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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중국 남조 송나라 시인(詩人) 안연지(顔延之)의 시(詩)를 적은 주련. 중국 남조 송나라 시인(詩人) 안연지(顔延之)의 시(詩) 「응조연곡수작시(應詔讌曲水作詩)」의 구절 중 세번째[其三], 네번째[其四] 부분을 적은 주련이다. 오른쪽 아래 작게 사(四)·육(六)·칠(七)·팔(八)이라 적혀있다. 「응조연곡수작시」는 모두 8수(首)로 이루어져 있다. 안연지는 중국 남조 송나라 시대 사람으로 자(字)는 연년(延年)어고 시호는 헌자(憲子)이다. 문장이 당대 으뜸이었다. 사령운(謝靈運)과 함께 안사(顔謝)라 불렸다. 작품은 연어(練語)와 대구를 중시한 형식미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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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3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德陽齋라고 쓴 遺墨 德陽齋라고 쓴 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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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晩이라고 쓴 遺墨 晩이라고 쓴 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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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道라고 쓴 遺墨 道라고 쓴 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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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0년 임란공신추모록편찬위원회(壬亂功臣追慕錄編纂委員會)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80 壬亂功臣追慕錄編纂委員會 1980 壬亂功臣追慕錄編纂委員會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0년에 임란공신추모록편찬위원회(壬亂功臣追慕錄編纂委員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 1980년에 임란공신추모록편찬위원회(壬亂功臣追慕錄編纂委員會)에서 고흥의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수단양식(收單樣式)을 알려주는 편지로, 임란공신추모록 수단(收單)과 관련해 공신의 사적(事蹟)을 행장, 묘갈명, 신도비 중에서 한 건만을 골라 현토 정서(精書)를 신입(申込)하라는 내용과 수단금(收單金) 내역을 안내하고 있다. 수단 양식 옆에 구독신입서(購讀申込書)를 함께 인쇄하여 보냈다. 이 편지는 국한문 혼용문이며, 피봉과 함께 남아있고 피봉에는 소인과 우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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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류연석(柳秊錫) 부서(訃書)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午九月十七日 護喪 柳秊錫 戊午九月十七日 柳秊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8년 9월 17일에 柳秊錫이 柳浣錫에게 보낸 訃書 1978년 9월 17일에 柳秊錫이 柳浣錫에게 보낸 訃書. 柳浩錫의 부인 水原白氏가 노환으로 사망하여 부고를 보낸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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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식 장식정가표(高興式 粧飾定價表)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미상 날짜에 작성된 정가표 미상 날짜에 작성된 정가표. 당시 경첩과 입쇠의 품명과 금액을 기재해 둠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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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4년 임준현(林俊賢)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拾參年甲戌三月二十二日 裵有卜 林俊賢 同治拾參年甲戌三月二十二日 裵有卜 林俊賢 裵有卜[着名], 柳漢烈[着名], 盧得權[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4년에 幼學 裵有卜이 幼學 林俊賢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874년(고종 11) 3월 22일에 幼學 裵有卜이 幼學 林俊賢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토지매매사유는 同生弟 文暈이 結債를 납부할 길이 없어 도피하였으므로 형제의 도리로 형에게 책임을 지우니 부득이 동생의 밭을 팔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매매한 밭의 위치와 면적은 흥양현 南面 鹽所坪에 있는 衛字丁 4마지기이다. 거래가격은 錢文 14냥이다. 거래 당시 증인으로 柳漢烈과 筆執으로 盧得權이 참여하여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1874년에 林召史가 흥양현감에게 작성해서 올린 所志와 연관된 것이다. 裵有卜은 동생의 진 빚 14냥 대신에 채권자인 林俊賢에게 동생의 밭을 넘기는 문서를 작성하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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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6년 류지호(柳志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戌六月二十七日 子 志浩 父主前 上白是 丙戌六月二十七日 柳志浩 柳日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6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1826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상태: 우측 윗면 일부 찢김 *원문: 伏未審近來庚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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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7년 류지호(柳志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三月十八日 子 志浩 丁亥三月十八日 柳志浩 柳日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7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1827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상태: 배면에 수신자와 발신자의 주소가 적힘, 일부 찢김 *원문: 父主前 上白是 月前遠程行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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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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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4년 임조이(林召史)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戌四月日 林召史 使道 甲戌四月日 [1874] 林召史 興陽縣監 官[押] ▣…▣ 3顆(7×6.5)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4년 4월에 林召史가 흥양현감에게 올린 所志. 1874년(고종 11) 4월에 南面 道也里에 사는 林召史가 떼인 돈을 받아달라며 흥양현감에게 올린 所志이다. 소사(召史)는 조선시대 여성, 혹은 과부가 된 여성에게 쓰인 호칭으로 '조이'라고 읽는다. 문서에 따르면 임조이는 작년에 재난을 당해 생활은 고사하고 내년에 세금을 낼 길도 없어 부부가 품을 팔고 또 돈을 빚내 겨우겨우 14냥을 모았다. 한 마을에 사는 裵文?가 마침 찾아와 꾀어내니 자신의 남편이 돈을 빌려주었고, 그가 내년 봄 補稅米를 자신이 납부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금을 납부할 그 놈이 도망하여 장차 어찌 해야할지 걱정하던 중 그의 친형 有卜이 일의 맥락을 알아 온 동네 사람들이 請來한 뒤에 그의 동생 보리밭[麥田] 4마지기와 禾穀을 함께 영구히 넘기겠다는 뜻의 문기를 작성하여 주었다. 墨跡이 마르지 않았을 뿐아니라 동 보리밭을 다른 곳에 방매하여 補稅할 생각이었는데 도망갔던 裵文?가 집으로 돌아와 동 보리밭을 자기가 차지할 모양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裵文?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린 뒤에 보리밭을 推給해주거나 錢을 推給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흥양현감은 매우 놀라운 일이므로 엄히 다스리기 위해 裵文?을 잡아오라는 처분을 내렸다. 당시 흥양현감은 유희동(柳羲東)으로 1873년부터 1875년까지 근무하였다. 연결문서로 1874년 임준현(林俊賢) 토지매매명문 1점이 있다. 위 소지의 내용에서 형 裵有卜이 동생의 빚 14냥을 대신하여 작성해주었다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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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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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참봉(參奉) 최식열(崔式烈)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安東金魯東 撰 金魯東 崔式烈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김노동이 작성한 참봉 최식열 묘갈명 병서의 초안 모년에 김노동(金魯東)이 참봉 최식열(崔式烈)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식열은 자는 우서(禹瑞)이며, 호는 죽포(竹圃)이다. 그의 선조 직제학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 이조참판 암계(巖溪) 최연손(崔連孫)은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죽포 최식열의 고조는 최덕대(崔德大), 증조는 최영(崔泳), 조는 최성원(崔成元), 부가 최광오(崔光五)이다. 최광오의 부인은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다. 부부는 자손이 없어서 동생 최광립(崔光岦)의 아들을 입양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죽포이다. 죽포의 생모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신해년(1851)에 공을 낳았다. 죽포는 어렸을 때부터 행동거지가 성인과 같았으며 동년배는 추앙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어른에게는 여러 차례 신속히 대접하고 이해하게 만들어 예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정도에서 끝내 굴복하게 하였다. 죽포는 산천의 적막한 방에서 담박한 생활을 하면서 아무것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찾아온 지기와 대화를 나누던 죽포는 말이 시국의 일에 미치자 슬피 울었다. 공은 인간 됨됨이가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바로 면전에서 힐난하였고 비록 지위가 있고 귀한 사람이라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세태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매번 향방(鄕坊)의 모임에서는 반드시 공을 추대해 맨 먼저 옳고 그름에 대하여 공이 가지고 있는 뜻을 물었으나, 공은 말을 기탄없이 사실대로 말하였기 때문에 비록 패악한 무리라도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였지만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계묘년에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으로 처음 벼슬살이를 하였다. 순종 정미년(1907) 4월 28일에 사망하여 남원 북창촌(北倉村)에 묻혔다. 공에게는 부인이 김씨(金氏), 방씨(房氏), 신씨(申氏), 최씨(崔氏) 등 4명이 있었고, 자식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규철(圭哲), 손자는 관호(觀鎬), 증손자는 창국(昌國)과 창환(昌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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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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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57년 진사(進土) 최안손(崔顔孫)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丁酉仲春 全義李炳殷撰 丁酉仲春 李炳殷 崔顔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이 작성한 최안손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李炳殷)이 진사공 최안손(崔顔孫)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안손(崔顔孫)의 자는 술성(述聖)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안손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강직하고 명민하였으며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남에게 굴종하지 않았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한 뒤에 학문에 매진하면서 당대의 석학인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0)과 돈독히 교류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 그가 사망하자 사림(士林) 모두 큰 건물의 대들보와 거목이 부러졌다고 탄식하였다. 최씨의 시조는 문성공(文成公) 아(阿)이며, 그의 선조 최심(崔深), 최구지(崔久之), 최석견(崔石堅) 등 3세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진사공의 부인은 예안김씨(禮安李氏)이며, 부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한두(漢斗)이고, 사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손자는 최천일(崔千一), 증손으로달효(達孝) 증효(曾孝) 창효(昌孝) 대효(大孝) 민효(民孝) 등 5명이다. 진사공의 묘는 완산의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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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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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49년 부사(府便) 최명손(崔命孫)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己丑至月 族後孫崔秉心撰 己丑至月 崔秉心 崔命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9년 11월에 최병심이 작성한 부사공 최명손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1949년 11월에 후손 최병심(崔秉心)이 부사공 최명손(崔命孫)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최명손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집현전 직제학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현손이다. 증조는 한성소윤을 지낸 율헌(栗軒) 최득지(崔得之)이며, 조는 현감 최자목(崔自睦), 부는 증상장군(贈上將軍) 최분(崔汾),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창령성씨(昌寜成氏)이다. 공은 선천부사도총관경력(宣川府使都摠管經歷)을 지냈고 부인은 숙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는 분토동(粉土洞) 현감공 묘 아래 서쪽을 향하여 쌍분으로 있는데 어언 400여 년이 흘렀다. 가첩(家牒)에 기록되는 것이 이와 같이 적지 않은데도 자, 호, 생졸년, 또한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가정이나 고을을 다스린 일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옛날 공자 때에도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예를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에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 선대의 비를 세우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근거 없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공의 둘째 아들 희정의 ?덕촌집(德村集)?을 보면. 공이 추천을 받아 북으로 가면서, 둘째에게 효도로서 그의 장형을 섬길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공이 공적을 세우고 조정에 돌아오자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관직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신하로서 적을 멸하였을 뿐인데 어찌 감히 상을 받을 수 있냐고 하며 굳게 사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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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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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

최인풍(崔仁灃) 청원서(請願書)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청원서 정치/행정-보고-청원서 崔仁灃 崔仁灃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최인풍이 제출한 청원서 초 태인군(泰仁郡)에 사는 최인풍(崔仁灃)이 부안군(扶安郡)에 사는 김행술(金幸述)을 고소하는 청원서(請願書)이다. 부안(扶安) 변산(邊山) 호치(胡峙)에 최인풍의 9대 조부모와 8대조의 산소가 있고, 최인풍의 선산 백호(白虎) 너머에는 김행술의 선산이 있다. 그러나 개인산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경계를 정하여 금양(禁養)할 뿐이었다. 1804년(순조 4)에 최인풍의 증조부와 종증조부가 처음으로 산지기[山直]를 두고 소나무를 길렀는데 1848년(헌종 14)에 김유달(金瑜達)과 김두모(金斗模)가 최인풍의 선영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최인풍의 조부와 사종조(四從祖)가 부득이 산송을 하게 되었고 1848년부터 1858년(철종 9)까지 10여 년의 산송이 이어졌다. 그때 송관(訟官) 조(趙 趙徽林) 등의 제사(題辭)에, '세장(世葬)한 자기 땅이라고 서로 우기는데 일이 오래되어 비록 친심하더라도 판결할 수가 없다. 관정(官庭)에서 서로 무익하게 다투지 말고 반으로 나눠 수호하라.'고 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송관(訟官) 김(金 金元植)등이 친심한 뒤에, '문기(文記)가 이처럼 분명하고 경계가 확실하니, 동 산지는 전에 결정한 대로 수호(守護)하고 다시 호소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1850년(철종 1) 6월에 부임한 새 군수 박(朴 朴珪壽) 등의 입안(立案)에 '최씨는 최씨 경계를 지키고 김씨는 김씨 경계를 지키도록 경계를 나누어 주었는데도 두 집안이 소송을 하니 이 산은 속공(屬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김유달의 종손(從孫) 김병태(金炳泰)는 군(郡)의 사족(士族)으로서 50여명이나 되는 시복(緦服) 친척이 있으면서 혈혈단신(孑孑單身)이라 속이고, 나이도 23세이면서 18세라 거짓말을 하여 전동(典洞) 대감(大監)에게 동정을 사고는 최산(崔山)의 송추를 자기의 송추라 하고 오래된 묘를 투총이라고 무함하였다. 그러자 전동 대감이 나서 격쟁을 부추기고 영문(營門)에 청탁을 하는 바람에 결국 최인풍의 조부와 종조부는 낙과(落科)하게 되었다. 최인풍은 1902년에 조(趙 趙漢國) 등에게 소송문권(訴訟文券)을 첩련(帖連)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고, 1906년에 다시 관찰사 한(韓 韓鎭昌) 등에게도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봉산(封山)에 사민(私民)을 장사 지낸 것도 무엄한데, 더구나 서로 경계를 정한 송사를 경향(京鄕)에 출몰하며 공정(公庭)에서 소란을 피우니, 이는 법을 벗어난 것이다.'라 하여 양측이 대질도 못한 채 마무리 되었다. 김씨측이 경계를 정하여 수호하자고 화해를 청하였으므로 함께 산에 가서 경계를 정하려 하였으나 누구네 땅이 많네적네 하느라 결단하지 못하였고, 그 당시 송관(訟官)도 체차되어 돌아가는 바람에 양측은 대질을 못하고 지금껏 함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08년 음(陰)12월 11일 밤에 의병이라고 자칭하는 수십 여인이 최인풍 의 집에 쳐들어와 집안의 재산과 문권을 탈취해 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김행술은 산송(山訟) 문축(文軸)이 유실된 것을 기회 삼아 산림(山林)을 측량(測量)하던 날에 최씨 선산(先山) 안까지 들어와 측량하여 그대로 그들의 소유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원하는 것이니 김행술이 제멋대로 측량한 도면은 관정에서 불태워 버리고, 공사(公私) 소유를 광점(廣占)한 김행술의 죄를 엄히 다스려 최씨 선영(先塋)을 다시 보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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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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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5년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元旦 大老祠儒會 院長 金東炫 乙丑元旦 金東炫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5년 1월 1일에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 1985년 1월 1일에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의 학덕(學德)을 기리고자 하여 작년에는 전국 유회원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한 해를 잘 보낼 수 있었으며 내년에도 본 유회의 숙원사업인 대노사정화(淨化)사업이 완성되도록 많은 도움 부탁드린다는 내용이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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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88년 신순우(申順雨)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一九八八年四月日 申順雨 一九八八年四月日 申順雨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8년 4월에 신순우(申順雨)가 보낸 편지. 1988년 4월에 신순우(申順雨)가 보낸 편지이다. 올해에 고흥향교(高興鄕校)의 새로운 전교(典校)를 맡게 되어 부담스럽기도 하나 성심성의껏 성현(聖賢)을 모시고 향교 사람들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일하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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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서신·통지류

1972년 고흥군산림조합장 납부고지서(納付告知書) 고문서-서간통고류-근현대문서 정치/행정-명령-고지서 1972년1월1일 고흥군산림조합장 柳濟洪 1972년1월1일 柳濟洪 고흥군산림조합인 2課(2.0×2.0)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2년 1월 1일 고흥군산림조합장이 柳濟洪에게 발급한 납부고지서 1972년 1월 1일 고흥군산림조합장이 柳濟洪에게 발급한 납부고지서. 1972년 조합비 250원정을 동년 1월 31일까지 납부바란다는 내용의 납부고지서로 아랫부분에 영수증이 함께 있음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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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9년 류지호(柳志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丑元月十一日 子 志浩 父主前 上白是 己丑元月十一日 柳志浩 柳日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9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1829년 柳志浩가 아버지 柳日榮에게 보낸 간찰. *상태: 배면에 수신자와 발신자의 주소가 적힘 *원문: 父主前上白是伏未審此時日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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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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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4년 류영회(柳永澮)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拾參年甲戌十月三十日 鄭貴孫 柳永澮 同治拾參年甲戌十月三十日 鄭貴孫 柳永澮 鄭貴孫[着名], 林俊伍[着名], 盧光烈[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4년에 鄭貴孫이 幼學 柳永澮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874년(고종 11) 10월 30일에 鄭貴孫이 幼學 柳永澮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에 따르면 토지소유 경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매매사유는 '要用所致' 즉, 필요한 곳이 있어서라고 밝히고 있다. 매매한 논의 위치와 면적은 南面 下道道也 侍中坪에 있는 率賓字丁 4마지기이다. 거래가격은 錢文 95냥이다. 거래 당사자 외 증인으로 林俊伍와 필집으로 盧光烈이 참여하여 문서를 작성하였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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