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신원첨(辛源瞻)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一年甲申十月初四日 辛源瞻 光緖十一年甲申十月初四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 21) 10월 초4일 신원첨(辛源瞻)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 21) 10월 초4일 신원첨(辛源瞻)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원첨은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 제방 아래에 있는 화자답(畵字畓) 20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52부(卜)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5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원첨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원첨과 정필(訂筆)은 박공거(朴公擧)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㱏張)은 일장(㱏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