작성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은 뒤 전해주었는데, 이때의 전교나 전지를 승전이라고 불렀다. 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臣羅謹啓爲實跡事."前矣到付兵曹關內, '「邊將等實蹟, 不用虛僞, 從實錄啓爲良在等, 善者乙良, 或授宣傳官、部將, 如或計慮不善侵虐軍民者乙良, 老於卒伍, 以示勸懲爲只爲.」承傳是白有亦. 同實蹟, 一時啓聞向事.'關是白乎等用良. 道內邊將等矣, 實蹟開坐, 謹具啓聞."花梁鎭水軍僉節制使李仁老 : 誠心供職, 才能有裕.德浦鎭水軍僉節制使崔峻天 : 奉職謹愼, 撫恤軍卒.鐵串鎭水軍僉節制使朴翰男 : 新設未就, 留心盡職.井浦水軍萬戶鄭? : 勸進主將, 慷慨赴亂.永宗浦水軍萬戶崔亨立 : 到任未久, 時無能否.崇德二年十二月十一日, 水軍節度使兼統禦使臣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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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12월 11일 계본(啓本) 崇德三年十二月十一日 啓本 101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계본(啓本): 교동부(喬桐府)의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군병을 영솔하는 중군(中軍), 파총(把摠), 초관(哨官)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의 등제(等第).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臣) 나덕헌이 포폄(褒貶) 결과를 보고하는 일 때문에 삼가 올립니다."본영(本營) 소속 교동부(喬桐府)의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군병을 영솔하는 중군(中軍), 파총(把摠),215) 초관(哨官)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을 등제(等第)하고 삼가 격식을 갖추어 보고합니다."중군(中軍) 전(前) 첨정(僉正) 황후헌(黃後憲) : 상(上).수군 파총(水軍把摠) 전 권관(權管) 서유성(徐有成) : 상(上).우초관(右哨官) 전 권관 이지남(李枝男) : 중(中).후초관(後哨官) 전 훈련봉사(訓鍊奉事) 최응룡(崔應龍) : 하(下).육군 파총(陸軍把摠)216) 전 사과(司果) 송인갑(宋仁甲) : 중(中).전초관(前哨官) 전 훈련봉사 한응남(韓應男) : 중(中).좌초관(左哨官) 전 사과 정천로(丁天輅) : 상(上).별국 초관(別局哨官) 전 주부(主簿) 노의남(盧義男) : 중(中).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2월 11일,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 나덕헌. 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臣羅, 謹啓爲褒貶事."本營屬喬桐府水·陸軍兵所領中軍、把摠、哨官等今秋冬等褒貶等第, 謹具啓聞."中軍前僉正黃後憲 : 上水軍把摠前權管徐有成 : 上右哨官前權管李枝男 : 中後哨官前訓鍊奉事崔應龍 : 下陸軍把摠前司果宋仁甲 : 中前哨官前訓鍊奉事韓應男 : 中左哨官前司果丁天輅 : 上別局哨官前主簿盧義男 : 中崇德三年十二月十一日, 水軍節度使兼統禦使羅.❶ 摠 : 저본에는 원문이 '總'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摠 : 저본에는 원문이 '總'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摠' 1자가 '總'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摠' 1자가 '總'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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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遺命 卷之十1)附錄記遺命○ 若我氣盡則 汝須淨潔沐浴櫛髮然後 襲焉○ 初終凡節 只是稱家有無而己 不可爲一毫過分之事焉○ 汝素甚貧 襲歛衣服 澣濯常時所著 用之 道袍一件 隨宜雯裁焉○ 襲殮2)時 衣衾帶履 方正端莊 以無損我平日莊 敬之威儀焉○ 銘旌書以精毅齋李處士之柩○ 初葬則 就書堂山先山汝之前妣金氏墓左雙兆 待乾淨改葬焉○ 葬地則 於下西面書堂洞 十三代祖司直公墓後左岡 己爲造墳 勿他求○ 世俗 吊慰賓客 或待之以酒肉 又有衰經而親勸者 非禮3)之甚也 汝須毋至越 禮犯禁焉○ 祭需豊儉 稱家有無 淨潔與否 在誠敬 有其誠則有其神 無其誠則無其神 先 聖之訓也 然則與其豊備 寧誠敬○ 冠昏喪祭 一依朱文公家禮行之 今世降俗頹 四禮之廢 久矣 行之者 無幾人 可勝歎哉 汝須勿從俗○ 祭品 不用油果與油物 先賢之所定也 又有六代祖遺訓 勿泛勿泛○ 居喪者 非有甚不得已之故則 絶不出入 可也 今禮坊4)大壞 身著衰經 赴人 喪葬 以爲常例 汝須謹身遵禮 毋使循俗 或有服親喪 不可不往慰 然故待卒 哭後 可也○ 余於前日居憂時 巧値歉年 初終凡節 多不稱意 是爲徹骨之恨 我死後 愼勿 豊厚過度也○ 人家子姪 爲聖爲凡 只是學與不學而已 不係於才之有無 苟有好資質 可以敎 矣 汝之二子 才雖鈍拙 俱有温良厚重之資質 可以爲儒業矣 善爲敎導 以成 其器 詩曰 温温恭人 惟德之基○ 汝性偏急 不容人細過 故常被人譏剌 余常所憂也 須從忠厚 上做工夫 其於 人過 寬恕十分 其於己能 退藏十分 母少相持 詩曰 式相好矣 無相猶矣二十三日 疾革 家人男女 遑遑在側 府君收歛精神曰 吾命似在二十五日 歛襲之 儀 營葬之節 一切凖備焉二十四日 夕陽 第三女來自龍湖侍側 府君曰 雖平時 婦女不得至丈夫之室 况疾革之時乎 禮云 男子 不絕於婦人之手 婦人不絕於男子之手 卽入内室 可也二十五日 晷已晡矣 府君精神自若 俄而問曰 今日 何日耶 對曰 正月二十五日 戌時 命曰 去舊衣 著新衣 藥水少許進乎 余口遂進藥水 自一匙二匙 至三匙而不復進 痛哭痛哭 何言何言 時澤5)謹錄 원래는 "卷之六"으로 나오나 순서에 따라 이렇게 고쳤다. 정서본에는 "歛"으로 나오나 이는 "殮"의 오기임으로 바로 잡았다. "禮"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정서본에는 "坊"으로 나오나 이는 "方"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정서본을 보면 "時澤" 옆에 "出出"이라는 글자가 써 있다. "時澤"을 "出出"로 바꾸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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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錄 公諱驥魯 字德夫 號精毅齋 姓李氏 瀛州人 李氏胄于高麗文憲公諱敬祖 本朝諱伯膽 執義 光廟改玉後 棄官自靖 是爲中顯 八傳而有諱克守 號小心齋 師事尤菴宋先生 動容周旋 必中規矩 學問思辨 得其要領 於公爲六代祖 曰長春 曰崇 曰鎭燁 是小心齋後三世 而俱有德行文章 祖諱萬祿 有特孝之行 命旌 考諱東益號直齋質直勤儉 事親極其忠養之禮 事兄盡其友于之道 妣扶寧金氏奉珏之女 哲廟辛亥五月三日生公 幼而端雅 異乎常兒 稍長深重寡默 惟以書籍翰墨爲事 始學於三從叔山塢公 及長 復從南岡公講磨 湥有資益 南岡即山塢之子也 丙寅丁母喪 俱盡情禮 戊子丁外艱 年饑勢艱 不能稱意 以送終之儉薄 爲一生之恨 兩親墓俱在百里之外 不能省掃之數數 移葬于先山下 間日拜墓 不以老而少弛也 自少至老 教誨族子姪及隣里少輩 因其才而導之 平居無親踈貴賤 皆以和顔接之 未嘗見其疾言遽色 或言及時政得失人物長短 嘿然少無和焉 時運不幸 天地閉塞 國步艱難 羣醜媒孼 乃寒後二子 扁其堂 盖欲所守之貞 亭亭然如窮冬之松柏 乙已艮齋田先生南駕于本鄉 納贄請學 以正其所有 補其所闕 先生以精毅二字 扁其所居之室 盖取君子之學不精則德不進 不毅則業不廣也 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 於是集合洛閩諸賢 言仁之說 以究其肯綮 若其著述 無非忠憤所發 能使讀者 凜然髮直骨冷 座揭切要之言 以爲警省之資 庭列羣芳之物 亦爲養性之需 憫時輩謀利之太酷 歎殘民保生之無由 每對門子姪 以純古仁厚之事 反覆敎誘 家庭之奴僕 先墓之守護者 亦皆要其厚也 以老患 長在呻吟 自丙寅臘月以來 疾祟轉革 翌年正月望間 命諸子 使備送終之具 至于二十五日 命家人曰 今日 卽吾符到之日也 因屏女 去舊衣着新衣 更命殮襲之儀 營葬之節 果是日悠然而殁 享年七十七 葬于扶安郡下西面書堂洞先塋負丁原 配義城6)金璜載女 無育而卒 繼配高興7)柳煥奎女 有婦德 克配君子 生三男三女 男長 時澤 師艮齋田先生 有剛直之行 次 時寬 時? 時? 出后仲父 女適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8) 延安李東寧 時澤 娶扶寧金淵述女 有四男 鍾珍 鍾熺 元鍾9) 僩鍾10) 時寬 娶全州李容馥女 一男 鍾奎 金壻男 升洛11) 臻洛 宗洛12) 薛壻男 啓錄13) 李壻男 義七 凡內外孫畧于人 公旣受天賦之美 加以謹思明辨之功 養以守死善道知命敦仁之趣 然不見知於世而終老林泉 譬如芝蘭 瘁于窮谷也 鍾坤受學于門下 薰灸者 已厚且久矣 詳如其本末終始之如何 故乃敢敘述其梗概 若其所造之深 所尙之高 果非淺量之所及 豈可容易言哉 丁卯三月下澣 族孫鍾坤謹撰 이 "城"字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에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정서본에는 이 "興"이 두 번 나온다. 하지만 이는 오류임이 분명하여 바로 잡았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薛仁鎬"로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薛載澤"으로 수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鉉中"으로 적었다가 나중에 "元鍾"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鉉萬"으로 적었다가 나중에 "僩鍾"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鼎洛"으로 적었다가 나중에 "升洛"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元洛"으로 적었다가 나중에 "宗洛"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永泰"로 적었다가 나중에 "啓錄"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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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禮具圖 蒲筵蒲筵常緇布純丈六尺曰常臺園器禮器註臺大一石禁疏曰王藻大夫側尊用棜士側尊用禁註云棜斯禁也特牲禮云實獸於棜註云棜之制如今大木輿矣則棜非承尊之物以禁與斯禁無足似輿故名爲棜士之棜禁大夫之斯禁名雖異其形同天子諸侯承尊之物謂之豊上有丹也勺絡冪篚 有盖篚接三禮舊圖云篚以竹爲之長三尺廣一尺深六寸定高三寸如今少車苓接篚制一頭大一頭小爵爵受一弁上兩柱取飮不盡之義戒其過也木爵王爵同制觶觶受三升接陳常道曰燕禮大射以象觶公燕禮司正飮角觶而士喪禮大歛亦有角觶盖觶以象爲貴角次之凡言觶者以木爲之盥槃枓巾架罍鼎鼎有牛羊豕三鼎皆以銅爲之俎木爲之以載牲體豆籩豆三禮舊圖云豆高尺二寸漆赤中大夫以上畵赤雲氣諸侯餙以象天子加王餙皆謂餙口足也又鄭註周礼及礼記云豆以木爲之受四升圓往尺二寸有盖?三礼圖云以竹爲之口有縢綠形制如豆受四升 鄕射礼云薦脯用籩醢以豆注宜乾物豆宜濡物也脾 撗麥 脡麥 正麥 膉肫 短脅 長脅 代脅 臂 肩胳 臑觳 觳肫或謂之膊胳或作骼接神俎不用左體故少牢禮只用右體其左體則侑以下用之此鄕飮禮所以致敬賢者故左體則不以升俎盖當用於燕羞矣但遵俎所用臑肫肺之外經無明文而疏家以爲用餘體所謂餘體豈指左體耶薦脯圖祭半膩左朐右末薦脯用籩每膩長一尺二寸中屈 之爲六寸 撗祭者 於其上 用半膱 亦長六 寸於脯 爲撗於 人爲縮其脡有五通祭者六肺離末圖本 皆 離 末以手從肺本循之至于末乃絶以祭 謂之僚祭不 循其本直絶 以祭謂之絶 祭禮多者 僚祭禮畧 者絶祭樂器圖 瑟爾雅釋樂曰雅 瑟長八尺二寸廣一 尺八寸二十五絃其 常用者十九絃頌 瑟長七尺二寸廣一 尺八寸二十五絃盡 用之笙嚴氏曰笙以匏爲之十三管列匏中 而施簧管端吹 笙則鼓動其簧 而發聲禮書云 三十六簧大者十 九簧小者十三簧編磬磬有大小磬則此編磬也春官小胥正樂縣 之位王官縣諸侯軒縣大夫判縣士特縣宮縣四面象宮室軒縣三面去南面辟王也判懸 判左右二面又去北面特縣於東方或於階 間而已凡鍾磬編二八十六枚而在一籅 ?謂之堵鼓華屬貫鼓大鼓也長八尺鼓四 尺中圍加三之一曰亦大鼓也縣周制 也夏后氏足鼓殷楹鼓周縣鼓 植木以縣鼓磬謂之?籅者下撗者也籅 上板曰業孔氏曰植者爲簴橫者爲籅大 板謂之業所以餙此簴而爲崇牙刻之如 鉅.捷業然故曰業其形卷然可以縣 鼓磬業上樹五釆之羽以爲文畵繒爲翣 載以璧人下有旄樹翣於籅之角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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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7년 12월 26일 감결(甘結) 丁丑十二月二十六日 甘結 039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감결(甘結) :올해와 내년은 세초(歲抄)를 중지할 것.무인년(1638, 인조 16) 1월 3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보내는 감결(甘結)."이번에 도착한 비변사가 재가받은 결과를 통지하는 관문(關文)에 이르기를,'함경감사의 서장(書狀) 내용을 요약하면,「올해 세초(歲抄)는 한가한 장정(壯丁)이 없어 대신 충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서장에 의거하여 본사(本司)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한가한 장정을 찾아 세초하는 것은 본래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대한 사안이니 폐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도(本道)가 난리를 겪고 사람들이 사망한 끝에 한가한 장정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은 과연 장계(狀啓)의 내용대로입니다. 그러니 올해와 내년까지는 우선 세초를 중지하소서. 경기의 도내도 더욱 심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니, 경기감사에게도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전교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관문의 내용을 살펴서 시행하라."정축년(1637, 인조 15) 12월 26일. 戊寅正月初三日到付.兼巡察使甘結."節到付備邊司啓下關內, '咸鏡監司書狀內節該, 「今年歲抄, 無閑丁充定不得.」事書狀據司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閑丁歲抄, 固是軍國重事, 不容廢弛是白在果. 本道經亂死亡之餘, 誠難搜拮, 果如狀啓事意. 限今明年, 姑爲停寢爲白乎矣. 京畿一道, 被兵尤甚, 亦爲一軆施行宜當, 京畿監司處, 幷以行移, 何如?」 傳曰, 「依啓.」事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關是置有亦. 關內辭緣, 相考施行向事."丁丑十二月二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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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公諱驥魯 字德夫 李氏系出瀛州 以髙麗文憲公諱敬祖爲始祖 以本朝執義 爲莊陵自靖者諱伯膽爲中祖 執義子錫祉司直 以剛直 見重於世 司直子長孫郡守 郡守子壹進士 生雲齡 才行薦授參奉 生僉知承宗 亦以行義稱 三傳而至小心齋克守 師事尤菴宋先生 先生亟稱其實學 是爲公六世 曰長春 曰崇 曰鎭燁 小心子孫曾 連世文行 祖萬祿 孝聞表宅 考東益 號直齋 勤儉孝友 妣扶寧金氏奉珏女 公以哲廟辛亥五月三日生 幼而端莊 異凡兒 稍長 深重寡黙 書籍之外 無他好 始學於三從叔山塢公東顯 復從其子南罔公泰魯講磨 弱冠前 已立根基矣 事親 以養志爲主 奉二兄 怡怡如也 丙寅丁母憂 情禮俱盡 戊子丁外艱 家貧年凶 送終儉薄 以此爲終身恨 間一日拜兩親墓 不以老而少弛 教誨族子鄉少 不問聰鈍 誠心導率 視爲己任而不憚勞 性眞率 不飾邊幅 平居無疾言遽色 無親疎貴賤 皆接以和顔 然有不正者 心惡而疎之 見人語及時政得失人物長短則 嘿不酬答 貧益甚 屢至絶火 堅坐看書 并不許家人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無寧守吾本分而死 常戒其子曰 人之居家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 謹中做去 及世道一敗 宗國幾危 邪說愈恣 以寒後二字 扁其堂 盖以歲寒松柏自期也 乙已歲 艮齋田先生之南駕也 納贄行弟子禮 就正所學 先生以精毅齋錫號 於是老成德聖 爲同門所推 時仁說多歧 先生每深慮焉 公集合孔孟言仁諸說 并作一篇 名曰 洙泗言仁錄 使讀者知 所自究而不事紛爭 盖倣南軒所編而因舊名也 座揭要切之言 爲警省之資 庭列羣芳之物 爲養心之需 皆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 疾俗輩謀利之酷 憫殘民保生之艱 每對人以仁義道德之說 反覆曉告 此又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 公之爲學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 少 其發爲五七言咏嘆者 較多 而要皆愛國憂道忠憤惻恒之辭 其亦變雅之遺調歟 自丙寅臘月 寢疾 翌年正月妄間 令辦喪具 至二十五日 謂其子曰 今日吾符到期也 屏婦女著新衣 要命以歛襲營葬之節 果以是日卒 享年七十七 葬于扶安郡下西面書堂洞丁坐原 從先兆也 配義城金氏璜載女 無育 繼配高興柳氏燠奎女 有婦德 克配君子 三男 時澤 時寬 時?出系仲父 三女 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14) 延安李東寧 時澤 娶扶寧金淵述女 四男 鍾珍 鍾熺 源鍾 僩鍾15) 時寬娶全州李容馥女 一男鍾奎 時?娶密陽朴亨圭女 五男 鍾培 鍾現 鍾祥 鍾然 鍾16) 金壻男 升洛17) 臻洛 宗洛18) 薛壻男 啓錄19) 李壻男 義鉉 嗚呼 跡公心行 洵淳古清厚外柔内剛人也 盖公得資質之美 襲先德之懿 固有事半功倍之易 然非有闇然自修到老穼篤之工 何以至此 謂公厚善有餘 明剛不足者 乃嚴師敎人之過慮 或者認爲實際定論則 失之矣 余嘗謁公於木上里庄也 公喜曰 不意子之訪我 我無文 故士多過而不入 子有文而顧訪我耶 此雖公自謙語 實病世之以文取人也 噫 是亦可以見公之所尙也 時澤 以公家狀一通 來示余曰 此吾族鍾坤君撰也 而有失於太畧 子其重爲備述也 余惟爲公同門二十年 知公固悉矣 且曾爲公作寒後堂記 贊服其所操 今於狀德之役 何敢固辭而不卒誠也 顧微顯闡幽 古之道也 故表章公之内剛有不負田先生精毅之錫者 用告夫世之淺知公者云爾歲在庚午三月下旬日 扶寧 金澤述撰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仁鎬"로 썼다가 이를 지우고 "載澤"으로 쓴 흔적이 있다. 네 아들 중 "源鍾"과 "僩鍾"의 이름은 별도의 종이를 이용하여 추가로 써넣은 것이다. 時?의 다섯 아들의 이름은 별도의 종이를 이용하여 추가로 써넣은 것이다. 다만 다섯 번째 아들의 이름은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원래는 "鼎洛"으로 적었다가 "升洛"으로 바꾼 흔적이 있다. 원래는 "元洛"으로 적었다가 "宗洛"으로 바꾼 흔적이 있다. 원래는 "永泰"으로 적었다가 "啓錄"으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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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월 7일 첩정(牒呈) 戊寅正月初七日 牒呈 040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병조에 보낸 첩정(牒呈): 수군(水軍)이 복구될 때까지만 입방(入防)에 보태게 한 교동부(喬桐府)의 육군(陸軍)에 보병(步兵)도 포함시킬지의 여부를 명령해줄 것.무인년(1638, 인조 16) 1월 7일.명령을 받는 일 때문에 보냅니다."본영(本營)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본영의 장계(狀啓)에 아뢰기를,「교동부(喬桐府)의 기병(騎兵) 등을 수군(水軍)이 복구될 때까지만 본영의 수군에 보태 입방(入防)하게 해주소서.」82)라고 하였습니다. 그 장계에 따라 비변사가 복계(覆啓)한 결과에 의거하여 해당 기병을 육군(陸軍)의 상번(上番)을 면제하고 수군에 보태 입방시키게 해주소서.'83)라고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전에 도착한 병조의 관문 내용을 요약하면,'본도(本島) 군사의 상번을 면제하는 일은 비변사가 이미 주상의 재가를 받았으니 본조(本曹)가 그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살펴서 시행하라.'84)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서 거론했던 기병 등을 본조가 알려온 공문에 따라 오는 2월 1일부터 시작하여 본영에 보태 입방시켜 전선(戰船)을 새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대체로 기병과 보병(步兵)은 모두 육군이기는 하지만, 애당초 장계 안에서 보병 2호(戶)는 누락시켰습니다. 해당 보병 2호를 수군이 복구될 때까지만 기병과 똑같이 본영에 보태 입방시킬지, 서울로 올려보내 입번(立番)시킬지, 기병과 보병이 똑같이 육군이니 보병 2호만 상번시킬지의 여부에 대한 것을 참작하여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첩정을 올립니다."병조에 보고함. 戊寅正月初七日.爲行下事."'「喬桐府騎兵等, 限水軍蘇復間, 本營舟師添防.」事狀啓導良, 備邊司覆啓據, 同騎兵, 除上番添防.'事, 已爲馳報爲有如乎. 前矣到付曹關內節該, '本島軍士除上番事, 備局旣已啓下, 該曹有何低昴於其間乎! 相考施行向事.'關是乎等以. 向前騎兵等乙, 依本曹行會, 來二月初一日爲始, 本營添防, 新造戰船計料爲在果. 大槪騎、步兵, 皆是陸軍, 而當初狀啓中, 步兵二戶段, 漏落爲有臥乎所. 同步兵二戶乙, 限水軍蘇復間, 騎兵一體本營添防爲乎喩, 京上立番爲乎喩, 騎、步兵, 一樣陸軍, 則步兵二戶耳亦, 上番與否事乙, 參酌行下爲只爲. 合行云云."報兵曹. '021 나덕헌의 장계' 참조. '025 비변사의 관문'과 '030 나덕헌의 첩정' 참조. '032 병조의 관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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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월 8일 장계(狀啓) 崇德三年正月初八日封 狀啓 041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선박용 목재를 벌목하는 일 및 솜씨 좋은 선박의 장인(匠人) 등을 다수 정해주도록 공청수사(公淸水使)에게 통지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본영(本營)의 전선(戰船) 3척 중 1척은 전(前) 수사(水使) 신경진(申景珍)이 병자년(1636, 인조 14)에 새로 제작하였으며, 2척은 전전전(前前前) 수사 최진립(崔震立)과 전전(前前) 수사 정응성(鄭應聖) 등이 제작하였는데 시기가 오래되었으므로 썩어서 버려질 물건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병선(兵船) 2척과 사후선(伺候船) 4척 등까지 합쳐서 총 8척을 차례대로 목재를 덧대 개조하고 그러한 연유를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습니다.85) 그런데 해당 전선을 제작하는 제도가 영남(嶺南)에 비해 더욱 몹시 허술하므로 전선 1척을 우선 새로 제작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칙사(勅使)가 나올 때가 되고 신이 교동부사(喬桐府使)를 겸직하고 있어 칙사의 접대를 맡았기 때문에 접대하는데 사용할 수많은 물품을 쇠잔한 고을의 재정과 인력으로 애써 준비하느라, 군병과 백성이 동원되는 큰 공사까지 함께 거행할 수가 없어 지난 겨울 이전에는 미처 제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본영의 차사(差使)를 별도로 정해 지난 11월 초에 공청수사(公淸水使)에게 보내, 안면곶[安眠串]에서 전선을 제작하는 일에 대해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그 뒤 선박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어렵사리 준비하여 올해 1월 20일에 신의 군관(軍官)인 출신(出身) 황경렴(黃景濂)과 새로운 출신 김숙 등을 정해 안면곶으로 보냈으며, 전선과 사후선을 모두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시급히 제작한 뒤 돌아와서 정박시키고 전선에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여 바람이 잔잔하고 날씨가 따뜻한 시기에 변란을 대비할 계획입니다. 선박용 목재를 벌목하는 일 및 솜씨 좋은 선박의 장인(匠人) 등을 다수 정해주는 일을 묘당(廟堂)에서 공청수사에게 각별히 공문을 보내 통지하게 해주소서.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월 8일에 봉하여 올림. 承政院開拆."本營戰船三隻內一隻段, 前水使申景珍, 丙子年新造爲白有旀, 二隻段, 前前水使崔震立、鄭應聖等, 造作年久, 將爲腐朽空棄之物是白乎等以. 臣到任卽時, 兵船二隻、伺候船四隻幷八隻乙, 鱗次添木改造, 緣由已爲馳啓爲白有乎矣. 同戰船之制, 比嶺南, 尤甚齟齬是白乎等以, 戰船一隻乙, 爲先新造計料爲白如可. 適値勅使之行, 臣職兼喬桐, 許多支用之物, 殘邑物力以, 拮据措辦, 軍民大役乙, 不得竝擧, 去冬前, 未及造作爲白有如乎. 別定營差, 去十一月初, 委送公淸水使處, 安眠串造作戰船事乙, 已爲傳通爲白遣. 難備造船財料, 今正月二十日, 臣軍官出身黃景濂、新出身金淑等以, 定送安眠, 戰船及伺候船, 幷以未春耕前, 急時造作, 回泊粧船, 風和待變計料爲白去乎. 船材木斫伐事及善手船匠等多數定給事乙, 令廟堂, 公淸水使處, 各別行會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崇德三年正月初八日封. '005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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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幷序 吾黨有簡古而濟之以學之士 瀛州李處士諱驥魯 精毅其號 盖以察微而不雜 擔重而致遠 自勉也 卒而易奠後 子時澤 欲文樹阡之石 謀于佘曰 世之作家 多矣 先人在世 闇然自修之實 確乎不拔之操 惟長者知之 故不於他而乃敢請焉 因督20)之再三 不獲己諾之 不遽把筆 深思累日 謹按其先世 有文憲公敬祖執義伯贍 執義 光廟改王 棄官自靖焉21) 自此八傅 至克守號小心齋 早師尤菴宋先生 學識文 行 著焉 高祖崇 曾祖鎭燁 俱有樹22)立 能世其業 祖萬祿 以孝蒙旌 又有羣行 詳載蘆沙墓碣 考東益號直齋 天分質直 事親奉兄竭其誠勤 外祖 扶寧金奉珏 公 幼而異羣兒 長而襟懷淡間 志尙邃古 資以經籍 繹其實際 晚師艮齋田先生 正其趨向 菀然爲儒門宿德 事親 能承順其意 奉二兄 怡怡也 至於諸族 無近遠 一以敦和 教人以勅行務實爲先23) 國家運否 夷虜憑陵 以寒後二字扁堂 寓其意 不以文辭自名 惟詩隨感觸而發 或慘而爲悲風凄雨 或舒而爲暖香和烟 皆任其眞率而不加藻飾 集合諸賢言仁說 以究其肯綮 庭除有小砌 種羣芳 以爲玩意適情之資 有宿患 丁卯正月二十五日 命家人曰 今日 卽吾符到之日 因屛婦女 去舊衣 著新衣 至於歛襲之儀 營葬之節 皆言及焉 已而悠然而逝 上距生年辛亥 七十七 葬于居鄉下西面書堂洞先塋負丁原 配義城金璜載女 無育而卒 繼配高興柳煥奎女 生三男三女 男 時澤 時寬 時? 女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24) 延安李東寧 時? 出系仲父 孫 鍾珍 鍾熺 鍾奎25) 次房出 鍾培 鍾現 鍾祥 鍾默 鍾錫 過房出26) 金壻男 升洛27) 臻洛28) 宗洛29) 薛壻男 啓錄30) 李壻男 時澤 有操修能執親喪 諸子孫 亦多淳質處士 其有後矣乎 銘曰維南淑氣 鍾而不渝小心奮作 世世業儒公又繼起 逈異夫夫能踵前美 遠程間趨老而猶篤 不瑕懷瑜視無靑白 心分紫朱常依愼默 刊落豪麤松蒼石白 崇山之隅堂斧所託 樵牧莫徂丁卯三月下浣 全州李喜璡謹撰 원래는 "篤"으로 적었다가 이렇게 바꾼 것이다. "焉"은 나중에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정서본을 보면 "修"를 "樹"로 고쳐 쓴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事"를 "先"으로 고쳐 쓴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薛仁鎬"를 "薛載澤"으로 수정한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鍾熺"와 "鍾奎" 사이에 "鉉中"과 "鉉萬"을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다. "鍾培"부터 "過房出"까지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내용이다. 정서본을 보면 "鼎洛"을 "升洛"으로 고쳐 쓴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琫洛"을 "臻洛"으로 고쳐 쓴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元洛"을 "宗洛"으로 고쳐 쓴 흔적이 있다. 정서본을 보면 원래는 "永泰"로 썼다가 이렇게 고쳐 쓴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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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7월 27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七月二十七日 關文 080 비변사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전선(戰船)의 제작과 보수에 필요한 목재는 참작해서 정해주고, 선박의 장인(匠人)과 나무를 끌어내릴 군인들은 본포(本浦)에서 모집하되, 이를 충청수사(忠淸水使)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재가받음.무인년 8월 4일 도착.비변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이달 20일에 성첩(成貼)한 경기수사(京畿水使)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133) 본사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경기 각 진포(鎭浦)의 전선(戰船)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달리 마련할 곳이 없으므로, 근래의 규례에 따라 안면곶[安眠串]에서 베어다가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옛 선박을 보수하는데 들어가는 목재를 참작해서 정해주도록 허용하여 함부로 마구 베는 사태가 없게 해야 합당하며, 선박의 장인(匠人)과 나무를 끌어내릴 군인들은 본포(本浦)에서 힘이 닿는 대로 모집해야지 다른 도(道)에서 징발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뜻으로 충청수사(忠淸水使)에게 함께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7월 23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이현(李俔)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충청수군절도사에게도 공문을 보냄. 숭덕 3년 7월 27일. 戊寅八月初四日到付.備邊司爲知音事."節啓下敎本月二十日成貼水使書狀據司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京畿各浦戰船材木, 他無出處, 依近例許令斫取於安眠串爲白乎矣. 舊船修補所入, 參酌許給, 勿致濫斫之患宜當, 船匠及曳木軍人段, 在本浦隨力雇募, 不可責出於他道. 此意, 忠淸水使處, 幷以行移, 何如?' 崇德三年七月二十三日, 同副承旨臣李俔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 合行云云."忠淸水軍節度使行移. 崇德三年七月二十七日. '076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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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월 8일 첩정(牒呈) 戊寅正月初八日 牒呈 04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비변사에 보낸 첩정(牒呈): 공청수사(公淸水使)에게 솜씨 좋은 선박 장인(匠人) 등을 다수 정해주라고 통지해줄 것.무인년(1638, 인조 16) 1월 8일.명령을 받는 일 때문에 보냅니다."본영(本營)의 전선(戰船) 2척을 나무를 덧대 개조하고 그러한 연유를 급히 보고하였습니다.86) 그러나 개조한 해당 전선은 양남에서 제작한 전선과 비교하면 더욱 몹시 허술하므로 잘못되어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반드시 낭패를 당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재를 어렵사리 준비하여 올해 1월 20일에 공청도(公淸道)의 안면곶[安眠串]에 보내 전선을 새로 제작하게 하되,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시급히 돌아와서 정박시키고 전선에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여 바람이 잔잔하고 날씨가 따뜻한 시기에 변란을 대비할 계획입니다. 전에 비로소'공청수사(公淸水使)에게 솜씨 좋은 선박 장인(匠人) 등을 다수 정해주소서. 그리고 본영의 차사(差使)를 별도로 정해 공사를 독촉하게 하겠습니다.'87)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공문을 보내 통지해주소서. 그러므로 첩정을 보냅니다."비변사에 보고함. 戊寅正月初八日.爲行下事."本營戰船二隻乙, 添木改造, 緣由已爲馳報爲有在果. 同改造之船, 比兩南戰船之制, 則尤甚齟齬, 脫有緩急, 必有狼狽之患是乎等以. 艱備財料, 今正月二十日, 公淸道安眠串良中, 新造戰船, 未農前, 急期回泊粧船, 風和時待變計料爲去乎. 在前始叱, '公淸水使處, 善手船匠等, 多數定給. 別定營差, 使之督役.'是如爲去乎. 自廟堂, 各別行會爲只爲. 合行云云."報備局. '005 나덕헌의 장계' 참조. '041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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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7월 10일 관문(關文) 崇德二年七月初十日 關文 013 비변사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철곶[鐵]의 진보(鎭堡)를 설치할 곳의 형세를 살펴보고 상세히 보고할 것.정축년(1637) 7월 15일 도착.비변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삼도통어사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43) 본사(本司)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44) 옛 진보(鎭堡)는 혁파하였으나 새 진보는 설치되지 않아서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주하고 있으니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너무나 아닙니다. 수사(水使)가 직접 순행하면서 진보를 설치할 곳의 형세를 살펴보고 상세히 주상께 보고하게 한 뒤 그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7월 9일에 좌승지(左承旨) 신(臣) 김휼(金霱)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그러므로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2년 7월 10일. 丁丑七月十五日到付備邊司爲知音事."節啓下敎統禦使書狀據司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舊鎭旣撤, 新堡未設, 入接民家, 殊非可久之道. 水使親爲巡歷, 審其設堡形勢, 詳細啓聞, 以憑處置事, 行移, 何如?' 崇德二年七月初九日, 左承旨臣金霱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崇德二年七月初十日.❶ 啓目粘連 : 저본에는 원문이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전후의 문맥의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007 나덕헌의 장계' 참조. 저본에는 원문 '啓目粘連' 4자가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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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1일 장계(狀啓) 崇德三年五月初一日 狀啓 054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화약을 제조할 수 있도록 군기시(軍器寺)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을 파견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본영(本營)에 비치해둔 염초(熖焇) 400근을 다른 재료와 섞어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서 거기에 들어가는 석유황(石硫黃)을 지급해달라고 예전에 주상께 청하여 50근을 해당 관사에서 받아왔으므로 지금 막 섞어서 제조할 계획입니다.99) 전(前) 수사(水使) 신(臣) 신경진(申景珍)이 애당초 군기시(軍器寺)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이라고 하는 사람을 염초를 굽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주상께 청하였습니다. 그가 구웠던 염초를 다시 담당하여 섞어서 제조할 수 있도록 해당 관사에서 시급히 독촉하여 보내주게 하소서. 이러한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 차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1일.▶ 어휘 해설 ◀❶ 별파진(別破陣) : 조선 후기에 군기시(軍器寺) 및 각 군영(軍營)에 소속되어 화약(火藥)을 제조하거나 화포(火砲)를 다루는 일에 종사하던 병종을 가리킨다. 별파진이 사료에 처음 보이는 것은 『광해군일기』 12년(1620) 1월 2일(신사)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면서 화포의 용도가 중시되면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기시,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등에 각각 별파진을 두었다. 용호영(龍虎營)에는 화포금군(火砲禁軍) 27명을 두었는데, 그 안에는 군기시의 별파진 6명, 훈련도감의 별파진 2명, 금위영의 별파진 2명, 어영청의 별파진 2명이 포함되었다. 承政院開拆."本營上熖焇四百斤合劑次以, 容入石硫黃, 曾已啓請, 五十斤, 該司受來爲白有如乎, 今方合劑計料爲白去乎. 前水使臣申景珍, 當初軍器寺別破陣高男稱名者, 啓請同熖焇煮取爲白有如乎. 其矣所煮熖焇乙, 更良次知合劑次以, 請令該司以急急督送事.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云云."崇德三年五月初一日. '046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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