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竹谷風飄紼路臨歧百感應非此一時齒德終鮮鄕邑老歌謠不絶巷閭兒滿齋蕙葉空多碧繞圃篁隂自不移眷眷年來陪誨席長旁犻有在傍知 侍下生水原白達燮再拜謹輓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近年一契誼承則活相怡暫阻雪寒節因違看花時窓風如聽嘯樑月 完懸儀短誄寂情爲頌稱五福宜寂寂掩山扉世情太半 非寄歸孰未有眞惜大仁歸 契下生 善山后 金鎬俊 謹再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홍규(李弘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홍규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홍규(李弘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홍규(李弘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홍규는 완산(完山)이씨의 후손이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최돈태(崔燉泰)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燉泰 李殷弼 崔燉泰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돈태는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생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경로(李經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경로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경로(李經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경로(李經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경로는 완산(完山)이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賞狀 [學校印]第四學年李喆壽右者本學年中精勤ニ付玆ニ之ヲ賞ス昭和三年三月卄三日寶節公立普通學校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1927년 노사원(盧思源) 근저당해약증서(根抵當解約證書)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年 帶方金融組合 盧思源 昭和十年 金融組 전북 남원시 [印] 3.5*3.5 1개(적색, 정방형), 1.5*1.5 1개(적색, 원형), 1.2*0.8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5년에 작성된 노사원(盧思源)의 근저당해약증서(根抵當解約證書) 1935년에 발급된 노사원(盧思源)의 근저당해약증서(根抵當解約證書)이다. 근저당 해약증서란 근저당으로 설정된 것을 해제한다는 의미이다. 남원군(南原郡) 주천면(朱川面) 호기리(虎基里) 519번지(番地)에 있는 답(畓) 589평(坪)을 담보로 하고, 남원군 남원읍(南原邑) 하정리(下井里) 3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대방금융조합(帶方金融組合)으로부터 90원을 빌렸다가 이번에 돈을 갚고 근저당을 해제하게 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解約證書一金九拾円也右金液을 限度 昭和貳年拾貳月貳拾八日申請登記受付第壹五貳參貳號 以取得 根抵當權은 今回之에 解約爲也昭和十年二貳十五日南原郡南原邑下井里參番地根抵當權者 帶方金融組合仝所仝番地右代表者理事趙智敬文[印]盧思源殿不動産의 表示南原郡朱川面虎基里五百十九番地畓五百八拾九坪以上背面(생략)根抵當權讓渡證書昭和貳年拾貳月貳拾貳日 附根抵當權 認定契約에 同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龍현里二七九垈一一三坪五六五 金昌述龍現里三入垈 五六坪二八ㅇ 松山理彦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17년 이래(李來) 영증(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六年丁巳陰十一月十五日 李來 大正六年丁巳陰十一月十五日 李來 전북 남원시 [印] 4개 1.0*1.0 6개(적색, 원형), 1.2*0.8 2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7년 음력 11월 15일에 이래(李來)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도룡리(道龍里)에 있는 논을 팔고 돈을 받은 뒤에 작성한 영수증(領收證). 1917년 음력 11월 15일에 이래(李來)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도룡리(道龍里)에 있는 논을 방매한 후 돈을 받고 작성한 영수증(領收證)이다. 이래는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에 있는 신자(晨字) 36번 논 5두지(斗只)를 32원(圓)에 팔았다. 문서 말미에 또 다른 영수증이 첨부되어 있는데, 위와 같은 논, 즉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 신자 36번 5두지 매매가격으로 일금 20원을 잘 받았다는 내용이다. 원래 첫 번째 매매값은 32원이었는데 또 다른 영증에는 20원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매입자와 방매자가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모두 같은데 금액만 다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는 거래일자가 그 해 11월 15일이며, 두 번째는 그 해 11월 6일이다. 당시 영증답주 이래와 증참대표주(証叅代俵主)로 정창두(丁昌斗)가 참여하여 함께 날인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推薦狀南原郡巳梅面官豊里九五番地立候補者 梅村東器(舊名 李東器)來五月十日에 道會議員總改選이 施行됨은 旣히 熟知하시는 바로 밋습니다.時局은 正히 興亞建設事業遂行途上에 在하야 國民總力을 切實히 要求하는이때 我等代言者로 上意下傳하고 下意상達하야 明朗道政을 翼贊할 有爲人物을 道議壇上에 보낼 것은 我等有權者의重大한 責務로 生覺합니다. 萬一巧言令色과 淺見小技로 釣名取譽에 汲汲하고 其實에 드러 無爲無能한 人士로 登場케한다면 道政百年之計에 一大汚点일지니我等有權者로 엇지 羞愧함이 아니리오자에 本道와 本郡의 實情에 빗취어 深思熟考컨대 梅村東器(李東器)君은元來 名門盛族으로 其德行이 崇高하고일즉이 京城에 負笈하여 普成中學을 卒業後 鄕土에 歸하야 修身齊家의 本分을다하며 農山村救濟事業을 爲始하야 社會敎育事業에 盡瘁한 功勞至大하며 人物이 溫厚質素하고 禮讓謙遜하며 頭腦明快하고 言正心淳한 時代的 人物로서 實로 아南原十二萬 郡民을 代表하야 道政에 參與케할 분은 此人을 捨하고 누구를 求하리요是以로 敢히 君을 公薦하는 바이니 公明正大하신 有權者 諸位는 千金一票를 同君에 投하시여 鄕土의 名譽를 振興케 하고 道政의 隆昌을 圖하도록 千萬仰望하나이다.昭和十六年 四月 日推薦者代表 李正根 國定豊 大金鉉奭(金鉉奭) 松村斗南(李斗用)敬白殿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20년 남원(南原)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추수기(秋收記) 1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庚申 庚申 1920 南原 全州李氏門中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0년에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회계기(會計記) 전북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경신년 회계기(會計記)이다. 경신년은 1920년으로 추정된다. 어느 누가 얼마만큼의 쌀을 빌려갔는지, 빌려 간 쌀에 대한 이자는 어느 정도인지, 빌려 간 후 얼마를 갚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본 회계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25명 정도가 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朴春三 米三十二斗蘇俊明 米一石金成八 米一石 又二斗 盧石奉 獨芸姜士洪 米十斗利鄭東勉 利米一石 又五斗 姜士洪來姜成式 利米一石柳明軌 米一石高岩宅 米三十二斗 二十斗 李恒采獨芸 米十一斗水南谷 米十四斗丁成文 米四十六斗內十斗崔鳳獨芸 十斗德獨芸 五斗二 二今獨芸在一石一斗 十斗內實獨芸 米十斗長利崔鳳 十四斗 又十斗 丁成文獨条柳明軌 次子 美八斗 庚申賭米条 新成後本米上次金頤 七十二斗 又昨条十四斗內十斗二束獨芸 在七十六斗木洞宅 二十斗成祚 二十四斗京七 八斗 又柿谷宅 二十斗李泰永 達文 在二斗 再 二十八斗 又昨条二斗 金哥条 三十斗吳明五 上在 一同金命道 三十四斗 在文二同柳一鳳 米十斗 明五處標給利丁鴨谷 在十四斗 二升 又米五斗姜制大 四斗二升德洞宅 二十四斗內 二月減次金東順 米二斗 己未 条 米九斗 庚申 条 合十一斗 価七十七兩魯平洞 租十八斗梁堯洞 米十二斗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14년 이홍기(李泓器)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三年甲寅陰二月初六日 李泓器 大正三年甲寅陰二月初六日 李泓器 전북 남원시 [印] 1개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4년 음력2월 초6일에 이홍기(李泓器)가 남원군(南原郡) 보현면(寶玄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4년 음력2월 초6일에 이홍기(李泓器)가 남원군(南原郡) 보현면(寶玄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홍기는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았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보현면 동좌평(洞左坪) 2두락지(斗落只) 호자답(乎字畓)으로 수확량이 82석이고 부수(卜數)로는 7부(負) 5속(束), 2배미의 논이다. 방매 가격은 330냥이다. 매도인 이홍기는 새로 작성한 매매문서를 매수인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문서의 끝에는 만일 뒷날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보현면은 오늘날 남원시(南原市) 보절면(寶節面)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원시 보절면은 보현면과 고절면(高節面)에서 한 자씩 따서 보절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삼종질(三從姪) 이홍기와 증필(證筆)로는 삼종(三從) 이교전(李敎典)이 참여하였다. 논의 주인 이홍기만 도장을 찍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大正八年己未閏七月十五日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伏在寶節面筏坪宁字員㱏斗只卜數幾負幾束㐣價折錢金㱏佰肆拾兩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考事地主 金日先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필추(金必追)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必追 李殷弼 金必追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필추는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蘤 篁翁餘蔭有期仁仁善風儀古逸民處世持 身無俗態愛人接物露天眞了債塵間完 命道全歸唍簀上仙倫杖屨從玆花何日覿 碧棲堂上感如好新 査下生 眞珠沈儀燮 謹再拜哭輓 {艹/靑+枼}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惟公德性稟於天寬厚爲心福祿連身且全歸方見 孝壽何多辱去登仙五畝桑麻場圃濶一床詩礼 子孫賢泉坮若見茅先考報以平安二字傳 溟州后人 金頤卿 謹拜 哭輓 竹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