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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八年己巳十一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移買次伏在上東肇開洞村前官字畓玖斗落所耕二十四負六束庫乙折價錢文㱏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段幷付他畓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筆幼學崔錫萬[着名]己巳十一月二十五日 前受記右標事段無他九斗落畓放賣而旧文記幷付他畓故不得出給之意新文中筆之更有疑訝故以手記一丈幷給若有他說以此手記告官卞正事標主幼學崔永壽[着名](背面)韓木亭本里崔永壽橋洞里前九斗落文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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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박준룡(朴凖龍)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己丑二月晦日 朴凖龍 光緖十五年己丑二月晦日 朴凖龍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6) 2월 그믐날에 박준룡(朴凖龍)이 부안군(扶安郡) 입화면(立化面) 동령치(東嶺峙) 아래의 만화동(萬化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9년(고종 26) 2월 그믐날에 박준룡(朴凖龍)이 부안군(扶安郡) 입화면(立化面) 동령치(東嶺峙) 아래의 만화동(萬化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만화동 전평(前坪)에 있는 이자답(而字畓) 4두락지, 부수(負數)로는 9부 2속 7야미되는 곳을 120냥에 팔았다. 거래시 매입자에게 구문기와 신문기를 함께 건네주었으며, 차후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 박준룡은 거래 당시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않았으며, 증인 이백현(李伯賢)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었던 만화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군 신복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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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光武四年庚子三月初一日 前明文右明文事以移買次伏在下西三賢洞字畓所耕拾伍負六斗落廤価折錢文貳佰肆拾兩依數交易捧上是遣旧文記段幷付於他文故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金德行[着名]證人 幼學 張乃成[着名]證筆 幼學 朴化連[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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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乙巳年) 김처일(金處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乙巳八月初三日 金處一 乙巳八月初三日 김처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을사년 8월 3일에 유학 김처일(金處一)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을사년 8월 3일에 유학 김처일(金處一)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처일은 긴급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건천리 정문등평(旌門嶝坪)에 있는 콩밭(太田) 5두락지와 시장(柴場) 5동락을 5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중간에 유실되었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만일 나중에 이 밭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콩밭주인 유학 김처일과 증필로 유학 김창학(金暢學)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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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五年丙寅二月初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露積里後坪舊基於字畓壹斗五升落果同字田三斗落只合所耕貳負廤幷化穀價折錢文拾伍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舊文壹丈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則以此文憑考事田畓主幼學 宋祥玉自筆[着名]證人 幼學 崔佑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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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元年辛亥十一月初一日 陳乭金 高生員宅奴 善鳳 咸豐元年辛亥十一月初一日 陳乭金 전북 부안군 [左掌]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1년(철종 2) 11월 1일에 한량(閑良) 진돌쇠(陳乭金)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1년(철종 2) 11월 1일에 한량(閑良) 진돌쇠(陳乭金)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진돌쇠는 흉년이 들어 도저히 생활할 길이 없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상서면 노적리(露積里) 전평에 있는 어자전(於字田) 4마지기를 고생원댁노 선봉에게 2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으며, 나중에 말썽이 나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 주인 진돌쇠만 참여하여 착명(着名) 대신에 왼쪽 손바닥을 그려서 확인하였다. 이 문서에서 선봉은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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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문권(文券) 녹명지(錄名紙)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全州李氏家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扶安)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적은 녹명지(錄名紙). 부안(扶安)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적은 녹명지(錄名紙)이다. 문서의 소장자가 문서를 분류하기 위하여 이렇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묶음에는 신해년과 무술년에 작성된 장사택일지 3장과 "1876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함께 들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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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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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四年戊寅十一月 日 前明文右明文事卽有要用處自己買得伏在一道定只堤下深字畓十六斗落所耕三十七卜五束庫果同坪履字畓十三斗落所耕三十五卜三束㐣價折錢文肆佰捌拾兩依數捧上是遣倂新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異論持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田在說[着名]證人 幼學 田汝伯[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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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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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4년 이계민(李啓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四年甲寅十二月十三日 幼學 李啓敏 咸豐四年甲寅十二月十三日 幼學 李啓敏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2월 13일에 유학(幼學) 이계민(李啓敏)이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2월 13일에 유학(幼學) 이계민(李啓敏)이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적고 있다. 거래가 된 토지의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고, 이자답(李字畓) 5승락지로 부수(負數)는 2부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거래가격은 3냥 5전이었다. 뒷날 이 논에 대하여 말썽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답주 이계민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의 구문기는 "1842년 채공하(蔡恭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는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는 구절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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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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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咸豐四年甲寅十二月十三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李字畓五升落只所耕貳負庫乙価折錢文參兩伍錢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 日後若有爻象之端持此文憑考事畓主自筆幼學 李啓敏[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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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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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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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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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김중전(金仲田)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元年辛巳六月初八日 金萬發 金仲田 道光元年辛巳六月初八日 金萬發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1년(순조 21) 6월 초8일에 김만발(金萬發)이 김중전(金仲田)에게 부북(扶北)의 진자답(盡字畓)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1년(순조 21) 6월 초8일에 김만발(金萬發)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동문중리(東門中里)에 사는 김중전(金仲田)에게 부북(扶北)의 진자답(盡字畓) 25두락지, 부수로는 48부 4속이 되는 곳과, 그 북변의 3부 2속이 되는 곳을 27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거래시 본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 뒷날 자손 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이 논은 김만발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증인으로 나호범(羅昊範)이, 필집으로 노보량(盧補良)이 거래에 참여하여 답주 김만발과 함께 문서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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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전공칠(田公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辛亥正月晦日 幼學田公七 辛亥正月晦日 幼學 田公七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1년 정월 그믐날에 전공칠(田公七)이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있는 채전(菜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1년 정월 그믐날에 전공칠(田公七)이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있는 채전(菜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밭을 팔았다. 매매 대상이 된 밭은 제자(帝字) 90경(頃)이 되는 곳의 채전 1두락으로, 부수로는 1부(負)가 되는 면적이며, 거래 가격은 27냥이었다. 그는 신문기와 구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유학 강화옥(姜化玉)이 필집(筆執)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년대가 신해년으로만 적혀 있지만, 강화옥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한 또다른 문서, "1904년 전재열(田在悅)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을 통해서 신해년을 1911년 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문서에 매입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밭의 소재지이자 이 문서의 소장처인 선은동에 살았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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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正月晦日 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故伏在東道仙隱洞帝字九十頃菜田一斗落所耕一負㐣價折錢文貳拾柒兩依數捧上是遣新舊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憑考事菜田主幼學田公七[着名]證筆 幼學姜化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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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강주환(姜周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年甲申三月十一日 姜周煥 光緖十年甲申三月十一日 姜周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 3월 11일에 강주환(姜周煥)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평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 3월 11일에 강주환(姜周煥)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평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을 매입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세금을 낼 길이 없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일도면의 송곶 전평(松串前坪)에 있는 금자답(禽字畓) 13두락으로, 부수로는 36부(負)가 되는 면적이며, 거래 가격은 60냥이었다. 그는 구문기 3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강주환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고응두(高應斗)가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송곶평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문서에 매입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의 소장처인 선은동에 살았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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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二年壬子十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黃水堤下一道秩面字玖〔七〕斗落只所耕二十二負〔十七負〕㐣折価錢文壹百玖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新旧文二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紛紜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幼學 柳基龍[着名]證筆 幼學 崔奉斗[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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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전수중(田水中)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拾年乙丑二月初八日 朴春得 田水中 嘉慶拾年乙丑二月初八日 박춘득 전북 부안군 [着名]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05년(순조 5) 2월 8일에 유학 박춘득(朴春得)이 전수중(田水中)에게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05년(순조 5) 2월 8일에 유학 박춘득(朴春得)이 전수중(田水中)에게 부북(扶北)에 있는 이작(二作)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수중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논에서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옮겨서 다른 곳을 살려고 부북에 있는 면자정(面字丁) 7두락지와 동자답(同字畓) 3두락지를 85냥에 전수중에게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22부 8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박춘득은 매수자 즉 전수중에게 본문기 2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자손 중 잡담이 있으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아 관에 고하여 증명하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논의 마지기 수와 부수를 고친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정한 수치로 해제를 작성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박춘득과 증인으로 강금이(姜金伊), 증보로 전란퇴(田亂退), 필집으로 유학 김형하(金亨河) 등 4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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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拾年乙丑二月初八日初田水中 前明文右明文事段祖上傳來累年畊食是如可移買次扶北伏在二作面字丁玖〔七〕斗落只所耕三十四卜五束〔十七負〕庫果同字畓三斗落只所耕五負八束㐣捧価錢文捌拾伍兩依數捧上是遣本文二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雜談是去等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幼學 朴春得[着名]證人 姜金伊[着名]證保 田乱退[着名]茟執 幼學 金亨河[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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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光武十年丙午三月初一日 前明文右明文事有要用所致故不得已夫伏在南一作小石後坪鳴字畓三斗落只所耕六負七束㐣價折錢文貳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記二丈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記告官 卞正事畓主 幼學 咸公洙[着名]證筆 幼學 崔德汝[着名]幼學 咸亨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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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곽윤거(郭允擧)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六年壬寅 畓主 郭允擧 光武六年壬寅 郭允擧 전북 부안군 [着名] 1.0*1.0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2년 2월 곽윤거(郭允擧)가 누군가에게 논을 매도(賣渡)하면서 작성하여 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광무(光武) 6년 2월에 곽윤거(郭允擧)가 논을 매도하면서 발급해 준 토지매매명문이다. 광무는 고종이 황제(皇帝)로 즉위한 고종 34년(1897)부터 사용한 조선의 연호(年號)이다. 따라서 광무 6년이면 1902년이 된다. 명문의 처음에는 으레 그 명문이 작성되는 해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의 연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 왔었다. 하지만 고종 33년(1896) 우리 스스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갖게 되고, 또 이듬해부터 광무라는 우리의 연호를 사용하면서부터는 명문에 으레 우리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곽윤거가 이번에 팔게 된 논은 소석(小石) 후평(後坪)에 있는 명자(鳴字) 논 3두락(斗落)이었다. 매매 대금은 165량이다. 매매하고자 하는 논의 크기와 매매 대금을 서로 비교해 보았을 때 논의 값이 상당히 높았는데, 그것은 팔고자 하는 논이 옥답(沃畓)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위 매매 대금이 곽윤거가 본 논을 매수하는 사람에게 줄 돈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곽윤거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데, 곽윤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는 것이 본 밖에 없었고, 그래서 부득이 위 논이 가격을 위와 같이 산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본 매매 문서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매매 대금을 적은 부분에 봉인(封印)처럼 보이는 도장을 찍은 대목이다. 도장은 물론 숫자를 바꾸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한데, 명문 가운데 이러한 예, 그러니까 명문 중 금액이 표기된 곳에 도장을 찍은 예가 조선시대에 작성된 명문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 강점기 이후에 작성되는 명문에는 그러한 예가 자주 있었다.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물론, 명문에서 가격을 의도적으로 고치는 일이 일제 강점기 이후 자주 벌어졌다는 반증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본 거래를 진행하는 데 있어 증인으로 참여한 이의 이름은 성명숙(成明叔)이었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6년 이석기(李石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906년 함공수(咸公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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