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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示次兒載畿【庚子冬。余有定山師門之行時。畿兒年十五。讀大學訖。因勖之以復讀千遍。而戒之云云。】 夫學須靜。不靜。難以存心。纔不存心。血肉之軀。了無管攝。而其不爲仰面貪看鳥。回頭錯應人者。幾希矣。噫聖賢千言萬語。不外乎一誠字。蓋誠者。實而不欺之謂也。爲學者。悠泛等待。不百倍着力做去。則先以自欺。次以欺人。豈不可懼也。但立誠意而讀之。必窮究乎如何是正心。如何是修身。造次必於是。顚沛必於是。無毫忽怠惰之病。萌乎方寸之間。則自然物格知至。而所謂三綱領八條目。必了然於胸中。而有餘味矣。汝將以是傳。爲千遍致力計。則要在靜其心誠其意。而硬着筋骨。似擔百十斤方得。汝其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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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梁君泰正文 嗚乎痛哉。自君之逝。穀燧一周。久愈痛迫。可難推諉。竊念君之於父母。盡愛敬之道。於兄弟。盡友恭之道。睦於宗族。信於友朋。至州里遐邇親疎。莫不各盡其道。萬口稱譽。一無瑕纇。當此叔季。禍亂如山。劫浪滔天。謂無憂虞。而永膺休祥。終展遐武。豈意崑火一炎。免不得玉焚之嘆。且君之先世積累德蔭。子孫食報。宜其昌大。擧謂之第一家。而竟罹禍厄。是豈天理人事之不僭可徵者耶。聞二穉哀。充茁俊秀。決知福善之應固在此。以此相慰。或洩幽明之憾耶。訃車所到。毋言知不知。莫不齎咨揮涕。是莫非令聞令譽之感人深者也。而胡然遽至於斯耶。嗚乎痛哉。昔君之患病。幾涉危津而復甦。欣幸可埒。將勇往相面。而冗故所萃魔障多端。年去歲來。因循退托者。豈其情也。但其寸心往來。靡日不憧憧。而謂有早晏握手相話。破顔紓懷矣。一朝千古。豈夢寐所到也。余亦縶燕餘毒。運武不得。葬未臨穴哭訣。祥未入筵洩哀。兒子輩。或緣奔汨靡遑。或因宿疴沈痼。使不得奔往哭酹。而留俟後日。只送薄奠告侑。是豈人彛。而不昧者靈。曲燭此狀。而庶鑑我臆緘辭。淚迸如雨。嗚乎痛哉。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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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姪載昌文 嗚乎痛哉。汝胡爲而生。胡爲而死耶。天胡爲豐其賦。而嗇其命耶。汝生而姿質英異。及長才藝迢邁。倫理極至。謂天將福吾家。昌吾門。而亦不偶矣。何天難諶。而奪之速耶。嗚乎痛哉。自汝父早世。痛恨在骨。而其儀刑之厚重。動止之安詳。惟汝肖似。每對汝。口雖不言。心焉悲喜。今竝與肖者而不可見耶。昔遭寇變而各流寓。見亦不頻數。常恨孤踽。會當擇里團聚。以償素志。誰謂此事未成。而爾遽棄我耶。吾勉翁先生之拘燕也。汝將涉海奉陪。旣至絆纏辦置而未行。病革過一朔。惡島訃音亦至。極天痛迫。此何情景。靈若有知。則當拜侍天臺。而服事左右矣。汝父哀詞。汝所泣懇者。而今見漏正書。初不載本藳致然。而未知其後圖之。將如何耳。余以南冠病骨。運武不得。汝死未得面訣。葬未得哭臨。又未得躬哭靈筵。以洩萬分悲痛。而兼慰汝穉孤母子。此豈人彛哉。綴辭數行。肝腸寸裂。語不得盡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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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十三人錄 金箕述 字正範號菊軒。己酉生 道康人 泰仁古縣內林炳瓚 字信大號遯軒。辛亥生 平澤人 泰仁宗聖文達煥 字德卿號遯齋。壬子生 南平人 綾州富春洞梁在海 字順集號華隱。乙卯生 濟州人 綾州白雲里高石鎭 字淸汝號秀南。丙辰生 長澤人 興德加平林顯周 字熙瑞號警堂。戊午生 平澤人 求禮海橋趙愚植 字宗顔號省菴。己巳生 淳昌人 谷城梧枝李容吉 字致弘號乙溪。庚午生 全州人 長水西邊鄭時海 字樂彦號一狂。甲戌生 晉州人 茂長三台 殉羅基德 字士溫號岐山。丙子生 錦城人 巨濟寺洞趙泳善 字而慶號止山。己卯生 錦城人 谷城梧枝崔濟學 字仲悅號習齋。壬午生 耽津人 鎭安木洞柳海瑢 字德容號剛菴。甲申生 高興人 谷城長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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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仲秋節。星州李鍾弼謹跋。 遯齋文先生。卽我先師尙志齋公。先君子也。早師勉菴崔先生。得聞爲學之道。又㴑淵源之正。弆朱書節選等書。俯讀仰思。自早至老。敬之如神明。悅之如芻豢。微辭奧旨。求之甚篤。常不敢自信。而信其師。尤以師贈進修根基修齊治平八字。終身佩服。是以性命理氣。事物微細之奧。言之若訥而信手筆記千萬言。滾滾成章。此皆勤苦積累之功也。猶是而不自有。近而同門宿德。遠而嶠南士友。講論尋討。無微不括焉。每讀其文詞。古而不新。實而不華。所謂不胾之大羹。疏越之朱絃。人孰知淡味之濃。大音之希也哉。噫。時値板蕩。賊臣販國。島夷猖獗。生民塗炭。有若勉菴崔先生。擧義欲復。公直覩危迫之勢。奮然而起。從師赴義。走檄八路。東閃西倐欲復宗社。不幸中途憤敗。竟失所圖。反爲賊窟所囚。不屈於桁楊凜烈乎劒戟。以死抗辨。倭酋嘿然。有慚怛色。竟放還故山。抱千秋不雪之恨。一臥東岡。遨世晦養。自任以導迪後學。以國讎未復。終身戴白笠。坎坷沒世。先生儘守義志士。秉德君子也。夫先生遺文。肖胤尙志公。嘗圖鋟梓。而經年未就。庚寅兵燹。多有散逸。尙志公。又不幸中逝。是顯晦所關之數耶。莫非爲世人所公惜者也。先生沒後三十六年。今將廣布壽傳。不無沈滯之感。然有始有終。則幸耳。又於門徒之苦心血誠。以盡事一之道。豈非叔世之盛事乎。世之君子。聞先生之風。溯先生之學。則豈無興感之效也哉。諸碩德章甫之揄揚備盡。故不必妄贅。余猥參分彙編錄之役。所感于中者。謹爲之書。癸丑重陽節。門下族姪基奉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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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을유년 삼도주박영국선탐정기(三島注泊英國船探情記) 초(抄)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乙酉六月日 乙酉六月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5년 6월에 흥양현 삼도(三島, 거문도)에 정박해 있는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탐정기(探情記) 1885년 6월에 흥양현 삼도(三島, 거문도)에 정박해 있는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탐정기(探情記)이다. 표제는 '을유년 6월 삼도에 정박한 영국 배 정탐기[乙酉六月三島注泊英國船探情記]'라 쓰고, 이후 7개 항으로 관련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885년 3월 1일,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항이라 부르고 요새를 구축했다. 얼지 않는 항구를 노리는 러시아가 거문도로 남하할 것으로 예측하고 취한 조치였다. 청나라가 중재에 나서 러시아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이끌어내자, 영국은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조선에서는 고종 22년(1885) 영국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한 사건에 대하여 《전라좌수영계록》에 전라 병영에서 7차례에 걸쳐 중앙에 보고한 내용이 확인된다.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난달 16일 穆參判(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 )이 同事로 蘇士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말을 타고 大輪船에 도착하여 長村 앞바다에서 招諭하여 伯民으로 하여금 安接하게 한 후에 다음날 出去함. 1. 덕흥리(德興里) 앞 남쪽 수구(水口)에 가로질러 막은 뗏목과 철삭(鐵索)에 대해, 해당 마을 백성들이 어채(漁採)하기에 불편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모양으로 누누이 함장(艦長)에게 간청하여 서쪽 10여 파(把)까지는 비로소 철거해 주어 겨우 어채선(魚採船)이 왕래할 길이 뚫림. 1. 왜도(倭島, 거문도)에 이미 집 한 채를 지었음. 장식은 매우 화려하고 건물 안에서부터 포변(浦邊)에 이르기까지 전선(電線)을 매설하여 동 포수(浦水) 밑에서 곧바로 중국에 이르고, 중국에서 또 영국에 이르러 잠통(潛通)한다는 성식(聲息)이 있다고 함. 1. 왜도(倭島, 거문도)에 새로 지은 屋舍 한 채는 우리나라의 假家와 비슷함. 다만 앞에 垈田 7石의 땅이 있음. 매 1石의 禾價는 銀 1錢 혹 1전 2, 3푼의 定價로 얻음. 船倉에서 雇人을 매일 2~30명 또는 50명을 고용하여 돌을 운반하여 쌓음. 1. 동쪽 수구 水雷砲는 전에 매립한 것에 의하여 선창에 쌓았으며 모두 비바람을 입어 훼손된 뒤에는 다시 고치지 않음. 1. 유촌(柚村) 뒤 포구의 주변에 철관혁(鐵貫革)을 설치한 다음 매일 5, 60명이 각각 총과 화약ㆍ탄환을 가지고 나와서 언덕에 의지해 엎드려 있다가 2명씩 조를 지어 사격을 시험하였는데, 솜씨가 좋은 자는 열 번 쏘아 열 번을 명중하고 조금 못한 자는 열 번을 쏘아 8, 9번을 명중하였음. 1. 북쪽 수구 뗏목에 철삭(鐵索)은 그 사이 풍랑으로 인해 양쪽가에 부딪쳐 뗏목이 이미 훼손되었음. 저들이 함께 大輪船을 타고 와서 훼손된 곳을 다시 設役하여 견고하게 막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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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33년 류영의(柳永毅) 야산류중헌축수문(野山柳重憲祝壽文)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癸酉冬十月五日 五泉 柳永毅 柳重憲 癸酉冬十月五日 柳永毅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3년 10월 5일에 柳永毅가 柳重憲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祝壽文 1933년 10월 5일에 柳永毅가 柳重憲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祝壽文이다. 회갑의 주인공인 류중헌은 고흥군 虎山에 살았으며, 1933년 10월에 회갑(回甲)을 맞이하였다. 그의 회갑을 맞아 주변의 일가 친족, 지인 등이 회갑을 축하하는 詩文을 보내왔다. 그 중에서 이 문서는 고흥에 살던 一家 柳永毅가 써서 보낸 축수문이다. 축수문의 내용에 따르면 류중헌은 仙山 老星의 맑은 기운을 모아 간직하고, 降心으로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며 그의 성품을 칭찬하면서 晬辰에 兩親이 살아계시니 하늘 아래 참된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 집은 조부가 回甲과 回婚에 이르렀고, 부친 또한 이와 같으며 류중헌도 回婚을 기약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후세에 반드시 칭하여 말하길 이 고을의 回甲, 回婚은 모두 某家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여도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류중헌은 자가 사집(士執), 호가 야산(野山), 본관이 고흥이다. 1873년 10월 5일에 태어나 1952년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南陽 宋冑僖의 딸이다. 품성이 영민하고 효성스러웠으며, 經史와 義理에 밝았다. 고조부 류일영이 편찬한 ?信庵實記?를 간행하였다. 류영의는 자가 弘叔이고, 호가 五泉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아버지 柳乙浩 와 어머니 여산 송씨 사이에서 1865년 6월 1일 고흥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당, 송, 명과 우리나라 시를 모아 ?古今試選?을 편찬하였으며, 1947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천유고?(1권1책, 석인본)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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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輔賢【章奭】文 嗚乎惟公。淳朴其姿。明敏其識。早謝公車。硏究經籍。味厥眞腴。務在自得。孝友睦婣。家法惟篤。喪祭飮射。聿覩儀則。粵在庚寅。薄遊余塾。整衣尊瞻。牖我來學。顧此愚陋。蓬麻有托。昕夕源源。畏友之益。講義論理。庶無差錯。欽聖希賢。尤勤喫着。人或談世。惟主寬黙。乃若斥邪。剛毅牢確。旣豐於才。數何局促。斯有斯疾。支離床褥。喪罰頑命。躬訊不得。只憑赫蹏。懇辭來復。明子姪訓。申父兄責。切切偲偲。終始戒勖。吾黨無祿。龍蛇告戹。報善以福。碩果不食。脚下子姓。如蘭如玉。異日樹立。曷不裕綽。用是相慰。庶感冥漠。但此賤生。憂故局束。葬未執紼。練未趨哭。晩後一侑。未免倩酌。撫舊傷今。懷緖千百。綴玆蕪辭。有淚沾臆。昭昭者靈。庶其歆格。嗚呼哀哉。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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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尹季仁【相麟】文 嗚乎哀哉。墳草已宿。再朞將至。陰陽推敓。日月奔邁。其間世道之嬗變。人事之休戚。亦復幾何。而獨吾之於君死生之憾。幽明之恨。不以歲月之久少弛。而愈往不衰者。何也。以其道同而契合。志脗而誼密。莫之爲而使之然也。昔者聞君之病報。亦已晩時。未得執手相悲。且歿未得撫棺一慟。而緘辭洩哀。亦後於人。此豈理耶。情耶。然吾年來。經歷便同滄桑。夤緣事勢。拘牽淹致。心迹矛盾。嗚乎哀哉。天胡稟君以重厚安詳之姿。而不幷假之遐壽。胡與君以聰敏英特之才。而不遂使之遠到。其與之者誰。其奪之者誰。與之奪之皆天也。則難諶者天。天如可諶。必玉成此人。而措斯文於當世。牖後學於將來。使天下後世。蔚然有令德令譽之不可泯沒者。而胡奪之甚速。反使君齎恨於冥漠之中。又使一世章甫。咨嗟嗚咽。而不能自已者耶。嗚乎哀哉。壬寅之秋。與君迎謁勉菴先生於方丈山之僧舍。浹旬坐春。君之所得最多。冬又遊余塾。晝而玩繹朱文。夜而講誦思傳。愈久愈篤。不使有晷刻少懈。而性又彊記。而明敏裕綽。每從燕暇。叩其所存。則胸有雲夢之富。詞有黼黻之華。然其持守。若愚若訥。凡百進修。豈余可及。竊謂之將翶將翔。相依相資。以遂蓬麻之願矣。何其奄忽至此。以貽隔世之恨耶。嗚乎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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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兄敬齋文 從弟達煥前一日。因朝奠謹再拜。文爲之告曰。嗚乎哀哉。先生資稟淳粹性度溫仁。忠宣垂蔭。勉修有孫幼失所怙。鞠於偏慈。有弟有妹孝友隆摯。承祖父訓。學問日就晩尤喜經。聖賢爲師。窮探力踐。如渴赴飮。言行相顧。孰不欽艶素履儉約。衣褐咬菜。睥睨名利。激仰今古。傎世汚下。蹄迹四交宇內啇啇。廉恥都喪。惟兄憤厲。特持綱常。秉心公明。疇敢匿情。杜門獨善。爲自靖計。敎子訓姪。恩愛懇至。至於族戚。睦婣有則訶佛詆巫。考禮正俗。對人遇物。湛如止水。咸稱君子。萬口一辭。婆娑林丘。守死善道。以敬加功。周流貫澈。仍揭堂楣。勉師記實顧弟窾啓。類瓠無竅。菲才陋質。衆所唾棄。惟兄諄諄。誘掖勸導。剩馥心薰。餘論耳剽。居住參商。恨不源源。俛仰之頃。遽隔重泉。悠悠彼蒼。胡不憖遺。鄕黨齎咨。宗族喪氣。病未擧扶。葬未執紼。雖縻冗故。於心常戚。日月不留。鑽燧改移。歲將再期。今焉已矣。賊狴餘俘。病未躬侑。倩人告由。腷抑涕流。嗚乎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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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齋朴公行狀 公諱枝春。字仁汝。號曰蓮齋。姓朴氏。爲珍原巨族。直提學熙中。十一世孫。竹川先生光前七世孫也。曾祖諱世蕃。祖諱台鉉。考諱采日。皆不仕。妣南平文氏必成女。公其季子也。生而穎悟。孝悌謹篤。早孤居喪盡禮。身不離苫塊。口不入酒肉。哀慕號哭。隣里觀聽。莫不感涕。或見幼穉被衰者。雖路上對之。必泫然。伯仲家生事。俱不贍。雖蔬果細物。無一不分。奉天只。養于其家。愉惋承順。溫淸殫誠。適口之味。便身之物。罔不畢給。而一主乎養志。及遭艱。送終營窆。極盡無憾。而三燧血淚。毁瘠骨立。人莫不咨嗟興歎。每遇新物。不薦廟不敢口。當親忌。則必求所嗜。極誠供羞。必謹齊沐。整肅冠服。坐待鷄鳴。老不少衰。素患痰咳。年又八耋。齊當季冬隆寒。子姓輩。恐其添祟。諫其澡浴。竟不聽。然而厥疾無加有減。所謂皇天無親。惟德是輔者。非此耶。宗家適不同里。道路稍間。子徽元。固請代行。是則聽施。然是夕。端坐長燈。鷄鳴而哭泣。此非至誠耶。孝哉朴公。公以英廟十二年乙卯。四月二十一日生。而終于正廟十九年己卯四月十八日。享壽稀五。嗚乎。夫孝者。百行之源也。其源深。故百行之善。無不由是而出。況其平生用力。尤深於庸學書也。一以窮理修己爲主本。而必勉勉乎中正之道。蓋其閨門。夷愉而肅穆。兄弟友恭而翕和。待族戚甚厚。若無遠近之別。接賓朋尤謹。雖年少必盡禮。御婢僕。恩威兼行。而必使之感化。聞親知之喪。設位而哭。或至廢食。當遠代之忌。或未往參。行素則不廢。事事謹愼。循蹈繩榘。於是有秉彛之性者。自里而坊。坊而鄕。鄕而道。俱以獎善褒美之意。龥告不已。而刺史不能薦。繡衣不能啓。以至大宗伯。雖甚嘉尙。而亦推諉待式年惜乎。朝無一人擧賢揚善。而爲風化之助者。可慨也耳。葬于本府富平面葛嶺村後。與配墓雙兆。配玄風郭氏致毅女。婦德純備。擧子男一人徽元。女一人。適金琬孫宇成。曾孫。廷洪廷國廷立廷薰廷集。玄孫以下不盡錄。公五世孫奉柱。眞法家拂士也。直溫有度。相與從逐數年。趣味甚孚。一日抱公狀軸。屬余以狀次。余以才菲德薄。不敢當是役辭之。旣又曰昔董邵南。隱居行義。刺史不薦。不得試於當時。後得韓文公作行傳。名後世。必待文章德義。如韓文公者然後。乃可書其志行。而非聵眊者所敢也。然不有其資。將於何取證也。遂㝡其梗槩。以備立言君子之採擇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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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通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寶城鄕校와 長興鄕校에서 양반의 군역충원에 반대하여 흥양향교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보낸 통문을 필사한 문서 양반의 군역충원에 반대하여 흥양향교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寶城鄕校와 長興鄕校에서 보낸 통문 2건이 필사되어 있다. 앞부분은 보성향교에서 보낸 통문으로 표제를 '寶城通狀'이라고 썼고, 뒷부분은 장흥향교에서 보낸 통문으로 '長興通文'이라고 적었다. 앞부분은 보성향교에서 大西面에 거주하고 있는 金春의 군역충원과 관련해서 흥양향교로 보낸 통문이다. 이 문서에 나오는 대서면은 현재 고흥군 대서면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흥양에 새로 들어와 정착한 金春의 군역부과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김춘은 양반가의 후예로서 장흥에서 이거하여 흥양에 새로이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朝令에 의하여 군역에 충원된 것이었다.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었지만, 김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보성의 유림들이 군역에서 그를 빼는데 흥양향교에서 적극 나서주길 요청하고 있다. 이 통문에 의하면 簪縷家의 자손은 백대의 良金이고, 淵源家의 苗裔는 만세의 美玉이라고 하면서 사람에게는 귀천이 있다고 하였다. 大西面에 사는 金春은 본관이 영광으로 본래 장흥에서 거주한 양반가로 장흥에서 흥양으로 移寓하여 산지가 벌써 三世를 지냈다고 하였다. 貴邑은 장흥에서 보이지 않아 초나라와 월나라 같이 서로 간에 관계가 먼 것 같지만 장흥은 귀읍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흥양이 이웃을 궁휼히 여기는 풍속 또한 지극하다고 하였다. 金春의 사람됨은 예전에는 점잖지는 않았지만 別隊에 充丁되었고, 烽燧臺에도 充軍되었다고 하면서 군역에 충원하는 일은 朝令으로서 각 읍에서 똑같이 이뤄지는 일이지만 이것은 靈家의 후예로서 이같이 降丁되는 것은 세상에서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근래 鄕綱이 무너지고 풍속이 변한지 오래되어 이같은 일은 천만뜻밖의 일로 흥양의 안타까운 일이자 士林의 수치라고 분개하였다. 푸른 귤이 바다를 건너오니 탱자가 된 것처럼 사람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고, 窮人이 고을을 떠나게 되니 남의 어려움을 보고 괴롭히지 않고 순수하게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公議를 내어 관아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서 양반가의 후예가 군역에 혼입되지 않고, 이웃을 궁휼히 여기는 풍속을 지킴으로써 후일의 잘못이 일어나는 폐단을 막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長興通文이라고 적힌 이후의 내용은 金春의 군역충원과 관련해서 흥양향교로 보낸 통문내용이다. 본문에서는 흥양에 새로 들어와 정착한 金春의 군역부과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김춘은 양반가의 후예로서 장흥에서 이거하여 흥양에 새로이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朝令에 의하여 군역에 충원된 것이었다.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었지만, 김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분개한 장흥의 유림들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는 한편, 군역에서 그를 빼는데 흥양향교에서 적극 나서주길 요청하고 있다. 장흥통문에 의하면 芝艾는 나눔이 있고, 鳥는 鸞과 梟의 구별이 있다면서 그 本을 찾지 않고 다만 그 末을 말한다면 어찌 사람을 대하는 도리라고 하겠는가라고 서두를 열면서 귀 고을 大西面에 사는 金春은 곧 雪岩(金㻶, 1426~1470), 月峰(金光遠. 1478~1550) 두 선생의 후예로 장흥으로부터 흥양으로 이거하여 산지가 三世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金春이 어리석어 한 번은 別隊에 들어갔고, 한 번은 烽燧臺에 들어갔다면서 군역에 충원하는 일은 朝令으로서 각 읍에서 똑같이 이뤄지는 일이지만 先賢家의 후예로서 充丁에 이른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지각이 있는 사람으로 수치가 되니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다고 하고 또한 貴邑의 안타까운 일로 別隊軍, 烽燧軍에 들어간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김씨 집안의 상황은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고, 그 사람의 확실한 행적을 알 수 있으니 士林의 公議에 있어서 입다물 수 없고 물러날 수 없으므로 이같이 齊議하여 알려 드리니 貴邑에서 관아에 稟達하여 영광의 후예를 보호하고 移居의 窮함을 구제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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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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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2년 류영시(柳永蒔) 등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寅四月二十二日 柳永蒔 等 15名 壬寅四月二十二日 柳永蒔 宋明浩, 柳鍾敏, 柳永暉, 丁在鉉, 柳永豊, 申在求, 宋箕浩, 宋幹浩, 宋俠, 申在彬, 宋良燮, 宋達三[在邑不着],徐德鳳[着名], 朴茂馨[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2년 柳永蒔 등이 작성한 手標. 1902년 4월 22일에 興陽에 사는 柳永蒔 등 총 15명이 작성한 標이다. 이 표를 작성한 이유는 본읍 無亡結戶의 역을 영구히 감하는 일을 주선하는데 엽전 23,500냥이 들어가는데 매 냥 당 5푼의 이자로 얻어서 쓰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읍에 있었던 柳永蒔, 宋明浩 柳鍾敏, 柳永暉, 丁在鉉, 柳永豊, 申在求, 宋箕浩, 宋幹浩, 宋俠, 申在彬, 宋良燮, 宋達三 13명은 서명을 하지 않고, 徐德鳳과 朴茂馨만 서명을 하였다. 수표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차, 기탁, 약속할 때에 이를 증명해주는 문서이다. 류영시(柳永蒔)는 자가 子汝, 호가 竹窩, 본관은 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靈光丁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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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자양사(紫陽祠)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戊午三月九日 紫陽祠 柳大錫 戊午三月九日 紫陽祠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8년 3월 9일에 자양사(紫陽祠)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 1978년 3월 9일에 자양사(紫陽祠)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류대석을 원장(院長)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자양사는 고흥군 도양읍 녹동에 있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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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방문(榜文) 고문서-첩관통보류-방문 법제-법령-방문 丁卯十二月 丁卯十二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각 지방에 위치한 선영에서 제사를 지낼 유사를 결정한 방(榜) 1927년(丁卯) 12월에 작성한 각 선영의 제사를 주제하는 유사를 결정한 방문(榜文)이다. 상동(上洞)은 20일에 류상영(柳相榮), 사현(沙峴)은 21일에 류종순(柳鍾純), 화적(花赤)은 23일 류관준(柳瓘俊), 금계형(金鷄形)은 22일 류식호(柳式浩), 24일엔 류영규(柳永奎), 비자동(榧子洞)은 24일 류영정(柳永正)이다. 적혀있는 지명들은 현재 상동은 운곡사가 있는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상동을 뜻하며, 화적은 현재 고흥읍 호동리 화적재, 금계형은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금계, 비자동은 고흥군 풍양면 호동리 비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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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釋辨 天地之間。一理而已。雖曰無形無爲。而實爲有形有爲之根柢。頭腦則凡聲色貌象之有萬不同。而盈天下者。曾未有遺此理而徒存者也。故聖人設敎之意。先自格物致知。擇善修身。敦五典明五禮。以至細微雜亂之域。莫不欲順此理而做將去。此道之所以一而貫之者也。彼釋氏則固已惡此理。充塞無間。而使己不得一席。無理之地以自安。厭。此理。流行不息。而使己不得一息。無理之時以自肆。是以叛君親棄妻子。入山林空寂之地。以玄竗爲說。雖曰明心見性。而實不識心識性。【認精神魂魄。而爲性。】至其說之窮也。則乃有不舍一法之論。而欲蓋前失。然但能言之而實不能踐其言。卒以殄滅彛倫而已。然務其空寂。而不累於物欲。極其玄妙。而不滯於形器也。則世之所謂賢智者有悅之者。又有以爲生死輪回之說。而謂其不淪於罪苦也。則傭奴爨婢之流。亦匍匐而歸之。此其罔世惑人之尤者也。且其所謂止觀。卽吾儒之克己。所謂參請。卽吾儒之致知。然大本旣差。其工夫節目。又何足煩論哉。大慧禪師。嘗語張無垢【以楊龜山門人。逃儒而入釋者。】曰。開道之際。改頭換面。隨宜說法。使殊塗同歸也。則張以是用佛語釋儒書。【庸學論孟及孝經】而專務亂眞。尤可駭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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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田辨 朱子井田類說曰。漢文帝。除田租。荀氏論曰。古者什一而稅。今漢民。或百一而稅。然豪强富人。占田逾侈。輸其賦太半。民收太半之賦。官家之惠。優於三代。豪强之暴。酷於亡秦。今不正其本。而務除租稅。適足以資豪强。孝武時董仲舒。嘗言限民占田。至哀帝時。乃限民占田。不得過三十頃。卒不得施行。然三十頃。有不平矣。且夫井田之制。就未備悉。宜以口數占田爲立科。限民得耕種。不得買賣。以贍貧弱。以防兼幷。且爲制度張本。不亦宜乎。雖古今異制。損益隨時。然綱紀大畧。其致一也。本志曰。井方一里。是爲九夫。八家共之。私田百畝。公田十畝。是爲八百八十畝。餘二十畝。以爲廬舍。餘夫。亦以口受田。士工商家。受田五口。乃當農夫一人。有賦有稅。賦謂計口發財。稅謂公田什一。及工商衡虞之入也。賦供車馬兵甲士徒之役。充實府庫。賜予之費。稅給郊社宗廟百神之祀。天子奉養。百官祿食庶事之費。民年二十。受田六十歸田。【男年六十。女年五十。無子者。官衣食之。】五家爲比。五比爲閭。四旅爲族。五族爲黨。五黨爲州。五州爲鄕。閭有序而鄕有庠。序以明敎。庠以行禮。八歲入小學。學六甲四方。五行書計之事。始知室家長幼之節。十五入大學。學先王禮樂。而知朝廷君臣之禮。其有秀異者。移於鄕學。鄕學之秀。移於國學而後。爵命焉。春則出民閭胥。平朝坐於左塾。比長坐於右塾。畢出而歸。夕亦如之。入者必薪樵輕重相分。班白不提挈。【晏出後時者。不得出。暮不持樵者。不得入。】冬則民旣入。婦人夜績。一月得四十五日功。三年則餘一年之畜。故王者三載考績。九年餘三年之食。故三考黜陟。二十七歲餘九年食。然後至德流洽。禮樂成焉。建司馬之官。設六軍之衆。因井田而除軍賦。地方一里爲井井。十爲通。通十爲成。成方十里。成十爲衆。衆十爲同。同方百里。同十爲封。封十爲畿。畿方千里。四井爲邑。四邑爲丘。丘十六井。有戎馬一匹。牛三頭。四丘爲甸。六十四井。有戎馬四匹。兵車一乘。牛十二頭。甲士三人。步卒七十二人。干戈備具。春振旅以蒐。夏拔舍以苗。秋治兵以獮。冬大閱以狩。於農隙講事焉。或曰朝鮮山川多阻。人稠地狹。難可畫井。曰因地廣狹。隨人稀密。量田而各分均之。是亦井田之類也。可以給五十畝。則以此均之。可以給七十畝。則以此均之。可以給百畝。則以此均之。分山野隨便宜。可以畫井之地。則行井田。不可畫井之處。則計田均授。而行貢法。何不可之有。然三代遠矣。經界溝洫之制莫詳。李疎齋云。平壤。有箕子田遺址。國人號爲井田。但其溝塍凸凹。莫識其制。韓參議伯謙氏。往見之。始以爲殷人七十而助。此其遺制。因依田形而作圖。爲說頗詳。其文集板本。在原州領原山城云。此可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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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孫泰鎬墓文 嗚呼痛哉。汝胡爲而來。胡爲而去。孰與之而來。孰奪之而去。孰主張是。而始豐之以其賦。終嗇之以其壽耶。嗚乎痛哉。汝始生。肥骨俊秀。眉睫恭肅。稍長。聲音淸亮。容儀端正。及授學。才氣則雖不過平常。其勤實也。篤信也。大異凡兒。我常擧晦翁所訓子。勤謹二字誦之。自後觀汝。動止尤安詳。言語常愼黙。有似乎實踐聖賢之訓。意其遠到。而宜祿宜壽。豈料遽至夭椓耶。福善禍淫。傾覆栽培。是天道之常。而汝之性旣善矣。汝之材亦栽矣。天胡不福不培。而遽至於斯耶。抑我命道愆舛。痛極風樹。哭盡鴒原。繼又國破主辱。樑摧道喪。而頑忍不死。爲罪而禍及於汝耶。天而憎惡於我。則胡不勦絶我之命。而有此錯施倒行。使我未死前。抱此無涯之戚。而五內蝕盡。悲淚交睫耶。汝祖母。汝爺孃。思汝悲汝。情狀幷不可擧。以重添我悲也。嗚乎痛哉。自汝始病。或滯或下。形容淸癯。然能誦讀。能書寫。或出入近遠。不見其疲勞之甚。是以不以爲深憂。其間屢試藥餌。別無差劇。而如雨濕衣。如水浸紙。病已根固於數年矣。一經痢症。眞元大敗。皮骨相連。四末生浮。迎醫調藥。湯丸竝進。徒使苦汝口。而皆非當藥。醫去醫來。日煩刀圭。汝甚厭苦。而猶能服之。歇㞃無度。如是者三年。而病無可奈矣。及其末境。旣絶乃甦。延至四五日。如是者非止一再。以其用蔘多而致然耶。以其非命去而致然耶。汝昔飮乳。旣死復生。今日慘禍。已萌於其時耶。皆不可知也。天乎命乎。嗚乎痛哉。汝婦勤而敏。常謂汝雖不顧産業。可以資汝衣食。而汝必大遂志願於古人爲己之學。將竪立我門戶矣。今乃送汝靑山。渠獨髽麻而晝哭。使我對此。尙可以忍其悲慘耶。嗚乎痛哉。自汝免乳。食則同盤。寢則同被。愛之如掌珠。貴之如櫝玉。猶恐傷之。猶恐失之。豈意一朝見慘。而腷臆悲塞耶。非惟吾祖孫私情。攸蔽而然也。凡厥隣里之嗟惜。族戚之興嘆。汝交遊之所挽哀詞。皆一辭而不貳。則是汝儀形之端雅。志意之淳慤。工夫之進脩。而使之然。尤不堪悲惜處也。汝課讀書。日用手抄者。藏之几匣。而不忍發視汝嘗讀。蕭寺移來菊本。今在砌蕃茂。始欲扷去。終焉不忍。而反愛護者。使汝欲來往於冥漠之中也。汝其知此意耶。我亦自春來。諸般敗坌集。畢竟朝夕臯呼。則先謁吾父母。次及兄弟。而長與汝相隨於泉臺之上。則可弛今日之戚耶。嗚乎痛哉。委汝荒原蔓草之中。忽已七晦朔矣。芻蕘者。及陰陽客往來者。皆云偶得吉岡。果如其言。而安汝體魄耶。雖少慰悲汝之情。然而但耳焉。而未之目焉。今始力疾。忍哀來哭汝墓。此何逆理耶。汝當酹我哭我。而我反酹汝哭汝耶。此何逆理耶。有聲徹天。天則悠悠。有淚徹地。地亦茫茫。天地有窮。此恨曷旣。汝其有知。庶擧此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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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류영시(柳永蒔) 문(文)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甲辰九月日 契末 高興柳永蒔 甲辰九月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4년 契末 高興 柳永蒔가 쓴 흥양 노인들의 契會 敍文. 1904년(광무 8) 契末 柳永蒔가 쓴 契會 敍文이다. 글의 내용에 따르며 서두에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노년의 친구 9인과 더불어 향산(香山)에서 모여 결성한 향산구로회와 송(宋)나라 때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으면서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 등 13인의 학덕(學德) 높은 노인들과 함께 만든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언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예부터 耆老所를 베풀어 優賢尙齒의 도리를 지극히 갖추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지금 瀛洲(흥양)의 고을에 나이가 백여 세에 이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노인분들이 전하는 말에 壽鄕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경자년(1900) 봄에 마침 會事가 있어 고을 유생들이 많이 모여앉아 좌우를 돌아보니 수염과 눈썹이 매우 흰 자가 거의 10員의 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從遊하며 서로 도와 학문을 닦았으니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난 후 자리에서 한 목소리로 말하길 '우리는 한 시대에 태어나 한 고을에서 살며 나이도 같아 聲氣相通한다는 말은 옳고, 선조 때부터 通家의 오랜 친분이 있다는 말은 情인즉 어려서 언덕에서 놀던 때부터 지금 나이에 이르기까지 만남과 이별이 몇 번인가 말하며, 늦게나마 契를 設하여 春秋의 단란한 모임을 갖고자 한다'고 하였다 老翁이 만든 모임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 아니며, 인생을 유희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하며, 세상의 선비로 오직 자기를 알아주는 知己를 얻기가 어려운데, 同老者로서 더욱 知己가 있기 어려우니 이 모임을 통해 그 뜻을 이루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이제 나이가 60세 이상으로 志氣가 서로 맞는 인원수가 香山의 노인보다 세배나 되고, 氣味는 洛社의 현인과 한가지라고 하면서 흥양 노인들의 契會를 당나라 백거이의 향산구로회와 송나라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에 비유하였다. 류영시는 글의 말미에 보잘 것 없는 자신을 僉員의 末로나마 참여하게 해 주어 붓을 들고 거칠게나마 위와 같이 모임의 의미의 首末을 대략 서술한다고 하였다. 류영시(柳永蒔)는 자가 子汝, 호가 竹窩, 본관은 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靈光丁氏이다. 容儀가 嚴重하고 德行이 有望하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예학에 밝았으며 淸白을 숭상하며 평생을 忍黙하여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다. 묘는 고흥군 虎山松峴 先塋右甲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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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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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류순(柳淳) 유사(遺事) 및 비음기(碑陰記) 초(抄)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淳의 사적을 적은 遺事 및 碑陰記를 필사한 문서. 류순(柳淳)의 사적을 적은 遺事와 碑陰記를 필사한 문서이다. 문서에는 崔夢嵒이 찬술한 '宣武原從功臣中訓大夫行宗簿寺主簿柳公遺事'와 1842년 8세손 柳志浩가 찬술한 '中訓大夫行宗簿寺主簿柳公碑陰記'가 함께 필사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류순의 世系와 행적, 성품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 내용에 따르면 류순의 자는 호숙(灝叔),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자태가 빼어났고 성품은 효성스러웠다.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천거로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왕을 용만(龍灣)까지 호종(扈從)하였고, 남쪽으로 돌아와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막하에 나아가 행주(幸州) 싸움에서 수십 명을 참획하였다. 명군(明軍)이 원병으로 나와 양곡을 서쪽으로 옮길 때를 만나 공은 3종질인 독운관(督運官) 몽사(夢獅)와 함께 10여 만곡(斛)을 선천(宣川)으로 운송하여 군수(軍需)로 제공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에게 방법과 계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주부(主簿) 벼슬을 받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광해군 때 귀향을 결심하고 시(詩)를 지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려는 자신의 뜻을 보였다. 1566년 3월 10일 흥양현 호산에서 태어나 1612년 11월 17일 향년 47세로 생을 마쳤다. 배우자는 영광정씨이다. 그런데 문서 첫머리 아랫쪽에 '高興郡高興面虎山 柳重益 碣'이라고 쓰여 있는데, 후손 류중익이 비석을 세웠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최몽암(崔夢嵒, 1718~1802)의 자는 乃說, 본관은 낭주로, 영암 사람이다. 아버지는 華宗, 어머니는 廣州 李漢衡의 딸이다. 17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동지의금부사, 공조 참판 등을 지냈다. 류지호(柳志浩)는 柳淳의 8세손으로 자가 通吾이고, 호가 農隱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1793년에 태어나 1856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여산송씨이다. 흥양현 읍내면 虎山東邊里에 살았다. 고흥류씨의 가계를 살펴보면 류순(柳淳) → 류우룡(柳遇龍) → 류하(柳河) → 류동기(柳東起, 1656~1713) → 류성갑(柳星甲, 1679~1725) → 류희탄(柳希綻, 1705~1753) → 류경(柳坰, 1738~1785) → 류일영(柳日榮, 1767~1837) → 류지호(柳志浩)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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