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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鄕交誼倍爲親平日相從杖屨頻勤儉持身庭有訓溫 和接物里稱仁隨仙嗟未醒魂夢處世還羞處俗塵閭巷蕭條 無向所哀詞短幅淚沾巾 星州后人戚侄 李宗源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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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金尙鎬)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尙鎬 李殷弼 金尙鎬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상호(金尙鎬)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상호(金尙鎬)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상호는 유학자로, 이은필과 같이 계제사(禊祭祀)를 모시던 김해(金海)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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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辛亥七月 日 機池幼學元世孝房煥守등 27인 城主 辛亥七月 日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6.0*6.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1년(철종 2) 7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의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2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51년(철종 2) 7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의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27명이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사인(士人) 박정환(朴正煥)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열행(烈行)과 박정환의 효행(孝行)을 영읍(營邑)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박정환은 관련문서에는 박인필(朴仁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박정환의 소자(小字)로, 같은 인물이다. 관련문서를 함께 참고하여 먼저 청풍김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풍김씨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일찍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정성껏 받들어 모셔서 마을에서 그녀의 효행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에게 시집을 와서는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역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3년 동안 병석에 누어 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백방으로 구한 약들이 효과가 없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자, 죽을 지경에 놓였던 남편에게 소생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며칠을 계속 달여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자 남편이 점차 회생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환은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으로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정환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정환의 나이 불과 17세 때의 일이었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이와 같은 박정환의 효행에 감동한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공의(公議)를 모아 남원부사와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이같은 기지방 유생들의 상서를 접한 남원부사는 부부의 효열이 참으로 탁이(卓異)하여 매우 가상하다고 말하고, 감영에 보고하는 일은 좀더 공의(公議)를 기다리는데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정환이 박인필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정환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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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춘실(全春實)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전춘실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전춘실(全春實)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전춘실(全春實)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전춘실은 정선(旌善)전씨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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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김방혁(金邦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八年戊子二月 日 道光八年戊子二月 日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8년(순조 28) 2월에 김방혁(金邦爀)이 부안현(扶安縣) 선은평(仙隱坪)에 있는 현자답(玄字畓)과 황자답(黃字畓)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8년(순조 28) 2월에 김방혁(金邦爀)이 부안현(扶安縣) 선은평(仙隱坪)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4두락지와 황자답(黃字畓) 1두락지 등 모두 5두락지를 45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현자답은 부수로는 8복 2속인 곳이며, 황자답은 3복 2속 되는 곳이었다. 김방혁은 이 논들을 자신이 매입하여 경작해 왔으나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거래시 매입자에게 본문기 3장을 함께 넘겨주었으며, 만일 뒤에 이 논들에 대해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김방혁이 문서를 자필로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증인은 거래에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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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八年戊子二月 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用處自己買得縣內一作仙隱坪玄字丁四斗落只所耕八卜二束庫及黃字畓一斗落只所耕三卜二束合五斗落只本文記三丈幷以捧価錢肆拾伍兩依數捧上爲遣永永放賣日後若相左之弊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 金邦爀[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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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二十五年庚辰正月十一日金邦爀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急用處自己買得縣內一作仙隱坪伏在玄字丁畓四斗落只所耕八卜二束庫及黃字畓一斗落只所耕三卜二束合五斗落只本文記二丈幷以右人前捧価肆拾伍兩依數捧上爲遣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如有相左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閑良金允周[着名]證人閑良金泓吉[着名]筆執閑良姜有輔[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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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사돈 이굉구(李肱九)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巳十一月初二 李肱九 乙巳十一月初二 李肱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45년(헌종 11) 11월 3일 사돈 이굉구(李肱九)가 보낸 서간(書簡) 1845년(헌종 11) 11월 3일 사돈 이굉구(李肱九)가 보낸 서간이다. 아들이 돌아와 상대방의 안부를 잘 알았다며 혼례를 잘 치르고 신부가 바라던 것보다 넘치니 자신 집안의 큰 경사이며 기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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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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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年乙酉七月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所用緊急故傳來苧田二斗落天字所耕二負六束㐣價折錢文十六兩果仙隱洞前麓柴場五同落價折二兩合十八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中間遺失故以田當票一張果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文記告 官憑考事苧田柴場主 童蒙 金明轍[着名]證筆 幼學 姜士成[着名]證人 幼學 田福汝[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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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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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2년 이정수(李正壽)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壬子正月二十日 李正壽 壬子正月二十日 李正壽 전북 부안군 [印]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1월 20일에 이정수(李正壽)가 부안군(扶安郡)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밭의 규모를 완정(完定)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12년 1월 20일에 이정수(李正壽)가 부안군(扶安郡)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밭의 규모를 완정(完定)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이정수는 부안군 우동리(愚東里) 동평에 있는 모시밭(苧田)을 세를 준 4대(隊) 반으로, 콩밭은 1두 5승락, 미모(米牟)는 3두(斗), 콩 3두로 완정(完定)하고 이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가 "1912년 이정수(李正壽)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와 점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해 2월에 모시밭과 콩밭을 이낙선(李樂善)에게 방매하기 전에 거래물건의 규모를 완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약서에는 당시 우동리에 사는 이정수 외에 노적리(露積里)에 사는 증인(證人) 박치장(朴治章)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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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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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壬子正月二十日右契約事愚東里東坪苧田四斗五升落貰四[印]隊半果太田一斗五升落米牟三斗과太三[印]斗式完定事契約主 愚東里李正壽[印]證人 露積里朴治章[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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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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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2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李樂善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전북 부안군 [印]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尤東里)에 있는 밭 세 곳이다. 첫 번째는 밭의 지번호(地番号)는 3432이고 하자저전(荷字苧田) 2두락지(斗落只)이며 결수(結數)로는 4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원이다. 두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태전(荷字太田) 1두(斗) 5승락지(升落只), 결수로는 3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12원이다. 세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저전 2두 5승락지로 결수로는 4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44원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밭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이고 두 번째 밭은 태전(太田)으로 콩밭이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의 총면적은 6두락지이고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86원이다. 이 거래에는 부안군 입하면 우동리에 사는 밭의 주인 이정수와 부안군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매수인(買受人) 이낙선이 참여하였고 이정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김낙도(金洛都)가 보증인(保證人)으로 참여하였다. 매도인, 매수인, 보증인은 매매계약서에 서명, 날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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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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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0년 박수회(朴受繪)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九年庚午二月初三日 朴受繪 同治九年庚午二月初三日 朴受繪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0년(고종 7) 2월 3일에 유학 박수회(朴受繪)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0년(고종 7) 2월 3일에 유학 박수회(朴受繪)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수회는 긴급하게 돈을 사용할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던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황개산(黃盖山)의 묘 아래에 있는 명자답(命字畓) 3마지기를 7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는 다른 논과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하고 신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박수회와 증인(證人)으로 이취호(李取浩)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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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同治九年庚午二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有急用處傳來右田伏在一道黃盖山墓下命字三斗落所耕六負三束庫乙捧價錢文柒兩是遣右人永永放賣爲去乎舊文段他田中幷付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張興成爲去乎如有日後携貳之弊以此文憑考事田主 幼學 朴受繪[着名]訂人 李取浩[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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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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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庚戌十一月二十八日愚東里前坪謝字畓四斗落果慼字畓六斗落果太種田二斗五升落荷字庫文券幷付於家垡文券故未得出給印畓主 李相九 [喪不着] 字正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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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임자년(壬子年) 김호영(金浩榮)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壬子十月卄七日 金浩榮 壬子十月卄七日 金浩榮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임자년(壬子年) 10월 27일에 유학 김호영(金浩榮)이 부북 송사을리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임자년(壬子年) 10월 27일에 유학 김호영(金浩榮)이 부북(扶北) 송사을리(松事乙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호영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부북(扶北) 송사을리(松事乙里) 후평에 있는 정자(停字) 논 12마지기를 32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20복 8속이 되는 곳이었다. 거래 당시 본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을 때에는 이 문기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김호영과 정필(訂筆)로 유학 고시영(高時榮)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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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一區林壑窈而深中有高人善養心鑿井耕田閒夜月採山釣 水弄春禽爲仁可見災殃去積德從知福祿臨何處北邙埋 玉匣薤歌聲曲淚沾襟 慶州后人 崔文洙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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