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5년 박치우(朴致愚)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三月初六日 朴致愚 朴佐郞 乙酉三月初六日 朴致愚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3월 6일에 박치우(朴致愚)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3월 6일에 박치우(朴致愚)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객지에서 무고함을 알게 되니 위로가 되었다며 복제(服制)를 만났는데 아직 남쪽 고향에 가지 못하였는지 물었다. 쇄마가(刷馬價) 감삭(減削)은 아전의 의송(議送) 때문인데 감영의 제사(題辭)도 몽롱하다며 도와주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당시 박용호는 서울에 있었고, 박치우는 자신을 문천(文川) 구민(舊民)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종명(權鍾明)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종명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종명(權鍾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종명(權鍾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종명은 자신을 척제(戚弟)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는 인척(姻戚)간으로 동생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교익(金敎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敎益 李殷弼 金敎益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교익(金敎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교익(金敎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교익은 유학자로, 호는 일문약인(一文若人)이며, 출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蘤尊達吾公五福全康寧氣質壽爲先堪怜帿契曾修好深慰琴心更合緣八旬南極塵間客二月東風海上仙裕後紹前何有憾古家聲望子孫賢 同契 生 權吉植謹再拜哭輓{艹/靑+枼}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달원(李達源)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達源 李殷弼 李達源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달원(李達源)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달원(李達源)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달원은 유학자로, 성산(星山)의 후생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寬仁年資得天眞壽福人間俱侈人窮逢八旬安二歲孝誠三子慕 終身一邨花柳無光地兩契鄕帿惜別辰歸不歸兮春艸綠薤歌 數非淚吾巾 星山後 侍下生 李達源 謹再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철기(金喆起)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喆起 李殷弼 金喆起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철기(金喆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철기(金喆起)가 이은필(李殷弼)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김철기는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그는 자신을 계하생(契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계하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계하생이라고 하였으니 김철기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蘤惟公天賦素寬仁每對愚生善諭諄八耋光陰經石火百年浩㤼嘆彫輪遨遊世外郡仙籍幻脫人間下界塵種德高門 餘慶大子蘭孫竹蔭長春 契下 生 江陵金喆起謹再拜哭輓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진경(金晉卿)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진경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진경(金晉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진경(金晉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진경은 명주(溟州), 곧 강릉김씨의 후손이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吏曺爲差定事嘉慶十六年九月初八日同副承旨臣安廷善次知口傳權知承文院副正字未差本龍祜戈只進叱使內良如爲口傳施行爲有置有等以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帖下文科新及第從仕郎朴龍祜准此嘉慶十六年九月 日差定判書 叅判 叅判[署押] 正郎 佐郞(背面)吏吏 李基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宿昔相欽一里居干干談咲數親踈床琴音斷情難續蘭玉輝生 慶?焉餘取枝翠翣傷心色一片白旗薄臆書斜風細雨 君歸路不覺日西獨立噓 情弟 咸安后人 趙鏞贊 再拜痛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진하(金鎭夏)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鎭夏 李殷弼 金鎭夏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심상길(沈相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심상길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상길(沈相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상길(沈相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상길은 진주(眞珠)심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12년 오병관(吳秉寬)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明治四十五年一月初五日 吳秉寬 明治四十五年一月初五日 吳秉寬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2년 1월 5일에 오병관(吳秉寬)이 남원군(南原郡) 고절면(高節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2년 1월 5일에 오병관(吳秉寬)이 남원군(南原郡) 고절면(高節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오병관은 자신이 매득한 논을 여러 해 동안 농사지어 먹고 살다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고절면 다산촌(茶山村) 아래 음지평(陰地坪)에 있는 우자원(愚字員) 논 6마지기를 250냥에 팔았다. 거래 당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문서 말미에 우자답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즉 동쪽으로 이환용(李桓容)의 논, 서쪽으로 우종호(禹鍾鎬)의 논, 남산의 북쪽으로 이경수(李敬洙)의 논이 있다고 기재하였다. 구문기는 유실되어 첨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다산촌은 오늘날의 남원시 보절면 금다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明治四十五年一月初五日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自己賣得畓累年耕食是多伏在南原郡高節面茶山村下陰地坪愚字負五十方畓六斗只十六畓結十七負三束㐣價折錢文貳佰伍拾兩依數交易捧上是遣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二說則將此文相考事答主 吳秉寬東李桓容畓西禹鍾鎬畓南山北李敬洙畓舊文記遺故未得添付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0년 김현(金顯) 영수증(領收證)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九年 領收人金顯 大正九年 金顯 전북 남원시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0년 음력 1월 14일 김현(金顯)이 작성하여 준 영수증 1 1920년 음력 1월 14일 김현(金顯)이 작성한 영수증이다. 남원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坡里) 광대평(廣大坪)에 있는 답(畓) 1두(斗) 5승지(升只)의 대금으로 200원을 우선 받았다는 내용이다. 김현이 이 밭을 누군가에게 팔기로 하고 그 대금을 받은 것인데, 위 200원이 전체 매매 대금인지 아니면 전체 금액 가운데 계약금조로 일부만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領收證-. 金貳百拾円也右金을 寶節面 新坡里 廣大坪畓 㱏斗五升只代金中爲先領收함大正九年陰正月十四日領收人 金顯(印)殿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2년 김영일(金永一)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丙午 契約主 金永一 丙午 金永一 전북 남원시 [指章]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2년 김영일(金永一) 계약서(契約書) 1912년 김영일(金永一)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써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용은 이렇다. 김영일은 본 문서를 받는 사람으로부터 병오년 이후부터 본 문서를 작성했던 시점까지 지속적으로 105승(升)의 쌀을 빌렸다. 병오년이라면 1906년이 되는데, 그 가운데 30승에 해당하는 돈 45량을 갚기로 하고, 나머지 75승은 1912년 가을 추수 때 갚는다는 의미이다. 그때까지 월 4리로 계산해 준다는 점도 추가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