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942년 오진영(吳震泳) 죽와류공묘갈명병서(竹窩柳公墓碣銘幷序)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壬午歲端陽節 首陽吳震泳 壬午歲端陽節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오진영(吳震泳)이 류영시(竹窩 柳永蒔)의 일생을 정리하여 적은 묘갈명(墓碣銘) 1942년 端陽節 首陽에 오진영(吳震泳)이 류영시(柳永蒔)의 일생을 정리하여 적은 묘갈명(墓碣銘)이다. 묘갈명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오년(1918) 6월 28일에 柳永蒔의 자는 자여(子汝), 호는 죽와(竹窩)로 향연 86세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뒤 35년 뒤인 임오년(1942)에 손자 柳重憲이 문서를 들고 千里의 나를 찾아와 마침내 묘도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선조인 류청신, 류탁의 공훈과 명절이 크게 드러난다고 언급하면서, 이후 濕, 東起, 日榮, 志浩 등 선조의 내력을 서술하였다. 류영시는 순조 계사년(1833) 11월 2일에 태어나 타고난 기품은 淳厚하고, 일찍이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으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예학에 깊었다고 하였다. 배필은 靈光丁氏로 婦德이 있었으며 임진년(1832)에 태어나 갑인년(1914) 6월 29일 향년 83세로 돌아가셨으며 묘는 합장하였다. 敬浚 외 2녀를 두었으며, 손자는 重憲 등 1남 2녀이며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가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0세에 사서육경을 통달하고, 20세 이전에 여러 책을 두루 익혀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사학(史學)에 정통하여 역사의 대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관직에는 뜻이 없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며 교육에 잠심(潛心)하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석농집(石農集)』이 있으며, 『대동사감(大東史鑑)』을 감수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朴公行狀。 朴氏之貫密陽者。世居竹樹。忠孝承襲。詞翰菀興。可謂泉芝有源根。而子姓蘩衍。皆梧竹鸞鵠。世或履盛。久則漸至墮壞。而惟此一門上下。益修孝友忠信。蓋想其福祿未艾而儘。今日罕見之古風也。今文采。亦以年少修飭。聞一日抱其曾大父行錄。請余以狀其德。余以匪人。屢辭不獲。謹按公諱豐煥。字道允。號隱。新羅王子密城大君後也。入我朝。有監察蔚始譜。有諱枝樹。壬燹立慬。贈左承旨。兼旌閭。有主簿諱天柱。以孝蒙旌。曾祖諱尙郁。號松溪通訓。祖諱必思。號道隱。贈司僕寺正。考諱慶杓。贈左承旨。妣坡平尹氏仁源女。以純祖辛酉生公。公自幼天性和平。動止淳質。事父母而極其愛敬。處兄弟而盡其友恭。家素淸貧。躬執漁樵以就養。凡便身之物。適口之味。隨力所至。未嘗不備。兄弟四人。同垣籬。合門扉以居。雖一錢財一尺布。必分以各適其用。一盃酒一斗米。必分以各盡其均。至於宗族隣里。各以其道而無所罅漏。及遭艱。哭擗幾至傷生。居廬行素制闋。而及歲時薦。忌祭祀。澹然肅然。靡有違禮。敎子姪。則自能言時。每以六甲九數。手提口命。稍長則以身心性情之正。彛倫日用之常。諄諄然命之。而尤詳於事親奉祭之際焉。嘗戒子曰。遺三斗土。不如三年敎經。此與古人籝金之論。異世同歸。而尤有切於稱家就實之意也。夙嬰疾久沈痼。一日謂二子。曰昨夢。與族姪在璟。及金進士再鐸作邑行。在璟還。余與金進士不還。此必魂游之兆。汝曹當以修身勤行。爲究竟法。而勿墜世業也。果以明日不起。卽丙午閏五月五日也。金進士亦繼逝。以其倂世友善而觀化。亦同異哉。以七月二日。葬于綾西茅山新榜山左麓壬原。從其先兆也。後以在源壽秩。贈今官。夫人洪氏壽益女。從封焉。夫人貞靜有閫範。公病十五年。極誠調護。未嘗一日少懈。後公二十六年辛未四月五日而終。葬于淨川村後德金峴亥原。有二男。長在源。壽陞同知。次在寅。有孝行。長房二男三女。男世鎭監察。女適鄭在春。閔元植。高光茂。側出男奇鎭。次房二男一女。男誠鎭商鎭。女適金喜澤。曾玄以下不盡錄。嗚呼。迹公平日言語事爲。可知其爲善人君子矣。事親而不憚疲勞。以盡志體之養。友兄弟而不私貨利。以均米布之分。喪致毁祭致誠。而敎子姪。則自幼及長。循循有序。使自得之。至有遺土不如敎經之語。較世之商商營營者。奚翅天淵哉。但家世淸儉。幹蠱濟務。無有餘力。未克專精劬書。然其發之家庭衽席之間。上下親疎之際者。靡不曲盡其儀則節文。非質美而然者耶。若使從師取友。硏經究義。開心明目。而知行竝進。則豈止於斯也耶。畧書其事如右。以俟秉筆者採擇焉。謹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與朴月江朴素山安玄菴諸丈約馬訖山詩會。有雨戱。遂爲之詠。 明日高遊共卜淸。夜樓疎雨使人驚。無端雲影中天濕。倏爾簷鈴近砌鳴。山鳥應嫌來俗客。江山還惜借春情。願將箕伯噓風氣。快掃輕嵐遠邇城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4 卷之四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944년 고흥향교(高興鄕校)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甲申陽九月 日 幼學 柳重憲 甲申陽九月 日 高興鄕校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4년 9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중헌(柳重憲)에게 보낸 망기(望記). 1944년 9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중헌(柳重憲)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유학(幼學) 류중헌을 다음 달 15일에 시행하는 석전제(釋奠祭) 아헌관(亞獻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흥향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향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광복 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5년 홍살문을 세웠다. 류중헌은 1873년(고종 10) 10월 5일에 태어났으며 1952년 9월 9일에 졸하였다. 자(字)는 사범(士範)이고 호(號)는 야산(野山)이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묘는 호산(虎山) 호서(虎西) 불암동(佛岩洞)에 있다. 부인은 송위희(宋胃僖)의 딸 남양송씨(南陽宋氏)이다. 1872년(고종 9)에 태어났으며 1947년 1월 13일에 졸하였다. 석전제는 석채(釋菜), 상정제(上丁祭),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이래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등 여러 성인에게 석전을 올렸으며, 한(漢)나라 이후 유교(儒敎)를 숭상하면서 동자를 제사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 아헌관은 국가의 제례에서 아헌(亞獻), 곧 두 번째로 잔을 올리는 일을 맡은 제관(祭官)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납증서(納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미상시기에 작성된 납입증서 읍내 호동에 거주하는 남자 종(奴) 춘금(春金), 춘매(春每), 수원(水元)이 류씨 가문에 납부한 내역을 적고 있다. 춘금은 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정안무(鄭安武) 납증서(納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七廿五日 鄭安武 奴 春金 七廿五日 鄭安武 奴 春金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안무(鄭安武)가 남자 종(奴) 춘금(春今)에게 발급한 납증서(納證書) 신(辛)년 7월 25일에 서내(西內)에 거주하는 정안무(鄭安武)가 읍내 호동(虎東)에 거주하는 남자 종(奴) 춘금(春金)에게 발급한 1결 값 23냥을 받고 발급한 납증서이다. 현재 읍내 호동은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이며 서내는 고흥군 고흥읍 호서리를 뜻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신축년 정인택(鄭仁澤) 간찰(簡札)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丑三月初十日 査弟 鄭仁澤 辛丑三月初十日 鄭仁澤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축년 3월에 査弟 鄭仁澤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신축년 3월 10일에 査弟 鄭仁澤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家兒가 집으로 돌아와서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어 잘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된다고 하고, 자신은 어제 집으로 돌아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했다. 新婦의 아름다운 몸가짐이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여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禮物이 좋은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며 미안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발신인이 이름 앞에 자신을 査弟라고 쓴 것과 편지의 내용을 봤을 때 사돈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9년 류제필(柳濟弼)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高敞郡面星斗里 柳濟弼 高興郡高興面虎東里 柳沚根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柳濟弼 柳沚根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3월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하여 보낸 간찰 1939년 3월 30일에 고창군 星斗里에 사는 柳濟弼이 高興郡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한 상대방의 행동을 꾸짖는 내용의 간찰이다. 편지는 국한문혼용문으로 쓰여 있고, 서두에 '答告書'라고 적고 편지를 시작하였으며, 편지 말미 발신자 柳濟弼이라 쓰고 그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편지의 내용은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고흥류씨 재실인 萬宗齋 일을 하면서 일어난 불미스런 일과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다. 먼저 귀 종중에서 數十年간 萬宗齋의 일을 사사로이 남용하던 중 位土 7頭를 은폐한 사실로 各宗이 상응하야 소화13년(1938) 舊8월 25일에 고흥군 過驛面 道川里 萬宗齋에서 大宗會를 개최하고, 그동안 귀 종중에서 가지고 있던 收支帳簿를 열람한 후 不微한 일이므로 門規을 고치기로 하고, 會議循序 5項 중 임원 선거에 있어서 高興郡內에 三派가 거주하니 門有司는 三派에 1員씩 3員을 뽑기로 하고, 都有司는 다른 군에 循回하기로 하였으며, 詳議員은 각 군에 1員씩 選定하기로 하고, 장부는 新舊有司가 서로 인수인계하고 부족한 것은 오는 10월 15일 享祀時에 會計하기로 하고, 諸般事는 新有司가 담당하여 처리하기로 하고 폐회하였다는 상황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宗人들을 무시하고 소작료를 集去하여 이 같은 혼란을 만들었냐고 꾸짖고 있다. 자신은 대종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따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화해를 하도록 한 뒤에 양쪽의 平和를 주장하며 신신당부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이같이 詰讕하는 것은 양쪽이 화해치 못한 탓이니 이들 이야기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서 만종재 문서를 만종재 함에다 보관하지 않고 어디로 가지고 갔느냐고 묻고, 貴派가 宗派와 서로 대립하면 이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季之季派로 이같이 행동하는 것은 무슨 자격이며, 대표자면 지금 虎山의 대표자지 大門中의 대표자는 아니라고 하면서 문중재산을 남용하는 등 자칭 대표자라고 하는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조상을 존숭하는 행동이 아니며 族誼가 아니라면서 호되게 꾸짖고, 추신으로 어느 때든지 재실의 논을 사서 代納하여야 無事할 것이라고 적었다. 만종재(萬宗齋)는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에 소재하는 고흥류씨 재실이다. 柳濟弼은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호일(浩一), 호는 성곡(星谷)으로 1880년(고종 17) 3월 14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성두리 상성마을에서 류명석(柳明錫)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1922년 고창향교에 친일 교육 도장이 들어서자 앞장서서 반대하였고, 일제가 성균관에 있던 계성사(啓聖祠)와 동서무(東西廡)를 훼철하려 하자 전국 유림 대표로 나아가 이를 철회시켰다. 이후 성균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유림 대표로 국장에 참여했다가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0년과 1941년 고창 산소동의 학산재(學山齋) 도유사(都有司)로 학산재의 재실을 중건했고, 벽산사(碧山祠) 도유사도 역임하였다. 1943년 친일에 앞장선 면서기와 공출 반대 문제로 맞섰다가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고창향교 뒷산인 성산에 묻혀 있던 일본군 시신 12구를 파내어 성역을 정화하였다. 1947년 1월 고창향교의 초대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에 재임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39년 현감(縣監) 남궁(南宮) 존문단자(存問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단자 정치/행정-보고-보고서 己亥七月三日 行縣監南宮 己亥七月三日 縣監 南宮 ▣…▣ 1顆(7.0×7.0)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39년 7월에 縣監 南宮鉐이 柳志浩에게 발급한 存問單子. 1839년 7월 13일에 縣監 南宮鉐이 柳志浩에게 발급한 存問單子이다. 존문이란,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자는 존문시에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흥양현감은 南宮鉐(1801~?)으로 1839년부터 1841년까지 근무하였다. 류지호는 자가 通吾이고, 호가 農隱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1793년에 태어나 1856년에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柳日榮이며 어머니 여산 송씨이다. 흥양현 읍내면 虎山東邊里에 살았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류중룡(柳重龍)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柳重龍 柳重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高興面 虎東에 사는 柳重龍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 高興面 虎東에 사는 柳重龍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이 백일장의 詩題는 馬上別虞美人이며, 科目은 大古風이다. 대고풍은 韻을 달지 않고 짓는 한국 특유의 한시체(漢詩體)이다. 시제는 중국 초나라 장수 項羽와 虞姬의 이별가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작성자의 이름밖에 알 수 없기때문에 언제 작성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 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滄厓堂遺墟碑銘【竝序】 宗人武烈甫。抱滄厓堂序。若䪨帖而來諗曰。堂是吾曾大父諱載馨。爲講學牖蒙而設也。方其始也。掄材僝功之勞。儲書裒圖之博。可謂勤且摯矣。乃今歲月寖久。爲風雨霜雪之所剝傷。鼠牙雀角之所侵凌。而免不得墟而荒茀矣。復欲建立。則海氛日迫。林誦頓絶。士友之力。無復可恃。而殘孫弱裔。獨難擔負。每過舊址。徊徨屢周而已。因潸然出涕。余亦愀然良久。曰蓋凡一氣震蕩。海宇變動。則山川猶不免湮。矧臺亭室堂之寄在流峙間。等一浮菌者乎。凡塗墍茨瓦。有不頻加修葺。而能不傾壞者乎。雖然棟宇之成。氣也物也。詩書之敎。理也心也。氣有時而變易。物有時而興廢。勢固然矣。若夫心理。則不以古今爲成壞。不以治亂爲存亡。人能操而存之。循而行之。則庶事就緖。百廢俱興。而固然之理。自有所不能已矣。然則理之所在。氣亦運行。今君能以祖先之心爲心。則亦何患乎堂宇之不復起也。若其堂址之久荒廢。爲心大戚。則姑卽築壇立碑。以限樵牧。可也否武。烈復起而請曰。願得一言而銘之。辭不獲已。乃爲之銘曰。塾規維何。聖賢遺敎。學徒斯何。衣冠進趨。海桑一變。人歸堂圮。孫曾克肖。立石敬慕。我其銘之。以警來裔。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安貧堂金公墓碣銘【幷序】 有一章甫見訪。叩之。乃世誼家少年。名性奎者也。纔敍舊。輒進一呇文帖是其大父所輯。其五代祖考遺事也。因懇墓道文。余雖匪分。講世感舊。不敢牢辭。謹按。公諱鳴玉。字鳴老。自號安貧堂。晉州之金。蓋自敬順王第七子。晉城府院君錘。始分貫也。麗朝有晉陽君諱茂珍。入我朝。有判三司諱履安。與良敬公趙捐。文貞公孟思誠。爲道義交。有諱曰欽曰敬恒。曰信守。曰億年。曰湊。官則參議監察。參奉。習讀。參奉也。高祖諱忠介。進士。陞寢郞。曾祖諱弘獻。號燧岑。祖諱鐵完。察訪。號台山。自錦城始寓竹樹。丙燹擧義。聞講和。幾至氣絶。考諱振球。號道隱。受業於徐梅壑。從遊乎朴西溪。硏經講禮。妣天安全氏。嘉善。致讓女。以顯廟癸丑九月二十三日。生公于道莊里第。骨格峻宏。才質純美。纔十五。通涉經傳。潛究文義。與弟聲玉。友恭各盡。工業相勖。或竝遊士林間。難疑答問。至若心性理氣。尤致精焉。侍親而坐。雖祈寒大暑。束帶終日。不設惰容。閭里行步。則必整衣冠。遭外艱。哀毁逾制。幾至傷孝。初終祥禫。一依家禮節文。及遭內艱。亦如前喪。每値諱辰。灑掃正寢。七戒三齊。克敬克誠。接賓也。致恭而盡禮。交友也。忠告而善道。所以從迎。皆端疋君子。事爲。皆義理當行。與同鄕六化梁公。日相談文究義。許以知己。堂揭安貧。而書之曰。亞聖顔子。樂道安仁。一簞之食。一瓢之飮。庶乎屢空。不改其。樂況爲下等人。而顔氏之賢。雖不可及。豈以貧賤移其心哉云。云其所著心經箚記。及遺藁。歲久散逸。惜乎不傳。以英廟庚戌正月十五日圽。葬于鳥峙先兆南麓坤原。配利川徐氏卿五女。貞淑柔和。閨範甚備。擧一男二女。男始澤。女南平文爾鵬。光山金運熙。孫應三。娶和順崔氏。無育。以再從應萬第二子仁鐸爲后。娶驪興閔氏挺驪女。三男漢成漢希漢九。漢成娶光山李氏。二男。弼相五相。漢希娶文化柳氏。一男殷相。漢九娶公州李氏。三男一女。男澈相禹相斗相。女延日鄭承基。澈相娶珍原朴氏。一男榮俊。弼相二男。榮順榮珠。禹相。三男二女。男榮泰榮昇榮桭。女公州李秉春。水原白好寅。斗相。二男。榮乾榮巽。銘曰。公德維何。居家孝悌。推而及人。禮讓純備。公行維何。判分義利。安貧巷居。琴瑟自娛。庶幾千載。激懦律頑。穹然彼邱。公藏之阡。我篆銘詩。以諗後人。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校宮通喩文 嗚呼。我國雖僻處東隅。保有小中華之美名。蓋由於講吾夫子之道。尊吾夫子之廟。而立紀綱正風俗而致然也。是以。六經語孟庸學之書。五敎仁義禮智之術。粲然而明。蔚然而興。道學忠孝。文章節烈之巍德至行。可以詔後世。爲民表者。輩出幷作。便有充小華之名。上自公卿大夫。下至婦孺輿臺。莫不知聖人之道。至貴至重。而異端不能惑。邪說不能行。於是乎春秋釋菜列聖朝。致禮去愈勤。諸先正配侑。繼以迭興。衣冠秩秩。節文彬彬。家而戶而絃誦不絶。屹然若砥柱於天下萬國。滔天頹波之中者。蓋五六百年于玆矣。世級益降。滄桑一變。學宮蕭條。聖廟冷淡。粢盛犧牲之具。籩豆簠簋之設。紊焉泯焉。章甫之依歸安在。郡國之羞恥愈深。玆敢通喩。願僉君子。定以今月念日。齊會于校堂。爛議詳畫。同心協力。重事體正條約。而復謹釋菜之儀。則雖窮陰之方沍。庶華脈之不墜。勿以在家不知。而恬視之地。千萬幸甚。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通諭校宮文 右通諭事。天地之所以爲天地。元亨利貞而已。人之所以爲人。仁義禮智信而已。此五常之敷施發用。特在明倫而已。卽轉聞。李賊完用。曾已販國。終又弑君。人倫之大變。天理之所不容。今雖跛躄垂死之日。不勝骨戰膽栗。昔陳恒弑簡公。吾夫子。沐浴而告哀公請討。其意蓋曰。弑逆大惡。天下所不容。人人得而誅之。況在鄰國而不討乎。據此則隣國固然。天下亦然。人人亦然。今吾遺民列聖朝。五百年培養之物。太上皇四十載。覆育之軀。豈可曰在家不知。而晏然貼席。不之討不之誅乎。此而不正。則天地不足爲天地。人不足爲人。小華不足爲小華。伏願僉君子。毋以人微而棄之。一乃心力。卽爲布諭列郡。亟行討之誅之。使彼賊不暇晷刻。容息於覆載之間。扶植春秋大綱紀之地。千萬幸甚。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綾州鄕校通諭文 竊以某等。跧伏草茅。淟涊朽腐。只合與世長辭。尙何言談之。動煩聽聞耶。然事係不得已。則有不得已而言者。幸垂察焉。昔鄭有毁鄕校之說。而子産不聽。此其鄕校不可毁廢之明驗也。朱子築精舍。率諸生行釋菜此其聖廟隨處當設之的據也。況吾朝鮮。箕封古疆。大明東土。所誦孔孟程朱之書而已。所尙仁義禮智之道而已。尊聖人如天。親聖人如父。何也。天不能言。而聖人言之以天理。父旣生之。而聖人敎之以人倫。順天理明人倫。則人可以爲人。背天理棄人倫。則人不可以爲人矣。故尊吾夫子之道而講之明之。建吾夫子之廟。而仰之瞻之。朝暮焉持志彌篤。春秋焉享祀克謹。是皆出於天之所賦。而非人所能自己者也。比聞有鄕校毁廢之說。神離氣塞。罔知攸出。蓋吾夫子之道。一太極也。天地也。日月也。閱幾萬年。而天地人物。消盡之後。無可依據處。則吾不敢知。而若天地人物。未消盡之前。則雖家祭而戶享之。尙不足以盡其崇慕之意。況以郡邑之移。而有此毁廢之可施乎。天下事。誠非腐儒所可管攝。然至若聖廟一事。決不可以死生異視。故齊會校堂。圖存聖廟議。各出力以奉俎豆。是乃不死之人心。亦未泯之天理也。玆依朱子滄洲古禮。條約已成。伏惟照納。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기노사선생계자문(奇蘆沙先生戒子文)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계자문(戒子文)을 필사한 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계자문(戒子文)을 필사한 글이다. 문서 첫머리에 제목을 '奇蘆沙先生戒子文'이라고 썼다. 내용을 살펴보면 벌과 개미도 군신간의 의리를 알고, 징경이도 암수의 분별이 있고, 기러기의 대열에도 차례가 있다고 비유하며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또 귤과 유자도 회수를 넘어가면 탱자로 변하고, 삼밭에 나는 쑥이라면 돕지 않아도 저절로 꼿꼿하며 소나무 사이의 칡도 곧게 천 길을 우뚝 솟는다면서 사람이 주위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좋은 환경에 있거나 좋은 벗과 사귀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범과 수달도 조상에게 제사할 줄 알고, 소도 밭갈 줄 알고, 말도 달릴 줄 알며, 닭으로써 새벽을 맡게 하고 개로써 밤을 지키게 하니 사람으로써의 도리와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문서 말미에 '청나라 하소기(河紹基,1799~1873)의 서법을 본뜨다[倣河紹基書法]'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작성 시기 및 작성자에 대한 기록이 없기때문에 누가, 언제 서술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자는 大中, 호는 蘆沙, 본관은 幸州, 시호는 文簡이다. 奇在祐와 안동권씨 權德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년에는 담대헌을 경영하였다.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다. 蔚山 金宜休의 딸과 결혼했다.○원문 奇蘆沙先生戒子文 盖虎雖至惡父負其子子必效焉烏雖至微母哺其子 子必反焉世之爲人子者豈不受乎蜂之渺焉猶能知 事長之義蟻之蠢焉尙不昧衛上之義世之爲人臣者豈不 愼乎睢鳩知而有別人之於夫婦獨不如是乎鴻雁行而有 序人之於兄弟亦不如彼乎在周園之菫荼如飴渡准海 之橘柚爲枳所居不可不擇麻中之蓬不扶而自直松間 之葛直聳千尋所從不可不審豺㺚尙知祭可以不知 祭禮乎牛知耕馬知馳而得蒭牧之養鷄司晨犬守夜而 安塒榤之居焉可以人不盡其職乎狒狒善笑而亡一笑豈 不受弧猩猩耆酒而斃一飮豈不愼乎驥騏雖善走驕而 不行則一步不得進矣蠖蟲雖質鈍行而不已則千里終可 到矣 倣河紹基書法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935년 박중면(朴重勉)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종교/풍속-관혼상제-제문 乙亥九月丁未朔十三日 世弟 珍原朴重勉 乙亥九月丁未朔十三日 朴重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에 박중면(朴重勉)이 松峴處士 柳公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 을해년(1935) 9월 13일에 세제(世弟) 박중면(朴重勉)이 松峴處士 柳公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祭文)이다. 제문의 주인공인 송현처사 류공은 柳敬浚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류경준은 1855년에 태어나서 1935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高興, 자는 乃欽, 부인은 礪山宋氏이며, 큰 아들은 柳重憲이다. 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옛말에 德은 神明에 통할만 하고 仁은 兩儀에 부합한다고 하였으니 하늘의 부름으로 인해 죽은 이가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죽은 이의 가문을 칭송하며 그의 가문은 세상에 덕으로 인망이 두터웠고, 智로써 修身에 府하고, 仁으로써 사랑을 베푸는 근본으로 삼고, 義로써 取興에 戶하고, 勇으로써 恥辱에 決하고, 行으로써 立命의 초석으로 하였다면서 공이 그 집안에서 태어나 옷 속에 옥을 품고 손에 옥 지녔어도 스스로 자기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고 깊이 은둔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에서 대개 懽心과 仁함과 효성스런 사람임은 알지 못해도 오직 하늘이 알아 강녕(康寧)의 성수(聖壽)를 내림으로써 宗族이 尊慕하고, 士林이 본받고 존경하였다고 썼다. 이에 하늘의 부름이 있어서 이에 미루어 하늘의 명에 응한 것이라고 하며 슬퍼했다. 박중면(朴重勉, 1869∼1950)은 일제강점기 문인으로 자는 경여(敬汝), 호는 야은(野隱)이다. 본관은 진원(珍原)이며, 출신지는 전라남도 고흥(高興)이다. 증조부는 박찬성(朴燦珹), 조부는 만회(晩悔) 박예빈(朴禮彬), 부친은 원재(遠齋) 박철현(朴喆炫)이다. 외조부는 여산송씨(礪山宋氏) 송현호(宋現浩)이며, 처부는 여산송씨(礪山宋氏) 송진회(宋鎭會)이다. 어려서부터 과거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을 닦는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족형 학계(鶴溪) 박중언(朴重彦)에게서 사사(師事)하였다. 1905년(광무 9) 경술국치 후 나라가 기울어짐을 한탄하며 두문불출하였다. 향년 82세에 사망하였다. 저술로 시문집 『야은유고(野隱遺稿)』가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902년 류영시(柳永蒔) 관고(官誥) 고문서-교령류-관고 정치/행정-임면-관고 光武六年九月二十五日 光武六年九月二十五日 高宗 柳永蒔 勅命之寶 1顆(11.1×11.1)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2년 高宗이 柳永蒔에게 정3품 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린 官誥 1902년(광무 6) 9월 25일에 高宗이 柳永蒔에게 정3품 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린 官誥이다. 품계를 내린 이유는 당시 고종이 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경축한다는 뜻에서 80세가 된 류영시에게 加資의 은전을 베풀어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린 것이다. 류영시(柳永蒔, 1833~1918)는 본관이 고흥이고, 자가 자여(子汝)이며 호가 죽와(竹窩)로 고흥 출생이다. 아버지는 柳志浩(1793~1856)이고, 어머니는 여산 송씨이다. 관고는 대한제국시기 임명문서 중 하나로 문서의 첫머리에는 황제의 명령임을 나타내는 '勅命'을 명시하고, 본문에는 수취자와 임명하는 품계 및 관직을 적는다. 발급연도는 年・月・日을 사용하여 본문 왼편에 기재하며, 年號와 年사이에 勅命之寶를 찍는다. 기로소는 耆老司, 耆老局, 耆社, 耆所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태조가 60세가 된 해에 기로소를 만들고 들어간 이후부터 시행되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입소 대상자가 왕일 경우 60세가 되면 들어갔고, 문관은 정2품 이상의 實職을 지내고 있으며 70세 이상일 경우 기로소에 들었다. 기로소를 설립하고 운영한 의미는 왕이 노인을 우대하는 모범을 보여, 백성들이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도록 교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기로소에 든 왕은 태조 이후에 숙종과 영조, 고종이 있다. 한편 기로소는 1909년 3월에 혁파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955년 고흥향교(高興鄕校)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乙未七月 日 高興鄕校 幼學 柳大錫 乙未七月 日 高興鄕校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 7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 1955년 7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류대석을 장의(掌議)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흥향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향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광복 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5년 홍살문을 세웠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장의는 조선시대 성균관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임원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각 1인씩 있었는데, 선출방법은 현임의 장의가 후임장의를 천거하도록 하되 전임장의들의 완전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