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90년 류영시(柳永蒔)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元月七日 柳永蒔 庚寅元月七日 柳永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 정월 7일에 류영시(柳永蒔)가 보내는 답장편지 1890년(고종 27) 정월 7일에 류영시(柳永蒔)가 보내는 답장편지이다. 먼저 편지를 받고 매우 감사하다고 하면서 설날을 맞이하여 건강하시고 새해를 맞아 복 많이 받으시라는 안부 인사를 전했다. 흔히 아신증지(迓新增祉) 아신익지(迓新益祉) 등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을 표현한다. 이어서 자신은 親事가 이미 연길(涓吉)에 이르러 매우 기쁘고 다행이라고 하면서 답장편지를 마쳤다. 수신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류영시(柳永蒔)는 자가 子汝, 호가 竹窩, 본관은 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靈光丁氏이다. 容儀가 嚴重하고 德行이 有望하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예학에 밝았으며 淸白을 숭상하며 평생을 忍黙하여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다. 묘는 고흥군 虎山松峴 先塋右甲坐에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황용구(黃龍九)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黃龍九 黃龍九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흥군 錦山面 錦津里에 사는 黃龍九가 작성한 백일장 試券. 고흥군 錦山面 錦津里에 사는 黃龍九가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백일장의 詩題는 '깊은 산속이라 4월이 되어 비로소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山深四月始聞鶯]'이며, 科目은 小古風이다. 이 시제는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시 "新夏感事"중에서 한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소고풍은 無韻詩 가운데 오언의 짧은 시편을 말한다. 황용구는 백일장에 참여하여 次下의 점수를 받았다. 답안지 우측에 이 시권의 字號가 八鱗이라고 쓰여 있다. 자호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字號를 매겼다. 이를 作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天軸, 地軸, 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天軸의 첫 번째 시권은 一天, 두 번째 시권은 二天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鱗軸의 여덟 번째 시권인 것이다.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1900년대로 추정되며 정확한 시기는 파악할 수 없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6년 류관준(柳瓘浚)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十二月二十日 柳永心 柳瓘浚 光緖十二年丙戌十二月二十日 柳永心 柳瓘浚 柳永心[着名], 柳永學[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6년에 七寸叔 柳永心이 柳瓘浚에게 祭田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886년(고종 23) 12월 20일에 七寸叔 柳永心이 柳瓘浚에게 祭田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에 따르면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경위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祭田이며, 매매사유는 移買次 즉, 다른 곳의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매매한 논의 위치와 면적은 邑內面 虎山 松峴坪에 있는 寒字畓 5되지기[升落只], 부수 1負 7束인 곳이다. 거래금액은 錢文 10냥이다. 이 문서 말미에 매도인, 거래 참여시 관계를 알 수 있는 畓主, 證人 등이 쓰여 있지 않고 七寸叔 柳永心, 五寸叔 柳永學으로만 기재하고 있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957년 이병은(李炳殷) 문간공송애선생신도비명(文簡公松崖先生神道碑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歲丁酉二月初吉 李炳殷 歲丁酉二月初吉 李炳殷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에 이병은이 작성한 문간공 송애 최광지의 신도비명. 1957년에 이병은(李炳殷)이 작성한 문간공(文簡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다. 그는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맏아들로, 1389년(창왕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병은은 송애가 문종조의 명신(名臣)이었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마찬가지로 출처(出處)가 분명했다고 칭찬했다. 최덕지는 앞으로 화(禍)가 닥치리라 생각하고 미리 은퇴했는데, 송애 역시 단종(端宗)의 즉위 1년 전에 기미를 알고 연촌보다 일찍 조정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최광지의 첫째아들은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이며, 그 아들, 즉 최광지의 손자가 바로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이다. 최광지는 특히 그가 문과 급제할 때 받았던 합격증서 홍패(紅牌)가 고려시대의 홍패로서는 매우 드물게 오늘날까지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명하다. 이 홍패는 왕명의 직인이 찍혀 있고 형식상 완결성을 갖춘 고려시대의 홍패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공문서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홍패는 2020년 4월에 보물 제2062호로 지정되었다. 이 신도기를 지은 이병은은 본관이 전의(全義)이며, 호는 고재(顧齋)이다. 완주 출신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고재집(顧齋集)』 12권 6책이 전하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사성공(司成公) 최순성(崔順成) 묘갈(墓碣)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從九世孫鼎錫謹撰 崔鼎錫 崔順成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최정석이 작성한 사성공 최순성의 묘갈의 초안 모년에 최정석(崔鼎錫)이 사성공(司成公) 최순성(崔順成)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墓碣)의 초안(草案)이다. 최순성의 자는 성지(成之)로, 고궁공(固窮公) 최수손(崔秀孫)의 장자이다. 1507년(중종 2)의 정묘생진시(丁卯生進試)에 3형제가 나란히 합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최순성은 그 뒤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도 급제하여 관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부인은 박씨(朴氏)이며 아들을 하나 낳았다. 아들 위(渭)는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냈으며 박학다식하고 재간과 도량이 뛰어나 당대의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두 선생과 우애를 나누었다. 명룡은 그 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계는 명룡을 유익한 벗으로 대하면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심지어 성혼(成渾, 1535-1598)과 함께 말하기를, 사문(斯文)에 인재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명룡은 그 뒤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으며 전주(全州) 인봉(麟峯)과 부안(扶安) 옹정원(甕井院) 두 곳에 배향되었다. 명룡은 두 아들, 거(勮)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경(勁)을 낳고, 경은 전두(全斗)를 낳았다. 사성공은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효우(孝友)가 뛰어나 아들과 손자들이 이를 본받아 도학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전할 수 있었다. 사성공의 묘는 석동산(席洞山) 선영 아래에 있다. 예전에 무덤 앞에 세웠던 비(碑)가 세월이 지나면서 마모되어 있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방손(傍孫)과 외가 쪽 후손 김씨 자제들과 합심하여 재물을 걷어서 모아 신묘년 봄에 이르러 비를 다시 세우기에 이르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정랑(正郞) 최말(崔沫) 묘갈(墓碣)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傍裔斗洪謹撰 崔斗洪 崔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최두홍이 작성한 정랑공 최말의 묘갈의 초안 모년에 최두홍(崔斗洪)이 정랑공(正郎公) 최말(崔沫)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墓碣)의 초안(草案)이다. 최말은 완산군 문성공 최아(崔阿)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최극성(崔克成)으로, 1507년(중종 2) 증광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봉렬대부 예문관검열 행금산군수를 지냈으며, 고을 수령으로 치적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그의 송덕비를 마을 입구에 세웠다. 어머니는 부정(副正) 오한상(吳漢相)의 딸인 숙부인 오씨(吳氏)이다. 정랑공은 천성이 활달하고 기량이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달랐다. 이조정랑으로 재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살이에 더 나아갈 뜻이 없어서 조정에서 물러났다. 부인은 부사(府使) 송기충(宋期忠)의 딸 숙인(淑人)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덕립(德立)으로 호가 청포(晴浦)이며 관직은 주부(主簿)이다. 문장이 뛰어났다. 딸은 안동권씨로 판서 길창군(吉昌君) 권협(權協)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집(㠎)이고, 외손자는 권신중(權信中), 권필중(權必中), 권경중(權景中), 권정중(權正中), 권근중(權近中), 권심중(權審中), 권위(權偉) 등이다. 증손자는 시만(是萬), 의만(義萬), 의만의 아들 종건(宗健), 종건의 아들 익형(益亨) 이외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정랑공의 세대가 이미 멀리 떨어지게 되어 유고(遺稿)가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후손 최병갑(崔秉甲)이 고가(古家)에 널리 퍼진 것을 겨우 얻어서 기록할 것을 청하자, 최두홍(崔斗洪)이 그의 뜻을 받아 묘갈을 작성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亭이라고 쓴 遺墨 亭이라고 쓴 遺墨.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4년 류삼석(柳三錫)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辰十一月十三日 大同譜重修委員會會長 柳三錫 甲辰十一月十三日 柳三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4년에 대동보중수(大同譜重修) 위원회(委員會) 회장(會長) 류삼석(柳三錫)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 1964년 11월 13일에 대동보중수(大同譜重修) 위원회(委員會) 회장(會長) 류삼석(柳三錫)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족보를 반포하는 일을 타협하는 일에 관련된 내용으로 지난 10월 20일에 족보의 인쇄가 완료되었으나 족보에 오류로 인해 지금까지 반포하는 일이 미루어졌다. 11월 말일 이내로 족보를 반포할 것을 타협하고자 임원회를 개최하니 이에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임원회의 일시는 1964년 음력 11월 20일 오전 9시이며, 장소는 광주시 월산동 36번지이다. 추신으로 단금(單金)을 미납한 문중은 수단유사(收單有司)에게 완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의 인쇄본이며 피봉과 함께 남아있다. 피봉에는 소인과 우표가 붙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江流天地外라고 쓴 遺墨 江流天地外라고 쓴 遺墨. *상태: 배면에 五라 적힘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庭養冲霄鶴라고 쓴 遺墨 庭養冲霄鶴라고 쓴 遺墨. *상태: 배면에 四이라 적힘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風이라고 쓴 遺墨 風이라고 쓴 遺墨. *상태: 오른쪽 아래에 先生이라 적혀있음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愚이라고 쓴 遺墨 愚이라고 쓴 遺墨.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7년 판경당(瓣敬堂)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三月二十五日 沈相淑 等 16名 丁未三月二十五日 沈相淑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고창군 판경당(瓣敬堂)의 류상숙(柳相淑) 등 16명이 고흥군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 1967년 3월 25일에 고창군 판경당(瓣敬堂)의 류상숙(柳相淑) 등 16명이 고흥군 호산리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판경당의 강신(講信) 적폐(寂廢) 문제 논의와 4월 11일에 있을 용암사(龍巖祠)의 유계(儒契) 논의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피봉과 함께 남아있으며, 피봉에는 소인과 우표가 붙어 있다. 판경당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주곡리에 있던 서당이며, 용암사는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춘송리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초기 문신 안성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용암서원이라고도 불리며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 같은 자리에 복설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82년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 안내장(案內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戌二月十日 大老祠 院長 金東炫 壬戌二月十日 金東炫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 2월 10일에 大老祠儒會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1982년 2월 10일에 大老祠儒會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尤菴 宋先生(宋時烈)의 大老祠 春享을 봉행하니 참석 부탁드린다는 내용 *특징: 국한문혼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90년 류중헌(柳重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二月二日 外甥 柳重憲 庚寅二月二日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에 사위 류중헌(柳重憲)이 장인어른에게 보내는 안부편지. 1890년(고종 27) 2월 2일에 外甥 柳重憲이 外舅에게 보내는 안부편지이다. 먼저 장인어른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부모님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간단한 안부편지이다. 편지봉투에 '外舅主前 上書'라고 쓰여 있고, 본문 말미 자신의 이름 앞에 外甥이라고 표현하여 사위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류중헌의 처가는 南陽宋氏로 장인은 宋冑僖이고 당시 류중헌의 나이는 18세였다. 연결문서로 피봉 1건이 있다. 류중헌은 자가 사집(士執), 호가 야산(野山), 본관이 고흥이다. 1873년 10월 5일에 태어나 1952년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南陽 宋冑僖의 딸이다. 품성이 영민하고 효성스러웠으며, 經史와 義理에 밝았다. 고조부 류일영이 편찬한 ?信庵實記?를 간행하였다.○원문 伏未審夜間 侍餘棣候萬安伏慰 區區無任下忱之至 外甥 無撓還程省事粗安 伏幸何達餘餘不備伏惟 下察 謹拜上狀 庚寅二月二日 外甥 柳重憲 拜拜 (피봉) 外舅主前 上書 謹書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11년 박재주(朴在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亥十二月二十一日 査弟 朴在柱 辛亥十二月二十一日 朴在柱 柳生員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1년 고흥의 朴在柱가 사돈에게 보낸 간찰 1911년 고흥의 朴在柱가 사돈에게 보낸 간찰. *원문: 日吉辰良醮禮及于歸順次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김치순(金致順)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金致順 金致順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寶城郡 福來面에 사는 金致順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 寶城郡 福來面에 사는 金致順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백일장의 詩題는 '푸른 그늘 꽃다운 풀, 꽃 피는 시절보다 낫구나[綠陰芳草勝花時]'이며, 科目은 古風이다. 이 시제는 唐宋八家의 한 사람인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詩 「初夏卽事」에서 '綠陰幽草勝花時'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김치순은 백일장에 참여하여 次下의 점수를 받았다. 답안지 우측에 이 시권의 字號가 四地이라고 쓰여 있다. 자호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字號를 매겼다. 이를 作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天軸, 地軸, 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天軸의 첫 번째 시권은 一天, 두 번째 시권은 二天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地軸의 네 번째 시권인 것이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7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建陽二年正月初八日 李貴右 建陽二年正月初八日 李貴右 李貴右[着名], 李命仁[着名], 李昌洪[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7년에 李貴右가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897년(광무 1) 정월 초8일에 李貴右가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 첫머리 조선시대 최초 연호인 建陽이 쓰여 있다. 문서가 작성된 건양 2년 즉, 1897년은 대한제국 수립으로 연호가 광무로 바뀌어 정확히 말하면 광무 1년으로 기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서에서는 이전 연호인 建陽을 이어서 쓰고 있다. 문서 내용을 살펴보면 답주인 李貴右는 자기가 구입한 논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頭原面 松亭坪 係字丁 5斗落只 25負를 錢文40兩의 가격을 받고 팔았다. 논을 매입한 사람은 빈 칸으로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며, 舊文記를 중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新文記 1장만을 작성하여 주었다. 조선시대 토지거래에는 이전 거래에서 작성했던 본문기(혹은 舊文記)와 새로운 거래 당사자와 작성하는 新文記를 매득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는 넘겨주지 않은 문서를 악용하여 이중매매 등의 불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본문기를 넘겨주지 못할 경우에는 사유를 기재하여야 했다. 문서 말미에 문서작성 시 참여한 증인 李命仁, 筆執 李昌洪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정사년 다사소(多土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丁巳三月 日 金洛震 등 13명 金氏門中 丁巳三月 日 金洛震 金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사년 3월에 김낙진과 이병민 등 다사소에 속한 유림 13명이 김씨문중에 보낸 통문. 정사년(丁巳年) 3월에 김낙진(金洛震)과 이병민(李炳敏) 등 다사소(多土所)에 속한 유림 13명이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1567~1621)의 묘도(墓道) 훼손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면서 김씨문중(金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최명룡(崔命龍 : 1567~1621)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가 석계(石溪)이며, 현감 최위(崔渭)의 양자이다. 이우기(李迂棋)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역(周易)과 수학(數學)에 능통했으며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그림도 잘 그렸다. 유작으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가 있다. 석계의 묘도에 있는 묘갈(墓碣)이 훼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자손들이 무력하여 다시 고쳐 세울 여력이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유림들이 김씨문중에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한 것은, 바로 사계 김장생이 석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석계의 묘갈명을 써주었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사계는 석계를 추모하는 묘갈명에서 그가 일찍이 변산의 어느 절에 들어가 10년 동안 나오지 않고서 천하의 이치를 탐구하기로 다짐하였다가 때마침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오게 된 일화를 소개하고, 석계가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을 때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석계를 보고 감탄하고서 우리의 도를 전할 사람이 있다고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계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듯한 애통함이 있다고 명민한 제자를 잃은 아픈 마음을 묘갈명에서 토로하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98년 화양간소(華陽刊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戊戌三月十五日 宋奎洙 등 6명 門中 戊戌三月十五日 1898 宋奎洙 門中 충청북도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98년 3월에 화양간소에 있는 도유사 송규수 등 유생 6명이 성담 송환기의 유집을 간행하는데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국의 각 문중에 보낸 통문. 1898년 3월에 화양간소(華陽刊所)에 있는 도유사(都有司) 송규수(宋奎洙)와 문의(文義), 대구(大邱), 초계(草溪), 진산(珍山), 청주(/淸州) 출신의 유생 등 6명이 각 문중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담이야말로 백세(百世)의 종사(宗師)인데도 타계 후 백년이 다 되도록 그 유집이 간행되지 못한 것은 조가(朝家)의 흠전(欠典)일 뿐만 아니라, 사림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작년 봄에 영 호남의 사림들이 발의하여 본가와 후학들이 협력하여 몇 권을 상재(上梓)하였으나 그 일이 워낙 방대하여 작업이 중지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간소에서는 전국에 있는 문중에 통문을 보내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송환기는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으로,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성담(性潭) 등이다. 1766년(영조 42)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순조(純祖)의 조정에서 형조참의, 예조참판, 공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