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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 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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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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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 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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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69년 동감강목발간유회소(東鑑綱目發刊儒會所)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己酉十二月 日 東鑑綱目發刊儒會所 柳大錫 己酉十二月 日 東鑑綱目發刊儒會所 柳大錫 東鑑綱目發刊儒會之章(3×3)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9년 12월에 동감강목발간유회소(東鑑綱目發刊儒會所)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 1969년 12월에 동감강목발간유회소(東鑑綱目發刊儒會所)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류대석을 동감강목발간소의 유사(有司)로 천거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동감강목은 송병선(宋秉璿)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사로 편찬한 책이다. 1902년에 완성된 필사본을 1970년 남원향교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27권 5책이다. 주희의 강목체(綱目體)를 편찬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역사를 정리하였다.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檀君)으로 잡고 있으나 문헌의 입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삼국통일을 이룬 669년(문무왕 9)에서 1863(철종 14)까지 1,195년간의 기사를 편년(編年)에 따라 수록하고 있다. 범례에서 밝힌 편찬의 원칙은 연대의 표시는 우리 왕호를 기준으로 중국왕조의 연대를 위에 붙이고 외민족의 왕조(五代·遼·金·元)의 경우는 우리 연대의 아래에 붙여 차별화하였다. 조선을 침략했던 청(淸)의 연대는 붙이지 않은 사실에서 화이론(華夷論)적 입장을 관철하고 있다. 『동감강목』의 편찬은 한말 도학자의 역사 인식과 사관을 밝힌 모범이 되고 있으며, 송병선의 문하에서는 이 책의 편찬 원칙을 이어 우리 역사의 편찬을 보완해갔다. 1912년 김종가(金鍾嘉)는 고종 원년(1864)에서 경술국치(1910)에 이르는 47년간의 역사로 『속동감강목』(1972) 6권 1책을 편찬하고, 1931년 김재홍(金在洪)은 단군에서 통일신라 직전인 문무왕 무진(668)까지를 수록한 『동감강목전편(東鑑綱目前編)』 8권 1책을 편찬하였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유사는 유사 중 그 우두머리를 '도유사(都有司)'라 하고 경리를 맡은 유사를 '사화유사(司貨有司)', 연락을 맡은 유사를 '전명유사(傳命有司)', 문서작성을 맡은 유사를 '사서유사(司書有司)'라고 불렀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한 사람이 유사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장례·출간·건물 중수 등 단기간에 처리를 요하는 일시적인 유사는 그 예정된 일이 완료될 때까지 회의의 결정사항을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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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68년 운곡사(雲谷祠)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戊申八月一日 雲谷祠 戊申八月一日 雲谷祠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8년 8월 1일에 운곡사(雲谷祠)에서 보낸 망기(望記). 1968년 8월 1일에 운곡사(雲谷祠)에서 보낸 망기(望記)이다. 오는 9월 13일에 하는 석채제관(釋菜祭官) 초헌관(初獻官) 송규봉(宋桂鳳)외 15인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운곡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고흥유씨와 남양송씨 15위를 모시고 있다. 여산송씨 송간(宋侃),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과 고흥유씨 유탁(柳濯), 영광정씨 정연희(丁運熙)를 배향하기 위하여 1785년(정조 9)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곡리에 창건한 사당이다. 1796년(정조 20) 여산송씨 문중에서 서동사(西洞祠,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로 송간·송대립 등의 위패를 모셔갔고, 같은 해에 남양송씨 송인(宋寅)과 영광정씨 정걸(丁傑) 등이 운곡사에 추배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유덕산 기슭의 고흥유씨 집성촌인 고흥읍 호동리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유몽인에게 광해군이 내린 교서인 '유몽인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 보물 제1304호)'가 보관되어 있다. 석전제는 석채(釋菜), 상정제(上丁祭),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이래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등 여러 성인에게 석전을 올렸으며, 한(漢)나라 이후 유교(儒敎)를 숭상하면서 동자를 제사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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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류영의(柳永毅)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舊二月二十二日 族從 柳永毅 壬午舊二月二十二日 柳永毅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2월 22일에 族從 柳永毅가 족보 간행과 관련하여 집안 사람에게 보낸 간찰 1942년 2월 22일에 族從 柳永毅가 족보 간행과 관련하여 집안 사람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 편지는 수신자가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연결문서인 편지봉투 겉면에 '高興郡 虎東里 柳野山丈 靜座'라도 쓰여 있어 柳重憲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野山은 류중헌(1873~1952)의 자이다. 삼가 꽃 피고 따뜻한 때에 체후가 萬旺하신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예전과 같이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였다. 이어서 譜事가 멈추었다고 하니 우리 가문의 큰 다행이라고 하면서 遺墟碑文 改草事는 고치면 고치고 멈추면 멈출 뿐 어찌 먼 길 왕래가 장애가 되겠느냐고 하고, 근로자는 德根과 晟인데 이 무슨 의리냐고 하였다. 다만 碑文을 쓴 錦城에 사는 石範이 文化인지 알지 못하고 泂舍人이 있으니 같은 이름으로 잘못 보고, 舍人을 기록하였다는데 자신은 믿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날 석범이 門老 某씨를 찾아가서 또 이 일을 門老에게 請하니 半許하며 永毅가 쓴 것은 그것을 보고 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며, 석범을 다시 찾아가 그에게 물으니 門老가 이러이러 改書를 청했다라고 하였다는 말을 전하였다. 자신은 다 믿을 수 없고, 석범이 自意로 오직 去揚里 永華씨와 함께 合謀하여 그런 것이며, 마침 가서 보니 곁에 도끼가 있어 즉시 碑面을 다듬고 그 이후에 자신에게 영화씨가 埋碑를 請하였다고 하니 영화씨가 시일을 미루고 여러 해동안 정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것이니 이 잘못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한탄하였으며, 자신이 고향을 떠나 있던 중 鄕中 미담으로 이 일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을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또 碑面에 그 文을 쓴 사람을 2명의 이름을 쓰는 것이 됩니까? 안됩니까? 묻고, 발간된 것에 자신의 이름이 빠졌는데 의논하지도 않고 간행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마디도 없이 그것을 새기니 이 무슨 곡절이냐고 책망하였다. 그 時事를 믿을 수 없는 까닭으로 錦城 石範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하면서 碑文 拔去는 回示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마지막에 추신으로 만약 拔去하지 않았다면 高興 五派는 1질의 책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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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을미년 부(父)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未八月十日 父 乙未八月十日 父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미년 8월 10일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서울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낸 간찰. 을미년 8월 10일에 서울에 올라가 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서울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낸 간찰이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달 초에 雲谷 張喪人便에 자세한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가을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데 할머님 건강은 한결같이 편안하신지 또 가족들 모두 잘 지내고 조카아이와 손자도 잘 크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이어서 자신은 객지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근래 들으니 올해 三南에 大豊이 들었다고 하니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서울의 사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아 인심이 騷擾되어 일의 형편이 더욱 어렵고, 勛洞大臣은 지난 3월 그름 사이에 大臣에서 遞歸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7월 초에 다시 總理大臣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모든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형세를 살펴보면 기다리자고 하였다. 또 이번 가을, 겨울에 아이들의 勸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 묻고 모든 것이 어려운 중에도 설행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작성 시기인 을미년은 내용 중 總理大臣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95년으로 짐작된다.○원문 今月初雲谷張喪人便詳聞消息矣 未請秋涼漸至 祖母主氣體候一向萬安而大小家 諸節亦得均迪侄兒與孫兒軰 慈爲善長否 遠溯萬千父客味 依舊爲幸之耳近聞今年 年形三南大豊云云欣喜萬幸萬幸 於內旣□云云耳京中物情 姑未完定人心騷擾客中事 勢尤極爲難而勛洞大臣去三晦 間大臣遞歸矣今七初更爲總理 大臣萬幸然凡事姑未安定待其觀勢 則諒之而事不如宜今晦間期於 發行計料耳今秋冬家兒軰之 勸學何以措處耶雖百難中期於設 付送願處爲好爲好京中居人也 此去彦書□□金慮□之族屬之書也卽速 接勸學爲好爲好耳餘便忙姑不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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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澗遺稿序 學蓋有三等。曰詞章。訓誥。儒者之學是已。何謂詞章。藻飾華妙是也。何謂訓誥。文義註疏是也。何謂儒學。明道正誼是也。然工於詞章者。不肯致力乎訓誥。泥於訓誥者。不能周洽乎。儒學。是皆才偏氣局之病。惟是三者畢擧。而相濟然後。可謂之通儒。而世不多見。惟若司憲府監察。具公諱文謨。字文植。號松澗者。未嘗不致力乎訓誥詞章。而時復馳書于國內長德之門。以爲請業。階且與境內直諒之士。結爲道義交。亦有以至於儒之學。而亹亹者也。觀其著見事爲。則孝親悌長。而信於人。正其家而親戚咸敦。修其身而悔吝自消。以至燕貽。則韋氏敎經。顔氏訓家。不必專美於古昔。而況其孫仍蕃衍。文學從事。家風淳好。如水源深而派流益長。木之根固而柯葉益茂也。公之孫秉祐。從余日久。交契轉密。請弁其卷。顧素拙文詞。不嫺是役屢。辭不獲。敢玆濡毫。以表相眷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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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堂金公墓碣銘【幷序】 公諱甲龍。字伍鉉。號樂堂。金海人。高麗寶文閣大提學。諱柱國之後。我朝仁廟。贈右議政。諡襄毅。諱應瑞之十世孫也。高祖諱延采。通政大夫。曾祖諱林龜。祖諱吉煥。副護軍。考諱鳳三。號瑞山。妣白川趙氏。泰鎭之女。純廟庚辰三月九日。生公于順天住巖坊竹林里第。賦性明敏。八歲入小學。日記數百言。而篤知愛親敬長之道。旣長力。學以忠信。不欺爲田地。而自夫發動。勇往直前。有不知。知之必行。有不行。行之必篤。惟盡在我而已。尤謹於事親。而不踰敬。不違志。而安其居處。旨其飮食。凡所就養。一出於誠敬。鄕黨咸稱其孝。轉聞于朝。除朝奉大夫童蒙敎官。壬申六月十二日終于正寢。享年知命有三。葬于同坊九山里案山酉坐原。配光山金氏在鎬之女。有女士之風。率三子。定居于綾州之校洞。蓋孟母徙舍學宮之傍之意也。公之後十年而卒。墓在懷德面圓山里右麓子坐原。丙子秋。玄孫孝根。遷公之墓。葬其配右。有三男。長海元童蒙敎官。仲湖雲。季海雲敎官。有子膺喆戶曹佐郞。嗚乎。公之言行。必多警世勵俗。而世遠文缺。存者無幾。雖若可恨。然卽此而可以知全鳳矣。遂爲之銘曰。天生斯民。其理本實。孰無此性。或鮮不失。嘉哉金公。能保帝畀。凡厥行爲。眞實無僞。爲人云何。是謂善士。我將銘石。以示千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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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論性不論氣云云。或謂此性。論氣質之性。不是論本然之性。【炯】謂氣質性。本然性。非二姓。以儲水之器喩之。單指其水。則曰本然之性。兼指其器則。曰氣質之性。 文炯 或人所謂。此性字。氣質之云者。非是賢者所答。兼指其器。則氣質之性云。亦不盡意。夫性譬之水。本皆淸。以淨潔之器盛之。則本然之淸。固自若。此不可以氣質論也。以汙泥之器盛之則本然之淸。因器而濁。此可以氣質論也。蓋程子之意以爲。性是本然。而至善者也。氣是生稟。而不同者也。若論性而不論氣。則無以見昏明之不齊。論氣質而不論性。則無以見理義之一原。故曰二之。則不是兩性字。皆指本然而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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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衆星拱之。謹按。集註曰。北辰。北極。天之樞也。居其所。不動也。每講此或曰。北辰。無星處。是天壤。或曰北辰。是北極。極是極星。或曰極星不動。或曰極星。亦動而但人不見。諸論紛紜。多與註說亦不穩合。敢請敎示。 高光澹 集註。北辰。北極。天之樞云者。辰是無星處。極乃北之極。天之中而中間些子不動處。卽天之樞也。如磨之臍輪之轂。雖欲動而不可得。然辰不可無記認處。故取其旁一小星謂之極星。星則微動。辰則不動。此集註。居其所不動之謂也。嘗試觀極星。第一星。不見其動。蓋最近於辰。故雖微動不覺。但其下四星。及末兩旁兩小星。隨天左旋。度亦如天而周天。四面衆星。自然環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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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洪公墓誌銘 故處士愚齋洪公。諱祐錫。字文玄。實吾黨中君子人也。嘗遊余塾。昕夕相依。寢食相隨。匝一歲同周旋。而硏經究義。考推該偏無所遺。每出言。亦無毁譽人。疑若不分是非。因叩其中。公私之幾。善惡之分。已較著。蓋其天性。簡重愼黙。重以學問有素。端本畜德而致之。此非君子人而能然乎。以是誦之勤。及其胤子承源。袖其遺集若遺事以謁之。尤有感愴者存。謹按。公自幼。器度不羣。甫授學。才藝聰敏。容止敬謹。其叔父鳳南公。甚器重之曰。是吾家龍文也。及長。敦篤乎六經。旁通乎百家。學優才備。以膺公車。其遇不遇。命也。奉身極儉。衣服。止冬綿夏麻。器皿。止陶匏磁碗。異域珍怪閃詭之物。絶不近之。室堂之間。只列圖書几案而已。事父母。能竭志體之養。奉祭祀。克致如在之誠。御家有法度。嚴內外之別。盡正邪之辨。至使巫尼輩。不許入壺內。至若敎生徒訓子姪。諄諄然導之以孝悌忠信。而不使有雜戱。中歲喪耦。宗族知舊。勸以卜姓。輒引以取失節者。已亦失節之訓而却之。嘗語人曰。富字。浮也。視如浮雲。貴字。鬼也。視如鬼關。財字。災也。視如烖孽。其嘉言善行。類難殫記。蓋公性行淳慤。儀度厚重。持身也恭儉。接物也溫和進學也。旣明體而適用。處事也。輒觀理而順應。凡所云爲。無少差謬。且其從遊趨向。皆國內碩德。或往復講磨。或追逐考質。所以造詣。晩尤高明。嗚乎。若使國家。任賢使能。如古昔盛時。而道尊德備者。日以陳善閉邪於吾君之側。又甄拔如公。勤儉禮義忠厚者多少人。布列中外。各隨其才以任之。則外敵何由以覬覦。賊臣何由以措弄。以至販君賣國。使五百年禮義掃地。三千里生民塗炭。至此之極耶。可悲惜也。公以憲宗癸卯生。終于今上戊申三月十日。得壽六十六。葬梅山嶝負癸之原。豐山之洪。爲我東著姓。其上祖曰。麗朝都僉議舍人侃。文章節行負重名。世稱洪厓先生。有諱治。以行義除厚陵參奉。諱埈聯中生進。諱景古號枕漱亭。隱德贈參判。諱履洙號竹窩。以孝贈敎官。高祖諱永漢。鰲樵其號也。羲禹。壽榮。圭周。其父祖曾三世諱也。皆不仕。妣全州李氏父光植。文安公思哲后。繼妣金海金氏父基白。齊河東鄭氏在信女。有婦德。擧一男二女。男承源。女長適曺秉覲。次適李三煥。孫泰植觀植晉植漸植。承源請余狀其德。然處士鄭公。已得安且成三字。余何敢贅焉。矧此愚陋。素拙文辭。加之病廢者。難以膺不朽之役。然平生知舊。如公之賢。歲寒相守之計者。亦不可無一言。而幽明相慰。玆敢摭實觕。記其大都。以貢幽誌。而銘之。銘曰。姿之厚兮其德邃。篤人倫兮守帝畀。勤謹恭儉又敏文。剌史不薦朝不聞。晩見亂華深杜門。獎進生徒送餘春。一朝翩然謝垢氛。我銘其藏詔冥。漠令聞令譽永無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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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41년 김영한(金甯漢) 신암실기서(信庵實記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辛巳坤之載生明 金甯漢 辛巳坤之載生明 金甯漢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에 김영한(金甯漢)이 신암실기(信庵實記)에 쓴 서(序) 1941년에 김영한(金甯漢)이 신암실기(信庵實記)에 쓴 서(序)이다. 서문의 내용을 보면 류청신의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고 그의 사실이 잘못되었음을 반증하는 예로 그의 사후 초상과 찬을 짓게 한 일, 英密이라는 諡號를 내린 일, 그의 손자를 발탁하여 벼슬을 내린 일, 공민왕이 진종사(眞宗寺)를 세워 상(像)을 봉안하도록 한 일, 조선 태조때 중신(重臣)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영의정을 증직한 일 등을 기술하였다. 서문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류청신의 후예 일영씨가 선조의 무고함을 원통하게 여겨 여러 문헌을 모아서 이 책을 엮어 지금 장차 책으로 간행하고자 자신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암실기?는 고려 때 재상을 지냈던 류청신(柳淸臣, 1257~1329)의 행적이 《고려사》 기록에 간신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보고 후손 류일영(柳日榮)이 변고(辨誣)하기 위해서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류청신이 간신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여러 사료를 고증하여 충실한 반론을 펴고 있다. 김영한(金甯漢,1878∼1950)은 자가 기오(箕五)이고, 호가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으로, 부친은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奭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빼어난 총명함을 타고났으며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94년(17세)에 식년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98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900년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에는 용인군수에, 이듬해에는 양근군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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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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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73년 김홍제(金弘濟) 초사(招辭) 초(抄) 고문서-증빙류-초사 법제-소송/판결/공증-초사 癸酉三月初六日 金弘濟 癸酉三月初六日 1873 金弘濟 白着啣, 官着啣 각 1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73년(고종 10) 3월에 부안에 사는 김홍제가 진술한 초사를 베낀 문서. 1873년(고종 10) 3월에 부안(扶安)에 사는 김홍제(金弘濟)가 진술한 초사(招辭)를 베낀 문서이다. 초서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김홍제는 최광권(崔光權)과의 산송(山訟)에서 패소하여 자신이 불법으로 벤 송추(松楸)의 값 2만냥을 배상할 처지에 있었다. 김홍제는 경영(京營)의 신칙(申飭)에 따르겠다는 점, 그리고 관련 소송문건을 하나하나 효주(爻周)하여 관에 바치고 다시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김홍제가 진술한 초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부안김씨와 전주최씨 사이에 벌어졌던 오랜 산송(山訟)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안의 석동산(席洞山)에는 전주최씨의 선산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부안김씨의 선산이 놓여 있다. 석동산에서 일어난 두 문중의 산송은 처음에는 부안김씨측에서 석동산에 있는 최씨의 선산 묘 하나를 가리키면서 자기네 선조의 묘라고 주장하면서 관에 소를 제기하여 시작되었다. 석동산은 부안김씨의 종산이다. 최씨문중에서 이곳에 묘를 쓴 것은 투총이나 진배없는 것이라는 게 부안김씨의 입장이었다. 물론 최씨가의 선산 묘들이 이미 자리를 잡은 터였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최씨문중으로서는 이러한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고 보면 이곳 부안의 최씨와 김씨는 서로 남남이 아니라 인척관계였다. 즉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이었으니 거미줄처럼 혼맥(婚脈)으로 서로 엮어진 조선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의 발단은 김씨가 부안에 훨씬 먼저 뿌리를 내렸고, 한참 뒤에 가서 최씨가의 한 사람인 최생명(崔生明)이 처가 동네인 이곳 부안으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어 그 후손들이 선대의 묘들을 이곳 석동산에 쓰게 된 점이다. 두 문중의 산송은 세월이 지날수록 격화되었다. 김씨 측에서 최씨 측 묘들을 사굴(私掘)한 데 이어 묘역의 송추(松楸)를 만여 주나 무단으로 베는 사건이 일어났다. 1861년(철종 12)에 일부 부안김씨측 유생들은 선산의 묘역에 무덤을 썼다면서 전주최씨의 무덤 7기를 무단으로 파헤쳐 해골이 드러나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최씨의 묘역에 있던 수많은 송추들이 마구 베어졌다. 이에 격분한 전주최씨 측 유생인 최영권(崔榮權)이 격쟁(擊錚)을 하면서 원정(原情)을 올려 사건이 표면화되었고, 결국에는 김씨측 유생들이 감옥에 갇혀 국문을 받았고, 일부는 사형을 당했고 일부는 유배를 당하였다. 김홍제는 이때 유배를 당하였다. 그런데 송추의 배상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양측은 이를 놓고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초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초사는 공초(供招)와 같은 말로, 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내용을 가리키는데, 공사(供辭)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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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1년 류영덕(柳永德)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未十二月日 柳永德 等 3名 掌松官 辛未十二月日 柳永德 呂官[押] ▣…▣ 3顆(6.5×6.5)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1년 12월에 柳永德 등이 興陽縣 呂島 掌松官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所志 1871년(고종 8) 12월에 本縣 邑內面 虎山 사는 儒生 柳永德, 柳新錫, 柳師浩가 興陽縣 呂島 掌松官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所志이다. 이 소지를 올린 이유는 자신들의 17대조인 柳淸臣의 묘가 본 현에 있다고 하면서 이곳의 祭閣이 무너져 이를 改建하고자 하는데 들어가는 材木은 묘소에 이미 자란 소나무와 잡목이 알맞으니 掌松官에게 재목으로 쓸 수 있도록 立旨를 成給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15일에 장송관은 松禁의 法意가 비단 松山을 봉한 것이나 묘소이고 이미 자란 소나무와 잡목을 작벌하여 개건한다고 하니 자손의 遠誠 매우 가상함을 들었으며 더욱이 재상의 묘각이 지금 이미 세워진 것이니 특별히 작벌을 허락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연결문서로 蛇渡僉節制使(1871), 興陽縣監(1871), 水相國(1872)에게 올린 소지 3점이 있다. 소지(所志)는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 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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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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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1년 류신석(柳新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未十二月日 柳新錫 等 17名 蛇渡使 辛未十二月日 柳新錫 蛇渡僉節制使 蛇渡使[押] ▣…▣ 3顆(7.0×7.0)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1년 柳新錫 등 14명이 蛇渡僉節制使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上書 1871년(고종 8) 12월에 柳新錫 등 14명이 蛇渡僉節制使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上書이다. 문서에 따르면 자신들의 先祖 相公의 墓閣을 重修하는데 新材의 補用이 반드시 필요하기 마련이니 무덤 주위에 있는 나무 중에서 약간을 재목으로 충원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人心은 헤아리기 어렵고 근심스럽게도 營鎭사이에 있어 소나무를 횡침하는 무리에 따라 邱木임을 알지 못해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공적인 일을 핑계로 사적인 일을 업신여기는 것이 없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邱木을 補用할 수 있도록 立旨를 成給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사도첨절제사는 22일에 묘각의 중건은 비록 封山의 소나무라도 마땅히 시행하도록 허락한다고 하면서 營鎭에 속하는 하나라도 浸漁하는 것은 각별히 禁斷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연결문서로 興陽縣 呂島 掌松官(1871), 興陽縣監(1871), 水相國(1872)에게 올린 소지 3점이 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로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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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인년 남양송씨문중(南陽宋氏門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二月二十一日 南陽宋氏門中代表 宋秉憲 壬寅二月二十一日 宋氏門中 柳氏門中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인(壬寅)년 2월 21일에 남양송씨문중(南陽宋氏門中)에서 류씨문중(柳氏門中)으로 보낸 간찰(簡札). 임인(壬寅)년 2월 21일에 남양송씨문중(南陽宋氏門中)에서 류씨문중(柳氏門中)으로 보낸 간찰(簡札)이다. 두 가문이 함께 운곡사(雲谷祠) 중수를 하게 되고 함께 하자는 의견을 내주시고 도움을 많이 받아 감사한다는 내용과 함께 추후에 양 가문의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 서원에 선조를 모시고자 하니 많이 참석해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행정(杏亭)은 송인(宋寅)으로 추정된다. 송인은 고려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ㆍ정당문학(正當文學)등을 지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후 태조(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송림촌(松林村)으로 내려와 스스로 호(號)를 송촌(松村) 또는 행정(杏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운곡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고흥유씨와 남양송씨 15위를 모시고 있다. 여산송씨 송간(宋侃),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과 고흥유씨 유탁(柳濯), 영광정씨 정연희(丁運熙)등을 배향하기 위하여 1785년(정조 9)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곡리에 창건한 사당이다. 1796년(정조 20) 여산송씨 문중에서 서동사(西洞祠,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로 송간·송대립 등의 위패를 모셔갔고, 같은 해에 남양송씨 송인(宋寅)과 영광정씨 정걸(丁傑) 등이 운곡사에 추배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유덕산 기슭의 고흥유씨 집성촌인 고흥읍 호동리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유몽인에게 광해군이 내린 교서인 '유몽인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 보물 제1304호)'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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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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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류중한(柳重漢) 등 단자(單子)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柳重漢 等 2名 僉尊 柳重漢 僉尊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德林齋 小生 柳重漢 등이 耆社僉尊座下에게 琴湖齋에서 여는 잔치의 술과 음식을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單子 草本 德林齋 小生 柳重漢, 柳誼鎭이 耆社僉尊座下에게 琴湖齋에서 여는 잔치의 술과 음식을 보내주기를 요청하며 올린 單子 草本이다. 德林齋는 고흥읍 호동리에 있었던 서당이다. 단자의 내용에 따르면 무릇 나무는 뿌리를 북돋은 뒤에 가지에 이르러 棟樑이 이루어지고, 모는 김을 맨 뒤에 이삭이 자라서 곳간에 쌓이는 것이며, 선비를 양성한 연후에 학문이 완성되고 經濟가 생겨나므로 윗사람이 孤兒를 보살펴 주면 백성이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絜矩之道라고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草草하고 추운 서당에서 아침에는 부추를 먹고 저녁에는 소금국을 먹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僉尊丈께서 竹林故事를 본받아 玉峯 아래에 모여 琴湖齋(고흥읍 간천리에 있던 서당)를 넓히고 큰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僉尊丈께서 특별히 饍宰에게 명하시어 자신들에게 술과 떡, 魚肉의 음식을 보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문서는 초본으로 내용이 중복되고, 글자를 첨가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있다. 류중한은 본관이 고흥으로 아버지는 柳桂浚이며 1901년에 태어났다. 배우자는 金寧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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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小註。論明德而以心統性情之說爲言。是合心性而言明德也。或問。論明明德而以此德之明。日益昏昧。此心之靈。其所知者。不過情欲利害之私爲言。是德自是德。心自是心。何其言之不同也。 文泰鎬 天命之得於心曰德。德是性也。彼以答明德。是心是性之問。故說心統性情而擧其全體。此以辨明德之明不明而言。故分心性而詳其所以然也。明德。固是合心性而得名者。然心主乎知覺。性主乎義理。而統之養之。則此德常明。一不自覺。而棄之絶之。則此德昏昧。而其心之所知。只自滔溺於利欲之橫流而不能返也。然則合心性而言者。旣不無界分。分心性而言者。亦非判爲二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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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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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文氏派譜序 凡譜。以尊祖敬宗。爲第一義。而其收族而加厚親睦。是次第事耳。然族是天倫之屬。譜是天倫之書。容有私僞於其間。則天理熄。而人倫乖矣。然則是豈非修譜之實關義理也耶。吾文氏。自崇禎再辛亥後。大譜派譜。連編累袠。且距辛卯庚子。年未幾何。則必無是役。而亦不能已者。蓋以其兩年所編。免不得恩掩私勝。而致有眞訛相混。繼之以未及廣蒐。而或有見漏者。是以謹次勉修先生以下諸派。湊成卷袠。雖若闕畧於疎遠。而密邇則又該備。蓋親親必自近始。篤於近。所以及遠也。亦何病焉。若有前失之未盡歸正者。則當俟百世。而修忒辨惑。豈非吾門之大幸也哉。於戱。文氏始於武成公。而歷羅及麗。名公碩德。連世不絶。盈千年炳赫於左海。至三憂先生。以倡正學。闢異端爲己任。而與圃牧諸先生。道義契深。及聖祖定鼎。遂杜門丹城山中。植杏築壇。明禮講道。至孫始入我朝。以都承旨致仕。再傳至參議公。始奠居綾城。又再傳至勉修先生。築正路別尊卑。興文學正鄕風。士林建社俎豆之。後亦多蔭。文忠孝德。行之繼承。又不大揚。愈久而愈替。今焉寥寥矣。然吾家靑氈。尙不墜文學之名。而非先生之法服法言。則不敢服不敢道。而以是傳之子孫。以是勉之宗族。毋或違背。則外雖零替。內實立基本之道也。夫貞藏而元生。天理然也。姑擧草木之微而言之。則藏荄晦根。而春始發榮。皆理也。矧乎人參天地。而無一理之不具。無一理之不盡者。心也。以是心事父兄則孝悌。事君上則忠敬。施之宗族。則敦睦。又推而廣之。則無一事一物之能外此而中節者也。吾先世邃學懿德。偉行卓節。畧萃斯編。而蓋是率性遵道之迹也。今玄緖眇裔。咸以祖宗之心爲心。存之養之。講且熟焉。則要不出此。而家可以不墜矣。願吾族。相與之勖焉。越川君一派。亦請合編。收名單而來。僉族見許。是乃江漢之沱潛。復歸于江漢者也。亦豈非篤近及遠之道也耶。若世統之源流。先德之炳燿。已見於舊譜之諸長德序文。則固當因舊用之。不必妄贅。而但合而爲大譜。分而爲派譜則。分合之際。亦不無可言者。故忘僭而如右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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