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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六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2년(광무 6)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광무 6)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5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6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7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6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 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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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七年癸卯七月二日 前明文右明文事有緊用處伏在扶安晴湖鷄爲坪收稅畓伍石拾捌斗落只所耕 結 庫叱價折錢文白銅貨㱏萬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十一丈永永放賣於右前爲去乎後若有異言以此文記憑考事畓主 韓參奉宅奴年奉[左寸]捧價後舊文出給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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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신오훈노(辛五勳奴) 공수(孔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六年壬寅九月二十八日 辛五勳奴 孔秀 大韓光武六年壬寅九月二十八日 辛五勳奴 孔秀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2.5*2.5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2년 9월 28일에 신오훈노(辛五勳奴) 공수(孔秀)가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2년 9월 28일에 신오훈노(辛五勳奴) 공수(孔秀)가 논을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오훈노 공수는 이번에 큰 흉년을 당하여 가을 일을 할 길이 없어 상동면 쌍구제(雙口堤) 아래에 있는 9마지기를 화곡(禾穀)과 함께 50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다른 문서와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서로 다른 단서가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공수와 증인(證人)으로 김성언(金成彦)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집필(執筆) 최익서(崔益瑞)는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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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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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韓光武六年壬寅九月二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歉荒年秋事無路故上東雙口堤下玖斗落所耕二十六負四束㐣幷禾穀價折錢文伍佰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他文記幷付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端則以此憑考事畓主 辛五勳奴孔秀[着名]證人 金成彦[着名]筆執 崔益瑞[喪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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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六年庚寅二月二十八日前標事右標事段要用所致擧石里下坪於字畓庫三斗落文卷右前典當爲去乎以市利例戔十五兩得用限六月晦內成標事標主喪人 李周鳳[喪不着]證人 幼學 姜仁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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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김성숙(金成叔)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未三月卄二日 金成叔 癸未三月卄二日 1883 金成叔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3월 22일에 유학(幼學) 김성숙(金成叔)이 작성한 수표(手標). 1883년(고종 20) 3월 22일에 유학(幼學) 김성숙(金成叔)이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김성숙은 형의 빚 때문에 여러 차례 관아에서 추변(推卞)을 한 끝에 자신이 반드시 형의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김성숙은 빚 30냥을 덜어주는 조건으로 조(租) 2석(石)을 10월 그믐까지 갚도록 약속하고 이 수표를 채권자에게 작성하여 주었다. 그러나 만약 빚을 갚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면 돈 30냥과 함께 본전과 이자를 모두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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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이경백(李京伯)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寅正月二十九日 李京伯 壬寅正月二十九日 1902 李京伯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2년 1월 29일에 이경백(李京伯)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밭을 담보로 하여 금전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 1902년 1월 29일에 이경백(李京伯)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밭을 담보로 하여 금전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이경백은 자식의 혼인 문제로 긴급하게 돈을 쓸 일이 있어서 돈지리(頓池里) 전평(前坪)에 있는 보리밭(麥田) 6마지기와 하곡(夏穀)을 담보로 하여 아무개에게 5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이다. 매달 이자(利子)로 6푼(分)을 주고, 빚은 오는 4월 그믐 안에 갚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기한이 지나도 빚을 갚지 않으면 이 문서를 증거로 하라고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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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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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北道 古阜郡宮洞面 靑良里 洞第 統苐戶籍表第 號 註明戶主 宋馹淳 年四十五 本礪山 職幼學 業農 前居地 移居月日父 學生 鎭龜生父祖 學生 培曾祖 學生 奎燦外祖 學生 黃永煥 本紆州同居親屬妻 丹陽禹氏歲四十六子 幼學榜玉年二十七婦 婦興城張氏歲二十六寄口 : 男 口 女 口雇傭 : 男 一口 女 口現存人口 : 男 二口 女 二口 共合 : 五口宅家 : 己有 瓦 間 草 六間 借有 瓦 間 草 間 共合 : 間光武六年二月 日郡守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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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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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8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二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二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898년(광무 2)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898년(광무 2)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4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1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3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2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4구로 기재되어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칸에 초가(草家) 5간(五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5칸임을 뜻한다. 1898년에 작성된 호적표에는 송일순 처의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있다.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송일순보다 1살 많다. 그러나 호적표에는 3살 적게 적혀있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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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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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정천석(鄭千石) 자매명문(自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자매명문 경제-매매/교역-자매명문 光緖三年丁丑三月初四日 鄭千石 舊上殿宅 光緖三年丁丑三月初四日 鄭千石 전북 부안군 [左章]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4일에 정천석(鄭千石)이 구상전댁(舊上典宅)에게 자신의 식구(食口)를 노비로 팔면서 작성한 자매명문(自賣明文). 1877년(고종 14) 3월 4일에 정천석(鄭千石)이 구상전댁(舊上典宅)에게 자신의 식구(食口)를 노비로 팔면서 작성한 자매명문(自賣明文)이다. 이 명문을 작성한 정천석은 본시 옛 상전댁 노였는데 이번에 큰 흉년을 당하여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정천석 본인(36세)을 포함하여, 처 덕율(德栗, 30세), 아들 순안(順安, 4세) 등 3명의 식구를 옛 상전댁에 10냥을 받고 영구히 팔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정천석과 처 문덕율(文德栗), 증인(證人)으로 유학 황은필(黃殷弼)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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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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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三年丁丑三月初四日舊上殿宅前明文右明文事段矣身素是右宅奴屬矣當此大荒之年至於餓死之境故矣身年三十六婦德栗年三十子順安年四合三口價折錢文拾兩依數捧上是遣右宅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以此憑考事明文主 鄭千石[着名]婦 文德栗[左章]證人 幼學 黃殷弼[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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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년 채생원노(蔡生員奴) 춘석(春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拾捌年戊戌七月初八日 李汝宗 蔡生員奴 春石 道光拾捌年戊戌七月初八日 李汝宗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8년(헌종 4) 7월 8일에 이여종(李汝宗)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채생원댁노(蔡生員奴) 춘석(春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8년(헌종 4) 7월 8일에 이여종(李汝宗)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채생원댁노(蔡生員奴) 춘석(春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여종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돈지리의 전평(前坪)에 있는 굴내평(屈乃坪)의 중자답(中字畓) 11마지기와 서변(西邊)의 논 4마지기를 춘석에게 62냥에 팔았다. 중자답은 부수(負數)로는 21부가 되는 곳이며, 서변의 논은 4부 2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본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이여종과 증인(證人)으로 남순이(南順伊), 필집(筆執)으로 고몽열(高夢說)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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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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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癸未三月卄二日 右人前手標右標事果以舍兄之債事屢次官庭推卞而至今必報乃已故右錢三十兩减條而以租二石今十月晦內代捧之意如是成標如有他端則右錢三十兩並本利推給事標主 幼學 金成叔[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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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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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詩(七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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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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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石灘柳上舍【東植】江亭韻 主人底意此亭起 純素門欄無綠紅 觸石灘鳴朝暮雨 跨郊㩜受去來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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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和金文玉【命楫】 金乃源【璐彦】 春光供逸興 殆若躡蓬岡 樽酒簫歌發 遨遊白日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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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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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往高敞與內從宋永新【有昔】 見松相和 枝枝樸地摠兒松 孤節亭亭獨秀冬 花草莫誇方自樂 雪中還笑片時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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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輓盧生汝伯 衰年同病也相憐 豈料雲鄕忽上仙 辭氣諄諄門會夕 心交澹澹主賓筵 守成庭訓將垂後 樹德家風盖自先 肖胤賢咸能繼述 玉溪流韻至今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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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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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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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輓族弟【濟祿】 年皆七耋兩衰翁 {焂/心}忽存亡一夢中 宗會莫論先世誼 鄕閭誰起上仁風 同師同業情懷別 曰兄曰弟炁味通 子克孝思孫雋異 家聲不墜儘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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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73년 백민징(白敏徵) 교지(敎旨)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白敏徵 英祖 서울 종로구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73년(영조 49)에 국왕이 백민징(白敏徵)을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爲副護軍)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 1773년(영조 49) 9월에 국왕이 백민징(白敏徵)을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爲副護軍)에 봉하며 내린 교지이다. 본 교지는 백민징(白敏徵)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무관 자품을 주고, 용양위부호군(龍驤爲副護軍)에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취자의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이며 관직인 용양위부호군(龍驤爲副護軍)은 종4품이다. 관품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표기하였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이 교지를 포함하여 백민징의 교지가 4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80세가 넘어 수직(壽職)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실직(實職)에 임명된 것은 아니다. 이 교지가 소장된 영암의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의 호구단자를 포함하여, 그의 아들 백창윤(白昌潤), 손자 백경옥(白慶玉), 증손 백사형(白思亨) 등의 호구단자 11점이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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