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927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소송(訴訟) 전말서(顚末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법제-소송/판결/공증-소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7년 부안 전주최씨 석동산 소송전말서 1927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소송(訴訟) 전말서(顚末書)이다.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1872년(고종 9) 2월 1일 경조관문(京兆關文), 1872년(고종 9) 8월 부안현감 서목(書目),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1873년(고종 10) 2월 19일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1872년(고종 9) 2월 23일 부안현감 서목, 1865년(고종 2) 11월 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1898년(고종 35) 재판소 판사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判決書), 1898년(고종 35) 10월 5일 김주상의 다짐, 1898년(고종 35) 10월 29일 부안현감의 고시(告示), 1910년 2월 4일 농상공부산림국(農商工部山林局)의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1921년 3월 5일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1년 11월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3년 11월 10일 동일산명증명원(同一山名証明願),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등의 산송관련 문서가 있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 최인감(崔仁鑑) 등의 선세(先世) 7총의 광중(壙中)이 파헤쳐져 유골이 드러나고 사토(莎土)가 벗겨져 있으니 누군가 무덤을 파낸 형국이 확실하며, 최씨산의 소나무는 솔밭의 너비와 둘레를 볼 때 1만여 주(株)가 된다는 내용이다. 2. 형조(刑曹)의 관문(關文) :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고 하였다. 3. 경조관문(京兆關文) : 김홍제(金弘濟) 등이 위권을 빙자하여 남의 묘소를 파냈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권을 환수하고 김홍제 등을 처벌할 것과 소나무 값을 받아서 내줄 것을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다. 4.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의 서목(書目) : 김홍제의 소나무 값을 재감(裁減)해 달라는 내용이다. 5.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 형조의 관문대로 소나무값 봉류전(捧留錢) 1만 냥을 조영소(造營所)에 올려보낼 것, 최광권에게 1만 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받아 영진고(營賑庫)에 둘 것, 김홍제에게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侤音)을 받고 풀어 줄 것을 지시하고 첩보하도록 하였다. 6. 1873년(고종 10) 2월 19일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 최씨의 주장 중 김씨측이 1860년(철종 11)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1788년(정조 12)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니 문권을 말소할 때 이것을 포함시켜야 하며, 김홍제가 운현(雲峴)에게 호소할 때에 근거로 삼을 만한 문서를 점련하였다고 하니 이 문권(文券)도 현납(現納)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7. 1872년(고종 9) 2월 20일 부안현감의 서목 : 김홍제를 가두고 문권을 현납(現納)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8. 1865년(고종 2) 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 최(崔) 김(金)의 석동산을 둘러싼 산송을 처결하면서 석동산이 최씨 소유임을 확인하여 준 문서이다. 산지와 소나무는 최민(崔民)에게 전속시키고 이른바 소윤묘는 김씨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9. 1898년(고종 35) 10월 전라관찰사 겸 재판소판사(裁判所判事)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 : 두 집안의 산송은 득실(得失)이 반반이다. 식송의 방법은 경계를 정하여 각각 수호(守護)하는 것뿐이니 소송문서들을 모두 소각하라고 하였다. 10. 1898년(고종 35) 10월 5일 김주상(金周相)이 관에 올린 다짐(侤音) : 지금 집에 누락되어 있던 7장을 찾아내 납부하여 불태웠으니 더는 다른 문축이 없다고 하였다. 11. 1898년(고종 35) 10월 29일 부안군수(扶安郡守) 고시(告示) : 소나무는 최씨(崔氏)가 기른 것이니 이미 작벌한 것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12. 1923년 2월 4일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 임야에 대해 지적계증명원(地籍屆証明願)에 대해 소유사실을 확인하여 준 것이다. 13. 1921년 3월 5일 부안군수의 벌채(伐採) 허가서(許可書) : 최병욱(崔炳郁) 석동산(席洞山)에서 침엽수 100그루를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14. 1921년 10월 25일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 최병욱(崔炳郁)이 침엽수 1,500속(束)을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15. 1923년 12월 10일 부령면장(扶寧面長)의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석동산이 일명 도동산(道洞山)임을 증명해 달라는 신청에 대해 틀림없음을 증명하였다. 16. 1846년(헌종 12)에 발행된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 군사공 최광서(崔光敍)의 묘가 석동산에 있고 그 자손들이 옹정촌(瓮井村)에 거주하며 대대로 석동산에 입장(入葬)되었다는 것과 석동산을 저동산(猪洞山) 혹은 도동산(道洞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다. 17. 피봉에는 석동산(席洞山) 지적 배달증(地籍配達証) 1통, 변명서(辨明書) 1통, 공안급송적초본(公案及訟蹟抄本) 각 1통, 천수록(天水錄) 1책을 참고 바란다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41년 포(逋)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鶴林 松峴草堂 野山老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野山(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피봉 1941년 野山(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피봉.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41년 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秋七月旣望 辛巳秋七月旣望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1941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前日辱訪何等感幸邇來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6년 류병춘(柳秉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八月二十三日 族姪 秉春 丙午八月二十三日 柳秉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6년에 김제 柳秉春이 고흥 族人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6년에 김제 柳秉春이 고흥 族人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원문: 秉春再拜不意凶變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6년 류병춘(柳秉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臘月上吉 族姪 秉春 丙午臘月上吉 柳秉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6년에 김제 柳秉春가 고흥 族人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6년에 김제 柳秉春가 고흥 族人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원문: 大宗齋奉別餘悵尙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임인년 송병극(宋秉極)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八月二十八日 記弟 宋秉極 壬寅八月二十八日 [1902] 宋秉極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인년 8월에 記弟 宋秉極이 보내는 간찰 임인년 8월에 記弟 宋秉極이 보내는 간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신묘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辛卯秋 辛卯秋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신묘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신묘년(辛卯年)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묘년에 작성된 이 추감기는 원래 문기의 일부로 추정되며, 중간에 내용을 고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초안으로 보인다. 지역도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신동근, 황종술, 박 아무개, 임명근, 배쌍동, 김기술 등 6인의 이름과 그들이 경작한 두락 수와 도조 등을 적고 있다. 신동근은 2필지 8두락을 경작했는데 도조는 모두 7석이었다. 황종술은 2필지 1두 12승락을 경작했는데 도조는 2석이었다. 임명근은 4두락, 배쌍동은 7두락, 김기술은 7두락을 각각 경작하고 4석, 10석, 7석씩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1925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신서(追申書) 고문서-소차계장류-신고서 정치/행정-보고-신고서 大正拾四年拾月 大正拾四年拾月 崔基洪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5년 부안 전주최씨 추신서 1925년 10월에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우동리(牛東里)에 사는 최병욱(崔炳郁 사망)과 부령면(扶寧面) 옹중리(瓮中里)에 사는 최기홍(崔基洪) 등 26명이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朝鮮總督府林野調査委員會)에 제출한 추신서(追申書)이다. 부안군(扶安郡) 부령면(扶寧面) 연곡리(蓮谷里) 산 35-2번지에 대해 1924년 9월 26일에 불복신립(不服申立 불복신청)한 것에 이어 사실과 이유를 추신(追申)한 것이다. 산 35-1은 불복신립인(최병욱・최기홍)의 14대조 최생명(崔生明)가 400여년 전 소유하여 대대로 계장(繼葬)하여 30번지와35번지에는 최병욱의 10대조모와 최병갑(崔秉甲)의 8대조부모 등의 묘가 있으며 산지기를 정하여 수호 금양(禁養)하여 왔다. 금양한 상황은 수백년 전에 백여년 된 소나무를 간벌했고 제각을 세웠으며 1910년에 약 50년생 소나무 2,000그루를, 1921년에 50~30년생 소나무 500그루를 간벌하였으며 60년 전부터 매년 나무 300그루를 심어 현재 수령 50~10년 된 소나무가 밀생하고 있다. 불복신립인이 금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정명의인(査定名義人)이 그들의 선조 김소윤(金少尹)의 분묘가 산 35-1(현재 34번)에 있다고 소송을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패소한 적이 있다. 1860년(철종 11)에는 사정명의인의 선대 김홍제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완문(完文)을 받아내고는 불복신립인의 선조분묘를 몰래 사굴하고 소나무를 베었으므로 불복신립인의 선대가 국왕에게 격쟁 호소하여 굴총죄인(掘塚罪囚) 9명을 정배하고 작벌한 소나무 값 25,000냥을 징봉하라는 결정이 내렸다. 그런데 1898년(고종 35) 사정명의인이 다시 소송을 야기하여 본도관찰사 겸 재판소판사 이완용(李完用)이 부안군수 유진철(兪鎭哲)과 친심한 후 양측의 산송문서를 전부 소각하고 불복신립인을 권유하여 현재 32번지 임야와 34번지 임야를 사정명의인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므로 35-1번지는 사정명의인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상의 진술은 틀림없다며 김홍제의 다짐 1통, 도본(圖本) 1통을 첨부서류로 제출하였다. 불복신립(不服申立)은 행정 처분의 위법 또는 부당을 이유로 그 취소나 변경을 위한 재심사를 관계 행정 기관에 청구하는 일이다. 사정명의인(査定名義人)란 조선총독부 임시조사국에서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조선의 모든 땅에 경계측량을 하여 각 필지별로 소유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여 토지 및 임야조사부에 기록하였는데 이를 사정(査定)이라고 하고 장부에 기록된 사람을 사정명의인이라 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23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산송청원서(山訟請願書)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석동산 산송 청원서 1923년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석동산(席洞山) 청원서이다. 먼저 석동산 산송 사적(事蹟)을 기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7년(고종 34)에 김씨측에서 소송을 제기하였고, 1898년(고종 35) 관찰사 이완용(李完用)이 김씨측을 옹호하여 식송(息訟)을 핑계로 산지를 김씨측에 나누어 주게 되었다. 이때 두 집안의 송축(訟軸)은 모두 불태웠고 판결서 5건과 다짐(侤音)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1909년 측량 지적계를 농상공부에 냄으로써 각자 경계를 지키게 되었는데, 최씨측에서 1921년 2월 간벌(間伐)을 하자 김씨측에서 군청(郡廳)에 이의를 신청하였고 7월에 경찰주재소에서 대질하여 김씨측은 최산(崔山)과 무관하다는 판명을 받았다. 8월에 신고(申告)를 하고 9월에 전지(剪枝)를 하자 김씨측이 다시 정읍(井邑) 재판관(裁判官)에게 호소하였고 5회 대질 끝에 소송은 정지되었다. 그런데 10월 18일 측량기사 박태종(朴泰鍾)이 측량을 할 때 김규상(金珪相) 등이 산을 점유하려고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1922년 2월 도청(道廳) 산림계(山林) 주임(主任)의 조사, 1923년 8월 23일에 총독부(摠督府)의 기사 량뢰(簗瀨)와 도청직원 권영욱(權寧旭)의 산형(山形) 조사, 묘소와 비문(碑文) 조사를 거쳐 24일, 25일에 군청(郡廳)에서 최씨측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였다.' 라고 하였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이 입장된 년대, 최씨 소유라는 옛 문적의 증거, 옹암 입장(入葬)시 소유 상태, 산지에서의 벌채와 식수 유무, 그간의 소송 전말에 대한 문답과 제반 증거 서류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최씨측 청원서 내용이다. '최씨측의 모든 문축은 1898년(고종 35)에 남김없이 태웠는데 그때 참관했던 신동영(辛東泳)의 귀뜸으로 김씨측이 긴요한 문축 몇 장을 감추었다가 오늘날에 사용하는 것이라며, 이것이 최・김(崔金) 양가가 다시 산판(山坂)으로 분쟁을 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조사원(調査員)이 김씨측의 문축(文軸)에 따라서 최산(崔山)의 전국(全局)을 김씨에 빼앗아 주었으니 원통함을 헤아려 달라.'는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38]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所敎萬宗齋事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9년 류영심(柳永心)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卯閏三月三十日 三從弟 永心 虎山柳生員宅 族案 己卯閏三月三十日 柳永心 柳生員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에 春川譜廳에서 三從弟 柳永心이 족보 일로 고흥의 종인에게 보낸 간찰 1939년에 春川譜廳에서 三從弟 柳永心이 족보 일로 고흥의 종인에게 보낸 간찰. *간찰 오른편을 접어 수신자와 발신자를 적음 *원문: 錢後已閱了矣伏未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54년 송규섭(宋圭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午臘月念四日 弟 宋圭燮 甲午臘月念四日 宋圭燮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4년 12월에 弟 宋圭燮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1954년 12월에 弟 宋圭燮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0년 박태삼(朴泰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子元月之六日 姻弟 朴泰三 庚子元月之六日 [1960] 朴泰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0년 姻弟 朴泰三이 松峴草堂 姻兄에게 보내는 간찰 1960년 姻弟 朴泰三이 松峴草堂 姻兄에게 보내는 간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을유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乙酉九月 日 乙酉九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을유년에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을유년(乙酉年) 9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을유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석동평(席洞坪)과 연곡평(蓮谷坪), 통정평(通井坪), 산징리평(山澄里坪), 신기전(新起田) 등 다섯 곳에 있는 전답의 지번과 두락수, 경작인과 조(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석동평에 있는 논은 2필지 20두락으로 조는 2석 15두이며, 연곡평은 3필지 7두락 5승락으로 조는 2석 15두이다. 통정평은 1필지 8두락이며 조는 4석 10두이다. 산징리평은 2필지 4두락이며 조는 사미(賜米)로 적혀 있다. 신기전은 3필지 4두 10승락이며 조는 5두 9승락 10홉이다. 그리고 연곡리 복사전(伏沙田)은 1필지 2두락으로 조는 사미(賜米)로 적혀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산송(山訟) 전말서(顚末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법제-소송/판결/공증-소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전주최씨 석동산 산송전말서(山訟顚末書)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산송전말서(山訟顚末書)이다. 석동산 산지와 소나무에 대한 소유문제로 전주최씨와 부안김씨간의 산송에 대한 전말을 밝힌 것이다. 우선 석동산은 천자맥(川字脈)인데 동쪽 두 기슭은 김씨 산이고 서쪽 한 기슭은 최씨 산이라고 공안(公案)과 읍지(邑誌) 및 김씨 족보에 실려 있다며 옹암(瓮庵 최생명(崔生明))이 이 산에 매장된 뒤로 조선문종조(朝鮮文宗朝) 이후부터 1935년까지 500년을 대대로 이어 장례하고 수호하는 땅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최산(崔山)의 산지에 대한 산송 내력을 밝혔다. 1679(숙종 5)에 김지택(金之澤)이 최씨선산(先山)의 국내(局內)에 있는 하나의 대부(大阜)를 가리키며 그의 증조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최씨측과 산송이 시작되었고, 이후 1788년(정조 12)에 김광일이, 1860년(철종 11) 김방제(金邦濟) 등이, 1897년(고종 34)에 김동용(金東容) 등이 산송을 일으켰다. 1898년(고종 35) 이완용(李完用)이 식송(息訟)과 정계를 획정한다는 이유로 양가의 송축을 모두 불살랐고 1909년에는 측량하여 최김(崔金) 선산의 경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1921년 2월 간벌(間伐)할 때 김익용(金益容) 등이 군청(郡廳)에 이의를 신청했고 10월 18일에 박태종(朴泰鍾)이 측량할 때 김씨측에서 산을 점유할 목적으로 최씨 산에 빠짐없이 입표를 하였다. 다음은 최산의 소나무에 대한 산송내력이다. 1871년(고종 8)에 '김씨측에게 소나무값 6만냥을 독촉해 받아들이라'는 대원군의 처분을 받았으나 그중 2만 냥만 받고 4만 냥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대원군은 '김홍제에게 전후의 송첩(訟牒)을 모두 소각하고 다짐(侤音)을 받으라.'고 처분했는데 이때 김홍제는 최민(崔民)의 수기(手記) 2장(張), 의송(議送) 1장(張)을 숨기고 납부하지 않았다. 감영, 형조의 완문에도 '숨겨 둔 문권은 말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산지(山地)와 소나무는 최민(崔民)이 수호(守護)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1891년(고종 28) 김홍제(金弘濟)의 아들 김필상(金弼相)이 숨겨 두었던 문권(文券)을 암행어사에게 바쳐 최씨측에 주었던 2만 냥을 되찾으려 하였고 이에 최민(崔民)도 암행어사에게 호소하여 '나머지 소나무값 4만 냥을 추봉(推捧)하라'는 처분을 받았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918년 최전구(崔銓九) 송석우서(送石愚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戊午春三月 日 崔銓九 戊午春三月 日 1918 崔銓九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8년에 최전구가 족종 석우를 송별하면서 작성한 서. 1918년에 최전구(崔銓九, 1850-1938)가 영종도(永宗島)에서 유폐(幽閉) 중인 자신을 찾아왔던 족종(族從) 석우(石愚)를 송별하면서 작성한 서(序)이다. 최전구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어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자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그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 지역(현재의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최전구는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 뒤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에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910년에는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으며,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911년에는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 순찰사로 활동하다가 1917년 12월에 붙잡혔다. 이어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이 서문은 최전구가 영종도에 유폐생활을 할 때 쓰여진 것이다. 최전구를 방문한 석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족종(族從)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의 항렬이 같은 가까운 친족으로 추정된다. 최전구는 송대의 유학자 남헌(南軒) 장식(張栻)의 표현을 빌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은 이(利)이지만, 아무런 의도가 없이 하는 것은 의(義)라고 하는데, 석우야말로 바로 그와 같이 의(義)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석우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울여가면서 항일운동에 매진한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이 기피하는 자신을 찾아 노구의 몸으로 멀리 이곳 섬까지 방문한 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최전구는 그 뒤 1918년에 고종이 죽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계속 항일운동을 하면서 투옥과 유폐생활을 거듭하다가 1936년 8월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독선재(獨鮮齋)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남정록(南征錄)』과 『유고(遺稿)』 4권이 있다. 고창 성송면 학천리에 최전구 추모비가 있고,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을미년 송민(宋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未十一月二十一日 宋珉 乙未十一月二十一日 宋珉 柳生員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미년 고흥 마륜의 宋珉이 같은 고장의 사돈에게 보낸 간찰 을미년 고흥 마륜의 宋珉이 같은 고장의 사돈에게 보낸 간찰. *원문: 景仰之際忽承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을미년 송민(宋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未十一月二十一日 乙未十一月二十一日 宋珉 柳生員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미년 고흥 마륜의 宋珉이 같은 고장의 사돈에게 보낸 간찰 을미년 고흥 마륜의 宋珉이 같은 고장의 사돈에게 보낸 간찰. *원문: 信后有日慕仰益切謹未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간찰(簡札) 초(草)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簡札 형식을 연습한 종이 簡札 형식을 연습한 종이.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종제 경(京)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今月望 弟宗 京 今月望 弟宗 京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번 달(今月) 그믐(望日)에 집안 아우인 경(京)이 보낸 간찰. 종제(從弟)인 경(京)이 작성해 보낸 간찰이다. 도로의 일로 정신이 없어 말씀을 받들기 위태롭다 하고 있다. 중원(重遠)의 일과 유허비의 일은 시간이 되는 자가 담당을 하여 완료를 했으면 하는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