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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3년 송형호(宋衡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三月二十三日 硏友 宋衡浩 癸亥三月二十三日 [1923] 宋衡浩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 3월에 東谷에서 硏友 宋衡浩이 松峴에 사는 柳雅士에게 보내는 간찰. 계해(1923)년 3월 23일에 東谷에서 硏友 宋衡浩이 松峴에 사는 柳雅士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宋衡浩는 편지에서 德林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이 비늘처럼 층층히 쌓여 눈썹을 펼 겨를도 없었다는 자신의 상황을 상대방이 들어서 알 것이며, 자신 또한 지금 柳雅士의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는 자신의 근심에 비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놀랍고 황공함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당신은 더욱 애통하겠지만 천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것으로 위안를 삼으라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이어서 거리가 멀고 인편이 적어 소식이 요원하였으며 憑聞하는 것도 어려우니 밤낮으로 마음 속에 그리움이 가득 차 있던 중 從孫婦가 집으로 돌아와 소식을 자세히 듣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며 건강이 좋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가 되며, 자신은 전과 다름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했다. 다만 事意를 살펴보니 말의 뜻이 만나서 마주보고 토론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며 또 문단은 비록 措語가 熟手하여도 지나치기 어려우니 기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느냐면서 좋은 시간은 얻기 어려우니 허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기간이 되었는데 말이 없으니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이와 같은 일은 그대가 이미 마음을 세우고 또 師友의 勸勉있으니 다시 어찌 赘客이 되겠냐고 하였다. 函席에서 令季씨와 더불어 봄 한철을 편안히 지냈냐고 물으며 사제의 즐거움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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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송규섭(宋圭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八月旬三日 甥 宋圭燮 癸亥八月旬三日 宋圭燮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宋圭燮이 장인 柳重憲에게 올린 간찰 1923년에 宋圭燮이 장인 柳重憲에게 올린 간찰. *원문: 向於路中幸不見窘於雨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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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류제상(柳濟庠)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柳濟庠 柳濟庠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濟庠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 고흥군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濟庠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 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백일장의 詩題는 '霜下傑'이며, 科目은 小古風이다. 시제인 霜下傑은 국화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도연명의 시 〈和郭主簿〉에 "숲길에 피어 빛을 발하는 향기로운 저 국화여,……우뚝 된서리 아래 걸물이 되었도다.[芳菊開林耀……卓爲霜下傑]"라고 하여 국화를 상하걸(霜下傑)로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소고풍은 無韻詩 가운데 5언의 짧은 시편을 말한다. 류제상은 백일장에 참여하여 乙의 점수를 받았다. 답안지 우측 상단에 이 시권의 字號가 五月이라고 쓰여 있다. 자호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字號를 매겼다. 이를 作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天軸, 地軸, 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天軸의 첫 번째 시권은 一天, 두 번째 시권은 二天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月軸의 다섯 번째 시권인 것이다.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1900년대로 추정되며 정확한 시기는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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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7년 정권수(丁權秀)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종교/풍속-관혼상제-혼서 丁亥四月六日 靈城丁弟權秀 丁亥四月六日 丁權秀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7년 4월 6일에 정권수(丁權秀)가 보낸 혼서(婚書). 1947년 4월 6일에 정권수(丁權秀)가 보낸 혼서(婚書)이다. 안부와 함께 이번 여름으로 날을 잡는 게 어떤지 물어보며 혼례와 관련해 사주단자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다. 류대석(柳大錫)의 차남 류제남(柳濟南)의 첫째 부인의 혼서이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류제남은 1929년 2월 20일에 태어났다. 자(字)는 석태(錫泰)이다. 첫째 부인은 정병진(丁炳瑱)의 딸 영광정씨(靈光丁氏)이다. 둘째 부인은 송지섭(宋芝燮)의 딸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정권수는 첫째 부인의 조부이다. 혼서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납채할 때 보내는 문서이다. 예서(禮書)·예장(禮狀)이라고도 하며, 장지(壯紙)를 간지(簡紙) 모양으로 접어서 썼다. 넓은 의미의 혼서에는 사주단자(四柱單子)와 혼인택일에 관한 서장(書狀)까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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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18년 김영한(金寗漢) 월당(月塘) 최담(崔霮) 묘도비명(墓道碑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著雍敦牂黃華節 金寗漢 著雍敦牂黃華節 金寗漢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8년에 김영한이 작성한 월당 최담의 묘도비명. 1918년에 김영한(金寗漢)이 작성한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묘도비명(墓道碑銘)이다. 최담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아(崔阿)의 증손이며,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최용봉(崔龍鳳)의 손자이고 동정(同正) 최을인(崔乙仁)의 아들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叅議)를 역임했고, 검교호조참의집현전직제학(檢校戶曺叅議集賢殿直提學)을 지냈다. 전주(全州) 주덕산(周德山)에 그의 묘가 있다. 숙부인 전주박씨(全州朴氏)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최광지(崔匡之), 최직지(崔直之), 최득지(崔得之), 최덕지(崔德之)가 바로 그들이다. 이 중 최득지는 사마시에 합격했고, 나머지 세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최담은 은퇴 후 향리에 내려와 한벽당(寒碧堂)을 지어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지냈다. 그 중에는 약절재(若節齋) 김종서(金宗瑞), 만육(晩六) 최양(崔瀁), 양촌(陽村) 권근(權近), 안평대군(安平大君), 대제학(大提學) 권맹손(權孟孫),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 등이 있었다. 한벽당은 처음에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月塘樓)'라고 하였다가 뒤에 '한벽당'으로 바뀌었다. 전주의 한벽당은 남원 광한루(廣寒樓), 무주 한풍루(寒風樓)와 더불어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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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57년 유석승(柳石承) 죽촌최공묘표(竹村崔公墓表)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에 유석승이 작성한 죽촌 최병기의 묘표. 1957년에 유석승(柳石承)이 작성한 죽촌(竹村) 최병기(崔秉璣, 1901-1949)의 묘표(墓表)이다. 죽촌은 월당(月塘) 최담(崔霮),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 처사(處士) 최필성(崔弼成) 등 도학과 문장, 그리고 충효와 절행 및 열행으로 이름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대성(東方大姓) 전주최씨(全州崔氏)의 후손이다. 고조는 만흥(萬興), 증조는 명익(命翼), 조부는 기채(其彩)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죽촌은 일찍부터 자질이 뛰어나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누가 과제를 내어 독촉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독서의 방법을 터득하여 문구 하나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정독하여 그 뜻을 끝내 알아내었다. 소년의 공부가 이처럼 진지하여 일취월장하자 그를 가르치는 선생도 그가 크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때는 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무너지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뒤섞여 있는 시기였다. 죽촌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새로운 책(新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모든 내용을 통달하자 마을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18세 때 박상기(朴象基), 김봉섭(金琫燮)과 함께 주산학교(舟山學校)를 설립하여 영재를 교육하는 것을 필생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배우는 학생들이 내는 월봉(月捧)으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배우는 생도의 수는 때로 수천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죽촌은 가난하게 생활하였지만, 결코 이를 걱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권을 가지고 그를 부추겼지만, 그는 결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도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 저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지고 사는 것이야 부득이한 일이지만, 부귀(富貴)하게 사는 일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치(國恥)를 회복할 수 없다면 내가 어찌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민을 가르쳐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묘표를 지은 유석승은 1961년에 ?호남모의록(湖南募義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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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2년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戌年陽三月八日 壬戌年陽三月八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 3월 8일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 대표가 김용관(金容琯)외 15인에게 보낸 편지. 1982년 3월 8일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 대표가 김용관(金容琯)외 15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용관씨 외 15일 귀하라고 제목이 달려있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용관 측에서 잘못한 부분에 대해 통고하였으나 현재 멋대로 강행하여 임원진을 뽑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본인이 자손들의 대표로서 절대 이번 2월 중정(中丁) 행사를 용납할 수 없으며 봉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두 가지로 내용을 정리하여 첫 번째는 합의되었던 임원을 두고 임원을 강제로 선출한 것에 대한 내용이고 두 번째는 제사의 대표로 삼았던 걸 취소하겠다는 내용이다. 지금의 행동을 계속 한다면 선조를 욕보이는 짓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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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2년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一九八二年二月二十一日 一九八二年二月二十一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 2월 21일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에서 전임대노사원장(前任大老祠院長) 김용관(金容琯)외 15인에게 보낸 편지. 1982년 2월 21일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에서 전임대노사원장(前任大老祠院長) 김용관(金容琯)외 15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임대노사 원장 김용관 외 15인 귀하 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작년에 작성한 내용을 3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유회를 소집하는 것은 문중에서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라 부당함을 통고(通告)하니 즉시 시정을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크게 다섯가지를 통고하였다. 첫 번째, 의논을 하고자 전화를 하였으나 병으로 면회하지 못한 점 유감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상기한 2월 11일자 통고문은 법적 절차인 듯 심히 유감이다. 세 번째, 이에 대해 유회에 참석하였던 경위를 증명해 부당함을 적시하고자 한다. 네 번째, 후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회를 중지하기를 바란다. 다섯 번째, 1차로 이사를 선출하였는데 추가로 9명을 선출하였으니 2차로 선출된 이사회는 무효라고 통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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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4년 류영시(柳永蒔)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八日 趙班碩 柳永蒔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八日 趙班碩 柳永蒔 趙班顧[着名], 申椿模[着名], 房瑢奎[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4년에 趙班碩이 柳永蒔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문서. 1904년(광무 8) 11월 29일에 幼學 趙班碩이 幼學 柳永蒔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畓主인 趙班碩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을 債給한 탓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浦頭面 上浦里 沙嶝坪 晝字丁 3斗落을 錢文180兩을 받고 유학 류영시에게 팔았다. 이때 소작인[時作] 申椿模와 증인으로 房瑢奎가 참여하여 문서를 작성하였다. 류영시는 자가 子汝, 호가 竹窩, 본관은 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靈光丁氏이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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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류춘석(柳春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二月十一八日 乙丑二月十一八日 柳春錫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5년에 고창의 柳春錫이 고흥의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1925년에 고창의 柳春錫이 고흥의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春錫白星?相苒苒花樹落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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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박영직(朴永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四月旬之二 朴弟永直 乙丑四月旬之二 朴永直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5년 4월에 박영직(朴永直)이 보내는 간찰(簡札) 1925년 4월 12일 弟 朴永直이 松峴에 사는 이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박영직은 먼저 편지를 받는 이가 사는 松峴이 사람이 傑出하다고 하면서 당신 형제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며 상대방을 칭찬하였다. 이어서 부모와 함께 형제가 살아있으니 독서가 참 즐거움이 된다고 하면서 맹자의 이른바 三樂에 대해 林氏가 그것을 설명하여 말하길 '하나는 하늘에 달려있고, 하나는 남에게 달려있으며 스스로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인간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맹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행동거지를 잘 살펴보고 주의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 자신은 족하(足下)께서 들으신 것으로 알고 반드시 책임으로 여길 것이므로 말하지 않았으나 책임은 이미 무겁고 앞길은 이미 머니 그릇이 큼직하고 뜻이 굳세다면 옛사람들이 말한 '의리는 계속하기 어렵고, 공부는 중단하기 쉽다[義理難繼續 工夫易問斷]'는 戒示를 유념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서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이 편지의 발신인인 박영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지 첫머리에 나오는 德山은 그가 살던 곳으로 짐작된다. 同名人으로 1897년에 출생하여 1989년에 사망한 호가 鶴算이고, 본관이 珍原인 박영직이 있으나 편지 발신인과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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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손호풍(孫浩豊)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庚申十月 日 孫浩豊 등 20명 全州崔氏門中 庚申十月 日 孫浩豊 扶安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신년 10월에 손호풍 등 20명이 옹정사 유지의 소유권 변경과 관련하여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 보낸 통문. 경신년(庚申年) 10월에 손호풍(孫浩豊) 등 20명이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었던 옹정사(甕井祠) 유지(遺址)를 최씨문중에서 그들 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꾼데 대하여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옹정사는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옹암(甕菴) 최생명(崔生命)의 위패만을 봉안하였다. 옹암은 대호군(大護軍) 김당(金璫)의 사위로 처가(妻家)가 있는 부안현에 옮겨와 살면서 전주최씨로서는 부안과 처음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부안 전주최씨의 역사는 옹암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옹정사는 그 뒤 1714년(숙종 40)에 옹암의 손자 최계성(崔繼成)의 위패를 청계사에서 이전 봉안하였다. 도중에 옹정사의 건물이 여러 차례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778년(정조 2) 옹정사를 중창(重創)하면서 손홍적(孫弘績), 김석량(金錫良), 최명룡(崔命龍) 등을 추배(追配)하였다. 그 뒤 1835년(헌종 원년)에 이르러 최활(崔活), 김단(金湍), 채달주(蔡達周)를 또 추배하였다. 따라서 모두 8명이 이곳 옹정사에 배향되게 되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옹성사는 훼철되었다. 이 때 8현의 위패를 이곳 유지에 매장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3월 14일에 8현의 후손들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치제(致祭)를 해왔다. 8현 가운데 4명이 전주최씨이며, 이곳 역시 부안 전주최씨의 텃밭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배향된 4성(姓)의 후손들이 골고루 답토(畓土)를 나누고, 단직가(壇直家)를 세우고, 여러 가지 손실 비용을 각자 부담해 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최씨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매우 부당하다는게 손호풍 등의 주장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사람들은 최씨가 아닌 손씨(孫氏), 김씨(金氏), 채씨(蔡氏) 등 3성 출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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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최봉수(崔鳳洙)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寅 正月 日 各邑宗中 壬寅 正月 日 崔鳳洙 各邑宗中 전라북도 전주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02년 정월에 최봉수 등 66명의 전주최씨 종원들이 각 지역의 종중에 보낸 통문. 1902년 정월에 최봉수(崔鳳洙) 등 66명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종원(宗員)들이 고부(古阜), 전주(全州), 남원(南原), 영암(靈巖), 보은(報恩) 등 각 지역의 종중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이들은 제학(提學)공(公) 최덕지(崔德之)의 묘역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변고로 인하여 '궐향(闕享)'에까지 이르게 된 저간의 사정을 통탄하면서, 또다시 제학공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안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건은 최성흠(崔聖欽)이라는 족인이 작년 봄에 제학공의 묘역 단청룡(單靑龍)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을 쓴 데서 시작되었다. 제학공은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의 장자이자 소윤(少尹)공(公) 최득지(崔得之)와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의 형이 되는 큰 어른이다. 그런데 낯선 무덤이 또아리를 틀고 서로 마주하면서 제학공의 묘소와 석계공(石溪公) 최명룡(崔命龍) 모자(母子)의 묘역을 위에서 압박하는 형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선산으로 다른 잡인의 무덤 하나 없었는데, 저 성흠이란 자가 투총을 하여 선조를 추모하는 이곳을 크게 모욕하였다고 종원들은 통탄해 하고 있다. 변고를 처음 당했을 때는 관을 통하여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일문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바깥의 모욕을 사는 일도 또한 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사람의 의리를 들어 성흠을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세 번을 거듭하여도 끝내 무덤을 굴거하지 않았다. 급기야 3월의 묘사(墓祀) 때에는 설령 선영에 음식을 차려놓는다 한들 조상의 혼령이 마음 편히 흠향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투총을 파간 뒤에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요컨대 월당공 4부자의 묘역이 같은 국내(局內)에 있어서 매년 함께 제사를 지내왔는데, 제학공만 궐향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로부터 다시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이르러 또다시 제사를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최봉수 등의 종중원들은 생각하였다. 이에 각 지역의 종원들에게 통문을 보내 결코 궐향을 해서는 안된다고 호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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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정유년 월헌(月軒) 최일홍(崔一洪) 행장(行狀)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丁酉年 丁酉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 단옷날에 최재홍이 작성한 최일홍의 행장. 1957년 단옷날에 최재홍(崔在洪)이 작성한 월헌(月軒) 최일홍(崔一洪, 1890-1950)의 행장(行狀)이다. 최일홍의 자(字)는 도국(道局)이며, 월헌은 그의 호(號)다. 송촌리(松村里) 출신이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환(寬煥)이다. 최일홍의 아버지는 충서(忠恕)와 효우(孝友)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며, 세상에 아부하지 않고 평생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직상(直相)의 딸로 성품이 매우 부드럽고 온후하였다. 최일홍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영민하였으며, 부모님께 항상 효도를 다 하였다. 행실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켰으며 그 행동거지가 고결하였다. 제사를 지낼때에도 항상 정성을 다하였으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나라가 무너지면서 윤리를 경멸하고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권세를 쫓아 금수의 도굴에 빠지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월헌은 이 같은 세태를 통분해 하면서 산림에 숨어 들어가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자신의 입으로 남의 장단점을 일절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선한 마음을 들으면 더할 수 없이 좋아했다. 월헌은 산수(山水)를 사랑하고 매죽(梅竹)에 대해 읊었으며,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최일홍의 묘(墓)는 부안군 주산면(舟山面) 돌천리(乭川里)에 있다. 최일홍의 처(妻)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운권(運權)의 딸이다. 최일홍은 8남 3녀를 두었는데, 병훈(秉勳), 병윤(秉潤), 병수(秉秀), 병길(秉吉), 병오(秉五), 병하(秉河), 병식(秉植), 병근(秉根) 등이 그의 아들이다. 첫째 사위는 본관이 김해(金海)로 김영배(金永培)이다. 둘째 사위는 본관이 부녕(扶寧)으로 김영철(金濚喆), 셋째 사위의 보관은 충주(忠州)로 지병주(池炳柱)이다. 행장을 지은 최재홍은 최일홍의 족종(族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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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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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29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제수물목기(祭需物目 고문서-치부기록류-물목 종교/풍속-관혼상제-물목 己巳三月十三日 己巳三月十三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9년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제수물목기 1929년 3월 13일 부안(扶安)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한 향사(享祀) 제수물목기(祭需物目記)이다. 제수물목기는 제수물목기와 비용기(費用記), 제수전입기(祭需錢入記)로 구성 되어있다. 제수물목기는 향사에 쓰이는 물품과 그 가격을 적었다. 그 내용을 보면 건시(乾柿), 생률(生栗), 대조(大棗), 문어(文魚), 황귤(黃橘) 28개-1원 40전, 북어(北魚), 계란(鷄卵), 건하(乾鰕), 합자(蛤子), 홍어(洪魚) 3마리-3원, 생합(生蛤), 석어(石魚) 23속-2개 7원(円), 청어(靑魚), 궐아(蕨芽 고사리), 수근(水芹), 청총(靑蔥), 백채(白菜 배추), 정육(正肉) 9근-3원 15전, 진유(眞油), 해의(海衣), 저(猪) 1수-9원, 생해(生蟹), 홍어(洪魚) 1마리-1원 20전, 백지(白紙), 필(筆), 묵(墨), 백염(白鹽), 진미(眞米), 백미(白米), 곡자(曲子), 대구(大口), 생석어(生石魚) 3속 1원 85전, 반합(班蛤), 두유(豆乳), 외자(桅子 치자) 백산(白散), 책반(簀盤) 2개-65전 등 844원(円) 80전(戔)이었다. 부안의 지역적 특성상 해산물이 많다. 비용기(費用記)는 제수물품을 구입하거나 마련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비용이다. 그 내용은 줄포(茁浦) 노자(路子), 초리(草履), 읍시(邑市) 노자(路子), 당황(唐黃 성냥), 연초(煙草), 백로지(白路紙), 수전시노자(收錢時路子), 산직처 부하(山直處賻下), 제수숙정인(祭需塾精人) 주가(酒價), 도저시산직노자(屠猪時山直路子) 등 8원 70전이었다. 16두 8승의 쌀 용도는 주미(酒米), 제반(祭飯), 병미(餠米), 자미(炙米), 염미(鹽米)이다. 제수전입기(祭需錢入記)는 제수비용을 낸 사람들 명단으로, 최정열(崔廷㤠), 최기홍(崔基洪), 최익홍(崔翼洪), 최진홍(崔珍洪), 최만홍(崔萬洪), 최길영(崔吉榮), 최병풍(崔秉豊), 최춘홍(崔春洪), 최병만(崔秉萬), 최길홍(崔吉洪), 최병도(崔秉道)가 각각 5원, 참봉공파(參奉公派)에서 65원을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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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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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3년 최병욱(崔炳郁) 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丑八月四日 崔炳郁 崔光煥 宋子大全重刊之役(所) 癸丑八月四日 1913 崔炳郁 崔光煥 宋子大全重刊之役所 1.3*1.3(원형) 2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3년 8월에 최병욱과 최광환이 ?송자대전?의 중간을 추진하는 곳에 보낸 서간. 1913년 8월 4일에 부안(扶安)에 사는 최병욱(崔炳郁)과 최광환(崔光煥)이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을 대표하여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중간(重刊)을 추진하는 곳에 보낸 서간이다. 사문(師門)의 대사(大事)인 ?송자대전?의 중간(重刊)에 즈음하여 그냥 있을 수 없다면서 문중에서 협의한 뒤에 종이 3 박스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은 여러 차례 간행된 바 있다. 송시열 사후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주도로 송시열이 생전에 남긴 글을 묶어 문집을 편찬하였다. 1694년경(숙종 20) 초본(草本)이 완성되었으나 미진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로 간행이 미루어졌다. 이때 남겨진 필사본인 초본 40책이 『우암유고(尤庵遺稿)』라는 서명으로 전하는데, 이를 황강본(黃江本)이라고 한다. 권상하의 활동무대가 주로 황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1717년(숙종 43)에는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따라 왕명(王命)으로 167권 63책의 『우암선생문집(尤菴先生文集)』이 교서관(校書館)에서 철활자(鐵活字)로 간행되었다. 본집과 별집 9권을 포함하여 167권이었고, 뒤에 간행한 『경례문답 經禮問答』을 합하여 191권이 되었으며, 나중에 부록 및 1732년(영조 8)에 연보 5권이 간행되었다. 교서관본은 일명 운관본(芸館本)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송나라 장식(張栻)의 문집인 『남헌집(南軒集)』의 범례를 따른 것이다. 1787년(정조 11) 『송자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총 236권 102책의 방대한 분량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호를 제명(題名)으로 삼는 것과 달리 '송자(宋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송시열이 '주자(朱子)'에 버금가는 스승임을 나타낸 것이며, '문집'이라고 칭하지 않고 '대전(大全)'이라 칭한 것 역시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과 비견된다는 뜻이다. 이 판본은 평안 감영에서 각인되었는데, 이 때문에 기영본(箕營本)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1907년(순종 1)에 병화로 소실되자, 1929년 후손과 지방 유림들의 협력으로 대전 가양동 소재 남간정사(南澗精舍)에서 대전(大全)의 중간(重刊)이 이루어졌다. 그 뒤 1977년에 이르러 다시 한번 영인, 반포되었다. 최병욱 등이 서간에서 언급한 ?송자대전?은 아마 1929년 남간정사에 중간된 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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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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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27년 전주최씨(全州崔氏) 결의서(決議書) 고문서-첩관통보류-지령 법제-소송/판결/공증-지령 丁卯五月初八日 崔東普 등 36명 丁卯五月初八日 1927 崔東普 인장 39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7년 5월에 전주최씨 문성공파의 후손들이 대동보 편찬과 제향비 마련을 위하여 한데 모여 결의하고 연명 날인한 문서. 최아(崔阿)를 시조(始祖)로 하는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성공파(文成公派)는 최아의 4남을 각각 파조(派祖)로 하여,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대호군파(大護軍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등 4파로 나누어진다. 이들 4파의 후손들이 1927년 5월 8일에 한데 모여 지난 병신년에 대동보(大同譜)를 편찬하기로 한 것을 축하하는 한편, 산판(山坂) 대지(垈地)를 세내어 제향비(祭享費)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백(伯)ㆍ중(仲)ㆍ숙(叔)등 3파는 그 제향비 중에서 1/3로 3위의 제사를 지내고, 계파(季派)는 제향비 중에서 2/3로 8위의 제사를 지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결의 내용을 판각에 새겨 재실에 걸어놓아 후손에게 보여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로 하고 연명 날인하였다. 안렴사공파에서는 고성의 최동보 등 4인이 참여하였고, 대호군공파에는 진안의 최진만, 전주의 최전국, 익산의 최병유, 금산의 최병춘, 익산의 최흥렬 등 13명이 참여하였으며, 판사공파에서는 무주의 최학원 등 3명이, 중랑장공파에서는 부안의 최기홍, 정읍의 최병현, 부안의 최춘홍, 전주의 최규상, 임실의 최병수, 영암의 최계홍 등 16명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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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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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2년 대노사유회연락사무소(大老祠儒會連絡事務所) 편지봉투(便紙封套)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大老祠儒會連絡事務所 柳大錫 大老祠儒會連絡事務所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에 大老祠儒會連絡事務所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의 봉투 1982년에 大老祠儒會連絡事務所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의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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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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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82년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 안내장(案內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戌三月十八日 副院長 權熙濬 壬戌三月十八日 權熙濬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 3월 18일에 大老祠儒會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1982년 3월 18일에 大老祠儒會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취소되었던 春享祭를 재개 하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는 내용. *특징: 국한문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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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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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임야 평면도(林野 平面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사회-지리-지도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흥군 고흥면 호동리 산 82번지 임야 1160평을 표기한 평면도 고흥군 고흥면 호동리 산 82번지 임야 1160평을 표기한 평면도. 일제시기 작성됨 *상태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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