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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七年癸卯二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勢不得己伏在扶安立下牛東里右邊殊字苧田㱏斗伍升落只所耕三負五束廤価折錢文㱏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倂新旧文二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之弊端則持此文記告 官卞呈事苧田主 幼學 金耿龜[着名]證人 幼學 曺德弼[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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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임기주(林基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七年辛卯八月二十七日 林基柱 光緖十七年辛卯八月二十七日 林基柱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1년(고종 28) 8월 27일에 임기주(林基柱)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 우동리(牛東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1년(고종 28) 8월 27일에 임기주(林基柱)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 우동리(牛東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임기주는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팔았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입하면 우동리 우측 가장자리에 있는 수자(殊字) 저전(苧田)으로 1두(斗) 5승락지(升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부(負) 9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76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임기주는 구문기(舊文記)를 잃어버려 내어 줄 수가 없었고, 신문기(新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모시밭 주인 유학(幼學) 임기주와 증필(證筆) 나우성(羅祐成)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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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七年辛卯八月二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不得而伏在立下面愚東里右邊殊字苧田㱏斗五升落只所耕三負九束㐣価折錢文柒拾陸兩依數捧上是遣舊文遺失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苧田主 幼學 林基柱[着名]證筆 幼學 羅祐成[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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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公仁性賦於天鄕里聲名正尉然訪往平生高寄客春山二月永歸仙 射帿殃德欽多日尙義矯鳳己有年去去玆臺無憾地草蘭苞 竹溓庭前 花山后契下生 權達洙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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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래길(崔來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來吉 李殷弼 崔來吉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래길(崔來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래길(崔來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최래길은 유학자로, 본관은 강성(江城)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최래길은 망자에 비해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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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賢人坐處葱生香恨未當年好指芳八耋遐㱓仁所得 一門和氣福應長丹心辭退先塋下白首優逝上帝傍 髣髴儀容無處見籖歌凄咽盈眶 江城后人 崔來吉 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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頻病誰止病已連當時欲別更難言嗟我哀惝 如許異先人厚誼績相侍問來摠不尋常淚老去 尤愁望八年門外千山何處近琳宮好友是眞緣 全州后人 誼從弟 李正圭 謹再拜哭慰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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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拾餘年病已成訃島啄啄諸家驚若有天堂 何畏死歸於地下不如生相貌賓客悲含淚還住 輀旌獨去惝一盃樽酒東門外哭送尊公萬里程 慶州后人 生 金東植謹再拜哭慰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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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인(沈相仁)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相仁 李殷弼 沈相仁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조용락은 유학자로, 다정한 벗이면서 함안(咸安)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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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明水麗玉川陽降我地仙卽午堂延壽百年南極老積陰永世後昆昌一般風致胸襟月千首詞源牙顂香鸞鶴飄然何處去萬古靑山淚滿裳 丹城后人禹潤碩 謹再拜痛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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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北斗以南有一人 碧梧堂月爲隣百世文華鳴地閥平生仁性保天眞達者誰知三也足 贖兮難欲百其身泉臺千里令何處灑淚難堪永訣晨 安城后人李在雲謹再拜哭 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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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李成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성준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성준은 자신을 정하생(情下生)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정의가 두터운 사이에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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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염상봉(廉相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 幼學田鎭斅 幼學廉相鳳 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 幼學田鎭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6년(헌종 2) 정월에 유학(幼學) 염상봉(廉相鳳)이 논을 사면서 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6년(헌종 2) 정월 보름에 유학(幼學) 염상봉(廉相鳳)이 부안현 선은동에 있는 논을 사면서 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학(幼學) 전진효(田鎭斅)는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선은동 전평(前坪)의 현자답(玄字畓) 4두락지를 30냥에 염상봉에게 팔았다. 결부(結負)로는 8부 2속이 되는 곳이었다. 뒷날 다른 말이 생기면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답주인 전진효가 자필로 명문을 작성하였으며, 유학 조갑환(趙甲環)이 증인으로 참여하여 답주와 함께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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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幼學廉相鳳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畓伏在扶東仙隱洞前坪玄字丁四斗落只所耕捌負貳束㐣価折錢文參拾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鬧端則持此告官卞正事畓主自筆 幼學田鎭斅[着名]證人 幼學趙甲環[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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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이원익(李遠翊)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 臘月 十七日 遠翊 甲申 臘月 十七日 李遠翊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자신은 뜻밖에 지방관이 되어 부모 봉양을 하게 되었다며 오늘 어렵게 상대방이 있는 지역에 왔으나 종일 바람이 불어 만나러 가지 못하였으니 내일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원익은 이때 함경도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어 부임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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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四年甲午三月初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歉年至有緊用處扶北二作邙字丁十四斗落只三庫並以所耕三十一卜二束㐣価折文一百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段中間閪失故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紛紜之弊則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自筆 李安遇[着名]訂保幼學 金吉[着名]訂保幼學 金光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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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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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김광섭(金光燮)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元年陰七月四日 金光燮 大正元年陰七月四日 金光燮 전북 부안군 1.4*1.4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7월 4일에 김광섭(金光燮)이 집값으로 1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 1912년 음7월 4일에 김광섭(金光燮)가 집값으로 1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이다. 김광섭은 친척 동생 봉준(奉俊)의 전토(田土)와 산판(山坂)을 파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봉준 대신 김광섭이 계약자(契約者)가 되어 대금(代金)을 받고 영수증을 대신 작성해 준 것이다. 추가로 문권(文券)과 함께 도본(圖本) 2장을 배달증명(配達證明)하고 음7월 초6일까지 위 금액을 준수하기로 계약하였다. 계약자는 김광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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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㱏佰貳拾円也右ᄂᆞᆫ 族弟奉俊田土山坂賣渡代金을正히領收홈再文券与配達証的圖本二張은限陰七月初六日로準數轉渡次로契約홈大正元年陰七月四日契約主 金光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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