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丙寅春院誌發刊時贊助座目 儒林朴贊浩 一 金參萬원 鳳東邑九尾里崔宗烈 一 金貳萬원 九耳面斗方里柳元球 一 金壹萬원 參禮邑柳里李鍾煥 一 金壹萬원 鳳東邑成德里洪英炫 一 金壹萬원 所陽面大勝里本孫李鍾文 一 金壹萬원 鳳東邑九萬里儒林高錫煥 一 金壹萬원 鳳東邑秋洞李存培 一 金壹萬원 全州市孝子洞李明坤 一 金壹萬원 全州市鄭奎 一 金壹萬원 全州市殿洞張庭福 一 金五阡원 鳳東邑場基里朴性根 一 金壹萬원 全州市平和洞柳秉秀 一 金壹萬원 九耳面斗方里林坤銖 一 金壹萬원 伊西面許堈 一 金壹萬원 鳳東邑場基里李容璿 一 金壹萬원 全州市老松洞金炯烈 一 金壹萬원 龍進面新岡里李徹煕 一 金五阡원 九耳面平村里儒林黃鎭元 一 金參阡원權寧孫 一 金五阡원 鳳東邑芚山里韓相俊 一 金五阡원 參禮邑上實里高濟信 一 金壹萬원 伊西面元洞里李誠宰 一 金五阡원 所陽面金永敏 一 金壹萬원 助村邑七亭里柳東秀 一 金壹萬원 九耳面斗方里崔英植 一 金五阡원 上關面竹陰里李南衡 一 金五阡원 九耳面斗峴里柳永譱 一 金五阡원 參禮邑柳里朴澤根 一 金壹萬원 全州市平和洞陸相玉 一 金五阡원 裡里市馬洞儒林林在鹿 一 金五阡원 鳳東邑長久里全直權 一 金五阡원 鳳東邑明灘里金汝植 一 金壹萬원 三禮邑下里金道泳 一 金五阡원 九耳面斗方里安東文 一 金壹萬원 九耳面斗現里李殷衡 一 金壹萬원 九耳面亢街里李赫根 一 金壹萬원 全州市本孫李漢求 一 金參萬원 鳳東邑新城里李亨求 一 金五萬원 鳳東邑寒溪里李學求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鍾燁 一 金壹萬원 淳昌郡東谿面五桐里李哲敎 一 金壹萬원 龍進面池洞里本孫李羲源 一 金壹萬원 慶北義城郡鳳陽面沙阜洞李載魯 一 金五阡원 慶北義城郡安平面大司洞李承魯 一 金五阡원 慶北義城郡安平面大司洞李大魯 一 金壹萬원 任實郡雲岩面仙居里李羲權 一 金五阡원 鳳東邑場基里李鍾燮 一 金五阡원 鳳東邑場基里李起錫 一 金貳萬원 任實郡館村面館村里李鍾斗 一 金五萬원 全州市殿洞二 一二五一一李鍾根 一 金五萬원 全州市高士洞二二二李羲析 一 金參萬원 全州市金岩洞一二一 二八李羲運 一 金壹萬參阡원 全州市松川洞一 五三李俊求 一 金壹萬원 全州市西老松洞七三三一二本孫李德求 一 金貳萬원 鳳東邑九萬里李炳求 一 金壹萬원 鳳東邑九萬里徐夏澤 一 金壹萬원 慶北軍威郡軍威邑金鳩洞徐鍾淇 一 金五阡원 九耳面亢街里李容求 一 金壹萬원 龍進面雲谷里李永俊 一 金參萬원 全州市完山洞李文求 一 金五阡원 鳳東邑寒溪里李東敎 一 金壹萬원 裡里市中央洞李龍甲 一 金五萬원 鳳東邑九萬里李秋求 一 金五阡원 慶北義城郡鳳陽面沙阜洞李卓求 一 金五阡원 慶北義城郡鳳陽面沙阜洞李鍾洙 一 金五阡원 大邱中里洞本孫李愚正 一 金貳萬원 鳳東邑九尾里李羲暢 一 金貳萬원 鳳東邑新城里李鍾允 一 金貳萬원 鳳東邑新城里李學魯 一 金貳萬원 鳳東邑新城里李吉魯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羲慶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鍾桓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鍾大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羲素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李羲鍍 一 金壹萬원 鳳東邑寒溪里李鍾奉 一 金壹萬원 鳳東邑九萬里李羲福 一 金壹萬원 鳳東邑寒溪里本孫李利敎 一 金壹萬원李永求 一 金參萬원 裡里市新城里李幸求 一 金壹萬원 鳳東邑寒溪里李恒求 一 金壹萬원 鳳東邑寒溪里李玉成 一 金壹萬원 金堤郡進鳳面南下里李炳魯 一 金壹萬원 金堤郡進鳳面南上里李羲俊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城里儒林許東信 一 金壹萬원 鳳東邑場基里崔秉律 一 金壹萬원 鳳東邑新后里全泰然 一 金壹萬원 鳳東邑洛平里朴勝雲 一 金壹萬원 鳳東邑九尾里金孟洙 一 金五阡원 鳳東邑高川里儒林崔昌烈 一 金壹萬원 鳳東邑龍岩里本孫李基宗 一 金壹萬원 全州市麟后洞李羲重 一 金參萬원 全州市西完山洞一街六六本孫李台求 一 金五阡원 慶北大邱北區砧山洞李學魯 一 金五阡원 慶北大邱東區壽城洞李賢求 一 金五萬원 全州市李永求 一 金參萬원 裡里市多士吳基男 一 金壹萬원 所陽面柳上里李義宣 一 金壹萬원 所陽面馬水里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鳳岡書院誌發刊韻 潘南 竹軒 朴贊浩堂年賦鵩鳳山東素志高標泰伯同祠宇初成 英廟際令名不失墨胎風裸將席上儀無闕明薦樽中酒不空妥享三賢同一德爲修院誌禮新崇濟州 竹軒 高錫煥鳳岡院任鳳岡東德配三賢妥享同報賜儀存鄕社禮闡幽恩振國家風蘋蘩觀薦明誠謹多士駿奔數郡空賦鵩當年憂世事于令修誌誦功崇全州 農隱 李存七忘牛堂在鳳岡東賦鵩先鄕樵稼同素志明明凌日色後孫振振繼家風藝蕭裸薦神來格列俎加籩酒不空修誌于令多稱慶彬彬禮秩益新崇全義 李殷衡忘牛騎到沛城東故國河山感舊同素志尊奉王季意立心固守仲雍風高標卓卓千秋赫奇蹟依依古史空二百年來妥享事謹修一誌記功崇寧越 敬窩 嚴命涉祠宇翼然在鳳東三賢一宮妥儀同忘牛堂裡遺餘馥賦鵩文中感下風遯跡紅塵從此遠樂天世慮至今空晩修誌日多追慕潛德英名去益崇潘南 龜岩 朴勝雲大道分明燦我東衆生賴化服承風入域惟知鄒魯俗四隣猶存洛閩風昻揚先訓多興起振作彛倫萬世崇三餘堂 耽津 安東文先賢多出唯吾東院社妥寧釋菜同道德光華化善俗文章節義世淸風名垂百歲餘無盡聲聞千秋少不空書籍古今眞寶物鳳岡成誌世傳崇南陽 春岡 洪斗炫鳳岡院在鳳岡東憂世三賢一廟同難報霑恩歸舊業未伸交誼訴仁風恭翁事績傳靑史兩老純情耀碧空良誌告成今有日士林仰慕倍前崇金海 明農 金碩澈禮儀思想在於東尊祖隆師擧世同窓外蒼松來皓月園中綠竹送淸風春秋裸薦誠無盡主客詩筵酒不空行篤志高君子節今刊院誌後人崇天安 春坡 全斗烈天上文星降海東先生三位道相同憂邦守義遺來世設院顯忠振古風鳳起朝陽千仞遠鵬飛溟陸九霄空運通五百年間事鄕邑儒林誌記崇本孫 李龍甲院宇巍然建鳳東看今憶古士林同綱常不絶韓邦俗禮儀由來槿域風一世騎牛違素志九皐鳴鶴聞蒼空先生忠節眞如許過此人人拜又崇天安 錦堂 全泰然鳳岡院在鳳村東髦士申虔進退同書味初生雲谷月門庭端的紫陽風餘休漸被無遐邇敎雨溥施那實空三公遺芳難盡輟高長山水世皆崇本孫 全州 李亨求鳳岡院宇在額號里名同村俗葛天世絃歌濂洛風道焉非寂滅學也豈虛空誌是著徽蹟從玆倍尙崇小敍余於院誌釐正豕亥至發刊韻素拙于詩未免夏虫語氷而自不勝永歎之發敢將五言一律欲無鹽之效嚬抱復呵呵而已全州 念齋 柳東秀麗正祀賢覃我東白雲爲始禮儀同軒頭敞爽稽山月村俗慈良闕里風造詣贍幽難䌷繹持操縝密莫虛空先生文獻佚京洛誌役玆竣世所崇義城 中齋 金安植身處至難避鳳東求仁懿德古人同力田樵稼遺安策托採岫薇擬景風籩豆列前庶品實禮儀卒度敬無空當年妥侑三賢事修誌于今義益崇全州 李存培社院原來起鳳東適時成誌士論同先師訓業多良俗後學遵行是正風人莫見聞知識狹事無記錄世傳空千秋不朽惟文字方策長存盍敬崇天安 敬菴 全中權鳳岡院宇燦吾東三位英靈妥享同節義堂堂千世史貞心赫赫萬年風紫煙猶帶簷欄下瑞氣常含廟洞空籩豆精禋敬慕裡遺芳百代尤隆崇鳳岡書院誌卷之二終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鳳岡書院重腱任員 有司柳學根 全州金洛朝 扶安總務李元求 全州監董李愚煥 全州黃金澤 紆州蘇現奎 晉州鳳岡書院秋享禮成掌議崔圭泰 全州鄭龜鉉 河東有司金允漢 安東姜濟檣 晉州掌議鄭龜鉉 河東崔圭泰 全州有司姜濟檣 晉州金允漢 安東別任李愚煥 全州掌議朴源述 密陽有司蘇宰奎 晉州有司權相奎 安東別任李正求 全州掌議黃鎬建 紆州有司黃海性 昌原金榮植 安東別任李閏敎 全州掌議柳學根 全州崔圭燮 全州有司李炳羲 全義宋璋燮 礪山韓德善 淸州別任李羲燮 全州掌議金洛朝 扶安李廷斗 鳳山李圭一 慶州有司金鍾仁 通川宋炅春 仁義別任李順敎 全州掌議蘇鎭南 晉州韓張洙 淸州有司申濟元 平山李正遠 全義崔忠鎬 全州別任李鍾瑞 全州院長蘇鎭南 晉州掌議柳原根 全州朴時文 密陽有司李時寧 延安姜讓煕 晉州別任李鍾瑞 全州掌議朴勝大 潘南崔秉曄 全州有司李赫奎 全州金良煥 義城林鍾珍 兆陽別任李愚復 全州掌議金允漢 安東李炳馥 韓山有司姜翔煕 晉州吳珵鉉 寶城蘇鎭浩 晉州別任李鍾云 全州掌議黃海性 昌原鄭圭鉉 晉州有司韓光洙 淸州李炳天 全義柳鳳玉 全州別任李舜求 全州掌議蘇現奎 晉州金榮植 安東有司李赫瀕 全州李昌林 全義金源述 扶安別任李哲求 全州掌議柳泰養 全州有司車汶奎 延安柳基泰 文化韓曾洙 淸州趙燦基 金堤別任李羲炳 全州李圭燮 全州掌議崔信洪 全州蘇星奎 晉州李時寧 延安有司李謙嘉 全義閔丙燾 驪興李演明 全州宋俊浩 礪山別任李重振 全州李鍾文 全州掌議柳寅植 全州掌議韓光洙 淸州有司張錫台 興城李奉雨 慶州金昌洙 光山別任李鍾玉 全州掌議李赫奎 全州黃金澤 紆州有司鄭大錫 晉州朴準哲 密陽別任李鍾善 全州李圭燮 全州掌議柳瓊 全州掌議李昌林 全義姜讓煕 晉州李謙嘉 全義有司柳榮植 全州鄭遇鳳 東萊柳尙譱 全州崔汶鎬 全州金炯律 扶安別任李仁求 全州李圭燮 全州掌議李赫讙 全州柳基泰 文化掌議車文圭 延安有司林鍾錫 兆陽崔寅洪 全州李鍾擇 慶州全泰然 天安別任李鍾全 全州掌議林鍾珍 兆陽宋璋燮 礪山有司柳思譱 全州鄭鎭五 晉州別任李鍾天 全州院長金允漢 安東掌議李奉雨 慶州金昌洙 光山有司盧秉烈 豐川全泰春 天安金炯律 扶安別任李愚永 全州李鍾元 全州院長黃金澤 紆州掌議韓曾洙 淸州有司蘇鎭璣 晉州金炯律 扶安別任李鍾仁 全州院長黃金澤 紆州掌議韓曾洙 淸州有司蘇鎭璣 晉州金炯律 扶安別任李判求 全州院長黃金澤 紆州掌議權相奎 安東有司沈麟燮 靑松姜來煕 晉州別任李羲福 全州院長黃金澤 紆州掌議金源述 扶寧有司高準奎 濟州李錫遠 全義別任李漢求 全州院長黃金澤 紆州掌議李正遠有司金洛敎 泗川林玄淳 兆陽別任李淑敎 全州院長姜讓煕 晉州掌議蘇昌奎 晉州李相宰 全州有司金箕南 光山有司全成根 天安別任李漢求 全州院長韓曾洙 淸州掌議趙燦基 金堤有司鄭慶采 河東全海權 天安別任李占求 全州院長李昌林 全義掌議高準奎 濟州蘇鎭浩 晉州有司朴東根 密陽黃熙道 紆州別任李德求 全州院長李相宰 全州掌議鄭遇鳳 東萊有司崔日洪 全州張炳龍 仁同李鍾明 慶州別任李瑄求 全州院長高準奎 濟州掌議蘇鎭炯 晉州朴東根 密陽有司劉永萬 江陵崔應烈 全州有司鄭泰憲 東萊朴致陽 潘南別任李龍求 全州院長鄭遇鳳掌議金箕南有司全泰石黃昇淵別任李漢求院長鄭遇鳳掌議金箕南有司全泰石黃昇淵別任李漢求院長蘇鎭炯掌議黃煕道李錫遠有司朴祥陽李義龍柳宰根別任李順求院長金箕南掌議韓德善金洛敎有司金仁默有司李赫根朴龍得別任李仁求院長朴東根掌議崔日洪全成根有司朴昌奎邏學根金長培別任李漢求院長李錫院 全義掌議姜來煕 晉州有司全吉權 天安黃德周 長水別任李漢求 全州院長趙燦基 金堤掌議林玄淳 兆陽柳思譱 全州有司李暢燮 韓山金京石 金海柳永秀 全州別任李公新 全州李羲日 全州院長崔日洪 全州掌議金轅基 尙山李應三 全州有司趙景煕 楊州姜天馨 晉州李炳敏 鳳山別任李鍾玉 全州院長全成根 天安掌議權昌南 安東曺秉寅 昌寧有司崔炳天 全州黃宇淵 長水別任李文求 全州院長林玄淳 兆陽掌議朴準哲 密陽全泰然 天安有司金永安 光山姜太錫 晉州別任李漢求 全州院長柳思譱 全州掌議朴林 密陽崔炳天 全州有司朱永彰 綾州林在鹿 兆陽別任李鍾大 全州院長張炳龍 仁同掌議洪景漢 南陽黃德周 長水有司姜振遠 晉州張庭福 仁同崔昌烈 全州別任李鍾煥 全州院長朴林 密陽掌議鄭雲湧 東萊金正福 慶州有司姜允煕 晉州許東信 金海別任李羲文 全州院長曺秉寅 昌寧掌議金永安 光山張廷福 仁同有司朴判權 密陽高永俊 濟州別任李鍾文 全州院長全泰然 天安掌議李義龍 延安金炯律 扶安有司林萬淳 兆陽高錫煥 濟州別任李羲錫 全州院長全泰然 天安掌議金福淳 慶州林鳳淳 兆陽有司韓相俊 淸州權寧孫 安東別任李羲一 全州院長洪景漢 南陽掌議李鍾檡 慶州柳永譱 全州有司全七男 天安朴昌根 密陽別任李台求 全州院長洪景漢 南陽掌議李鍾檡 慶州柳永譱 全州有司朴昌根 密陽全七男 天安院長朴贊浩 潘南掌議崔宗烈 全州柳元球 全州有司李鍾煥 慶州洪英炫 南陽別任李鍾文 全州院長朴贊浩 潘南掌議崔宗烈 全州柳元球 全州有司李鍾煥 慶州洪英炫 南陽別任李鍾文 全州院長朴贊浩 潘南掌議崔宗烈 全州柳元球 全州有司李鍾煥 慶州洪英炫 南陽別任李鍾文 全州丙寅三月 日院長朴贊浩 潘南掌議崔宗烈 全州柳元球 全州有司李鍾煥 慶州洪英炫 南陽別任李鍾奉乙卯二月二十日春享時興學稧再設立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17년 이종태(李鍾泰) 등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巳 正月 初七日 李鍾泰 丁巳 正月 初七日 李鍾泰 毅淳 相春 寅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7년 정월 7일에 이종태(李鍾泰) 등이 파송 행원에 대한 의견을 전하고자 보낸 간찰(簡札) 1917년 정월 7일에 이종태(李鍾泰) 등이 파송 행원에 대한 의견을 전하고자 보낸 간찰(簡札)이다. 지난번에 받은 경문(京門)에서의 여러 건의 통지 내용은 긴급하게 필요하고 실로 자손을 위한 것이니 하루라도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먼 조상의 일은 소홀하기 쉽고 혼자 이루기도 어렵다. 금번 일은 이미 곡실과 보성의 단독 책임이 아니고 편들어주기를 기다릴 수 없다. 전국의 파족을 둘러보아도 변명하지 못할 듯하고, 우리 임무상에 도망할 수도 없다. 우리 곡실과 보성은 한 가문이니 반드시 일치된 의사로 조합하고 계획한 연후에 나중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파송하는 행원(行員)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의견을 제출하고 편지로 진달하고자 하니 양찰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인은 종태 외에 의순(毅淳), 상춘(相春), 인순(寅淳) 등이 있다. 피봉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서류 내역서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각종 서류와 그 수량을 적은 내역서이다. 각종 서류와 그 수량을 적은 내역서이다. 서류는 9종이며 그 수량을 아울러서 적었다. 서류 종류는 인감증명원, 주소변경신청서, 납세증명원, 매도증서 등이며 수량은 1~3매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2년 본다증일(本多增一)의 거주증명원(居住證明願)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大正拾壹年五月拾參日 南平面長 本多增一 大正拾壹年五月拾參日 南平面長 本多增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567 1922년 5월 13일에 본다증일(本多增一[혼다 준이치])이 현 거주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을 청원하는 거주증명원(居住證明願)이다. 1922년 5월 13일에 본다증일(本多增一[혼다 준이치])이 현 거주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을 청원하는 거주증명원(居住證明願)이다. 567과 동일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원적(原籍)과 거주자 및 생년월일, 신청내용, 주소지, 신청자, 수신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적은 대분현 우좌군 입번촌 530번지이다. 이것은 등기 신청상 필요해서 현재 살고 있는 나주군 남평면 동문리의 거주 사실을 증명해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신청자는 본다증일(本多增一[혼다 준이치])이며, 남평면장에게 보내는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무○년 김방식(金邦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之暮春九日 金邦植 可川 戊之暮春九日 金邦植 可川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무○년 3월 9일에 제 김방식이 상대의 집에서 돌아온 후로부터 약 2달간에 있었던 자신의 안부와 그리운 마음을 전한 안부 편지 무○년 3월 9일에 신호(莘湖)에 사는 제(弟) 김방식(金邦植)이 가천(可川)에 사는 이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형이 옛 것을 좋아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1월에 헤어진 후 어느덧 봄이 다 가게 되었다며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여 한탄스럽다고 했다. 상대와 상대의 종자부(從子婦)가 잘 있는지, 상대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생부(生父) 어른은 환후를 잘 조리하고 계신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상대가 있던 곳에서 돌아온 지 채 2일도 되지 않아 자신의 본래 병증이 일어나 먹을 것을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 사지에 마비가 와서 누웠다 일어났다 함에 사람을 대령한지 한 달이 넘었다가 겨우 집 뜰을 걷고, 현재는 거의 완치 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조카아이의 말로 듣기를 바란다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추신에는 형이 이 쪽으로 혹시 지나가게 되어도 너무 많은 물자를 주어 자신이 감사인사를 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하고 동생은 10리쯤 떨어진 곳에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적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3월 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三月 日 關文 050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통제사(統制使)의 장계(狀啓)에 대한 판부(判付)를 잘못 이해한 충청감사(忠淸監司)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말고 조간(趙侃)을 호위청(扈衛廳)의 군관(軍官)으로 옮겨 소속시킬 것.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충청감사의 장계(狀啓)에 아뢰기를,'이번에 도착한 태안군수(泰安郡守)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예전에 통제사(統制使)의 장계를 보니,〈사부(射夫) 등을 각 아문(衙門)의 군관(軍官)으로 정하지 말고 수군(水軍)에 전적으로 소속시키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장계에 대한 병조의 회계(回啓)에 대해 판부(判付)하기를,〈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한 군관(軍官)을 제외하고 나머지 남한산성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태거(汰去)하여 수군으로 보내라.〉라고 판하(判下)하였습니다. 본군(本郡)의 출신(出身) 조간(趙侃)·조사눌(趙士訥)·문준남(文俊男)·한인좌(韓仁佐)·김대택(金大澤)과 능천(綾川)의 군관인 한량(閑良) 안제민(安濟民) 등은 남한산성에 호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판하한 사목(事目)에 따라 수군의 사부로 바꾸어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호위청(扈衛廳)의 관문에 이르기를,〈총융사(摠戎使)의 군관 조간 등을 본청(本廳)으로 옮겨 소속시켰으니, 상번(上番)할 차례를 통지하여 올려보내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애당초 통제사 장계의 회계에 대해서는 주상께서〈남한산성에 호종하지 않은 각 아문의 군관은 모두 태거하여 수군에 소속시키라.〉라고 판하하였는데, 몇 개월도 되지 않아〈도로 군관으로 소속시키라.〉라고 하였으니, 조정의 어떤 명령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상급 관사의 분부가 아무리 중대하다고 하더라도, 판하한 사목을 위반하였는데도 지금 호위청의 관문을 첨부하여 공문을 보내 보고한다면, 결국 실정을 제대로 파악할 리가 없으며 군관이 되기를 도모하는 자들도 기꺼이 수군으로 나아갈 리가 없습니다. 각별히 장계를 올려 군정(軍政)을 중시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재가받아 주상의 결정을 받은 일이 있었으니 지금 와서 연이어 변경할 수 없습니다. 수군을 싫어하여 회피하고 서울 아문의 군관으로 소속되기를 도모하는 자들을 당사자는 적발하여 죄를 정하고 자망(自望)하여 군관으로 뽑아 데려가려고 올린 문서는 시행하지 말되, 다시 병조에서 거듭 밝히고 규정을 세워서 조정의 명령이 하나로 귀결될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 장계에 의거하여 본조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위의 통제사 장계에서는「본도(本道)의 바닷가 등 14개 고을도 모두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의 예에 따라 자망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는데, 지금 충청감사의 장계를 보면 태안(泰安)에 사는 충융사의 군관 조간 등도 태거하여 수군에 소속시키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애당초 통제사 장계의 본래 취지를 잘못 살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당 조간을 총융사의 군관으로 계속 소속시키고 태거하여 수군에 소속시키지는 말라고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3월 5일에 우승지(右承旨) 신(臣) 허계(許啓)가 담당하여,'「판하한 문서를 살펴서 처리하라.」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하였다. 판부에 의거하여 본조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판하한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작년 6월 13일에 통제사의 장계에 아뢰기를,「본도 바닷가의 전선(戰船)이 있는 각 고을의 무사(武士)는 모두 양서의 예에 따라 각 아문에서 군관으로 자망하지 못하게 하고96) 전후로 자망했던 사람들도 모두 다 파하여 돌려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장계에 대해 회계하자 판하하기를,「군관 중 남한산성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모두 태거하여 돌려보내라.」라고 판부하였습니다. 충청도 태안에 사는 조간 등은 남한산성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으나 애당초 판하한 내용에 해당되지는 않으니, 전에 복계(覆啓)했던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 3년 3월 9일에 우승지 신 허계가 담당하여,'「삼남(三南)도 똑같이 시행하라.」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3년 3월 일.▶ 어휘 해설 ◀❶ 사목(事目) : 법령(法令)과는 별도로 작성된 세부 규정이나 시행 세칙을 가리키며, 절목(節目)이라고도 하였다. 사목 또는 절목은 국왕의 지시나 관사의 건의에 따라 문서로 작성하여 해당 관사에 비치하였으며, 추후에 지속적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 내용은 새로운 관사나 관직의 설치와 업무에 대한 규정, 특정 사안에 대한 처리 규정, 왕명을 봉행하는 관원의 사무 지침 등을 항목별로 열거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사목 또는 절목을 문서로 작성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을 때의 문서로는 별단(別單)이나 단자(單子)를 사용하였다. 兵曹爲相考事."節啓下敎忠淸監司狀啓內, '節到付泰安郡守牒呈內, 「曾見統制使狀啓, 則以〈射夫等, 勿定於各衙門軍官, 而專屬舟師.〉事該曹回啓中判付內, 〈山城扈從軍官外, 其餘未入山城者乙, 幷爲汰送舟師.〉亦判下爲有等以. 本郡出身趙侃·趙士訥·文俊男·韓仁佐·金大澤、綾川軍官閑良安濟民等, 不得扈從山城乙仍于, 幷依判下事目, 改定於舟師射夫爲有如乎. 頃者扈衛廳關內, 〈摠戎使軍官趙侃等, 移屬本廳爲去乎, 使之番次知委上送.〉爲臥乎所. 當初統制使狀啓回啓中, 自上以, 〈山城未扈從各衙門軍官, 幷汰屬舟師.〉亦判下爲有去乙, 未及數月, 〈還屬軍官.〉亦爲臥乎所, 朝家號令, 莫適所從. 況上司分付, 雖重, 有違判下事目, 今若粘移論報, 則終無得情之理, 圖軍官者, 亦無樂就舟師之理. 各別狀啓, 以重軍政爲只爲.」是白置有亦. 前日已有啓下定奪之事, 則今不可續續更改. 厭避舟師圖屬京衙門軍官者乙, 當身擲發定罪, 其自望推捉公事, 勿施爲白乎矣, 更令該曹申明立科, 俾朝家之令得以歸一爲白只爲.'狀啓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上項統制使狀啓, 則乃以「本道沿海等十四官, 一依兩西例勿令自望.」爲啓, 而今見忠淸監司狀啓, 則泰安居摠戎使軍官趙侃等亦, 欲汰屬於舟師, 此必誤察當初統制使狀啓本意是白置. 同趙侃, 仍屬摠戎使, 勿爲汰屬舟師之意, 行移, 何如?' 崇德三年三月初五日, 右承旨臣許啓次知, '啓, 「判下公事, 相考處置.」爲良如敎.'事據曹啓目, '粘連判下是白有亦. 上年六月十三日, 統制使狀啓, 「本道沿海有戰船各官武士, 則各衙門軍官, 一依兩西例勿令自望, 前後自望之輩乙良置, 幷皆罷還.」事回啓判下內, 「軍官中未入山城者乙良, 幷爲汰送.」事敎是白在如中. 忠淸道泰安居趙侃等, 雖不入山城, 不在當初判下之中, 依前覆啓施行, 何如?' 崇德三年三月初九日, 右承旨臣許啓次知, '啓, 「三南一體施行.」爲良如敎.'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崇德三年三月 日.❶ 望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003 여이징(呂爾徵)의 관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望'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003 여이징(呂爾徵)의 관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3월 26일 첩정(牒呈) 戊寅三月二十六日 牒呈 053 정포만호(井浦萬戶) 겸 삼도해운판관(兼三道海運判官) 정연(鄭?)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첩정(牒呈) : 조전사목(漕轉事目)에 조선(漕船)을 잘 호송할 것.무인년 4월 17일 도착.정포만호(井浦萬戶) 겸 삼도해운판관(兼三道海運判官) 정연(鄭?)이 호송하는 일 때문에 보냅니다."전라도 영산창(榮山倉)으로 빌려서 내려보낸 원래의 조선(漕船) 5척에, 영산창에 소속된 광주(光州) 등 5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균등하게 나누어 싣고, 오는 4월 2일에 조선을 출발시켜 한강(漢江)으로 올라갑니다. 조선이 경유하는 연로(沿路)의 각 고을과 진포(鎭浦)는 해당 조선을, 조전사목(漕轉事目)에 따라 수군(水軍)의 병선(兵船)을 정돈하여 각자 경내 바닷길의 상태가 변화하는 곳에서 차례차례 폐단 없이 호송하고, 도착 확인증을 받아 도(道)에 올려 조선이 침몰하는 사태가 없게 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귀도(貴道)에서도 똑같이 신칙하여 시행해주시기 바랍니다."무인년 3월 26일. 차사원(差使員) 정포만호(井浦萬戶).▶ 어휘 해설 ◀❶ 조선(漕船) :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를 바닷길로 운송할 때 사용하던 선박을 가리키며,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하였다. 전세는 11월 1일부터 거두기 시작해서 다음 해 1월까지 완료한 뒤 서울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는데, 전세를 운송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육로(陸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서울과의 거리가 가까운 경기와 강원도 일부는 전세를 육로로 운송하여 납부하였고, 서울과의 거리가 멀더리도 전세로 거둔 곡식을 운송하기 편리하도록 돈이나 베로 바꾸어준 경우에도 육로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다. 둘째는 수로(水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수로는 서울의 한강(漢江)으로 연결된 강원도와 충청도의 물길을 가리킨다. 이처럼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전세를 운반하기 위해 원주(原州)의 흥원창(興元倉), 춘천(春川)의 소양강창(昭陽江倉), 충주(忠州)의 가흥창(可興倉)이 설치되었고, 이곳 창고에서 참선(站船)에 전세를 실어 서울로 운송하였다. 셋째는 해로(海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육로나 수로로 전세를 운송할 수 없는 삼남(三南) 지역과 황해도가 이 방법을 이용하였는데, 이때 이용한 선박이 조선이었다. 조선으로 전세를 운송하기 위해 바닷가나 바다로 연결된 강가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였다.『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조전(漕轉)〉에 의하면, 충청도에는 아산(牙山)의 공세곶창[貢稅串倉], 전라도에는 함열(咸悅)의 덕성창(德城倉), 영광(靈光)의 법성포창(法聖浦倉), 나주(羅州)의 영산창(榮山倉), 황해도에는 배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을 설치하였다. 그뒤 나주의 영산창, 강음의 조읍포창,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은 폐지되고, 함열의 덕성창은 성당창(聖堂倉)으로 바뀌었으며, 옥구(沃溝)의 군산창(郡山倉)이 새로 설치되었다. 경상도는 지토선(地土船)으로 전세를 운송하다가 영조 36년(1760)에 조엄(趙曮)의 건의에 따라 창원(昌原)의 마산창(馬山倉), 진주(晉州)의 가산창(駕山倉), 밀양(密陽)의 삼랑창(三浪倉)을 설치하였다. 조창에는 일정한 수의 조선과 조군(漕軍)을 소속시켰다. 『속대전(續大典)』 「호전」 〈조전〉에 의하면, 아산의 공세곶창에는 조선 15척과 조군 720명, 함열의 성당창에는 조선 11척과 조군 528명, 영광의 법성포창에는 조선 28척과 조군 1344명, 옥구의 군산창에는 조선 17척과 조군 816명을 두었고, 『대전통편(大典通編)』 「호전」 〈조전〉에 의하면, 창원의 마산창에는 20척, 진주의 가산창에는 20척, 밀양의 삼랑창에는 15척의 조선을 각각 두었다.조창에서 전세를 실은 조선은 압령차사원(押領差使員) 또는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의 지휘를 받아 해로로 운항하였으며, 중간 지점인 충청도의 원산(元山)과 안흥(安興)에서 점고를 받은 뒤 서울의 한강 가에 설치된 광흥창(廣興倉) 등의 창고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다. 조선이 지나가는 바닷가 고을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에게는 조선의 호송 책임을 부여하여, 물길을 잘 아는 사람 두 세명씩을 각 조선마다 태워서 인도하게 하고 풀등이 있는 곳에는 표시를 하여 부딪치지 않게 하였다. 조선이 운항 중에 침몰되면 해당 지역의 수령은 즉시 직접 달려가서 건져냈고, 건져내지 못한 곡물은 해당 조선의 감관(監官), 색리(色吏), 사공(沙工), 격군(格軍)에게서 징수하였다.『경국대전』 「공전(工典)」 〈주거(舟車)〉에 의하면, 바다와 강으로 운항하는 선박을 각각 대선(大船), 중선(中船), 소선(小船)으로 나누고 5년 사용하면 수리하고 10년 사용하면 새로 제작하였다. 『속대전』 「호전」 〈조전〉에 의하면, 강으로 운항하는 수참선(水站船)은 7년이면 개삭하고 14년이면 새로 제작하였으며, 바다로 운항하는 조운선은 10년이면 개삭하고 20년이면 새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대전통편』 「호전」 〈조전〉에서는 조운선에 대한 규정을 『경국대전』 「공전」 〈주거〉에 따라 5년이면 개삭하고 10년이면 새로 제작한다고 하였다.❷ 조전사목(漕轉事目) :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를 조선(漕船)에 실어 서울로 운반하는 일과 관련된 세부 규정을 가리킨다. 조전(漕轉)은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를 조선에 싣고서 바다와 서울의 한강을 거쳐 광흥창 등의 창고로 운반하는 것을 가리킨다. 조전을 위해 삼남의 각 도에는 조창을 설치하였다. 해운판관(海運判官) 또는 영운차사원 등이 조운선을 영솔하여 올라올 때에는 경유하는 지역의 수령과 변장이 조운선을 잘 인도하여 호송할 책임이 있었다. 사목(事目)은 특정 사안이나 제도에 대한 세부 규정을 가리키며, 절목(節目)과 혼용하였다.❸ 차사원(差使員) : 지방에서 서울로 물건을 가지고 올라가거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차출된 관원을 가리킨다. 삼남의 전세를 운송하는 압령차사원 또는 영운차사원, 각 도마다 전문(箋文)을 모아서 가지고 올라가는 전문차사원(箋文差使員), 표류한 선박을 호송하기 위한 호송차사원(護送差使員), 국왕이 행차할 때 차출된 각무차사원(各務差使員) 등이 있다. 戊寅四月十七日到付.兼三道海運判官爲護送事."全羅道榮山倉借送元漕船五隻亦中, 倉屬光州等五邑田稅, 惠伊分載, 來四月初二日, 發船上江爲去乎. 所經沿路各官浦, 同漕船, 依事目, 軍兵船整齊, 各其境內變遷處, 次次無弊護送, 受到付上道, 俾無臭載之患事, 分付爲在果. 貴道以置, 亦爲一體申飭施行向事."戊寅三月二十六日. 差使員井浦萬戶.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4월 11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十一日 關文 055 의정부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직언(直言)을 구하는 전지(傳旨)를 잘 살펴서 시행하고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할 것.무인년 4월 18일 도착.의정부가 직언(直言)을 구하는 일 때문에 보낸다."주상께서 이르기를,'직언을 구하는 교서(敎書)는,「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역대 임금이 물려주신 큰 기업을 외람되게 지키고 있으므로 이를 감당할 수 없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종일토록 애를 써서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나100) 나의 정성이 하늘의 신뢰를 받지 못하여 하늘의 분노가101) 그치지 않았으며,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백성을 다친 사람이나 자식처럼 여겼으나102) 나의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났다. 재이(災異) 현상이 계속 나타나고 비통해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내가 측은하게 여기고 상심하여 자신을 반성해보니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워서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이제 봄과 여름이 교차하고 곡물을 파종하는 시기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고 비가 내리지 않아, 양맥(兩麥 보리와 밀)은 메말라서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고 전답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서 농부들이 쟁기를 팽개쳐두었다. 봄철의 밭갈이를 이미 망쳤으니 가을의 수확을 어찌 바라겠는가! 가엾은 나의 백성만 거의 죽게 되었으니, 아!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다.103) 여기까지 말을 하고 보니 마구 눈물이 쏟아진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더구나 이처럼 큰 난리를 겪고 난 끝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바로 발생하여 고아와 과부가 의지할 수 없으며, 칙사(勅使)가 다녀가자마자 가난한 백성은 양식마저 다 떨어졌다. 굶주리고 목마른 다급한 상황조차도 구제하기 어려울까 걱정인데, 이렇게까지 재해가 닥치니 나는 감히 이유를 모르겠다. 나와 걱정을 분담하는 수령들이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백성이 몹시 착취를 당하고 있어서인가? 지방에 파견된 장수가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군병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있어서인가? 궁궐이 엄중하지 않아 부정한 통로가 열려 있거나, 관직 제수가 공정하지 않아 뇌물이 횡행하고 있어서인가? 형정(刑政)이 문란하여 옥사(獄事 형사 사건)와 송사(訟事 민사 사건)가 지체되거나, 상벌(賞罰)이 어긋나서 권장과 징계가 막혀서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아서 나의 과실을 듣지 못하거나, 선악(善惡)을 구별하지 않아서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이 뒤섞여 나아와서인가? 붕당(朋黨)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공정한 여론도 소통이 막혀 있어서인가? 사치스러운 풍조가 아직도 여전하여 몸소 실행하는 진심이 신뢰를 받지 못하거나, 명령에 모순이 있어서 솔선수범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음기(陰氣)는 성대하고 양기(陽氣)는 미약하여 내외(內外)의 구분이 일반적인 법칙을 상실해서 그런 것인가?길흉(吉凶)은104) 들어오는 문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일 뿐이고,105) 하늘은 모두 우리 백성을 통해 보고 들으니,106) 어찌 아득히 먼 하늘에다가 책임을 떠넘기고 나에게 있는 도리를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은(殷)나라 탕왕(湯王)과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전례를 행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하늘의 경고에 호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로 삼아야 한다.107) 그래서 이미 침전(寢殿)을 피하여 스스로 신칙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는 등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에 최선을 다하였다. 나의 조정에 있는 신하와 초야에 있는 선비 중에는 틀림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잘못된 정치와 과실 중에서 어떤 일은 백성을 상하게 할만한 일이고 어떤 일은 재이를 불러들일 만한 일인지를 각각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하라. 말이 정도에 지나치더라도 내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아! 하늘이 높아도 낮은 곳으로부터 민심을 듣고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말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천 리에 걸쳐 큰 비가 내리기도 하니, 하늘이 감동하는 것은 마치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빠르다. 이것이 내가 허둥지둥 서둘러서 재이를 구할 직언을 기어이 들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한 해의 정무(政務)에 힘쓰고 있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깨달으라.」라고 전국에 포고하도록 의정부에 내려주라.'라고 하였다.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11일에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이무(李楘)가 공경히 받든 전지(傳旨)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도내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하라."4월 일.▶ 어휘 해설 ◀❶ 교서(敎書) : 국왕이 백성에게 널리 알려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어 다중(多衆)에게 반포하기 위해 발급하거나 특정한 사안과 관련하여 개인에게 발급하던 문서이다. 따라서 교서는 수취자가 다중이냐 개인이냐에 따라 다중에게 반포하는 교서와 개인에게 발급하는 교서로 나눌 수 있다. 다중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국왕이 즉위할 때 전국의 신민에게 반포하던 즉위교서(卽位敎書), 국왕이 왕위를 세자(世子)에게 물려주면서 반포하던 전위교서(傳位敎書), 국왕이 세자나 세손(世孫) 등의 동궁(東宮)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킬 때 내리던 청정교서(聽政敎書), 세자, 세손, 왕비, 세자빈(世子嬪), 세손빈(世孫嬪) 등을 책봉할 때 내리던 책봉교서(冊封敎書), 국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전국에 반포하던 상호교서(上號敎書), 국왕이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할 때 내리던 구언교서(求言敎書), 역적을 토벌한 뒤 전국에 반포하던 토역교서(討逆敎書), 나라에 경사가 있어 사면령(赦免令)을 내릴 때 반포하던 사면교서(赦免敎書) 등이 있었다. 개인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개국(開國), 토역(討逆), 반정(反正), 전란(戰亂) 등 국가적인 사건이 있을 때 공로를 세운 녹훈공신(錄勳功臣)에게 내리던 녹훈공신교서(錄勳功臣敎書), 각 왕의 재위 기간에 공로가 많았던 신하로 선발되어 종묘(宗廟)의 해당 국왕 신실(神室)에 배향(配享)된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에게 내리던 종묘배향공신교서(宗廟配享功臣敎書), 유학(儒學)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적 수양이 뛰어난 선비로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문묘종사공신(文廟從祀功臣)에게 내리던 문묘종사공신교서(文廟從祀功臣敎書), 관찰사(觀察使), 유수(留守), 절도사(節度使), 지방 군영(軍營)의 사(使) 등에 제수된 사람에게 발급하던 제수교서(除授敎書),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 발급하던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 국왕이 가례(嘉禮)를 행할 때 왕비의 집에 발급하던 가례교서(嘉禮敎書) 등이 있었다.❷ 전지(傳旨) : 국왕의 명령을 실행할 관사에 전달하기 위해 승정원이 작성한 문서를 가리킨다. 전지는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유음전지(流音傳旨)와 하음전지(下音傳旨)로 분류할 수 있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시상전지(施賞傳旨)와 징벌전지(懲罰傳旨)로 분류할 수 있다. 유음전지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요약 정리하여 주서(注書)에게 주면 주서가 작은 글씨로 작성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던 전지이고, 하음전지는 국왕의 재가를 받은 전지를 주서가 베끼고 관인(官印)을 찍으며 승지가 장함(長銜)을 적고 서명하여 담당 관사에 내려주던 전지이다. 시상전지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가자(加資), 승진시켜 임용하는 승서(陞敍), 임금의 이름으로 물품을 하사하는 사급(賜給) 등에 관한 전지이고, 징벌전지는 관원의 추고(推考), 파직(罷職), 삭직(削職), 탈고신(奪告身), 금추(禁推), 나추(拿推), 나문(拿問), 나국(拿鞫) 등에 관한 전지이다. 戊寅四月十八日到付議政府爲求言事."'「王若曰. 予以否德, 叨守祖宗丕基, 常恐不克負荷. 乾乾夕惕寅畏乎天, 而誠不上孚, 天怒未已; 凜凜如傷子視乎民, 而澤不下究, 民怨日滋. 災異畓至, 愁痛載路, 予用惻然疚懷, 反躬自省, 忸怩顔厚, 無樂爲君矣. 今者春夏之交, 播穀之節, 久旱不雨, 兩麥枯損, 無計收獲, 田疇龜拆, 耕夫釋耒. 旣失東作, 何望西成! 哀我赤子, 大命近止, 噫! 人之類滅矣. 興言及此, 流涕無從. 究厥所由, 皆予不辟之致, 尙誰怨尤! 況此大亂之餘, 瘡痍甫起, 孤寡靡依, 西使纔過, 蔀屋如罄. 飢渴之急, 亦患難救, 而災害此極, 予不敢知. 分憂之官, 不體予意, 而民有膏血之浚歟? 閫外之將, 不體予意, 而兵有離散之患歟? 宮闈不肅, 而有徑曲之開; 除拜不公, 而有苞苴之行歟? 刑政紊而獄訟滯, 賞罰舛而勸懲沮歟? 言路不開, 而過失罔聞; 薰蕕無別, 而賢邪雜進歟? 朋黨猶有所未祛, 公議亦有所雍閼歟? 奢侈猶夫前, 而躬行之實未孚; 號令有所乖, 而草偃之效未著歟? 抑或陰盛陽微, 內外之分, 失其常道而然歟? 夫休咎無門, 惟人所召, 天之視聽, 皆自我民, 則其可諉之於茫茫杳杳而不反在我之道乎! 予當以成湯之禱、魯昭之祈爲責躬應天之實. 旣已避殿自飭減膳禁酒, 其於弭災之道, 靡所不用其極. 凡我在朝臣僚、草野士庶, 必有中心所懷而欲言之者矣. 予之庇政闕失, 某事足以傷民、某事足以召災者, 其各盡言無隱, 匡救不逮, 以答天譴. 言雖過中, 予不爲罪. 噫! 天高聽卑, 至誠感神, 一言未竟, 大雨千里, 天之感動, 如響赴聲. 此予之所以遑遑汲汲必欲聞救災之言也. 勖歲政旨, 體予至意.」 布告中外爲只爲, 下議政府爲良如.' 崇德三年四月十一日, 行都承旨臣李楘敬奉傳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道內各浦良中, 知委向事."四月日.❶ 怒 : 저본에는 원문이 '恕'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滅 : 저본에는 원문이 '感'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❸ 休 : 저본에는 원문이 '咻'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효사(爻辭)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애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無咎']라고 한 말과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일(無逸)〉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덕을 칭찬하면서 '엄숙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였다.[嚴恭寅畏]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怒' 1자가 '恕'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여기셨다.[文王視民如傷]'라고 한 말과 『서경』 「주서」 〈강고(康誥)〉에 '백성을 갓난아이 보호하듯이 하면 백성들이 편안히 다스려질 것이다.[若保赤子惟民其康乂]'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滅' 1자가 '感'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休'가 '咻' 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서경』 「주서」 〈홍범〉에서는 '왕자(王者)의 잘잘못은 한 해를 기준으로 증명하고, 경사(卿士)의 잘잘못은 한 달을 기준으로 증명하며, 사윤(師尹)의 잘잘못은 하루를 기준으로 증명한다. 비옴[雨]·볕남[暘]·따뜻함[燠]·추움[寒]·바람[風] 등 다섯 가지의 길흉[休咎]은 한 해의 이해(利害)와 관계되고 한 달의 이해와 관계되며 하루의 이해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서경』 「주서」 〈태서(泰誓)〉에서는 '하늘이 볼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들을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라고 하였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하(夏)나라 걸(桀)을 정벌한 뒤로 7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고 비를 빌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탕왕 자신이 희생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재계(齋戒)하고 모발과 손톱을 자르고 소거(素車)에 백마(白馬)를 타고서 자신의 몸을 흰 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고 상림(桑林)의 들에 가서 세 발 달린 정(鼎)을 놓고 산천에 기도하면서 자책하니,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큰비가 내렸다. 노(魯)나라 소공(昭公)은 25년 7월의 상순과 하순의 각 신일(辛日)에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事文類聚前集』 「天道部」 〈禱雨〉; 『春秋左氏傳』 昭公 25년 7월.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4월 7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初七日 關文 056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양성(陽城)과 진위(振威)의 자모수군(自募水軍) 등이 잃어버린 군기(軍器)를 비변사의 관문에 따라 회수하지 말고 감면해줄 것.무인년 5월 11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화량첨사(花梁僉事)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본진(本鎭)에 소속된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등 고을에 사는 자모수군(自募水軍) 명의로 바친 의송(議送)에 의거하면,「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었던 활과 화살을 턱없이 징수하는 것은 너무나 애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송에 대한 제사(題辭)에 이르기를,「병조가 보낸 공문에 이르기를,〈난리를 겪고 난 뒤에, 각 도(道) 각 진(陣)의 군병 등에게 주었던 군기(軍器)를 전투에 나아갔을 때 잃어버렸으면 감해주어야 하지만, 흩어져 도망한 군졸로서 받았던 군기이면 거두어들여서 회록(會錄)하라.〉라고 하였으니, 본영(本營)이 멋대로 경감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서로 싸우다가 잃어버린 군기이면 감해주어야 할 대상에 포함되지만, 도피한 산골짜기에서 잃어버린 것이라면108) 병조가 회부(會付)한 군기를 틀림없이 감해주지 않을 것이다. 본진(本鎭)이 사실대로 조사한 뒤 원문서를 첨부하여 공문을 보낼 수 있도록 2건의 첩정(牒呈)을 올려 보고하라.」라고 제사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는데, 저의 임기 중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상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대체로 군기를 주었던 수군들도 같은 해 12월 27일에 남양(南陽)에 나아갔고, 남양부에서 군인들을 위로하던 중에 청나라의 마병(馬兵)이 뜻하지 않게 남양부에 들이닥쳤는데, 남양부사(南陽府使)가 살해될 때에 그들을 영솔하던 초관(哨官)과 군병들도 일부는109)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본진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증언하였으므로 이러한 연유를 원문서를 첨부하여 첩정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적지 않은 군기를 본조(本曹)에서 멋대로 감해주기는 어려우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지시해주소서.'라고 낱낱이 거론하여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번에 도착한 비변사의 관문에 이르기를,'난리 중에 잃어버린 군기를 징수하는 것은 원통할 것 같으니, 분간하여 감해주라.'라고 하였다. 그러니 살펴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7일.▶ 어휘 해설 ◀❶ 자모수군(自募水軍) :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수군(水軍)을 가리킨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이 있을 때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군병을 자모군(自募軍)이라고 불렀다.❷ 의송(議送) : 백성이 관찰사(觀察使)나 절도사(節度使) 등에게 억울한 사정 등을 호소할 때 올리던 청원서이다. 문서 형식은 소지(所志)와 유사하나, 당사자가 거주하던 고을의 수령에게 바치지 않고 그보다 상급 기관에 바치던 문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❸ 회록(會錄)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부(會付)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회록한다는 것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회록(會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회록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때의 회록은 군포(軍布) 2필을 1필로 감해주면서 생긴 재정 손실을 메꾸는 방안의 하나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의 여유 자금, 비변사의 군작미(軍作米), 호남(湖南)의 검영미(檢營米) 등에서 일부를 떼어 원금을 마련한 뒤 이를 환곡(還穀)으로 운영하여 받은 모곡(耗穀)의 전부 또는 일부를 회계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가리킨다. 균역법의 시행에 따라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었으나 기존에 지출하던 비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포의 감면에 따라 부족해진 지출 비용을 국가가 마련해서 대주는 것을 급대(給代)라고 하였는데, 회록에 의해서 마련된 자금도 급대할 비용에 보탰다.❹ 회부(會付)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록(會錄)이라고도 하였다. 戊寅五月十一日到付.兵曹爲相考事."節到付花梁僉事牒呈內, '本鎭屬陽城、振威等官居自募水軍名呈議送據, 「兵亂時所授弓箭乙, 生徵, 天下曖昧.」是如呈議送題音內, 「〈經亂之後, 各道各陣軍兵等所授軍器乙, 赴戰時閪失, 則應減, 散亡餘卒以授軍器, 則收捧會錄.〉事, 兵曹行移已到, 非本營擅自蠲減是置. 汝矣等, 若陣上相戰所失軍器, 則在於應減之中, 若失於逃避山谷者, 則兵曹會付軍器乙, 必不減下. 本鎭從實査覈, 粘移次, 兩件牒報向事.」題送是置有亦. 相考爲乎矣, 非僉使等內之事以, 未能詳知是在果. 「大槪軍器所授水軍等亦, 同年十二月二十七日, 進到南陽, 府良中, 犒軍爲如可, 馬兵不意突入同府, 府使被殺時, 所領哨官及軍兵段置, 除除良亦爲被殺.」是如, 鎭下餘存人等, 如出一口爲乎等以, 如此緣由粘牒.'是置有亦. '不小軍器, 自本曹擅減爲難, 處置指揮.'事, 枚擧報備邊司爲有如乎. 節到付備邊司關內, '亂中散失軍物徵納, 似寃, 分揀減下向事.'關是置有良旀. 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四月初七日.❶ 失 : 저본에는 원문이 '背'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除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失' 1자가 '背'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除'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첩정(牒呈) 牒呈 058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비변사에 보낸 첩정(牒呈): 새로 제작하는 전선(戰船)은 공사를 완료한 뒤에 보고할 예정이며, 옛 전선은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에 팔아서 공장의 급료를 지급하고 회부(會付)한 군량(軍糧)도 채웠음.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냅니다."본영(本營)이 새로 제작하는 전선(戰船)을 충청도 안면곶[安眠串]에서 제작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주상께 급히 보고하고 한편으로 비변사에 보고하였는데,111) 체선(體船)만 제작한 뒤 돌아와서 정박시켰습니다. 상장(上粧)과 하장(下粧) 및 참나무 방패(防牌)는 강원도 춘천(春川) 지역에 군관(軍官)과 색리(色吏)를 별도로 정해 파견하여 해당 참나무 널빤지를 산밑에 사는 사람에게 값을 주고 산 뒤 뗏목을 만들어 한강(漢江)으로 떠내려 보내 받아서 현재 거의 다 장치하였으니, 공사를 마친 뒤에는 장계(狀啓)를 올리겠습니다. 병선(兵船) 2척도 모두 일시에 제작하기 때문에 공사가 거창하여 공장(工匠) 등의 요포(料布)를 계속 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제작하는 선박을 대신하여 세워두었던 옛날의 세 번째 전선을 부임하자마자 바로 나무를 덧대 개조하였으나, 수영(水營)에 세워둘 전선을 새로 제작하기 때문에 해당 옛 전선은 묘당(廟堂)이 재가받아 주상의 결정을 받은 문서에 따라'각 진포(鎭浦)에다 팔아서 비용에 보태쓰겠다.'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두 고을이 모두 지정선[卜定船]을112) 바꾸어 세우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갔으므로, 해당 전선 값으로 받은 쌀은 공장 등에게 빌려주어 급료를 지급하게 하고 회부(會付)한 군량(軍糧)도 모두 채워서 비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 그러므로 첩정을 올립니다."위와 같이 비변사에 보고하니, 비변사가 서목(書目)에 써서 보낸 제사(題辭)가 도착하였는데, 그 제사에 이르기를,'보고한 대로 시행하되 나중에는 전례로 삼지 말라.'라고 하였다.▶ 어휘 해설 ◀❶ 체선(體船) : 선박의 부속 장치는 설치하지 않고 골격만 갖춘 선박을 가리킨다.❷ 상장(上粧) : 선박의 상부에 설치하는 부속 장치들을 가리킨다. 특히 전선의 경우에는 전투할 때 공격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전투할 때에는 이를 설치하여 전선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이를 제거하여 조선(漕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❸ 하장(下粧) : 선박의 하부에 설치하는 부속 장치들을 가리킨다.❹ 지정선[卜定船] : 전세(田稅)의 수송, 부교(浮橋)의 설치, 군량(軍糧)의 수송 등을 위해 각 고을에 분배하여 징발하던 선박을 가리킨다. 爲相考事."本營新造戰船, 忠淸道安眠串造作事, 一邊馳啓, 一邊報本司爲有如乎, 體船叱分, 造作回泊爲有去乙. 上·下粧、眞木防牌段, 江原道春川地, 軍官、色吏別定, 同眞板乙, 山底人處, 給價貿得, 作茷流下, 時方幾盡修粧爲有置, 畢役後狀啓事是在果. 兵船二隻段置, 竝只一時幷擧造作乙仍于, 功役浩大, 工匠等料布, 勢難繼用乙仍于. 新戰船代立本舊第三戰船, 到任卽時, 添木改造爲有乎矣, 營上船新造是乎等以, 同舊船段, 依廟堂啓下定奪公事, '各其浦以, 許賣補用.'亦行移. 導良延白兩官, 幷卜定船改立次以, 備價買去是乎等以, 同價米段, 工匠等, 貸下放料爲在, 會付軍糧, 並只充上事. 緣由馳報爲臥乎事是良厼. 合行云云."報備邊司, 書目題送內, '依所報施行爲乎矣, 後勿爲例.'事, 到付.❶ 卜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041 나덕헌의 장계'와 '042 나덕헌의 첩정' 참조. 저본에는 원문 '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9월 27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九月二十七日 關文 090 예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탄일(誕日)과 동지(冬至)의 전문(箋文)을 올려보낼 때 작목(作木)을 하지 말고 대신 방석(方席)을 마련해서 보내줄 것.무인년 10월 7일 도착.예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본조(本曹)는 평상시부터 너무나 가난하여 포진(鋪陳) 등의 물품이152) 보잘 것 없었다. 난리를 겪고 난 이후로는 더욱 준비할 길이 없어서 이처럼 겨울철에 일이 많을 때가 되어도 관원들에게 줄 방석 하나도 없으니 일을 맡기기가 염려스럽다. 앞으로 탄일(誕日)과 동지(冬至)의 전문(箋文)을 올려보낼 때 본영(本營)에서 작목(作木)하여 실어다가 납부하는 규정이 있으니, 이 두 차례 작목을 하지 말고 편리한 대로 방석으로 마련해 보내서 본조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와 같이 공문을 보내는 것도 전례가 있고 마련할 길도 없어서 감히 이처럼 공문을 보낸다. 살펴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9월 27일.▶ 어휘 해설 ◀❶ 작목(作木) : 돈이나 곡물 등 다른 명목의 물품을 무명[木]으로 바꾸어 마련하는 것을 가리킨다. 戊寅十月初七日到付.禮曹爲相考事."弊曹自平時淸寒太甚, 鋪陳等物, 無以成形爲如乎. 經變以後, 尤無措備之路, 當此寒節多事之日, 官無一葉之席, 委屬可慮. 前頭誕日、冬至箋文上送時, 貴營有作木輸納之規, 除此兩度作木, 席子, 隨便備送, 以助弊曹, 如何? 如是移文, 亦有前例, 而措辦末由, 敢此移文爲去乎. 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九月二十七日.❶ 鋪 : 저본에는 원문이 '補'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鋪' 1자가 '補'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10월 13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十月十三日 關文 091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전문(箋文)은 5일 이전에 올려보내고, 동지(冬至)에 올릴 전문도 미리 준비하였다가 기일에 앞서 올려보낼 것.무인년 10월 19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오는 11월 7일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전문(箋文)을 5일에 봉진(封進)할 예정이니 일시에 보내기 위해서 그 이전에 위에 올려보내되, 11월 17일 동지(冬至)에 올릴 전문도 미리 준비하였다가 기일에 앞서 위에 올려보내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0월 13일. 戊寅十月十九日到付.兼巡察使爲知音事."來十一月初七日大殿誕日箋文乙, 初五日封進爲去乎, 一時輸送次, 以前上使爲乎矣, 十一月十七日冬至箋文乙良置, 豫爲措備, 前期上使向事."崇德三年十月十三日.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8년 1월 12일 관문(關文) 崇德三年正月十二日 關文 045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세초(歲抄)에 대해 주상께 속히 보고할 것.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첩정(牒呈) 내용을 요약하면,'세초(歲抄)에 관한 사안은 평상시처럼 연말에 주상께 보고할 수는 없더라도,90) 각 고을에 시기를 정해서 통지하여 늙거나 사망하여 대신 충원한 결과를 정리한 세초의 책자를 일일이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이를 받아서 추후에 주상께 보고할 계획입니다.'91)라고 하였다. 속히 주상께 보고하여 시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월 12일. 兵曹爲相考事."節到付牒呈內節該, '歲抄一事, 雖不得依平時歲末啓聞爲乎喩良置, 各官良中, 刻期知委, 老故充定歲抄成冊乙, 這這查報捧上, 追乎啓聞計料.'事牒呈是置有亦. 斯速啓聞施行向事. 合行云云."崇德三年正月十二日.❶ 雖不得依平時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038 나덕헌의 첩정'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雖不得依平時' 6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038 나덕헌의 첩정'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038 나덕헌의 첩정' 참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契員座目 朴酇林 一金五百원 龍進面龍伏里朴小林 一 金五百원 龍進面龍伏里林玄淳 一 金壹阡원 龍進面澗中里柳思譱 一 金壹阡원 參禮邑柳里宋順鳳 一 今五百원 龍進面雲谷里曺秉寅 一 金壹阡원 鳳東邑場基里崔炳天 一 金五百원 龍進面雲谷里朱永彰 一 金五百원 九耳面仲仁里張大奎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尾里黃孟周 一 金五百원 龍進面下二里金炯律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林萬淳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韓相俊 一 金五百원 參禮邑新卓里金永安 一 金五百원 鳳東邑乾田里全泰然 一 金五百원 鳳東邑洛平里姜太錫 一 金五百원 全州市湖城洞李應三 一 金五百원 參禮邑上卓里權昌南 一 金壹阡원 參禮邑岫溪里金福順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林奉淳 一 金壹阡원 參禮邑下里林在鹿 一 金壹阡원 鳳東邑長久里李漢求 一 金壹阡원 鳳東邑新城里李根敎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李鍾泰 一 金五百원 鳳東邑坪村里李龍甲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李敦求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羲文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羲一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羲大 一 金壹阡원 參禮邑松亭里李順求 一 金壹阡원 參禮邑長浦里李奉求 一 金壹阡원 參禮邑長浦里李鍾春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黃德周 一 金五百원 龍進面九億里洪景漢 一 金五百원 所陽面大勝里陸相玉 一 金五百원 龍進面山亭里金長培 一 金五百원 鳳東里新基里崔昌烈 一 金五百원 鳳東里童岩里黃鎬成 一 金五百원 鳳東里芚山里金奉洙 一 金五百원 全州市草堂村權彛甲 一 金五百원 龍進面九億里金炯烈 一 金五百원 龍進面新岡里張庭福 一 金壹阡원 鳳東里場基里丁完燮 一 金五百원 鳳東里長久里朴判權 一 金壹阡원 龍進面龍伏里姜振遠 一 金五百원 上關面柳永譱 一 金壹阡원 參禮邑柳里權俊夏 一 金壹阡원 飛鳳面泥田里洪淳明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岩里張炳龍 一 金參阡원 鳳東邑九尾里李鍾煥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李文求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愚正 一 金貳阡五百원 鳳東邑九尾里李亨求 一 金壹阡원 鳳東邑寒溪里李鍾文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李學求 一 金貳阡원 鳳東邑新城里李玄喆 一 金五百원 錦山郡錦城面邑草李性宰 一 金壹阡원 錦山郡錦城面邑草李哲敎 一 金壹阡원 錦山郡錦城面邑草李愚燮 一 金五百원 參禮邑舊瓦里李聖漢 一 金五百원 高山面五山里李重求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鍾烈 一 金五百원 鳳東邑九萬里李鍾龜 一 金萬五阡원 全州市西老松洞朴龍得 一 金五百원 龍進面新基里金正福 一 金壹阡원 鳳東邑場基里許東信 一 金壹阡원 鳳東邑場基里姜允煕 一 金五百원 全州市古堂里田甲俊 一 金壹阡원 鳳東邑九萬里崔秉煥 一 金五百원 鳳東邑龍岩里權寧孫 一 金五百원 鳳東邑芚山里朴春日 一 金五百원 鳳東邑龍岩里鄭雲湧 一 金壹阡원 上關面竹陰里林秉根 一 金五百원 參禮邑三禮里鞠干順 一 金五百원 龍進面新岡里李春馥 一 金貳阡원 高山面花亭里成正鎬 一 金貳阡원李德 一 金貳阡원 全州市李羲錫 一 金參阡원 全州市朴贊浩 一 金五阡원 鳳東邑九尾里崔宗烈 一 金參阡원 九耳面斗方里李炳日 一 金參阡원安東文 一 金貳阡원 斗峴里柳元球 一 金參阡원 參禮邑柳里陸相玉 一 金五阡원 龍進面山亭里李鍾煥 一 金參阡원 鳳東邑成德里柳東秀 一 金貳阡원 九耳面斗方里洪英炫 一 金參阡원 所陽面大勝里柳煥容 一 金貳阡원 參禮邑三禮里林奉淳 一 金貳阡원李存培 一 金五阡원李東敎 一 金萬원 裡里市柳秉燮 一 金貳壹원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옥과향교지(玉果鄕校誌) 玉果鄕校誌 玉果鄕校誌 고서-기타 교육·문화-서원·향교-서원지 서원향교지 원문 玉果鄕校誌 석판본 1 반곽 유계 12행28자 주쌍행 상2엽화문어미 곡성 영월엄씨 경와 엄명섭가 한국학호남진흥원 전남 옥과의 향교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儒林 金有澗 【字子松號玄石慶州人禮儀判書文敏公樹隱沖漢孫縣令滋子天資卓犖不群拔乎其萃學又贍弘不强思索而能悟大義動靜威儀如中繩墨遭艱廬墓一遵朱禮遠近多有觀感遵化者 太宗丁亥中司馬以孝學薦除參奉歷洗馬行潭陽府使金仙源文忠公尙容撰孝行錄略曰孝之誠篤如王曾容齋李荇跋遺集以學之穎悟比子貢】辛九剛 【字柔之寧越人靑坡二剛弟少受學於伯氏及長就正於雲壑趙平華聞彌大丙子後與伯仲兄隱居陋巷甘藜藿修仁義採山釣水自適其意世稱栗里處士】沈世益 【字舜弼號浩然定安公靑城伯德符後承議卽之潤子天性孝友好學有隱操不事科業托跡於林泉因修江亭而與弟善養堂進士齋月堂友愛隆篤時人稱南中高士金副提學贈詩曰三兄弟一室高義稀人間云云遭二弟喪悲痛述懷其詩曰嗟吾二弟今安在我獨人間哭雨阡由來{完+刂}却心頭肉白首函悲只怨天 肅宗壬申卒有遺稿】沈世寅 【字擧卿號善養堂靑松人忘世亭璿八世孫承儀卽之潤子天性溫恭早受庭訓夙夜不懈律身謹勅持志堅確硏窮義理謝絶名利遯跡林泉以開進後學爲己任弟兄湛樂爲世表準副提學金公以三兄弟一室高義稀人間之句贊之有遺稿】鄭遂祚 【字子壽號默齋河東人後凋堂大昉後獨善堂東僑子 英廟丁丑生天資豪邁才器過人年甫弱冠與弟遂洪受業于木山李起敬門學博行高持論正大期之以廊廟之才與秋陽宋啓幹復元齋兪星柱爲道義交刮磨資益甚多以學行屢登剡薦】鄭遂洪 【字就深號容齋河東人後凋堂大昉後獨善堂東僑子 英廟庚辰生稟姿豪爽卓犖不覊從其兄默齋受業于木山李先生門得聞聖賢爲己之學日斯邁而月斯征先生甚哭重之及其學益博德益高當時賢士莫不願交而請益焉】金秉賢 【字道裕號蘭菴慶州人禮儀判書樹隱沖漢十四代孫宗昌子天姿穎悟德容淸溫博閱經史無不領會參右酌今根刷實理持已篤敬禦家以法安喫淸貧而不戚戚銖視榮利而不汲汲鞱跡林泉囂囂自樂孝友行於家庭令譽著于鄕黨】辛應曄 【字士燦號松隱寧越人漢城尹熹後 英宗辛巳生天姿純美才藝卓越博涉經史崔侯瑗之莅邑也聞公德義公暇遊從】吳炫 【字晦甫號霽月堂海州人慕古軒天佑曾孫天姿聰穎文章鳴于世有林泉雅意遯跡于霽洞仍居焉有遺稿】呂東煥 【字燦西號雲齋咸陽人左贊成知義禁府事靖平公樗谷稱後奎永子 純祖甲申生賦性剛直造詣精深不戚戚於貧賤不汲汲於富貴於聲利夸靡淡乎絶意也常曰大小大事必本於一念之微尤致力於小學論語以主敬涵養躬行心得爲究竟前後艱寧戚不文親戚服其義鄕黨稱其操】金煕錫 【字現五號竹灣慶州人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樹隱沖漢後贈通政大夫廷海子賦性仁順氣宇豪爽早習貢擧稍不稱意斂跡林泉深得爲己之學至老彌篤鄕隣多有欽服者壽階嘉善大夫同知中樞】許錫寬 【字大永號佳汀詩山人校理斯文後進士蘅子稟質魁傑德器寬弘持已也儼然喬嶽接人則藹然春風有威可畏有儀可象處家雍睦不言而事集臨事周詳不校而姦息每戒子孫以儆戒勿怠無忝所生爲第一義諦其他爲人父兄爲人子弟者各隨所對而以慈友孝敬諄諄諭之宗族以之模楷鄕黨以之矜式所以縣有疑難未嘗不延接而決之】辛在基 【字泰叔號梧庵寧越人松隱應曄孫 純祖甲申生天賦純厚潛心力學守志篤行齊家有度】申梃 【字德化號常春齋平山人壯節公崇謙後文僖公寅齋槪十五代孫義瀗子賦質純粹氣岸淸肅律身謹行泛濫群書就正于文敬公苟菴申公之門先生以宗族之恩兼師弟之義奬與朝勉逈出尋常所與從遊者崔勉菴益鉉田艮齋愚申陽園箕善申農山得求也築室于里後橫經講道苟以是心至者受之不辭有遺稿】許琮源 【字漢瑞湖玄湖泰仁人道峯繼後錫仁子天姿奇偉儀範不俗早年科業見屈不憫晩好林泉以讀聖賢談義理爲第一眼藏又精於書法筆翰如流文名與實行俱著】金止賢 【字道敏慶州人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文敏公樹隱沖漢後宗河子性賦高潔氣岸勇敢處家以雍睦接人以和厚出入鄕閭感謂某文某甫云晩樂林泉琴書自適於世間毁譽是非澹然無所介焉】沈雲澤 【字光煥號湖隱靑松人 端廟朝忘世亭璿後魯臣子天性正直志介英邁事親誠孝交友信義士友推重以追慕之誠重修浩然亭而鄭小松奇松沙推許友善而從遊焉任侯弘準莅郡每於公暇一童驢一壺酒時訪于嵌巖之下慨然贊曰主人江山有三勝之樂共修鄕約民化漸進自乙巳不出鄕里樂爲之繼述焉見蔭】金敎信 【字舜七號雪峯慶州人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樹隱沖漢後煕豐子中樞院議官以特典陞嘉善大夫天性聰敏篤於彛倫況潛乎仁義博涉乎經史處己則謙接人則和德宇粹然有縉紳家風味所以名重鄕閭士林尊仰】沈晶澤 【字舜瑞號睡庵靑松人大提學忘世亭璿十五世孫生員霽月堂世日七世孫魯憲子年甫四歲聰穎出凡在婢背一往來後能解分路學襲家庭德器早成事親極孝友于兄弟睦姻族戚救恤隣里多有損已益人者親事明辨出言正大屢以鄕望推重至于今傳頌其德行柳月坡三綱門年久頹圮倡衆葺理 聖廟墻瓦爲奸豪撤取通告致法大同撤院後公歎曰斯文九六自此履霜將板揭鄕先進三十五賢以寓羹墻之義任侯弘準序其事而贊之又修整郡誌以勵風俗於龜巖祠遺趾從士林議設壇竪碑參判金宗漢一見獎詡後復致書繾綣謂之南中高士松沙奇宇萬撰狀略曰南來郡牧多造廬而致敬在朝紷紳有渴見而願交云見蔭】金鎭秀 【字允實號兢齋慶州人文敏公樹隱沖漢後 子才藝過人博通經史孝奉二親躬執菽水潔行勵志不求聞達遊於蘆沙奇先生門學益進德日邵又與鄭草堂友善多有扶正綱紀之功縣宰兼山崔瑗贊曰有德有望衆所心服湖左碩望士林儀表】沈胤澤 【字祚卿號石圃靑松人忘世亭璿十五世孫 子賦性純厚律身勤儉友于敦睦人無間言有志於性理之學師事淵齋宋先生累被起予之奬學優而信官從仕郞參奉及時事日非則休遯于桑梓結天淵亭與其弟寢卽宗澤徜徉吟哦焉又用力於中庸至老彌篤而樂善好義周窮恤貧蓋其天性然也遠近服義者竪碑稱頌】許進源 【字性恢號雪峯詩山人進士蘅孫錫寬子生而異質淸健毅直剛介樂易事親能孝敎子有方出言若決江河故先事而信臨事樂善好義故待公而決尤用力於詩書活潑滂沛亦不甚思索而義理裕如郡廢也毁校隨之與章甫倣子産不毁之義設立尊聖案仍舊供奉旁郡之同廢者多取法焉】金學信 【字德寬號農窩慶州人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樹隱沖漢後炳魯子賦性英豪學術端確凡聞善必行力行有過勇於遷改孝友家庭訓迪後生雖有拂人之性者一見公後莫不改容而欽服焉】沈時澤 【字敬彦靑松人忘世亭璿後魯云子賦性溫良德器夙就早入靑雲行從仕郞 僖陵參奉晩老林泉孝友行於家忠信孚於人樂善而不伐好施而不矜無甚畦畛而亦不俯仰於世宗族服其義鄕隣稱其行】許相麟 【字聖汝號新安詩山人止齋斯文後百源子德器宏遠氣岸勇決見事必果知過能改入學劬經夙夜靡懈文詞日進成就有望而家貧無以爲父母養掩冊躬耕左右就養以奉志體經傳子史間以涉獵隣有鬪訟片言決解宗家貧替無以爲禮葬毋子喪至他協葬亦數家也自倡立稧拮据買祭田數畝爲累世享右計焉父咳喘連年沈錦凡百調洽不委人而躬執一日不懈及艱身方大痛强病而起拚擗哭踊方絶頓蘇而第七日而逝人皆悲之】金義信 【字德潤號秋坡慶州人禮儀判書文敏公樹隱沖漢後在恒子自幼莊重寡默不見數數態動靜語默必以法度應事接物不逾禮間自慊自責不少假借敎子姪亦有義方侍疾十年不懈彌篤所與從遊者皆當時名公聞人而所居白淡淡無塵埃氣味鄕隣推荷尤重焉松沙奇宇萬有贊】金永中 【字允執號石坡光山人文肅公周鼎後 哲宗甲寅生生而異質英邁豪爽加之以朴實淳謹敦尙孝悌容止有常修辭行義服儉守約綜理事物辨決是非式遵詩書修講鄕約彈誠 聖廟修補謹守學宮遺規鞱光鏟跡於煒煌靑紫淡如也遺稿見失識者恨之】曺殷承 【字致彦號山史昌寧人副提學靜齋尙治後錫雲子隱居金山之陽種文續學訓迪子姪有客則討論嘯詠人謂金山處士】沈相運 【字敬贊號溪隱靑松人 哲宗辛酉生龜巖民覺十世孫聾臺居士昌鎭五世孫遠璣子性儀正大孝友敦睦慕先誠心敎子義方對人接沕言必信行必果惟義所在潛居江湖自潔其身不役於物累】呂邦燮 【字士彦號海隱咸陽人左贊成知議政府事靖平公樗谷稱後東表子 哲宗甲寅生性寬而潔學要而精筆得魏公之端謹詩有五峯之天成早遊京洛行議官陞通政大夫與茂亭鄭萬朝荷汀呂圭亨諸名公磨礱酬唱笙簧治道其秀句佳篇膾炙於縉紳之間色擧之日諸公贈篇見於詩集附錄】金榮信 【字史國號菊史樹隱文敏公沖漢後炳焞子天性淳正才器卓越孝友之純敦睦之至文藻又富麗經綸施設足以有爲焉鄕隣推重】金瑢信 【字良彦號錦圃慶州人樹隱沖漢後炳鉉子賦性醇謹德行溫重居家孝悌處世和厚聖賢之書手不停披祖先之訓心常恐墜嘗以公議擔任鄕事一遵正規鄕里稱之】鄭在英 【字四練號濟軒河東人禮儀判書景烈公退庵地十五世孫兵曹判書良襄公種十三世孫樵隱萬烈子稟姿聰明迎刃折理孝友敦睦人無間言早有四方之志見時不可納約自牖而常以利人澤物爲心絶無熱囂氣味鄕里稱其懿行】金炳鎬 【號小隱慶州人鎭秀子稟質醇厚濡染家庭篤志勵行凡有善必服有過必改於物外聲色斷乎不置意鄕隣稱歎】梁基烈 【字淸一南原人龍城君朱雲後判官時遇十世孫賦性豪爽慷慨樂易不見畦畛而事集低視榮利而學成孝友成於內而庭無間言令名著於外當時名流咸渴交焉曰非公山楸水涯太寂寂】金相喜 【字云瑞號竹軒慶州人樹隱文敏公沖漢後農窩學信子賦質簡重造詣超凡經傳百家如誦已言早入試場見屈不悶隱居求志鄕隣矜式之】韓龜植 【字公瑞號槐隱淸州人淸城君終孫後 贈嘉善同中樞在夾子生稟絶倫天性純孝望之也儼卽之也溫濯磨高潔不與世俱往贄謁淵齋宋先生先生賜堂號曰天山宋心石題額奇松沙記之金南豐狀其行略曰胚前休樹立甚偉云壽階通政】陳宗燮 【字舜擧號雲樓驪陽人翰林學士禮賓卿溫後東祐子賦性敏悟凡於天文地理節文度數之學無不周詳晩究性理之學手不釋近思錄心經等書嘗置別業於招賢洞後吟哦自適】金彦植 【字士一號野隱金海人安敬公永貞後濟璉子天姿卓偉德器夙就累發鄕解試登一官時乎歸隱聊樂琴書嘗遊於淵齋宋先生門先生嘉其行而勉其學居常以孝友任恤爲本宗族樂其德鄕黨服其義】許翰源字順集號聽松窩詩山人雪巖紹十世孫錫 子孝友天植事親甘旨必供隱居耕讀不求名譽使子兄弟就學於艮齋田愚門艱艮齋有歷訪徹宵講論焉】宋達鉉 【字道贊號鵲岫軒新平人老松希璟後以聰明果敢之資篤於仁純孝悌之行儀範于家推及鄕黨晩歲追從於立齋宋相公之門見許甚重見蔭】梁基鍾 【字舜擧號兢庵南原人龍城君朱雲後 子性度寬弘廉公有威知有大體不拘小節敦尙孝友疾斥奸枉鄕隣欽仰有所矜式以上見丙子誌】朴宣圭 【字錫步號三復軒高靈人文孝公長遠後爲先遭遷曷不孝云學問宏博德器厚重受業者衆多有成就】吳鶴淳 【海州人字希聞號松皐文襄公延寵後正壽子宋淵齋鄭雲藍從遊族兄進士哲淳門人風神峻整天性韞藉年十九都尹縣內思威幷行一自免喪晦跡林樊敎授閭巷學徒坌集好讀孟子浩然章遺稿二卷】鄭繻鉉 【字元伯號訥軒 憲宗戊申生河東人景烈公諱地後在浩子性寬厚有長自風受學于家庭篤於孝友好讀書躬行爲範于鄕黨士大夫延爲師表敎子課督一邑年少善良皆賴焉】金炳錫 【字贊仲號芝圃慶州人樹隱沖漢後性品淸明風采射人有溫溫君子之氣像孝友俱臻誠於門事 於鄕事曾有廢校之聲乃與雪峯許進源石圃沈胤澤諸先德極力存校與子産 事同軌至于今賴之】許錫述 【詩山人字寬翊號雲軒止齋斯文後伯仲子性本剛介見事必果樂善好義有過則改而不再有善則字而不失贄謁松沙奇先生門多被奬許又號而記之多年任校以扶聖廟見孝子編】許聖源 【字聖三號南泉詩山人道奉繼後錫奎子稟氣剛明見事必果義理昭明片言折獄人之患難盡心救之鄕黨賴之】鄭麟鉉 【字季善號石樵丁巳生稟資嚴正有經綸器識不阿於世卓然自立邁進所信律身御家自有法度垂範於當時一卿士林推重】呂驥燮 【字陽彦號湖隱咸陽人左贊成知議政府事靖平公樗谷諱稱後德軒東顯子 哲宗戊午年生性慷慨嚴於淑慝之辨又贍於幹局遇事立辨恩義周遍故鄕隣有疑難處未嘗不延座而決之自塾舍至庠序延爲師表者敎育之奬勵之樂成人材晩築湖隱亭於臥牛山下逍遙湛樂田艮齋寄題曰存心養性謹言愼行以立裕後之基】金在琫 【字君獻號畏窩光山人新羅王子興光後箕範子風儀魁偉容貌傑特哲宗辛酉中生員其肅謝也自上稱歎特命擢文科卽宣醞仍除宣略將軍行龍釀衛副司果卒後 贈禮曹參判成均進士德殷宋哲憲撰墓表揄揚其德義】鄭文鉉 【字煕卿號剛庵 高宗辛酉生河東人景烈公諱地後在彦子性剛明果斷臨事明見是非善於辭令於義利公私陰陽淑慝皆有條理界程聞者多誠服焉】金亨秀 【字局瑞號槐堂樹隱沖漢後懿賢子性賦寬厚推愛敬以及族戚於鄕黨恩義周洽修鄕約以敦風敎於勢利紛華泊如也】許相淑 【詩山人字德賢號晩峯道峯繼後明源子性賦仁慈體宇豐原孝友根天篤於先事嘗編五賢先蹟心力俱至勸於門事奉祀代石終始不懈逍遙自適終老林泉】沈魯文 【字武兼號草叟靑松人忘世亭璿後樂禎子賦性廉潔言論骯髒奉先以誠接人以和貧寒而不以富貴易其操厄窮而不以僥倖動其心】鄭淳學 【字道卿號小雲小雅趙公肇錫 高宗甲戌生河東人牧使后後凋堂十一世孫龜鉉子奇偉有大志喜遊名勝賦詩成章爲文文辭燦然於史學古今治亂盛衰靡不援據世將期待甚重年命局之士論惜之】金奉喜 【字珍文號遷喬慶州人樹隱諱沖漢後資憲大夫弼信子純實樂易無崖岸行奉先以禮接人以和每値佳節與同志數人登山臨水賦詩遣懷有濛灑出塵之意】呂圭鍾 【字炯國號竹史咸陽人靖平公樗谷稱後龍湖孝燮子 高宗乙亥生以聰明俊偉之資濡染詩禮之敎發軔正路不由岐逕學優而遊京洛見諸宰輔之不忠於王室無意仕進退守丘園造詣方高聲譽日著年命之嗇識者恨之】申翼休 【字公弼號梧川高靈人禮儀判書醇隱德隣後歸來亭末舟後性慈仁周治家有禮法處衆有恩義常恨各處先隴之闕享遂置祭田永設歲一香火玉果醇隱公墓下祭位土及歸來亭基趾一朝烏有事將難測不避風雪殫誠據義拖至歲月竟得歸正其他敎處先墓齋閣殫誠建築爲子孫範鄕里稱頌】金相吉 【字大順號竹棲金海人鶴城君完後琮泰子性簡重寡默不見數數態色惟孝睦姻不違越於前憲祭祀致誠必見所祭者訓迪子侄不失法家尺度焉】許枓 【字士沃號蘭圃庚辰生詩山人雪峯進源子道峯繼之後豪爽慷慨有容人之量憂人憂樂人樂出入公廨數十年先公後私常有濟人利物之心又謹於禮數鄕隣之懷疑者來決爭訟者多救解之詩又淸爽有蕭散氣味】沈相洪 【字道源號兢窩靑松人忘世亭璿後參奉胤澤子以寬弘之資早有爲己之學就正于宋心石門反躬踐履脚踏實地鄕黨稱其德】金炳驥 【字奎三號雪圃慶州人文敏公樹隱沖漢後資品聰敏知識高明孝友根天齊家有度尊聖事業爲世矜式有遺稿】鄭淳達 【字大卿號華泉河東人景烈公諱地後 高宗乙酉生性豪放不覊受學於伯氏雷淵門好讀書不求甚解深究典故及史學論古今政治得失錯綜人物論議風發令人難於對酬每佳辰與親知及子姪登臨水石爽塏之地命酒賦詩人謂有謝東山風致少時有華字聯曰樹從舊色藏春色人自靑年戀國花之句】辛泳載 【字有聲號頤菴寧越人侍中仲碩後弘默子辨明義理稍存廉隅鄕里多有感悅子】許斗煥 【詩山人字應七號芝史道峯繼後相殷子才諝捷疾言論諄諄接人以和處家以嚴琴酒自娛詩律敍懷有豪爽氣味多年任校立尊聖契以扶校至于今賴之】金在廷 【字孝淑號石醒光山人文肅公周鼎後早遊漢京晩老林泉尊聖慕賢一生事業揚善闡美乃其餘事】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