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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西隣蘭報忽傷神苽葛親情更不眞歌往哭來 無限地醉生夢死片時春三山百歲遐蹤客蓬海孤 墳曠漢濱寶樹成行麟瑞又好看餘慶也應臻 江陵后人金振明 謹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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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通諭事橘有渡淮之欲而終知其爲橘花有落溷之髮是知其爲花今花何爲泥橘何爲柚哉然則可以人而不如淮之橘溷之花乎盖貴坊士人朴東禎仁碩叔侄粤自密城君後裔本以淸州木果洞人也簪纓世族詩禮古家論其世德則恭孝公其十一代祖也訥齋公其九代祖也江波先生之八代孫也棄窩先生之四代孫也棄窩公隱德不仕棄世於本府本坊者取不才明主棄之意而退世於山林中勝探者也不幸此家興替有數科?間寂班名世守者鄕中表族俱是姻婚之家道內美閥亦是戚紀之地則愚夫蠢童咸知其班脉之昭然常人庸士亦誦其來歷之閥閱而去甲乙大無哀我生靈黃口簽丁白骨徵布之餘士人東禎混入虛名故盖有齊顙之呈此終見頉給之題矣傳聞今又其侄仁碩不幸橫侵云然則仁碩之家便是常人樣卽亦不無齒寒之歎然尊卑有等上下有分則極守班名者必無是理而況我鄕知名之族有此橫侵之獘者豈不寒心而若使其淸州鄕人聞知則必有一正論於本府矣玆敢齋參通告窃願上有司與益尊特出齊憤之義一以明同濟之有等一以杜任掌之橫侵無至玉石之俱樊千萬幸甚右敬通于機池上有司癸未十一月初六日龍湖祠會所友通 幼學崔漸翼 李亨來 金星德 房基亨 盧學文 趙重伯 丁孝達 安錫宗 楊大壽 金星燁 房海相 李觀淵 朴鼎權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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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2년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午 掌議 金壽甲 壬午 1822 전북 남원시 [着名]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과 색장(色掌) 한경열(韓敬烈)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이다. 회문이란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보도록 쓴 글을 의미한다. 장의는 향교(鄕校)의 임원 가운데 으뜸 자리를, 색장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간부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따라서 본 회문은 향교의 임원들이 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김수갑 등이 본 회문을 돌린 이유는 삼리(三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삼리는 세 개의 거리가 만나는 삼거리를 말할 텐데, 여기서는 남원군 기지방에 속한 삼리였다. 본 회문에 따르면 박인필은, 당시 17세에 불과한 아이였지만 품성(稟性)부터 진정한 효자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 박동정은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병으로 수 년 동안 고생하고 있었는데, 특히 지난 신사년(辛巳年) 12월 경에는 병세(病勢)가 위중하고 몸에 피가 흐르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박인필은 자기 엉덩이 살을 떼어 내어 아버지께 드시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돌아가실 위기로부터 구해 냈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었는데, 이러한 박인필의 효행을 감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어 본 회문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갑 등이 박인필의 위와 같은 효행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지만, 박인필의 효행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박인필의 집안은 박인필만이 아니라 박인필의 아버지 박동정(朴東禎) 또한 이름난 효자였는데, 박동정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해 작성된 기지풍헌서목(機池風憲書目)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효자를 기리기 위해 통문이나 회문을 발송하는 일이 그리 중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대가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가질 법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전통과 효자에 대한 생각은 조선 후기라도 조선 초기나 조선 중기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그 암물한 시기에도 또는 해방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전통이 이제는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1950년도 혹은 1960년대라도 지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전통의 유습(遺習)은 질겼던 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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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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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주탁(沈周鐸)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周鐸 李殷弼 沈周鐸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주탁(沈周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주탁(沈周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심주탁은 유학자로,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만장에 쓴 다직(悉直)이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척에 있었던 부족 국가 이름이다. 따라서 '다직'은 삼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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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純仁性質自由天牗下安閒白髮年 溫飽平生傳世業聲名一代任才賢三山鶴 駕歸華表千載塵寰認謪仙泉路無窮敀莫懶夜坮寶瑟續前緣 侍生 悉直沈周鐸謹再拜哭輓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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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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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권길식(權吉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吉植 李殷弼 權吉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길식(權吉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길식(權吉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길식은 유학자로, 본관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동계생(同契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동계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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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경(金鳳卿)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봉경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봉경(金鳳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봉경(金鳳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봉경은 명주(溟州), 곧 강릉김씨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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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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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권오리(權五利)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오리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오리는 안동(安東)권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생(侍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가 어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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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모년(某年) 농지경작확인서(農地耕作確認書)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전북 남원시 [印]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모년(某年) 지주(地主)와 경작자(耕作者) 관계를 정리한 농지경작확인서(農地耕作確認書) 어느 해의 지주(地主)와 경작자(耕作者) 관계를 정리한 농지경작확인서(農地耕作確認書)이다. 세 곳 논의 크기와 각 논의 등급(等級) 그리고 각 논의 지주와 경작자의 이름이 정리되어 있다. 논은 모두 용두리(龍頭里)에 있었는데, 두 곳의 지주는 김창술(金昌述)이었고, 한 곳의 지주는 최호권(崔昊權)이었다. 김창술 소유의 논의 경작자는 趙몽운이었으며, 최호권의 소유 논은 경작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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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農小票自小歸 對照表地目積地等級任價貸格主栽培作物名地主耕作者公簿實地公簿實地住所姓名住所姓名산田坪113坪11362円龍頭里金昌述龍頭里趙몽운산田292957龍頭里金昌述龍頭里趙몽운산田626257龍頭里崔昊權으로는 垈地로 되였으나 實地에 田으로 되어 있기에 農地改革法上으로 보아 분배되였다하오니 垈地稅賦課 關係로는 何等 關係가 없다고 하오니 諒知하시앞기 仰望하나이다.背面279番은 公簿上 垈地281番은 公簿上 田임282番은 公簿上 田임[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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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21년 노모(魯某) 계약서(契約書)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大正十年辛丑十二月三十日 魯 李元輰 大正十年辛丑十二月三十日 魯 李元輰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1년 12월 30일에 노모(魯某)가 이원양(李元輰)에게 작성하여 준 계약서(契約書). 1921년 12월 30일에 노모(魯某)가 이원양(李元輰)에게 작성하여 준 계약서(契約書)이다. 노모는 돌아가신 부친(父親)의 부채가 200냥이 넘는데 이것을 3형제가 나누어 갚기로 약속하였다. 노의 형이 80냥, 동생이 50냥 그리고 본인은 70냥으로 각기 분담하기로 계약하고, 1년 안에 힘껏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당시 계약주 노와 증인(證人)으로 노하선(魯河善)이 참여하였는데, 서명이나 날인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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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契約書右契約事은主事宅本人亡親債則至爲二百餘兩인바未得報償야本人三兄弟分債報償이되本人兄이捌拾兩報償契約이고本人弟가19伍拾兩契約이고本人이柒拾兩幾許年間舒力報納之意玆成契約홈大正十年辛丑十二月三十日契約主 魯證人 魯河善李元暢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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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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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9년 이철수(李喆壽)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상장(賞狀) 고문서-증빙류-상장 사회-조직/운영-상장 昭和四年三月卄三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喆壽 昭和四年三月卄三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喆壽 전북 남원시 3.5*3.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9년 3월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4학년 이철수(李喆壽)에게 발급한 정근(精勤) 상장(賞狀). 1929년 3월 23일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4학년 이철수(李喆壽)에게 발급한 정근(精勤) 상장(賞狀)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출석하여 받는 개근상(皆勤賞)과는 달리, 출석일수에서 하루 이틀 빠졌을 때 받는 상이다. 이철수는 1928년에도 똑같이 4학년으로 정근상장을 받았는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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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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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賞狀第四學年李喆壽右者本學年中精勤ニ付玆ニ之ヲ賞ス昭和四年三月卄三日寶節公立普通學校 [學校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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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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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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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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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41년 이용기(李容器) 차용금증서(借用金證書) 고문서-치부기록류-근현대문서 사회-조직/운영-서식 昭和拾六年八月貳拾六日 李容器 獒樹金融組合 昭和拾六年八月貳拾六日 李容器 獒樹金融組合 전북 남원시 1.4*1.4 17개(청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1년 8월에 이용기(李容器)가 오수금융조합(獒樹金融組合)으로부터 2천원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금증서(借用金證書). 1941년 8월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오수금융조합(獒樹金融組合)으로부터 2천원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금증서(借用金證書)이다. 이자는 년 8푼 5리로 정하였다. 원금은 차입일부터 1933년 1월 20일까지 거치하되, 그 기간 동안의 이자는 매년 3월, 6월, 9월, 12월의 말일까지 각 4회에 걸쳐 나누어 납부하기로 약정하였다. 차용인 이용기 외에, 연대보증인 이교성(李敎性)이 거래에 참여하고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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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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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32년 정공일(丁恭一)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七年參月拾七日 丁恭一 李容器 昭和七年參月拾七日 丁恭一 李容器 전북 남원시 1.0*1.0 2개(적색, 원형), 1.4*1.0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2년 3월에 정공일(丁恭一)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1932년 3월에 정공일(丁恭一)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이다. 당시 정공일은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지주(地主)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가 남원의 전주이씨 소장문서이고, 같은 시기에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에 지주를 이용기(李容器)로 밝히고 있는 것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기가 지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용기는 관련문서에 따르면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소작료 등 8개의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 있고, 토지소재, 지번, 지목, 지적, 지가, 적요 등 6개 항목을 정리한 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인쇄된 서식에 지나지 않고, 소작료의 액수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소작인과 연대보증인 2인의 주소와 성명에 날인만 찍혀 있다. 요컨대 사실상 백지 계약서나 다름없는 토지소작계약서인 셈이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면서 미곡의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연평균 미곡생산량이 증가하였지만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1917∼1921년 평균 0.68석에서 1927∼1931년 평균 0.49석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이 한국 농민의 식량을 약탈하여 일본인들의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 식량수탈정책의 표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토지개량사업은 대지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을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심지어 소작농민들에게까지 전가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 농민층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화전민으로 하층분해되어 갔다.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은 지주의 지시에 따라 소작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계약서에는 소작료의 납입방법과 기준, 계약기간 설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소작인이 부담해야 할 소작료는 지대(地代)와 토지개량비, 영농에 필요한 자재비, 공과금을 포함한 것이다. 그밖에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운반비와 종자대·수리조합비·비료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수리조합 구역 내에서는 수확량의 7∼8할까지도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한 소작지 관리인으로 농민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소작계약 체결권을 악용하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위협했고, 소작료를 증액하며, 소작인들의 선물증여 등 물품공세 여부에 따라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 각종 폐해를 자행하였다. 그 외에도 소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와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사이의 차액을 가로채고, 추수 종사원들의 접대비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며, 소작인에게 금전이나 곡물을 고리대로 빌려주거나 물자를 고가로 팔아 폭리를 취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농촌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조합 건설비의 부담과 고율 소작료 등으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갔고, 거기에 더한 마름의 횡포로 인해 소작농민의 궁핍화는 가속화되었다.(1920년대의 대중운동, ?신편한국사? 49, 국사편찬위원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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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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