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戒家兒時澤 凡事必須豫則立 一心勤謹敬爲先黜今稽古從師訓 餘力看書不亦賢無恥縕袍簞食樂 欽斯子路學顔淵窮毋失義惟安分 福善丁寜降自天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記夢 偶入蓬萊坐翠微 千峯雨意洞雲飛山深啼鳥類多別 林密名花也不稀倘臨溪水因澆手 更向松風聊曬衣遍踏碧紅佳境入 忽然夢覺不知歸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稽古亭 此世何爲作此亭 黜今稽古學朱程多藏書卷承先業 正著衣冠踐舊形梧月照來胸自快 松風吹到耳能聽先師健筆名言在 諸子居常顧是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偶題 檀箕遺域曰吾生 生受萬端一不成値世猖狂無與語 逢人壓制莫堪聲如何我地山川變 依舊彼天日月明氣運循還應有待 誓毋失義保身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松溪亭次高德洪 【二首】 靑松遲鬱碧溪淸 先世亭名後益名山果待秋懸古木 洞雲留客掩歸程當年主翁遺謨密 此日令人感意生念祖肖孫修厥德 向君快許繼家聲亭曰松溪意味淸 至今不改舊時名山深見木知村落 洞僻緣流記路程景物遊人眉際入 詩香讀者口中生此閒自有無絃樂 水瑟風琴總好聲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13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十八年癸酉月日 白慶玉 行郡守 嘉慶十八年癸酉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13년(순조 13)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3호(三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13년(순조 13)에 4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3호(三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70세로, 처(妻) 장씨(張氏)(64)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32살 먹은 계집종이 하나 있었으며, 외거비 신량(申良)이 하나 있었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庚午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경오년, 즉 1810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祭文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敎旨白敏徵爲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者乾隆三十八年三月 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정읍(井邑) 여산송씨(礪山宋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전북 정읍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의 하나이다.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장사택일지에는 묏자리의 형국과 방향을 비롯해 취토(取土), 개토(開土), 혈심(穴深), 하관(下棺)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문서의 중간에 "坤化命 己亥"로 기록하고 있어서 망자(亡者)가 여자이며 기해생(己亥生)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들, 손자, 증손까지 기재된 것으로 미루어 망자가 고령에 죽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903년 조한국(趙漢國)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서(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癸卯春 趙漢國 癸卯春 趙漢國 전북 정읍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3년에 조한국(趙漢國)이 작성한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의 서(序). 1903년에 조한국(趙漢國)이 작성한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의 서문이다.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은 호남지방의 충절, 충효, 정절에 관한 기록을 모은 책자로, 9권 8책의 석인본이다. 편자는 미상이다. 권1에 충신몽포(忠臣蒙褒), 권2·3에 효자몽포(孝子蒙褒), 권4에 열녀몽포(烈女蒙褒), 권5에 충신건사(忠臣建祠), 권6∼8에 효자미몽, 권9에 열녀미몽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조한국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1880년(고종 17) 증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1895년 충주부관찰사를 거쳐 내무아문협판(內務衙門協辦)을 지내다가 1897년 광주부윤(廣州府尹), 1898년 개성부윤, 경상북도관찰사가 되었다. 1899년 궁내부특진관·궁내부협판을 거쳤다. 1900년 전라북도관찰사, 1904년 충청남도관찰사를 지냈다. 1904년 충청남도관찰사·의정부참찬·궁내부특진관, 1905년 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장례원소경(掌禮院少卿), 1906년 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査局長), 1907년 지돈녕사사(知敦寧司事)·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感時物慰內從宋永新【有昔】 枯木向陽更少年 枝枝葉葉樂良辰 人何無此還生理 欲問蒼天㝠黙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壯洞書社和金文玉【命楫】 簷前裊裊千絲柳 浦上童童一盖松 把酒臨風詩興足 無邊光景善形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跋 此桐塢公詩若文幾篇也甚寥寥無可以耀人耳目世或有以此不甚知重者似然而烏知又有不然者哉孔門弟子多至三千而游夏之徒特以文學著然至於德行顔閔冉牛仲弓乃能當之而彼以文學著者無與焉或又以其寡才而詘之此又不然顔氏之子何嘗寡才而無著至於游夏之徒亦未聞以其多著爲能事也後世之稍有名聲者動輒著書盈箱博聞强記叩其實則無有也向之稍有名聲者徒其博聞强記著書盈箱而云然者耳後世指儒爲純盜虛名者意雖不美而實則有所自招者也余觀桐塢公此詩若文不事雕鏤任眞自如必其無慕乎外不詭于俗者苟推斯志也不附勢利不畏强禦乃其常事而孔子所稱剛者之德殆將在是也彼能巧其言辭爛其文章誇多闘靡以求人悅者畢境時伏於人之術豈不使人可羞也公之曾孫時澤與余密剪去邊幅率直自待而文辯少遜然能窮而不搖迫而無窘好善如色惡惡如臭人以落落難合目之余猶及見其大人精毅亝公淳質無華望而知其爲君子人也吾以是而愈知公家傳之有素而厚重之有來也後之君子必有思余言之一日而知所貴之在此而不在彼也於其將發巾衍而付印竊附姓名於後以爲吾榮也是以題之庚午五月日潭陽田鎰中謹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跋 曾晳之棗屈到之芰皆其至微而本無足謂也爲其子者不自忍忘而人亦書之遂傳至今况其大者乎我曾考亦有詩與文若干篇但爲子孫巾衍之藏而已初無廣世意子孫亦以自守爲幸而不復以廣世爲計盖以爲不必也挽近人心愈下自謂爲先者非非理求闡卽卽空塡實爭相慕效者余見亦多矣其視古人不忘細微使人取書之事其爲貽先榮辱之判果何如也此宜發之巾衍以圖壽廣不可一向湥藏以待變滋爲諱之日也雖然曾屈二氏之能傳細微者以其後之賢也苟其後之無狀則若荀淑之素有賢名以彧之故朱子謂父兄之間必有一種議論遂加貶畧他尙何說也但知爲先而不知自修者亦可以鑑矣於其印役因述數語於卷後盖其自傷少失學老無聞無以稱揚先懿云庚午七月上浣曾孫時澤謹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跋 詩言志也而其來久矣然苟非發於性情而關於風敎其善惡足以勸懲人心而只是抽黃配白柔筋脆骨是尙焉則君子不屑焉商周之雅頌不爲不多矣夫子之所取纔三百十一濂閩之風雅殆充棟汗牛而金仁山之所錄纔二篇者職由此也水大者物畢浮膏沃者光益曄如桐塢李處士諱萬祿言志而辭達造精而功專殆若水之大膏益沃矣或直以賦物或因而寓情或出於宣暢鬱湮或發於贊頌德美或喩彼而省已或懷古而感今趣各不同而語亦隨異皆足以感發善心懲創頹俗矣公之曾孫時澤蒐輯金玉將附剞劂氏以余爲同門久要謁相役辭不獲摩挲之餘畧加刪正埴名篇末以遂驥蠅之願旃蒙大淵元月上元耽羅高東是謹書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6년 송관순(宋冠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宋冠淳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들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관순의 나이는 39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관순은 아내 단양우씨(丹陽禹氏)와 둘이 살았다. 단양우씨의 나이는 38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1구, 여 1구, 공합(共合) 2구로 기재되어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2간(二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관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2칸임을 뜻한다. 송관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906년과 1903년에 각각 작성된 총 2장이 전해지고 있다. 요 3년 사이에 송관순의 가족 구성원이나 주거 형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01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六年辛酉正月日 白慶玉 行郡守 嘉慶六年辛酉正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01년(순조 1)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호(一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01년(순조 1)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호(一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58세로, 처(妻) 장씨(張氏)(52)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19살 먹은 계집종이 하나 있었으며, 외거비 신량(申良)이 하나 있었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戊午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무오년, 즉 1798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見少娥移秧 彼美人兮二八女 何年誤嫁一田夫 嗟余衰暮垂霜髮 惜汝糞泥汚雪膚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