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83년 동도선은동(東道仙隱洞)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未三月 日 李奎煥 城主 癸未三月 日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3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83년(고종 20) 3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자신의 돈을 빌려간 뒤 갚지 않고 있는 김치서(金致西) 부자(父子)를 처벌해달라면서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이규환이 김치서 부자와 관련하여 관에 올린 소지가 이 문서 외에 몇 건 더 있는데, 이를 함께 참고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계유년, 즉 2년 전인 1873년 12월에 부안현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翼上里)에 사는 김원숙(金元叔)이라는 자가 여러 차례 이규환을 찾아와서 큰 이익을 보게 해줄 터이니 30냥을 꾸어달라고 하였다.(金元淑으로 나오는 문서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요호(饒戶)로 분류되어 30냥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 수표(手標)를 받고 김원숙에게 30냥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김원숙은 시간을 끌면서 돈을 갚지 않았다. 이에 이규환은 관에 소지를 올려 제사(題辭)를 받고 김원숙으로부터 돈을 갚겠다는 수표(手標)를 다시 받았지만, 갚기로 한 기일이 지나도록 돈을 받지 못했다. 그 뒤 김원숙은 서울에 가서 살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규환은 김원숙의 동생 김성숙(金成叔)과 부친 김치서(金致瑞)를 여러 차례 집으로 찾아가 수표를 보여주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치서는 상당한 재력가이면서도 돈을 갚기는커녕, 자식이 누구인지도 모르면 30냥 또한 모르는 돈이라고 우겼다.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간 뒤에 이처럼 사람을 기망하고 윤리를 그르치고 의리를 멸시하는 이들을 가리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관에 김원숙의 부친과 동생 김성숙 등을 즉시 잡아들이는 한편, 본전과 이자까지 계산하여 관에서 추급(推給)할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고 하였다. 이규환은 소지를 올리면서 관련 수표와 이전에 올렸던 소지들을 점련하여 함께 제출했다. 부안현감은 이들을 조사하여 추급할 수 있도록 김원숙의 부친과 동생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본문에는 작성연대가 계미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이규환이 전답을 사들이면서 작성한 명문(明文) "1873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계미년을 1883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3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三月五日 高濟英 李樂善 大正二年三月五日 高濟英 전북 부안군 [印] 3개 1.2*1.2 1개(적색, 원형), 1.0*0.8 4개(적색, 타원형), 0.7*0.7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3월 5일에 고제영(高濟英)과 이낙선(李樂善)이 부안군 하서면 청일리에 있는 논을 거래하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3년 3월 5일에 고제영(高濟英)과 이낙선(李樂善)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청일리(晴日里)에 있는 논을 거래하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고제영은 거래 당시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원중리(元中里)에 살고 있었으며, 이낙선은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살고 있었다. 거래 대상이 된 논은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청일리평(晴日里坪)에 있는 휘자(暉字) 785호 논으로 1야미 2두락으로, 부수(負數)로는 5부 2속이었다. 매매가는 30원이었다. 고제영과 이낙선 외에 보증인으로 원중리에 사는 이익삼(李益三)이 거래에 참여하여 함께 날인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一 土地表示은全羅北道扶安郡下西面晴日里坪[檢証濟][印]暉字七八五号畓一夜味貳斗落結五負貳束一 賣買代金은參拾円也一 賣渡人은右賣買代金을凖領ᄒᆞ고前記土地所有權을買受人의게轉渡홈一 保証人은右賣買의 確的홈을認호고左에 署名捺印홈大正二年三月五日扶安郡下西面元中里一統九戶賣渡人 高濟英[印]扶安郡東道面仙隱洞二統五戶買受人 李樂善[印]扶安郡下西面元中里一統三戶保証人 李益三[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3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2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三月十五日 姜化淑 李樂善 大正二年三月十五日 姜化淑 전북 부안군 [印] 3개 0.7*0.7 1개(적색, 원형),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3월 15일에 강화숙(姜化淑)과 이낙선(李樂善)이 부안군 하서면 금광동에 있는 밭을 거래하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3년 3월 15일에 강화숙(姜化淑)과 이낙선(李樂善)이 부안군 하서면 금광동에 있는 밭을 거래하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강화숙은 거래 당시 전주군(全州郡) 이동면(伊東面) 파구리(波九里)에 살고 있었으며, 이낙선은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살고 있었다. 거래 대상이 된 논은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금광동평(金光洞坪)에 있는 긍자(矜字) 2,717호 밭으로 1야미 2두락으로, 부수(負數)로는 3부 9속이었다. 매매가는 25원이었다. 고제영과 이낙선 외에 보증인으로 금광동에 사는 김진원(金鎭源)이 거래에 참여하여 함께 날인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매입자 이규환(李奎煥)은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에서 구축한 고문서DB의 "1879년 이규정(李奎井) 호구단자(戶口單子)"에서 호주 이규정(李奎井)의 동생으로 나온다. 그는 당시 41세로 처 청주한씨(淸州韓氏)(34)와 함께 형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 土地의 表示左記와 一通함-. 賣買代金 七円也-. 賣渡人은 前記賣買代金을 愼領하고 左記 土地의 所有權을 買受人에게 轉渡함-. 保證人은 右契約을 確實히 認하고 左記名 調印함大正貳年 九月 卄七日扶安郡上東面新后里二六戶賣渡人 金明燮[印]扶安郡上東面卜星里二四戶保證人 金奉三[印]買受人 李孟三 殿左記扶安郡上東面卜星里陶 一00七 二田 一味一斗落結貳負五束也余白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부안(扶安) 전주이씨(全州李氏) 추수기편(秋收記片) 2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안에서 작성한 추수기(秋收記) 2 전북 부안군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집안에서 작성한 추수기(秋收記)이다. 추수기란 일반적으로 소작(小作)을 주고받은 소작료(小作料)를 받은 내역을 정리한 것인데, 본 추수기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전답을 배도한 일과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어느 해에 작성한 문서인지는 모르나, 전체 4,000냥 가운데 3,500냥을 답가(畓價)로 제외하고, 7냥 8전은 축소하기로 하였으므로, 나머지는 492냥 1전 4분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4,000냥은 아마도 종중(宗中)의 자금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돈으로 논을 매입하기로 하고 그 돈의 사용 내역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入文四千兩以三千五百兩畓價除七兩八戔六分縮小除實在文四百九十二兩一戔四分三千兩捧留票還送孝權焉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8년 안달수(安達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四年戊子三月二十三日 安達守 光緖十四年戊子三月二十三日 安達守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8년(고종 25) 3월 23일에 유학(幼學) 안달수(安達守)가 부안현(扶安縣) 이도면(二道面) 송곶(松串)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8년(고종 25) 3월 23일에 유학(幼學) 안달수(安達守)가 부안현(扶安縣) 이도면(二道面) 송곶(松串)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안달수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송곶 전평(前坪)에 있는 금자답(禽字畓) 4마지기, 부수(負數)로 9부 3속이 되는 곳을 28냥에 팔았다. 그러나 문서의 끝 부분에 "논 주인이 논을 팔지 않는다고 말하여 7냥을 더 보태어 주어 총 35냥이다."라고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논값은 실제로 35냥에 거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다른 논의 문서에 붙어 있어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안달수와 증필(證筆)로 유학 박문일(朴文一)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報債無路故衿得伏在上西擧石里於字草家三間苧田七隊落太田一石六斗落㐣價折錢文九十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二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則持此文憑考事此亦中右錢以市利例限七月晦內備報後還退事九十三兩六戔內三兩六戔無利家垈主 童蒙 李周鳳[喪不着]證人 幼學 姜永氣[着名]幼學 金基鐘[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緖十六年庚寅二月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伏在上西擧石里前坪於字苧田一帶半直㐣價折錢文五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本無故以新文一丈成文事日後若有爻像則以此文記憑考事此亦中右錢三月晦內以報後還退事苧田主 童蒙 李周鳳[喪不着]證人 幼學 姜仁俶[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정선(貞善)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貞善 貞善 전북 부안군 30.1* 개(, /////23.5)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신년(辛年) 12월 20일에 정선이 보낸 간찰 신년(辛年) 12월 20일에 정선이 보낸 간찰이다. 신년이란 간지에 신(辛)이 들어가는 해를 말한다. 피봉이 없는 관계로 수신인은 알 수가 없다. 한편 정선은 스스로를 삼종형(三從兄)으로 적고 있는데, 삼종은 팔촌이 되는 형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아버지 육촌 형제의 자녀들이 나와 팔촌이 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5년 김명여(金明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九年乙巳九月十六日 金明汝 光武九年乙巳九月十六日 金明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5년 9월 16일에 유학(幼學) 김명여(金明汝)가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5년 9월 16일에 유학(幼學) 김명여(金明汝)가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명여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상리 전평(前坪)에 있는 궐자답(闕字畓) 3마지기와 5마지기를 합하여 총 700냥에 팔았다. 3마지기 논은 부수(負數)로 4부 4속이 되는 곳이었고, 5마지기 논은 9복 9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 2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이 거래에는 벼(禾穀) 3석(石) 10두(斗)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논 주인 김명여와 증인(證人)으로 유학 김원겸(金元謙)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문서 말미에 상리 전평 김명여 7마지기 문권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武九年乙巳九月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故伏在上東上里前坪闕字畓參斗落所耕四負四束庫果闕字畓伍斗落所耕九卜九束庫乙價折錢文柒佰兩依數捧上是遣以舊文記二張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持此文記憑考事此亦中倂禾穀三石十斗事畓主 幼學 金明汝[着名]訂人 幼學 金元謙[着名]上里前坪金明汝七斗落文券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乾隆三十年乙酉月日靈巖昆二始面長田里戶籍單子第一統統首金汝信第四戶幼學白敏徵年七十六庚午本水原父學生 信憲祖學生 尙源曾祖禦侮將軍行龍驤衛副▣▣時南外祖武科及第金擎錘本金海妾崔氏年五十八戊子本朗州率子昌仁年四十八戊戌賤口仰役婢士仁故逃亡秩奴注壯良妻小德二所生婢士命年四十五辛丑三所生小良年三十一四所生奴壬戌居玉泉婢小升一所生丹陽同婢二所生婢件里介年五十五同婢二所生奴干嶌良妻{氵+唜}西非一所生溫良年乙丑居海南同婢一所生婢之今年三十九二所生奴光男婢厚礼年三十九奴注良後良妻命化二所生婢今礼年三十二所生婢信化年乙卯同婢一所生奴九音伊年辛卯居務安木浦婢壬良年壬寅居古阜等壬子戶口相準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04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九年甲子正月 白慶玉 行郡守 嘉慶九年甲子正月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04년(순조 4)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04년(순조 4)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61세로, 처(妻) 장씨(張氏)(55)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22살 먹은 계집종 얼상이 있었으며, 외거비 신량이 있었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辛酉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신유년, 즉 1801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0년 신사명(辛士明)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四年庚子十一月二十四日 辛士明 大韓光武四年庚子十一月二十四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2.5*2.5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광무 4) 11월 24일 신사명(辛士明)이 쌍괴제(雙塊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0년(광무 4) 11월 24일 신사명(辛士明)이 쌍괴제(雙塊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사명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기 매득하여 경작해 오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쌍괴제 아래에 있는 지답(至畓) 개자답(芥字畓)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5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600냥이다. 쌍괴제는 쌍구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쌍구제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에 있는 저수지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사명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사명과 증필(證筆)은 이행신(李行辰)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793년 신명직(辛命直)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八年癸丑四月初六日 金履直 辛命直 乾隆五十八年癸丑四月初六日 金履直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喪人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3년(정조 17) 4월 초6일에 김이직(金履直)이 양친(兩親)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부안(扶安)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3년(정조 17) 4월 초6일에 김이직(金履直)이 양친(兩親)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부안(扶安)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 전평(前坪)에 있는 온자답(溫字畓) 8두락지와 7두락지, 그리고 6두락지 논 등 세 곳을 신명직(辛命直)에게 310냥을 받고 팔았다. 이곳은 김이직이 외가(外家)로부터 자기몫으로 물려받은 논이었다. 당시 김이직은 사정이 있어서 양친의 장례를 바로 지내지 못하고 조금 기일이 지난 뒤에 치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장례비용이 필요하여 논을 팔게 되었다. 8두락지 논은 부수(負數)로는 24복 6속이 되는 곳이었으며, 7두락지 논은 21복 8속이 되는 곳이었으며, 6두락지 논은 18복 7속이 되는 곳이었다. 거래시 본문기(本文記) 7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는데, 만일 차후에 족속 가운데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이 문기를 관에 알려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당시 김이직은 상중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증인(證人)으로는 최덕관(崔德寬)이, 필집(筆執)으로는 유학(幼學) 김광이(金廣履)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乾隆二十一年丙子十二月初八日幼學金昌海前明文右明文爲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耕食是在之飛里前坪一作溫字畓捌斗落只所耕貳拾伍卜參束庫乙價折錢文玖拾伍兩以交易依數捧上爲遣右人前本文記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良中同生子孫中如有雜談隅是去等此文記內兒爲告官卞正事畓主故金明輝妻朴召史[右掌]證 金仁才[着名]筆執幼學 孫萬雄[着名]新明文中稱八斗落只今量所耕二十四卜六束庫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746년 고(故) 김명휘처(金明輝妻) 박소사(朴召史)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十一年丙寅十二月十六日 李夏悅 故金明輝妻朴召史 乾隆十一年丙寅十二月十六日 李夏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左寸]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46년(영조 22) 12월 16일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이하열(李夏悅)이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고(故) 김명휘(金明輝)의 처(妻) 박소사(朴召史)의 전답과 상환(相換)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46년(영조 22) 12월 16일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이하열(李夏悅)이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고(故) 김명휘(金明輝)의 처(妻) 박소사(朴召史)의 전답과 상환(相換)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하열은 전답의 위치 때문에 농사 짓기가 어렵자 지비리 전평(前坪)에 있는 온자답(溫字畓) 25부 3속이 되는 곳을 박소사 소유의 근처 임자답(臨字畓) 12두락지와 맞바꾸기로 하였다. 상환하는 대신에 박소사에게는 40냥을 주기로 하였다. 거래하면서 박소사로부터 본문기 2장을 받았으며, 자신은 박소사에게 이 명문과 패자(牌子) 등 11장을 넘겨주었다. 만일 차후에 자손들 중에게 이 거래를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官)에 알려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 이하열은 외손가락 마디를 그려 서명을 대신하였으며, 증인으로는 무학(武學) 김초상(金楚相)이, 필집(筆執)으로는 유학(幼學) 최석귀(崔碩龜)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