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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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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6년 박내유(朴乃有) 차용증서(借用證書) 고문서-증빙류-차용증 경제-회계/금융-차용증 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 朴乃有 崔氏門中 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 朴乃有 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원형 적색 3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6년 음력 11월에 박내유가 최씨문중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증서. 1916년 음력 11월 11일에 박내유(朴乃有)가 최씨문중(崔氏門中)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증서이다. 부안군 백산면에 사는 박내유는 4원(円) 50전(錢)을 빌리면서 정사년, 즉 1917년 음력 10월 그믐까지 갚겠다고 최씨문중에게 약속을 하였다. 만일 채무인(債務人)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고 기한 내에 갚지 않을 때에는 채권인(債權人)이 지불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의 채권인은 일종의 보증인으로 추정되지만, 채권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딸린 별지에 따르면, 박내유는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잔액 55냥(兩) 6전(錢) 2복(卜)을 본전과 이자에 합쳐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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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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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류춘섭(柳春燮)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從弟 春燮 松軒 兄任 柳春燮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春燮이 柳大錫에게 보낸 簡札의 皮封 柳春燮이 柳大錫에게 보낸 簡札의 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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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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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전북 전주 주덕산에 있는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전북 전주 주덕산(周德山)에 있는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작성연대와 작성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염수재를 지은 시기를 '辛'자인 해로 밝히고 있는데, 유절재 소장문서 중에는 같은 염수재를 대상으로 지은 기문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를 통해서 볼 때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이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전주최씨의 재실 주덕재(周德齋)가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출처(出處)를 돌아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용기를 내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이것은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라서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데 우리 후손들은 이같은 선조의 덕행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덕을 닦고 실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선조를 잊어버리고 도덕을 땅에 떨어뜨린 후손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가정을 다스릴 때 나라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염수(念修)'라는 편액명은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에서 나왔다.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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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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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50년 권홍수(權鴻洙) 영창당기(永昌堂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歲上章攝提格淸和節 權鴻洙 歲上章攝提格淸和節 1950 權鴻洙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0년에 권홍수가 작성한 영창당의 기문. 1950년에 권홍수(權鴻洙)가 작성한 영창당(永昌堂)의 기문(記文)이다. 영창당은 승주군(昇州郡) 해룡방(海龍坊) 앵무산(鸚鵡山) 남쪽 죽동(竹洞)에 있는데,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세장지(世葬地)이다. 예전에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가 처음 지었고, 그 뒤 정축년에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이 중수(重修)했다. 원문에는 또한 그 죽천의 아버지 귀산(龜山)이 성우산(成愚山)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였다. 한편 기문의 저자 권홍수(1882-1972)는 자가 한거(漢擧), 호는 석하(石荷)이며, 일찍이 형 지촌(芝村) 권봉수(權鳳洙)와 함께 매천(梅天) 황현(黃玹)에게 사사하였다. 권홍수는 매천사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창이라는 현판의 이름은 우리 성씨가 영원히 더욱 창성하리라(吾姓永世彌昌之道)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권홍수는 전주최씨의 후손 최학림(崔學林)이 자신을 조상의 문적을 가지고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자 선대의 아름다운 사적을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이곳 전주최씨들이 조상이 쌓은 업적을 이어받아 힘써 도를 닦고 실천하여 그들이 더욱 창성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최학림이 이 기문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최씨가의 현조들을 살펴 보면,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를 필두로 하여,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연촌의 증손 이조참판 암계공(巖溪公) 최연손(崔連孫), 암계의 8대손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 사포의 아들 삼성헌(三省軒) 최영필(崔英弼), 삼성헌의 아들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 송재의 아들 동정(桐亭) 최익문(崔翼文), 익문의 아들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 남산의 아들 청계(聽溪) 최광현(崔光顯), 청계의 아들 성암(誠菴) 최상기(崔相琦), 성암의 아들 농은(農隱) 최규선(崔圭善), 농은의 아들 귀산(龜山) 최춘호(崔春鎬), 귀산의 아들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 등이다. 이들의 자와 호, 활동상황이 적혀 있어서 승주에 살았던 전주최씨의 현조들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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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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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무자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戊子秋 戊子秋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무자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무자년(戊子年)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자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신기평(新基坪)과 통정평(通井坪), 정해평(井海坪) 등에 있는 전답의 두락 수와 경작인,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신기평에서는 최순구와 허익효가 7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6두의 도조를 납부했으며, 통정평에서는 최성도가 5두락을 경작하여 1석 12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정해평에서는 최경선이 5두락 2곳과 4두락 2곳, 3두락 1곳 등 5필지 21두락을 경작하여 6석 36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그리고 최경원이 7두락과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3석 10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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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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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684년 이단하(李端夏) 연촌최선생가록후발(烟村崔先生家錄後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歲舍甲子孟秋上澣 李端夏 歲舍甲子孟秋上澣 1684 李端夏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가 연촌 최덕지의 가록에 부쳐 작성한 후발.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李端夏)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가록(家錄)에 부쳐 작성한 후발(後跋)이다.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은 40여년 전에 간행되었는데 그때 그 서문을 지은 사람이 이단하의 부친 택당(澤堂) 이식(李植)이었다. 그 뒤 연촌의 8세손 최세영(崔世榮)이 아들 최방언(崔邦彦)과 함께 가전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중간본을 펴냈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그 발문에서 연촌의 서발문 중에서 가장 상세한 것으로 이식의 것을 꼽으면서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우암은 다만, 그 중에서 지기(知幾)라고 하였던 부분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여 이식을 평가하면서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암은 어찌 주역(周易)에서 기미를 아는 것을 신(神)이라고 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여기에는 택당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에 대하여는 최세영이 택당의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였다. 바로 이 글이 이식의 아들 이단하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 연유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에서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한편 이식의 아들 이단하는 자가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 송간(松磵)이며,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에 들어가 숙종 때 서인으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난 뒤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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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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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갑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2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甲寅八月二十五日 甲寅八月二十五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인년 8월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갑인년(甲寅年) 8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갑인년 8월에 작성된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신평리평(新坪里坪), 묵정평(墨丁坪), 마전평(麻田坪), 청일평(晴日坪)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최운경과 최응수가 각각 7두락과 6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6두와 2석 2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신평리에서는 최성도가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묵정평에서는 김경옥이 4두락, 2두락, 7두락 등 3필지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2두, 16두, 3석 3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그리고 백한서가 4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6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마전평에서는 최경선이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7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청일평에서는 최성일이 5두락의 논을, 최경선이 2필지 4두락과 5두락의 논을 각각 경작하여 1석 10두, 그리고 1석가 1석 10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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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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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모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소지(所志)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문중에서 올릴 소지의 초안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부안현감 앞으로 올릴 소지(所志) 초안(草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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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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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고흥류씨 사직공파보 권2편(高興柳氏司直公派譜 卷二編) 고문서-치부기록류-보첩류 사회-가족/친족-족보 高興柳氏司直公派 高興柳氏司直公派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흥류씨 사직공파보(高興柳氏司直公派譜)의 제2권에 실을 초본. 다른 파보가 활자로 가본이 나온 것과 달리 이 파보 초본은 모두 수기로 작성되어 있다. 거제공파(巨濟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송암공파(松庵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의 22세부터 27세까지의 족보가 기재되어 있으며 확인하고 보완한 원본으로 9장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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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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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제관명단(祭官名單) 고문서-치부기록류-참사록 종교/풍속-관혼상제-부고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제사를 지낼 獻官과 禮祝間의 이름과 정보가 적힌 명단 제사를 지낼 獻官과 禮祝間의 이름과 정보가 적힌 명단. 獻官 洪南根과 禮祝間 鄭東采의 생년, 역임한 직책, 주소가 적혀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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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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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조객록(弔客錄) 고문서-치부기록류-조객록 종교/풍속-관혼상제-부고 [壬辰]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壬辰年 初喪時 9月 9日~11日과 癸巳年 小祥時의 弔客錄 壬辰年 初喪時 9月 9日~11日과 癸巳年 小祥時의 弔客錄. *내용: 壬辰年九月九日初喪時, 十日, 十一日, 十六. 癸巳九月八日小祥時 *앞표지: 壬辰九月巳時率復 *앞표지 裏面: 壬辰九月初九日巳時率復 *속표지: 壬辰九月九日巳時率復, 弔客錄 *권말에 ‘高興郡高興面虎東里松峴宅入■’ 묵서됨. *1冊 20張이 線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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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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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류중헌(柳重憲) 사주풀이 고문서-치부기록류-사성록 종교/풍속-민간신앙-점복자료 [1953]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미상 날짜에 작성된 柳重憲(1873~1952)의 생년풀이 미상 날짜에 작성된 柳重憲(1873~1952)의 생년풀이. 류중헌의 사후인 1952년 이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임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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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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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류대석(柳大錫) 사주풀이 고문서-치부기록류-사성록 종교/풍속-민간신앙-점복자료 柳淙錫 柳淙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大錫의 사주풀이 柳大錫의 사주풀이. 족보확인결과 류대석은 1900년 윤 8월 28일생임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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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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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17년 최학선(崔學善) 낙육정기(樂育亭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巳春三月下澣 崔學善 丁巳春三月下澣 1917 崔學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7년 3월에 최학선이 작성한 낙육정의 기문. 1917년 3월에 야은(野隱) 최학선(崔學善)이 작성한 낙육정(樂育亭)의 기문(記文)이다. 낙육정은 원문에 완주군 초포면 미산리 172번지에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곳은 그동안 행정구역의 변천으로 지금은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부근에 해당한다. 원문에는 최학선이 정사년 3월에 이 정자를 지었다고 나온다. 그의 생몰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와 관련된 기록으로, ?승정원일기? 고종 5년(1868) 4월 9일(정해)조에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올린 계문 가운데 유학 최학선(崔學善) 등이 전주(全州)의 고(故) 학생 백상수(白象洙)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최학선이 기문의 저자와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위의 정사년은 1857년이나 1917년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최학선의 기문에 뒤이어 기미년 11월에 춘계(春溪) 유상룡(柳相龍)이 작성한 낙육정 서문이 실려 있다. 유상룡은 최학선과 교우하였던 인물인데, 문익환(文翊煥, 1870-1930)의 ?정헌유고(靜軒遺稿)?에 문익환이 보낸 간찰의 수신인으로 나온다. 따라서 기미년은 1919년에 해당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위의 기문 작성연대인 정사년도 1857년이 아니라 1917년이 맞다. 최학선은 정자의 이름을 낙육(樂育)이라고 지은 이유를 맹자(孟子)가 말한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에서 찾고 있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孟子? 盡心上) 요컨대 최학선은 말년에 이곳 완주군 초포면 미산리에 정자를 지어 후진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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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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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무자년 석동재(席洞齋)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戊子九月 日 戊子九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무자년에 석동재에서 작성된 추감기. 무자년(戊子年) 9월에 석동재(席洞齋)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자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석동평(席洞坪) 연곡리와 통정리와 신흥리 등 세 곳에 있는 전답의 지번과 지목, 지적, 경작지의 종류, 경작인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연곡리에 있는 전답은 16곳이며, 경작인 중 안복동(安福同)이 연곡리 내 8곳을 경작했으며, 황종술(黃鍾述)이 6곳을 경작했다. 연곡리의 전답은 모두 8,140평이다. 통정리의 전답은 1,1517평이다. 신흥리의 전답은 1,191평이다. 이 성책문서의 끝에는 무자추향제수전기(戊子秋享祭需錢記)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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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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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2년 류중철(柳重哲)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正月十七日 壬午正月十七日 柳重哲 柳重憲 高興柳氏忠正公譜所 1顆(3.0×3.0)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에 柳重哲 등 17인이 宗人 柳重憲에게 전한 간찰 1942년에 柳重哲 등 17인이 宗人 柳重憲에게 전한 간찰. *원문: 歲已新月已圓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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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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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정사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叅奉公派)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丁巳八月二十七日 丁巳八月二十七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사년에 부안의 전주최씨 참봉공파에서 작성된 추감기. 정사년(丁巳年) 8월 27일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叅奉公派)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정사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하장평(下長坪)과 행안면(幸安面) 묵교리평(墨橋里坪), 상서면(上西面) 통정평(通丁坪), 하서면(下西面) 정해평(井海坪) 등에 있는 전답의 경작인, 두락 수,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하장평에서는 김우옥, 김재중, 이경일 등 4명이 4필지 18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8석 20두의 도조를 납부했으며, 묵교리에서는 최응수 등 2명이 1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모두 4석의 도조를 납부해야 하는데, 둘 다 그 중 2두씩을 납부하지 못했다. 통정평에서는 최경원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5두의 도조를 납부해야 하지만 그 중 5두를 납부하지 못했다. 정해평에서는 최성일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0두의 도조를 납부해야 하지만 그 중 5두를 납부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경선은 3필지의 논 10두락을 경작하여 2석 34두의 도조를 납부해야 하지만 그 중 5두를 납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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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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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류경근(柳敬根) 회갑시(回甲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竹坡 柳敬根 野山 [1933] 柳敬根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竹坡 柳敬根이 野山 柳重憲의 晬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竹坡 柳敬根이 野山 柳重憲의 晬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野山晬宴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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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詩 詩. *원문: 層層紅顔夢慷慨… *상태: 인쇄본 형태, 문서 앞뒤와 상단 중간부분이 찢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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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7언절구의 시문 7언절구의 시문. 시구는 '香, 康, 長'임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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