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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년 송동하(宋東河)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亥二月五日 宋東河외 2인 柳生員 丁亥二月五日 [1947] 宋東河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해(丁亥)년 2월 5일에 송동하(宋東河)외 2인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단자(單子). 정해(丁亥)년 2월 5일에 송동하(宋東河)외 2인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단자(單子)이다. 1947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류대석에게 보낼 황촉대금(黃燭代金) 300냥을 송동하(宋東河), 송덕삼(宋德三), 송진태(宋鎭泰)가 각각 100냥씩 보낸다는 내용이다. 황촉은 벌집의 밀랍으로 만든 초를 말한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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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류신석(柳新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未十二月日 柳新錫 等 15名 城主 辛未十二月日 柳新錫 興陽縣監 行官[押] ▣…▣ 3顆(7.0×7.0)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1년 柳新錫 등이 興陽縣監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上書. 1871년(고종 8) 12월에 化民 柳新錫, 柳師浩, 柳永蒔 등 총 12명이 興陽縣監에게 제각 보수에 필요한 材木의 사용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上書이다. 류신석 등은 자신을 化民이라 하였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이 문서는 자신들의 先祖 侍中公의 墓가 縣의 북쪽 바다에 있는 섬에 있는데 祭閣이 頹圮되어 材木으로 邱木을 사용할 계획이니 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에 흥양현감은 23일에 일에 관계되는 先材가 무덤에 있는 나무이니 작벌해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당시 흥양현감은 이덕순(李德純)으로 1868년부터 1873년까지 재임하였다. 연결문서로 興陽縣 呂島 掌松官(1871), 蛇渡僉節制使(1871), 水相國(1872)에게 올린 소지 3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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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1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七月旬二日 逋 辛巳七月旬二日 逋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7월 12일에 상중에 있던 朴璟鎭이 柳重憲에게 시문 2건과 함께 보낸 간찰 1941년 7월 12일에 상중에 있던 朴璟鎭이 柳重憲에게 시문 2건과 함께 보낸 간찰이다. 편지를 보낸 이와 받는 이가 적혀 있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편지 내용과 봉투, 연결문서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받는 이의 경우는 편지봉투에 '松峴草堂 野山老 道幌下'라고 쓰여있고, 계유년(1933)에 환갑을 맞았다는 내용이 있어 野山 柳重憲으로 짐작된다. 보낸 이는 우선 자신을 哀子, 逋라고 표현하여 상중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哀子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자식이 스스로를 칭하는 말로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고자(孤子)라고 하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애자(哀子)라고 한다. 그리고 편지 내용 가운데 경진년 초여름에 작성한 글을 보낸다고 쓰고 있는데 연결문서 중 '追祝 野山翁長筵文'에 庚辰首夏朴璟鎭謹祝이라고 적혀 있어 보낸 이가 朴璟鎭임을 알 수 있다. 이마를 조아리고 재배하고 말씀드린다고 하면서 서늘한 기운이 교외에 들어오니 道養하시는 氣力이 萬旺하시고, 가족들도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세월이 머물러 주지 않아 어느덧 練祀를 지냈으며 사물의 변화를 보니 슬픈 마음을 지탱할 수 없다며 자신의 심정을 전하였다. 이어서 계유년(1933) 晬辰(생신)때 祝壽詩를 보냈는데 어찌 이것으로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지난해(1940) 초여름에 또 한 글을 써 놓고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전해드린다고 하였다. 또 朴松泉은 효성과 우애가 있고, 온 힘을 쏟아 은혜를 베풀며 유림과 더불어 結社하고 금년에 회갑을 맞아 상금을 걸고 詩를 募集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先賢이 이르길 頌祝에 있어서는 居屋者도 無妨하다고 하였으므로 濟弘의 이름으로 글을 보낸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몰래 草錄하여 보내니 또 수정하신 뒤에 책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편지를 끝맺고 있다. 연결문서로 시문 2건이 있는데, 하나는 庚辰년(1940) 초여름에 朴璟鎭이 쓴 '追祝 野山翁長筵文'이고, 또 다른 문서는 高興郡面虎東里 柳濟弘이라고 쓰인 '祝朴松泉壽筵' 이다. 이 시문 2건은 편지 내용에서 언급하고 있다. 박경진(朴璟鎭, 1884~1956)은 자가 사일(士一)이고, 호가 남죽(南竹)이며, 본관은 진원(珍原) 이다. 아버지 박중언(朴重彦)과 어머니 고령신씨 사이에서 고흥군 산양에서 태어났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남죽유고?3권2책(1958년간)이 있다. 野山 柳重憲과는 사돈관계이고, 류중헌의 아들인 류대석이 그의 사위이며, 손자는 柳濟洪이다. 류중헌은 자가 사집(士執), 호가 야산(野山), 본관이 고흥이다. 1873년에 태어나 1952년 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南陽 宋冑僖의 딸이다. 품성이 영민하고 효성스러웠으며, 經史와 義理에 밝았다. 고조부 류일영이 편찬한 ?信庵實記?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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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籍序 綾之爲鄕也。遠京輦而又近峽。可謂僻矣。然山川炳靈。風氣淳朴。其民勤儉。其士多以儒行經學。忠孝節義稱焉。而鄕射堂。古有古籍。古籍之興也。不知其在於何代。又不知其義致攸。居鄕人。以是病之。余謹按。先祖勉修齋行錄。則公以進士。歷職曹署。出監咸谷二縣。皆以文學爲治。歸老于州之西月谷時。有同德縣監閔公。贈承旨梁公。亦同里閈而又善。於是乎樹立鄕綱。裁定邑規。始創鄕射堂。習鄕射禮。堂前築正路。以別尊卑。置司馬齋。以延來學之士。絃誦日聞。冠佩整暇。鄕之人士。事之以鄕先生。留三先生案于鄕射堂云爾。則此其古籍之興。始於此。而其後羣賢。次第列書。竊恐幾百年後。編次以成。而名以古籍也歟。就其中。邃學壯節之。如梁學圃惠康公。崔日休堂忠毅公。曺月軒參議公。李衋悔齋生員公。尤名於世者。而余先世傍親。敬菴持平公。與崔忠毅公同殉晉州。其義烈烈。而見漏編中。是乃葺卷者。不謹之失也。日。朱君大甲來言。昔遊鄕射堂。其時東燹方熾。恐犯玉焚。卽奉留于家。然亦不可久奉私第。乃求數間屋將奉安。君之慕古崇賢。可謂勤摯。而又有功於扶邑綱。甚庸嘉幸。請余序其事。余感愴良久。辭以非分。又强之不置。乃敢忘陋拙。記之如右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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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台觴咏錄序【契名六七蓋取竹溪六逸竹林七賢之意】 居今之世。士當蹈魯連東海。而嗟無新垣之服義則且飄然長逝匿形藏影。如桃源商山之爲。而今以觴咏寓意。抑佩壺子之流耶。會員皆讀書士也。宜乎若太公伯夷之避世居海。而又返托迹於晉塘淸曠。醒醉吟哦之間。而名以六七。其意蓋曰天地陷溺。日月薄蝕。當此之時。非不知言忠信行篤敬之可以行矣。而亦不無塗炭之將浼焉。且守先王法服法言。而行尤高潔。則懼爲指目於衆咻叢鏑之中。而其爲深鑽密藏。反不如自放於盃酒詩詞之間。故爲此鏟光眩迹之計。出於人所慮不及之地。其眞以師晉唐。而事淸曠者哉。暫爲遯世俟淸之意也。會必於天台者。此山本幽閴深邃。古木彌覆。蘿葛蒙絡。人迹罕到。狂塵不侵。可以爲碩人。考槃薖軸之所。而所謂觴咏者。將寓之酒。而洩其鬱氣也。然參是契者。毋專以自家臆見爲主。而益讀聖賢之書。服膺其親切之訓。則庶幾旁行不流。而將無害於循蹈天理矣。李友秉五。朴友文采。請不佞以敍其事。然病淹工拙。無以充其意。畧陳大要。如右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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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菴文公遺稿序 不佞之於訥菴文公。族誼鄭重。交契又深密。早歲嘗同遊山塾。蓋得其氣像意趣於講論諷詠之際。而謂其凝定收斂之實。溫柔敦厚之味。凝古君子儒而無愧矣。近世文風蔚興。士友之執簡秉筆。吟咏風月。藻餙山水者。雜然幷出。如金石迭奏。宮徵相宣。未有能優劣之者矣。公亦未免。脫然於公車業。而頗有聲譽於場屋間。然其詩若文。皆出於性情之正。而無少燥迫浮露之態。淺近支離之語。而但其端雅艶美。則已燦然矣。或有評公者。曰文章則有餘。而至若硏究經義。涵養本源。則但少積累之工。余曰不然也。大抵學問之道。收放心尊德性而已。觀公平日言動行致。則莫非存養中發揮出來。矧今日陽脈剝床。羣陰用事。天下之亂極矣。公老且益堅。其發之言語文爲之間者。往往多衛闢尊攘底意味。然則此獨非學問之驗。而何也。蓋欲學程子者。非方領大袖所可能。而在乎持敬而已。公常謙虛推讓。如懷瑾瑜而深藏不市。較之懷石眩玉者。則其短長。奚啻雲泥哉。嗚呼。此其言行之在巾衍者。可壽傳而不可泯也。族人昌圭。早自發軔於公之門。而優遊國內士友間。工夫已發越。蒐輯公稿若干編。請余弁之。屢辭不獲。敢因平日耳目所及。而畧敍顚末。如右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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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亭居士。文公墓碣銘。【幷序】 嗚乎。孝親忠君。從師親仁。乃天理之所以然。而不可易者。人倫之所當然。而不容己者也。一日不講此道。則天地不位。萬物不育。而華夏。不足以爲華夏矣。自元淸來。華脈特在我東者。以其保有此綱常也。吾先世旁親。有號退亭公。其循蹈典禮。畜德廣業。雅素踐歷。無纖毫不實底。可以聳動今古者。彬彬然遺迹足徵。公諱存道。字聖哭。我南平之文。自武成公諱多省始。其後名碩相傳。至麗季。有三憂堂先生益漸。道學忠孝。冠冕一世。諡忠宣。是公十世祖也。高祖諱佑昌。通政。曾祖諱敏。生員。祖諱彦寬。宣傳。考諱雲龍。贈副護軍。妣益山蘇氏。婦德甚備。以萬曆壬寅九月十九日。生公于道開里第。生而天稟純美。才氣高邁。八歲護軍公。呼䪨試之。起而對曰。門外雪月白。潔潔見人心。二白唱我曲。今宵誰知音。其意趣。自幼已然。母夫人疾病月餘。公侍湯極誠。暫不離側。一日思喫桃。時早難求。後園桃一顆。適成實。取而供之。味輒爽病漸甦。護軍公夜夢。有老人謂言病愈。以其子孝感。自此可壽九十云。工夫夙就。文詞贍富。護軍公戒以時文。足以應擧而已。大抵吾儒之學。誠敬而守小學之法。格致而講大學之道。俛焉孳孳。自鄕人而可至於聖賢之道也。於是摯見隱峰安先生。時年二十。先生甚器重之。待之以友。丁卯虜警。李相梧里。視師完山公。素相善。卽馳謁爲陳機務。李相深納之。因贈詩曰。吾得一賢士。胡兵豈久留。壬申遭外艱。居廬哀毁盡禮。丙子虜大至。宗社危亡。迫在朝夕。公合義旅三十餘人。赴隱峰幕。丁丑正月到完山。中夜點軍。因感吟曰。一代男兒仗釰歌。四邊賊勢問如何。點軍此夕英豪士。乘勝明朝義氣多。又誓軍曰。士生此世。入則孝親。出則忠君。此五倫之大本。若違令。國家之罪人也。又致書于巡察李公時昉。爲陳銷戢之術。明日到礪山。聞講和。衆皆北向痛哭。公聞三從載道。扈駕南漢。觸寒激憤成疾。卽馳往見之。田內賜藥物。已見甦矣。時朝議。以淸國修幣事。相持不已。公不勝慷慨有詩。【佚】二月還第。族戚朋知皆會。公嘆曰。國家貽羞。到此極矣。改堂扁仁智曰。退亭。亭壁。書皇明乾坤。崇禎日月八字。聞淸陰自瀋陽還。嘆曰。文山殺死。此老生還。其大節。不可以生死異觀。此老卽今日文山。而余未得爲張一鶚可恨。洛舊將薦公。公牢辭曰。吾志已定。決不可回。但先人文學著世。未蒙一命。是何恨。遂聞其行誼于朝。贈秉節校尉副護軍。閔老峰適按本省。因訪曰。孝聞夙彰。白衣急國。眞南州高士也。題其堂曰元峯居士。且留詩曰。草草行裝薄暮尋。靑山雲樹故人心云云。乙未丁內艱。雖耆衰。哀疚致毁。皓首邱林。一以究經硏義爲事。惟論語尤深玩。且戒子曰。居敬而立本。窮理而明善。力行而踐實。此學問要法。汝其勉之。己酉十月七日考終。踰月而葬于加樂峙柯亭壬原。配竹山安氏。生一男時振。孫日華。曾孫。弘德就德命德潤德應德。玄孫以下不錄。嗚乎。公之所師。隱峯安文康公。所從遊。仙源金文忠公。淸陰金文正公。老峰閔文忠公。月沙李文忠公。梧里李文忠公諸先生。是皆宿德碩輔。公能優遊其間。當國家板蕩之會。而同周旋。卒乃卷而藏之。終老林樊。尤豈非磊磊落落者哉。誌狀等文。一辭稱公。以仙淸同歸。尤可徵而不可誣矣。公八代孫炯。以謹愼篤學名。亦可謂肖孫矣。類公遺迹。問銘於余。余敢忘匪分。欽其懿行壯蹟。而銘之。銘曰。天生公才德竝。養親而孝。憂國而忠。有警急而挺身勇往。聞媾成而潔身恬退。所交皆邦國賢哲。所行皆義理恰好。旣不愧而不怍。克有始而有終。後有徵乎斯銘。其必曰退亭公之德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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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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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박형득(朴炯得) 등 회갑시(回甲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南坡密城 朴炯得 等 2名 野山 [1933]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박형득(朴炯得) 등이 류중헌(柳重憲)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시(詩). 박형득(朴炯得)과 박경진(朴璟鎭)이 류중헌(柳重憲)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시(詩)이다. 문서의 제목은 '삼가 야산 수연운에 차운한다[謹次野山壽筵韻]라고 썼다. 회갑시의 주인공인 류중헌(1873~1952)은 자가 사집(士執)이고, 호가 야산(野山)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고흥군 호산(虎山)에 살았으며, 1933년 10월에 회갑(回甲)을 맞이하였다. 그의 회갑을 맞아 주변의 일가 친족, 지인 등이 회갑을 축하하는 회갑시(回甲詩)를 보내왔다. 그 중에서 이 문서는 고흥에 살았던 박형득과 사돈지간인 박경진이 써서 보낸 7언의 회갑시이다. 박형득(朴炯得, 1876~1947)은 호가 남파(南坡)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와룡마을에 살았다. 와룡마을 입구에는 하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하구정(何求亭)은 1918년 3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후학 양성을 위해 설립된 곳으로 호남의 문인들을 초빙하여 시화와 학문을 공유하던 곳이다. 1918년 3월 박형득이 주도하여 박재민, 박형순, 박형필, 박형관이 참여하여 하구정 건립 계원을 모집하고 찬조원, 기부원, 계외원, 재계, 동계, 족계의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건립되었다. 1932년에는 ?매천시집?을 간행하였다. 박경진(朴璟鎭, 1884~1956)은 자가 사일(士一)이고, 호가 남죽(南竹)이며, 본관은 진원(珍原) 이다. 아버지 박중언(朴重彦)과 어머니 고령신씨 사이에서 고흥군 산양에서 태어났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남죽유고? 3권2책이 있다. 野山 柳重憲과는 사돈지간으로 류중헌의 아들인 류대석이 그의 사위이며, 손자는 柳濟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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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19년 류일영(柳日榮)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 고문서-치부기록류-중수기 경제-토목/건축-중수기 崇禎四己卯三月日 高興 柳日榮 崇禎四己卯三月日 柳日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19년 3월에 류일영(柳日榮)이 쓴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 1819년(순조 19) 3월에 류일영(柳日榮)이 쓴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이다. 향교의 수선 이력과 함께 일을 주도한 현감에 대한 감사, 대역사를 마친 감회를 적고 있다. 문서 내용에 따르면 봄에 흥양의 명륜당 중수를 마치고 그날 유림들이 모여 낙성을 축하하며 이 글을 지었다고 하였다. 만력 정유년(1597)에 병화로 향교가 소실되어 5聖의 위패를 읍의 동촌(東村)에 이봉(移奉)하였고, 90여 년 뒤인 1701년에 고을 유생들의 건의로 성(城) 서쪽 옛 터에 중건하였으며, 1765년에 한 차례 수선하였다 한다. 지금 수선한 지가 오래되어 당(堂)이 훼손되었고 동ㆍ서재, 전사청 또한 모두 훼손되었다고 하였다. 1815년 현감 안광찬(安光贊)이 봉전(俸錢) 510緡의 중건 비용을 모아 정축년에 동재 및 전사청을 수리하고, 무인년(1818)에 이르러 지금 현감 신의학(愼宜學)이 시전(視篆)하여 서재를 수선하고 기묘년(1819) 봄에 명륜당의 대역사를 완성하였다며 현감 안광찬과 신의학의 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흥양현감으로 재임한 안광찬은 1812년부터 1815년까지 근무하였고, 신의학은 1817년부터 1819년까지 근무하였다. 고흥향교는 세종 23년(1441)에 처음 세워졌으나 초기 운영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숙종 26년(1700)에 재건한 것이다. 순조 17년(1817)에 양사재가 건립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대성전이 중수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5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전학후묘의 형식으로 앞쪽에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에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원문 明倫堂重修記 上之十九年春興陽之明倫堂成成祉日靑襟 齊會成賀其成乃欣欣然胥言曰方今 聖化丕闡賢宰文治堂忽成焉其成也蓋亦 有數存矣粵自設以來斯堂也巍焉煥乎絃 誦之洋洋文物之彬彬寔爲鄕人之瞻仰多士之依 歸 萬曆丁酉不幸爲南燹之毁而移奉我五 聖位版於邑之東村由是而建校於東殆九十餘 年在 崇禎再辛巳之歲因鄕儒籲于 朝而復 建于城西舊址卽今之校宮是己於是焉堂亦成矣 其後三乙酉又一修葺而今乙酉亦久矣堂之毁圮已 極而東西齋典祀廳亦皆同然則士林之咨嗟庸有已 乎歲乙亥本縣監安公光贊之苽歸也留俸錢五百 十緡以爲重建之資至丁丑柳侯民儉之莅政也從士 論修東齋曁典祀廳及戊寅今太守愼公宜學之 視篆也慨然興感曰凡治以首善爲政先斯文 大事不可緩也遂葺西齋推以至庫廚門闌 無不一新之因於己卯春乃爲明倫堂大役役不煩 民事皆就緖我賢侯慕聖之誠興學之志於 乎大哉譬之於樂則安公金聲之愼公玉振之 前後太守右文之功其可忘乎宜有以揭板記其 事余曰諸賢之意亦盛矣哉堂之成毁雖或有理 數行乎其中而如無我侯之實心做事則豈有今 日之斯堂耶噫鄕之校猶 國之學也學爲賢士 之所關校亦鄕士之所造也入是校登是堂而顧 名思義使我五倫之實秩然有序勑之惇之則豈 徒名其堂而已哉政所謂有其名有其實者而是日 鄕校之士亦皆爲異日 國學之需凡我諸君子盍 以是勉之至於幹事諸賢勞之勤固當列錄于 左玆不論贅云 崇禎四己卯三月日高興柳日榮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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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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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68년 고흥향교(高興鄕校)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戊申正月 日 高興鄕校 李鐘永 戊申正月 日 [1968] 高興鄕校 李鐘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8년 1월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이종영(李鐘永)에게 보낸 망기(望記). 1968년 1월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이종영(李鐘永)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망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종영을 오는 10월 석전제(釋奠祭)의 진설(陳設)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흥향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향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광복 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5년 홍살문을 세웠다. 이종영은 1945년 8월 27일 결성된 고흥 건국준비위원회에 속해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석전제는 석채(釋菜), 상정제(上丁祭),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이래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등 여러 성인에게 석전을 올렸으며, 한(漢)나라 이후 유교(儒敎)를 숭상하면서 동자를 제사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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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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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63년 광주포충사유회(光州褒忠祠儒會)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癸卯陰正月十五日 光州褒忠祠儒會 柳大錫 癸卯陰正月十五日 光州褒忠祠儒會 柳大錫 ▣…▣(3×3)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3년 1월 15일에 광주포충사유회(光州褒忠祠儒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 1963년 1월 15일에 광주포충사유회(光州褒忠祠儒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류대석을 춘향제(春享祭) 제관(祭官)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 종후(從厚,1554~1593) ·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 안영(安瑛,1564~1592)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왜란 후 호남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 내외삼문 ·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이때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忠孝堂) · 청사영당(晴沙影堂) · 전사청(典祀廳) · 고직사(庫直舍)등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文籍) 4종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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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류중철(柳重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二月十四日 族從 重哲 壬午二月十四日 柳重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2월 14일에 族從 柳重哲이 僉尊에게 족보 편찬 진행 상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간찰. 1942년 2월 14일에 族從 柳重哲이 僉尊에게 족보 편찬 진행 상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간찰이다. 이 편지에 수신자가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연결문서인 편지봉투 겉면에 '高興郡 虎東里 柳野山丈 靜座'라도 쓰여 있어 柳重憲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野山은 류중헌(1873~1952)의 자이다. 삼가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매우 감사하고, 僉尊의 體度가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그 사이 喪을 당해 孤露餘生이 되어 마음이 몹시 슬프다며 안부를 전하였다. 이어서 遺墟碑文의 일은 이미 많은 議論가 있었고, 지난 臘月에 醉汀(柳賢錫) 族丈께서 내려오셔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은 그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는 말을 전하였다. 설령 刻石面이 아니더라도 이미 正草를 허가하여 완성하였으니 어찌 판각[登梓]이 불가하겠느냐고 하면서 의견이 紛紜하여 발간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자식된 도리겠냐고 하였다. 또 두 사람의 이름을 넣는 것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이미 본래 草本 중에 있었으니 넣지 않는다면 도리어 一門에서 不睦의 발단이 될 것이므로 대략 끝에 넣는다면 피차 和好의 의리가 되니 어찌 해롭겠냐고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가 광주인쇄소에 간행을 정하고, 즉시 올라왔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 일은 모두 醉汀어른께서 하신 것이므로 누가 그치게 하고, 누가 그리하게 할 수 있겠냐면서 족보는 普和가 주이므로 어찌 불화의 단서가 되겠냐고 하면서 僉尊께 깊이 이해해주시고 支吾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편지를 통해서 1942년에 고흥류씨 족보 간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柳重哲은 자가 雲解이고, 본관은 고흥으로 아버지는 柳徽浚 이며 1911년에 태어났다. 배우자는 金寧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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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김영한(金甯漢)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壬月八日 金甯漢 辛巳壬月八日 金甯漢 柳重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에 高陽에 사는 金寗漢이 全南 高興에 사는 柳重燮에게 청탁받은 서문에 대해 써서 보낸 간찰. 1941년 壬月 8일에 高陽崇仁面樊里에 사는 金寗漢이 全南高興郡高興面虎山에 사는 柳重燮에게 청탁받은 서문에 관한 내용을 써서 보낸 간찰이다. 김영한은 류중섭이 보낸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답장을 썼다. 편지를 받고 섣달 추위에 건강하시다니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고질병인 현기증으로 인해 괴롭다고 하였다. 서문에서 주된 뜻은 오로지 2개 조항만을 살펴서 썼고, 被誣의 말은 삭제하였다고 하였으며 아직도 頭緖를 잡지 못하였으니 어쩌겠냐고 하였다. 이어서 천리 밖 멀리에서 글자를 써서 왕복하는 것은 모호(糢糊)한 것이 매우 많아 자신이 참으로 酬應하기가 어렵다면서 蔽一言하고 자신의 글이 용도에 맞지 않으니 다시 상의하여 높은 안목과 뛰어난 문장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는냐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였다. 편지 내용에서 김용한이 청탁받은 서문은 신암실기(信庵實記)에 수록 될 서문으로 짐작된다. ?신암실기?는 ?고려사?에 간신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흥류씨 선조인 류청신(柳淸臣, 1257~1329)의 행적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러 사료를 고증하여 후손 류일영(柳日榮, 1767~1837)이 편찬한 것이다. 1949년에 간행되었으며, 오진영과 김영한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고흥류씨가문 소장자료에 1941년에 김영한이 쓴 信庵實記序와 吳震泳의 信庵實記序가 남아있다. 김영한(金寗漢, 1878∼1950)은 자가 기오(箕五)이고, 호가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으로, 부친은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奭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빼어난 총명함을 타고났으며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94년(17세)에 식년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98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900년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에는 용인군수에, 이듬해에는 양근군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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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役曺公墓碣銘【幷序】 嗚乎。此綾州治南十里富春洞。陷井嶝面庚之原。卽故監役曺公諱常燁字大心號松塢之藏也。公生而容貌端雅。肥骨俊秀。性又沈潛。不隨群兒遊戱。及就學。篤信師敎。不設懈怠。不爲人勸獎而餙其工。不要人稱譽而伐其才。實心喫着。聰明發越。文理大達。先生長者。見輒奇愛之年纔十七。喟然發嘆曰。家貧親老。菽水屢空。凝然對卷。恬不顧養。實非古人設敎之本意。亦非人子供職之常情。於是乎躬調産業。家力稍舒。冬夏而可以備溫淸。入廚而可以供甘旨。親甚便之。幹務少間。不廢佔呻。嘗戒子姪曰。孟子謂人無恒産無恒心。今吾家勤儉守約。則可以免呼庚。惟懼汝輩。無恒誦無恒心也。曾不恝然。父老之請敎授村秀。整衣尊瞻。威儀有則。人有請益公車業者。公曰此足以應擧而已。何必多爲。余亦初年。枉費心力於此等課做。乃覺其非。捨而不治久矣云。及遭艱。戚而易。奉祭。謹而誠嚴肅以持身。慈愛以處家。自卑以接人。寡欲以存心。晩尤喜書。雖疾不肯釋卷。曰人之於經學。斃而後已云。公以憲廟乙巳生。圽于當宁戊戌正月九日。考諱楨鉉參奉。妣朗州崔氏鳳達女。擧二男。公其長也。上系世德。已悉於參奉公墓文。不須架疊。配利川徐氏。以婦德稱。有男三。長曰載愚。委禽于淳川朴氏某女。次載轍載驥。載愚生二男。龍鎭麒鎭。餘竝幼。余於公之嘗見訪。挹其表。聽其言。知其爲。恂恂君子矣。今觀其遺事。尤信然。畧加檃括。而敍而銘之。銘曰。天之賦人。豈有薄厚。繇其淸濁。始知智愚。聖人斯惻。設敎拯救。公匪愚矣。遜而自居。篤志力學。惟恐不就。間或作徹。急於供親。日用云爲。循蹈忠信。非法不道。非禮不踐。有封若堂。寔公之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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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攻乎異端。斯害也已。曾聞人之於異端。痛絶之可也。而若欲究異端之爲異端。則斯爲害也。而近間與人論此。其人曰。若如彼看。則大不合本文義。當看註說。攻。專治也。異端。非聖人之道。而別爲一端。蓋聖人之道。則兼四端而異端。則爲仁而至於無父。爲義而至於無君。若專治仁一端義一端。則爲害甚。前後兩說。誰是。 李海英 此蓋曰異端。決不可爲也。而若專治之以欲精之。則其爲害尤甚也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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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春洞契案序 甲辰春。僕自牟山陽。寄寓富春山中。其社名富春洞也。社中父老。衣冠寬偉。言行簡重。隱而不市。頗有天山逸民之操焉。其子弟。又皆俊彦士焉。而相講義理。農焉而克務稼穡。其俗尙忠厚謹勤。庶幾有三代之風焉。僕之至於斯也。觀感而欲學之者。蓋有年而尙不能矣。或曰是社也。谷呀而狹。土瘠而磽。所以生涯蕭散。華藻未備。此豈非欠闕處乎。僕曰不然。土瘠故其人勤儉。勤儉故其俗淳庬。若土沃而膩。用力少而得粟多。則其人易放逸。放逸則非口華其屋。腴其飮食。侈其衣服之爲。可懼荒服。妖怪奇玩之物。亦將踵至。若爾則雖欲守先王法服與典禮。可得乎。且以形勝論之。則天台金鰲。左右拱揖。前有楊子江。汪洋瀅濙。其北一麓。逶迤作勢。巖石參差。花木隱映。乃曺氏富春亭遺址也。沂流而上百許步。有子陵灘。其山高水長。尤令人有曠感處也。由江而西。有田疇數千。其經界溝塍。條理分明。而春耕秋斂。足以奉祭祀接賓客。由社而谷。又有寒泉。水甚淸冽。不以水旱爲盈縮。可以備濯纓。其下流。則又可以濯足。雖詩所謂碩人。考槃薖軸之地。想無以過此也。若其文詞。則雖未有拔萃而鳴於一世。然其安貧守道。篤於爲己。朝耕夜讀。如董召南之爲者。其行誼可尙。且聖賢遺言。無非餘力學文。存心養性之事。則此其近似。而亦豈非夫子所謂。里仁爲美者乎。矧又三綱。人倫之至也。社樹下。有一旌閭。巍然立者。乃族姪在善大夫人閔氏。以孝有綽楔之命。而竪建者也。社議將改修其案。曺友化心。李友達之。族姪載益。以父老之命來告。願得數行文。以弁其卷端。不佞。非但迂疎棄物。且不嫺文字。然請之不置。故終辭不獲。因序次與或人問答。以告社中父老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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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曰仁者。不是特地。散財買人歸己。【止】不私其有。人自歸之而身自尊。是仁者。務聚財。不管身危亡。是不仁者。而如有散財買人歸己者則喚作何等人也。 文炯 散財買人歸己者之於聚財。不管身危亡者。較其身存身亡。則雖不同而其爲不仁一也。或曰專務聚斂而利己者。害人必多。皆知其爲不仁。若散財買人歸己者。則雖非正道。亦必有濟人飢寒。同謂之不仁。亦不過論耶。曰見人飢寒。便發惻隱而救之。則誠是仁。然若一毫有買人歸己之心。則便其私意。私意行則天理亡矣。奚可與論於仁哉。蓋仁是本心之全德。惟廓然大公者。可以體之。凡所作爲。有所爲而爲之。則皆是不仁。故孔子曰巧言令色鮮矣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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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止】溫故。只是尊德性之屬。而章句曰謂故學之矣。復時習之矣。又曰涵泳乎其所已知。抑時習與涵泳。自是一般工夫耶。竊惟時習。是動時工夫。涵泳。是靜時工夫也。蓋以動靜言之。則尊德性靜也。道問學動也。靜而尊德性。動而道問學。則內外交養。工夫不亂矣。若尊德性。自兼動靜工夫。則所謂道問學者。無所用工矣。何不曰故學之矣。復涵泳之。而曰時習之也。 大抵此五句。承章首道體大小而言。故一句內。只是皆具大小二意。今不可以動靜分。屬上下截而偏看也。蓋上五截。言其大而渾淪處。存心之屬也。下五截。言其小而詳密處。致知之屬也。且上下截各上一字。言其固守窮至之事。是乃修德凝道之工也。然存心也。非獨是靜時爲然。動亦常存是心。此所以不可有頃刻之不存者也。致知也。亦不是動時必然。靜而先須理會。此不可以察識端倪。爲初下手者也。然則上下相資。表裏兼盡。無間於動靜。而道之大小。無所不體。故章末言居上居下。在治在亂。無所不宜。此豈可偏言動偏言靜。而有若體用云耶。且時習云者。亦非涵泳之義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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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류일영(柳日榮) 문안서(門案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辛巳春 案末日榮 辛巳春 柳日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1년 봄에 柳日榮이 작성한 門案의 序文. 1881년 봄에 柳日榮이 작성한 門案의 序文이다.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 집안은 이미 족보가 있지만 案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냐고 하면서 우리 21세조 戶長公(柳英)이 처음으로 高伊의 부곡에 살았다고 하였다. 고이는 지금의 고흥으로 호장공의 6세손 英密公府君(柳淸臣)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승이 되어 府院君에 봉해짐으로 部曲이 縣으로 승격되고 高伊를 高興으로 고치었다고 한다. 영밀공 이후에 高興柳氏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분파가 나뉘었다. 고흥은 先祖의 자취가 일어난 땅이고, 貫居之鄕으로 지금 우리 門長이 發議하여 聚族하니 옛사람들의 花樹會와 같다고 하면서 昭穆의 차례에 나이를 따져서 마침내 問安 1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류일영(柳日榮)은 자가 달부(達夫)이고 자호는 창명(滄溟)이다. 1767년에 태어나 1837년에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류경(柳坰)이고, 형제로는 형 必榮과 동생 思榮, 宗榮, 여동생이 있다. 배우자는 礪山宋氏이다. 信庵實記와 誠齋年譜를 편찬하였고, 문집으로 ?滄溟遺稿?가 있다.○원문 門案序 吾家旣有譜矣又何事於案于譜所以放先世記後承也案 所以敍時人述嘉會也譜雖作矣案烏得已乎噫我家之受 姓爲柳不知自何代始而其問世代之振不振又未可考矣前 乎高興以何鄕爲貫以何地爲居而自吾二十一世祖戶長公始 有傳焉蓋居高伊之部曲高伊卽令之興陽也戶長公之 六世孫英密公府君起於高伊大闡爲政丞封府院君以是之 故陞部曲爲縣改高伊爲高興英密公之後遂大昌爲高興柳 氏自是以來世有分派環東土數千里之內殆將遍焉而無非冠 儒衣儒之人則先世之積善種德蓋可驗矣高興卽先祖發 跡之地而又後人貫居之鄕則實異諸凡他人奠接之比也居是 之鄕者宜乎宗法之自別矣此案之所以作也嗚呼族雖有遠近 人雖有賢愚推溯以究則俱是一家之人豈可以今視今而不 顧其同根一源之義哉今吾門長發議聚族爲古人花樹之 會而序昭穆講年齒遂成門案一冊入是案者緬先世積 累之功思後承繼述之業罔或睽異罔或違越每以循循雅 飭自成家範則此非一門之幸他人之觀瞻哉凡我同案盍 各勉之勢辛巳春案末日榮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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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오진영(吳震泳) 신암실기서(信庵實記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辛巳閏六月首陽 吳震泳 辛巳閏六月首陽 吳震泳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윤6월에 오진영(吳震泳)이 신암일기(信庵實記)에 쓴 서(序). 1941년 윤6월에 오진영(吳震泳)이 신암일기(信庵實記)에 쓴 서(序)이다. 서문을 쓰게 된 이유는 고흥 유생 류중헌(柳重憲)씨가 와서 신암실기(信庵實記)를 보여주며 신암(信庵)은 고려조 대신(大臣) 류청신(柳淸臣)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을 대대로 섬겼으며, 그가 죽은 후 원 황제의 명으로 李師僧을 불러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한림학사 조맹부(趙孟䫍)가 찬하였으며 뒤에 또 영밀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 조선 태조 때에는 용흥(龍興)에 중신을 보내 그의 묘를 치제하고 영의정을 증직(贈職)받았는데 오직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 본전에만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이에 비로소 실기(實記)를 엮었으나 아직 책으로 간행하지 못하여 서문을 얻고자 하니 마침내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류청신이 고려조에 시호를 받고, 조선 태조 때 그의 묘에 중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사실을 기록하고,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이 그에 대해 명망이 있었으며 사직에 공이 있었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모함되었음이 명백하니 고려사에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서술하였다. ?신암실기?는 고려 때 재상을 지냈던 류청신(柳淸臣, 1257~1329)의 행적이 《고려사》 기록에 간신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보고 후손 류일영(柳日榮)이 변고(辨誣)하기 위해서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류청신이 간신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여러 사료를 고증하여 충실한 반론을 펴고 있다. 오진영(1868~1944)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가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인으로, 스승의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했다. 10세에 사서육경을 통달하고, 20세 이전에 여러 책을 두루 익혀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사학(史學)에 정통하여 역사의 대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관직에는 뜻이 없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며 교육에 잠심(潛心)하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석농집(石農集)』이 있으며, 『대동사감(大東史鑑)』을 감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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