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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신욱수(辛郁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 畓主 幼學 辛郁首 光緖三年丁丑 辛郁首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신욱수가 팔고자 한 것은 정지제(定只堤) 남쪽 아래에 있는 임자(臨字) 답(畓)과 또 다른 임자(臨字) 답 4두락 등 2군데였다. 매매 가격은 200량. 결코 적은 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옥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본 톤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했던 문서들은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문서들이 다른 전답의 문서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인데, 문서 마지막에 "구문기 타답병부 고미위출급인(舊文記 他畓並付 故未爲出給印)"라고 적힌 부분이 바로 그 내용이다. 한편 신욱수는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를 유학(幼學)이라고 칭한 점을 알 수가 있다. 유학이란 관직이나 품계를 같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사실 양반이 논이나 밭의 거래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으레는 자신이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양반이 돈과 관련한 일에 관여한다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행은 갑오경장 이후가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는데, 신욱수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리인으로 내세울만한 노복이 없어서였는지 혹은 이제는 신분이라는 것이 무색한 것이 되어 비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4년 전준기(田凖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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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박균석(朴均碩) 부동산매도증서(不動産賣渡證書)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五年貳月拾參日 朴均碩 李承冕 大正五年貳月拾參日 朴均碩 전북 부안군 [印] 1개 1.0*1.0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6년 2월 13일에 박균석(朴均碩)이 부안군(扶安郡) 산내면(山內面)과 보안면(保安面) 등지에 있는 전답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면서 작성한 부동산매도증서(不動産賣渡證書). 1916년 2월 13일에 부안군(扶安郡) 상서면(上西面) 용서리(龍西里)에 사는 박균석(朴均碩)이 부안군(扶安郡) 산내면(山內面)과 보안면(保安面) 등지에 있는 전답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면서 작성한 부동산매도증서(不動産賣渡證書)이다. 1916년 박균석(朴均碩) 부동산매도증서(不動産賣渡證書) 1과 같은 내용의 문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1번 문서와는 달리 보증인이 빠져 있다는 것과, 증서의 본문에서 매도인이 사고시 손해배상을 보증인과 함께 연대 책임지겠다는 내용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아마 2번 문서를 작성한 다음에 수정하여 1번 문서를 새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거래 대상이 된 전답은 산내면 연동리의 망자답(莾字畓) 4두 5승락, 부수(負數)로 5부 6속이 되는 곳과, 같은 연동리의 추자전(抽字田) 7승락, 부수로 6속이 되는 곳과, 같은 곳의 추자전(抽字田) 6두락, 부수로 5부 7속이 되는 곳과, 같은 지역 추자전(抽字田) 2두 5승락, 부수로 5부 5속이 되는 곳과, 보안면 만화동(萬化洞)의 원자답(園字畓) 4두락, 부수로 9부 2속이 되는 곳이다. 거래 가격은 420원이었다. 거래시 매입자는 매도인에게 거래가격을 일시에 전부 지급하고, 매도인은 사고시에 이를 해결함은 물론 손해 배상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다. 보증인은 부안군 산내면 연동리에 사는 김준상(金俊相)으로, 매도인과 보증인이 함께 날인하였다. 논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만화동은 부안군 보안군 신복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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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在壬寅十二月初十日 前明文右明文事有要用故自己買得伏在左山面蓮洞東坪滿字畓陸斗落只所耕七負七束㐣価折錢文伍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幷旧文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此亦中日後若爲餘力則還退事畓主 幼學 金河舜[着名]證人 幼學 李永春[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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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조백운(趙白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戊戌九月二十七日 趙白雲 戊戌九月二十七日 趙白雲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8년 9월 27일에 조백운(趙白雲)이 부안군(扶安郡) 연동(蓮洞)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8년 9월 27일에 조백운(趙白雲)이 부안군(扶安郡) 연동(蓮洞) 전평(前坪)에 있는 만자저전(滿字苧田) 3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부수(負數)로 4부가 되는 이 모시밭을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세를 받으며 살았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하여 이 밭을 팔았다. 거래가격은 220냥이었다. 거래시 구문기 3장을 함께 건네주었으며, 차후에 문제가 생기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으로 양득수(梁得壽)가 거래에 참여하여 방매자 조백운과 함께 서명하였다. 모시밭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戊戌"로만 나오지만, 같은 모시밭이 거래되었던 이 문기의 구문기와 신문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무술년을 1898년으로 추정하였다. 해당 문서들은 "1862년 조육손(趙六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904년 염석수(廉錫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에 따르면, 연동의 이 모시밭은 1862년에는 50냥에 거래되었다가, 1898년에는 220냥으로, 1904년에는 270냥으로 각각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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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황찬성(黃贊成)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黃贊成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황찬성은 긴히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은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2두락지(斗落只) 밭이며 부수(負數)로는 4부(負) 1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7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황찬성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전답(田畓)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황찬성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는 유학(幼學) 조백현(曺伯賢)이 참여하였다. 조백현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이 문기에서는 매매 대상이 논인지 밭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 기재된 '傳來畓'을 통해 보면 논이 분명하지만, 마지막 부분 '田主 黃贊成'을 통해 보면 본 문기의 매매 대상은 밭이 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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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모인(某人)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2월에 누군가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12월에 누군가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에 있는 콩밭과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문서의 왼쪽이 대각선으로 잘렸기 때문에 방매자와 매입자의 성명은 물론 거래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추정컨대 문서에 적혀 있는 밭의 일부만을 팔기 때문에 구문기를 반으로 잘라서 매입자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 거래된 것으로 적혀 있는 밭은, 하자(荷字) 모시밭 2두 5승락과 직자(職字) 콩밭 4두락이다. 아마 이 중에서 콩밭만을 팔면서 이 문기를 반으로 나누어 매입자에게 주었을 것이다. 밭이 위치한 부안현 입하면은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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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食以多可不得已伏在立下面▣…[荷字苧田二斗五升落]職字太種田四斗落果苧▣…所耕六負九束㐣果▣…十同㐣価折錢文▣…捧乙以遣以新文▣…之放賣爲去▣…說卽以此▣…田主▣…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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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元年乙亥二月二十三日 右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黃盖山定只堤下臨字畓四斗落只所耕十一負㐣価折錢文玖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一張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所若有異說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廉錫龜[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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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박수회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八年己巳四月十七日 朴受繪 同治八年己巳四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9년(고종 6) 4월 17일 박수회(朴受繪)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9년(고종 6) 4월 17일 박수회(朴受繪)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박수회는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황개산 정지제 아래에 있는 임자묘답(臨字墓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1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7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수회는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문중(門中)에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박수회와 증필(證筆) 유학 염재우(廉在祐)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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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崔永心前明文右明事段傳來畓數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弓月里西坪乃字畓九斗落所耕宮結二十九負二束㐣價折錢文㱏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他畓倂付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辛寬玉[着名]證筆 金致化[着名](背面)弓月里竹薪後下星西九畓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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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李宗愿) 실기(實記)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李宗愿 李宗愿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이다. 그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종원의 자(字)는 사근(士謹)이며, 1712년(숙종 38년)에 태어나 1792년(정조 16년) 80세에 세상을 떠나 부안현 자미동(慈尾洞)에 묻혔다. 부인은 담양전씨(潭陽田氏)이다. 그는 겨우 10여 세 나이에 집안의 조부모와 부모를 2년에 걸쳐 연이어 돌아가시게 되는 아주 혹독하고 큰 화를 당하여 한 가문의 애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린아이 나이로써 화를 피하러 혹은 남원 외숙에게 가서 의지하거나 혹은 서울 일가들에게 가서 머물거나 하면서 시일을 보낸 지 10여 년 후에는 부안에 사는 이종사촌 성만통(成萬統)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33세에 비로소 혼인을 하고 돌아와 부안에 의탁하며 살게 되었다. 그는 자제(子弟)들을 가르치는데 애써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예를 부흥시켜 종가(宗家)를 위하고 별도로 조상의 제사를 위하는 터전을 두어서 이미 무너진 문벌(門閥)이 다시 창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의 효성과 우애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아주 순진한 어렸을 때이지만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였던 것이 평생토록 고통이 되어 매번 돌아가신 임계(壬癸)년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부모의 기일이 되면 문과 뜰 안팎으로 물을 뿌리고 쓸어내고 청소하며 일체 외부인이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제사에 쓰는 음식은 반드시 넉넉하게 하고 또한 지극히 정결스럽게 하였다. 저녁에는 엄숙하게 의관을 정돈하고 바르게 앉아 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도록 잠깐이라도 곁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가 제사 때에 이르면 슬피 부르짖으며 절도의 한계를 넘었다. 그의 나이 80에 가까이 되자 병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사에 빠진 일이 없었다. 그리고는 옛날 부모의 상(喪) 때 연이은 상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실패하였기 때문에 초종(初終) 제사에 한치의 비단도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오늘날 비단으로 짠 옷을 입고 스스로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면서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에게는 둘째와 셋째 동생이 함양(咸陽)에 살고 있었는데, 둘째 동생은 가난하며 자식이 없었고 셋째 동생은 일찍 사망하였고 3명의 자식은 모두 어렸다. 그가 중년에 모두를 데리고 와서 집과 밭을 사서 나누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 우애가 융성하고 돈독하였다. 고을 사람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며 물질로써 은혜를 베풀고 모자람이 없이 지극하여 인근 마을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흠모하였다. 그가 일찍이 바쁘게 피해 다닐 때 학문에 마음을 쏟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이제 그 어려운 때를 벗어나 많은 순수한 서책을 가지고 두문불출하고 정좌하며 깊이 빠져 반복하여 읽으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문장의 뜻이 막히면 그 뜻이 해석될 때까지 깊은 곳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해득하였다. 음양술수(陰陽術數)에 관한 서적도 또한 모두 통달하였는데, 특히 역서(易書)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에 ?험역방(驗易方)?이라는 책 2권을 후세에 남겼다. 그 사이에 또한 필적에 뜻을 두고 한 자 한 획을 반듯하게 써서 해정(楷正)의 주동자가 되었고 초서(草書)도 또한 이와같이 베껴 쓴 서편(書篇)이 매우 많아 후세 사람들의 모본(摹本)이 되었다. 그의 성품은 밖으로는 엄격하고 안으로는 관대하여 보통 사람이 처음 가까이할 때도 늠름하지만 무시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온화하여 춘풍에 따스한 기운이 도달하고 있어 사람들이 처음에는 두렵게 여기지만 나중에는 기뻐하였다. 그의 가정과 일의 성취에 대하여 말한다면 어려운 형편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학문에 대하여 말한다면 은덕(隱德)의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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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이주봉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가대(家垈)인 상서면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어자(於字) 초가 3칸과 모시밭 7 대락(隊落), 콩밭 1석 등을 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추기로 시중의 이자(利子) 예에 따라 7월 그믐 안에 빚을 갚을 시 집과 토지를 도로 물릴 수 있다고 하였으며 93냥 6전 속에 3냥 6전에는 이자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이 문서는 매매명문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상 가대와 밭을 전당 잡히고 돈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래 당시 가대 주인 이주봉은 상을 당하여 거래에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강영기(姜永氣)와 김기종(金基鐘)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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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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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三年丁丑三月二十八日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擧石里村前於字畓二斗落庫乙價折錢文三十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舊文二章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定事畓主 幼學 金道賢[着名]證筆 童蒙 崔元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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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午十月卄二日 權秉澤 李丈 壬午十月卄二日 1882 權秉澤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이다. 권병택은 자신의 친산(親山)이 이씨가의 선산에서 불과 100여보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묘를 파가라는 요구를 이씨가로부터 계속 받았다. 그러나 권병택은 산지가 매우 귀한 데다가 갑자기 이장(移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씨가에 통사정을 했다. 권병택은 다행히도 이씨가에서는 산을 구한 뒤에 이장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에 권병택은 이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여 이씨측에 주었다. 이 문서에 기재된 이장(李丈)은 곧 부안의 선은동에서 세거하였던 전주이씨문중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임오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관련문서를 통해 임오년을 1882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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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標右手標事段生之親山入於李丈先山百餘步之地耳李丈今此遠來雖爲督掘山地極貴猝難移葬故萬萬哀乞則李丈特垂慈悲之澤以求山後移緬之意許諾故可勝咸服玆成手標以納事手標主 權秉澤[着名]壬午十月卄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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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十一年壬申九月十八日 明文右明文事急有要用處買得伏在上東上里前坪珠字畓五斗落所耕九負五束庫果幷禾穀二石價折錢文壹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幷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以此文券卞正事畓主 幼學 辛玉年[喪不着]證人 幼學 ▣聖孝[着名](背面)上里金明汝畓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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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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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26년 서치록(徐致錄)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서치록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오랫동안 농사지으며 먹고 살던 동도면 선은동 전평(前坪)의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 부수(負數)로는 10복이 되는 곳을 46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다른 전답의 문서에 함께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자손 중 여러 말이 있으면 이 신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서치록과 증인(證人)으로 박호재(朴好才) 필집(筆執)으로 조종학(趙宗學)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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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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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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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六年丙申十二月十六日辛奴春伊前明文右明文事段矣宅緊有急用處自己買得畓伏在扶東一作玄字丁肆斗落只所耕拾負庫乙折價參拾五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旧文記一丈果牌子一丈並爲成文記爲去乎日後如有相左之端持此憑考事畓主 李生員宅奴分同[着名]證筆 趙亨益[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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