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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七月二日 韓參奉宅奴 年奉 光武七年癸卯七月二日 韓參奉宅奴 年奉 전북 부안군 [左寸] 1개 4.5*4.5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 7월 2일에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청호(晴湖)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 7월 2일에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청호(晴湖)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한참봉댁에서 급하게 돈을 쓸 일이 있어서 청호 계위평(鷄爲坪)에 있는 수세답(收稅畓) 5석(石) 18마지기를 백동(白銅) 화폐로 1만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11장 건네주며 나중에 서로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한참봉댁노 년봉 혼자만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의 맨 끝에는 돈을 받은 뒤에 구문기를 출급하겠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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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八年己亥十二月初九日 侄趙弼良 前明文右明文事段移徙次伏在一道之飛里前坪樓字畓拾斗落所耕二十三負四束㐣折価錢壹百二十兩依數捧上爲遣右侄前永永放賣而本文記段他文書並付故不得出給爲去乎日後若有異說是去等持此文記告官憑考事畓主 叔母 金氏[着名]訂爭 幼學 金聖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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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최석두(崔石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崔石斗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최석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최석두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 전평(前坪) 호자답(号字畓)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0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석두는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최석두와 증필(證茟)으로는 유학 임세(林世)가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은 오늘날 부안군 상서면 고잔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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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전명여(田明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三年甲戌 田明汝 同治十三年甲戌 田明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3월 26일 전명여(田明汝)가 대전(坮田)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874년(고종 11) 3월 26일, 전명여(田明汝)가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대전(坮田) 1두락(斗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전명여가 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급히 돈이 필요해서였기 때문이다. 매매가는 25냥이었다. 전명여는 분 매매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를 내 주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옛 문서가 다른 전답 문서들과 합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 타전답병부 고부득출급(舊文記他田畓並府故不得出給)"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한편 전명여의 신분은 양반이었다. 양반이 어떤 거래에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자기 집에서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는데, 전명여는 그렇지 않고 있다. 노복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본 문서는 양반 신분에 있는 자가 직접 매매현장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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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강주환(姜周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姜周煥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喪人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런데 거래 당시 전주 이영수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족인(族人) 이시용(李時容)이 전주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섰다. 이영수는 동생의 선인(船人) 염가(塩價) 문제에다 왕세(王稅) 납부를 거부한 죄목으로 옥에 갇혀 있었다. 관에서는 가장(家庄)과 전지(田地)를 방매하여 추급(推給)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기 때문에 이영수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기(手記)를 작성하여 전지를 파는데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시용이 이영수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서 문서에 서명하였다. 한편 증인으로 면임(面任) 김석원(金碩元)이, 필집(筆執)으로 동임(洞任) 조종규(趙宗奎)가 거래에 입회한 것도 이 거래가 세금을 추징하기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거래의 매입자는 이영수가 작성한 수기와 관제(官題)를 신문기와 함께 넘겨받았다. 만일 뒤에 이 거래를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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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姜周煥前明文右明文事李永壽以其弟之船人塩価事與 王稅拒納事卽當滯囚而李時容自 官捉治推給行分付至嚴而家庄田地乙放賣題下故依 官分付仙隱洞前坪玄字田五斗落所耕八卜八束庫乙幷禾穀価折文肆拾伍兩依數捧上是遣李永壽手記與官題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只以新文一丈成給日後若有紛紜之弊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田主 李永壽 滯囚捧標放賣族人李時容[着名]證面任 金碩元[着名]筆洞任 趙宗奎 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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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전준기(田凖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八年甲辰 畓主 田準淇 光武八年甲辰 田準淇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고종 41) 2월 7일 전준기田準淇)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명문 1904년(고종 41) 2월 7일에 전준기(田準淇)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주었던 매도 문서이다. 전준기가 팔기로 한 논은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 제방 아래에 있는 임자(臨字) 답(畓) 4두락(斗落)이었다. 매매 대금은 4백 50냥이었는데, 논의 크기를 감안할 때 매매 금액이 조금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논이 매우 기름진, 이른 바 옥답(沃畓)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매도자인 전준기가 매수자에게 줄 돈이 450냥이었는데, 매도자에게 남은 재산이 오직 이 임자 답 4두락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논의 값이 450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매도자로부터 더 이상 받아낼 방법이 없으니 이 논을 받는 것으로 그 돈을 다 상환한 셈으로 쳤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한편 전준기는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임자답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되었던 문기, 즉 구문기(舊文) 한 장도 추가로 주었다. 그것은 매수자의 소유권을 보다 분명히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877년 신욱수(辛郁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신문기로 추정된다. 전주이씨가에서 뒷날 해당 전답을 매입하면서 그 이전의 관련 문서들을 모두 건네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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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在戊戌九月二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數年收食是多可移居次不得已伏在蓮洞前坪滿字苧田參斗落只所耕四負㐣価折錢文二百貳拾兩依數捧用是遣倂旧文記三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則以此文記憑考事此亦中苧田主 趙白雲[着名]證人 梁得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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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신덕연(辛德淵)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五年己卯十二月十一日 辛德淵 光緖五年己卯十二月十一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9년(고종 16) 12월 11일에 신덕연(辛德淵)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9년(고종 16) 12월 11일에 신덕연(辛德淵)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덕연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봉황리 후평(後坪) 누자답(樓字畓) 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8부(負) 6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25냥이다. 봉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덕연은 구문기(舊文記)가 중간에 불에 타서 유실되었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신덕연과 정인(訂人)으로는 유학 전복여(田福汝)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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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정순익(鄭順翼)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己丑十二月十四日 鄭順翼 光緖十五年己丑十二月十四日 鄭順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6) 12월 14일에 정순익(鄭順翼)이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9년(고종 26) 12월 14일에 정순익(鄭順翼)이 남중작(南中作) 묘라평(竗羅坪)에 있는 식자전(食字田) 4두락과 개자전(盖字田) 4두락을 86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식자전은 부수(負數)로 9부가 되는 곳이며, 개자전은 10부가 되는 곳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밭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적고 있다. 밭이 있는 묘라평은 오늘날의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는 또 구문(舊文) 2장을 매입자에 넘겨주면서 만일 차후에 이 밭을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으로 박성로(朴成老)가 거래에 참여하여 정순익과 함께 문서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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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최병식(崔炳湜)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幼學 崔炳湜 幼學 崔炳湜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9년 8월 11일에 유학(幼學) 최병식(崔炳湜)이 부안군(扶安郡) 좌산면(左山面) 연동로(蓮洞路) 아래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9년 8월 11일에 유학(幼學) 최병식(崔炳湜)이 부안군(扶安郡) 좌산면(左山面) 연동로(蓮洞路) 아래에 있는 모시밭 1두락지를 4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최병식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모시밭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구문기는 다른 문서에 함께 붙어 있기 때문에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만을 매입자에게 넘겨 주었다. 뒷날 이 모시밭을 두고 문제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으로 최윤홍(崔鈗洪)이 방매자 최병식과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己亥"로만 나오지만, 같은 모시밭을 1909년에 거래한 문서, "1909년 김봉상(金奉相)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가 있어서 기해년을 1899년으로 추정하였다. 요컨대 이 문기는 1909년 문서의 구문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두 문서를 비교하면 10년 사이에 모시밭의 가격이 40냥에서 60냥으로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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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4년 송월주(宋月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二十四年甲辰六月十六日 宋月柱 道二十四年甲辰六月十六日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21) 6월 16일 송월주(宋月柱)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21) 6월 16일 송월주(宋月柱)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송월주는 세금이 많이 밀려서 물려받은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계자답(誡字畓) 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3부(負) 3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0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송월주는 구문기(舊文記) 2장(丈)과 화곡(禾穀) 그리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송월주와 증인(證人) 김상화(金尙華), 필(筆)은 이원전(金尙華)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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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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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同治八年己巳四月十七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故黃盖山定只堤下臨字墓畓四斗落只所耕十一負㐣折価錢文八十七兩依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門中相左之端則以此文記告 官卞考事畓主 幼學 朴受繪[着名]證筆 幼學 廉在祐[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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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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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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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9년 신보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五年己卯十二月日 辛普亨 光緖五年己卯十二月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9년(고종 16) 12월에 신보형(辛普亨)이 서도면(西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9년(고종 16) 12월에 신보형(辛普亨)이 서도면(西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보형은 자기가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본 문기에는 매도 사유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서도면 정지제 아래에 있는 임자답(臨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1부(卜) 1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5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보형는 구문기(舊文記) 2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보형과 증인(證人) 염치화(廉治化)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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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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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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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五年己卯十二月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西道定只堤下伏在臨字畓四斗落只所耕十一卜一束㐣価折偂文五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二丈新文一丈永永放賣爲乎乙事畓主 辛普亨[着名]證人 廉治化[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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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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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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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戊申至月十七日票右票事切有緊用處故伏在上東中里後坪太田一斗五升落所耕三負六束庫乙典執於右人前是遣錢文捌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則十月晦內竝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若過限則右㐣永永差持爲乎事票主 金成彦[着名]舊文記一張留置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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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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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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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무술년(戊戌年) 신사현(辛士賢)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戊戌 埋標主 辛士賢 戊戌 辛士賢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무술년(戊戌年) 12월 15일에 신사현(辛士賢)이 작성하여 준 약속문서 무술년(戊戌年) 12월 15일에 신사현(辛士賢)이 작성하여 준 약속문서이다.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 후록(后麓)에 있는 행취산(行翠山)의 일부분을 50냥을 받고 매도하기로 하였으며, 앞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본 거래의 증인(證人)은 김치도(金致道)였다. 한편 위 행취산에는 신사현의 종중 선산(先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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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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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戊戌十二月十五日右標事一道鳳凰里后麓行翠山所在埋標處折價錢文五拾兩許賣爲去乎以此然后俾無爻象爲乎乙事埋標主 辛士賢[着名]證人 金致道[着名]丙午四節田艮壬坑龍甲卯一節㣟咽起頭壬入首子哇午向乙得戊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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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00년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 답안(畓案) 고문서-치부기록류-전답안 경제-농/수산업-전답안 전북 김제군 [印] 1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 4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매입한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의 답안(畓案). 1900년 4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매입한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의 답안(畓案)이다. 묘라제는 오늘날의 전북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문서의 맨 끝에, "大韓光武四年庚子四月 日萬頃李福宗處給價壹萬{扌+八}千伍百兩買得畓案 舍音吳[印]"라고 적혀 있다. 즉 만경의 이복종(李福宗)에게서 18,500냥을 주고 매입하였고, 마름[舍音] 오(吳)가가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이 문서의 소장처가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주이씨가에서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름 오가는 이복종의 마름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만경 남일면 묘라제평에 산재한 논 가운데 어느 곳을 누가 얼마큼 소작하고 있는 지를 밝히고 있다. 예컨대 방자답(方字畓) 17두락(斗落)은 부수로는 38부(負) 1야미(夜味)인데 김운경(金雲卿)이 현재 소작인, 즉 시작(時作)이라고 적고 있다. 방자답은 7필지이며, 개자답(盖字畓) 10필지, 식자답(食字畓) 3필지, 차자답(此字畓) 5필지, 장자답(場字畓) 1필지, 화자답(化字畓) 1필지, 발자답(髮字畓) 1필지, 신자답(身字畓) 1필지, 만자답(萬字畓) 1필지, 목자답(木字畓) 1필지, 백자답(白字畓) 2필지, 재자답(在字畓) 1필지, 의자답(衣字畓) 1필지, 제자답(制字畓) 2필지, 수자답(樹字畓) 1필지, 명자답(鳴字畓) 4필지, 봉자답(鳳字畓) 3필지, 뢰자답(賴字畓) 1필지, 식자전(食字田) 3필지, 장자대전(場字垈田) 1필지 등이다. 묘라제평의 규모는 논 20석 9두, 밭 9두로, 합계 20석 18두이며, 결부(結負)로는 9결 92부 9속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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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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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2년 족제 은상(殷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元年壬戌四月初一日 金德豐 族弟 殷相 同治元年壬戌四月初一日 金德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2년(철종 13) 4월 1일에 족형(族兄) 김덕풍(金德豐)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족제(族弟) 김은상(金殷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2년(철종 13) 4월 1일에 족형(族兄) 김덕풍(金德豐)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족제(族弟) 김은상(金殷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덕풍은 급하게 돈을 사용할 곳이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상리 전평(前坪)에 있는 궐자답(闕字畓) 3마지기, 부수(負數)로 4부 4속이 되는 곳을 족제 은상에게 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3장과 입지(立旨)에 적혀 있는 다짐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분란의 폐단이 있으면 이 문서들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김덕풍과 증필(證筆)로 유학 임낙기(任洛基)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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