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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八月初三日 前明文 太三斗右明文事以急用處伏在乾川里㫌門嶝坪 字田五斗落只山稅四負五束庫果柴場五同㐣価折錢文五拾兩依數捧上是遺舊文記中問有失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他說則以此文憑考事太田主 幼學 金處一[着名]證筆 幼學 金暢學[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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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乙巳年) 최치삼(崔致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乙巳七月二十日 崔致三 乙巳七月二十日 최치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을사년 7월 20일에 유학 최치삼(崔致三)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을사년 7월 20일에 유학 최치삼(崔致三)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최치삼은 곤궁한 시절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자신이 매득한 건천리 전평에 있는 태종전(太種田) 5두락을 50냥에 팔았다. 만일 나중에 이 밭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문서 끝에 구문기가 다른 논에 붙어 있기때문에 신문기 1장만을 넘겨주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거래 당시 밭주인 유학 최치삼과 증필로 유학 강봉국(姜奉國)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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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七月二十日 前明文 大三斗右明文事段當此窮節生活無路故自己買得伏在下西面乾川里前坪太種田 字五斗落山稅十一負四束㐣価折錢文五十兩依數捧上是召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若有日後他說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 此亦中旧文他田畓並付故以新文一章永永放賣田主 幼學 崔致三[着名]證筆 幼學 姜奉國[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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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九年甲子十月十五日辛命直前明文右明文事段所負債錢許多不得已自己買得是在扶北一作之飛里前坪梁傍伏在溫字畓四斗落只所耕十七卜四束庫乙価折錢文伍拾伍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一丈及牌子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屬人中如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李仁芳[着名]證保 同姓四寸玉南[左寸]筆 金致鎰[着名]定只堤下梁俠三巨里下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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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扶安) 선은동(仙隱洞)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 용하기편(用下記片)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扶安) 선은동(仙隱洞)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작성된 용하기(用下記)의 일부. 부안(扶安) 선은동(仙隱洞)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작성된 용하기(用下記)의 일부이다. 2월 2일, 4일과 4월 16일 등에 지출된 돈의 액수를 적은 것이다. 세목은 적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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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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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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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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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3년 이맹삼(李孟三)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貳年 買受人 李孟三 大正貳年 李孟三 전북 부안군 [印] 2개 1.2*1.2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9월 27일 이맹삼(李孟三)이 토지를 매매할 때 작성한 문서 1913년 9월 27일 전북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 24호에 사는 이맹삼(李孟三)이 전북 부안군 상동면 신후리(新后里) 36호에 사는 김명섭(金明燮)으로부터 토지를 매수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맹삼이 사들이 토지는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1007의 1미(味) 1두락(斗落)이었다. 매매 가격은 7원이었다. 매매 가격으로 큰 토지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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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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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東道面仙隱洞居化民李奎煥右謹言憤寃情由事今此人心尤極凶獰其有甚於上東翼上里金成淑爲名人乎去癸酉年良中渠之兄元淑爲名者累次過限連爲不報故民不勝憤惋累次呈訴是乎則題音截嚴而或囚或杖終是不報豈有如許之陰慝頑惡者乎恒切憤寃之際同元淑之弟成淑快言曰該錢渠之擔當備報之意成標是白去乙民依其言許之矣同成淑兄弟同一心腸至于今延拖不報眞所謂難兄難弟不知何年何月捧之而又況當王稅辦納之時束手無策故玆敢前呈所志與手標帖連仰籲 洞燭敎是後特加別般處分上項成淑卽刻捉上嚴囚督捧該錢幷本利一一推給俾無空失之幣千萬祝手行下 向敎是事城主 處分甲申 四月 日官[署押](題辭)非但渠之手票消詳前後官題截嚴何不報給有此更訴所謂金成叔萬萬無憾嚴治推給次星火捉待事初八日 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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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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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祖考諱宗愿字士謹壬辰肅宗三十八年九月二十四日生壬子正宗十六年五月初二日寅時卒壽八十一是年八月初九日丑時葬墓在扶安縣古山內慈尾洞後甲坐庚向之原公年甫十餘家禍孔酷壬癸兩年之間連遭王考內外艱及父母之憂重以一門喪慽相續不絶公以童稚之年跳身避禍或去寄于南原渭陽家或往留于京中同族家荏苒十有餘年之後轉向于扶安成萬統氏家而公之姨從也年三十三始有室回寓于扶安刻意興復敎子弟以文墨之工爲宗家而別置奉祠之田使旣覆之門戶至於重創成立之境非天挺之資烏能及此孝友純至以早喪考妣未得奉養爲終身之痛每語及壬癸必泫然下淚當忌日則汛掃門庭切禁外人之來汪祭品必致富饒而且極精潔齊之夕整飭衣冠而危坐自夕達曉暫不倚側將祀之時哀號踰節一如袒括之日年迫八旬而若非疾病則未嘗不叅祀平生不以紬帛爲衣曰吾昔於父母之喪以連喪蕩敗之故初終之際未得用一尺帛吾豈忍今日着紬帛之物以爲自便之道乎子孫或欲進之則責而却之仲季兩弟嘗在於咸陽而仲弟則貧而無子季弟則早卒而三子皆幼公中年並皆率來買給田舍與之同居友愛隆篤恤撫備至隣里觀聽者莫不聳動而欽慕焉公嘗於於奔避之中以未能專心於學問爲恨脫年多粹書冊杜門靜坐沈潛反覆至忘寢食其文義之窒碍處音釋之深閟者必窮究而解得之至於陰陽術數之書亦皆貫通尤好易書作驗易方二卷以遺于後間且留意于筆工一字一畫不爲放過必以楷正爲主至於草書亦如之所騰書篇頻多而皆可爲後人之摹本焉公性外嚴而內寬凡接人之初凜然有不可犯之色及其與語溫溫有春風底和氣人以是初憚而後悅焉嗚呼語公之成家事業則眞回天之雙手也論公之進學工夫則實隱德之君子也此皆實錄豈敢有一毫所私於其間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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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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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二月 李周胤 光緖十六年庚寅二月 李周胤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2월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2월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주봉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거석리 전평(前坪)에 있는 어자(於字) 모시밭 1.5 대락(隊落)을 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본래 없었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일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추기로 3월 그믐 안으로 돈을 갚는다면 되살 수 있다는 환퇴(還退) 조항을 삽입하였다. 거래 당시 모시밭 주인 이주봉은 상을 당하여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강인숙(姜仁俶)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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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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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3년 김병두(金炳斗)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二年癸亥六月二十二日 黃海鱗 金炳斗 同治二年癸亥六月二十二日 黃海鱗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3년(철종 14) 6월 22일에 유학(幼學) 황해린(黃海鱗)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유학 김병두(金炳斗)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3년(철종 14) 6월 22일에 유학(幼學) 황해린(黃海鱗)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유학 김병두(金炳斗)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황해린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선은동 전평(前坪)에 있는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를 김병두에게 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3장를 매입자에게 건네주었으며,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특히 이 문기에 환퇴(還退)를 위해서 구문기를 건네준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황해린은 나중에 이 논을 다시 살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논 주인 황해린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임필상(任弼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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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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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二年癸亥六月二十二日幼學金炳斗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東道仙隱洞前坪一作玄字畓四斗落所耕拾負㐣折價錢文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日後還退次舊文三丈倂右人前放賣爲去乎日後系人中若有他端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幼學 黃海鱗[着名]證人 幼學 任弼常[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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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노(奴) 분동(分同) 패지(牌旨)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丙申十一月 日 上典 李 奴 分同 丙申十一月 日 1836 上典 李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6년(헌종 2) 11월에 상전(上典) 이모(李某)가 노(奴) 분동(分同)에게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토지의 거래를 위임하면서 작성해 준 패지(牌旨). 1836년(헌종 2) 11월에 상전(上典) 이모(李某)가 노(奴) 분동(分同)에게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토지의 거래를 위임하면서 작성해 준 패지(牌旨)이다. 거래 대상이 된 논은 선은동 전평(前坪)에 있는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로, 값을 정하여 상전댁에서 받아들인 뒤에 문서를 작성하여 지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병신년으로만 되어 있으나 분동이 방매자로 거래한 관련문서 "1836년 신노춘이(辛奴春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를 통해서 작성연대를 1836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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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十一月初二日 嘉義崔永心 光緖十六年庚寅十一月初二日 嘉義崔永心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 11월 초2일에 가의(嘉義) 최영심(崔永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 11월 초2일에 가의(嘉義) 최영심(崔永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동평(東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경작해 왔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동평 통수동(通水洞)에 있는 의자답(衣字畓) 5두 5승락, 매매가격은 78냥이었다. 문서에는 이 논의 부수(負數)를 사복(司卜) 11복 1속과 민결(民結) 5복 1속으로 나누어 기재하였다. 구문기는 다른 논 문서에 함께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만을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최영심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유학 한응화(韓應化)가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월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최영심의 자품으로 적힌 가의(嘉義)는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줄임말로, 조선시대 종2품의 문무관의 품계이다. 최영심은 이보다 앞서 2월에도 상동면 궁월리에 있는 여러 곳의 논들을 600냥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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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김자익(金子益)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開國五百五年丙申九月十九日 幼學 忠淸道龍湖 金子益 開國五百五年丙申九月十九日 幼學 金子益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6년 9월 19일에 김자익(金子益)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6년 9월 19일에 김자익(金子益)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고마제(叩馬堤) 아래의 궁월리(弓月里) 동서남평(東西南坪)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세를 받아왔으나,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논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복자답(服字畓) 12두락, 거영(渠永) 1두락, 상답(上畓) 3무(畝) 30부 4속, 복자답 8두락 20부 4속, 내자답(乃字畓) 12두락 35부 5속, 내자답 9두락 궁결(宮結) 29부 2속, 관자답(官字畓) 9두락 24부 6속, 조자답(鳥字畓) 16두락 37복 1속, 관자답 12두락 28부 6속 등 아홉 곳으로 매매가격은 1,400냥이었다. 거래시 구문기 9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었으며,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이 때 건네 준 구문기의 하나가 "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인데, 불과 6년 사이에 논값이 600냥에서 1,400냥으로 2배 이상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래 당시 충청도 용호(龍湖)에 살고 있었던 유학 김자익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유학 김원겸(金元謙)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월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며, 고마제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대규모 저수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문서에 매입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의 소장처인 선은동에 살았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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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五年己丑七月十九日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草家四間折価錢文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永永放賣爲去乎以此新舊文憑後之地爲乎乙事家垈主 吳淳周[着名]證人 金元基[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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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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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十八年壬辰六月晦日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勢不得已草家四間舍太田三斗落只所耕 㐣折價錢文肆拾陸兩依數捧上是遺旧文記中間流失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丈右處永永放賣爲去乎日后若有他說則以此文記告官憑爲乎乙事家垈主 林自雲[着名]證人 金益化[着名]筆執 金道範[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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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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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심문경(沈文京)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六年壬寅 畓主 幼學 沈文景 光武六年壬寅 沈文景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2년(고종 39) 1월 18일 심문경(沈文京)이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2년(고종 39) 1월 18일 심문경(沈文京)이 마차제(馬車堤) 위에 있는 경자(驚字) 답(畓) 9두락(斗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賣買) 문서이다. 심문경이 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급히 돈이 필요해서였다. 매매 대금은 450냥이었다. 금액으로 보아 규모가 작은 거래는 아니었던 것을 추정된다. 심문경(沈文京)은 위 논을 매도하면서, 위 논과 관련된 이전의 문서는 주지 못하였다. 그 문서가 다른 문서와 서로 병합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병부타답문권고이(旧文記幷付他畓文券"이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 내용이다. 한편 본 문서를 작성한 심문경이나 또는 증인으로 자리를 함께 하였던 김몽삼(金夢三) 등은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그 점은 그들 스스로 유학(幼學)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 논밭을 거래하거나 혹은 어떤 물건을 거래하는 데 있어 양반이 직접 참여하는 예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개는 자신 집에서 부리고 있는 노(奴)를 대신하였는데, 그런 점에서 본 문서는 이례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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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光武十年丙午十一月初九日 明文右明文事當此窮節錢政葛藤故不得已伏在仙隱洞村前 字畓苧田一隊落所耕 㐣折価錢文伍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苧田主自筆 李勉秀[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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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이면수(李勉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年丙午 苧田主自筆 李勉秀 大韓光武十年丙午 李勉秀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 12월 8일 이면수(李勉秀)가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1906년 12월 8일 이면수(李勉秀)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이 밭은 선은동(仙隱洞)에 있었는데, 크기는 1대락(隊落)이었으며, 매매 대금은 20냥이었다. 밭의 크기를 재는 단위 가운데 대락은 매우 생소하다. 고문서에서 대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도 거의 없는 듯하다. 따라서 1대락이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면수가 위 모시밭을 팔게 된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였다. 아마도 올해 가을 작황(作況)이 좋지 못하였고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곡식을 살 정도의 돈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면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위 모시밭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들도 같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전 문서를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중간유실 고이신문일장 우전영영방매위거호(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라고 말한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그런데 본 문서의 내용은 바로 앞서 소개된 "1906년 이면수(李勉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의 문서와 그 내용이 같다. 모시밭의 위치나 크기도 동일하다. 틀린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매매 가격인데, 그렇다면 앞서 거래한 모시밭과 이번에 거래한 모시밭을 동일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같은 지번에 있는 모시밭을 두 차례로 나누어 매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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