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822년 기지풍헌(機池風憲) 서목(書目)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정치/행정-보고-서목 壬午 日風憲金 壬午 1822 전북 남원시 [着名], [署押] 7.0*7.0(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윤3월에 기지방(機池坊) 풍헌(風憲) 김씨(金氏)가 남원군수(南原都護府使)에게 올린 서목(書目) 1822년(순조 22) 윤3월에 남원도호부의 기지방(機池坊) 풍헌(風憲)인 김씨(金氏)가 남원군수(南原都護府使) 앞으로 올린 서목(書目)이다. 기지방은 남원 48방 가운데 하나요, 풍헌은 향청(鄕廳)의 우두머리인 좌수(座首) 아래 있던 자로서, 면(面)에서 기강(紀綱)을 담당한 자였다. 풍헌 김씨가 본 서목을 올린 이유는 기지방에 사는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위 서목에 따르면 기지방의 삼리(三里)에 사는 박인필은 본관이 밀성(密城)이었으며, 강수공(江叟公) 박훈(朴薰)의 9대손(代孫)이요, 유학(幼學) 박동정(朴東禎)의 아들이었다. 박동정은 수 년 동안 그 어떤 약에도 치료가 되지 못할 정도의 중병으로 기력도 없고, 피부가 수척해지고 또 식음도 전폐하여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지난 해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당시 17세에 불과한 박인필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내어 아버지 박동정으로 하여금 드시게 함으로써 박동정의 목숨을 부지함을 물론이요, 박동정의 건강까지 되찾게 해 드렸다. 이에 기지방 풍헌은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인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한편 박인필의 효행을 널리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본 서목을 올리게 된 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영억(金榮億)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영억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영억(金榮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영억(金榮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영억은 익성(益城)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인제(姻弟)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는 인척간으로 동생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4년(순조 24) 8월 25일에 박인필이 기지방 미곡원에 있는 산지를 정천석으로부터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 1824년(순조 24) 8월 25일에 박인필(朴仁弼)이 기지방(機池坊) 미곡원(薇谷員)에 있는 산지를 정천석(鄭千石)으로부터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이다. 정천석은 위의 산지에 선산이 있어서 오랫동안 금양해 왔는데, 박인필이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산지를 팔아달라고 부탁하자 25냥을 받고 팔았다. 거래가 된 산지의 위치는 친산이 들어설 자리의 고총(古塚)이 있는 산등성이의 동편 사이 계곡에서 서편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정천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에 해당 산지를 표시하여 박인필에게 넘겨주었다. 증인으로 황상언(黃相彦)과 김인복(黃相彦)이 산지두 정천석과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으며, 유학 양필주(梁必舟)가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道光四年癸未八月二十五日幼學朴仁弼前明文右明文事段矣先山在於機池坊薇谷員禁養處右人其親入葬而請買是乎乙勢不得已入葬處古塚嶝東过間谷爲限西过折価錢貳拾伍兩依數交易捧上爲遣右人前本文背打永永放賣爲去乎日後同生子孫中若有雜談是去等持此文記告 官卞正事山地主 鄭千石[着名]訂 黃相彦[着名]金仁卜[着名]筆 幼學 梁必舟[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吏曺嘉慶十九年正月初一日奉敎承訓郎朴龍祜爲承議郎者嘉慶十九年正月 日徽陵別檢甲正別加判書臣李[署押] 叅判 叅議臣金[署押] 正郎 佐郞(背面)吏吏 李基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13년 박용호(朴龍祜) 교첩(敎牒)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嘉慶十八年十二月十三日 吏曹判書 朴龍祜 嘉慶十八年十二月十三日 吏曹判書 서울시 종로구 [署押] 1개 8.0*8.0 1개(적색, 정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3년(순조 13) 12월 13일에 이조(吏曺)에서 왕명(王命)을 받아 선교랑(宣敎郎) 박용호(朴龍祜)에게 발급한 교첩(敎牒). 1813년(순조 13) 12월 13일에 이조(吏曺)에서 왕명(王命)을 받아 선교랑(宣敎郎) 박용호(朴龍祜)에게 발급한 교첩(敎牒)이다. 이때 박용호는 승훈랑(承訓郎)으로 승급되었다. 선교랑은 문신 종6품 상계(上階)의 품계이며, 승훈랑은 문신 정6품 하계(下階)의 품계이므로 1단계 승급된 셈이다. 이 때 자품이 승급된 이유를 교첩의 본문에 "徽陵別檢癸十二別加"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휘릉(徽陵) 별검(別檢)의 관직에 있던 박용호가 계유년, 즉 이 해 1813년 12월에 있었던 별가(別加)의 혜택을 받아 승진되었다는 의미이다. 별가는 국가의 경사나 큰 행사 뒤에 백관에 대하여 베풀어지던 은전인데, 주로 품계를 더하여 주는 은전을 가르킨다. 휘릉은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다. 별검은 정8품 또는 종8품의 관직으로 무록관(無祿官)이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에는 '吏吏 李基黙'라고 적혀 있다. '이이'는 고신을 작성하는 이조의 서리로,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 불리웠다. 즉 박용호의 교첩을 직접 작성한 사람은 이기묵이었다. 이조와 병조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들 정색서리(政色書吏)들은 지방 양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첩은 5품 이하의 관원에게 이조나 병조에서 발급하는 임명장이다. 4품 이상의 관원에게 국왕이 직접 발급하는 임명장은 교지(敎旨)라고 불리웠다. 교첩은 대간(臺諫)의 인사비토권이라고 할 수 있는 서경(署經)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왕이 관직을 임명하더라도 5품 이하 관직의 경우 대간이 서경을 해야 비로서 그 인사가 효력을 발휘하였다. 국왕의 자의적인 인사권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인 셈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吏曺嘉慶十八年十二月十三日奉敎宣敎郎朴龍祜爲承訓郎者嘉慶十八年十二月 日徽陵別檢癸十二別加判書 叅判 叅議臣洪[署押] 正郎 佐郞(背面)吏吏 李基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機池坊上有司稟目爲行下事伏以民頃日良中以本坊班民朴仁錫頉番事白其爲密城君後裔而道內衷族之來歷昭詳論稟是乎則題內不可倉猝査處事行下敎是乎則事當姑待處分之如何是矣渠之班名若是其閥閱而暫帶賤名爲同儕羞恥者莫大於此矣且民旣爲此坊上有司而不雪此寃則無面目於入鄕中故更聒嚴明者極涉猥濫是矣鄕內齊類與渠矣姻婭齊聲投通論理致責於有司之不明是乎則民之於此事非但一鄕之聲罪將爲一道之聲罪則嚴揀明察之下敢不更稟哉渠矣譜諜文籍城主已爲親鑑敎是乎故更不仰溷而渠矣五代祖棄窩公碑銘及鄕儒通狀粘連仰稟爲去乎一一垂察敎是後矜其有世而泯沒而鄕而微賤同仁錫叔姪番名特爲分揀使大賢之後無愧於一世之矜式千萬仰甚謹冒昧以稟癸未十一月日上有司房[着名]使[署押](題辭)頉給事十六日該色[官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서상로(徐相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徐相魯 李殷弼 徐相魯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서상로(徐相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서상로(徐相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서상로는 유학자로,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17년 박금석(朴金石) 영증(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六年 領證主 朴金石 大正六年 朴金石 전북 남원시 [印] 1.0*0.6 1개(적색, 장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7년 3월 29일 박금석(朴金石)이 작성한 영수증 1917년 3월 29일 박금석(朴金石)이 작성한 영수증이다. 48원 80전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돈은 남원 보절면(宝節面) 황벌리(黃筏里)에 있는 답 4두지(斗只)의 값이었다. 별다른 언급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위 돈은 전체 매매 대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領證一金 肆拾捌円捌拾戔也但以宝節面黃筏里雲十三番四斗只畓価로正正히領受함大正六年丁巳三月二十九日領證主 朴金石[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21년 노모(魯某) 계약서(契約書) 1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十年 契約主 魯 大正十年 魯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1년 12월 30일 노모(魯某)가 이원채에게 작성해 준 계약서(契約書) 1 1921년 12월 30일 노모(魯某)가 이원채(李元彩)에게 작성해 주었던 계약서(契約書)이다. 노모의 아버지가 상대방인 이원채로부터 빌린 돈 200여 량에 대해, 노모의 형제들이 힘을 다하여 서로 나누어 갚는다는 내용이다. 각각의 몫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백형(伯兄)이 80량, 중형(仲兄)은 70량, 노모 본인은 50량이었는데, 이 돈은 앞으로 6개월 이내에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본 계약서의 증인은 노월선(魯月善)이 섰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契約書右契約事은 本人亡親債則이至爲二百餘兩인바 未得報債하야 本人佰兄은 捌拾兩 按當이고 本人中兄 柒拾兩 按當이고 本人은 伍拾兩 按當하와 半許年間에 舒力報納之意 玆成契約홈大正十年辛酉十二月三十日契約主 魯證人 魯月善李元彩 殿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42년 이용기(李容器) 담보차입증(擔保差入證) 고문서-증빙류-전당문기 경제-회계/금융-전당문기 昭和拾七年四月貳拾貳日 李容器 獒樹金融組合 昭和拾七年四月貳拾貳日 李容器 獒樹金融組合 전북 남원시 1.0*0.8 5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 4월에 이용기(李容器)가 오수금융조합(獒樹金融組合)으로부터 7백원을 빌리면서 채무의 담보물을 차입하고 작성한 증서(證書). 1942년 4월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오수금융조합(獒樹金融組合)으로부터 7백원을 빌리면서 채무의 담보물을 차입하고 작성한 증서(證書)이다. 담보물은 잔고 820원의 정기예금증서이다. 오수금융조합은 이용기가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정기예금증서를 담보물로 차입하고 유사시 이를 통해 변제하기로 하였다. 이용기가 오수금융조합으로부터 7백원을 빌리면서 작성한 문서는 "1942년 이용기(李容器) 차용금증서(借用金證書)" 참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注意書公立普通學校授業料ᄂᆞᆫ아신바의如히每月五日ㅅ가지納入ᄒᆞᆯ者인되貴下의未納分에對ᄒᆞ야ᄂᆞᆫ當該學校로부터兒童便에屢次督促ᄒᆞ여도今尙未納ᄒᆞ야當郡敎育施設上收入에 缺陷이生ᄒᆞ야莫大ᄒᆞᆫ支障을來케ᄒᆞ니左記未納金을本月五日까지當該學校又ᄂᆞᆫ郡廳에持叅納付ᄒᆞ기를特히通知홈昭和九年六月二日 南原郡守寶節面新波里李容器 殿記昭和九年度分未納金 壹圓 錢也昭和九年度自四月至五月 未納金 壹圓 錢也 李?淑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高峰山下世仍居左蕙右蘭香滿墟勤儉治家家有道仁溫處世世同譽空庭雪草靑還出佳兆煙松翠更踈慶福高門天必報莫非平昔積陰餘侍生安東權寧桓 謹拜哭輓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병수(權秉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秉洙 李殷弼 權秉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병수(權秉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병수(權秉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병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화산후인(花山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화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옛 별호이며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병수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公 曾擇處舊臨瀛八十年來送泰平遐祝長期南極壽緣何遽作北邙行湖邊風月懷深色谷裏蕙蘭惜別情講信春秋觀夫席後生不覺淚縱橫 花山后人 侍生 權秉洙謹再拜哭挽竹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