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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六年庚寅三月十七日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記得累年居生是多可要用所致伏在上西面擧石里於字草家四間果行廊二間果垈田二斗落果苧田九隊〖斗〗落果太種田拾捌斗落果綿田肆斗落果沃畓參斗落果紫場伍拾同處梨木一株柿木陸株所耕二負㐣價折錢文貳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舊文三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則以此文記憑考事家垈主 童蒙 李周鳳 喪不着證人 幼學 姜永氣[着名]證筆 幼學 李瑛儀[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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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六年庚寅二月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傳來畓累年捧稅是多可勢不得已伏在全羅道扶安上東面弓月里東西南坪叩馬堤下服字畓十二斗落果渠永一斗落果上畓三畝所耕三十負四束庫果服字八斗落所耕二十負四束庫果乃字十二斗落所耕三十五負五束庫果乃字畓九斗落所耕宮結二十九負二束庫果官字畓九斗落所耕二十四負六束庫果鳥字畓十六斗落所耕二十一卜一束庫果官字畓十二斗落所耕二十八負六束㐣価折錢文陸佰兩依數捧上是遣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告 官卞正事畓主扶安上東 崔永心[着名] 此亦中新文記一丈果旧文記八張出給事證人扶安 韓應化[着名]證筆扶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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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光武四年庚子十一月二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自己買得畓伏在雙塊堤下基畓芥字畓玖斗落所耕拾五負五束㐣価折錢文陸佰兩依數捧上是遺旧文記他文券倂付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以此文記以此憑考爲乎乙事畓主 辛士明[着名]證筆 李行辰[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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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四年庚子十二月初九日 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雙口堤下基畓芥字畓玖斗落所耕十五負五束庫乙価折錢文陸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持此文記憑考事畓主喪人 金元謙 喪不着訂人 南汝順[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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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一年甲申十月初四日 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自己買得伏在一道定只堤下坪畵字畓二十斗落只所耕五十二卜庫叱折価錢文四百五十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張[段他畓倂付不得出給以]新文記㱏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辛源瞻[着名]訂筆 朴公擧[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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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동중(洞中) 김순오(金順五) 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十月二十九日 金順五 光緖二年丙子十月二十九日 전북 부안군 [着名] 6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0월 29일 동중(洞中) 김순오(金順五)가 봉산(鳳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10월 29일 동중(洞中) 김순오(金順五)가 봉산(鳳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마을 공동 소유의 논이다. 마을 대표 김순오는 흉년이 들어 마을에 급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3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봉산(鳳山)에 있는 후평(後坪) 흥자답(興字畓) 7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1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52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김순오는 '구문기(舊文記)가 작성된 지 오래되어 찾을 수 없어서 줄 수 없다고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김순오와 강치현(姜治賢), 이취오(李聚五), 전운중(田云仲), 염석구(廉錫九), 채춘언(蔡春彦)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논은 마을의 공동 재산이므로 마을 사람 여러 명이 거래에 참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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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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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박균석(朴均碩) 영수증(領收證)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五年陰二月三日 朴均碩 李承冕 大正五年陰二月三日 朴均碩 전북 부안군 [印]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6년 2월 3일에 박균석(朴均碩)이 이승면(李承冕)으로부터 토지거래 대금 220원을 받고 써준 영수증(領收證). 1916년 2월 3일에 박균석(朴均碩)이 이승면(李承冕)으로부터 토지거래 대금 220원을 받고 써준 영수증(領收證).이다. 박균석은 이 해 2월 13일에 부안군(扶安郡) 산내면(山內面) 연동리(蓮洞里)와 보안면(保安面) 만화동(萬化洞)의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420원을 받고 팔기로 하는 내용의 매도계약서를 체결하였다. 아마 220원은 그 중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논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만화동은 부안군 보안군 신복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입자인 이승면은 이 문서의 소장처인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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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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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4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二年陰五月十九日 金化西 李承冕 大正二年陰五月十九日 金化西 전북 부안군 [印] 1개 1.2*1.2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음력 5월 1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승면(李承冕)에게 논값을 받았다고 써 준 영수증(領受証). 1913년 음력 5월 1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승면(李承冕)에게 논값을 받았다고 써 준 영수증(領受証) 영수증(領受証)이다.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사는 김화서가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정공인(鄭公仁)의 논값으로 50원(円)을 잘 받았다고 이승면에게 써 준 영수증이다. 김화서는 정공인에게 위임받아 일을 처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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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김규상(金珪相) 방매(放賣)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陰八月八日 金珪相 大正元年陰八月八日 전북 부안군 [印] 3개 1.5*1.5 1개(적색, 원형), 1.1*0.8 1개(적색, 타원형), 1.6*1.1 1개(적색, 타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력8월 8일에 김규상(金珪相)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益上里)에 있는 산판(山坂)을 팔면서 작성한 산지매매계약서(山地賣買契約書) 1912년 음력8월 8일에 김규상(金珪相)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益上里)에 있는 산판(山坂)을 팔면서 작성한 산지매매계약서(山地賣買契約書)이다. 김규상은 스스로 매입하여 가꾸어 온 시장(柴場)을 팔게 되었다. 시장(柴場)이란 땔감 채취를 위하여 가꾼 지정된 삼림 지역을 말한다. 매매 대상이 된 시장은 부안군 상동면 익상리 뒷쪽에 있는 산판 10동락(同落)이다. 매매 가격은 150냥이다. 익상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도인 김규상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부안군 상동면 익상리에 살고 있었다. 이 거래에는 매도인 참봉(參奉) 김규상과 보증인(保證人)으로는 호용신(扈用辰) 또한 마을 이장(里長) 심한근(沈漢根)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산판사표(山坂四標)를 살펴보면 동(東)쪽으로는 김원겸(金元兼)의 시장(柴場)있고, 서쪽으로는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 있다. 남(南)쪽은 김옥여(金玉汝)의 시장이 있고, 북(北)쪽으로는 손씨(孫氏)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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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서내열(徐乃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八日 徐乃烈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광무 7)11월 18일에 서내열(徐乃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老溪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광무 7) 11월 18일에 서내열(徐乃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老溪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서내열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팔게 되었다. 이 문기에서는 특별한 방매 사유를 밝히고 있지 않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계동 전평(前坪) 태종전(太種田)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3부(負) 2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5냥이다. 여기서 태종전은 콩밭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락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서내열은 구문기(舊文記)가 가대(家垈)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서내열과 증필(證筆)은 강봉국(姜奉國)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 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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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安居化民李奎煥右謹言情由事民之畓土一石庫在於本邑一道面甑東里坪是乎所時作定于該里金希道處而賭租六石十斗酌定矣凶彼希道暗懷賊心符同其弟致道所作租包藏置于致道之家民之賭租延拖不給累次往督二石租纔爲辦出外集租一石推尋於其弟之家而在條二石十斗尙未推捧世豈有如許凶獰者乎緣由仰訴 洞燭敎是後賭租二石十斗 特爲推給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兼城主 處分[署押]辛卯 十二月 日(題辭)査推以給不則定差押送金希道于此向事卄日留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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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辛未年) 이창선(李昌善)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未 李昌善 辛未 李昌善 전북 부안군 [署押]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신미년(辛未年) 8월에 이창선(李昌善)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 신미년(辛未年) 8월 하순(下旬), 상서면(上西面) 주산리(珠山里)에 사는 이창선(李昌善)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이창선이 소지를 올린 이유는 김씨(金氏)와의 산송(山訟) 사건 때문이었다. 이창선에 따르면 자신의 고조모(高祖母) 분묘(墳墓)가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봉덕리(鳳德里)에 사는 김씨가 몰래 무덤을 쓰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이창선은 지난 4월, 소지를 올려 김씨로 하여금 자신이 몰래 만들어 놓은 무덤을 파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관(官)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으니, 그 후로도 김씨가 무덤을 파가지 않고 있었다. 이에 다시 한 번 소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창선의 호소에 대해 부안현감은 "이미 약속 날짜가 지났는데도 이굴하고 있지 않으니 잡아와 엄히 다스려 이굴(移掘)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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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珠山里李昌善右謹言憤悶情由事民之高祖母墳墓在於東道仙隱洞而逢偸塚於鳳德里金漢之由去四月呈訴而金漢置諸落科自官庭限七月晦日掘移云云故民去月二十七日往觀終無掘移之意晦日已過尙不掘去此無乃凶獰之漢蔑視 官令之致也緣由仰訴於孝理之下同金漢發差捉致治其違令之罪嚴囚督掘以雪幽明之恥千萬祝手爲只爲城主 處分辛未 八月 日官[署押](題辭)旣是過限率來身當嚴懲掘移事卄四日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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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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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승헌(承憲)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卯 承憲 癸卯 承憲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고종 40)에 승헌(承憲)이 보낸 간찰(簡札) 1903년(고종 40) 2월 18일에 승헌(承憲) 보낸 간찰이다. 수신인은, 승헌이 스스로를 죄질(罪姪)로 적고 있는 점으로 보아, 승헌의 삼촌이었다고 생각된다. 죄질은 상(喪)을 당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승헌이 본 간찰을 보낸 이유는 전답의 매매와 관련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계묘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문서의 지질과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1903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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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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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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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5년 이하용(李夏容) 등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李夏容李遠馨 城主 乙巳十一月 日 경남 함양군 [署押] 1개, [官印] 5개 7.0*7.0 5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이다. 이들은 도백원(都伯元)(다른 소지에는 도백언(都百彦)으로도 나온다.)이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있는 자신들의 선산에 투총(偸塚)을 한 것을 알고 관아에 소를 제기하여 도가를 잡아오라는 판결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던 도가는 투총 2기를 파가겠다고 다짐하는 문서까지 작성하여 주었지만,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이장을 하지 않고 이씨측을 피하고 다녔다. 이에 이씨측은 관아에 소를 올려 관에서 내린 제사(題辭)를 무시하고 천리 먼 곳의 타향에서 온 자신들을 무시하는 도가를 잡아다가 법대로 처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수령은 우선 그를 다시 즉각 잡아서 대령하는 한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단 도형(圖形)을 작성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하용과 이원형은 부안의 선은동에 살고 있었던 전주이씨 문중의 일족으로, 선대에는 함양에서 살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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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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唵川面盖山里戶籍單子戶幼學白思亨年三十三甲辰 本水原父學生 慶玉祖學生 昌潤曾祖學生 敏徵外祖學生張天翼 本仁同妻徐氏齡二十二乙卯 籍利川父學生 達孝祖學生 命伯曾祖學生 泰胤外祖學生 金履玉 本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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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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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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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第一統統首吳甲運第四戶幼學白慶王年四十九甲子本水原父學生 昌潤祖嘉善大夫中樞府事 敏徵曾祖學生 信憲外祖學生 金壽龍 本光山奉母金氏齡七十四己亥妻張氏年四十三庚午籍仁同父學生 天翼祖學生 漢佑曾學生 善長外祖學生 朴師德 本密陽賤口秩婢信良年四十七丙寅逃亡己酉戶口相準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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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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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8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寅 東道面仙隱洞罪民李奎煥 戊寅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12월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 1 1878년(고종 15) 12월 전북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거주하는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이규환이 소지를 올리게 된 이유는 김치서(金致西)와의 채무 관계 때문이었다. 김치서가 약속한 날이 지나가도록 주지 않고 있자 이규환이 이 돈을 빨리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규환은 이전에도 또는 이후에도 김치서와의 채무 관계 때문에 여러 차례 소지를 올렸고 또 올리게 되는데, "1884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1", "1884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2", "1884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3", "1878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2", "1875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등이 그와 관련된 문서들이다. 이규환과의 문제는 심지어 김치서의 아들 김성숙(金成叔)과도 연결이 되고 있다. 한편 본 소지를 올리면서 이규환은 스스로를 죄민(罪民)이라고 적었던 이유는 이 소지를 올릴 당시 그가 부모님의 상(喪)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어머니 상인지 혹은 아버지 상인지는 알 수 없다. 부모님 상을 당한 자식이 스스로를 죄민이라고 부른 이유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는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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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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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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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0년 김상만(金祥滿)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庚寅三月十八日 金祥滿 光緖十五年庚寅三月十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3월 18일 김상만(金祥滿)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증산(甑山) 남쪽 산기슭에 있는 땅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3월 18일 김상만(金祥滿)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증산(甑山) 남쪽 산기슭에 있는 땅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산의 주인 김상만은 다음달 말까지 이곳에 있는 친산(親山)을 이장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상대방이 이곳에 산소를 쓰기 위하여 매입 의사를 밝히자 옛 무덤구덩이 전후 좌우 10보씩에 해당하는 땅을 팔기로 하였다.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50냥이다. 증산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증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도인(賣渡人) 유학(幼學) 김상만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산지주(山地主) 유학(幼學) 김상만과 증필(證筆)로는 유학 박규환(朴奎桓)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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