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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池三里戶籍單子第二十統四戶幼學朴政煥 前名麟煥年五十九庚申本密陽父學生 東乘祖學生 相源曾祖學生 春城外祖學生 金五弼本盆城妻金氏年五十九庚申籍淸風父學生 守澤祖學生 光魯曾祖學生 聖海外祖學生李國柱本全州賤口婢唜丹年戊子乙卯 相準印丁巳八月 日風憲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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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未三月 機池坊居民房煥貴元世五等 城主 己未三月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9년(철종 10) 3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1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등장(等狀) 1859년(철종 10) 3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1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등장(等狀)이다. 이들은 이 등장에서, 효자 박인필(朴仁弼)이 감영(監營)에서 포양(褒揚)의 제사(題辭)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연조(烟租)를 면제 받아 왔었으나, 이번에 억울하게도 그 특전에서 제외되었다고 탄원하고, 관련 증명 문서를 점련하여 올리니 다시 연역(烟役)에서 제외시켜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서에 제사(題辭)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관에 제출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관련문서에 따르면,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을 포함하여 전라도내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이처럼 어린 박인필의 지극한 효행을 포양하여 줄 것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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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안복동(安福同)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一月二十五日 安福同 光緖三年丁丑一月二十五日 安福同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1월 25일 안복동(安福同)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1월 25일 안복동(安福同)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안복동은 흉년(凶年)이 들어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물려받은 논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돈지 전평(前坪) 가자답(嘉字畓)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8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안복동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5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안복동은 신문기(新文記)에 "만일 뒷날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안복동과 증필(證筆)로는 김병후(金炳後)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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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2년 신욱(辛郁)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一年壬申九月二十日 申郁 同治十一年壬申九月二十日 申郁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2년(고종 9) 9월 20일에 신욱(申郁)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봉산(鳳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2년(고종 9) 9월 20일에 신욱(申郁)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봉산(鳳山)에 앞 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신욱은 돈이 급히 필요해서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동면 봉산 앞 들에 있는 논 5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9부(負) 3속(束)인 곳이며 화곡(禾穀) 30두(斗)도 함께 방매하였다. 매매(放賣) 가격은 125냥이다. 매도인(賣渡人) 신욱은 구문기(舊文記)는 1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만약 차후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이 문서를 가지고 사실을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거래 당시 신욱은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증인(證人)으로는 임진상(任鎭常)이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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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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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6년 김병두(金炳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貳年丙子十一月二十五日 幼學金炳斗 光緖貳年丙子十一月二十五日 幼學金炳斗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1월 25일에 김병두(金炳斗)가 부안현(扶安縣) 댁상동(宅上洞) 전평(前坪)에 있는 논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11월 25일에 염규석(廉圭錫)이 부안현(扶安縣) 댁상동(宅上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4두락지를 10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현자답은 부수로는 8부 2속이 되는 곳이었다. 거래시 매입자에게 구문기 5장을 함께 넘겨주었으며, 뒷날 이 논에 대하여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답주 김병두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유학(幼學) 전인홍(田仁鴻)이 증인으로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거래된 논이 있는 댁상동 현자답의 구문기에 선은평(仙隱坪)으로 기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안현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1820년 김방혁(金邦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828년 김방혁(金邦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 두 문기에는 현자답 외에 1두락지의 논이 더 있어서 모두 5두락지가 거래되었다. 거래가격은 45냥이었다. 약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논들 중 일부가 100냥으로 거래되었으니 논값이 크게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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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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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貳年丙子十一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宅上洞前坪玄字畓四斗落只所耕八負二束㐣價折錢文一百兩依數捧上是遣並以旧文五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幼學金炳斗[着名]證人幼學 田仁鴻[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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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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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敎旨朴龍祜爲通訓大夫行文川郡守兼春秋館記事官者道光四年七月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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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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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문천공 시문집(文川公詩文集) 文川公詩文集 文川公詩文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고서 원문 文川公詩文集 성책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서울시 송파구 박용호 후손가 문천공(文川公) 박용호(朴龍祜)의 시문집(詩文集). 문천공(文川公) 박용호(朴龍祜)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에 관에 들어가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휘릉(徽陵) 별검(別檢),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등을 지냈다. 현재 그의 후손가에 전하는 그의 고신(告身) 가운데 연대가 가장 뒤늦은 것은 1824년(순조 24) 7월 20일에 국왕이 박용호(朴龍祜)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이때가 47살이었기 때문에 관직 생활을 충분히 더 하였을 법도 한데 관련 문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시문집에는 정해년 3월 23일에 진행된 삼일제(三日製)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글이 있다. 정해년은 1827년(순조 27)으로 그의 나이 49세 때이다. 아마 이 무렵에도 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이 시문집에는 수십 편의 시문이 실려 있는데, 주로 관직생활을 하면서 동료 또는 선배 관원들과 주고 받은 차운시(次韻詩)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 일부 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次騎郞柳榮河 贈朴判書燕行 入直時追次泮中諸益花柳韻 次尙州宋監察奎弼 客中除夕 送別同色黃李兩友 癸未冬至 上元 次湖中鄭進士來留屯德崔雅家除夕韻 燈夕戱吟 天官直房階前種柳 與諸益賞花 次沁樓甲維翰韻 次肅宗大王傅子韻 送別金相稷注書 春虛 次李正言東迪 한편 시문집의 끝 부분에는 두 글자로 된 한자어(漢字語) 1천여 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달아놓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물건의 이름이나 성격, 의성어 등이 많은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모(嫫毋) : 추녀(醜女) 배우(俳優) : 희롱하는 일(戱也) 주유(侏儒) : 키가 작은 사람, 난장이(短人) 원탈(晼脫) : 해가 지는 것(日落) 아나(婀娜) : 아름다운 모양(美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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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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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3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拾壹年癸酉三月十七日 辛淇馨 李奎煥 同治拾壹年癸酉三月十七日 辛淇馨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3년(고종 10) 3월 17일에 신기형(辛淇馨)이 이규환(李奎煥)에게 부안현 서도면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3년(고종 10) 3월 17일에 신기형(辛淇馨)이 이규환(李奎煥)에게 부안현 서도면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기형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부안현 서도면(西道面)에 있는 상소산(上蘇山) 후평(後坪)의 봉자답(蜂字畓) 9마지기를 이규환에게 26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원래 있던 구문서는 중간에 화재로 인하여 타버렸기 때문에 신문서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면 증거로 삼아 관에 알려서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매매 당시 논 주인인 신기형과 필집(筆執)으로 최인길(崔麟吉), 증인으로 전기현(田基賢) 등 3인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상의 동치 11년은 계유년이 아니고 임신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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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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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捌円也右成黃里家垈價로正히領收홈大正四年陰四月二十四日領收人金文在[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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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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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5년 김창희(金昌稀)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大正四年陰正月二十六日 金昌稀 李議官 大正四年陰正月二十六日 金昌稀 전북 부안군 [印]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5년 음력 1월 26일에 김창희(金昌稀)가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토지와 건물을 이의관(李議官)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 1915년 음력 1월 26일에 김창희(金昌稀)가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토지와 건물을 이의관(李議官)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이다. 김창희는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 남자(男字) 집터 8승락(升落)과 건물 7칸을 이의관에게 총 650냥에 팔기로 거래하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이다. 당시 매매계약할 때 구문기를 건네주면서 나중에 다른 말이 있을 때 이 문기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가대(家垈) 주인 김창희와 보증인(保證人) 이관여(李官汝), 증인 김창운(金昌云)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의 중간에 재이동증명비(再異動証明費)는 구가대주(舊家垈主), 즉 방매자가 담당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대부분의 명문들이 착명(着名)으로 서명한 것과는 달리 인장(印章)을 찍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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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土地建物賣買契約書右契約書扶安郡東津面鳳凰里男字一九三八垈八升落結四負六束庫果建物七間을價折錢文六百五拾兩依數捧上이고舊文記 張右宅前에永永放賣거논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再異動証明費은舊家垈主가擔當事大正四年陰正月二十六日扶安郡東津面鳳凰里三統七戶家垈主 金昌稀[印]扶安郡東津面鳳凰里三[印]統五戶保證人 李官汝[印]扶安郡扶寧面仙隱洞證人 金昌云[印]李議官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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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3년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未臘月初十日 從兄 震祜 癸未臘月初十日 朴震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못본 지 여러 해라며 객지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의 아들은 예산 조씨(趙氏) 가문과 혼인을 정하였고, 선조의 문집 등 두어 가지 일은 종의(宗議)를 물어서 해야 하며 능행(陵幸) 때 힘써 보려 하는데 거둥 날짜를 정확히 모르니 통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은 복과(覆科)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하였다. 박용호가 외임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쓸쓸하다고 하였다. 박진호의 아들은 박규서(朴奎瑞)로 1825년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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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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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上有高峰下甑山分明靈地此中間左蘭右蕙芬芳宅北海東湖水繞環杜宇緣何啼血淚庭柯爲孰尙怡顔人間無有長生術斯日斯程復不還 侍生 臨瀛朴曾松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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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남응성(南應盛)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南應盛 李殷弼 南應盛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남응성(南應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남응성(南應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남응성은 유학자로,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그는 자신을 계제(契弟)라고 적고 있는데, 계제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남응성은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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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生而樂也死而憐生則謂人死後仙春草蘇來新快活王孫忽去正茫然招魂敀魄如何事白旗丹㫌別有天執彿下玄今寂寞拜詞却憶淚涓涓 契弟英陽南應盛 再拜 哭 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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