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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惟 公邵德斌於天升彼白雲遽化仙懋以溫良門戶彰敎之仁義子孫賢依庇偏盛風塵歲影韾空踈杖屨筵千歲佳城那可作斜陽不覺淚漣漣 侍下生臨瀛朴容大 謹再拜哭輓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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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기(朴相基)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相基 李殷弼 朴相基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상기(朴相基)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상기(朴相基)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상기는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후인(臨瀛后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박상기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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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駕飄飄祖道遷俄客像望在生前陶朱産業非心事商皓鬢眉 處世仙八耋大歸云是翁千秋永訣正堪憐 公座身後座無感肖 子賢孫非繼侍 溟州后人 契下生 金章起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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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수(崔文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文洙 李殷弼 崔文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문수(崔文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문수(崔文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문수는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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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필(朴敬弼)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박경필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경필(朴敬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경필(朴敬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박경필은 반성(潘城)박씨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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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六年庚寅十二月十五日 明文右明文排結錢充納無路故伏在象邊里前坪畓八斗落價折錢文㱏佰五拾依數捧上是遣並以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以此文記告官卞政事畓主 辛奇男[喪不着]證筆 辛武然[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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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전재열(田在悅)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二年戊戌二月二十日 田在悅 光武二年戊戌二月二十日 田在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8년(광무 2) 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8년(광무 2) 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 쪽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재열은 논을 팔게 된 이유를 요용소처(要用所處), 즉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라고 밝혔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군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이자답(履字畓) 8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3부(負) 2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0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전재열은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전재열과 증인(證人)으로는 유학 김치도(金致道)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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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김봉준(金奉俊)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陰九月十日 金奉俊 大正元年陰九月十日 金奉俊 전북 부안군 [印] 2개 1*1 1개(적색, 정방형),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9월 10일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2년 음9월 10일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김봉준은 밭을 스스로 매입(買入)하여 경작해오다가 부득이하게 부안현 상동면 복성리에 있는 콩밭 2곳을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내자(乃字) 499호 태전(太田) 1편(片) 1두락지(斗落只)로, 결수(結數)로는 1부(負) 5속(束)인 곳과 462호 태전 21편 1두락지 결수로는 1부 5속인 곳이다. 두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10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봉준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매입자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만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상동면 복성리에 사는 김봉준과 증인(證人)으로는 같은 동네 사는 김광섭(金光燮)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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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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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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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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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33년 유광호(柳光浩)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元月十九日 柳光浩 朴文川 調案執事 癸巳元月十九日 柳光浩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3년(순조 33) 1월 19일 유광호(柳光浩)가 보낸 서간(書簡). 1833년(순조 33) 1월 19일 유광호(柳光浩)가 보낸 서간(書簡)이다. 년전(年前) 1월에 상대방의 방문을 받고 지금까지 위로가 되었는데 벌써 새해가 되었다며 새해를 맞아 복 받고 경사가 많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객(客)을 통해서 상대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듣고 염려되었다며 자신은 독감으로 두어 달 아팠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은 섣달 정사(政事)에서 승자(陞資)되었다고 하였다. 유광호의 아들은 유억(柳億)으로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운조루(雲鳥樓)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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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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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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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5년 김시근(金蓍根)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二月八日 蓍根 朴文川 乙酉二月八日 金蓍根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매동(梅洞)에 사는 김시근(金蓍根)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매동(梅洞)에 사는 김시근(金蓍根)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북로(北路)에서 폄하를 맞고 한탄스러웠는데 별일 없이 서울을 지나는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 한탄스러운 마음이라고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보내 준 해미(海味)에 깊이 감사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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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十年辛未正月初五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耕食是如可要用所致伏在上東面長水內坪巨字畓三負三束庫㱏斗五升落乙価折錢文參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閪失故只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考事田主 姜汝中[着名]證筆 田鳳圭[着名](背面)姜奴小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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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박오위장댁노(朴五衛將宅奴) 동일(東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拾肆年癸巳二月二十六日 金福介 朴五衛將宅奴東日 道光拾肆年癸巳二月二十六日 金福介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3년(순조 33) 2월 26일 김복개(金福介)가 박오위장댁(朴五衛將宅) 노(奴) 동일(東日)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 1833년(순조 33) 2월 26일 김복개(金福介)가 박오위장댁(朴五衛將宅) 노(奴) 동일(東日)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이다. 김복개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박오위장댁의 노 동일에게 팔았다. 문서상 토지를 산 사람은 박오위장의 노비(奴婢) '동일'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대부는 매매행위에서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집안의 노비를 내세워 계약을 했다. 즉, 이 밭의 실질적 매득인(買得人)은 박오위장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명자태전(命字太田)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5부(負) 6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냥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전(太田)은 콩밭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김복개는 중간에 구문기(舊文記)를 모두 분실하여 이번에 작성된 신문기(新文記) 1장(丈)만을 매수인에게 넘겨주었다. 추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을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밭의 주인 김복개와 정필(訂筆) 이기석(李基錫)의 이름과 서명이 각각 있다. 본 문서(文書)가 작성된 계사년(癸巳年)은 1833년으로 도광(道光) 14년이 아니라 도광 13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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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拾肆年癸巳二月二十六日朴五衛將宅奴東日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太田命字三斗落所耕五負陸束㐣捧價錢文捌兩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旧文記段中間閪失故以新文一張放賣日後如有爻象是去等持此文憑考卞正事田主 金福介[着名]訂筆 李基錫[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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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식(在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在植 李殷弼 在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재식(在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재식(在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재식은 유학자로,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하지만 만장이 훼손되어 재식의 성(姓)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을 사생(査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사생이란 사돈(査頓) 관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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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夏山華閥擅吾東詩禮風聲奕世長司馬宅中能繼武幽蘭谷裏自留香修文一夜丹祲壑化島千年海變桑苽葛情深淸範隔春山寂寂月蒼蒼査生 完山后▣ ▣在植 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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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堂寂寂主何寜乃?君今永永離明也雖分幽也會生而相樂 死而悲繁華互楡敦如許孤秀庭蘭慶不衰多少情懷今未敢 斜風那忍送靈輀 情契 咸安后人 趙鏞洛 慟哭再拜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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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寜華閥遠落來碧海鑑湖這一隈仁享九旬上年 壽厭煩是日復泉臺其二萬紫千紅當此時和風惠雨日遲遲 薤歌數曲人歸去酹醪以香膠哭以詩 侍生 眞珠 沈興鐸 謹拜哭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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