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암(竹菴) 최규동(崔圭東)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安東金魯東 撰 金魯東 崔圭東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김노동이 작성한 죽암공 최규동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모년에 김노동(金魯東)이 죽암공 최규동(崔圭東)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규동(崔圭東)은 자는 재숙(在淑), 호는 죽암(竹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씨의 시조는 고려문하시중 아(阿)이며, 연촌선생(烟村先生)에 이르러 선덕이 드러나고 벼슬로는 최성원(崔成元), 학행으로 이름이 난 자는 최광립(崔光岦), 효로 이름이 난 자는 증조 최한풍(崔翰豊)이다. 조는 최이(崔禰), 부는 한팔(翰八), 모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이다. 죽암은 태어나 자라면서 준수하고 점잖아 무게가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섬기고 상중(喪中)에는 예를 다하여 허물이 없게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사람들을 믿음과 어진 마음으로 대하여 모든 이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가난한 사람을 보면 형편에 따라서 두루 구휼하였다. 나라에 국난(國難)이 일어나자 의사 이석용(李錫庸)과 더불어 꾸민 일이 발각되어 추궁당하며 갖은 곤욕을 치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주암(舟巖)은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가 만년에 머물던 곳으로 오랫동안 대대로 내려온 세천지(世阡地)였는데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서 그동안 백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죽암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최씨 문중의 소유로 회복되었다. 죽암은 무인년에 그가 태어난 곳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용호(龍鎬)와 재호(在鎬), 사위는 소재륜(蘇在倫), 박찬기(朴燦琦), 박홍양(朴洪陽) 등이 있으며, 그리고 4명의 손자 낙현(洛賢), 양현(洋賢), 생현(泩賢), 정현(涏賢) 등이 있다. 죽암공의 묘는 남원 몽촌(夢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