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參奉) 최식열(崔式烈)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安東金魯東 撰 金魯東 崔式烈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김노동이 작성한 참봉 최식열 묘갈명 병서의 초안 모년에 김노동(金魯東)이 참봉 최식열(崔式烈)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식열은 자는 우서(禹瑞)이며, 호는 죽포(竹圃)이다. 그의 선조 직제학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 이조참판 암계(巖溪) 최연손(崔連孫)은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죽포 최식열의 고조는 최덕대(崔德大), 증조는 최영(崔泳), 조는 최성원(崔成元), 부가 최광오(崔光五)이다. 최광오의 부인은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다. 부부는 자손이 없어서 동생 최광립(崔光岦)의 아들을 입양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죽포이다. 죽포의 생모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신해년(1851)에 공을 낳았다. 죽포는 어렸을 때부터 행동거지가 성인과 같았으며 동년배는 추앙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어른에게는 여러 차례 신속히 대접하고 이해하게 만들어 예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정도에서 끝내 굴복하게 하였다. 죽포는 산천의 적막한 방에서 담박한 생활을 하면서 아무것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찾아온 지기와 대화를 나누던 죽포는 말이 시국의 일에 미치자 슬피 울었다. 공은 인간 됨됨이가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바로 면전에서 힐난하였고 비록 지위가 있고 귀한 사람이라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세태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매번 향방(鄕坊)의 모임에서는 반드시 공을 추대해 맨 먼저 옳고 그름에 대하여 공이 가지고 있는 뜻을 물었으나, 공은 말을 기탄없이 사실대로 말하였기 때문에 비록 패악한 무리라도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였지만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계묘년에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으로 처음 벼슬살이를 하였다. 순종 정미년(1907) 4월 28일에 사망하여 남원 북창촌(北倉村)에 묻혔다. 공에게는 부인이 김씨(金氏), 방씨(房氏), 신씨(申氏), 최씨(崔氏) 등 4명이 있었고, 자식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규철(圭哲), 손자는 관호(觀鎬), 증손자는 창국(昌國)과 창환(昌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