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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實記 精毅齋李處士實記44)洛婺遠而吾道東 栗翁 講明性理之學 尤翁 闡明麟經大義 艮齋田先生 繼栗尤講學明義於旺嶝繼華之間 從學之士 千百其多 而飮河之腹 各充洪鍾之鳴 隨叩其充足 大叩者 處士李公精毅齋 其一也 余方爲世矢的 抱經待盡於扶風山下 公胤時澤 過余曰 先考講修之德之行 莫不散在於族姪 陽山鍾坤所撰行錄45) 後滄金友澤述所撰行狀 而遠齋李公爲之46)撰碣銘 欽齋崔丈撰墓表 晦峯高公述墓誌 然余素乏記性 且才經喪威 十忘八九 不得盡載 便作千古之恨吾言之予記之 作實記一通 俾後裔冀有參考 余辭以不敢 督之不已 烏敢終辭 公諱驥魯 字德夫 其先瀛州47)人 以勝國文憲公諱敬祖爲始祖 本朝執義諱伯瞻 光廟改玉 棄官自靖48) 諱克守號小心齋 師事尤翁 學識著名 是中葉顯祖 諱崇 諱鎭燁 高與曾祖 諱萬綠 號桐塢 以孝命旌 考諱東益 號直齋 有至行著于世 妣扶寧金奉珏女 有四德譽 哲廟辛亥五月三日 擧公于扶安郡乾先面木上里 生而顔如白玉 聲若洪鍾 脩幹豊額 眼爍背直 端重雅飭 異凡兒 稍長 就三從叔山塢公東顯學 深寬寡黙 書籍之外 舞他嗜好 公深許之 復就山塢胤南岡公泰魯學 公素愛質美性敏 誘掖 激勵不已 文義日就 辭章富瞻 有欲罷不能之微義49) 性孝根天 事無大小 必先意承順 有不安節 煎藥煉粥 必身親任 彈力竭誠 而不委婢僕 沐浴拜廟 以祈永年 與二兄 友悌篤至 凡有異味 不進則雖小50) 不先入口 非有外事 日侍坐子舍 或講磨道理 或討論古今家國興亡俗尙美惡 或誦諷經子書數篇 以與起向善懲惡之心 丙寅 遭內艱 躃踊哭泣 襲歛51)饋奠 一遵禮制 三年食素 柴毁骨立 過祥廬墓 終不服闇 戊子 丁外憂時 値大無 勢且艱難 哀慼雖有餘 送終之禮 未免儉略 而以是爲終身恨 至老衰 鮮御酒肉 凡當忌辰 沐浴遷坐 必致如在之誠 考妣墓 曾在百里之地 恐他日省埽之不虔 移于先塋下 日必52)拜省 不以雨雪老衰廢 設私塾 敎族子鄕秀 不問敏鈍 因其村而誠心導率 以爲己任而不憚勞苦 乙已 艮翁痛宗國淪喪 華夏改顔 將乘桴入西 溟駕暫住蓬萊山下 遂具摯贄53) 納拜以爲依歸 且正所學 先生憂厚善有餘 而明健不足 僅守氣質之偏而未能進於義理之正也 以精毅 名其講學之室 蓋人纔有一毫鹿疏之心 便察理未明 故要精密 纔有一毫懦弱底心便守道未確 故要剛毅 是乃嚴師敎人之過慮也 公以爲余 自早年不知有爲己之學 荏苒蹉過 晩而從學 恐心鹿力懦 不能硏幾而致極 擔重而致遠 遂劂精毅 揭壁上 日坐其下 時時舊勵曰 聖賢敎人 雖千言萬語 其用功54) 必自明 善誠身始而其要在精毅 余雖老昏 刻若做去 可入聖門 又曰 吾年多精短 不宜涉躐群書 只宜從切要處下手 而切要者 其論語乎 遂將論語一部 尊閣丌上 日常愛讀首尾二十篇 如誦己言 而惟於仁說 益致意焉 蓋伊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故耳 於是集合孔孟言仁諸說 合爲一篇 名曰 洙泗言仁錄 使讀者知所自究而不事紛爭 蓋倣南軒舊轍而仍以爲名者也 或疑聖賢言仁處 固是仁 而其餘許多說話 莫非仁則 今此之錄 不其近於擧一而廢百耶 曰子之疑 誠然然 仁有體用而做工當自 切要處 始顧此 老昏與其泛及餘說而無得 不若專究切要處有得之爲愈也 故有是錄 然使學者 求仁止於此而已 而不復致博於其餘則 未免擧一廢百之累 而非吾所集之意也 自宗國運否 外夷憑陵 揭寒後扁其堂 以寓微意 卽夫子所謂 歲寒後凋之義 而寒松老栢 未嘗摧折於大冬酷雪者 有似乎 君子之不變 素履55)於患亂顚沛之中 故取之列書聖賢格言至論 附于座右 以爲警省之資 作砌庭除 列植群芳 以爲玩意適情之資 卽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 嫉世俗謀利之刻酷 憫殘民保生之艱難 每對老少 擧仁義道德之說 反覆曉諭 卽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 常戒諸子曰 人之處世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當躋古賢堂室 家甚貧窶 不許家人借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不若守吾本分而死 衣服飮食 先須節儉 量入以爲出 或絶火至屢 頓堅坐看書 人不見其飢容 性賦眞率 不事邊幅 平居喜怒不形56) 無疾言遽色 不問親疎貴賤 接之以和顔有語 及時政得失人物長短者 嘿無酬答 至若尊攘衛闢之辨 必一刀兩殷 而少不容貸 且其學問思辨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小 而文則不加藻餙 精簡雅直 有上古之味 詩則 隨其感觸而發者 皆愛國憂道忠憤惻恒之辭 而或慘而爲悲風凄雨 或舒而爲春花秋月 有離騷之味 其亦衰世之意歟 丙寅臘月 示憊 翌年正月望 潻祟命 辨喪具 念五日夜半 呼家人 問曰 今日 何日 曰 二十五日戌時 曰 吾命 休矣 屛婦人 去舊衣 著新衣 進藥水悠然而逝 距其生七十有七 葬于本郡下西面書堂洞先塋面癸57)原 從遺命也 前配義城金璜載女 早卒無育 繼配高興柳容58)奎女 克配君子 育三男三女 時澤 時寬 時{金+憲} 過房男也 適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 延安李東寧 女也 鍾珍 鍾熺 元鍾 長房出 鍾奎 平康蔡奎鎬 水原金絅達妻 次房男女 鍾培 鍾玹 祥 鍾黙 嫁善山金東吉者 過房男女 升59)洛 臻洛 宗60)洛 金婿出啓錄 薜婿出 嗚呼 公以淳古淸厚之資 有外柔內剛之質 以闇然自修之工 兼到老彌篤之誠 本之以孝悌 補之以經史 淳古而淸厚 故每日淸晨 盥櫛衣冠 歛容端坐 對書潛玩 威儀棣棣 望之自有可近 不可犯之思 外柔而內剛 故接人以和顔 而無疾言遽色 然至若闢異端攘夷狄斥邪 說明辨痛 絶不遺餘力 闇然自修 故一部論語 如誦己言 而辨論文義 如河決竹破 而無餘蘊然 至若著述 不屑屑於發揮 至老而彌篤 故早襲庭訓 晩師艮翁 以誠正修治 迢凡做聖爲自期 而不知老之衰焉 本之以61)孝悌 故養生以敬 而定省溫凊 靡不用極 而志體俱養 敬如嚴父 保如幼兒 而怡怡如也 補之以經史 故學而助其行 行而驗其學 行合體經言 輒證書而著於咳唾之餘者 有數十篇 其論敬義 兩進曰 內而立心 正而直之 然後外而制事 敏而方之 此所謂敬以直內義 以方外也 是乃終身事業 非一朝一夕而可到 論仁曰 仁 是人心之全德 純然天理 而無一毫人欲之雜者也 爲仁而至無一息間斷 無一物不存兼該 萬善而眼前道理 無非這氣 脈則聖矣 言本然性曰 性是天命 而卽心之理仁義禮智信是也 言氣質性曰 性本純粹至善而未嘗有惡 然但爲氣稟所拘 物欲所蔽則 有時而不善 然惟其本體之善 亦不改頭幻面 故君子學問思辨 明其固有之善 而變革其氣稟物欲則 可復其初 釋心曰 心卽天之所以與我而者 我得以具衆理應萬事者也 又曰 心之爲物 最虛最靈 神明不測 而常爲一身之主 提撕萬事之綱 不可頃刻而不存 然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殼之外則 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眄之間 自不覺其身之所在 故孟子有操存求放之訓 學者 必以敬爲主 講究主一無適 整齊嚴肅之義 收歛放失惺惺昏昩之要 革舊染 去拘蔽則 其心 庶幾至善 論時義出處曰 夫子曰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而篤信好學 守死善道 若吾輩者 只是一介讀書士 而至於撥亂救世 非惟才力不足 亦勢無所乘 只有忍痛舍寃 抱經林下 以身殉道而已 詩多於文 而令人讀之向善懲惡之義 油然而生 自不覺消融其汙濁之念 脫却其塵累之態 入於間靜淸高之域 君子不屑屑之敎 其如斯夫 艮翁所許 父子讀書 書聲盈屋 世務不到 自有眞趣 不覺神往 遠齋李公62)所謂 襟懷淡間 志尙邃古 資以經籍 而繹其實際 晩師艮翁 而正其趨向 菀然爲儒門宿德 淡淡乎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晦養見畸於世 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 自戢淵冰之趣 非淺劣者 所測 晦峯高公所謂 身任經籍心不解63) 開蒙峨冠博帶 實古人之風儀 簡言質行 非世人之儔擬 欽齋崔丈所謂 素性眞率 不飾邊幅 人無親疎 接以和顔 然有不正者 疎斥之不容 金後滄所謂 淳古淸厚 外柔內剛 有闇然自修 到老罙篤之工 李陽山所謂 志尙高邁 講學有序 律己有法 出言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有補於斯文 世道大矣者 皆實際語而不阿其所私也 故並書之序次如右 使其64)子孫門人 知希賢希聖 必自公言行 始焉歲閼逢涒灘重坤興龍節 耽羅 高東是 謹撰 이 실기는 원래 精毅齋遺稿의 정서본에 있던 글이 아니었다. 별도로 있던 것을, 정의재유고의 정서본이 완성된 후 이를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실기는 당연히 정의재유고에 들어와야 했다. 또 당초에는 그럴 계획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정서 과정에서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이를 알고 추가로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家狀"으로 썼다가 이를 "行錄"으로 고친 흔적이 있다. "之"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원래는 "高阜"로 썼지만 정서본이 완성된 후 "瀛州"로 고친 흔적이 있다. "棄官"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義"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雖小"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歛"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必"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贄"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功"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不形"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子"로 썼다가 지운 후 다시 쓴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癸"와 "子"가 모두 나오고 있는 셈이다. "煥"으로 썼던 것을 정서본이 완성된 후에 고친 것이다. "鼎"을 고쳐 쓴 것이다. "元"을 고쳐 쓴 것이다. "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李公"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經籍心不解"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其"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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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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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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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祭文 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十九日庚辰 同門李憙璡 謹以脯果 告于精毅齋李公靈筵 嗚呼 公之聲音絶於耳 儀形邈乎目 歲倏忽其一周 日月若是其疾促 余寄在于斯世 誰與談討 誰與遊息 竊惟公淡淡乎不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益密晦養 見踦於世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自戢 淵冰之趣味 非淺劣者所測 今旣與形而俱化 何處覿其彷彿 公雖無意於塵寰 其奈世道之岌岌 悶余獨抱殷憂 助玄宰急此陽復 告此衷丹 靈其昭格 嗚呼 尙饗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二十四日乙酉 族孫鍾坤 敢昭告于精毅齋處士象生之靈筵曰 嗚呼 人之生也 有爲邦國之棟樑者 有爲士林之領袖者 有爲一門之矜式者 隨其成就之高下 有稱道之優劣焉 故人之死也 有邦國之不幸者 有士林之愛惜者 有一門之慟歎者 嗟 吾先生 德行學識 能承六世之文獻 其於承先裕後之功 實爲一門之矜式 就正有道 守死善道 其於衛正闢邪之功 實有辭於士林 假使試用於世則 其於樹風立俗之功 或有補於邦國矣 然士之用行舍藏 有時焉 有命焉 豈以爵祿之不及 有損益於先生哉 况且享年八耋 是其壽 仁之一驗 而爵祿 蓋非亂邦之所安也則 今於先生之歿 復有何憾 然在後生 不無遺憾 鍾坤受學于門下者 十餘年矣 一無笞楚之施 亦無叱怒之責 諄諄然敎導 惓惓然開導 以若樗櫟之不材 不能成器 是爲入髓之所恨 以家學之不墜 丁寧囑託 至於臨終 猶不已 而以若滅裂之淺見 不能繼業 亦爲刻骨之攸憾 屬纊如昨 祥朞在明 聲容永隔 幽明乃分 是爲臨時之所感 謹具酒果 敢告衷情 庶幾格思 鑑此衷情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二十三日戊申 族孫鍾坤 謹以酒果 再拜 哭告于精毅齋先生之靈筵曰 嗚呼 養子而後 知父母劬勞之恩 敎人而後 知師傅敎導之功 小子 以十策一步之質 九歲始受訓于門下 至于十年之久 諄諄然眷眷然敎誘 未嘗有笞楚之嚴叱咤之誚 於今 始覺涵養之有素 敎導之有術也 小子 雖不能盡弟子之職 堪承敎導之萬一 然於其化導之妙 陶鑄之恩 敢不服膺而慕仰乎 吾家 以小心齋以來 世襲文獻 爲人稱藉 而先生常恨其不能繼 然以若先生之學而有此者 以其謙虛自處而然也 以賤見思之 先生志尙之高邁 講學之有序 律己之有法 出言之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其有功於斯文 有補於世道者 豈可謂承先業而已哉 實有辭於後日矣 但先生歿後 靑氈舊業 有誰而復能紹述耶 平日屢託於不肖 然志不尙而和於流俗 學不進而畫於刻圈 况賤齒五旬 百病交侵 未知亦將以模樣度了一生 而受他日泉臺之責否 是爲小子區區之恨 庶其黙佑 使此賤疾 快爲蘚完 使之永年 則學之進不進 業之繼不繼 惟在小子 是爲區區之望 庶幾遂願否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九日甲午 同門晩生平康蔡東建 謹具薄醪 蕪詞哭告于精毅齋李公象設之筵曰 嗚呼 愷悌君子 淳古處士 近仁流亞 致道淸髓 天性厚善 師門稱美65) 精毅命扁 深厥意旨66) 精爲見道 毅是進德 慥慥白首 老而好學67) 遠老接隣 輔益親切 不知年數 已到八耋 頤養有素 需用愈密68) 考經依傳 會萃仁說69) 意在精耗 惟從要約 又觀居庭 孝友爲律70) 蒔花培草 趣味雅潔 痛彼戎世71) 綱常斁絶72) 寒後揭隅 特勵士節73) 信乎我公 允和不流 後人考德 由斯可求 如我顓蒙74) 猶知好賢 况在同門 遊從多年 謬被德愛75) 規箴殷宣 風潮浪裏 庶幾保全76) 或誦曩哲 又示言志 顧甚顓蒙 豈無勉圖 心期千載 脚立遠途 公今厭世77) 翛然乘雲 拜師淸都 可續誾誾78) 吾門紛競79) 冥佑是勤80) 我惟失誨 悵私罔云 誠通神明 靈或冥相 又望龥帝 挽回道喪 駒光不留 奄周二朞 撤象靡遐81) 悵私岡云82) 數文登哭 庶格玆尊83) 意雖無窮 辭不能施 嗚呼哀哉 尙饗 "師稱珍重"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夙夜祗奉"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常悔晩學"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體康用適"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編稡仁說"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孝友家法"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痛彼世亂"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綱墜怪作"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特勵堅節"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如我傝{宂+辱}"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幸蒙見愛"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規箴"부터 "보전"까지는 원 문장을 지우고 새로 쓴 흔적이 있다. "公厭濁世"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相樂無垠"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門戶紛競"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亦論慇懃"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撤床靡遐"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悲復何涯"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厄"을 "尊"을 고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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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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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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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四月三日風乎瓮巖山頂 快披胸襟立暮天 蒼茫水色半空連良辰適値淸和日 勝賞何如少壯年依斗北望多嶺海 背山西看隔雲烟坐陰招鶴歸笻晩 倦踏斜陽影在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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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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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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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7년 9월 18일 장계(狀啓) 崇德二年九月十八日 狀啓 02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경기수영(京畿水營)과 5곳 진보(鎭堡) 수군의 생존 숫자와 탈이 생긴 숫자 등을 정리한 책자를 올려보냄.〈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본영(本營)에 소속된 5곳의 진보(鎭堡)와 각 고을로부터 먼저 받았던 수군의 생존 여부를 정리한 책자의 숫자는 비변사(備邊司)로 올려보냈다고 급히 보고하였습니다.57) 추후에 도착한 생존 수군과 사망 수군의 수효도 모두 받았으므로 본영 및 5곳 진보의 원래 군병 중 현재 남아있는 숫자 및 사로잡혀간 사람, 살해된 사람, 도망하거나 죽은 사람 등 잡탈(雜頉)의 숫자를 모두 분류하여 정리한 책자를 비변사로 다시 올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18일. 承政院開拆."本營所屬五鎭堡·各邑水軍存沒成冊先捧數段, 備邊司以上送事, 已爲馳啓爲白有如乎. 追乎到付存沒數畢捧是白乎等以, 本營及五堡元軍時存及被擄、被殺、逃故雜頉數, 幷以秩秩成冊, 備邊司以更良上送,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崇德二年九月十八日. '004 나덕헌의 장계'와 '006 나덕헌의 첩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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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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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7년 9월 22일 장계(狀啓) 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狀啓 023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철곶[鐵串]의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으므로 비변사에서 대책을 마련하여 지시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전에 도착한 비변사가 회계(回啓) 결과를 통지한 관문(關文) 내용을 요약하면,'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의 서장(書狀)에 아뢰기를,「초지(草芝)와 제물(濟物) 두 곳의 옛 진보(鎭堡)는 철거하였으나 철곶[鐵串]의 새로운 진보는 설치되지 않아 철곶첨사[鐵串僉使]가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으니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너무나 아닙니다.」58)라고 하였습니다. 경기수사(京畿水使)가 직접 순행하면서 진보를 설치할 곳의 형세를 살펴보고 상세히 주상께 보고하게 한 뒤 그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59)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변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즉시 순행하면서 살펴야 할 일이었으나, 부임한 즉시 본영(本營)의 전선(戰船),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을 제작하는 공사가 거창해서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더욱이 칙사(勅使)가 행차하는 시기와 겹쳐서 본부(本府)를 광주(廣州) 대신 부칙사(副勅使)를 접대할 곳으로 바꾸어 정하였으므로, 역참(驛站)의 각종 휘장(揮帳)과 기물(器物), 숙소 건물의 수리가 몹시 긴요하고 다급하여 다방면으로 애써 마련하고 밤낮없이 준비해서 연속 역참으로 실어 보내느라 거의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철곶진[鐵串鎭]을 살펴보는 일은 이달 20일에서야 신이 직접 철곶에 도착하여 철곶첨사를 데리고서 살펴보았는데, 철곶첨사가 진보를 설치할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장신(張紳)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전(前) 경기수사 신(臣) 신경진(申景珍)과 함께 만나 적간(擲奸)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결정을 받은 곳은 철곶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는 곳이고, 이른바 진보를 설치하기에 합당하다고 한 곳은 모두 백성의 전답이었습니다.60) 따라서 국가에서 대가를 지급하고 매입한 뒤에야 진보를 설치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연유를, 백성의 전답 숫자를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와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애당초 초지와 제물 두 진포(鎭浦)를 합쳐서 하나의 진보로 설치하도록 한 사안에 대해 장신이 급히 보고한 것에 의거하여 병조가 복계(覆啓)한 문서를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이번에 두 옛 진포를 철거하고 새로운 진포를 설치하는 공사는 매우 중대하니 반드시 시기를 정해서 완료하도록 분부하여 재촉해서 거행한 뒤에야 추워지기 전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조정의 분부에 따라 신속히 철거하여 옮겨 설치하라고 시급히 통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제물과 초지 두 진포의 관아 건물을 즉시 철거하여 진보를 옮겨 설치할 철곶으로 옮겨 두었으나, 난리를 겪던 중에 해당 목재와 기와를 일부는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현재 백성의 전답에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애당초 두 진보를 철거하고 합쳐서 철곶을 만들고 호칭을 승격시켰던 일은 그럴만한 취지가 있는 것인데, 시일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진보 설치할 곳을 여태까지 마무리하지 못해서 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을 빌려서 거처하고 있으니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묘당(廟堂)에서 신속히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22일.▶ 어휘 해설 ◀❶ 적간(擲奸) : 관원의 근무 상태나 특정 장소의 상황 등을 살펴서 문제점을 적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承政院開拆."前矣到付備邊司回啓關內節該, '統禦使書狀內, 「草芝、濟物舊鎭旣撤, 新堡未設, 入接民家, 殊非可久之道.」 水使親爲巡歷, 審其設堡形勢, 詳細啓聞, 以憑處置向事.'回啓關是白有亦. 臣依備局移文, 卽爲看審事是白乎矣, 到任卽時, 本營戰、兵、伺候船等功役浩大, 今始畢役. 而又値勅使之行, 本府乙, 廣州代移定副天使支待是白乎等以, 站上各樣供帳·器俱、館宇修理, 萬分緊急, 多般拮据, 罔夜措置, 連續輸送站上乙仍于, 殆無暇日. 同鐵串鎭看審事乙, 今月二十日沙, 臣親到鐵串, 僉使率良遣看審, 可以爲設鎭是如. 張紳留守時, 與前水使臣申景珍眼同擲奸, 定奪處, 則僉使時方借入民家, 而所謂可合設鎭之處, 皆是民田. 自公家給價買得, 然後設鎭緣由乙, 備邊司以, 民田庫數條列成冊, 上送爲白在果. 考諸當初草芝、濟物兩浦以爲一鎭張紳馳報據該曹覆啓公事節該, '今此兩浦撤舊營新之役, 極爲重大, 必須刻日分付催促擧行, 然後未凍之前, 勢可完役. 依朝廷分付, 急速撤毁移設之意, 星火知委.'亦爲白有等以. 同濟物、草芝兩浦公廨乙, 卽時撤毁, 移置於鐵串移鎭處, 亂離中, 同材瓦乙, 除除良散失, 方爲棄置民田爲白有臥乎所. 當初撤破兩鎭合爲鐵串陞號, 其意有在, 而遷延時日, 設鎭處乙, 迄未究竟, 僉使時方借入民家, 事未妥當. 令廟堂急速處置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007 나덕헌의 장계' 참조. '013 비변사의 관문' 참조. 장신(張紳)은 장유(張維)의 아우로, 인조 14년(1636, 인조 14) 3월 9일에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를 지키지 못하고 함락당한 책임을 물어 이듬해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관찬사료에는 장신이 철곶[鐵串]의 설치와 관련하여 올린 장계와 비변사의 회계(回啓) 등은 보이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인조 6년 5월 16일, 14년 3월 9일, 15년 2월 22일, 3월 18·20일; 『인조실록』 15년 1월 22일(임술), 2월 22일(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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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9월 25일 관문(關文) 崇德二年九月二十五日 關文 025 비변사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교동부(喬桐府)의 육군(陸軍) 48호(戶)를 수군(水軍)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上番)을 면제하고 선박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할 것.정축년(1637, 인조 15) 9월 29일 도착.비변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이달 18일에 성첩(成貼)한 본영(本營)의 서장(書狀) 내용을 요약하면,'난리를 겪고 난 뒤에 본영(本營)의 수군은 사로잡혀가기도 하고 살해되기도 하고 도망하거나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의 육군(陸軍) 48호(戶)는 모두 바다의 섬에서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전선(戰船)이 정박해있는 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이들 육군으로 수군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上番)을 면제해주고 선박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는 사안을62) 묘당(廟堂)에서 참작하여 처리하게 해주소서.'63)라고 하였다. 그 서장에 의거하여 본사(本司)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본사가 예전에 전(前) 경기수사(京畿水使) 변흡(邊潝)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본부의 속오육군(束伍陸軍)과 출무(出武) 등을 수군에 전적으로 소속시켜 징발하여 쓰게 하는 일에 대해 주상께 여쭈어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육군이 옛 규례를 그대로 답습한 채 해마다 상번시키고 있으니 이는 주상께 여쭈어 결정한 본래의 취지가 아닙니다. 현재 선박을 정리하는 공사가 한창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게다가 48호의 육군은 그다지 많은 숫자도 아니고 모두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전선이 정박해있는 부근에 거주하고 있으니, 장계에서 아뢴 대로 수군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을 면제하고 선박을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병조에도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24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신(臣) 김휼(金霱)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2년 9월 25일.▶ 어휘 해설 ◀❶ 성첩(成貼) : 문서를 첩자(帖子) 형식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첩자란 일정한 간격으로 접어서 만든 문서를 가리킨다. 성첩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병풍처럼 두 쪽씩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일정한 간격으로 접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문서의 뒷부분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두루마리처럼 안쪽으로 감아가며 접는 방식이다. 전자를 작첩(作帖)이라 하였고, 후자를 주첩(周帖)이라 하였다. 계본(啓本), 계목(啓目), 차자(箚子), 정사(呈辭), 전문(箋文), 상언(上言), 단자(單子) 등은 작첩 형식으로 성첩하였고, 초기(草記), 장계(狀啓), 관문(關文), 첩정(牒呈) 등은 주첩 형식으로 성첩하였다. 丁丑九月二十九日到付備邊司爲知音事."節啓下敎本月十八日成貼本營書狀內節該, '經亂之後, 本營水軍被擄、被殺、逃故. 本府陸軍四十八戶, 皆是海島水業之人以, 居在戰船所泊之處, 若以此陸軍, 限水軍蘇復間, 使之除上番, 添助舟楫事, 令廟堂參酌處置.'事據司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本司曾因前水使邊潝狀啓, 本府束伍陸軍、出武等, 專屬水營, 使之調用事, 已經定奪, 而陸軍, 因循舊例, 每年上番, 已非定奪本意是白在果. 目今整理船艦, 其役方殷, 且四十八戶之軍, 不至甚多, 而皆以爲水業之人, 居在戰船近處, 則依狀啓限水軍蘇復間, 除上番添助舟楫役, 似爲便當. 以此意, 該曹良中, 幷爲分付, 何如?' 崇德二年九月二十四日, 左副承旨臣金霱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崇德二年九月二十五日.❶ 助舟楫 : 저본에는 원문이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021 나덕헌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助舟楫' 3자가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021 나덕헌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021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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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본(啓本) 啓本 06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계본(啓本): 각 진포(鎭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의 등제(等第).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臣) 나덕헌이 포폄(褒貶) 결과를 보고하는 일 때문에 삼가 올립니다."도내 각 진포(鎭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김남중(金南重)과 함께 논의하여 등제(等第)하고 삼가 격식을 갖추어 보고합니다."화량진수군첨절제사(花梁鎭水軍僉節制使) 이인노(李仁老) : 상(上).덕포진수군첨절제사(德浦鎭水軍僉節制使) 최준천(崔峻天) : 상(上).철곶진수군첨절제사[鐵串鎭水軍僉節制使] 박한남(朴翰男) : 상(上).정포수군만호(井浦水軍萬戶) 정연(鄭?) : 상(上).영종포수군만호(永宗浦水軍萬戶) 최형립(崔亨立) : 상(上). 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臣羅謹啓爲褒貶事."道內各鎭浦僉節制使、萬戶等矣今春夏等褒貶乙, 觀察使兼巡察使臣金南重同議等第, 謹具啓聞."花梁鎭水軍僉節制使李仁老 : 上.德浦鎭水軍僉節制使崔峻天 : 上.鐵串鎭水軍僉節制使朴翰男 : 上.井浦水軍萬戶鄭? : 上.永宗浦水軍萬戶崔亨立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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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字釋義 謹按此心 包得五行之妙 而五常之德 具焉 何以言之 心即天之所以與我者 而我得而具衆理應萬事者也 蓋嘗論之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而復動 一動一靜 傷變陰合 而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而水火木金土 質具於地 而氣行於天 化生萬物 此乃天地之心也 而萬物之中 惟人也 得其秀而生 以爲心而性 即心所具之理也 由此觀之 天地之太極 即吾之性也 天地之動靜陰陽 卽吾之心也 水火木金土 即仁義禮智信之氣也 而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 隨時發見 而信以進德者也 且夫天一生水而有潤下之象 天三生木而有曲直之形地二生火而有炎上之氣 天五生土者 居中 地四生金者 居終 故曰 體得五行之妙 而五常之德 具焉者也 蓋心之爲物 㝡虚最靈 神明不測 動靜有時 常爲一身之主 而提撕萬事之綱 不可頃刻而不存者 然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循物欲於軀殼之外 則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眄之間 自不覺其身之所枉 故孟子有燥存求放之訓 學者 必於是 以敬爲主 而講究其主一無適 整齊嚴肅之義 與夫收歛放失惺惺昏昧之要 革舊染去拘蔽 則其心也 庶幾至善矣 噫 余學識空疏 未嘗治性理之說 然見今叔季人 異於禽性獸心者 幾希 不可不喚我主人翁曰 惺惺耶否 拘蔽耶否 以爲自警也 故著爲一說 書諸座右 以爲寓目之資心包性情 而性是體 情是用 而心爲性情之田地 故性情 皆從心心本活物 能憂勤惕 厲則不死 不然則人欲肆 而天理亡 身雖存 而心則死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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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7월 16일 관문(關文) 崇德二年七月十六日 關文 017 군기시(軍器寺)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정포(井浦), 덕포(德浦), 철곶[鐵串] 등의 진보(鎭堡)에 통지하여 어교(魚膠)를 시급히 상납하게 할 것.정축년(1637, 인조 15) 7월 20일 도착.군기시(軍器寺)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본도(本道)가 올려보낸 어교(魚膠 민어의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 7근은 정축년 몫으로 수량대로 받았고, 도내의 화량진(花梁鎭)과 영종포(永宗浦)도 어교를 상납하였다. 이번에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깡그리 써버리고 난 끝에 화살 하나조차 없으므로 현재 각종 군기를 특별히 제조하고 있는데, 부족한 것은 어교이다. 도내의 정포(井浦), 덕포(德浦), 철곶[鐵串] 등의 진보(鎭堡)에 관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통지하여 상납하지 않은 어교를 시급히 상납하게 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7월 16일. 丁丑七月二十日到付軍器寺爲相考事."本道上送魚膠柒斤, 以丁丑條, 依數捧上爲在果, 道內花梁鎭、永宗浦魚膠, 亦爲上納爲有如乎. 節武庫蕩失之餘, 無一介箭乙仍于, 時方各樣軍器, 別造爲乎矣, 所乏者, 魚膠是去乙. 道內井浦、德浦、鐵串等鎭良中, 未納魚膠乙, 到關卽時知委, 急急上納向事. 合行云云."崇德二年七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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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6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六日 關文 057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의 파견에 대해 군기시(軍器寺)에 공문을 보내도록 재가받음.무인년 5월 14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본도(本道)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110) 본조(本曹)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을 군기시(軍器寺)에서 시급히 독촉하여 보내주게 하라고 본시(本寺)에 공문을 보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3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신(臣) 김광황(金光煌)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한 내용대로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3년 5월 6일. 戊寅五月十四日到付.兵曹爲相考事."節啓下敎本道書狀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別破陣高男, 令軍器寺急急督送事, 移文本寺, 使之施行, 何如?' 崇德三年五月初三日, 右副承旨臣金光煌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貌如, 奉審施行向事."崇德三年五月初六日. '054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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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9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九日 關文 059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따라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를 등제(等第)하는 일은 수사(水使)가 직접 행할 것.무인년 5월 14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병조의 관문에 이르기를,'이번에 재가하신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아뢰기를,「관찰사와 절도사의 직임은 각각 관장하는 일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는 관찰사에게 순찰사의 호칭을 겸하게 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본래 의도는 도내의 군정(軍政)을 총괄적으로 알고 있다가 비상 사태가 발생한 날에는 통제하게 하려던 의도였지, 원래 사안에 따라서 관직만 구비해두려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113) 만약 관찰사가 체면만 알고 매번 제재할 생각을 하여 예사로운 군무(軍務)조차도 병사(兵使)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는다면, 정무(政務)를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114) 그래서 신이 부임한 이후로는 항상 병사와 수사(水使)에게 신의 이러한 뜻을 알도록 하여 방해되는 사태가 없게 하였습니다.〈심지어 각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에 대한 포폄(褒貶)을 다른 도에서는 병사가 마련하여 주상께 보고한다.〉라고 하는데, 본도(本道)의 근래 규례는 근무 상태에 대한 진관의 보고에만 근거해서 등제(等第)하여 보고하니, 몹시 불성실한 일입니다. 병영(兵營)에서 주상께 보고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번 6월부터 시작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을 병조에서 주상께 아뢰어 결정을 받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본조(本曹)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옛날에 관찰사의 호칭만 가지고 있을 때에는 병사와는 상호간에 관문을 사용하였고 수사는 첩정(牒呈)을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순찰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가 통제를 받는 일이 없었고115) 모든 군무에 관한 사안은 병사가 전적으로 관장하여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순찰사는 총괄적으로 관리하기만 해야 순찰사라는 체모에 맞는 것인데, 근래에는 순찰사가 체면만 스스로 지키려고 하고 병사에게는 예사로운 군무조차도 스스로 전담할 수 없게 하며, 심한 경우에는 병영에 전해져오던 당연히 사용해야 할 물품마저도 빼앗아 감영(監營)에 소속시키고, 봄과 가을의 시재(試才)를 시행하기 위한 순행도 순찰사의 분부가 아니면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도(道)가 똑같이 그처럼 방해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군무가 허술해지는 이유는 모두 참으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충청감사 정태화가 이와 같은 폐단을 깊이 알고서 사유를 갖추어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는데, 진관의 중군 이하 근무 상태를 등제하는 일도 장계에서 아뢴 대로 함께 시행하라고 각 도에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5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최유연(崔有淵)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수사에게도 아울러 통지하여 시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관문 안의 내용을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 3년 5월 9일.▶ 어휘 해설 ◀❶ 진관(鎭管) : 진관은 두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전국의 행정 조직인 읍(邑)을 군사 조직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관할하던 체제를 가리킨다. 진관 체제에서는 각 도의 군사 조직을 각각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주진이 거진을 통솔하고 거진이 제진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거진은 각 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군영(軍營)을 가리키고, 거진은 각 도의 고을이나 진포(鎭浦) 중 중심이 되는 몇몇 고을과 진포로 지정된 군영을 가리키며, 제진은 거진에 소속된 고을이나 진포의 군영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거진을 가리킨다. 거진으로 지정된 곳은 고을이나 진포의 이름 아래에 '진관' 2자를 붙여 거진임을 나타내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에 수록된 경기의 진관을 예로 들면, 광주진관(光州鎭管), 수원진관(水原鎭管), 양주진관(楊州鎭管), 월곶진관[月串鎭管], 덕포진관(德浦鎭管) 등이 있었다. 그중 월곶진관과 덕포진관은 수군(水軍)의 거진이고, 나머지는 육군(陸軍)의 거진이다.❷ 시재(試才) : 지방 특수군의 장교(將校)와 군병(軍兵)을 대상으로 해마다 1, 2차례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시(科試)의 일종이었다. 시재는 시행 지역과 응시 대상에 따라 강화부(江華府)의 장의려시재(壯義旅試才), 개성부(開城府)의 선무군관시재(選武軍官試才), 통제영(統制營)의 장사시재(將士試才), 동래부(東萊府)의 별기위시재(別騎衛試才),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군관시재(軍官試才), 수원(水原)과 파주(坡州)의 별효기사시재(別驍騎士試才), 제도(諸道)의 마병시재(馬兵試才) 등이 있었다. 戊寅五月十四日到付.兼巡察使爲相考事."節到付兵曹關內, '節啓下敎忠淸監司鄭太和狀啓內, 「觀察、節度之任, 各有所掌. 近年以來, 令觀察使兼巡察使之號, 故朝廷本意, 欲使摠知道內兵政節制有事之日, 元非隨事備官之意. 徒知體面, 每思裁制, 尋常軍務, 亦不專委於兵使, 則恐不能展布政事. 臣到任以後, 常使兵、水使知臣此意, 俾無掣肘之患爲白在果. 〈至於各鎭管中軍以下褒貶乙, 他道, 則兵使磨鍊啓聞.〉是如爲白乎矣, 本道近例, 只憑鎭管勤慢之報, 等第以啓, 殊不着實. 自兵營啓聞, 實合事理. 今六月爲始, 依此施行事乙, 令該曹定奪.」事書狀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在昔觀察使時, 則與兵使通關, 水使牒呈矣, 以無帶巡察使之號, 故兵使無受制之事, 而一應軍務之事, 則使兵使專掌次知. 巡察使只統領而已, 乃巡察之得體, 而近來巡察使, 徒能自存體面, 使兵使, 尋常軍務, 亦不得自專, 至於甚者, 流來兵營應用之物, 亦爲奪屬監營, 春秋試才, 非巡察分付, 則不得任意出巡. 故其掣肘之弊, 各道同然. 兵務虛疎, 無非實由於此是白如乎. 忠淸監司鄭太和深知如許之弊, 具由馳啓爲白有昆, 鎭管勤慢等第之事乙良置, 依狀啓一體施行之意, 各道幷以行移, 何如?」 崇德三年五月初五日, 同副承旨臣崔有淵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水使處, 幷以知委施行向事.'關是置有亦. 關內辭緣, 相考施行向事. 合行云云."崇德三年五月初九日.❶ 政 : 저본에는 원문이 '停'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無 : 저본에는 원문이 '有'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하게 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 25년(1592) 5월 6일(을축)에 황해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에게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고, 이후로 필요한 도에는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25년 5월 6일(을축), 7월 12일(기사)·17일(갑술), 10월 29일(을묘); 『광해군일기』 1년 3월 10일(신묘). 저본에는 원문 '政' 1자가 '停'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無' 1자가 '有'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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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4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四日 關文 060 호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화량첨사(花梁僉使)가 사용한 군량(軍糧)도 회감(會減)할 것.호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화량첨사(花梁僉使)의 첩정(牒呈)을 첨부한 경기수사(京畿水使)의 관문 내용을 요약하면,'덕포첨사(德浦僉使)와 정포만호(井浦萬戶) 등은 사용한 군량(軍糧)을 회감(會減)하였으나 화량(花梁)만 회감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연유를 다시 첩정을 첨부하여 관문을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보고한 대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4일. 같은 달 21일에 도착함. 戶曹爲相考事."節到付使關粘連花梁僉使牒呈內節該, '德浦僉使、井浦萬戶等段, 用下軍糧, 已爲會減, 花梁耳亦, 不爲會減乙仍于, 以此緣由, 更良粘移.'事粘關是置有亦. 依所報施行向事."崇德三年五月初四日. 同月二十一日到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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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6월 19일 장계(狀啓) 崇德三年六月十九日 狀啓 064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전선(戰船)과 병선(兵船) 4척은 공사를 완료하였고, 군량미(軍糧米) 400섬 등을 별도로 갖추어 대변고(待變庫)에 들여놓았으므로 호조에서 회록(會錄)하게 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신이 작년 6월에 부임하여 본영(本營)의 전선(戰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을 하나하나 점검해보니, 제작한 지가 오래되어 썩은 것이 있었으므로 전선 2척, 병선, 사후선은 즉시 썩은 부분을 철거하여 차례대로 개조하고 그러한 연유를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습니다.116) 그리고 비변사가 복계(覆啓)한 결과를 통지한 공문에 따라 모두 양남(兩南)에서 선박을 제작하는 제도에 따라 전선을 새로 제작해서 경기의 전선을 제작하는 표준으로 삼으려고 계획하였습니다.117) 그런데 작년 가을과 겨울에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일 때문에 선박을 제작할 여력이 없다가, 얼음이 녹자마자 바로 올해 1월 20일에 요포(料布)를 모으고 군관(軍官)을 별도로 정해 안면곶[安眠串]으로 내려보내면서'솜씨 좋은 선박의 장인(匠人)과 이장(耳匠)을 모으고 선박 목재를 산에서 끌어내릴 군인 등을 고용하여 기한을 정해놓고서 공사를 독촉하고, 제작을 마치면 돌아와서 정박시키라.'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면곶에 사는 백성이 전에는 선박을 제작하는 일에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올봄부터는 안면곶 안에 염장(鹽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모두 소금 굽는 일에 의탁하여 소속되었으므로 모집할 군인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먼 지역의 공사를 신이 직접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서 제때에 제작하지 못하고, 3개월째가 되어서야 겨우 제작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박시켰습니다. 배 위에 판옥(板屋)을 장치하는 일은 신이 직접 감독하여 별도로 제작하였는데, 공장(工匠)과 역군(役軍) 등의 요포로 쌀 57섬과 무명 10동(同) 반을 들여 겨우 완료하였습니다. 대체로 본영의 전선은 평상시에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에 정박해있는데, 물이 빠질 때면 선체가 큰 전선을 강가에 매어두고 있으며 전선을 숨겨둘 장소가 별달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봄과 가을에 수영(水營) 소재지에 사는 약간의 군병과 백성으로 으레 포구를 파내게 하였는데, 한 달 안에 전선이 물에 떠 있는 시기는 적고 매어 두는 시기가 많습니다. 선박 위에 설치할 방패(防牌)와 각종 기구들을 모두 옛 선박의 제도에 따라 제작하면 체제가 무겁고 크므로, 잘못되어 바람에 요동칠 경우에는 반드시 손상되어 파괴될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두께를 참작하여, 선박 위에 설치할 방패는 걸어둘 수도 있고 뉘여 놓을 수도 있게 별도로 제작해서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기타 회부(會付)한 병선들도 신이 개삭(改槊)하였을지라도 삼판(杉板)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므로, 해당 병선 3척을 모두 전선과 함께 일시에 삼판을 개조하여 4척의 선박은 공장들이 이미 완성하였습니다. 본영의 회부한 전선과 병선 등 각종 선박 15척 안에서 2척은 전(前) 경기수사 신경진(申景珍)이 새로 제작하였고, 그 나머지 13척은 개삭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신이 부임한 뒤에 새로 제작하기도 하고 나무를 덧대 개삭하기도 하여 모두 공사를 마쳤습니다. 본영의 회부한 군량미(軍糧米)는 원래 수량 900섬 안에서 연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413섬은 군병 등에게 급료로 지급하고 회감(會減)하였고, 현재 남아있는 군량미는 526섬뿐이어서, 잘못되어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군병에게 급료를 지급할 때 부족할 우려가 있을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부임한 초기부터 오늘까지 쌀과 베, 소금과 장(醬) 등의 물품을 애써 마련하여 모으고 군량미 400섬을 별도로 갖추어 대변고(待變庫)에 들여놓았으니, 호조에서 회록(會錄)하여 시행할 것을 아울러 급히 보고합니다.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6월 19일에 봉해서 올림.▶ 어휘 해설 ◀❶ 염장(鹽場) :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여 논처럼 만든 곳으로, 염전(鹽田)이라고도 하였다. 바닷물을 여기에 모아서 막아 놓고, 햇볕에 수분을 증발시켜서 소금을 얻었다.❷ 판옥(板屋) : 전선의 지붕을 널빤지로 덮은 것을 가리킨다.❸ 삼판(杉板) : 선박의 좌우 뱃전에 붙이는 널빤지를 가리킨다. 承政院開拆."臣上年六月到任, 本營戰·兵船、伺候船等乙, 一一點檢, 則年久腐朽者有之, 故戰船二隻、兵船、伺候船段, 卽爲撤罷鱗次改造, 緣由已爲馳啓爲白有在果. 因備邊司覆啓行移, 一依兩南船制, 新造戰船, 以爲畿輔戰船之標的事是白乎矣. 上年秋冬, 以勅使支待, 力未遑於造船, 解氷卽時, 今正月二十日, 鳩聚料布, 別定軍官, 安眠串下送, '募得善手船匠、耳匠及雇立船材曳下軍人等, 使之刻期督役, 畢造回泊.'亦分付爲白有如乎. 安眠串居民, 在前段, 造船傭役資生爲白如可, 今春始叱, 串內設鹽場乙仍于, 盡爲投屬鹽役是白乎等以, 募軍難得. 遠地之役, 非臣親自監督, 未能及時造作, 第三朔, 僅以畢造回泊爲白有去乙. 船上板屋粧修事段, 臣親自監董, 別樣制作, 而工匠、役軍等料布段, 米五十七石、木十同半以, 僅僅完了爲白有齊. 大槪本營戰船, 常時留泊於潮汐出入之處, 水落之時, 則體大戰船, 掛置江邊, 而他無藏船之所. 不得已春秋若干營下軍民, 例爲堀浦爲白乎矣, 一朔之內, 浮水之時少, 掛置之日多. 船上防牌、各樣諸具乙, 一依古船制造作, 則體制重大, 脫有風擺, 必致傷破落是白乎去. 其間參酌厚薄, 船上防牌乙, 或掛或臥, 以爲別制避風之地爲白有齊. 其他會付兵船等段置, 臣已爲改槊爲白乎喩良置, 杉板不爲牢固是白乎等以, 同兵船三隻乙, 竝只戰船一時改造杉板, 四隻之船, 工已斷手爲白有在果. 本營會付戰兵各樣船十五隻內二隻, 前水使申景珍新造, 其餘十三隻段, 改槊當次乙仍于, 臣到任之後, 或新造, 或添木改槊, 竝爲畢役爲白有齊. 本營會付軍糧米, 元數九百石內, 年前兵亂時, 四百十三石段, 軍兵等放料, 已爲會減爲白有遣, 時留在軍糧, 只五百二十六石是白去等, 脫有緩急, 軍兵放料之際, 恐有缺乏之患. 臣自到任之初至于今日, 斗米、尺布、鹽醢等物乙, 拮据收合, 別備軍糧米四百石, 入置待變庫爲白有置, 令該曹會錄施行事, 幷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云云." 崇德三年六月十九日封. '005 나덕헌의 장계' 참조. '010 비변사의 관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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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 渾然天資 精毅簡讜 漉落器宇 允矣 風光月霽之精神 明徹胸襟 依然海闊 天高之氣像 窮尋遺經 實踐力行 施諸事業 盡夫蠶絲牛毛之義 發爲文章 燦然84)布帛菽粟之精 淵源眞的上泝朱栗 造詣極致 下啓後學孔夫子誕降二千四百八十二年辛未 濟州高東是 謹書 "宛成"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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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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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文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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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後堂記 處常而不失度 易 遇變而不易操 難 難易俱失者 必小人也 難易俱得者 必君子人也 是故 得於易而失其難者 有矣 夫未有得其難而失乎易者也 歷觀今古鄕黨善士邦國大夫 能循塗轍於平日 蔚然聞達乎世者 何限及乎凍餒切骨禍灾剝膚 厥 或異說 熾而易天下 能不隕穫 驚惑以喪其守者 鮮焉 豈不誠難矣乎 夫夏令方殷 萬木敷葉 群靑衆綠一色 可玩 少焉 霜威疊降 朔風怒號 向之靑綠 可玩者 索 然無復生意 只見松柯柏葉蒼蒼特挺於大冬中 君子之遇燮不燮 盖似之旨哉 吾夫子歲寒後凋之歎也 有志哉 精毅李公寒後堂之命名也 噫 公亦豈易得哉 啜水讀書 書聲淸越 四隣積粟如山 絶不許家人借貸 卓乎其安貧之固 邪詖盈世 百岐眩人 七耋負笈 就正有所至 忘年數之不足 確乎 其信道之篤 第今天地閉塞 吾道之禍 有不可測者 公能因其所己能 而推用於異日則 熊厚魚薄 毛輕山重 必有所宿筭而前定者矣 誠有然者 奚但命堂之稱志而已哉 直謂人中之松柏 殆無愧矣 吾將攀翠柯而趨下風 撫蒼髥而庇餘蔭 盤桓徜徉而卒歲也 幸蒙不以凡木而遠之 則與有榮焉 大矣屠維協洽陽下旬 扶寧金澤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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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泗言仁錄序 夫仁 天地之道而人心之德也 人莫不有是德 苟非生知安行之資 必待乎講而後明 求而後得 若吾夫子以天縱之聖 猶曰 聖與仁 吾不能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不厭不倦 朱先生以爲非己有之則 不能 以學者言之則 必先用不厭之功 然後有得於己 而不厭不倦 庶幾乎聖人爾 程先生嘗云 當合孔孟言仁處 大槩硏究之二三歲 得之 未晩 南軒之有洙泗言仁錄 盖從此訓也 同門李公 亦有志於求仁 集合四子言仁處 爲一冊名則 因張氏之舊 或曰 聖賢言仁處 固是仁 而其餘許多說話 亦皆是仁矣 今此錄 不其近於擧一而廢百耶曰 子之言 誠然 然學者欲知仁體用之端的 及似工夫之要切 泛及餘說 不若專力體究於直指正言者之易爲有得也 昔寒泉精舍 編近思錄而曰 窮鄕晩進 誠得此而玩心焉 亦足以得其門而入矣 如此然後 求諸四君子之全書 以致其博 而反諸約焉則 其宗廟之美 百官之富 庶乎其有以盡得之 若憚其煩勞 安其簡便 以爲取足於此而可則 非今日所以纂集此書之意也 余於此編 亦曰 求仁止於斯而已 而不更致博於聖賢全書則 誠有擧一廢百之譏 而非集言者之本意也 又念求仁之要 敬是也 心或放而敬則存 私或起而敬則消 理或昧而敬則明 無一息之間斷 而心常靈昭 無一毫之虧欠 而理常周徹 無一點之蔽累 而査滓渾化則 是敬功之純熟 而與仁無間然後 可復本心之德 而不負天地付畀之重 爾李公名驥魯齋號精毅云歲重光大淵上章攝提格月仲旬 全州李喜璡 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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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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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0월 10일 관문(關文) 崇德二年十月初十日 關文 028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윤이지(尹履之)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칙사(勅使)가 나올 때 관무재(觀武才)에 사용할 물품 등을 준비해두었다가 수송할 것.정축년(1637, 인조 15) 10월 13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전에 명(明)나라 칙사(勅使)가 나올 때 관무재(觀武才)에 사용하는 사후(射帿), 소혁(小革), 방석(方席), 고도리(古道里), 숙마(熟麻), 세겹바[三甲所] 4거리(巨里) 등은 으레 명나라 칙사가 나올 때부터 수영(水營)에서 준비하였다. 이번에 칙사가 나올 때에도 준비하여 대령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시 신칙하니, 시기가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게 되면 오목참(梧木站)으로 미리 수송해서 바치되 사후군관(射帿軍官)도 정해서 보내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10월 10일. 丁丑十月十三日到付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在前天使時, 觀武才所用射帿、小革、方席、古道里、熟麻、三甲所四巨里等, 例自天使時, 水營措備爲如乎. 今番勅使時, 想已備待是在果, 更良申飭爲去乎, 日期聞見, 梧木站以, 前期輸納爲乎矣, 射帿軍官, 亦爲定送向事. 合行云云."崇德二年十月初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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