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송효섭(宋孝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卯三月初四日 弟 宋孝燮 丁卯三月初四日 [1927] 宋孝燮 柳士集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3월에 弟 宋孝燮이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1927년 3월 4일에 弟 宋孝燮이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편지봉투의 수신처가 '高興面 虎東里 柳士集壽宴所'로 되어 있다. 士集은 柳重憲의 자이며, 壽宴所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환갑잔치에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데 편지를 보낸 정묘년(19270) 당시 류중헌의 나이는 55세이고, 또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류중헌이 아닌 아들 柳大錫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편지봉투는 다른 편지의 겉봉으로 후대에 잘못 섞인 것으로 짐작된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헤어져서 서글프다고 하면서 지금 懷襄의 세상에서 세상의 지기는 몇 사람 없고, 몇 사람 없는데 또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다만 나 자신과 더불어 내가 서로 마음으로써 지킨다면서 마음을 논하면 이익이 없는데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므로 탄식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오직 믿을 것은 다만 一心의 글자뿐이라면서 一心을 보존한다면 비록 천리, 백리 멀어도 지척인데 어찌 가히 70리로써 한 달이 지나도록 멀리 떨어져 久遠하게 되었냐면서 朋友의 도리는 마음이 보존되고 보존되지 않음이 어떠한가에 있는데 마음이 존재함이 없어 어쩌겠냐며 상대방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서 꽃들이 다 지려는 이때 지난번에 春府丈께서 왕림해 주셔서 重堂의 茵匙가 편안하고 좋으시고 가족들 모두 기거가 안녕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이며, 자신은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시며 예전과 같이 지내고 있어 다행라는 안부를 전했다. 다만 게으름을 피우며 공부에 마음을 쓰지 않고 한갓 먹고 자며 세월을 보내고 있어 孔夫子의 戒에 어긋나니 부끄러워 모르게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죄송하다고 하였다. 도리어 생각하면 오직 뜻이 독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진실로 우리가 善導하는 것을 돌이켜보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麗澤은 하루라도 없는 것이 불가하니 우리 형께서 반드시 決意直前에 맹렬히 발꿈치에 힘을 주고 하루라도 천리를 가고자 변화하는 정성을 들인다면 吾黨에서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멀리서 매우 축하드리며, 嚮은 善道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형이 아니면 누구에게 바라겠느냐고 하면서 형께서 특별히 돈독함으로써 규칙을 일으켜 자신같이 게으르고 산만한 자가 거의 그 다음이 될 만하니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난번 令季씨께서 집으로 왕림해 주셨는데 함께 동행하지 못하고 전별하니 서글프다고 하면서, 思軒丈께서 圭孫을 데리고 근래 지은 '湖嶺行矣'라는 어구는 글자가 되지 않고, 또한 정으로도 안되는 것이니 어쩌겠냐면서 편지를 마쳤다. 柳大錫은 고흥 출신으로 초명이 基錫이고, 자가 桂彦, 호가 松隱이며, 본관이 高興이다. 부인은 珍原朴氏이다. 190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柳重憲(1873~1952)이다. 송효섭(宋孝燮, 1907~1973)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자가 인보(仁甫), 호가 긍재(肯齋), 본관은 여산이다. 송주헌(宋柱憲, 1872~1950)의 아들이다. 13세 때 송두양(宋斗陽)에게서 수학한 후 외이재 송경숙(畏已齋 宋敬淑), 양재 권순명(陽齋 權純命) 등에게도 배웠다. 상조계(相助契)를 만들어 재능이 있으나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從弟인 宋在烈이 유고를 정리하여 1981년 고흥 동강면의 영효재(永孝齋)에서 ?긍재유고(肯齋遺稿)?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