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大韓隆熙三年己酉正月十三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所耕食是如可以要用所致伏在古阜巨麻面林方里前坪嘯字畓七斗落只所耕二十九負四束㐣價折錢文貳佰貳拾兩依數捧上是遣幷新舊文三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參奉 梁啓光[印]證人 幼學 劉良知[着名]證筆 幼學 金敬淑[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崔永心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7년(고종 4) 정월 초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서평(西坪)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7년(고종 4) 정월 초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서평(西坪)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논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내자답(乃字畓) 9두락, 부수(負數)로는 29부 2속인 곳으로 매매가격은 120냥이었다. 구문기는 다른 논문서에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만 매입자인 최영심에게 건네 주었다.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인 신관옥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김치화(金治化)가 문서를 작성하고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을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최영심은 같은 해 1867년 10월 10일에 상동면(上東面) 궁을리(弓乙里)에 있는 논 7두락을 70냥에 샀다.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참고. 최영심은 그 뒤 1890년 2월 17일에는 같은 지역에 있는 논 아홉 곳을 600냥을 받고 팔았다. "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참고. 최영심은 1890년 11월 초2일에는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동평(東坪) 통수동(通水洞)에 있는 의자답(衣字畓) 5두 5승락을 78냥에 팔았다. "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참고.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領受証扶安郡下西面老谷坪畓價四佰六[印][印]十円捧上[印]大正二年陰五月二十日捧主本群下西面衣服洞 鄭公仁[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武七年癸卯四月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以婚用處故伏在下西三賢洞前坪字畓六斗落只所耕拾柒負四束㐣價折錢文貳佰六十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四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陳濟澤證人 幼學 張乃成[着名]證人 幼學 洪石喬[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6년 김성운(金成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三月初八日 金成雲 光緖十二年丙戌三月初八日 金成雲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3월 8일에 김성운(金成雲)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3월 8일에 김성운(金成雲)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성운은 자신이 매득한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 앞들에 있는 부자답(扶字畓) 6마지기를 27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3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성운과 증인(證人)으로 하자중(河子中)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歲次己亥十一月十二日 前明文右明文事移畓次自己買得伏在蓮洞東坪滿字畓六斗落只所耕十八負㐣価折錢文參佰參什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一張半割舊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則以此文 憑考事此亦中去丙申年金汝中氏許買得新文遺失故未得出給事畓主 幼學 宋恒淳[着名]證人 幼學 金河舜[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병술년(丙戌年) 노(奴) 언금(言金) 패지(牌旨)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丙戌 畓主 鄭 丙戌 鄭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병술년(丙戌年)에 답(畓)의 주인 정씨(鄭氏)가 자신의 노(奴)의 언금(言金)에게 준 위임장 병술년(丙戌年) 3월에 주인 정씨(鄭氏)가 자신의 노(奴) 언금(言金)에게 준 위임장이다. 위임하는 사안은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우곡평(尤谷평)에 있는 답(畓) 3두락(斗落)의 매도건이었다. 답주(畓主) 정씨가 이 밭을 팔게 된 이유는 급히 돈이 필요해서였는데, 매매 희망 가격은 35냥이었다. 이 밭을 사기 원하는 사람에게 파는 문제를 언금에게 위임하였던 것이다. 한편 정씨는 이 밭의 매매를 위해, 이 밭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있었던 문서들도 함께 내주어야 했다. 그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은 중간에 분실하였기 때문인데, 문서에 보이는 "차역중 구문중간서실 고부득병급이(此亦中 旧文中間閪失 故不得幷給耳)"라는 부분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 가운데 "차역중"은 추가 사항이라는 뜻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7년 김은숙(金殷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三年丁亥三月初二日 金殷淑 光緖十三年丁亥三月初二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7년(고종 24) 3월 초2일에 김은숙(金殷淑)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7년(고종 24) 3월 초2일에 김은숙(金殷淑)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김은숙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가자답(佳字畓)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7부(負) 7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60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김은숙은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예전에 쓴 약속문서 1장 그리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김은숙과 증인(證人)으로는 유학 고수민(高壽敏)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3년 김성채(金成彩)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 金成彩 大正二年 전북 부안군 [印] 0.8*0.8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4월 20일에 김성채가(金成彩)가 토지를 매도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3년 4월 20일, 김성채(金成彩)가 전북 부안군(扶安郡) 서면(西面) 돈지리(頓池里) 들판에 있는 황자(荒字) 답(畓) 4738번 3두락(斗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계약서(賣買契約書)이다. 매매 대금은 80냥이었다. 위 논은 김성채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김성채는 위 논을 매도하면서 위 논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있었던 문서를 본 문서와 함께 주었다. 한편 문서 마지막에 나오는 "再郡廳連名簿金成彩名下로在하니 陰四月晦日內異動ᄒᆞ을 事"라는 표현은 현재 이 논이 군청의 명부에는 김성채(金成彩)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음력 4월 안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이다. 이 가운데 "재(再)"는 추가할 내용이라는 의미이다. 군청 장부에는 아직 김성채의 소유로 되어 있으니, 소유권자의 이름을 매수자인 이경백으로 바꾸라는 뜻인 듯하다. 김성채가 방매한 위의 논은 문서의 소장처로 미루어 볼 때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에서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右契約事ᄂᆞᆫ 當此窮節하야 本郡下西面頓池里坪荒字四七三八畓三斗落價折錢文捌拾兩依數捧上이고旧文一張과以新文一張으로右人前에永永放賣하거온日後若有支節이면以此文記憑考事大正二年陰四月二十日下西面頓池里三統三戶賣渡人 李京白[印]再郡廳連名簿金成彩名下로在하니陰四月晦日內異動ᄒᆞ을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10년 김성채(金成彩)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金成彩 金成彩 전북 부안군 1.0*1.0 1개(흑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0년(순종 4) 2월 10일에 김성채가 논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일본과의 합병이 이루어지기 얼마 전인 1910년 2월 10일, 김성채(金成彩)가 오래 동안 경작해 오던 자신의 논 2마지기를 매도 방매(放賣)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매수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조선시대, 혹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작성된 명문을 보면 매수자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예는 많았다. 그것은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매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었기 때문이다. 김성채가 매도하고자 했던 논은 전북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 앞 들판에 있던 것이었다. 문서를 보면 4738번(畓)의 황자(荒字)라고 나오는데, 이러한 표기 방식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새로운 지번(地番)이 만들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매매 금액은 60냥이었다. 한편 김성채는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황자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만들어졌던 문서들도 함께 매수자에게 주어야 했다. 그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 옛 문서를 중간에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구문기중간서실(旧文記中間閪失)"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와 관련한 내용이다. 위의 논을 매입한 곳은 문서의 소장처로 미루어 볼 때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 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2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甲戌十月二十日 權秉澤 李 生員 甲戌十月二十日 權秉澤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10월 20일에 권병택(權秉澤)이 내년 10월까지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생원(李生員)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 1874년(고종 11) 10월 20일에 권병택(權秉澤)이 내년 10월까지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생원(李生員)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이다. 권병택은 부모의 묘를 대방촌(大方村)에 있는 이생원의 선산(先山)에 옮겨 썼다. 당초 입장(入葬)할 때에도 나중에 이장하려고 했지만 이씨측 집사들이 쫓아와 남의 선산에 쓴 무덤을 파내가라고 독촉하자 금년 10월에 이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수기를 작성하여 이씨측에 주었다. 이것이 금년 3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10월이 되었지만 권병택은 산을 구하지 못했다면서 이장을 하지 않았다. 이씨측이 묘를 이장해달라고 독촉하자 권병택은 내년 10월까지는 꼭 이장하겠다고 약속하는 수기(手記)를 다시 작성하여 이씨측에 넘겨 주었다. 권병택이 3월에 작성한 수기는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이다. 위에서 이생원의 선산이 있는 것으로 기재된 대방촌은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에 있던 마을이다. 원래 이생원이 속한 전주이씨 일족은 오랫동안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살았지만, 그보다 훨씬 선대에는 경상도 함양 대방촌에서 오랫동안 거주했었다. 이 문서에서 이생원으로 나오는 인물은 위의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에 따르면 이규현(李奎炫)으로 나온다. 이규현은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따르면, 1849년(헌종 15)에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進士)였다. 생원을 진사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합격 당시 거주지가 연안(延安)으로 되어 있지만, 수기가 작성되었을 무렵에는 부안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갑술년으로만 나오지만, 이생원의 사마시 합격년도와 관련문서를 통하여 갑술년을 1874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2년 김봉준(金奉俊) 방매(放賣)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金奉俊 金奉俊 전북 부안군 [印] 3개 1.40*1.4 2개(적색, 정방형),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력 7월 6일에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사는 김봉준(金奉俊)이 상동면의 복성리와 신후리(新后里)의 밭과 산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음력 7월 6일에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사는 김봉준(金奉俊)이 상동면의 복성리와 신후리(新后里)의 밭과 산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일제 강점기여서 작성연도를 "大正元年陰七月六日"처럼 일본 연호를 사용하여 적고 있고, 이장(里長)이 거래에 참여하여 날인하고 있는 점도 이전의 명문과는 다르다. 이 명문에도 매입자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문서의 소장처인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 문중으로 추정된다. 김봉준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복성리 후평(後坪)의 내자전(內字田) 4두락과 해당 구문서 2장, 같은 면 신후리의 복자상전(服字相田) 3두락과 해당 구문서 1장, 같은 면 복성리(卜星里) 동록(東麓)의 산판(山坂) 1필 50동락과 해당 구문서 2장, 같은 곳의 산판 1필 30동락과 해당 구문서 1장과 배달증명(配達證明) 1장 및 도본(圖本) 2장 등 모두 9장의 문기와 신문기 1장을 120원에 팔았다. 보증인으로는 김노섭(金老爕)이 참여하여 날인하였고, 이장(里長) 신순석(辛淳錫)도 거래에 입회하여 날인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786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五十一年丙午正月日 白慶玉 行郡守 乾隆五十一年丙午正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86년(정조 10)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長田里) 2통 1호에 거주하는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 1786년(정조 10)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2통 1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43세로, 어머니 김씨(金氏)(68), 처(妻) 장씨(張氏)(37)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은 당시 2통의 통수(統首)이기도 하였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41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庚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경자년, 즉 1780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765년 백민징(白敏徵)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三十年乙酉月日 白敏徵 行郡守 乾隆三十年乙酉月日 白敏徵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65년(영조 41)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4호(四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민징(白敏徵)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765년(영조 41)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4호(四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민징(白敏徵)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장전리는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민징은 첩(妾) 최씨(崔氏)와 아들 백창인(白昌仁)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백민징은 76세였고, 첩은 58세로 21살의 차이가 나며, 아들은 48세였으니 첩과는 10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마 본처가 죽은 뒤에 첩을 데려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민징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최씨의 낭주(朗州)였다. 백민징의 부는 백신헌(白信憲), 조부는 백상원(白尙源), 증조부는 어모장군행용양위부▣▣(禦侮將軍行龍驤爲副▣▣) 백시남(白時南)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은 조선 시대 무신 정3품 당하관의 품계명으로 당시 무신 당하관으로서는 최고의 품계였다. 이에 문신 당하관의 최고 품계인 통훈대부(通訓大夫)와 더불어 계궁(階窮)으로도 표현되었다. 외조부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김경추(金擎錘)로 김해(金海)가 본관이다. 이 호구단자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호구의 식솔보다 많은 노비의 명단이다. 문서의 반절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데리고 있던 노비는 이미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노비들이다. 사실상 데리고 있는 노비는 한 명도 없는 셈이다. 10여명이 되는 도망노비들은 옥천, 해남, 무안, 목포, 고부 등지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노(奴)와 양처(良妻) 사이의 소생들로, 당시 양반들이 양처와의 혼인을 통해 노비들을 세습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壬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임자년, 즉 1762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호구단자를 보면, 백민징의 아들 백창윤, 손자 백경옥, 증손 백사형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9세기 후반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이시백(李時白) 산도(山圖)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19세기 후반 전북 부안군 [官印] 3개 6.5*6.5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후록(後麓)에 있는 이시백(李時白)의 선산(先山) 산도(山圖) 19세기 후반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후록(後麓)에 있는 이시백(李時白)의 선산(先山)에 묻혀 있는 선조들의 묏자리와 최창규(崔昌奎)의 선조들의 묏자리를 표시한 산도(山圖)이다. 당시 이시백이 속한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과 그 선산에 묘를 쓴 최창규의 문중과의 사이에 산송(山訟)이 일어났다. 산도에 적혀 있는 기록에 따르면 10월 초6일에 이시백의 5촌숙(寸叔)이 이곳에 입장(入葬)하였을 때, 최씨측은 이를 투장(偸葬)이라고 하였고, 이씨측은 백주(白晝)에 떳떳하게 입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같은 달 초9일에 이시백의 조부를 이곳 선산에 입장(入葬)하였는데, 최씨측은 이를 또 투장(偸葬)이라고 하였고, 이씨측은 백주(白晝)에 떳떳하게 입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최창규의 7대 조부모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75보 떨어진 곳에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시백이 새로 무덤을 썼다. 그리고 이시백이 새로 무덤을 쓴 곳에서 그의 증조모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는 불과 20보 반보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전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도에는 수령의 제사(題辭)도 적혀 있는데, 즉시 고하여 입장하고 만약 다시 소요를 일으키면 잡아들여 엄히 형벌을 가하라는 내용이 19일자로 적혀 있다.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지 않아서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수령은 소를 제기한 이시백측의 입장에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고문서가 수백 점 전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소장 문서의 압도적인 다수는 명문들로 약 5백여 점의 문서가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7년 이상필 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十一年丁未三月初六日 李相弼 裵閏國, 光武十一年丁未三月初六日 전북 부안군 [印]3개, [着名] 2개 2.0*2.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3월 초6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3월 초6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개자답(盖字畓) 9두락지(斗落只) 결수(結數)로는 21부(負) 7속(束)인 곳과 백자답(白字畓) 15두락지 결수로는 35부 2속인 곳이다. 이와 함께 백자답(白字畓) 6두락지 결수로는 10부 2속인 곳과 수자답(樹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23부 9속인 곳이다. 또 명자답(鳴字畓) 9두락지 결수로는 17부 7속인 곳과 명자답(鳴字畓) 18두락지 결수로는 40부인 곳이다. 마지막으로 봉자답(鳳字畓) 10두락지 결수로는 23부 9속인 곳이다. 네 곳의 토지는 모두 80두락지로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5950냥이다. 묘라리는 오늘날의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매매 명문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면적을 표기하는 방법은 조선 시대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필은 답안(畓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 배윤국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경평동(京平洞) 이상필과 매수인 배윤국, 임은숙(任殷叔), 집필(執筆) 오양숙(吳良叔), 증인(證人)은 임도형(任道亨)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7년 이상필 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一年丁未四月初八日 李相弼 裵閏國 大韓光武十一年丁未四月初八日 전북 부안군 [印]3개, [着名] 2개 2.0*2.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4월 초8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4월 초8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개자답(盖字畓) 15두락지(斗落只) 결수(結數)로는 33부(卜) 6속(束)인 곳과 차자답(此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30부 1속인 곳이다. 이와 함께 동자답(同字畓) 18두락지 결수로는 41부 6속인 곳과 동자답(同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25부 7속인 곳이다. 네 곳의 토지는 모두 59두락지로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2805냥이다. 묘라리는 오늘날의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매매명문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면적을 표기하는 방법은 조선 시대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필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논문서와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음이라 하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1장을 매수인(買受人) 배윤국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경신문외평동(京新門外平洞) 전참봉(前叅奉) 이상필과 매수인 배윤국, 거매주(居賣主)는 유학(幼學) 임은숙(任殷叔), 집필(執筆) 유학 임도형(任道衡), 보증(保證)은 유학 강자선(姜自先)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7년 모경삼(牟京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一年丁未十二月十一日 牟京三 大韓光武十一年丁未十二月十一日 모경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12월 11일에 모경삼(牟京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12월 11일에 모경삼(牟京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모경삼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고부현 거마면 임방리 전평(前坪) 소자답(嘯字畓) 7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9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0냥이다. 임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모경삼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구문기(舊文記)를 합쳐 모두 2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모경삼과 증인(證人)으로는 이청여(李淸如)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大韓光武十一年丁未十二月十一日 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數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伏在巨麻面林方里前坪嘯字畓七斗落只所畊二十九負四束㐣価折錢文參百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幼學 牟京三[着名]證人 幼學 李淸如[着名]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