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년 양림(梁霖) 등 상서(上書)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未四月日 梁霖 等 34名 大宗伯 癸未四月日 梁霖 等 大宗伯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3년 4월 梁霖 等이 六忠祠와 관련하여 大宗伯[禮曹判書]과 巡相合下에게 올린 上書 抄 1823년 4월 進士 梁霖 等 전라도 유생 34명이 大宗伯[禮曹判書]과 巡相合下에게 올린 上書를 抄해 놓은 문서이다. 문서에 필사된 상서 2건은 全羅道 興陽縣에 있는 六忠祠와 관련된 내용이다. 첫 번째 문서는 예조판서에게 올린 상서로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六忠祠는 단종조 忠臣 忠剛公 宋侃을 모시는 곳이다. 충간공은 도진무사(都鎭撫使)로 호남을 순시하던 중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興陽에 은거하였다. 스스로 호를 서재(西齋)라고 하였으며, 충의와 높은 절개가 해와 별같이 빛났다. 또 충간공의 후손 중 임진•병자의 난에 殉烈한 자들이 많아 모두 추증되는 은전을 입었다. 이에 흥양에 사우인 六忠祠를 세워 忠剛公과 그 자손 중 충절을 세운 자를 제사 지낸지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비록 아직 恩額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一世之公議와 百代之名節과 관계되므로 事體 또한 매우 정중하다며 특별히 채납(採納)하시어 本曹에서 각도 祠院錄에 載錄을 명하여 사방의 사인들이 모두 흥양의 송씨 가문 육충신의 사당이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에 예조에서는 육충사는 아직 宣額하는 欠典이 아니므로 祠院錄에 마땅히 들이라고 하는 제사를 내렸다. 두 번째 문서는 巡相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 문서는 예조의 처분을 받은 이후에 올린 것이다. 문서 말미에 자신들이 예조에 載錄의 뜻을 알려 이미 특별히 허락하는 제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에 本營에서 祠院錄에 載錄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전라감영에서는 사원록에 들이라는 제사를 내렸다. 六忠祠는 현재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자리한 재동서원을 이른다.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 충강공 송간을 주벽으로 송대립, 송심, 송순례, 송희립, 송건과 김시습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본래 고흥 운곡사에 봉안되어 있던 宋侃에게 1793년 내려지자 1796년 宣諡를 위하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재동에 사우를 짓고 재동사라 하였다. 1801년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고 육충사라 하였다. 1833년 송상보, 송득운, 효자 송석융을 추배하고 世忠祠라 하였고, 1846년 매월당 김시습을 합설배향하고, 1848년에 세충사에서 西洞祠로 개칭하였다. 1868년에 서원 서우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